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
- 감독
- 라이언 존슨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조셉 고든-레빗, 브루스 윌리스, 에밀리 블런트, 파이퍼 페라보, 폴 다노, 제프 다니엘스, 가렛 딜라헌트, 트레이시 토마스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에 관하여 웨스 앤더슨(이후 앤더슨)의 영화에 관한 주된 불평은 강박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의 형식적 아름다움에 비해 내러티브의 밀도가 낮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가 지닌 명확한 목표가 있음에도 주인공의 감정과 주된 갈등에 집중하기보다 산만하게 여러 인물과 주변 사건을 나열하듯 펼치며,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를 표현하는 시청각적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럴듯한 가상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실제 인간이라기보다 인형극 속 인형처럼 존재하며, 배경이 되는 공간도 로케이션과 세트장의 구분 없이 무대화된 허구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앤더슨 영화의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불평을 넘어 시각적 스타일 외에는 말할 것 없는 텅 빈 영화라는 비판에 이르게 한다. 텅 비었다는 가치 판단을 제외하고, 강박적으로 통제된 시각적 이미지에 반해 내러티브가 온전히 제어되지 않고 산만하게 구성되어 형식과 내용 사이에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강박적으로 통제된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허구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서사에서도 그럴듯한 극적 이야기에 이르는 고전적 구조가 아니라 산만한 구성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영화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앤더슨 세계의 스타일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인 데뷔작 < 바틀 로켓 >(1996)을 보자. 영화의 핵심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디그넌(오언 윌슨)은 서점과 공장을 터는 행위를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하듯 실행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전은 장르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고, 모방임이 드러난 방식으로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작전이 진행되거나 실패에 이른다. 그럼에도 디그넌의 계획들은 그가 추구했던 일상적인 삶 바깥의 일탈적 범죄에 도달하며 그 스스로도 만족한다.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암울한 상황과 그 과정이 그럴듯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한다”라는 디그넌을 은유하는 영화의 핵심 대사 속에 꿈이란 고전적인 극적 구조로서의 환영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함이 드러난 아마추어 같은, 어딘가 부족한 반쪽짜리 환영이다. 디그넌이 그랬던 것처럼, 앤더슨 세계의 꿈 혹은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꿈이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식에서 앤더슨은 기묘한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시각적으로는 강박적으로 계산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시화한 프레임과 과도하게 장식적인 이미지로 인해 가짜임이 드러난 형식으로 보여준다. 환영적이면서 일면 자기 반영적(self-reflexivity)이기도 한 모순된 시각화 방식이다.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든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2009)와 < 개들의 섬 >(2018)이라는 두 편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영화 간의 비교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완전한 가상인 그림이나 CG가 아니라 현실의 인형과 물질을 활용한 스톱모션으로 제작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세계가 하나의 사실적 이미지이기도 함을 이중으로 드러낸다. 이는 현실의 인간들과 공간을 촬영한 영화를 정반대로 비현실적으로 연출하고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처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미지를 다루는 앤더슨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가상의 것은 사실적으로, 사실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그리며 ‘영화’라는 사실을 기록했지만, 이미지에 불과한 매체의 양면성이 빚는 감각을 극대화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앤더슨적인 스타일을 대표하는, 강박적 대칭 구도를 생각해보자. 오른쪽과 왼쪽이 데칼코마니처럼 같아 안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과 그러한 구도가 극단적으로 반복되어 작위성이 드러나는 일종의 거리 두기 효과를 동시에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수평과 수직 트래킹 쇼트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몰입의 효과도 있지만, 주요인물에게서 멀어지거나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는 프레임을 벗어나 공간이 확장되는 효과를 주면서,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이야기 바깥에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만 이러한 프레임 밖을 비추며 나타나는 효과가 다른 사실주의 영화들처럼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잠재성을 확인시키는 열린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완전히 통제된 허구의 세계 바깥에도 통제된 다른 허구적 무대가 계속 이어져 있는 열려있지만 닫혀있기도 한 기이한 프레임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 열려있지만 닫혀있고, 몰입시키면서 몰입을 저해하는, 이를테면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소설 지문까지 읽는 형식처럼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도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모순적 충돌이 일어난다.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중심인물에는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어머니의 죽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 친구의 죽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 아버지의 죽음(< 다즐링 주식회사 >), 부모님의 부재(< 문라이즈 킹덤 >), 아내의 죽음(< 애스터로이드 시티 >)과 같이 사적 전사(前史)를 이룬다. 보통 영화가 그러하듯 앤더슨의 영화에도 인물의 전사는 거대 서사를 만나 해결되는 고전적인 이야기 형태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 과정이 극적 구조로만 묘사되지 않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산만하게 서브플롯을 다루거나, 시간 순서를 뒤섞거나, 막을 나누거나, 화면비와 색을 바꾸거나, 시각적 형식 자체가 서사의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고전적이지만 과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가 밀도가 낮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디그넌이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범죄를 모방하는 것처럼, 극적 밀도가 낮은 상태 혹은 고전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과정이 충돌하는 내러티브 방식이 앤더슨의 의도이다. 매혹 시키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작위성을 나타내는 이미지, 시각 형식의 모호한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듯 말이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에 이르면 앤더슨은 그러한 자신의 테마에 더 적절한 이야기 구조를 하나 덧붙인다. 수평 트래킹의 움직임을 따라 화면을 확장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허구적 세계 밖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제된 움직임 아래 보여주었던 것처럼 액자식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의 이전 영화처럼 주요인물의 결핍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이야기 안에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젊은 시절에 겪은 영화적인 모험이 있고 그 극적인 사건 끝나고 회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결핍이 등장한다. 과거의 이야기, 허구적인 모험의 바깥에 전쟁이라는, 파시즘이라는, 독감이라는 재앙의 현실이 있고 더 바깥에는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주드 로/톰 윌킨슨)의 죽음이라는 시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에 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는 될 수 있다는 대사처럼 제로가 작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의 회복이 아니라 슬픔과 약간의 위로뿐이다. 오기(제이슨 슈왈츠먼)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4.5광년 떨어진 별나라가 아니라 땅속에 있다고 말했듯, 앤더슨은 고전적 이야기 구조가 온전한 위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과 세계를 액자식 구조를 통해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바라보며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삶과 비슷하면서 다른 허구의 아름다움에 이입하거나 거리를 두며 나의 현실을 비추는, 낯설고 기묘한 감흥을 줄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앤더슨의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크나큰 낙차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막 도착한 오기는 자식들에게 아내의 부고를 전하며,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별나라에 계신다고 위로했던 일화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며 시간은 약이 될 수 없고, 반창고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처음부터 고전적인 이야기의 허구적 위로가 불가능함을 선언하듯 시작한다. 그럼에도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결핍을 지녔거나 상처를 지닌 캐릭터들이 모여든다. 중심인물인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고, 밋지(스칼렛 요한슨)는 전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 이 두 사람은 1층이지만 전경만 보면 공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과거와 상처를 말하고, 사진을 찍고, 연기 연습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창을 경계로 마주 보는 두 인물의 관계는 각각 카메라와 피사체이자 관객과 배우처럼 느껴진다. 창이라는 프레임을 경계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인물의 구도와, 오기가 사진작가이고 밋지가 배우라는 직업적 위치가 그러한 생각을 강화한다. 여기에 왜 자신과 오기가 가까워졌는지 알겠다고 말하는 밋지의 말이 덧붙여진다. 둘은 비슷하므로 가까워졌다.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유사성 때문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배우는 아픔, 결핍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다. 물론 시선을 끌어당기는 볼거리라는 본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대개 관객들은 현실과 닮은 허구의 고통과 갈등에 이입한다. 때문에, 영화의 시작에서 해설자(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완전한 픽션이라고 선언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도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모여든다. 그렇지만 앤더슨 영화가 늘 그러하듯,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인물들의 전사와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액자식 구성을 오가며 여러 인물의 서브플롯들을 산만하게 비춘다. 외계인이 소행성을 훔쳐 가는 비일상적인 사건 또한, 보통의 고전적 이야기 구조라면 주인공의 결핍이나 상처를 거울처럼 비추는 은유가 되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거대 서사로 기능하지만 오기와 밋지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밋지는 오기에게 느낌이 다르냐고 묻고 오기는 아무 느낌 없다고 답한다. 그러고 얼마 후 외계인이 나타나 훔쳐 갔던 소행성을 돌려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갔고 다시 돌려놓았을까?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외계인이 소행성을 가져간 후 오기에게 “이제 세상이 변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놓고 변한 것은 우습게도 소행성에 적혀진 품목번호뿐이다. 외계인(제프 골드블룸)을 연기하던 배우 또한 외계인 탈을 벗고 자신은 외계인을 하나의 메타포로 이해한다고 말했을 때 오기가 무엇에 관한 메타포냐고 되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모호하다고 답한다. 즉 이 코스믹 한 해프닝은 그저 픽션에 필수 불가결한 비일상적인 사건으로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오기 역할을 연기하던 존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그는 이 말을 내뱉고 무대 뒤로 연결된 문을 열고 연극 연출자에게 향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무대 밖을 벗어나 횡적으로 이어진 여러 공간을 지나쳐 오기는 연출자를 호출한다. 자신이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지,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이 연극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주연 배우에게 연출자 슈버트(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Doesn't matter, Just keep telling the story)”라고 말한다. 외계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고, 해설자의 말처럼 현대 연극으로 정의되는 이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창작과정의 고통을 묘사하는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는 이 둘의 대화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내가 아닌 캐릭터의 상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오기이자 존스의 고민에 연극이라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통제하는 연출자가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저 계속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전하는 말이 현실 세계를 향한 코스믹(Cosmic) 한 시선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는 우드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어머니도 46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른의 마음과 얼마 전에 일을 겪은 아이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다만 46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면 그때는 우드로가 박사의 마음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코스믹 한 사건에도 어른들은 시큰둥하고 격리된 상황에 불평만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외계인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보이며 통제된 상황을 타개할 작전을 세운다. 이 맹랑한 아이들도, 죽은 딸이 과거에는 손녀들 같았다고 말하는 스탠리(톰 행크스)의 대사처럼,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다. 당연히 히켄루퍼의 말대로 몇조 킬로미터 떨어진 별의 빛이 우리에게 닿은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끝없이 흐르는 우주적 흐름대로 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액자식 구조의 여러 겹의 세계 속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스토리텔링 하는 연기자들처럼 우리의 삶도 일면 가상적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삶의 고통이, 우주인의 등장과 같은 허무맹랑한 사건이 등장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처음에 보여주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황량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우주의 순환적 시간 아래 그러하다. 대신 이러한 무기력함, 허무함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라 덧붙인다. 언젠가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기의 말대로 땅으로 돌아가 영원한 잠을 자게 되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는 잠에는 꿈이 존재한다. 연기 학교의 선생님 솔츠버그(윌렘 데포)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자는 건 죽는 것이 아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생각도 한다. 죽은 엄마를 만날 수 있고, 전처나 전남편과 잘 수도 있고, 마테호른에 오를 수도 있다. 그게 스토리가 될까? 되지,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해보자고”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한다. 이는 꿈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현실로 삶을 구성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안에서 도저히 이 연극을, 이 삶을 이해할 수 없던 오기는 밖으로 나간다. 그 밖이란 무대를 넘어 연극이 상연 중인 건물 외부까지 향한다. 이때 그는 연극에서 잘린 배우를 만나게 된다. 오기의 아내 역할을 했던 배우(마고 로비)와 삭제된 장면의 대사를 나누는 이 장면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오기의 죽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극적 상황이 아닌 일상적 위치에서, 두 인물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삭제된 대본을 아내 역할의 배우가 혼자 상대의 대사와 지문까지 읊고 있는 자기 반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에게 이 대본 리딩은 감정적인 몰입의 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겪은 작은 대화처럼 지나가며, 좋은 회상인데 왜 잘랐는지 서로 의문을 표하며 가볍게 헤어진다. 정작, 이 장면 속에서 별나라에 있는 오기의 엄마를 만난 것처럼, 죽은 아내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밖 우리 관객들이다. 측면에서 두 인물을 약간 멀리서 비추는 쇼트들이 지나가고, 대사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정면 바스트 쇼트에서 클로즈업 쇼트로 인물을 비추면, 그 쇼트들이 만드는 환영적 효과는 관객들에게 약은 아니지만, 반창고와 같은 작은 위로의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가 오기의 죽은 아내를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느끼듯, 배우인 존스가 대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상대역을 통해 듣는 것일 뿐 오기라는 연극 속 캐릭터가 겪은 경험이 아님에도, 오기가 꾸는 꿈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밋지와 창을 통해 나누었던 장면의 구성과도 공명하면서 이해할 수 없던 연극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대의 안과 밖, 스크린의 안과 밖의 경계를 어지럽게 뒤섞으며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난 돌아올 수 없어 오기”라는 아내의 슬픈 대사와 함께 존재의 부재증명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사진을 냉정하지만 일면 따뜻하게 마주하게 한다. 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오기가 무대를 탈주하며 이어지는 이 장면들을 통해 꿈이, 허구가, 이야기가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 뒤섞인 앤더슨 세계의 모호한 매혹을 잘 드러내는 최상의 것으로 남는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이 탁월한 시퀀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연극의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의 죽음을 알리며 모든 연기자가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는 대사를 외치는 씬으로 이어진다. 콘래드가 연극의 주제가 무엇이냐는 배우의 질문에 “무한함?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 것처럼, 앞과 뒤를 알 수 없이 순환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더슨식 세계를 더없이 적절히 요약한다. 이제 영화의 엔딩에서 우리는 잠에서 깬 오기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극작가가 신비한 우주적 체험을 공유한 모든 등장인물이 몽환적인 잠 속으로 제각기 빠져드는 씬을 구상 중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연극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안인지 밖인지 헷갈릴 때쯤, 영화는 죽은 엄마를 향해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삭제된 꿈 장면의 슬프지만 차갑기도 한 대사처럼, 신을, 꿈을, 허구를 믿지 않지만, 반창고 같은 위로를 기대하며 그렇게 영화라는 잠에 빠지고 꿈에서 깨어난다.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전 세계는 물론이고 영화계도 큰 폭의 변화를 맞아왔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났고, 그동안 얼마나 적은 수의 영화가 여성의 크레딧을 달고 생산됐는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영화계가 남성들만의 친목과 우정, 그리고 지배 카르텔 안에서 굴러왔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후 변화는 극적이라 할만하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지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나서는 영화들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도 줄어드는 분위기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전기영화 붐이다. 방사능 연구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 < 마리 퀴리 >(마르잔 사트라피, 2019), 멜버른컵이라는 경마대회에 우승한 최초의 여성을 다룬 < 라라걸 >(레이첼 그리피스, 2019), 여성의 정체성을 노래로 승화했던 호주 가수 헬렌 레디의 이야기 < 아이 엠 우먼 >(문은주, 2019),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스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을 네 배우(주로 줄리안 무어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통해 들려주는 <더 글로리아스 The Glorias>(줄리 테이머, 2019), 1960년에서 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린 영화배우 진 시버그의 이야기 <시버그 Seberg>(베네딕트 앤드류, 2019), 어린 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주디 갈랜드에 관한 < 주디 >(루퍼트 굴드, 2019) 등이 실존했던 굵직한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 전기영화다.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을 그린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은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두 여성과 폭스뉴스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일체화한 가공의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며, 1970년 미스 월드 대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여성들의 < 미스비헤비이어 >(필리파 로소프, 2020)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기영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Mrs. America>(크리에이터 다비 월러, 연출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엠마 아산테,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자니크자 브라보, 2020)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걸출한 인물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옴니버스 전기영화'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기영화/ 드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을 통해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온갖 제약을 뚫고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인공을 다루거나(<마리 퀴리> <라라걸>)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담아낸다(<아이 엠 우먼> <더 글로리아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미스비헤이비어> <미세스 아메리카>). 상당수가 여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 깊다. <라라걸> 같은 경우 여성 스태프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들 여성 전기영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생산 방식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수산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 미스 마르크스 >도 여성 전기영화다. 이 전기의 주인공은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1855~1898)다. 그 옛날 마르크스주의를 익혔던 사람들조차 채 알지 못했겠지만, 엘리노어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중후반 온갖 분야에서 열렬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55년 런던에서 카를과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의 일곱째 아이(이중 넷은 사망했다)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사회주의 신동’의 면모를 드러냈다. ‘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자본론> 저술을 도왔고 16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여러 투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성인이 된 뒤로 그녀는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최초의 여성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도 올랐다. 또한 맹아 단계에 있던 여성운동에서도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었다. <미스 마르크스>는 엘리노어 생애의 후반기인 1883년부터 1898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카를의 장례식식장에서 시작된다. 이 첫 시퀀스에는 이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모든 인물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카를부터 그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미 사망한 큰 언니 예니첸의 남편 샤를 롱게와 아들 조니, 또 다른 언니 라우라의 남편 폴 라파르그,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엘리노어의 사랑이자 원수가 되는 에드워드 에이블링까지. 이들 인물을 담은 영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는 운동가 엘리노어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속히 퍼져감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적 계승자는 절친 엥겔스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유산 관리권을 물려받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됐던 엘리노어 또한 이 '운동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엘리노어가 여러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습을 직접 화법으로 보여준다. 엘리노어가 <자본론>의 자본 축적 법칙에 관한 구절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읊는다든지 당대로선 매우 급진적이었던 여성 평등에 관한 연설 장면을 꽤 길게 편집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바가 19세기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두 번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카를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했던 데무트에게는 프레데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무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엘리노어는 여자 관계에선 방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엥겔스가 프레데릭의 친부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엥겔스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엘리노어는 혼란에 빠진다. 또한 언니 예니첸이 사망한 뒤 자신이 돌보고 있던 조카 조니가 아버지 롱게에게로 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축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질적 남편 에드워드 에이블링과의 이야기다. 엘리노어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당대의 틀을 깨는 파격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마르크스 가문이나 엘리노어 마르크스에 관한 대다수의 전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에게 아킬레스의 건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곳곳에 설파한 운동가로 기록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낭비벽과 쉴 줄 모르는 성편력으로 엘리노어의 삶을 자글자글 갉아먹었다. 이 영화에는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에이블링은 미국 유세여행에서 고급 와인과 꽃을 마음껏 질러대며 비용을 낭비해 이들을 초청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노어가 물려받은 유산 또한 펑펑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노어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링을 신뢰하려 애썼고 그것이 그녀 삶 최대의 불운이었다. 영화는 가뜩이나 힘겨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나날을 살아가던 엘리노어가 아버지의 과거사에 배신당하고 에이블링에게 연달아 결정타를 맞으면서도 분투하지만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사실, <미스 마르크스>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을 그려서인지 영화는 순간순간 에피소드를 단순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운동가로서의 엘리노어 보다는 한 남성과 가족 관계에 휘둘리는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며, 워낙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풍부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감독은 나름의 '필살기'를 보여준다. 한때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던 전설적 가수 니코가 1980년대를 맞아 독자적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린 여성 전기영화 < 니코, 1988 >(2017)로 데뷔한 수산나 니키아렐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전기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기영화의 한계라 하면 실재했던 인물의 삶이라는 굴레에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니키아렐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영화적 삶'을 부여하려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후반부 엘리노어가 펑크록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과 버젓이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성과 결혼한 에이블링을 보는 괴로움에 둘러싸여있던 엘리노어는 이 장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도록 몸을 마구 내던진다. 어쩌면 진혼 의식이나 살풀이와도 같은 이 장면을 통해 니키아렐리 감독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순간의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 한 장면은 앞서 언급한 여성 전기영화보다 이 영화가 한 발 앞선 지점이며, 어쩌면 이 지점이 앞으로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P.S. 영화 속 ‘살풀이 의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국 밴드 다운타운 보이즈 Downtown Boys의 음악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서 사용된 'Waves of History'부터 엥겔스가 사망하는 장면 직후에 흘러나오는 '인터내셔널가 L'Internationale'까지 여러 장면에서 곁들여지는, 좌빨 성향 농후한 이 미국 밴드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어릴 적부터 "Go Ahead"라는 인생의 모토를 갖고 살아온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
엄태화 , 엄태구 형제의 < 잉투기 >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도 미국영화 < 브릭 >이 떠올랐다. 이제는 스타 배우이자 감독이 된 조셉 고든 레빗이 고등학교 내 살인과 마약과 범죄를 해결하는 ‘고딩’을 연기했던 <브릭>은 그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로저 에버트에게 “고전 미스터리 탐정물의 자세를 현대적인 캘리포니아의 한 고등학교로 완벽하게 바꾸어놓았다”는 인상적인 평을 받은 바 있다. 뜬금없이, 2008년 개봉한 청춘 필름누아르 영화의 기억을 길어 올린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 브릭 >은 저예산에 20일이란 짧은 촬영 기간 동안 젊은 배우들을 데리고 신인 감독(이후 조셉 고든 레빗과 < 루퍼 >를 함께 만든 라이언 존슨)의 아이디어와 연출력, 그리고 7년을 준비했다는 시나리오로 승부해 ‘작품’을 만들어낸 케이스다. 개인적으로 <브릭>이 뇌리에 각인된 이후 종종 리얼리즘과 작가주의에 과하게 경도되는 우리 독립영화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 이같이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저예산임에도 장르성을 경유하는 동시에 단단한 이야기와 캐릭터, 개성을 갖춘 튀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바람과 근심을 지녀왔었다. 그러기를 수년째, 드디어 < 잉투기 >가 왔다. ‘잉여’ 담론이 흥했던 2013년을 관통한 <잉투기>에서 < 브릭 >의 그 활력과 생동감을 맛본 것은 실로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영자로 대변되는 파닥파닥 살아 숨 쉬는 캐릭터, 피해자인 칡콩팥 ‘태식’이 미스터리한 가해자 ‘젖존슨’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 내러티브 구조, 10대부터 30대까지라면 꽤나 널리 공감할 ‘갤러리’, ‘현피’, ‘먹방’ 등 인터넷 ‘루저’ 문화에 관한 생생한 묘사, 그리고 태식과 희준으로 대변되는 하릴없이 부유하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청춘’들에 대한 복잡미묘한 시선까지. 특히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지질할 수밖에 없는 ‘잉여’들을 극의 중심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로 (20대들의 박탈감이나 ‘일베’의 일면을 연상시키는)동시대성을 획득하는 한편 위로와 관조, 냉소를 넘나드는 거리 두기에도 성공한다는 점에서, 엄태화 감독의 연출력은 장편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브릭 >이 필름누아르 안에 청춘과 성장 기운을 녹여내는 기성품으로서의 활력이 도드라진다면, < 잉투기 >는 성장영화의 내러티브를 지속적으로 비틀면서도 탈주까지는 시도하지 않는 묘한 활력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전형적이고 획일적인 장르성은 거부하지만 동시대 영화관객들과의 친밀도는 계속 높여나갈 수 있을 만큼의 영화적인 전형성과 보편성은 획득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자의 반 타의 반 방임과 자학과 인정욕구를 넘나드는 이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공력이 실로 놀라웠다. 엄태화 감독은 레퍼런스로 < 400번의 구타 >와 < 허공에의 질주 >, <바보들의 행진> 등을 꼽았다고 한다. < 잉투기 >의 요소요소를 되새기게 하는 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잉투기>에는 분명 저 작품들 모두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젊은이의 고민들이 2013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얼굴에 가로 새겨져 있다. 데뷔작에서 확인시켜 준 동시대성과 활력이라면, 엄태화 감독은 청춘의 이야기를 넘어 어떤 장르든 제식대로 요리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부디, 묵직한 듯 싱싱하고 반골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차기작으로 이내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