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 감독
- 크리스티안 E. 크리스티안센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라이턴 미스터, 민카 켈리, 캠 지갠뎃, 앨리슨 미칼카, 댄닐 액클레스, 프란시스 피셔, 토마스 아라나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 성적표의 김민영 >(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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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와 권태, 기쁨과 슬픔을 껴안는 방식에 관하여 ‘나’는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청년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치코와 동행한다. 사치코는 한 잔 할 것을 제안하고 ‘나’는 몇 시간 후에 문자하겠다고 하고 헤어졌지만 ‘나’는 그만 잠을 자느라 약속시간을 어긴다. 그 날 ‘나’는 룸메이트 시즈오와 밤새 술을 마신다. 다음날 ‘나’는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하다 사치코를 또 만난다. ‘나’는 어제의 약속을 어긴 것을 사치코에게 희미하게 사과하고 사치코는 애매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 관계인 듯 아닌 듯한 관계가 시작된다. ‘나’와 사치코가 처음 섹스하던 날 귀가하던 시즈오는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시즈오가 두 사람 곁에서 물러나는 건 이때가 마지막이다. 그 후로 세 사람은 거의 늘 함께 한다. 함께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당구 치고 탁구 치고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다. ‘나’는 누구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삶을 원하며 사치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태도로 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치코는 그런 ‘나’의 쿨함 또는 무심함에 슬쩍 마음이 상한다. ‘나’와 사귀기 전 서점 사장과 연인관계였던 사치코가 그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 ‘나’는 그런 사치코의 결정을 남 얘기 듣듯 하고 사치코는 ‘나’의 진지하지 못한 반응을 나무란다. 그 후 사치코는 ‘나’보다는 시즈오에게 끌린다. 뭔가 슬픔을 품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시즈오는 뚜렷한 직업 없이 하루 하루를 소일하며 친구들에게 사심 없이 마음을 내어준다. 그런 시즈오에게 사치코는 ‘나’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사치코가 말한다.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시즈오가 말한다. “그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거야.” 시즈오의 말은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척 한다. 약간의 선의를 품은 채 ‘나’는 가급적 세상으로부터 벽을 치고 방해받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연애도 ‘나’에게는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더 가깝게 지내자 ‘나’는 그런 사치코의 변화를 기꺼이 수긍한다. 미야케 쇼 감독의 세 번째 장편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2018)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이 원작이며 요절한 작가가 서른 한 살에 쓴 작품을 역시 서른 한 살의 영화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으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소거하고 좀 더 무채색에 가까운 감정으로 옮겨낸 이 청춘의 이야기에서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환희와 피로는 불가해한 형태로 뒤엉켜 공존한다.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파트타임 직업으로 호구를 삼고 미래에 대한 별다른 계획도 없으며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출구 없는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전형이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고 있는 상태에서 바깥으로부터 오는 행복의 신호에 부드럽게 반응한다. 사치코는 권태와 무의미의 극단에 삶이 처해 있는 듯한 서점 사장과의 관계를 가만히 견디면서 ‘나’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구애의 의사를 전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가족 관계가 화면에 상술되지 않는 사치코는 ‘나’와 시즈오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며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밤새 바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출 때 무리에서 빠져나와 DJ 앞에서 홀로 자기만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치코의 모습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순간의 농도를 제공하는 관계의 즐거움을 기꺼이 만끽하며 동시에 자기만의 영역을 세심히 지키는 행동을 보여준다. 시즈오는 딱히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는 청년인데 길거리에서 경찰 심문에 걸려 살짝 모욕을 겪어도 실실 미소를 흘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직업소개소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옆 자리 사람이 건네는 사탕 한 알을 물고 천진한 웃음을 짓는 만사태평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그는 치명적인 병을 앓는 어머니가 있다. 가끔 술을 마시며 심드렁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들 모자는 필사적으로 절망을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그의 병상을 정리하면서 시즈오는 생각한다. “병원 냄새를 참을 수 없다. 친구들과 단골로 갔던 장소의 냄새를 기억해내고 싶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사치코와 시즈오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행복의 징후가 보이면 반갑게 그걸 껴안는 두 사람과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잠시 충만한 그 행복의 흐름에 무심한 척 몸을 맡기는 사람이다. ‘나’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간섭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서점에서 책을 훔쳐가는 손님의 행동을 보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나’의 태도에 동료 점원은 분개하지만 동료점원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태연하던 그가 사장과 바람피운다며 사치코를 비아냥거리는 동료점원의 말을 참지 못하고 혼내주는 건 누군가를 함부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무례에 ‘나’가 예민한 성격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태도만으로 그의 삶이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사치코와 시즈오가 둘이서만 캠핑을 떠난 시간에 홀로 거리를 산책하던 ‘나’는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누군가로부터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나’의 앞에 시즈오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온 시즈오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나’는 사과가 담긴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내민다. ‘나’를 좋은 아이라고 칭찬해주며 떠나는 시즈오의 어머니는 ‘나’ 앞에서 보인 호기로운 태도와는 달리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어가며 울적한 뒷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즈오의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켜 의식불명으로 쓰러진다. 이런 장면들에서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른 등장인물들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그들의 다면성을 이해시키는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이 드러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별 다른 사건 없이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행복한 순간만 서로 주고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일상의 순간들을 늘일 수 있는 만큼 늘이는 영화이다. ‘나’와 사치코와 시즈오가 바에서 밤새우며 노는 장면은 거의 7분 분량을 넘어서는데 별다른 사건 없이도 그들이 노는 모습만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는데도 화면에는 활기와 매력이 넘친다. 심지어 세 사람이 편의점 내부를 돌며 먹을거리와 마실 것을 사는 평범한 장면에서도 카메라와 인물의 움직임은 서로 조응하며 자그마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밤새워 논 다음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곤죽이 되어 졸고 있는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희열과 상실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자잘한 일상을 궁극의 낙관적 기운으로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할 것처럼 즐기고 그 다음에 오는 허무의 기운을 부드럽게 응시하며 껴안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각자의 존재를 스스로 보호하면서 상대에게 부드러운 선의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의 후반부, 늦은 밤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시즈오는 다음날 첫 기차를 타기 전까지 ‘나’와 사치코와 함께 단골 바에 가서 늘 그랬듯이 즐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슬픈 상황에서 그들은 함께 있음으로써 그 시간들을 견딘다. 다음날 일찍 시즈오과 집을 나설 채비를 할 때 그런 시즈오의 행장을 도와주는 ‘나’와 어둠 속에서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치코의 옆모습을 잡는 카메라는 기쁨도, 슬픔도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나누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여준다. ‘나’역의 에모토 타스쿠, 사치코 역의 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 역의 소메타니 쇼타 세 배우는 특정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특정 역할로 특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적 배우의 매력을 조용히 웅변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스타일로 인상적인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때의 표정과 동작으로 그들 각자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감독 미야케 쇼를 만났을 때 그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예견하는 나의 건방진 덕담을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하는 것은 영화를 준비하고 찍으며 동료들과 누릴 수 있는 시간의 행복을 음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촬영하면서 그는 배우들과 최상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 모두 영화 촬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회상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행복에의 추구가 영화 바깥의 과정에서도 관철되었다는 그의 말은 만남과 이별이 늘 한 쌍을 이루는 인생의 궤도에서 슬픔을 견디면서도 기쁨을 폭발적으로 나누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실감하게 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젊다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게 만든 드문 활기의 영화이다.
감독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친구 주용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남자 화장실에 가는 인간이고, 가슴달린 남자”이다. 스스로를 양성구유자라고 밝히는 이 친구는 자신을 영화로 찍어달라하고, 영화는 주용과 룸메로 지내면서 그의 일상과 인터뷰를 따라가며 시작된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이 탄로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중학교 시절이나,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숱한 상처를 겪었을 주용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 평범하기 >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성소수자에 대한 다큐로 보인다. 그런데 한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의 영화가 시작하고 절반 즈음을 넘어서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주용의 룸메이트로 지내던 감독이 그 집을 나와 이사를 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생긴다. 2년 여간의 촬영본을 편집하던 감독은 주용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고, 사진 속 주용의 모습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에 기록된 주용의 모습과 카메라 앞에서 고백한 주용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속 주용은 영락없는 남자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감독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관객도 주용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혹은 이 영화 전체가 픽션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감독 역시 “주용이가 소재를 제공하고, 내가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는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란스러움과 실망을 느낀 감독은 주용에게 말을 안 한 것이 있는지, 촬영된 부분 중 사실이 아닌 것이 있는지 추궁하고, 카메라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감정의 골은 깊어진다. 이때부터 < 평범하기 >는 성소수자라는 한 인물을 떠나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 실재와 상상, 주관적 기억과 객관적 기록,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어딘가에 위치한다. 감독은 양성구유자인 주용에서, 소수인권자인 주용이로, 그리고 다시 내 친구 주용이에 대한 영화로 편집하는 것으로 이 작업을 마무리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주용이의 내레이션으로 끝맺는다는 것이다. 이 다큐를 시작한지 4년이 지나 영화가 완성될 즈음 쓰여진 주용의 내레이션에서 그는 “이제껏 누군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 믿었던 적은 없다. … 나는 잊혀지고 싶다. 나는 최대한 평범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대로 감독이 주용이라는 친구를 만나 그를 알게되고,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가, 다시 멀어지고, 또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친구로 그를 이해하게 되는 일련의 시간을 일기처럼 써내려갔다. 하지만 마지막 주용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볼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 평범하기 >는 감독의 시점이 아닌 주용의 시점으로 다시 영화를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영화는 별다른 장치 없이 시간순으로 편집되었고, 마치 일기를 쓰듯 감독은 촬영이 진행된 시간을 화면에 표시해두었다. 대신 주용의 인터뷰를 보충해주듯이, 주용의 어릴 적 흑백사진을 자신의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관객인 우리는 이 사진 속 주용의 모습이 인터뷰에서 스스로 지어낸(혹은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를) 주용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내밀하고 꺼내어놓기 어려운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카메라 앞에서 꺼내어놓는 주용의 ‘고백’에서 진정성이나 진심, 공감 대신 의구심이나 의혹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반부는 감독이 주용과 그의 주변을 촬영하거나 가끔은 주용이 카메라를 들고 감독을 찍는다. 그러니까 전반부는 감독이 보는 주용이거나, 주용이 바라보는 감독의 모습이 담겨있다. 하지만 편집실에 앉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여기에서부터 감독 자신도, 관객도 주용의 이야기가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은 제3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져 있다. 이때부터는 두 사람이 바라보는 서로의 모습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제3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렇게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 평범하기 >는 감독의 감독이 바라보는 주용, 그리고 주용이 바라보는 감독 등 누군가가 바라보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읽힌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주용의 고백이나 러브레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카메라를 향해 이야기하는 주용의 인터뷰가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가라는 경계를 흔들어버리기 때문이고, 영화 역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밝혀내기보다는 그 경계의 모호함, 그 경계의 불명확함에 더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기록’한(했다고 믿어지는) ‘다큐’ 안에 담긴 ‘실재’하는 인물을 통해 성수자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고, 차이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대신 <평범하기>는 좀더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과연 우리가 누군가/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야기된 자기’를 벗어나는 건 가능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