렛 미 인
- 감독
- 매튜 리브스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클로 모레츠, 코디 스밋-맥피, 리차드 젠킨스, 엘리아스 코테스, 사샤 바레즈, 카라 부오노
언젠가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만약 성경의 표현이 모두 은유라면? 마구간과 구유, 동방박사가 곧이곧대로 마구간과 구유, 동방박사가 아니라 일종의 상형문자라면, 복음서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 벽 뒤에 감춰진 방이 열리는 듯했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팔로우 >도 내게 비슷한 매혹이었다. 이 영화는 10대 슬래셔를 비롯한 몇몇 호러 장르의 관습을 메타포로 받아들임으로써, 여태 정면에서만 보아온 장르적 설정과 도상의 뒷면을 드러내고 더 보편적인 명제로 주제를 확장한다. 참신한 것은 주제보다 영화로 거기까지 도달하는 경로다. 그러나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장르의 관습을 비틀어 장르 자체를 갱신하는 작업에는 무관심하다. 그는 가난한 집의 꾀 많은 아이처럼 장르의 레고 블록들을 고스란히 빌려 와 자신이 원하는 딴판의 구조물을 조립한다. 20대에 접어들 무렵 시간의 풍경과 정서에 대한 숨 막히는 정밀 묘사. 그것이 <팔로우>의 실체다. 보지 못한 감독의 첫 장편 <아메리칸 슬립오버 The Myth of the American Sleepover>의 줄거리를 IMDb에서 찾아보았다. ‘네 명의 젊은이가 여름의 마지막 주말, 사랑과 모험을 찾아 디트로이트 교외를 돌아다닌다.’ 악령이라는 변수만 더하면 <팔로우>의 시놉시스와 바꿔치기해도 상관없을 성 싶다. 디트로이트에 사는 제이(마이카 먼로)는 남자친구 휴와 처음 섹스를 나눈 직후 클로로포름에 마취돼 의식을 잃는다. 휠체어에 묶여 깨어난 제이에게, 휴는 섹스를 통해 옮겨가는 악령을 방금 너에게 넘겨줬으니 너도 어서 다른 희생자를 찾으라고 통보하고 앞으로 제이를 따라올 ‘그것’(원제의 ‘it’)의 실체를 곧장 보여준다. 예고편에서 부각된 이 신은 < 쏘우 > 류의 고문 호러를 암시했지만, 실제 극중 맥락은 딴판이다. 휴가 구태여 제이에게 ‘생존 매뉴얼’을 설명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도록 결박해 악령의 존재를 입증하는 까닭은 이 저주에 수반된 특수한 규칙 탓이다. 새로운 표적이 악령에게 살해될 경우 저주는 사슬을 한 칸 역행해 돌아온다. 다음 주자가 요령껏 살아남아야 나도 무사하기에 저주를 넘겨주는 쪽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섹스 상대와 감정적인 유대가 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진다. 이 항목에 이르러 < 팔로우 >의 10대들은 괴물에게 쫓기는 예쁜 사냥감을 넘어 결단의 주체가 된다. 호러의 재미를 이루는 3대 원소는 대략, 저주가 작동하는 룰과 몬스터/악당의 개성, 반격의 전략일 텐데 <팔로우>는 총명하고 의미심장한 규칙을 고안해 승점 절반 이상을 확보한다. <팔로우>의 ‘그것’은 때로는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때로는 낯선 이의 형상으로 나를 향해 똑바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하지만 좀비처럼 표 나는 행색도 아니라 군중 틈에서 식별하기 어렵고 저주를 넘겨주고 받은 당사자 이외의 사람들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 악령이 하는 행동의 물리적 결과는 모두의 눈에 보인다.) <팔로우>의 STD(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 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설정은 방종한 10대를 살인마가 응징하는 70, 80년대 < 할로윈 > 류 호러와 동일하다. 그러나 <팔로우>의 섹스는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도이기도 하기에 10대의 성을 죄악시하는 청교도적 보수성은 제거됐다. 한편 누구도 해치지 않는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고 무고한 타인에게 위험을 넘겨야 살아남는다는 딜레마는 < 링 >과 가깝다. <링>의 저주가 시한부 삶과의 초조한 투쟁이라면, <팔로우>의 공포는 한번 눈 딱 감고 남에게 전가해도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고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을 영원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광막하다. 빨리 성년이 되고만 싶었던 겨우 스무 살인 주인공들은 갑자기 남은 삶이 끔찍이도 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팔로우 >의 약점은 명백하다. 한 마디로 이 호러는 별로 무섭지가 않다. 적어도 펄쩍 뛰거나 긴장으로 몸에 쥐가 나는 대목은 없다. 희생자들이 악령을 대적할 수 있는 실질적 방도가 없다는 점도 관객을 맥 빠지게 만든다. 제이와 친구들이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짜내는 작전은 한심하거나 허술하다. 실내 수영장으로 악령을 유인하는 클라이맥스의 논리는 특히 이해하기 힘들다.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뱀파이어 호러 <렛 미 인>이 같은 공간에서 연출한 아름답고 통쾌한 클라이맥스와 비교하면 더욱 시시해 보인다. <팔로우>가 물과 악령의 연관성에 대한 설정을 여러 차례 깔아놓고도 매듭짓지 않는 점은 가장 의아한 대목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위협을 느낄 때 주로 물가로 도망친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귀신의 힘을 빨아들이는 아시아 호러 영화 속 물의 힘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팔로우>에서 물의 의미는 끝까지 구체화되지 않는다. 요컨대 < 팔로우 >의 어느 구석을 보아도, 재미있는 호러를 연출하기 위해 필요한 감독의 적당한 잔인함과 최소한의 새디스트적 기질을 발견하긴 어렵다. 대신 <팔로우>는 공포감의 역치를 바꾸어 놓는다. 히치콕의 < 새 >가 그랬듯이 여태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상을 섬뜩한 앵글로 다시 보게 한다. 게임의 규칙을 인지한 다음부터 <팔로우>의 관객은 중경과 원경에 행인이 나타날 때마다 동요하게 된다. 휴는 제이에게 절대 막다른 장소에는 가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사방이 트인 공간 역시 저주받은 자에게는 언제 맹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정글이다. 요컨대 <팔로우>는 공포의 역치를 바닥까지 낮춤으로써 악령에 쫓기지 않는 관객에게도 어이없는 사실을 일깨운다. 낯선 사람이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저주 이후의 영화 속 세상은 영화 초반 제이를 처음 소개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집 뒤뜰의 간이 수영장에 몸을 가라앉힌 소녀에게 세상은 평온하고 다정하다. 제이는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다람쥐와 새를 느긋이 바라보고 벌레를 만져본다. 울타리 너머에서 엿보는 호기심 많은 소년들은 귀여울 뿐 위협이 못된다. 어떤 생명체도, 움직임도 성적 응시도 위험으로 느끼지 않았던 소녀에게 20대와 더불어 닥친 저주는 유년의 평화를 영구히 부숴버린다. 그러면 악령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실패하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가? <팔로우>에서는 죽음이 딱 두 번 묘사된다. 첫 번째는 제이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프롤로그의 이름 모를 소녀이고 두 번째는 제이에게 내린 저주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간 예전 남자친구 그렉이다. 두 죽음에서 눈길을 끄는 요소는 부모와의 관계다. 프롤로그의 소녀는 무슨 일이냐고 염려하는 아빠를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혼자 도망친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는 순간 아빠에게 전화를 걸지만 “제가 엄마,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못되게 굴었던 일들 미안해요.”라는 체념의 인사만 남긴다. 기이하게도 이 10대는 보호자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렉을 습격한 악령은 심지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양수 같은 물을 흘리며 다가와 섹스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청년을 덮친다. 제이 역시 홀어머니에게 자신이 처한 위기를 설명하지 않고 나중에는 죽은 아버지를 모습을 한 악령에게 쫓긴다. <팔로우>의 아이들은 스누피 만화 「피너츠」처럼 어른이 실질적으로 부재하는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궁리하고 행동한다. 이 캐릭터들이 부모를 대하는 감정은 증오라기보다 아득한, 그리고 스스로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거리감이다. 많은 10대 슬래셔 호러에서도 부모가 집을 떠난 사이에 참극이 일어난다. 그 영화들이 죽음의 게임에서 변수를 줄이고 편리하게 풀어가려고 부모를 배제했다면 < 팔로우 >의 폐쇄된 소우주는 10대 후반의 생활 감각을 표현하기 위한 시적 허용에 가까워 보인다. 나와 내가 선택한 소수의 친구 그룹이 온통 세상의 전부인 시절. <팔로우>를 보는 동안 나는 학교나 가족, 사회보다 자아, 그리고 친구들의 판단이 절대적 가치 기준이자 법이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감정을 상기할 수 있었다. 동생 켈리와 소꿉친구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음에도 제이의 이야기를 무조건 신뢰하고 곁을 지킨다. 제이네 집 현관에는 마치 네 친구를 위한 듯 딱 네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있다. 이 한시적으로 밀봉된 <팔로우>의 세계는 영화의 절묘한 톤과 디자인으로 완성된다. 예컨대 제이를 오래 짝사랑해 온 폴은 “왜 나는 안 되니?”라고 저주를 자청한다. 이것은 좋아하는 여자와 잘 수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는 10대 남자아이다운 무모한 행동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 장면에서 폴을 비웃거나 동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절한 멜로로도 코미디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팔로우>는 미숙한 열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편 영화에서 최초로 악령의 존재를 의식하는 장면이 “인생을 바꾸고 싶은” 사람을 군중 속에서 지목하고 이유를 맞추는 게임을 계기로 끌려 나온다는 점도 성년 입구의 중대한 이슈와 연결돼 있다. 무엇보다 <팔로우>는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어떤 특정 연대에도 속하지 않는 세계를 창조해 이 시절이 갖는 섬과 같은 속성을 시각화한다. 아이들은 분첩 모양의 e-북 리더로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70년대 옷을 입고 50년대 차를 몰며, 브라운관 TV로 흑백 특수촬영 SF를 시청한다. <팔로우>는 여자들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태연히 펼쳐지는 피터 스트릭랜드의 <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와 더불어, 영화의 이름 아래 독자적 규칙과 문화로 작동되는 리얼리티를 구축한 2015년의 영화다. 나는 왜 더 많은 영화가 대안적 세계를 발명할 수 있는 이 매체의 특권적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스무 살이 되려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그것’은 육체에서 해방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에게 평생 달라붙어 있는 섹슈얼리티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오르가슴의 별명은 ‘작은 죽음’이다- 있다. 데이빗 로버트 미첼 감독은 이 시기의 맹목적이고 천진한 열정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윤리라고 믿는 듯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커플을 이룬 제이와 폴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손을 꼭 잡고 경계하는 얼굴로 걸어간다. 둘은 대담하고 어리석게도(!) 더 이상 악을 세상에 전가시키지 않고 서로의 불침번이 되기로 결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 팔로우 >는 같은 디트로이트에서 촬영된 다른 영화의 제목과 조우한다. 다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들이 이사 오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은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태워준 운전사를 추적해냈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많지 않았다. 그저 한 아버지와 어리고 예쁜 딸이 탔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하나 더. 꼭 밤에 이사해야 한다고 했다. 돈이 더 들어가도,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들에겐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삿짐도 유달리 적었다. 여행 가는 사람들처럼 최소한의 짐들뿐, 큰 가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일이 무척 편했다고 느꼈다. 조용히 내리던 눈이 모든 걸 덮어주던 밤이었다. 본인만 모르고 있었을 뿐, 그는 그들을 이곳에 들인 장본인이었다. 경찰이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생토록. 그렇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소년은 수영장에서 가해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한 소녀와 함께 사라졌고, 엽기적으로 온몸의 피를 뺀 채로 사람들을 죽이던 소녀의 아버지는 병실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 병원에선 햇볕을 쬐고 자연 발화돼 죽은 여인에 관한 소문이 돌았으며, 그 여인의 남자친구는 소녀와 그 아버지가 머물던 집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스톡홀름 근교의 도시 블라케베리에는 한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들이 겨울 맹추위처럼 배회했다. 교회가 없는 동네라 그런 거란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오로지 사라진 소년과 소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수영장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가 쓴 「렛 미 인」은 작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 블라케베리를 무대로 뱀파이어가 나오는 자전적인 성격을 띤 소설이었다. 하지만 내용이 괴상하다는 이유로 여러 출판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투고한 곳에서 연락이 와 2004년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기구했던 시작과 달리 출간 후 반응은 뜨거웠다. 전 세계 23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영화화 제의가 쇄도했다. 그중 자국의 촉망받는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구애를 받아들여 작가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매만져 영화로 완성했다. 1980년대 초 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기,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던 왕따 소년이 외톨이 뱀파이어 소녀와 만나 기묘한 관계를 맺게 되는 모습을 때론 서정적으로 때론 무시무시하게 그려낸 영화 < 렛 미 인 >는 트라이베카 영화제,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등 30여 개 영화제에서 48개의 상을 받으며 2008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선 다소 보기 힘든 북유럽권 영화에, 호러라는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재빠르게 리메이크를 진행해 ‘힛 걸’로 떠오르는 신성이 된 클로이 모리츠를 앞세워 원작과는 또 다른 감성을 선보이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에서 생의 이유를 발견하는 두 아이의 외롭고도 가슴 아픈 성장담은 이렇게 세계를 매혹시켰다. 이에 깊은 울림과 서정을 부여한 건 요한 소데르크비스트의 스코어 덕분이었다. 이름만큼이나 생소한 스웨덴 태생의 영화음악가 요한 소데르크비스트는 1966년에 태어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톡홀름 왕립음악학교에서 작곡과 편곡을 전공했다. 재즈 밴드와 민속 음악그룹에서 활동하며 경험을 쌓던 그는 여느 작곡가들처럼 우연히 영화음악을 맡게 되며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데, 그에겐 1991년 작 <아그네스 세실리아>와 덴마크 출신의 수잔 비에르 감독 데뷔작 <프로이트의 리빙 홈>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TV와 라디오, 연극 등 다양한 분야로 행보를 넓히며 실력과 인지도를 갖춰나갔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수잔 비에르 감독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 브라더스 >부터. 이 영화로 유로피안 필름 어워드와 칸영화제에서 음악상을 석권하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이후 그녀와 함께한 < 애프터 웨딩 >과 <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 < 인어베러월드 >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까지 연달아 호평받으며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여전히 유럽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그는 최근 <콘티키>와 <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 >, < 페인리스 > 등 어드벤처와 로맨틱 코미디, 호러와 같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최고조에 오른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주로 기타와 피아노를 바탕으로 절제됐지만 애수 어린 멜로디를 선사하는 그는 잘 설계된 풍부한 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 실력도 지녔다. 게다가 워터폰이나 허디거디, 어레이 마림바 등 독특한 민속 악기들을 활용해 새로운 사운드를 창출하는 등 색다른 시도와 실험을 멈추지 않는 탐구심과 신선한 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요한 소데르크비스트 Johan Soderqvist <렛 미 인>의 음악은 차갑고 시린 동시에 아름답고 따스하다. 소데르크비스트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스코어를 쓸 수 있는 드문 기회라고 라이너노트에 적었을 만큼 양면적인 색채가 도드라진다. 전형적인 호러영화음악에서 벗어나 십 대의 성장통과 가슴 아픈 멜로라인까지 보듬어낸 감성적인 분위기는 절절하게 심금을 울리고 가슴을 저미게 한다. 애수 어린 선율은 한없이 우울하고 어두운 영화에 한줄기 구원의 빛처럼 다가오지만, 평온한 안식을 심어주지 못한 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함으로 관객들을 괴롭힌다. 그 사이를 잠식하는 건 베이스 워터폰의 허무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잔향들이다. 얼핏 신디사이저로 착각할 만큼 다채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선사하는 워터폰의 존재감은 스코어 전반을 지배한다. 공포영화에 쓰이는 악기로 한때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던 이 기괴한 몰골의 악기는 리처드 A. 워터스가 1967년에 발명한 것으로 물에 의한 공명 현상과 진동을 통해 독특한 소리를 들려준다. 타악기처럼 두드리거나, 활로 켜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활용할 수 있는데, 음향에 가까운 낯선 쇳소리로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마력을 지녔다. 마치 차가운 북유럽의 대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스산한 기운으로 고독의 깊이와 세월의 무게감을 전해주는 듯하다. 이를 감싸 안는 건 슬로바키아 내쇼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짙은 스트링과 피아노, 그리고 기타의 몫이다. 처연하면서도 구슬픈 선율을 연주하는 이들은 워터폰에 맞서 사람다운 일말의 온기를 부여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쓰인 건 ‘Eli’s Theme’다.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애달픈 선율의 현악 앙상블은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어린 모습으로 홀로 버텨온 뱀파이어 이엘리의 심정과 기구한 사연을 대변한 곡으로 ‘The Father’와 ‘Then We Are Together’, ‘Going Home’, ‘Let the Right One In’ 등 여러 차례 변주되며 제법 선명한 잔상을 남긴다. 주로 소년과 소녀가 잠깐 동안 행복한 시간을 가질 때 흘러나오는데, 현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미래의 운명이 그 숨겨진 비극성을 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결국 ‘Eli’s Theme’는 무기력하고 어두운 생존의 저주를 고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자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모습을 담은 곡으로 음악적 메타포로도 활용된 셈이다. 그 외 부분은 주로 호러적인 감수성을 품고 있는 짧은 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귀에 거슬리는 베이스 워터폰의 잔향과 독특한 음색들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데, ‘The Arrival’이나 ‘The Slaughter’, ‘Hiding the Body’와 ‘Virginia wakes up’, ‘Spotting a Victim’, ‘Death of Hakan’, ‘Lacke Dies’ 등 전반적인 트랙에 걸쳐 엠비언스처럼 사운드 디자인적인 측면으로 다뤄지고 있다.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초현실적이고 공감각적인 소리의 향연으로 어둡고 나약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호러영화음악만의 고유한 미덕이 담긴 큐들이다. 요한 소데르크비스트의 <렛 미 인>은 변방에 있던 북유럽권의 영화음악을 세상에 널리 알린 첨병과도 같은 사운드트랙이다. <브라더스>로 자신의 이름을 처음 드러냈다면 <렛 미 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는 수잔 비에르 감독과의 협업 외에도 능히 통용될 수 있는 영화음악가임을 스스로 입증해냈다. 어둡고 아름답지만 애잔하고 감미로운 선율을 통해. 이쯤 되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넘어 독일과 스페인 등으로 보폭을 넓혀가는 그의 다음 행보가 퍽 궁금해진다. Track List 1. The Arrival 2. Eli and Oscar 3. Eli’s Theme 4. The Slaughter 5. Oscar in Love 6. Hiding the Body 7. After the Fight 8. Oscar Strikes Back 9. Virginia Wakes Up 10. The Father 11. Spotting a Victim 12. Giving Up 13. Death of Hakan 14. Virginia Is Bitten 15. Then We Are Together 16. Virginia in Flames 17. Eli Bleeds 18. Related by Blood 19. Lacke Dies 20. Going Home 21. Let the Right On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