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카페
- 감독
- 미구엘 코핸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호라시오 살간, 레오폴도 페데리코
코로나가 가장 심각하던 시기,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 간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고, 국민들은 일부 격리되며 대부분의 문화 활동은 중지되었다. 많은 영화들은 부쩍 한산해진 극장가를 보며 개봉을 미루던가, OTT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 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의 신작 < 테넷 >은 이 시기 유일하게 극장에서만 공개된 텐트폴 영화였다. 놀란과 파트너십을 이어오던 워너는 가장 OTT 공개(및 동시 개봉)에 앞장서던 배급사였고, 그래서 놀란의 결정에 난감했던 게 사실이다. 몇 번의 연기를 거쳐(다른 작품들이 창고 영화가 되거나 TV 영화가 되어가는 속에서도) <테넷>은 코로나 속 극장에서 고군분투 블록버스터로 위용을 보였지만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할리우드 메이저에 진입했던 < 인썸니아 >부터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놀란과 워너의 관계에 금이 간 건 바로 이때였다. 놀란은 워너의 소극적인 홍보를 아쉬워했고, 워너는 놀란의 비협조적인 선택에 섭섭해 했다. 결국 놀란은 워너를 떠나 차기작을 유니버셜과 하기로 결정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 프로젝트는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실제 인물을 다룬 전기물이었다. 전 세계에 핵이란 새로운 빛을, 그리고 동시에 두려운 공포를 안겨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원작 제목이다)'이자 천하의 둘도 없던 천재,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 < 오펜하이머 >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놀란과 유니버셜의 첫 협업물인 <오펜하이머>는 바로 놀란의 전 파트너였던 워너의 최고 기대작인 그레타 거윅의 < 바비 >와 맞붙게 되었고, <바비>가 <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를 넘어 워너의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바람에 <오펜하이머>는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한번도 1위를 기록하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역대급 흥행을 찍은 경쟁작의 방해와 3시간이란 상영시간의 압박, 누드와 욕설로 인한 R등급 등 숱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 조커 >의 뒤를 이어 R등급 영화사상 두 번째로 흥행한 작품이 되었고, < 보헤미안 랩소디 >가 가지고 있던 전기물 최고 흥행작 타이틀도 빼앗았으며, < 인셉션 >을 넘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리지널 작품으론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루드비히 고란손 안타깝게도 필생의 소망(!)이던 < 듄 > 작업 위해 자리를 비운 한스 짐머가 이번에도 그 속편을 위해 바쁜 관계로, 놀란은 전작 <테넷>을 함께 했던 루드비히 고란손을 다시 한 번 음악적 파트너로 맞이한다. 스웨덴 출신의 고란손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80년대생 영화음악가들 중 하나로,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베토벤의 이름을 딴(그의 아버지는 블루스 기타의 신 알버트 킹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 그의 음악적 소양은 기타 교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톡홀름 왕립 음악학교를 졸업한 고란손은 미국 USC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의 영화과에 다니던 라이언 쿠글러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고란손은 영화음악가 테오도르 샤피로 밑에서 견습 생활을 이어가며 시트콤 <커뮤니티>로 자신의 첫 음악 크레딧을 얻는데, 여기서 차일디쉬 감비노로 활동하는 배우 도널드 글로버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이 둘과의 만남은 고란손에게 < 블랙 팬서 >의 오스카와 “This Is America”의 그래미라는 영예를 안겨다주었다. 영화음악과 힙합이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두며 화려한 커리어를 맞이한 고란손의 다음 스텝은 바로 놀란과의 계속된 협업이었다. 루드비히 고란손은 익숙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데 탁월한 식견과 해석력을 보여 왔다. 그래서 빌 콘티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록키 발보아의 세계에서 힙합 리듬으로 새로운 적자 크리드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성공했고, 마블의 고전적이고 영웅적인 심포니가 득세하는 전장에서도 리얼한 아프리칸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이식했으며,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가 굳건히 세워놓은 갤럭시 사가에서 향토적이고 이국적인 베이스 리코더를 내세운 색다른 만달로리안 사운드로 새로운 여정의 진군가를 완성해냈다. 랜디 뉴먼이나 마이클 지아치노가 꽉 잡고 있던 픽사 애니메이션에서도 흥분하면 래서 판다가 되는 틴에이저의 고충을 끌어안은 그의 음악은 반짝반짝 빛났다. 엔트로피와 양자역학이 판을 치는 놀란과의 첫 만남에선 데이빗 줄리앙과 한스 짐머가 구축해놓은 미니멀한 사운드에서 더 나아가 쉽게 시도하지 않는 실험적인 백마스킹을 통해 앞뒤가 똑같은 회문 구조의 인버전 스코어를 현실에 구현해냈다. 고란손은 감독들이 요구한 사항을 받아들이되 기존의 존재하던 스타일을 반복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낸다. 이게 수많은 영화음악가들이 데뷔하고 활동하는 할리우드에서 빠른 시간 안에 그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인셉션>에서의 에디트 피아프, < 인터스텔라 >에서의 파이프오르간, < 덩케르크 >에서의 시계초침과 엘가, 그리고 <테넷>에서의 인버전된 백마스킹이 핵심적인 사운드 키워드로 자리했던 놀란의 영화음악답게 이번 <오펜하이머>에서 놀란이 영화음악가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여러 층위를 가진 복잡한 내면의 천재였고, 일반 전기물처럼 쭉 한사람의 일생을 따라가기보단 원자력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까지 세 가지 시간 선을 엮어낸 다층적인 구조라 레이어 쌓기 가장 좋은 악기인 바이올린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고란손 역시 아름답고 환상적인 선율의 비브라토를 연주하다가도 바로 브릿지로 격한 소리를 만들거나 빠르고 예민한 트릴이나 미끄러지는 글리산도로 신경질적이고 공포적인 효과로 돌변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야말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들면서 가졌던 이중적인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악기로 받아들였다. 아내 세레나 맥키니가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고란손은 놀란이 던진 이 아이디어를 맘에 들어 했고, 1인칭으로 묘사된 시나리오 속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바이올린으로 극대화 시킬 방법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압도적인 건 바로 오펜하이머가 가진 고뇌와 무게감, 일반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천재성과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한 큐 안에서 스트링 세션이 변화무쌍하게 4마디마다 템포가 변화해 최대 21번의 빠르기가 가중되는 'Can You Hear The Music'이나 'Destroyer Of Worlds'같은 트랙이다. 처음 시작보다 무려 3배나 빨라지는 연주는 한 테이크 안에 라이브가 불가능하다 생각해 후반 믹싱적 테크닉을 시도하려했으나 아내의 격려와 시도로 실제 연주를 사흘에 걸쳐 이뤄냈으며, 이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제는 시작돼 멈출 수 없는 핵 개발의 체인 리액션을 표출한 방식이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상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트리니티 실험에 흘러나오는 8분에 이르는 대곡 'Trinity'는 폭발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고조되며 심장을 마구 옥죄여오는 킬링 트랙인데, 버나드 허먼이 울고 갈 정도로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현의 비명들 아래 깔리는 웅장한 관악기와 어두운 일렉트릭의 조화는 폭발 순간 침묵에 휩싸이며 먹먹함을 선사한다. 버튼을 누르면 결코 이전으론 되돌아갈 수 없는 결과를 낳는 핵의 운명처럼, 이 모든 소리의 파편들이 쌓여 거대한 침묵을 완성한 건지 모른다. 여기에 가이거 계수기를 비롯한 다양한 펄스파의 소리들과 군중의 발소리를 채집한 효과들이 어우러지는 아방가르드한 공명감은 핵개발 이후의 바뀐,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세상의 연쇄적인 반응을 담아내는 듯 불길하고 무섭게 다가온다. 간혹 섬세한 하프와 간헐적인 피아노가 덧입혀지며 아내 키티와 동료 과학자들 간의 신뢰를 구축하기도 하지만, 독일과 소련과의 원폭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며(또 작중 후반 증인들의 증언이 거듭됨에 따라 불리해지며) 그 초조한 긴장감을 담아내는 규칙적인 초침소리와 금속성의 엠비언트, 현악 오스티나토의 질주감은 별다른 화려한 비주얼 없이도 청각적으로 스크린을 압도해버린다. 기억에 남는 명징한 테마들은 없지만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켜켜이 쌓이는 현악의 구조와 강도는 점점 완성되어가는 원폭을 보듯, 증언이 쌓이며 점점 인물들을 구체화 시키는 청문회를 보듯 단단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런 강렬함에도 고란손은 스코어에 드럼이나 팀파니 같은 전통적인 타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활로 현을 때리거나 샘플링된 소리들로 효과를 주었을 뿐이다. 버나드 허먼의 신경질적이고 풍부한 스트링에 나인 인치 네일의 공감각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포용한 채 필립 글래스나 막스 리히터의 미니멀리즘과 요한 요한손의 드론 음악을 결합시켜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현대음악처럼 풀어낸 루드비히 고란손의 추상적이고 과할 정도로 시끄러운 사운드 임팩트는 핵이란 거대 담론이 가진 여러 방향성과 폭발력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층위의 감정 스펙트럼을 방사형으로 내뿜어낸 비장의 OST다. Track List 1. Fission 2. Can You Hear the Music 3. A Lowly Shoe Salesman 4. Quantum Mechanics 5. Gravity Swallows Light 6. Meeting Kitty 7. Groves 8. Manhattan Project 9. American Prometheus 10. Atmospheric Ignition 11. Los Alamos 12. Fusion 13. Colonel Pash 14. Theorists 15. Ground Zero 16. Trinity 17. What We Have Done 18. Power Stays in the Shadows 19. The Trial 20. Dr. Hill 21. Kitty Comes to Testify 22. Something More Important 23. Destroyer of Worlds 24. Oppenheimer
아홉 살 마사오에게 여름방학이 찾아온다. 그러나 마사오는 즐겁지 않다. 친구들은 저마다 산으로 바다로 가족들과 떠나는데, 부모 없이 일하는 할머니와 사는 마사오에겐 함께 떠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공놀이할 친구도, 학원에 갈 급우도 없고, 심지어 선생님마저 일찍 퇴근하는 여름방학이 마사오에겐 못내 섭섭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같이 떠날 수 없다면 혼자 가면 된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빠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날아든 엄마의 택배에 적힌 주소 덕분이었다. 여름방학 숙제와 그림일기를 넣은 가방을 챙겨 든 마사오는 엄마를 찾아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으니 얼마 못 가 동네 양아치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만다. 이를 해결해준 건 이웃집에 살던 씩씩한 아줌마. 혼자 엄마를 찾으러 가는 마사오를 걱정하던 그녀는 자신의 전직 야쿠자 백수 남편 기쿠지로를 보호자로 붙여준다. 그러나 그는 마사오의 엄마를 찾아주기는커녕, 모처럼 자신이 얻은 여름방학을 만끽하기 위해 더 열을 올린다. 경마장과 술집에서 돈과 시간을 탕진하고 마사오를 한번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윽박지르고 욕과 손부터 먼저 나오는 그의 성질 때문에 잠시도 편안할 순간이 없다. 이에 대한 뒤치다꺼리는 오롯이 어른스런 아이 마사오의 차지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날 길 위에서 더위를 뒤로 한 채 추억과 여정을 공유한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력과 피의 의미를 묻는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공세가 지겨워 기타노 다케시가 차기작으로 폭력이 전무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이를 솔직히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는 <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와 < 키즈 리턴 >에 이어 필모에서 가장 잔잔하고 따뜻한 로드무비 < 기쿠지로의 여름 >을 8번째 작품으로 들고 나왔고, 이 영화는 제52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을 비롯해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대척점의 두 사람이 같이 여행을 떠나며 성장하고 교류해간다는 이야기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지만, 이 평범한 이야기에 기타노 다케시의 색채가 덧칠돼 독자적인 매력을 갖췄다. 영화는 기존의 관습적인 문법과 틀을 거부한 채 투박하고 거칠게 붙어있지만, 특유의 만화적이고 생뚱맞은 점프와 관조적인 시선을 통해 독특한 리듬과 유머를 부여하며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적인 삶의 동질성과 유대감을 포착해냈다. 물론 이전의 < 그 남자 흉폭하다 >나 < 소나티네 >, < 하나비 >에서 보였던 단초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며 여전히 불완전하게 연소한 채 남아 그 근간을 살짝 비추는데, 그런 지점들이 단선적일 수 있는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대오각성을 가져다준 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여행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에 있어 이런 방학과도 같은 휴식이 만들어준 치유와 관계의 소중함만큼은 오래 남아 두고두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여기에 그럴듯한 악센트를 남겨주는 건 (지금은 비록 깨졌지만) 기타노의 뛰어난 음악적 파트너 히사이시 조의 존재감이다. 기타노 다케시와 지브리의 영화음악 1950년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난 히사이시 조는 국립음악대학의 학생이던 시절부터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음악에 심취했다. 본명은 ‘후지사와 마모루’지만 무대에서 쓰기 위한 예명을 위해 ‘퀸시 존스’의 일본어식 발음에서 따와 ‘히사이시 조’란 이름을 만들어냈다(퀸시의 일본어식 발음인 ‘쿠이시’를 히사이시(久石)라고 읽은 것에 존스의 애칭인 조 역시 한자어 음독(讓)을 붙여 완성했다). 졸업 후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뉴 사운드 인 브라스의 오케스트라 편곡을 맡는 한편 틈틈이 원더 시티란 회사를 세워 다양한 앙상블과 솔로 작업을 병행하며 독자적인 사운드를 완성해갔다. 그의 지명도가 높아지게 된 건 1983년 음반사로부터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이미지 앨범의 작곡을 제안 받았을 때부터다. 원래는 YMO출신의 호소노 하루오미가 음악을 맡기로 했지만, 작업한 곡이 영상과 어울리지 않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과감히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 히사이시 조를 선택한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그가 작곡한 이미지 앨범을 듣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후로도 콤비를 이루며 < 천공의 성 라퓨타 >, < 이웃집의 토토로 >, < 마녀 배달부 키키 >, < 붉은 돼지 >, < 모노노케 히메 >, < 하울의 움직이는 성 > 등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음악을 도맡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음악가 반열에 올라선다. 1992년에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을 위한 테마송을 작곡하며 총책임자로의 역할도 수행했고, 야마다 요지 감독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실사 영화에서 탁월한 멜로디를 선사했다. 2001년에는 직접 음악영화 < 콰르텟 >의 연출을 맡기도 했고, 프랑스 판타지 <엄지 동자>의 음악을 담당하며 세계로 활동반경을 넓혀 박광현 감독의 < 웰컴 투 동막골 >과 김종학 피디의 < 태왕사신기 > 그리고 중국영화 <이모의 포스터모던 라이프>와 <해양천국>, <삼장법사의 모험>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히사이시 조가 기타노 다케시와 다섯 번째로 작업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들의 파트너쉽 중 가장 큰 변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전까지의 영화들이 미니멀한 색채를 짙게 품고 절제된 테마를 반복, 변주해가며 미묘한 변화를 통해 캐릭터의 심리와 극적인 전개를 다루고 있다면, 이 영화에선 아예 그런 방식을 포기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선율의 테마를 정면에 배치해 분위기를 일신한 것이다. 대사와 음악이 없을수록 순수한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하던 기타노 다케시였기에 <그 남자 흉폭하다>나 < 3-4x 10월 >같은 초기작들에선 영화음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사이시 조를 만나 작업하며 영상이 가진 매력을 200% 끌어올려주는 음악의 효과를 체험하고 나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음악을 의뢰할 때 항상 “자신의 작업이 아니다”라며 히사이시 조에게 전적으로 맡기던 기타노도 이번 <기쿠지로의 여름>만큼은 제작 전에 “피아노 위주의 부드러운 곡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주문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구가 있었다. 히사이시 조와 첫 만남 자리에서 “영화에는 반드시 음악이 들어갈 자리가 있죠? 그런 곳의 음악은 일체 뺍시다”라고 대놓고 밝혔던 그였기에, <기쿠지로의 여름> 음악 쓰임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모한 셈이다. 음악적 사용에 대한 혜안과 자유를 얻은 지금의 기타노 다케시는 더 이상 히사이시 조가 없어도 이케베 신이치로나 스즈키 케이지, 카지우라 유키, 후지카와 쇼고 등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을 진행할 만큼 개안했다. 히사이시 조 로드무비답게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 영화답게 음악은 에피소드보다 주로 길 위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주된 테마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Summer’라는 곡인데, 영롱한 피아노는 도로에 갓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경쾌하고 시원한 스트링은 한 줄기 바람처럼 산들산들 영혼을 간질이며 이들의 여정에 부담 없는 미소와 흐뭇함을 안겨준다. 히사이시 조의 마력이라면 절제됐지만 명료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있는데, ‘Summer’는 그 효과가 가장 극대화돼 발휘된 곡이기도 하다. ‘Going Out’과 ‘Mad Summer’, ‘Angel Bell’, ‘River Side’와 ‘Summer Road’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영화 내내 활용되었다. 빼놓을 수 없는 트랙이라면 마사오와 기쿠지로가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흐르는 ‘Real Eyes’를 꼽을 수 있는데, 잔혹할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해 서늘한 스트링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선율이 만만치 않은 삶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런 풍부한 서정 속에 가려진 외로움과 허무함을 담아낸 감성은 이전 작품들 속에서 언뜻언뜻 등장했던 부분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쉽게 함몰되지 않는 건 평화롭고 여유로운 사운드로 이를 치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전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비슷하면서 다른 부분이기도 한데, 관조와 냉소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Two Hearts’와 ‘Mother’가 그런 정서적인 분위기의 큐들이다. 그 외 영화에서 마사오가 꾸는 악몽에 등장하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Nightmare’와 또 다른 아름다운 테마 ‘Kindness’나 ‘The Rain’도 잊을 수 없는 트랙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올해 < 바람이 분다 >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은퇴만 벌써 5번째지만). 기타노 다케시 또한 이제 다른 작곡가들과 호흡을 맞추는데 어색하지 않다. < 동경가족 >과 < 작은 집 >을 함께 한 야마다 요지 감독은 여든을 훌쩍 넘겼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듣게 될 기회는 점차 줄어드는데 반해 그의 새로운 영화음악을 기다리게 되는 심정은 늘어만 간다.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AMPAS) 멤버로 선출되고, 2015년 완공 예정인 새로운 나가노 시민 회관의 예술 감독으로도 뽑혀 더욱 바빠질, 일본의 현존하는 최고 마에스트로 중 하나인 그의 신작을 고대해본다. ‘Summer’ Track List 1. Summer 2. Going Out 3. Mad Summer 4. Night Mare 5. Kindness 6. The Rain 7. Real Eyes 8. Angel Bell 9. Two Hearts 10. Mother 11. River Side 12. Summer Road
뜨거운 태양 아래 빨간 무스탕이 아리조나 사막을 가로질러 달린다. 흙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차 안 라디오에서 흐르는 곡은 페기 리의 ‘It’s a Good Day’. 경쾌하고 발랄한 스윙곡의 희망찬 가사와 달리 운전자의 상황은 그리 좋아보이질 않는다. 초조하게 담배를 물어 피우는 왼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감겨있고, 며칠째 잠을 못 잔 듯 운전하며 꾸벅꾸벅 졸기까지 한다. 각성제를 쏟아 붇고, 연신 라디오 채널을 돌려 록과 재즈, 성악까지 다양한 곡들로 근심과 피로를 지우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설상가상 펑! 소리와 함께 본네트에서 흰 연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고무 밸브가 더위를 참지 못하고 그만 터져버린 것이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는 사막 한 가운데 갈래 길에서 잠시 멈춰 서는데 그제야 불길한 듯, 음산한 듯 스코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더위를 상징하는 색소폰 연주에 짜증을 한 가득 품어 낸 하모니카 소리가 어우러진,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곡조 같다. 서부극의 한 자락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이 음악은, 맞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스타일이다. 올리버 스톤은 이런 기시감을 위해 이 거장을 불러왔다. 스파게티 웨스턴 사운드의 선각자. 정통 서부극의 정의와 용기, 사랑과 프론티어 정신 따윈 개나 줘버리고 암투와 음모, 배신과 폭력 그리고 조소가 판을 치는 조잡스런 세계관에 잔인하면서도 위트 있는 음악을 부여한 그는 그야말로 < 유턴 >의 음악에 최적화된 작곡가였다. 엔니오 모리꼬네 엔니오 모리꼬네. 더 이상의 어떠한 설명도, 찬사도 필요치 않은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영화음악가. 전설 중의 전설이자 아직도 현업에서 열심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작업을 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마에스트로다. 비발디와 로시니, 베르니와 푸치니 이후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자 히트상품으로 1961년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50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맡으며, 전 세계적으로 50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는 국경을 초월해 수많은 나라에서 작업했고(심지어 막부 시대를 다룬 일본 NHK 대하서사극 <무사시>의 음악도 담당했다), 열렬한 관객들의 찬사와 감동, 전율을 이끌어냈다. 아카데미 음악상에 5번 후보로 올랐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며 수상하지 못했지만, 2007년 아카데미는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안겨주며 그 공적을 인정했다. 그의 음악은 천상의 하모니와 아름다움을 가진 동시에 실험적이고 키치적이며,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이념과 국가에 소속되지도 않는다. 드라마와 코미디, 시대극은 물론 갱스터와 SF, 공포, 웨스턴, 전쟁, 액션과 지알로나 성애영화에서도 그의 음악은 등장한다. 고전에 능숙하며 현대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창의적인 유머와 과감성, 천부적인 멜로디 감각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경이적인 작업 속도와 양이다. 53년간 530편에 육박하는 작품 수만 보더라도 산술적으로 한해 평균 10편씩 50년간 개근해왔다는 건데, 실력과 재능 못지않게 부단한 노력과 근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턴>은 그의 필모 중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선율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준 그의 초기작과 유사한 비장의 OST다. < 닉슨 >의 실패 이후 올리버 스톤 감독은 가볍고 작은 소품으로 그 정치적인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했다. <유턴>은 그런 재기발랄함이 드러나는 영화로 숀 펜과 닉 놀테, 제니퍼 로페즈, 존 보이트, 빌리 밥 쏜튼, 파워스 부스, 클레어 데인즈, 조아퀸 피닉스 등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과 존 리들리의 단단한 각본을 가지고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단 하루 동안에 작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이 영화는 마치 2시간분의 머피의 법칙을 보는 듯한데, 어떻게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를 되네일 만큼 지독하게 꼬여가는 점입가경의 상황이 재미를 부추긴다. 자동차 고장으로 인해 사막 한가운데 외딴 마을로 들어선 남자는 마을의 아름다운 여인과 만나며 이에 얽힌 욕망과 질투, 과거의 복잡한 사연까지 안게 되고, 이 잠재적인 폭탄의 심지가 점점 타들어가며 서스펜스와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거기에 사막이 주는 강렬한 더위까지 결합하며 불쾌지수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데, 그 파멸과 비극이 그리 고통스럽진 않다. 오히려 씁쓸하고 텁텁한 뒷맛에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사랑과 돈, 그 두 가지로 인해 발생하는 어리석은 인간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로버트 리차드슨의 과도하지만 감각적인 촬영과 < 도어즈 >와 < 올리버 스톤의 킬러 >를 찍었던 감독답게 올리버 스톤의 센스 넘치는 음악 선곡이 빛을 발하며 이 지독한 악몽과도 같은 영화에 구원의 빛을 비추고 있다. 유턴 엔니오 모리꼬네의 선율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아리조나 사막의 숨 막힐 듯한 무더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스파게티 웨스턴과 지알로, 좌파 영화로 대표되던 그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초기 스타일이 정확히 한 세대를 거슬러 되풀이 되고 있다. < 미션 >이나 < 시네마 천국 >처럼 인상적인 테마라 할 주된 선율이 관객들에게 각인되지 않지만, 우수 어린 하모니카나 구슬픈 여성의 허밍, 나른하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일렉 기타, 지역색이 묻어나는 벤조와 뇌쇄적인 색소폰, 차갑기 그지없는 피아노와 팬파이프 등 그가 즐겨 쓰는 모든 악기들이 총동원돼 저마다 음색을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올리버 스톤은 특히나 사막이라는 공간의 작은 마을 ‘수피리어’를 세팅하며 마카로니 웨스턴 속 무법천지와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과감히 엔니오의 색채를 빌렸는데, 이렇게 짜증스런 음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편하고 불유쾌한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U-turn’과 ‘Hallucination Walk’, ‘End of Sheriff’, ‘Fall and Rse’ 등이 대표적인 트랙으로 전위적이고 입체적인 사운드의 진수를 선보인다. 그의 아름다운 선율만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겐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그의 초기 음악 스타일을 알고 있는 팬들에겐 이런 전복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면모가 반가울 수도 있을 것이다. 웨스턴과 스릴러, 멜로와 블랙 코미디를 아슬아슬하게 경유하는 <유턴>의 퓨전적인 미학은 또 다른 환희와 감동을 던져준다. 삽입곡에 있어서도 대단한 사치를 부렸다. 사운드트랙엔 그 중 10곡이 엄선돼 실려 있는데 모두 깨알같이 빛나는 명곡들이다. 그리고 그 곡들은 대체적으로 반어적으로 사용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한 페기 리의 ‘It’s a Good Day’가 영화의 앞과 뒤를 멋지게 장식하며 아이러니한 즐거움을 주었다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컨트리송이나 감미로운 블루스, 발라드와 흥겨운 홍키통크는 주인공의 재수 없는 일진을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낸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도시 속에 숨겨진 욕망과 잔악한 배반의 드라마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셈이다. 새미 스미스와 패치 클라인이라는 걸출한 국보급 두 여성 컨트리 싱어를 비롯해 자니 캐쉬와 웹 피어스라는 쟁쟁한 남성 컨트리 스타까지 배치해 남서부의 정서를 기가 막히게 담아낸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Your Cheatin’ Heart’, ‘Honky-Tonk Girl’, ‘Ring of Fire’, ‘More and More’ 등은 기이하게 비틀린 마을 분위기와 달리 달콤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영화 <돈 주앙>에 쓰였던 브라이언 아담스의 주제곡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en’을 라틴 버전으로 부른 ‘La Mujer Que Amas’를 비롯해 글로리아 린의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I wish you love’와 ‘Speaking of Happiness’ 등 감미로운 곡들이 삽입돼 영화를 중화시키거나 아이러니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이를 모두 마무리 짓는 건 엔니오 모리꼬네의 처연한 ‘Grace’다. 흐느낌에 가까운 구음과 팬파이프, 신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듯 부유하는 일렉 기타의 선율이 모든 고통과 사건을 치유한다. 요즘 올리버 스톤이 다소 주춤한 길을 걷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나이로 구순이 거의 다 되어가는 엔니오 모리꼬네는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영화적 동지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신작 <커러스폰던스 The Correspondence>의 음악작업에 들어갔고, 자국의 TV시리즈나 TV영화음악도 꾸준히 담당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달(6월) 중순에는 미국에서 콘서트가 예정돼 있고, 내년에는 프랑스에 투어가 잡혀있는 등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실천 중에 있다. 부디 그가 오래 오래 몸 건강히 활동해서 공로상 받고도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으면 좋겠다. Track List 1. It's a Good Day - Peggy Lee 2.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 Sammi Smith 3. More and More - Webb Pierce 4. La Mujer Que Amas - Pedro Fernandez 5. I Wish You Love - Gloria Lynne 6. Honky-Tonk Girl - Johnny Cash 7. Your Cheatin' Heart - Patsy Cline 8. Ring of Fire - Johnny Cash 9. Lonesome Town - Ricky Nelson 10. Speaking of Happiness - Gloria Lynne 11. Grace 12. U-Turn 13. Bobby 14. Hallucination Walk 15. Go On... Kill Grace 16. A Banjo in the Desert 17. Against 18. A Careless Sheriff 19. Dialogue with the Indian 20. Old Family Souvenirs 21. End of Sheriff 22. Fall And Rise 23. Grace (Repr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