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 감독
- 짐 에이브람스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빌리 버크, 크리스티나 애플게이트, 제이 모어, 파멜라 기들리, 올림피아 듀카키스, 로이드 브리지스, 제이슨 푸치스, 조 비터렐리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헐리웃 미투 캠페인 지지를 위해 글든글로브 시상식에 블랙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배우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 니체(『선악을 넘어서』) 차이콥스키 내 노트북의 바탕 화면은 대중적으로 비호감인 남자 배우의 사진이다. 내가 이 배우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알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의 연기와 극 중 캐릭터를 좋아하고, 그가 쓴 글과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을 뿐이다(나는 그가 독특한 사람이라고 짐작한다.). ‘바탕 화면 배우’ 말고 좋아하는 배우 두 명이 있는데, 그 두 사람 역시 마초 발언으로 논란이 많다. 여자 배우? 많은 여성 배우들은 위에 언급한 남자 배우들의 나이까지 ‘버티지’ 못한다. 나는 노트북을 켤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말,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000을 좋아해?” 혹은 아예, “네가 컴맹이라 다운로드가 잘못되었나보다, 내가 바꿔줄게”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아직은) 성폭행범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우성 배우를 매우 좋아하지만, 모든 남자 배우가 그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이 역시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난민 인권을 논하는 배우를 더 싫어할까, ‘문란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병역을 기피한 배우를 더 싫어할까. 모두 뇌관이다. 내 심정은 복잡하다. 일단,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라는 자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이 세상에는 내가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환경주의, 페미니즘은 모두 내가 추구하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 나는 특별한 정국(政局)을 제외하면, “ ~ 주의자”라고 자칭하지 않는다. “ ~ 주의자”는 선언한다고 획득되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 ~ 주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과 자기 검열을 잘 알고 있다. 어려운 일상의 연속이다.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인간의 품성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많은, 나 같은 관객들은 고민한다. “작품은 좋은데, 그 감독 인간성은 00이라며?”, “난 그 배우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패스야. 배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지”, “네가(나) 어떻게 그런 소설가를 좋아할 수 있니”... 흔한 논쟁거리다. 이것은 ‘타인의 취향’도 ‘정치적 올바름’도 ‘똘레랑스’도 ‘작가와 작품의 분리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제3의 정치학을 필요로 하는 이슈다. 위에 적은 내용에 비해 덜 논쟁적인 문제도 있다. 단지, 무지와 통념으로 인한 혐오로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어떤 클래식 애호가(?)가 내게 물었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면서요?”, “그런데요?”, “저는 그다음부터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께름칙해요”, “그러세요? 그럼 듣지 마세요”. 나는 차이콥스키와 바흐 없이 살 수 없다.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서 그의 음악을 못 듣겠다면, 그 사람만 손해다. 아니, 음미할 자질조차 없는 거다(참,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있다). 오스카 와일드, 트루먼 카포티, 안데르센, 소크라테스! < 주노Juno >(제이슨 라이트맨, 2007)와 < 인셉션Inception >(크리스토퍼 놀란, 20010)의 엘렌 페이지, 조디 포스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가 동성애자라서 ‘꺼려진다면’ 볼 책도 영화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이슈를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뭔데?” 이 말은 사이먼 페그가 나오는 영화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의 연예 잡지 기자로 성공하기 위해 애쓰다 실패한 이야기인 < 하우 투 루즈 프렌즈How to lose friends & alienate people >(로버트 B. 웨이드, 2008)에 나오는 말이다. 시드니 영(사이먼 페그 扮)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좌충우돌하다가, 뉴욕의 문화계의 거물을 찾아가 한심한 협박을 한다. “(기자인 나한테 뭔가 이득을 주지 않으면) 동성애자 배우, 모델, 감독, 작가들을 모두 아우팅 시킬 거다”. 상대방은 웃으며 말한다. “이 바닥에서는 거의 동성애자 아니면 유대인이야. 매장당할 사람은 당신이야” 가해자보다 더 나쁜 예술 분야뿐 아니라 정치인, 학자, 페미니스트 등 수많은 위인 중에서 인간성과 그의 업적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간성은 수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학대했는지(톨스토이), 남의 업적을 가로챘는지(아인슈타인), 성차별을 일삼았는지(레닌), 자기만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는지(푸코, 보부아르), 비열한 연애로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권모술수를 부렸는지, 표리부동했는지,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는지... 아니, 거의 대부분의 ‘위대한 서양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이다. 성폭력범은 너무 흔해서 이 논의에서 제외한다. 그런데, 맷 데이먼. 누가 그를 싫어할까. 그는 왠지 미국인도 제국주의자도, 심지어 ‘남성’도 아닐 것 같은 이미지다. 미투 이전까지, 맷 데이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2016년, 영화 < 제이슨 본Jason Bourne >(폴 그린그래스)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던 그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이 맡은 캐릭터 해석과 영화 철학,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다. 18살에 커리어를 시작해 구스 반 산트,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들리 스콧 등 거장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알려졌다시피 글쓰기에도 능하다. ‘바람둥이’, 왕자병’ 스타일도 아니다. 특히, 그는 물 부족 국가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www.water.org).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작품 자체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니, 그의 영화를 다 봤다. 나는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해 ‘지구화 시대 국민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2편인 <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폴 그린그래서, 2004)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사과하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상하게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안소니 밍겔라, 1999)마저 순수해 보인다. 알랭 들롱의 ‘리플리’(<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 >(르네 클레밍, 1960)에서 주인공)와 다르다. 그의 인간성은 모든 캐릭터를 맷 데이먼으로 환원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최근 할리우드의 미투 운동 과정에서 연일 ‘말실수’를 했다. 아니면, ‘본색’일까. 그의 발언을 보자.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과 강간, 아동 성추행은 다르다.”, “영화 제작자까지 인종 다양성을 보장할 필요는 없다.”, “성 정체성은 편견을 줄 수 있으니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성추행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결국 일련의 발언으로, 여성들만을 주인공으로 한 < 오션스 8Ocean's 8 >(게리 로스, 2018)에 카메오로 출연했으나,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거센 항의로 편집 당했다. ‘평균 시민의 교양 미달’이라는 측면에서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저런 수위의 발언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큰 충격은 그가 (쿠엔틴 타란티노, 벤 애플렉 등과 함께) 지난 20년 동안 하비 와인스타인과 친분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와인스타인의 셀 수도 없는 성폭행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귀네스 팰트로의 전 남자친구 브래드 피트만이, 와인스타인에게 항의했다고 알려졌다. 더 심각한 문제, 아니 더 혐오스러운 데이먼의 범죄 행위는 그가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보도하려던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를 회유했고, 옹호 논리까지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맷 데이먼 자신은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와인스타인 같은 인물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직접 가해보다 ‘더 질 나쁜’ 행위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살인보다 살인 교사가 더 나쁘고 비리 재벌보다 재벌의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언론사, 회계사, 변호사가 더 역겨운 것처럼 보이는 심리처럼 말이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추잡’하다고 할까. 이런 나의 생각 역시, 스타의 이미지에 포섭된 미디어 시대 우중의 모습이고, 진짜 가해자인 와인스타인은 아예 제쳐 둔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불신, 문화적 억압이라는 또 다른 피해 배우는 힘든 직업이다. 지금도 활동 중인 노년의 배우가 있는데,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지하는 TV 연설원이었다. 그가 노태우 후보를 지지한다면서 한 첫 마디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요, 왠지 그 양반(노태우)이 좋습디다...”였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느낌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배우의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 노태우와 광주 학살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와 군부에 대한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이후 그 배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배우나 작가가 모든 면에서 결점이 없을 수 없다. 마피아부터 파시스트까지, 그리고 그들을 스폰서로 둔 사례까지... 문제는 간단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했던 배우의 영화를 더 이상 볼 ‘비위’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성폭력은 특별한 범죄다. 난 맷 데이먼을 잃었다. 이제 그가 출연한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일과 비슷하다. 몇 년 전 세계적인 석학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안내 업무를 맡은 친구로부터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책을 읽지 않는다. <인 더 컷>의 마크 러팔로와 맥 라이언 ‘개념 매력남’인 줄 알았던 맷 데이먼에게 놀라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마크 러팔로도 의심이 간다. 게다가 그는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더 나쁜 X’이면어떡하지?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는, < 인 더 컷In the cut> (제인 캠피온, 2003)의 러팔로 같은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과 <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 >(케네스 로너건, 2000)에서 러팔로의 빵구 난 러닝셔츠를 생각하면서 웃곤 한다. 나는 점점 <인 더 컷>의 맥 라이언처럼 편집증 환자가 되어갈 판이다. 차라리 스파이크 리처럼 대놓고 마초인 남자가 나을까.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영화의 캐릭터)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미투 이후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졌다. 예술가의 인성과 작품 수준의 관계는 끝없는 논쟁거리지만, 나는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이 있다. 좋은 인간과 좋은 예술가는 모순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사회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선(善)의 기준은 대단히 넓고, 다면적이고, 맥락적이며, 인간은 일관되고 합리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선악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나쁜 사람의 작품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의 작품에는 반드시 나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다. 혹은 위대한 작품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므로 생각보다 이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어린이를 학대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얘기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이런 사람의 작품은 논쟁을 넘어 논쟁의 가치조차 없다.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라.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가진 배우, 감독, 스태프 하고는 일하지 않는다(해고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필버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하는 가해자는 없다. 그런데 왜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만 논쟁이 분분할까. 이 자체가 젠더 폭력에 대해 관대하다는 얘기다. 성폭력은 그 어떤 잘못보다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지 않는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남성들의 반발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남성 사회는 스스로, 혹은 (피해) 여성 집단에 두 번째 기회를 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부정하고 은폐하고, 가해자는 여전히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기회가 웬 말인가. 맷 데이먼. 다시는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서 속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한 씨네필의 영화 사랑을 망친 그에게 분노한다. 내가 신뢰하는 어느 영화평론가는 이런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2004) 월드 프리미어 참석한 그는 서구 기자들에게 ‘치여’ 제대로 입장도 못하고 곤란한 처지에 있었는데, 관람권을 미리 확보가 ‘기득권 평론가’가 영화가 상영되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는 것이다. 극장 밖에는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고레에다의 영화를 보면서 코를 골고 잔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이들의 관람 기회를 박탈해가면서) 솔직히 살의를 느꼈다.”. 내가 맷 데이먼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다이캐스트 모형 자동차 브랜드 중에 ‘쟈니 라이트닝’이라는 미국 회사의 브랜드가 있다. 미국 마텔사의 ‘핫휠’, 일본 토미사의 ‘토미카’ 등이 경쟁상대로서 대표적인 모형 자동차 장난감 브랜드인데 쟈니 라이트닝은 토퍼 토이사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여러 번 문을 닫고 다른 회사로 팔려가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오뚝이처럼 되살아나 모형 자동차를 생산해내고 있다. 국내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제품이지만 수집가용으로 출시되는 한정판은 정식 수입이 안 되고 구하기도 어렵다. 쟈니 라이트닝에서 최근 ‘2017 미국 머슬카’ 시리즈를 출시했는데 그중에서 세 편의 영화에 등장했던 머슬카가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에 주문했다. 영화 <배니싱 포인트>(1971)에 등장하는 1970년형 흰색 ‘닷지 챌린저 R/T’, <매리와 래리>(1974)의 1969년형 ‘닷지 차저 R/T’, 그리고 <잭 리처>(2012)의 1970년형 ‘쉐보레 셰빌 SS’ 모델이 그것이었다. 위 세 편의 영화는 탈주의 쾌감을 확실하게 선사하는 영화로 닷지사의 머슬카를 몰고 나오는 것 외에도 음악과 카체이스 스타일 등이 닮아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저격 사건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이 결백을 주장하며 지목한 단 한 사람 ‘잭 리처’가 사건 해결을 위해 홀로 나서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잭 리처> 역시 로드 무비 성격의 영화는 아니지만 차종에 있어서는 차저와 챌린저를 비롯해 다분히 미국 머슬카의 특징을 노린 선택이다. 자동차 모델명 뒤에 붙는 ‘R/T’는 1960년대 이후 닷지 차량에 사용된 성능 표시로서 ‘로드/트랙’의 약자를 뜻한다. R/T가 모델명에 붙은 차량은 서스펜션, 타이어, 브레이크, 엔진 등의 성능이 일반 모델보다 강력하다는 뜻이다. 제작진이 얼마나 큰 의미 부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자 신분의 주인공들이 머슬카를 몰고 질주하는 로드 무비 <배니싱 포인트>와 <매리와 래리>와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차종으로는 잘 어울리는 성능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물론 옳은 일을 하고는 있지만 도망자 신분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잭 리처(톰 크루즈)가 모는 1970년형 쉐보레 셰빌 SS 모델의 ‘SS’ 역시 ‘슈퍼 스포츠 버전’의 약자로 사실상 R/T와 같은 뜻이나 다름없으니, 탈주 즉, ‘도망’이라는 로망을 추구하는 자동차 모델로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 차들이 아닐까? <배니싱 포인트>(1971) 닷지 챌린저 R/T 장난감 전문 회사들이 어른의 수집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이들 영화 속 차량을 취급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듯, <배니싱 포인트>와 <매리와 래리>는 영화적으로도 ‘도망자의 차’에 입문하기 딱 좋은 영화다. 그중에서도 <배니싱 포인트>의 추격 장면은 카체이스 영화 역사를 통틀어 종종 베스트로 손꼽히는 시적인 여운을 선사한다. 이 칼럼을 쓰면서 너무 많은 영화들에 ‘역사상 베스트’ 운운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한데 이 영화는 카체이스 촬영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정서적 여운을 건드리기에 더욱 회자되는 것 같다. 아무튼 연출을 맡은 리차드 C. 사라피안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에 1970년형 흰색 ‘닷지 챌린저 R/T’를 등장시키려 한 것은 제작자인 대릴 F. 자눅의 뜻이었다고 한다. 제조사인 크라이슬러사에서 저렴한 값에 차를 렌트하는 대신 영화 곳곳에 크라이슬러사의 차를 등장시키는 일종의 협찬 광고를 따온 셈이다. 이 영화의 카체이스 스턴트 대역 운전을 맡았던 유명 스턴트맨 캐리 로프틴이 직접 닷지 챌린저의 토션 바를 쓰는 서스펜션 퀄리티가 촬영 및 쾌속 질주에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타이어가 터져 버릴 정도로 달리고 또 달리는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탈주 장면은 언제든 다시 봐도 통쾌하고 묵직한 쾌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카레이서 이력도 있는 주인공 코왈스키(배리 뉴먼)의 삶의 태도 혹은 성격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가 덴버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밤낮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굴레가 내던져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배니싱 포인트>는 상당히 실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로도 해석된다. 요새는 여러 가지 프로덕션 상의 이유로 이 영화처럼 질주하는 장면을 편집도 없이 길게 찍지는 않는다. 게다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도로의 끝과 끝을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만 보여줬다가는 평점테러 당하기 딱 좋을 것 같다. <리피피>(1955) ‘도망자의 차’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영화를 골라 넣고 있자니, 줄스 다신 감독의 <리피피>(1955)를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생애 마지막이자 최고의 작전이었던 퇴물 도둑 토니(장 세르베)의 보석털이가 실패로 돌아갈 운명에 처한다는 이야기인데, 누군가는 왜 이 영화를 누아르 영화가 아닌 ‘도망자의 차’ 카테고리에 들이미느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숨소리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긴박했던 그리고 또 작전 자체로 기발한 면모도 보였던 금고털이 장면도 사실 자동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자동차는 의외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등장한다. 범죄자로서의 프로 의식과 책임감, 내지는 비열하고 냉철한 감정이 뒤섞인 채로 주인공 토니가 결국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아주 처절하고 멋진 필사의 질주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토니가 올라탄 차종이 ‘포드 비뎃’이다. 유럽 최초의 8기통 자동차라고 알려져 있는데, 영화의 정서적 핵심에 해당하는 이 장면과 자동차의 성능이 잘 맞아 떨어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카체이스 장면을 감각적으로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 뭉클한(?) 도망자의 질주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자동차 영화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미덕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의외의 순간에 등장할 때 감동은 배가된다. <이탈리안 잡>(1969) 오스틴 미니 쿠퍼 S <리피피>가 프랑스 도둑들의 어떤 정신세계를 잘 보여줬다면 마이클 케인이 주연을 맡았던 피터 콜린슨 감독의 <이탈리안 잡>(1969)은 이탈리아 땅을 휘젓고 다니는 영국 도둑들의 영화다. 마크 월버그가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같은 브랜드의 자동차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 마이클 케인의 오리지널 영화와는 여러모로 비교 불가다. 이탈리아는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만든 나라지만, 주요 도시의 길이 좁고 아스팔트 대신 자갈을 깔아 놓은 길도 많아 운전하기 썩 좋지 않은 나라라는 인식이 있다. 대신 조그만 크기의 자동차는 좁은 골목 사이 사이를 지나다니기에도 유용하고 또 영화적으로도 ‘탈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탈리안 잡>은 이러한 지역 특색을 매력으로 승화시켰다. 오죽했으면 무시무시한 스턴트 배우들의 운전 솜씨가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기까지 했을까. 런던 출신의 유명한 도둑 찰리(마이클 케인)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400만 달러의 현금을 탈취할 작전을 세우는데 이때 쓰이는 범죄 도구가 바로 1967년형 ‘오스틴 미니 쿠퍼 S’다. 지금은 ‘미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차는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BMC)에서 1959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는 인수 과정을 거쳐 BMW 산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960년대 당시 영국의 국민차로 각광받았는데 몬테 카를로 랠리에서 3차례나 우승도 했던 차다. 영국 도둑들이 영국 국민차인 미니 쿠퍼를 이끌고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크게 한탕 벌이는 영화의 줄거리 속에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재미있는 ‘자동차 부심’ 대결도 숨어있다. 극 중 찰리 일행은 거사 직전에 마피아들에게 붙잡혀 이탈리아를 빈손으로 떠나라고 협박을 당한다. 영국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깡패 집단들끼리 기 싸움을 벌이는 상황인데, 영국의 미니 쿠퍼가 탄생하게 된 이유도 이탈리아의 피아트 때문이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로 심각한 연료난에 처했을 때 유럽 전역에서 소형차들이 각광받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이탈리아의 ‘피아트 500’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의 회장은 이 차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미니카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대안으로 미니 쿠퍼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다고 제작진과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계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제작자인 매튜 필드와 마이클 딜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이탈리아 대배우 로자노 브라지라와 람보르기니를 함께 등장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누가 봐도 이탈리아의 상징 같은 배우와 자동차가 아닌가. 또 영화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스포츠카 디노 페라리에 얽힌 사연도 있는데 당시 피아트의 회장이었던 지아니 아넬리가 촬영을 위해 선뜻 빌려줬다고 한다. 왜냐하면 피아트는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토리노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안 잡>의 제작을 반겼다고 한다. 당시 유럽 영화계에서 최고의 자동차 스턴트팀을 이끌었던 곡예 운전사 레미 줄리엔은 이 영화에서 스턴트 총괄을 맡은 이후 피아트에 스카우트되어 공식 드라이버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알아둬도 쓸데없는 사연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이탈리안 잡>은 자그마한 소형 자동차들을 가지고 당시로써도 획기적이고 지금 봐도 스펙터클한 카체이스 장면을 탄생시켰다. 아마 21세기에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도심 추격 장면은 절대로 구현할 수 없을지 모른다. 대리석으로 이뤄진 저택이나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백화점 실내, 혹은 건물 옥상을 타고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장면을 과연 누가 찍을 수 있을까.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블리트>나 <프렌치 커넥션> 같은 영화의 도심 카체이스 장면도 21세기에는 구현이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대단한 장면을 찍을 기술적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겠지만. 가장 최근에 무식한(?) 도심 카체이스 장면을 선사해준 영화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로 주변을 다 때려 부수면서 질주하던 <킬러의 보디가드>(2017)였다. 촬영 현장 메이킹 영상이 참으로 궁금하다. 반면에 도심 추격 장면을 블록 구간별로 쪼개 찍어 편집으로 이어 붙일 수밖에 없었던 <베이비 드라이버>(2017) 같은 영화는 스타일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드라이버>(1978) 다시 과거로 돌아가, 나만의 ‘도망자의 차’ 카테고리에 포함된, 그리고 카 체이스 영화의 묘미를 잘 드러낸 연출은 월터 힐 감독의 <드라이버>(1978)였다. 사실 이 영화는 자동차보다 드라이버라는 캐릭터 자체에 더욱 무게가 실린 영화이긴 하다. 어쩌면 소위 ‘도망자의 차’ 영화 중 가장 자동차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배우 라이언 오닐이 연기하는 이름도 없는 캐릭터 ‘드라이버’는 범죄자들을 딜리버리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운전 실력이지 자동차가 아닌 듯 보인다. 어떤 자동차도 운전할 줄 알아야 진정한 장인이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영화는 수많은 ‘드라이버’ 영화들, 예를 들면 최근의 <드라이브>(2011)나 <베이비 드라이버> 등의 영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월터 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봐도 그는 항상 자동차를 하나의 캐릭터 이상으로 잘 다룬다. 3편의 연재 칼럼 내내 영화 속의 특정 자동차 브랜드나 성능에 주목해서 역으로 영화의 매력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어떻게 캐릭터처럼 생명력 넘치게 그려낼 것인가, 이지 않을까. 물론 ‘도망자의 차’ 영화들이 전해주는 ‘재미’의 핵심은 탈주의 기술에 있고, 또 그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동차다. 그런데 카메라에 담긴 자동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뭘까. 무엇이 자동차를 주인공처럼 보이게 할까. <뺑반>(2018) 시나리오 표지 최근에 2018년 한국영화 기대작 취재를 하면서 <뺑반>의 한준희 감독을 만났는데 그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뺑소니 사고 조사를 전담하는 경찰 수사팀이 주인공인 <뺑반>은 어쩌면 한국영화 중 가장 본격적으로 카체이스 액션을 선보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표현하면 카체이스 액션에 있어 거의 선구자격의 노력을 기울였던 <썸>의 장윤현 감독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돌려 말하면 어떨까. <뺑반>은 2018년 현재 카체이스 액션에 있어 가장 기대해도 좋을 국내 최고의 스태프들이 모였다. 김태경 촬영감독과 허명행 무술감독, 장근영 미술감독, 그리고 특수효과에 데몰리션 팀이 참여한다. 경찰 영화와 자동차 영화로서의 카체이스 액션이 결합할 <뺑반>의 개봉을 기대하면서 영화와 자동차 칼럼 연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