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렐
- 감독
- 피터 솔레트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줄리안 무어, 엘렌 페이지, 마이클 섀논, 스티브 카렐, 루크 그림즈
아무래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영화사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와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계 영화사에서 이 두 개의 발명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또 하나의 발명을 뒤이어 소개할 것이다) 고유한 순간들. 그런 다음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확장되어나간 기호들. 먼저 첫 번째 발명에 대해서 말하겠다. 파이 던지기. 영어로는 ‘Pie Fight(파이 난투극)’ 하나의 용어가 된 광경. 아마도 영화에서 상대방의 얼굴에 파이를 집어 던지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면 항의의 의미로 정치인, 혹은 누군가에게 연설의 순간에 그를 향해서 집어던지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변형이랄 수 있는 계란 던지기가 있다. 파이 던지기의 장면들은 이제 하나의 영화사가 될 만큼의 역사가 되었다. 영화에서 파이를 가장 먼저 던진 사람은 맥 세네트였다. 그때 키스톤 스튜디오에서 그걸 유심히 보던 사람이 있었다. 찰리 채플린. 아마도 키스톤 스튜디오는 채플린에게 영화 학교였을 것이다. 맥 세네트의 영화에서 먼저 던졌지만 그는 이것만으로 하나의 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채플린은 1916년에 9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주연을 했다. 그 중 상영시간 23분의 <촬영 현장에서(Behind the Screen)> 속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파이던지기로 장식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촬영 현장에 소품을 옮기는 일을 하는 찰리는 미숙한 실수와 악당 소품 팀장의 구박으로 온갖 실수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여차저차 우여곡절 끝에 서부극 영화 촬영 현장에서 찰리와 무대 팀장은 대역으로 서로에게 생크림 파이를 집어던지는 연기를 하게 된다. 그때 마침 옆 스튜디오에서는 17세기 프랑스 사극을 촬영 중이었고, 바깥에서는 해고당한 무대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와서 모두 날려버릴 참이었다. 찰리와 무대 팀장은 32개의 파이를 서로 주고받는데 (아마 촬영에는 더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파이가 옆 현장까지 날아가 왕과 왕비와 주교도 파이를 뒤집어쓰고 마지막에는 촬영 현장이 폭발된다. 관객들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도 이 파이장면을 보기 위해 <촬영 현장에서>를 다시 보러 왔다. 생크림 파이. 맛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도 손에 묻히기를 원치 않는 끈적거리는 축축함.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기 모습으로부터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액체 직전의 표면장력. 그걸 집어던져서 상대의 얼굴과 옷을 망쳐놓는 무례한 퍼포먼스. 여기저기서 파이 던지기를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찰리 채플린은 그런 다음 이 영화 이후 파이 던지기 난투극에 관심을 잃었다. 파이 던지기를 스펙터클로 만든 것은 ‘뚱뚱이와 홀쭉이’ 컴비로 더 유명한 (스탠) 로렐과 (올리버) 하디의 <세기의 전투>(1927년)에서 였다. 여기서 파이 난투극이 시작되자 3,000개의 크림 파이를 서로 집어던졌다. 이때 파이 던지기는 영화의 문법에서 완전히 과잉하는 소비의 그로테스크한 익살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집어던지는 장면과 상대방이 맞는 장면은 한 쇼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둘을 나눠찍는 순간 하나의 파이를 던져서 상대방이 맞는 장면을 찍을 때 언제나 현장에는 두 개의 파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던진 파이는 두 번 쓸 수 없다. 이건 낭비의 퍼포먼스이다. 정식화시킨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파이 던지기를 보면서 느껴보는 통쾌한 기쁨은 상대방에 대한 가학적 조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크림 파이를 뒤집어 쓴 모습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러운 몰골의 스펙터클, 아마도 그것이 정치적 퍼포먼스의 목표일 것이다) 오로지 생산만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낭비라고 할 수밖에 없는 퍼포먼스의 순간에 가져보는 일시적인 카니발의 향연의 이미지에의 과소비일 것이다. 토키 영화가 시작하자 여기에 집어던지고 난투극이 벌어지는 상황을 더 실감나게 연출하기 시작했다. ‘파이 난투극’의 영화적 형식은 ‘세 얼간이(Three Stooges)’가 등장하는 <달콤한 파이, 파이>(1941년)에서 거의 완성되었다. 파이의 개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5분 30초 동안 레스토랑의 신사숙녀들이 서로에게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이 쉬지 않고 집어던진다. 이때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던지는 파이가 아니라 그걸 맞는 순간 상대방의 얼굴에서 나는 철썩! 하는 끈적거리는 크림 액체의 사운드 효과이며 마치 스크린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만든다. 물론 그런 다음에도 영화에서 계속해서 파이를 던졌다. 브레이크 에드워즈의 <그레이트 레이스>(1965년)에서는 마치 기록을 세우듯이 4,000개의 파이와 엄청나게 커다란 파이를 상대방에서 집어던지는 씬이 등장한다. 이 목록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은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어찌하여 나는 걱정을 그만두고 수소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의 파이 던지기일 것이다. 여기서 큐브릭은 원폭으로 종말을 맞이하는 인류의 마지막 날에 어울리는 향연을 보여준다. 나는 한정 없이 파이 던지기의 목록을 늘어놓고 싶지만 여기서 참아야 할 것 같다. 다만 두 편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첨언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톰과 제리’이고 다른 하나는 ‘심슨 가족’이다. 약간 흥분하면서 말하자면 파이 던지기를 보는 순간 내가 지금 영화를 보는구나, 라고 감격하게 된다. 파이 난투극은 영화라는 향연에 초대받았음을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계속)
영화의 여명기, 당시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에디슨 사(社)는 자신들이 제작한 단편 필름 작품의 저작권 등록을 위해 프레임 전체를 종이에 프린트해 미의회도서관에 납본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초기 무성영화의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은 실물 프린트를 통해 저작권을 등록하고 돌려받는 식으로 정책이 바뀐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즉 1912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영화는 사진의 형태를 취함으로써만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번잡하기 짝이 없는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 덕분에 당대의 영화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화재에 취약한 질산염 필름(nitrate film)으로 제작되었던 초기 영화의 상영본과 오리지널 네거티브 대부분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동안, 미의회도서관에 보존되었던 이 ‘종이 프린트’(paper print)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형상들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다시 투사할 그날을 망각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디슨 사에서 제작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용 단편 <재채기>(1894)의 종이 프린트. 총 45프레임. 저작권 등록(1894년 1월 9일)된 최초의 영화. 1942년, 당시 미의회도서관 저작권관리국 직원이었던 하워드 월스(Howard Walls)는 저작권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1894년부터 1912년 사이에 제작된 3,000여 편의 영화의 종이 프린트 더미들을 발견한다. 월스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의 지원을 얻어 종이 프린트들을 다시 셀룰로이드 필름에 옮기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지만, 종이에서 필름으로의 매체 전환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켐프 니버(Kemp Niver)를 통해서였다. 1950년대 초부터 니버를 통해 프로젝트가 다시 활성화된 이후 1965년 즈음에는 종이 프린트 대부분이 16mm 필름 프린트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월스와 니버, 그리고 종이 프린트에 얽힌 이 흥미로운 역사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빌 모리슨의 아름다운 단편 <그녀의 영화 The Film of Her>(1996)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종이 두루마리에서 되찾은 미국 역사>(1953, 19분) 종이 프린트를 16mm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전환하는 공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당시 복원된 초기 영화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켐프 니버가 대본을 쓰고 연출했다. 미의회도서관 소장 종이 프린트의 복원 소식에 관심을 가진 이들 가운데는 미국 아방가드르 영화감독 켄 제이콥스도 끼어 있었다. 세인트존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몇 편의 복원 프린트를 대여했다. 이 가운데 한 편의 영화가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05년에 빌리 비처(Billy Bitzer)가 촬영하고 연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릴짜리 작품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그것이다. 스콧 맥도널드(Scott Macdonald)와의 인터뷰에서 켄 제이콥스와 그의 부인 플로 제이콥스는 이 작품을 소재로 작업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플로 제이콥스 : 하지만 이 영화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전에 필름들이 저희 집에 배송되어 왔고 그래서 그가 그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래저래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요즘에 신경시스템(Nervous System: 켄 제이콥스가 고안한, 잔상효과를 이용한 환각적 영사 방식)을 가지고 하는 식은 아니었고요, 그보다는 “와! 이거 봐, 내가 이 남자를 뒤로 움직여볼게!” 하는 식이었죠. 켄 제이콥스 : 점점 더, 저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듯 이 필름들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친구들을 불러 그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해 보였죠. 한 번은 퍼포먼스가 끝났는데, 제 친구인 화가 존 쿠스(John Koos)가 다가왔어요. 전 그때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영사기 옆에 서서 어질어질한 가운데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려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말하길 “켄, 이거 끝내주는데! 이건 꼭 촬영해둬야 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려고 생각했어.”라고 대답했죠.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고요. 그가 제 어깨를 꽉 붙들면서 말했죠. “꼭 그렇게 해!”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방가르드 영화사(社)의 기념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톰, 톰, 피리꾼의 아들(Tom, Tom, the Piper's Son)>(1969~1971)이다. 종종 이 작품은 1905년의 무성영화 필름을 소재로 작업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작품으로 기술되곤 하는데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기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원본 영화의 필름 복제본이나 디지털 영상클립을 가지고 작업하는 통상적인 파운드 푸티지 작품들과는 달리,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반투명 스크린에 1905년 작 원본 영화를 구식 칼라르트-빅터(Kalart-Victor) 16mm 영사기로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뒤로 그리고 다시 앞으로, 때로는 깜빡이게, 때로는 멈추는 식으로 영사한 것을 16mm 카메라로 스크린 반대편에서 재촬영한 기록물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에이빈 뢰사크(Eivind Røssaak)가 지적한 대로, “아카이브적인 것과 퍼포먼스적인 것 사이의 인터페이스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위)와 빌리 비처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첫 번째 장면(아래)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물성(materiality)에 집중하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한 경향에 매혹을 느끼는 이라면, 때론 더 이상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필름의 세부를 확대해 입자(grain)를 감촉하게 하면서 미적 경험을 끌어내는 부분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혹은 매체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표현의 역사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rgath)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 Southwark Fair>(1733)에 묘사된 광경이 빌리 비처를 통해 운동감을 얻고, (종이 프린트 형태로 미의회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제이콥스의 손을 통해 다시 떠들썩한 영화적 환영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경험의 힘은 굉장하다. 원본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형상들을 멈추고, 확대하고, 깜빡이게 하는 영화적 안무의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관람자는 일시적으로나마 다른 우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제이콥스의 영화가 도취의 경험에만 탐닉하면서 원본 영화를 무정형적인 시각적 덩어리로 재가공하고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몇몇 평자들이 지적한 대로 제이콥스의 작품은 일종의 “세미나 같은”(뢰사크) 분석적 구조 — 원본 영화 전체를 보여주고, 이어 제이콥스 자신에 의해 꼼꼼히 탐사되고 변주된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원본 영화를 보여준 후에 짧은 에필로그로 마치는 방식 — 를 취하고 있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전체적 구조에 실제로 자신이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음은 제이콥스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와 같은 평론가는 언어에 기반을 둔 종래의 이론적 연구를 확장시키는 ‘시각적 연구’(visual study)의 탁월한 사례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을 꼽기도 한다. 브레네즈에 따르면 제이콥스는 “기술적 선도라는 면에 있어서나 텍스트적이고 영화적인 표명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론의 창조자”이다. 하지만 결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 대해 가장 근사한 설명을 내놓은 것은 제이콥스 자신이다. “예술은 타격을 가해 당신을 수백만 조각으로 토막을 내고는 다음 타격을 위해 결합시킨다. 작품에는 질서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질서는 정신없는 경험을 자극하기 위한 방안(recipe)일 뿐이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여기서 제이콥스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필름을 조작하면서 내뱉은 “와!”, 혹은 그의 16mm 퍼포먼스를 본 친구 존 쿠스가 내뱉은 “끝내주는데!” 같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시공간의 특이성 자체를 영화화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여기서 제이콥스는 퍼포먼스라고 하는, 일시성과 현장성(actuality)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 자체의 경험을 영화적 장치로 포착하고 재구성한다는 대담한 모험에 뛰어든 것이다. 3D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재구조화하기 이전에 시도된, 전통적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통한 ‘경험의 복제’라는 실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영화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유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제이콥스의 야심은 카메라 앞에 놓인 사물, 인물, 혹은 사건과 같은 현실을 복제하고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익숙한 영화관(觀)을 이미 훌쩍 넘어서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퍼포먼스는 그것을 단순히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경험의 질감과 양감을 상실한 건조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예컨대 무대극을 현장에서 기록한 영상물들은 어쩐지 생기 없는 인형놀이와 같은 느낌을 준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제이콥스가 1905년 작 원본 영화로 16mm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는 광경이나 그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반투명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삼각대를 장착한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다양한 크기로 촬영되었고 이후 이 촬영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편집되었다. (반면 오늘날 신경시스템을 이용한 제이콥스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에 비친 시각적 형상들을 고정된 카메라로 장시간 촬영해 편집 없이 상영용 디지털 버전으로 제공되곤 한다.) 이따금 제이콥스는 어둠 속 한가운데 조그맣게 빛나는 스크린을 보여주거나,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을 보여주거나, 영사 중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는 광경을 삽입함으로써,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원본 영화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에 비추어 재촬영한 영화의 표면임을 꽤 직접적으로 환기시키기도 한다. (아래 그림 참조) 1905년 원본 영화의 프레임 일부가 확대되어 보이다가(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스크린 전체가 보인다(우)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 스크린 왼쪽에 영사 도중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보인다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경험의 복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에 걸맞은 상영 환경을 영화적 장치로서 요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영화관 환경보다는 (제이콥스가 1905년 원본 영화를 가지고 그의 16mm 퍼포먼스를 행한 환경과 유사하게) 영사기가 영사실이 아닌 객석 가운데 자리한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모터 소리를 공간에 퍼뜨려가며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사할 때 비로소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를 현재적 경험으로 되살려 놓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에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필름으로 처음 상영된 것은 2016년 10월 16일 문래예술공장에서였는데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무빙이미지 포럼이 마련한 『영화에 관한 3개의 강연과 노트』 행사의 일환으로 —이때 상영환경 또한 바로 그러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영될 때,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어느 순간 그것의 영사를 감싸고 있는 공간을 기묘하게 유령적인 활력으로 물들인다.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가 지극히 감각적으로 현전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곧 부서질 것 같은 환영적인 느낌으로만 그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강의를 들을 때 으레 그러하듯) 때론 졸음을 부르기도 하는 나른한 긴장 속에 임하면서, 유령화된 공간 저편에서 빛나는 스크린으로부터 문득 생생한 유령들이 튀어나와 춤추는 것을 목도할 때, 그 춤이 절대적으로 지금/이곳(now/here)에서 펼쳐지는 어디에도 없는(nowhere) 춤이라는 것을 감히 부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본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선집 『Optic Antics: The Cinema of Ken Jacobs』(2011)를 참고하면 좋다. 본문에서 인용한 에이빈 뢰사크의 글 「Acts of Delay: The Play Between Stillness and Motion in Tom, Tom, The Piper's Son」과 니콜 브레네즈의 글 「Recycling, Visual Study, Expanded Theory: Ken Jacobs, Theorist, or the Long Song of the Sons」 또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인터뷰는 캘리포니아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스콧 맥도널드의 『A Critical Cinema 3: Interviews with Independent Filmmakers』(1998)에 수록되어 있다. 제이콥스의 영화세계 전반과 신경시스템 혹은 신경환등기(Nervous Magic Lantern)의 원리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를 얻고 싶다면 『씨네 21』에 실린 중앙대학교 김지훈 교수의 글 「 무한과 역설의 영화 」를 참고하길 바란다. 신경시스템의 원리를 활용한 제이콥스의 장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는 <로렐과 하디가 등장하는 시각적 익살광대극: 안녕, 몰리 Optic Antics Starring Laurel and Hardy: Bye, Molly>(2005)인데 이 또한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아들인 에이저젤 제이콥스(Azazel Jacobs)는 촉망받는 독립영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마마스 맨 Momma's Man>(2008)에는 켄과 플로 제이콥스 부부가 주인공의 부모 역으로 출연해 거의 그들 자신을 연기하다시피 한다. 1965년 이후 이들이 거주해 왔던 뉴욕 맨해튼 아파트(꼭대기 층)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비디오테이프가 나오기 시작한 1980년대만 해도 볼만한 영화가 많지 않았다. 비디오를 빌려주는 가게에서도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메이저영화는 소수였다. 일주일에 서너 편 빌려 보면 고작이었다. 한창 영화에 빠져들었던 시절이라 비디오 가게를 일주일에 서너 번 갔고, 갈 때마다 두세 편은 골랐다. 금방 볼 영화가 떨어졌다. 그러면 전혀 모르는 제목과 비디오 재킷을 곰곰이 살펴보며 어디선가 들어본 감독이나 배우인지 생각했다. 짧은 줄거리를 읽으면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지를 상상했다. 그렇게 본 영화들은 주로 B급 영화였다. 원래 B급 영화는 동시에 2, 3편을 개봉하는 극장에서 유명 배우가 나오는 A급 영화에 끼워 파는 영화를 말했다. B급 영화는 SF, 호러, 범죄와 액션 등 소수의 팬이 존재하는 특정 장르를 표방한 영화들이 많았다. 제작비와 시간만 엄수한다면 비교적 자유로운 제작환경이었기에 독특한 영화들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제작과 배급의 독점이 금지되면서 원래의 B급 영화 제작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제작사들이 만드는 저예산 영화를 흔히 B급영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화사적으로도 B급 영화의 자유로운 정신과 기발한 표현을 평가하게 되었다. 한참 B급 영화들을 빌려볼 때의 성공 확률은 1/3에서 1/4이었다. 감독과 배우의 이름도 낯설고, 선정적인 내용이지만 조잡해 보이는 영화들 중에서 간혹 흥미로운 영화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유명한 감독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경우도 있었다. 켄 러셀의 < 크라임 오브 패션 >이나 조지 로메로의 <데이 오브 더 데드>도 80년대 중반에 비디오로 봤을 때는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몇 년 뒤에야 거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실 이런 영화들은 B급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 진짜 B급 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은 거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감독도, 배우도 누군지 잘 모른다. 하지만 논리도 없고 유치한 상황들이 전개되면서도 기묘한 흥을 자아내는 영화들이 있다. 뒤죽박죽이지만 일관되게 자신의 취향이나 주장을 밀고 나가는 유희정신 같은 게 보인달까. 포스터 로비 픽커링 감독의 < 프릭스 오브 네이처 >를 포스터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선택했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아마도 주인공으로 보이는 고등학생 남녀가 밤길을 마구 달려간다. 아마도 좀비처럼 보이는 무리가 그들을 뒤쫓는다. 남자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이유는 에이리언 때문이라고. 아니 좀비 영화가 아니라고? 그리고 영화는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딜포드는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고등학교의 평범한 아침 풍경이 보이는데 뭔가 다르다. 통학버스에서 좀비가 함께 내린다. 옆의 아이를 물어뜯으려 하자 좀비의 목걸이에서 전기충격이 일어난다. 사물함 옆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아이에게는 기다란 송곳니가 있다. 뱀파이어다. 딜포드는 인간과 뱀파이어와 좀비가 공존하는 사회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좀비를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것은 알겠지만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뱀파이어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설정을 정교하게 만들어 관객에게 이해를 시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필요한 설정만 있으면 되니까. 싸구려 B급 영화의 흔한 경우다.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대그는 로렐라이에게 푹 빠져 있는데, 로렐라이는 대마초를 맡기고 가끔 들러 피우는 용도로만 대그를 이용한다. 대그가 접근하면 자기는 순결을 지킨다고 말한다. 페트라는 좋아했던 뱀파이어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아 설레지만 그의 목적은 오로지 피였다. 뱀파이어가 된 것을 안 페트라는 절망한다. 공부는 잘하지만 너드인 네드는 학교에서 따돌림받고, 집에서도 외면당하자 자진해서 좀비가 된다. 좀비처럼 사는 것과 좀비가 되는 것, 어차피 뭐가 다를까. 대그와 페트라는 어렸을 때 약간의 악연이 있었고, 대그와 네드는 친구였지만 성장하면서 멀어진 사이다. 이렇게 인간인 대그와 뱀파이어인 페트라와 좀비인 네드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외계인이 침공한다. 그러니까 < 프릭스 오브 네이처 >를 장르로 말한다면 전통적인 유니버설 호러 영화의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는 50년대 외계인 침공영화의 현대판이다. 외계인이 침공을 시작하자 인간과 뱀파이어와 좀비의 대립이 격화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 외계인을 불러들였다고 비난한다. 좀비가 된 네드가 이끄는 좀비들도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외계인이 모두를 잡아먹기 시작하자 아수라장이 된다. 대그와 페트라와 네드는 지하실에 숨는다. 대그와 페트라는 사랑에 빠지고, 천재인 네드는 외계인을 공격할 방법을 찾는다. 뇌를 먹지 않는 좀비는 인간의 지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뜬금없이 나온다. 외계인이 딜포드의 햄버거 패티가 필요해서 왔다는 사실도 그냥 밝혀진다. 어이없는 이야기 진행이지만 애초에 정확한 논리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갑자기 거대해지고 영리해진 외계인이 인간에게 교훈을 늘어놓는다. 평화롭게 열심히 잘 살아라.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이 비난을 시작한다. 너나 잘해, 네가 뭔데 설교질이야 등등. 그러자 화가 난 외계인이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 이런 식이다. 어이없는 상황이 난데없이 벌어지고 그걸 발판삼아 다음 상황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런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제일 재미있다.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뒤죽박죽으로 모든 것을 싸안고 달려가는 것. 앞뒤를 재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 오로지 하나의 말장난이나 액션이 필요해서 만들어지는 장면들. 그야말로 전형적인 B급영화의 장난이고 책임방기다. 알게 뭐냐. 그냥 재미있으니까 이런 장면을 넣어야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대화로 진행되는 초반이 황당하면서도 별 재미는 없는 것에 비해 중반을 넘어 액션으로 진행되면 확실히 경쾌하고 즐거워진다. 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의 어처구니없음이 순수한 B급 영화의 재미다. < 프릭스 오브 네이처 >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