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일
- 감독
- 박수호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차혜원, 재니스
<질투>(한형모, 1960) 촬영 현장, 한형모 감독의 뒷모습 (박승배 촬영감독 기증)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감독 한형모 는 1950년대 한국 영화에서 대중성과 통속성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 유명 감독들 신상옥 , 이만희 , 김기영 , 유현목 같은 자기만의 고유한 주제의식이나 미학을 가진 작가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성 인물을 매개해 대중이 쉽게 매혹될 만한 선정적인 스펙터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장르적 오락성을 중점에 두면서도, 결말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순치와 처벌의 서사를 통해 보수적인 도덕성을 거스르지 않는 통속 영화들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기에 한형모의 작가성에는 늘 매혹과 순응, 현대와 전통이라는 모순된 단어들이 함께 붙게 된다. 감독 데뷔작이자 최초의 반공영화인 < 성벽을 뚫고 >(1949)와 한국전쟁 중 제작된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 1부 1951, 2부 1952)을 제외하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여성이 주인공인 멜로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이 다수를 차지한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던 만큼 그의 작가성으로 기술적 유려함, 다양한 장르를 결합시키는 능력(첩보+멜로, 로맨스+코미디, 멜로+뮤지컬 등)을 언급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 주인공에 대한 이중 의식이다. 전후 혼란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던 1950년대에 한형모 영화의 여성 주인공들은 얼핏 보면 당대 가장 진취적인 여성들의 샘플처럼 보인다. (좌) <운명의 손> 중 마가렛/정애 / (우) <여사장> 중 요안나 <자유부인> 중 오선영 첩보멜로물인 < 운명의 손 >(1954)의 주인공 마가렛/정애는 북한 간첩이자 ‘양공주’로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어느 쪽에도 포섭되길 거부하고 개인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다. < 자유부인 >(1956)의 오선영은 교수 남편이 있지만 경제적 욕망과 결혼제도 바깥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후에도 스튜어디스인 < 순애보 >(1957)의 인순부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출판사 사장인 < 여사장 >(1959)의 요안나, 산부인과 의사인 < 남성 대 여성 >(1959)의 윤송희, 유도 유단자인 < 언니는 말괄량이 >(1961)의 안순애까지 여자 주인공들은 경제적 독립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만한 직업과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다. 세련되고 도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들의 생활 묘사에서 ('남성혐오'를 포함한) 성적 욕망의 적극적인 표현, 서구문화의 소비, 자본주의 상품에 대한 갈망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문직 여성의 라이프스타일 혹은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개성은 당대 여성 관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형모의 영화는 일관되게 서사적으로 이들을 결국 순치시키고 처벌하며 가부장제 안으로 복귀시키는 결말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타락하거나 병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지며, 가부장의 그늘을 거부하는 경우 살인, 강간, 사기 등에 위협적으로 노출된다. 시대적으로 앞서간 여성 인물을 스크린에 가시화한 반면, 그만큼 처벌하고 순치시키는 과정도 선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그려냈던 이중적 태도야말로 그의 작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적 여성의 매혹적 스펙터클은 길고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반면(사실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여성 주인공이 화려하게 전시되는 영화적 순간들이기 때문에), 순치의 과정은 서사적 비약이라고 느껴질 만큼 짧고 급작스럽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매혹적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 동안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들은 사회의 성차별과 가부장제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게 된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거나, 남편의 물리적 힘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갑작스럽게 현모양처로 돌변하고, 자신의 욕망을 모두 헛된 꿈, 허영으로 환원한다. 영화도 그들이 자진해서 죄를 고백하고 가부장제가 지정한 자리로 재귀한다는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그저 감독 자신의 혹은 기성 사회의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아 영화를 확인할 수 없는 < 질투 >(1960)는 이와 같은 한형모의 작가성이 순도 높게 구현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현대성은 동성애이다. 동성애는 영화의 가장 선정적이고 호기심 갖게 하는 마케팅 포인트이자 결국은 교정되고 처벌받아야할 대상이다. 당시 신문광고에 실린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 있다. “이성애의 공포가 동성애로 변한 것은 세계적인 풍조일까?” -《동아일보》 1960. 5. 25. “동성연애서 엉크러지는 일대의 질투, 국제무대에 파문을 던질 최고 이색편!” -《경향신문》 1960. 5. 7. 두 번째 문구가 적혀있는 포스터가 196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도 실려 있다. 즉 동성애를 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유행과 동시대성으로 연관시키며 선정적인 호기심을 부추긴다(유명한 여성 동성애 영화 두 편, 오드리 햅번과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 아이들의 시간 >(윌리엄 와일러, 1961)이 1961년 할리우드에서, 로미 슈나이더 주연의 < 제복의 처녀 >(게자 본 라드바닐, 1958)가 1958년 독일에서 개봉했다). 동성애는 이 영화의 세련된 차별점이다. <질투>는 한국영화사에서 영화제작과 개봉이 확인된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한형모의 다른 여성 주인공들처럼 이 영화의 재순 역시 주장이 분명하고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여성이다. 한형모는 배우 문정숙에게서 톰보이 기질 혹은 여성의 남성성을 포착하며 <질투>와 <언니는 말괄량이>에 연이어 출연시킨다. 문정숙 이 맡은 재순과 안순애는 모두 부치 레즈비언 혹은 남성성을 드러내는 여성으로 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그 이유를 '남성혐오'에서 찾는다. 특히 <질투>의 재순은 한국전쟁 당시 강간을 당하고 병적으로 남성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대사 속에서 기술된다. 입양된 동생인 금이( 전계현 )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 즉 동성애는 독자적 욕망일 수 없으며 필히 이성애의 대체제로만 가능하다. 여성 동성애는 '남성혐오'의 병적 증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재순이나 금이 등 여성 인물이 아닌, 집안의 가부장인 오빠 재수와 정신과 의사의 해석일 뿐이다. 오히려 금이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분명히 표현하는 재순은 과거의 일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재순은 그저 금이를 사랑할 뿐이며, 그것이 폭력적 집착일지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금이를 위할 선택을 할뿐이다. 금이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이성애 결혼과 남편에 순종하는 아내의 역할을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재순은 여성에게 결혼이 왜 부정적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재순은 오빠의 아내인 남이( 김신재 )에게는 “난 여자가 남성의 노예가 돼서 하루 종일 그 봉사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라고 한다. 또한 금이의 약혼자 광호의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도 여자분이니까 그 점을 아실 겁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남성들한테 받아온 압박을 금이한테까지 당하게 할 순 없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며 여성들의 동의를 구한다. 놀랍게도 서사적으로 볼 때 적대 관계에 있음에도 광호의 어머니는 “나도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이라고 답한다. 적대관계에 있는 여성들의 동의마저도 얻어내며 여성들을 규합하는 재순의 말은 여성 관객들을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또 금이의 장래와 관련해 재순은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재수는 “훌륭한 가정부인이 돼”야한다고 대치한다. 재순은 성폭력 트라우마의 증상을 보이지 않으며 남성과의 만남에서도 두려움이 없고 합리성에 근거해 이성애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정확하게 비판한다. <질투> 중 재순과 이금 (박승배 촬영감독 기증) 재순은 친동생처럼 함께 자란 금이와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으며 한 방을 쓰면서 육체적 관계도 가진 것으로 암시된다. 또한 재순의 문제가 “동성연애”냐고 재수가 묻자 금이는 긍정을 표하며, 금이의 옛 이웃 광호가 등장하며 단순한 S 언니-동생 사이에서 “동성연애”로 관계 혹은 욕망이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금이와 재수 사이에 이어지는 대사는 재순을 병리적 인물로 보고 있지만, 동시에 재순과 금이의 관계가 단순한 자매애나 여성적 친밀감을 넘어섰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재차 확인한다는 점에서 통쾌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금이는 “사랑은 역시 이성에게서 느끼는 애정만이 인생을 즐겁게” 한다며 재순과의 동성애 관계와 광호와의 이성애 관계를 비교적 대등하게 놓고 비교한다. 한형모가 견지하는 선정성과 현대성, 서구의 유행에 대한 호기심과 물신화, 그리고 언제든지 순치시킬 수 있다는 가부장제적 자신감은 동성애라는 욕망을 매우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재순의 (이해 불가능한) 동성애를 설명하려는 의도는 곧장 가부장제와 결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재순의 사랑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혹은 그에 앞서 그의 논리에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다. 재순의 질투와 집착은 지나치게 커지고 금이와 광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살해 시도까지 간다. 재순의 폭력성은 그의 남성성의 표현이 된다. 재수와 금이는 재순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약물치료를 통한 동성애전환치료를 받게 한다. 명목상으로는 성폭력 트라우마와 '남성혐오'를 고치는 것이라고 나오지만 결국은 동성애를 이성애로 교정하고 순치시키는 폭력이 된다. 재순의 사랑의 원인은 재순 스스로 말하듯 그저 사랑에 기인할 뿐이다. 그것이 파괴적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폭력적 교정은 매우 짧은 하나의 결말 장면으로 묘사된다. 시간을 건너뛰어 급하게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동성애전환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재순은 금이와 재수, 재순을 좋아하던 영기와 의사가 모인 앞에서 “꿈에서 깬 것 같다”라고 말한다. 공격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 많고 논리적이던 재순의 저 응축된 한 마디 대사는 문자로만 표현되어 있지만 공허한 눈을 목격한 것처럼 느껴진다. 병원장면은 논리와 설득력이 부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며 아이러니한 연극이며 그로테스크한 악몽이다. 재순은 앞의 긴 시간이 꿈이라고 했지만, 실은 병원장면이야말로 허상이자 꿈처럼 느껴진다. 한형모가 반복적으로 결말에서 여성들을 처벌하고 순치시키며 가부장제와 강제된 이성애로의 자리로 보내려는 시도는 실은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이 결말의 보수적 안전함 속에서 주목하고 환호했던 것은 바로 ‘꿈’과 '병증'으로 취급된 동성애 욕망이기 때문이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연말 리스트 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원래부터 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소위 ‘객관적인’ 리스트들을 짜다 보면 정작 그해에 진짜로 좋게 본 영화들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리스트에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넉넉하게 가기로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가장 재미있게 보거나 좋게 본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달라붙은 영화들이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들이다. 일단 < 그랜마 >는 릴리 톰린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면서 뻔뻔스러운 할머니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동스럽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는 노장의 힘을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장르물이었다. < 무서운집 >은 심지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장감독이 컬트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 팔로우 >는 오래전에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던 ‘십 대 아이들 괴롭히기’ 호러의 영역에 미개척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 월드 오브 투모로우 >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올해 최고의 SF다. 60년대의 폴란드와 대화를 나누는 < 이다 >의 교령의식은 오싹한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깜찍한 퀴어 소녀의 성장물인 < 아니타의 마지막 차차차 >는 여성영화제 바깥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은 영화였고 < 나이트 크롤러 >는 대한민국에서 뉴스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전에 한 번은 의무시청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에 대해 말할 거 같으면... 어떻게 크레디트에 “Perfume by Je Suis Gizella”라고 박는 영화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 28일 후 >의 작가 알렉스 갈란드의 감독 데뷔작인 < 엑스 마키나 >다. 최고의 SF는 < 월드 오브 투모로우 >가 차지했고 그 뒤는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가 뒤에 바짝 붙어 있으니 올해의 SF로는 3위 정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영화이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 엑스 마키나 >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전형성이다. <엑스 마키나>는 인간형 로봇 이야기다. 굉장히 흔해빠진 설정이고 역사도 깊다. SF만 따져도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로 거슬러 갈 수 있고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도 있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창조 신화들이 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 엑스 마키나 >에 대한 기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척 봐도 아름다운 여자 모습을 한 로봇 이야기이니 이성애자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노골적이다. 그리고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작가의 욕망 자체이다. 이야기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욕망에 충실해 포르노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포르노의 외설성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야기는 지겹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 뒤에 나올 닐 블롬캠프의 < 채피 >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예측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모습을 한 여성 로봇 에이바에 대한 쾌락적인 추구가 무시할 수 없을 비중으로 존재한다. 이런 추구는 소노야 미즈노가 연기한 쿄코에겐 더욱 노골적이다. 그리고 이름이 에이바가 뭔가. 꼭 이런 여자 모양의 로봇에겐 이브에서 파생된 이름을 붙어야 하나? 하지만 갈란드는 자신의 욕망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과학적 정직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만 확실하게 망해버렸던 로봇 영화 < 채피 >와 < 엑스 마키나 >를 갈라놓는 부분이다. 여기서 < 채피 > 이야기를 조금 하겠다. 이 영화는 < 엑스 마키나 >의 거의 정확한 대척점에 있어서 비교용으로 거의 이상적이다. 얼핏 보면 대량생산된 투박한 경찰 로봇인 채피가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에이바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사실적인’ 외양 밑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라. 과학, 논리, 철학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다. < 채피 >에서 주인공 로봇은 그냥 로봇 시대의 피노키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원형적인 이야기에 채피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뭐든지 하는데 그 과정 중엔 최소한의 고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은 채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림은 예술이고 예술을 할 줄 아는 존재라면 영혼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채피가 그린 그림은 아이패드 그림 앱으로 사진을 가공해 프린터로 찍은 것처럼 기계적이다. 구도에서부터 붓놀림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중요한 질문이지만 < 채피 >는 안 한다. 영화 내내 그렇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질문을 한다. SF 영화로서 <엑스 마키나>의 가장 큰 장점은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 줄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화된 TED 강의’라고도 이죽거리기도 한다던데, 이게 그렇게 큰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 질문과 대답이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확하며 재미있다면 그게 문제가 되나? 내가 미리 설정해 놓은 기준점을 < 엑스 마키나 >가 넘은 순간은 에이바의 성을 건드렸을 때였다. 많은 SF가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형 로봇은 여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남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로 인간 여자나 남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근거가 있는가? 많은 작가들이 이 부분을 건너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 이입하는 남자 주인공과 로봇이 섹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로봇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섹스는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그 질문을 한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에이바를 만든 천재 과학자 네이든은 자신이 에이바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이바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에이바의 내면은 강제로 분석할 수 없는 블랙박스이기 때문에 그에겐 일종의 튜링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의 직원인 카일렙을 불러와 테스트를 시킨다. 카일렙은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고 그 로봇을 네이든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뭐든지 할 생각이다. 하지만 에이바는 어떤가? 에이바는 네이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그 감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에이바가 인간 여성의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행동할 것인가? 게으른 작가들은 ‘그냥 그렇게 프로그램했다’라고 얼버무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엑스 마키나>는 답을 갖고 있다. SF는 오래된 장르이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1세기가 넘었다. 과학이 매서운 속도로 발전한 20세기와 21세기를 통과하면서 1백 살의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옛날엔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었던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린 레이 브래드베리가 그린 로맨틱한 고대의 화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나사가 보낸 로봇들이 보내온 자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고 SF는 현대 과학의 논리에 맞추어 계속 전진을 해야 한다. 그 과학과 논리는 현재의 지식일 수도 있고 이전 것보다 발전된 가설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이전엔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잘못된 상식이나 관습의 수정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과 특이점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나왔다. < 엑스 마키나 >와 < 채피 >를 빼더라도 < 빅 히어로 >와 < 그녀 > 같은 작품들이 있는데, <채피>를 제외한 모든 영화들은 다가올 인공 지능에 대한 21세기 초의 상상력을 반영한다. 물론 이 상상력의 결과물이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특이점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이게 오긴 할까? 정말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자아를 갖게 될까? 상관없다. SF가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토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제였던가, ‘서울아트시네마’가 옛 허리우드극장 자리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기억한다. < 얼굴없는 것들 >의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는 도중 조그만 사건이 벌어졌다. 앞줄에 앉은 한 중년남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감독에게 이런 영화를 도대체 왜 만들었냐고 따졌는데, 제법 긴 시간이 흘러도 그의 분노 띤 장광설은 끝나지 않았다. 진행자는 안타깝게도 그를 멈추지 못했고, 왜소한 체격의 감독은 거의 울먹이며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 아저씨는 화면 속의 소년이 절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긴 것 같았으며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카메라에 담은 행위를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당시 나는 멀리서 김경묵 이라는 감독을 보며 참 수줍은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수줍은 청년이라고? 글쎄, 과연 그랬을까? 김경묵 이란 이름을 처음 알린 단편영화 < 나와 인형놀이 >(2004)는 이 청년이 아이었을 때 어떻게 심심함을 달래며 자랐는지 보여준다. ‘So Shy''''''''''''''''''''''''''''''''''''''''''''''''''''''''''''''''''''''''''''''''''''''''''''''''''''''''''''''''''''''''''''''''''''''''''''''''''''''''''''''''''''''''''''''''''''''''''''''''''''''''''''''''''''''''''''''''''''''''''''''''''''''''''''''''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인형을 가지고 외따로 노는 꼬마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잘 탈 법한 청년의 과거가 엿보인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아이의 인형놀이를 비디오로 찍었으며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상 앞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극중 소년은 병원에 가 “나 자신을 모르겠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분명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주변의 꼬마들과 자신이 달라 혼란을 겪었을 따름이다. <나와 인형놀이>를 찍을 즈음, 소년 김경묵은 그런 혼란쯤은 이미 떨쳐낸 후였을 게다. 김경묵은 극중 꼬마를 빌려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쪽팔려할 짓거리를 보란 듯이 재연한다. 여기서 방점은 ’재연한다‘가 아니라 ’보란 듯이‘에 찍혀야 한다. 그는 보여주기 위해 재연했다. <나와 인형놀이>의 엔딩에서 소년 김경묵은 (담배도 못 피는 주제에) 담배를 꼬나물고 도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는 < 얼굴없는 것들 >에서 반복된다. 김경묵은 은밀한 매체인 홈비디오를 장롱 속에 감추고 혼자 돌려보는 대신 다 함께 보기를 권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그 비디오가 세상에서 굴러가도록 내놓았다. <얼굴없는 것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김경묵은 스크린 앞에 앉은 다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얼굴의, 그래봤자 이제 갓 스물 살이 된 청년은 여지없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경묵이 수줍은 청년이라고? 아니, 전혀. 통증은 그의 시선이, 그의 그것보다 더 싸늘한 타자의 시선과 충돌하면서 일어났다. 혼자만의(혹은 그들만의) 놀이가 리그 바깥에 있는 사람의 시선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소년의 놀이에 대해 쑥덕대기 시작했다. 나는 욕망의 충족이 곧 쾌락과 연결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래야 마땅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욕망이 곧 절망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채, 밝은 빛의 저편에서 그들의 욕망의 의식은 진행된다. 그들은 아무도 보지 못할 그들만의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의 욕망을 들춰낸다. 그들 중 누군가는 심지어 그곳에서조차 얼굴을 가린다. 마스크를 쓴 중년 남자는 헐떡이며 소년의 몸을 탐하고, 또 어떤 이는 두건을 뒤집어쓰고 바닥에 누워 똥을 받아먹는다. 의식을 마치면 그들은 덤덤한 관계로 복귀한다. 누군가는 서둘러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홀로 남는다. 남겨진 소년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매번 관계의 절망에 빠졌을 소년은 나를 향해 묻는다. “당신 눈엔 내가 무엇으로 보여?” 괴물처럼 단순하게 정의되는 존재도 없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괴물은 단지 인간과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괴물이 되었다. 그들에게 내면의 세계란 없다. 외눈박이 괴물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들에게 <얼굴없는 것들>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냥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곁에 놔두면 왠지 불안한 대상이다. 다가오려고 하면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야 하며, 설령 그것들의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대더라도 한사코 거부해야만 한다. 보통사람들을 들먹이며 돌려 말하지 않겠다, 내 눈에 < 얼굴없는 것들 >의 그것들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들은 괴물이다. 여기서, 창 안에 웅크리고 앉은 존재를 괴물로 규정하는 것은, 창밖에서 그의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시선은 곧 규칙이자 거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울에 비친 ‘그것’을 괴물이라 불렀다.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김경묵 의 데뷔작 < 얼굴없는 것들 >은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고작 스무 살의 감독은 너무 뜨거워 만질 수 없는 물건을 세상에 선물했다. 당시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영화도 <얼굴없는 것들>보다 더한 충격파를 던지진 못했다. 어지간한 영화에는 눈도 끔뻑 안하는 외국의 평자들도 <얼굴없는 것들>를, 건드리면 터질 핵폭탄으로 취급했다. 비록 소수의 관객과 만났을 뿐이지만, 그들 가운데 <얼굴없는 것들>의 충격을 잊은 이는 아마도 없을 게다. 나는 김경묵의 다음 영화가 궁금했다. 저질스러운 나는 그가 <얼굴없는 것들>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영화를 선보일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음으로 만든 < 청계천의 개 >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괴물의 탄생을 그린 <얼굴없는 것들>을 잇는 <청계천의 개>는 괴물의 활보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얼굴없는 것들>을 경험했던 나는 적당히 멜랑콜리한 심정으로 <청계천의 개>를 보았다. < 청계천의 개 >는 노래방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시작한다. 허림이란 가수가 1970년대 초반에 발표한 <인어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노래 가사에 맞춰 출렁이는 파도가 눈에 들어온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이 싸구려 이미지는, 카메라가 뒤로 빠질수록 앞의 이미지를 계속 부정하며 전개된다. 처음에 바다처럼 보이던 공간은 이내 폭포수가 떨어지는 계곡이라고 밝히고, 이어 폭포수 앞에 앉은 남자 인어의 자태를 보여주며 친숙한 자연의 이미지에서 키치와 환상을 더한 괴상한 이미지로 넘어간다. 그게 다가 아니다. 폭포수가 저속으로 떨어지고 카메라가 뒤로 더 빠지면, 보고 있던 것이 어두운 벽에 걸린 한 폭의 액자임을 알게 된다. 김경묵 은 또 한 번 우리의 시선을 시험하려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배경으로 흐르는 <인어 아가씨>란 노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노래는 가사에서 직접 ‘슬픈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는데, 슬픈 사연이 특이하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슬픈 게 아니라, 인어가 되었기에 슬프다는 거다. 달리 말해 인간으로서 사랑을 나눠야 하는데 인어라는 괴물로 변태했기에 슬프다는 거다. 노래가 끝나면 턴테이블 앞에서 울던 남자가 일어나 페트 병 안으로 자지를 밀어 넣고 오줌을 눈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김경묵의 영화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첫 번째 인물이다. 무심하던 이전 인물들과 달리, 그는 왜 슬픈 걸까. 자지가 있으므로 남자인 게 분명한데, 조금 지나 그는 여자로 분장한다. 털을 밀고 란제리를 착용하고 금빛 가발을 쓴다. 그리고 굵은 팔뚝에 환각제를 주사한 다음 투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선다. 그가 몸을 애무하는 동안 거울 속 그의 몸과 가발은 탈색된다. 그의 슬픔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그의 진짜 슬픔은, 여자가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거울 앞에 내보인 데서 기인한다. 거울은 말한다. 너는 괴물이라고. 그래서 남자는 괴롭다.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이 괴물이라니. <인어 아가씨>의 노래가사는 <청계천의 개>가 ‘슬픈 이야기’라고 일러준다. 귀기가 충만한 허림의 목소리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턴테이블 위에서 ‘슬픈 이야기’라고 네 번씩이나 강조해서 노래한다. 그러므로 예정대로라면 < 청계천의 개 >는 여자가 되지 못해 결국 물속으로 몸을 던져 괴물을 완성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스쳐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를 주목해야 한다. ‘슬픈 이야기’라는 가사가 다섯 번째로 나올 찰나, 남자는 턴테이블에서 바늘을 들어올린다.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건지, 스스로 슬픈 이야기를 끝내겠다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노래를 멈추는 건 남자의 손이다. 이후 <청계천의 개>는 처량한 노래를 멈춘 손과 정신을 물들인 환각제 사이에서 요동친다. 남자는 자기 몸을 제어하고 싶지만, 약물에 병든 그의 영혼은 자기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와 남자,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 때마다 영화 또한 컬러와 흑백 사이로 순간 이동한다. 경계를 통과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건 거울 또는 (남자를 감시하는 경찰이 쓰고 있는) 검은 선글라스다. 거울과 선글라스에 자신의 상이 포착될 때면,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가며 혼란을 겪는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혼란의 양극을 헤어나지 못한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부정해야 한다는 설정은 < 청계천의 개 >의 외형을 결정짓는다. 단 3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 얼굴없는 것들 >과 반대로, 자기 생각을 비현실적으로 여기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청계천의 개>는 주어진 조건 내에서 해볼 수 있는 온갖 시도를 다 해본다. 도입부의 싸구려 뮤직비디오는 앞으로 다양하게 나올 속악한 이미지들의 맛보기에 해당한다. 디지털로 찍은 영상에 스크래치를 내고 사운드와 컬러를 제거해 흑백무성영화를 만들어보고, 통기타 가수를 현장에 불러다 뮤지컬 분위기도 내보고, 영상을 좌우로 마주 붙여 두 개의 자아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기도 한다(빤하지만 이 장면이 마음에 든다). 그 중 톰 칼린의 퀴어영화 <스운>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는 공원 장면은 압권이다. 남자의 성기가 연상되는 인조대리석 의자 사이로 여자가 돌아다니고, 그녀를 중심으로 예쁜 얼굴의 남자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지는 장면은 웃지 않고 보기가 힘들다. 김경묵 은 그 장면 앞뒤로 순박하면서 저열한 뮤지컬 장면을 배치해 ‘B급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청계천의 개>는 고급한 정서에 바탕을 둔 작품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주어진 한계 때문이긴 하지만, 그 결과물은 남자가 통과하는 비현실적 상황 및 낯설고 일그러진 현실과 적절하게 조응한다. 혼란의 정점에서, 그녀(혹은 그)는 거울을 깨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그)는 자신이 믿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혹은 꿈)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그)의 혼란은 더욱 가차 없이 증폭된다. 그녀(그)가 겪는 극도의 분열 상태는 파괴된 사운드와 이미지로 표현된다. 거리에서 만난 눈 먼 소년이 예언한 것 - 너는 될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위험한 존재다 - 이 바로 이런 상황일까? 마침내 그녀(그)는 괴수에게 강간을 당한다. 아뿔싸, 김경묵 의 인물은 이번에도 파시즘적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매혹당하고 만다. 그녀(그)의 얼굴 위로 타락한 성녀의 고통스런 신음과 환희의 미소가 공존한다. 거울을 깬다고 해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깨어진 거울마저 그녀(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죽음의 충동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남자는 이제 결정해야 한다. 괴물이 인간이 되려면 진화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옥의 밤이 지나고 감시자도 사라진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청계천을 걷던 남자는 어디에선가 보았던 풍경과 마주한다. 인공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잔잔한 물결이 치는 그 곳. 그것은 그의 방 액자에 담긴 풍경 아니던가. 그 때, 남자는 그토록 갈망하던 반인반수의 인어가 바로 자신임을 자각한다. 문제는 거울이 아닌 자신이었던 게다. 전날, 남자는 맹인 소년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믿는 게 더 진실해요. 비록 그 믿음이 내가 만든 허상에 불과할지라도”라고 말했다. 그 믿음이 자각을 부른다. “넌 내가 될 수 없다”는 다른 자아의 폭압에 짓눌려 살던 남자는, 환상이나 그림이 아닌 비루한 청계천의 현실 앞에서 드디어 그 폭압을 뒤집고 그토록 갈망하던 네가 된다. 일원론과 이원론의 낡은 틀 따위는 비웃으며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괴물을 초월한 인간이었음을, 인어보다 훨씬 아름다운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 청계천의 개 >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인어 아가씨>로 막을 연 <청계천의 개>가 허림의 또 다른 노래 <별 이야기>로 끝맺는 건 그래서다. 청승맞은 목소리로 <인어 아가씨>를 부른 허림은 방정맞을 정도로 밝은 톤으로 <별 이야기>를 부른다. ‘노래하며 우리는 행복 찾아 길을 떠나요’라고. 인어의 슬픔은 별의 행복으로 화한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반영하고, 감독은 사회를 반영한다. 이 발칙한 감독은 <청계천의 개>를 통해 작가와 감독을 모두 꿈꾸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부분을 성취했다. 어쨌거나 그가 동시대의 어떤 젊은 감독보다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자기 영화의 한 막을 열고 닫았다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사족 : < 나와 인형놀이 >, < 내안의 평안 >, < 얼굴없는 것들 >, < 청계천의 개 >는 김경묵 영화의 첫 번째 막을 이룬다(<암코양이들>, <머리카락의 기억>, 는 보지 못했다). 괴물이 탄생했고, 괴물은 자신을 부여안았다. 언젠가 나는 김경묵이 두 번째 막의 첫 번째 장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괴물의 첫걸음을 영화화하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그 작품 < 줄탁동시 >를 얼마 전에 보았다. 괴물은 인간이 되어 우리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서툰 걸음으로 말이다. 이제 나는 그가 그 인간의 이야기로 자기 영화의 2막을 채울 것임을 확신한다. 김경묵의 인간이 또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나는 벌써부터 궁금해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