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타의 매
- 감독
- 존 휴스턴
- 제작년도
- 1941
- 출연
- 험프리 보가트, 매리 애스터, 글래디스 죠지, 피터 로레, 바톤 맥레인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은 우리네 모습이나 욕망을 되새김질할 원천이라도 품고 있는지, 시대에 묻혀있다가도 불현듯 다시 다가와 새로운 영감을 던지고는 한다. ‘영화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이런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프로그램 목록에는 매우 대중적인 장르인 필름 누아르와 멜로드라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장르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 아니라 고전 배우들이 전하는 캐릭터를 통해서도 큰 매력을 선사한다. < 말타의 매 >는 필름 누아르의 시작이라 회자되는 작품답게, 음모의 정체를 쫓느라 좌충우돌하는 탐정, 저의는 베일에 감추고 주인공 남성을 빠져들게 하는 팜므파탈, 범죄가 깊고 넓게 침투해 있는 사회 모습 등을 버무린다. 사설탐정 샘 스페이드(험프리 보가트)는 비밀스러운 여인과 사랑에 빠져드는 한편 이런저런 상황들로 사건에 연루된다. 탐정은 자신을 덫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하는데 이는 매우 냉철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 강박적이다. 영화가 사회의 어두운 욕망을 폭로하는 한편, 동료애와 사랑을 따르는 투박함과 세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련함 사이에서 위기감과 소외를 느끼는 현대사회의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 빅 슬립 >에서 필립 말로우(또! 험프리 보가트)는 사랑과 의리를 중시하는 낭만적인 인물이지만 순진한 믿음 따위는 취급하지 않는다. 험프리 보가트가 만들어낸 하드보일드 탐정의 매력은 전형적인 미남형이나 완벽하게 다져진 몸매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의 분위기에 기인한다. 오히려 구부정한 자세와 작은 키가 왜소한 느낌을 주지만 그 몸짓과 발성은 세상에 초연한 안티히어로의 모습을 멋들어지게 표현한다. 그러나 <빅 슬립>의 세상 역시 어지럽고 진실은 끝내 완벽히 밝혀지거나 해결되지 못한다. 누아르는 섣부른 낙관이나 해피엔딩을 허용하지 않는 검은 세계인 것이다. 한편 < 스텔라 달라스 >는 계급갈등이나 젠더갈등 등이 빚어내는 멜로드라마의 전형들이 녹아 있어 멜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되는 영화 중 하나이다. 주인공 스텔라(바바라 스탠윅)는, 노동계급 여성으로 부르주아 남성과 결혼에 이르지만 문화적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딸의 행복을 위해 전남편의 세상에 딸을 두고 돌아선다. 그런데 바바라 스탠윅의 스텔라는 사회의 굴레를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당당하다. 영화가 멜로에서 반복되는 부당한 관계 및 결말의 어떤 전형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녀의 희열에 찬 듯한 마지막 표정은 심지어 그녀가 성공을 이룬 것처럼 느껴지게까지 한다. 물론 이는 모성애의 아름다움에 왕관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녀의 당찬 노동계급 말투 및 행동은, 신분이 다른 남성에게 다가가기 위해 적극적이고, 숙녀이기를 요구하는 남편의 욕망에 거스르며, 딸의 사회적 삶과 성공을 위해 엄마이기를 포기하는 그 모든 순간을 관통하며 세상 뭐라던 자신에게 충실한 어느 여인을 보여준다. 그 우아함은 사회의 잣대를 이해할지언정 이에 굴복하지는 않으며 모성에의 찬가 사이를 비집고 나와 스텔라 자신을 빛나게 한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에 열광하고 어떤 인물을 동경하면서 위 장르의 자장 안에서 세상을 다루고 있을까? 담백하게 그 정수를 전하는 고전 영화는 익숙한 장르의 근본 질문에 보다 정확히 도달할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누아르의 질문이 범죄와 부패로 얽힌 사회에 살아남아 그 어둠에 먹히지 않을 수 있을지를 향한다면, 멜로는 계급갈등이나 가부장제 등의 사회구조를 이겨내는 사랑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둘 다 사회의 장벽과 대면하여 어떤 사랑을 갈망하며, 많은 경우 세상에 백기를 든다. 누아르가 더 큰 음모의 폭로를 통해 주인공에게 실패를 안긴다면, 멜로는 맹목적인 판타지나 완벽한 주류적 가치의 수용 속에서 출구를 봉쇄한다. 그러나 고독한 투쟁을 벌이는 위 고전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순간에도 그 우아함을 잃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짜 동경하는 스타의 면모이자 우리 스스로에게 꿈꾸는 바가 아닐는지.
홍길동이 시골 도로에 길을 잃은 채 서 있는 장면을 보며 이것은 확실히 < 짐승의 끝 >(2008)의 상업적 연속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이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조성희의 데뷔작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은 확실히 조성희 의 영화고,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조성희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다. 물론 단편 < 남매의 집 >(2008)에 열광했던 당신은 장편 데뷔작 < 짐승의 끝 >(2010)을 보고 길을 잃었거나, < 늑대소년 >(2012)과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에 낙담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조성희 의 영화가 점점 데뷔작의 근사한 악몽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오히려 조성희의 영화가 데뷔작의 악몽을 더욱 본격적으로 풀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짐승의 끝>을 다시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 짐승의 끝 >은 부조리한 SF 재난 영화다.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만삭의 여자는 이상한 남자를 만난 뒤 쓰러진다. 일어나보니 세상은 멸망했다. 그녀는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모두가 이상하다. 밤은 계속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짐승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한국영화의 부조리극 속에 던져 넣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다. 그런데 나는 <짐승의 끝>을 보자마자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초창기의 스필버그 사단의 영화들이 강하게 떠올랐다. 사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한국 감독으로서 80년대 초중반 스필버그 사단과 당대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상업영화의 영향력을 받지 않았을 도리는 거의 없다. 어린 시절 B급 SF/호러영화들, 그리고 TV 시리즈 < 환상특급 >을 보고 자란 세대의 문화적 결과물에는 어떤 동일한 무의식적 인장이 찍혀있다.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당시 스필버그 사단의 장르 영화들을 다시 꺼내보는 순간 당신은 적잖게 놀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지금 할리우드가 조 단테의 < 그렘린 >처럼 화면 바깥의 피비린내가 자욱한 영화를 PG-13으로 개봉할 수 있을까? 스필버그의 몇몇 영화들(특히 <인디아나 존스 2>)은 거의 소년들의 악몽이다. < 늑대 소년 >에서 조성희 는 적극적으로 팀 버튼의 < 가위손 >, 80년대 늑대인간 장르영화 < 하울링 >과 < 런던의 늑대 인간 >, 그리고 스필버그의 < E.T. >를 끌어온다. 그가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의 비밀>에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007 영화에 일종의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는 것도 거의 분명하다. 그는 이 영화 속 누아르의 관습과 스타일의 표본으로 <말타의 매>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 면에서 조성희가 누아르 전성기의 영화들이 아니라 워렌 비티의 < 딕 트레이시 >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조성희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균열이다. 그는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오히려 지금의 블록버스터보다 더 B급으로 음침하고 못된 구석이 있던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관습을 2010년대 충무로 상업영화의 관습과 마구잡이로 버무린다. 그것은 타협처럼 보이지만 타협이 아니다. 균열이다. 그리고 조성희는 두 개의 균열을 지나칠 정도로 매끈하게 이어붙이는 데 강박적인 공은 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 늑대소년 >과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의 비밀>은 80년대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2010년대의 충무로 영화도 아닌, 홀로 뚝 떨어진 영화가 됐다. 비평가들이 겨우 2편의 상업적 장편영화를 만든 그를 이야기하며 ‘조성희 월드’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다시 < 짐승의 끝 >을 돌아보는 건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당시 그는 < 남매의 집 >의 가능성을 이 첫 번째 장편영화에서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는 비평을 꽤 받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런 비평들은 조성희 를 아트하우스 영화의 결계 속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한 탓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짐승의 끝>은 가장 상업적인 대학 졸업영화를 만들어내려는 오락적 결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이런 음침하고 즐거운 결기를 나는 아마도 극장판 < 환상특급 >(1983)에서 조 단테가 연출한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봤던 것 같다. 그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상한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