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마
- 감독
- 에바 두버네이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데이빗 오예로워, 카르멘 에조고, 짐 프랑스, 트리니티 시몬, Mikeria Howard, Jordan Rice, Ebony Billups, Nadej k Bailey
번역 제목에 왜 오바마를 넣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흑인과 백인의 설전 도중에 오바마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있었기에 오바마가 하버드를 갈 수 있었고, 그래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지금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가장 손해를 보는 집단은 고등교육 받은 백인 남자라고, 아이비리그의 윈체스터 대학을 다니는 학장 아들 커트 플레처가 말한다. 어디선가 듣던 말 같다. 여성이나 특정 지역이나 소수자들이 지나치게 이득을 취해서 조용히 있는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다. 진짜 희생자는 우리다, 라고 떠드는 집단들은 어디에나 있다. 오바마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관심을 끌기 위한 시도로 보이고, < 캠퍼스 오바마 전쟁 >의 실제 내용은 대학 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이다. 2015년인 지금도 미국에 인종차별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1960년대 말에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 흑인혁명조직인 블랙 팬더 등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지만 세상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인용되는 스파이크 리의 < 똑바로 살아라 >(1989)가 나온 지 20년이 훨씬 넘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받은 < 캠퍼스 오바마 전쟁 >은 < 똑바로 살아라 >처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기는 했다. 더 이상 대중은 정치적 구호에 휘둘리지 않는다. 같은 흑인이라도 그들의 사회적 처지는 천차만별이다. 성과 인종의 유리 천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별적으로는 상층에 올라갈 수 있다. 이미 대통령이 흑인이다. 반만 흑인이고, 진보적인 인사이더이긴 하지만. 그런 점까지 생각해 보면 <캠퍼스 오바마 전쟁>이란 제목도 역설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린다. 흑인이 대통령이 될 정도로 미국은 인종차별이 사라진 나라다.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인종 간의 갈등과 전쟁은 지금 이곳,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 아이비리그의 대학에서 첨예하고도 유치하게 진행되고 있다. 흑인인 저스틴 시미엔 감독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분명하다. 다만 < 캠퍼스 오바마 전쟁 >은 일방적으로 누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흑인이 등장한다.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는 흑인 여학생인 샘 화이트는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디어 화이트 피플 Dear White People’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흑인학생연합 소속인 샘은 미국 사회의 흑백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치밀하게 전파한다. 백인들에게 전하는, 인종차별 이야기. 샘의 동료인 레지는 흑인학생연합을 이끄는 과격파다. 반면 흑인 학생들만 사는 기숙사인 암스트롱 파커 하우스의 학생 대표 트로이 페어뱅크스는 학생처장의 아들이고, 백인 학장의 딸과 연애를 하고 있다. 흑인 배신자라고 불린다. 코코 코너스는 베셋 하우스에서 백인과 연애하고, 리얼리티쇼를 통해 스타가 되기를 원한다. 코코는 ‘디어 화이트 피플’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동영상을 올려 인기를 얻는다. 그들의 사이에 있는 아웃사이더는 철학과 학생인 라이오넬 히긴스다. 동성애자이기에 고등학교 때는 흑인 남자애들의 괴롭힘을 더 심하게 당했고, 지금은 어디에도 끼이지 못한 채 기사를 쓴다. 마침 학교 신문인 버글에서 샘 화이트에 대한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한다. 샘과 흑인학생연합은 시위를 준비한다. 학장이 시도하고 있는, 기숙사를 무작위 배정하려는 방침에 반대하는 것이다. 흑인들만 있는 암스트롱 파커 하우스에서 20여 년간 쌓은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무수려 한다는 것이다. 갈등이 격화되자 샘과 흑인 학생들은 암스트롱 파커 하우스의 식당을 이용하는 백인과 외부인을 모조리 쫓아내 버린다. 식당에서 쫓겨난 커트 플레처는 매년 주최하는 할로윈 파티를 ‘흑인 코스프레’로 주제를 잡는다. 지금 학내의 최고 ‘또라이 집단’은 흑인들이라면서 공격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코코는 방송 매체인 파스티쉬에 들어가 인기를 얻기 위해, 파티를 블로그로 생중계하는 역할을 자원한다. 학생 대표 트로이도 주류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파티의 홍보문구를 작성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정치도, 사회도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 입장의 흑인들도 마찬가지다. 샘도, 레지도 오로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개인의 소소한 이익은 거대한 혐오 혹은 분노와 맞닥뜨리는 순간 힘을 잃고 방황한다. 흑인 코스프레 파티는 < 캠퍼스 오바마 전쟁 >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2010년 이후 미국 대학들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실제 사건이다. 백인들이 검은 분장에 힙합 차림을 하고 랩을 부르면서 프라이드 치킨과 퍼플 드링크를 마셔대는 파티. 현실의 대학생들이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캠퍼스 오바마 전쟁>에서 백인 남학생들은, 흑인이 소수자인 것을 이용해서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늘 차별당한다고, 희생자라고 떠든다고 생각한다. 흑인 코스프레 파티를 주최한 백인이 말한다. 이런 표현도 마음대로 못한다면 그게 바로 언론탄압 아닙니까? 나도 희생자라고요. 하지만 엄연히 차별은 존재한다. 학생처장은 아들인 트로이에게 말한다. 학장과 나는 1년 차이이고, 나는 최우등 졸업생이고 그는 보통 학생이었다고.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백인인 그는 학장이고, 나는 그의 아래에 있다고. 네가 백인 뒤를 따라다니면 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마침 커트도 트로이에게 말한다. 너는 장기판의 졸일 뿐이라고. 커트의 아버지인 학장은 지금 미국에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기껏해야 멕시칸 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인식은 그렇다. 아니 현실을 지우고, 자신들의 이익에 필요한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내고 지배한다. < 캠퍼스 오바마 전쟁 >은 그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격파 레지의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대항문화를 만들어 주류를 일깨우는 방식은 이미 과거의 것이다. 이미 주류는 너무나 세분화되었고 흩어져 있다. 필요한 것은 흑인 전체의 고함이 아니라 개인의 목소리다. 샘이 수업시간에 만든 무성영화는 정치적 선동으로 가득하지만 날것의 주장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샘이 카메라를 들고 흑인 코스프레 파티를 찍으면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자 관객이 공감한다. 흑인과 백인으로 태어났기에 한쪽의 입장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이 있고, 차별을 둘러싸고 다양하게 반응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캠퍼스 오바마 전쟁 >은 흑인 코스프레 파티를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주장은 명징하지만 수많은 목소리가 존재한다. 저스틴 시미엔은 다큐멘터리 아니 리얼리티 쇼 스타일로 대학 내의 자잘한 갈등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존재’에 대한 차별이 명백하게 있다. 나와는 다른, 우리와는 다른 어떤 존재들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악인들이 있다. 개인은 무력하지만 결국은 행동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마틴 루터 킹과 < 똑바로 살아라 >와 <캠퍼스 오바마 전쟁>이 말하는 것은 같을 수밖에 없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수장으로 하는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할리우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남부 지방의 인종 차별을 다룬 < 헬프 >(2011)가 큰 사랑을 받더니, < 노예 12년 >(2013)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 셀마 >(2014)는 1965년 투표권 획득을 위해 행진하던 마틴 루터 킹의 모습을 담아냈다. <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2013)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30년 넘게 8명의 대통령과 함께했던 집사의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노예제 폐지 당시의 역사를 다룬 < 링컨 >(2012)을, 타란티노는 흑인 히어로를 내세운 <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3)를 만들었다. 우연일까? 아니다. 레이건 시절 람보나 코만도 같은 이른바 ‘하드 바디’ 액션 영화들이 등장했듯, 이런 변화는 분명 ‘오바마 효과’의 결과이며,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의 이른바 ‘블랙 시네마’(black cinema)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는 있다. 스파이크 리, 존 싱글턴, 휴즈 형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블랙 시네마’가 현실을 토대로 사회적 모순을 때론 과격한 방식으로 파고들었다면, 오바마 시기의 이 영화들은 과거로 돌아간다. 노예 제도가 존재했고, 흑인들에겐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하녀와 집사와 유모로 살아가야 했던 시절. 이 영화들은 흑인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환기시키고, 그들의 투쟁을 복기하며, ‘오바마’라는 현재의 성과를 되새긴다. 이런 현상은 북미 대륙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서양 건너편, 영국에서 제작된 <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저스틴 채드윅, 2013)(이하 <만델라>)은 일종의 반성이다. 이 영화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이 자행되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를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을 통해 바라보면서, 영국의 폭력적인 식민 통치의 과거사를 바라본다. 만델라의 자서전을 토대로 꼼꼼하게 엮어나간 이 영화는, 한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이면서, 매우 선명하게 재현한 역사적 폭력의 영화이기도 하다. <만델라>는 자료 화면과 기록 사진들을 삽입하며,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픽션이 아님을 수시로 일깨운다. 영화를 보기 위해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우린 작은 당혹감에 부딪힌다. 나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넬슨 만델라’에 대해,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전기 영화의 ‘기본적 미덕’인,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적이며 개괄적인 설명에 충실하다. 말 그대로 ‘일대기’라고 할 수 있는 < 만델라 >는 유년기와 청년기에서 시작해, 변호사가 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리더로서 투쟁의 전선에 서고, 27년 동안 감옥에 갇히며, 1994년 76세의 나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만델라를 보여준다. 이 과정은 만델라의 개인사이며 동시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대사다. 만델라를 연기한 배우들: (상단좌측부터 시계방향) 대니 글로버(만델라), 데이빗 해르우드(미세스 만델라), 시드니 포이티에(만델라와 클레르크), 모건 프리먼(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전기 영화의 이런 서술 방식 지니는 가장 큰 난점은, 긴 시간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가다 보면 드라마의 밀도가 떨어지면서 지루한 스토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 만델라 >도 예외는 아니며, 때론 교육용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제작진과 저스틴 채드윅 감독의 ‘신의 한 수’는 만델라 역에 < 토르 > 시리즈(2011~ )의 헤임달이자 < 퍼시픽 림 >(2013)의 사령관인 이드리스 엘바를 캐스팅한 것이다. 이미 다른 선택들도 있었다. HBO의 TV 영화 <만델라>(1987)의 대니 글로버는 무난했다. 역시 TV 영화였던 <만델라와 클레르크>(1997)의 시드니 포이티에는, 포이티에 라는 인물이 할리우드에서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상징적인 캐스팅이었다. <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2009)의 모건 프리먼은 최고의 싱크로율이었다. 이드리스 엘바와 넬슨 만델라 그렇다면 이드리스 엘바는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의 진짜 모습에 가장 근접하려는 노력이다. 엘바의 만델라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알고 있는, 인자하고 온화한 이미지의 넬슨 만델라와 거리가 있다. 190cm의 키에 탄탄한 근육질인 엘바는(만델라는 185cm였다) 대중 앞에서 뜨거운 어조로 선동하고, 육체적 욕망 앞에서 솔직한 만델라를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긴 세월 동안 감옥 생활을 견디는 인동초 같은 이미지로 만델라를 바라봤던 일반적인 관객들에겐 꽤 신선하다. 이드리스 엘바는 묵직한 카리스마와 섬세한 감성을 통해 50년이 넘는 세월을 훌륭하게 연기해내며, 어쩌면 그의 존재감이 이 영화의 전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도 있다. 자서전을 토대로 한 만큼, < 만델라 >는 저항적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좀 더 다각적인 모습의 만델라를 담아낸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동료인 만델라. 이런 접근 역시 이야기를 분산시킬 수 있지만, 두 번째 아내인 위니 만델라(최근 007시리즈의 머니페니 나오미 해리스가 역할을 맡았다)와의 관계는 후반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갈등 구도다. 22세 때 18세 연상의 만델라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38년의 결혼 생활 중 27년을 감옥에 있었고, 그동안 그녀는 투쟁의 선봉에 서서 갖은 고초를 당했다. 출옥한 후 남편과는 노선 갈등을 빚으며 결국 이혼하게 되는데, 영화는 그녀가 겪었던 일과 넬슨 만델라와의 공적, 사적 관계들을 담담히 보여준다. 이런 대목들은 만델라라는 인물을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인간관계 속에서 고뇌하고 힘겹게 결단하는 평범한 인간임을 보여준다(만델라와 친분이 있었던 U2가 주제가를 맡았다. 제목은 ‘Ordinary Love’. 즉 ‘평범한 사랑’이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건 아니지만). < 만델라 >는 그렇게 뛰어난 전기 영화는 아니지만, 채드윅 감독의 영화적 리듬은 분명 좀 더 다듬어야 할 구석이 있지만,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의 진짜 얼굴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접해야 할 작품이다. 영화는 만델라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피의 현대사’를 기교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증오의 마음을 품었고, 그래서 투쟁의 선봉에 섰고, 그 대가로 긴 세월 동안 갇혀 있었고, 결국은 적들을 용서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며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연 넬슨 만델라. 영화 <만델라>는 이 과정을 평이하지만 정직하게 그려낸다. PS: < 만델라 >는 2013년 12월 5일 런던에서 시사회를 가졌고, 이 자리엔 관계자는 물론 윌리엄 왕자와 캐서린, 그리고 만델라의 딸인 진지와 제나니 등도 참석했다. 영화가 상영되던 도중, 만델라의 두 딸의 휴대전화엔 당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넬슨 만델라가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시사회는 계속되었고, 두 사람을 제외한 관객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상영이 끝난 후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드리사 엘바는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만델라의 부음을 알렸고, 2분 동안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