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芒種)
- 감독
- 장률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류연희, 김박, 주광현, 왕동휘, 사시, 류서화, 로아려, 완박운, 상홍, 진영, 조배, 장의청, 장국서, 하진우, 손뢰, 리겸의, 장혜, 류경지, 추해빈, 왕해명, 장위, 주항, 김리, 리해서, 한옥생, 모건국, 왕해명, 장뢰, 리정, 마하민, 왕울화, 양가, 류련제, 리신언, 장영생, 풍강, 후록상, 왕설암, 여선학, 최란
장률 감독의 영화 중 재중 동포의 디아스포라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 망종 >인데 거기서 최순희는 아들 창호에게 “너는 조선족 새끼다. 조선말을 알아야지”라고 말하면서 말을 가르친다. 창호는 ㅁ, ㅂ, ㅊ을 ‘므브츠’라고 발음하면서 조선어를 학습하는데, 별로 내켜 하지는 않아 하면서 TV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순희는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관계로 고향을 떠나 북경 근처 공장 지대, 기차 길 옆 버려진 집에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살면서 김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조선포채’라고 쓰인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김없는 중국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인이다. 그녀는 허가증이 없어 경찰에게 자전거와 김치를 모두 빼앗기기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최순희에게 김치를 사러 오는 남자들은 이러저러한 호의를 베풀거나 그녀의 육체를 요구한다. 김치를 사러 오던 경찰은 음식 판매 허가증을 내주고, 조선족 자동차 기술자 김 씨는 그녀를 노래방에 데리고 간다. 또 아들이 유리창을 깨어 사과 차 찾아갔던 이웃집 남자는 김치 납품을 주선하겠다면서 자신과의 육체적 거래를 요구한다. 이러한 와중에 최순희가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것은 조선족 남자 김 씨다. 처음 김 씨가 김치를 사러 왔을 때 최순희는 그의 조선어에 반응하지 않고 중국어로 말한다. 김 씨는 최순희가 담배를 꺼내 물자 조선 여자가 웬 담배냐며 질책하듯 말하다가 괜한 간섭을 했다고 말을 거둔다. 이후 김 씨가 김치를 사러 다시 오자 최순희는 “뭐 사겠습니까?”라고 조선어로 묻는다. 그가 배추김치를 사자, 다른 김치를 덤으로 얻어 준다. 그러고 나서 최순희는 공안들에게 김치와 자전거를 빼앗긴다. 혼자 길을 걸어가던 최순희를 발견한 김 씨는 그녀를 자신의 자전거에 태우고 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그녀의 배경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이곳은 조선 사람 보기 힘든 곳인데 조선 사람끼리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권유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래 남편은?” “사람 죽였어요.” “뭣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서?” “벌 받았지요.” 이후 김 씨는 최순희의 집을 찾아가 잠자리를 함께한다. 최순희와 이웃해 사는 성매매 여성들은 김 씨가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만류하지만 “나도 그리 좋은 여자는 아니지.”라고 대꾸한다. 김 씨의 부인이 경찰들을 데리고 오자 김 씨는 최순희가 매춘을 한 것이고, 자신이 돈을 주었다는 거짓 정보를 부인에게 흘린다. 경찰은 최순희에게 김치 파는 여자가 몸도 판다는 비방을 한다. 최순희는 경찰에 끌려가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놓는다. 길림성 연길시에서 살던 조선족이며 32세다. 이후 자신의 김치를 사주며 호의를 보이던 왕 경관에게 바로 경찰서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을 잃는다. 왕 경관의 약혼녀가 그들 결혼식 연회 음식으로 김치를 부탁하자, 최순희는 김치에 쥐약을 섞어 버무린 후 배달한다. 결혼식장으로 많은 앰뷸런스들이 도착하고 최순희는 집을 나와 기차 길을 건너 보리밭을 향해 걸어간다. 조선족의 기표인 김치는 여기서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재앙의 기호로 바뀐다. 김치는 쥐약과 인접한 죽음의 기호가 된다. 영화의 이러한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최순희의 김치는 여러 것들과 치환되는 은유이자, 그 이전 7위안의 돈과 교환되는 물물이었다. 영화가 그려내는 일상은 많은 부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손질하고 배추를 씻는 그녀의 노동의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조선족이 구성하는 기호적 공간의 미장센을 김치 만들기와 그렇게 만들어진 김치가 팔리고 빼앗기고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김치 파는 사람이 몸도 판다는 조롱과 질타는 남편의 범죄로 조선족이 주로 살고 있는 길림성 연길 시에서 북경 근처의 산업 지역으로 이주했고 가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여자가 무엇을 매매해야 하는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조선족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풀려난 후, 그녀는 창호가 조선어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연습장을 찢으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창호의 죽음 후 그녀는 김치를 독극물로 바꾸어버린다. 장률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치와 조선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성일: < 망종 >은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최순희의 이야기다. 중국 사람들에게 김치란 어떤 음식인가. 별미로 찾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에 김치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의례인 결혼식에 김치를 올리는 것이 한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이 영화에서 조선족 최순희가 다른 걸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김치를 팔 때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장률 : 중국에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4,700만 명 중 200만 명은 굉장히 크지만 그것을 14억 중국 인구 중에 흩트려 놓으면 찾지도 못한다. 옌볜에만 가면 조선족이 많지만, 중국 다른 지방에선 알아보지 못한다. 생긴 것도 같고. 그런데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보면 안다. 전국 각지 어디나 김치 파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보면 다 조선족이다. 조선 부녀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김치 팔아서 잘사는 사람은 없는데, 가난해도 성실하게 계속 그 김치를 밀고 다니며 판다. 중국에서 김치를 아는 사람이 그래서 많다. 그건 <대장금> 때문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았던 거다. 중국에는 행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게 바로 김치 파는 사람들이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다. 먹어도 문제없고 배탈 안 난다고. 그렇게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멀리서 바라본다. 고생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라면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나의 친척 같고 자매 같다. 그리고 김치를 중국 결혼식에 놓는다는 게 한국인들에게는 이상할 수 있지만, 중국은 요즘 급격히 변하고 있어서, 결혼식 음식이 완전 짬뽕이다. 중국 물만두 올라왔다가, 서양식 요리가 올라오고.... 32살 최순희가 김치 파는 아줌마로 등장할 때, 그녀는 위와 같은 김치-조선족 여자-성실-청결 등의 기호적 작용 속에서 감지된다. 조선족 여성의 김치에 관련된 재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김치가 독약으로 바뀔 때, 문화적 접촉이나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는 세미오스피어(semiosphere)가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바뀐다. 두 세계를 잇는 마술사 대신 앰뷸런스가 등장하고, 조선족 여성과 나머지(여기에는 조선족 남성도 있다)의 적대는 폭발한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고, 그래서 연변을 떠나 이 북경 근처의 공장 지대에 왔던 최순희는 아들을 잃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김치에 쥐약을 타 몇 대의 앰뷸런스가 오는 재앙을 만든다. 청결한 맛은 치명적인 독으로 바뀐다. 김치는 두 개의 문화를 매개(catalyst)하는 대신 재앙(catastrophe)이 된다. 그녀가 독김치로 의미화하는 것은 급진적 거부다. 자신의 김치를 필요로 하고 샀던 모든 남자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녀의 김치는 7위안이라는 돈으로 교환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조선족 김 씨, 이웃집 남자, 왕 경찰관 등은 늘 덤, 잉여,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그래서 김치에 독을 탈 때 그녀는 그 잉여에 독을 놓는 것이다. 잉여가 저주의 몫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김치가 작용하는 곳은 왕 경관으로 대변되는 공안, 국가 소 권력 집단이다. 그녀의 복수는 국가로 향한다. 그녀는 헐벗은 삶, 무능력 즉 자유의 박탈 외에는 어떤 잠재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삶으로 가고 있는 듯 보였으나 세미오스피어의 변경을 보여주고 번역 행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 장식이 없는 미장센, 판타지의 틈입이 없는 방식을 고수하다가 한 장면에서 다른 논리를 따라간다. 최순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이전 최순희의 아들 창호는 용이 그려진 연을 푸른색 스프레이로 뒤덮었다. 창호가 푸른색으로 색칠해나가는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만의 특이한 세계의 고집이고 창조다. 기차 길 옆,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최순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프레임 속, 기차 길 옆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앰뷸런스가 보인다. 사람들은 최순희를 본다. 최순희가 그들을 본다. 앰뷸런스의 닫혔던 문이 열리고, 최순희는 슬픔과 패닉에 빠진 표정이다. 이때 최순희를 보는 시선이 최순희에 포커스 인했다가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들의 집에 맞추어진다. 망자의 시선, 죽은 창호의 시선이다. 이 소년 망자의 엄마 최순희는 연변에서 살다가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자 북경의 외곽 지대에서 김치 행상을 하게 된다.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연변을 떠나 북경 외곽 지대에 있는 최순희는 두 번의 이주를 겪은 것이다. 한번은 그녀 부모나 더 먼 조상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또 중국 내에서 다시 한 번 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떠난 것이다. 최순희는 창호와 이곳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지냈다. 사는 집은 온기 없이 황량하고 쥐가 출몰한다. 나는 망자의 시선, 이러한 집을 들고나는 죽은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엄마, 집 그것의 그러한 유령성, < 망종 >이 사유하는 모국, 엄마, 집의 문제가 흥미롭다.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이 친숙한 것으로 동요하는 이 운동. 예컨대 이 집, 폐가는 이들의 집이 아니지만 또한 집인 것이고 망자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다 이 집에 머문 후 떠날 때 익숙한 것의 부재와 현존(un-home-liness)의 느낌이 지극하다. 친밀한 낯섦의 깊은 동요(the deep stirring of the uncanny)라고 부를 수 있는 망자의 시선으로 포커스 인 되는 이 장면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머무르거나 소유할 수 없는 집과 소수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자리를 잡았으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자의 시선이다. 나의 삶의 거주지로서의 세계(Oikos), 나의 존재노력으로서의 거주의 관리(Oikonomia). 이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엄마에게 부여되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시선. 엄마의 얼굴과 집이 포커스 인, 아웃되는 이 장면을 레비나스 윤리학과 영화적 재현을 가능하면 관통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레비나스는 광학으로서의 윤리학, 즉 윤리학이 존재론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체와 타자의 구제적이고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는 광학(optics) 혹은 영혼적 광학이라고 본다. 이때 일종의 광학으로서의 윤리학은 개요적이고 전체화 시키며 객체화하는 시각의 특성을 배제한 이미지 없는 또 다른 시각이며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상이나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얼굴의 클로즈업은 유리 로트만에게 있어서는 ‘친밀함’ 과 ‘내밀함’ 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의 관찰이라는 일상의 경험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세계나 지극히 친밀한 세계의 특징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 친구와 적들 -이 관객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의 친분 관계란 인물의 특징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핏줄의 불거짐과 얼굴의 주름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내밀한 관계인 것이다.” - 김수환, 「영화 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개념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8, 43쪽. 반면 엡스탱, 발라즈(Bela Balazs), 그리고 바르트(Roland Barthes)는 바로 얼굴에서 의미심장한 ‘타자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 그것은 기호학의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자족적 실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가 엡스텡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클로즈업(그는 클로즈업을 영화의 영혼이라고 불렀다)은 발라즈의 이른바 “인상학적(physiognomic)” 영화 이론의 중심 테마이기도 했다. 이러한 클로즈업의 포커스 인과 아웃의 운동에서 아이를 잃은 소수자 여성의 얼굴은 타자성과 내밀함을 동시에 극대화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경찰관의 결혼식에 피로연 음식으로 가져간 김치에 독극물을 탄다. 그녀가 이렇게 얼굴을 잃을 때, 체면을 버릴 때 그녀의 괴물성이 생산한 중국 공안의 괴물성이 드러난다.
< 경계 >(2007)는 장률 의 세 번째 영화이고, 그의 두 번째 영화 < 망종 >(2005)과는 일종의 2부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작품이다. 공간적 배경은 베이징 외곽의 쇠락해가는 공업도시에서, 몽골의 변경 지대로 바뀌었다. 인물은 남편이 살인죄로 수감된 후 김치를 팔면서 아들과 살고 있는 조선족 여인에서, 북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남편을 잃은 후 아들과 함께 중국의 거쳐 몽골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을 밟아온 탈북 여성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공간적 배경과 중심인물이 처한 구체적 상황은 바뀌었지만, 두 영화는 가부장이라는 보호막 또는 벽이 없어진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두 모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강한 공통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 <경계>는 ‘사막을 소재로 나무를 심는 남자의 이야기를 해보지 않겠냐는 한국 제작사의 제안’으로 시작된 영화로 알려져 있는데, 장률은 그 제안을 (이미 <망종>을 통해 했던) ‘순희와 창호라는 두 모자’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하고 변주하는 기회로 삼았던 셈이다. 장률에게 이 반복과 변주는 왜 필요했을까? 나는 이것이 장률의 일관된(적어도, <망종>과 <경계>를 관통하는) 영화적 화두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률의 영화적 화두는, 두 가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라는 경계에 대한 질문, 그리고 그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그러니까 서로 다른 국가체제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속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장률 영화세계의 특이성일 것이다. <망종>에는 없지만 <경계>에는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국경’이라는 경계의 물리적 현존이다. 아마도 이것이 장률이 <경계>를 통해 같은 질문의 반복 필요성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 경계 >라는 영화에서 ‘경계’는 다층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히야쯔가르’ 즉 사막과 초원의 점이지대인 그 공간은 동시에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기도 하다. 전자가 여전히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는 ‘사이 지대로서의 경계’라면, 후자는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고하게 차단하고 가로막는 ‘벽으로서의 경계’이다. 이 이중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경계 공간에서, 가부장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면서까지 그곳을 삶의 공간으로 지켜내려는 한 남자와, 국가와 남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가부장적 권력으로부터 밀려난(또는, 벗어난) 한 여자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경계>는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 영화이고, (적어도 현재로서는) 두 남녀의 행복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냉철한 대답으로 끝을 맺는 영화다. < 망종 >의 순희는 서서히 몸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한 조선족 남자의 배신 때문에 더 이상 아들에게 조선족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게 되는 엄마이자, 아들을 잃고 나서 단호하게 가부장-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여성이다. <경계>의 순희는 새롭고 낯선 공간에서 만난 이민족 남자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되었지만 끝내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없게 된 여성이다. <경계>의 순희는 왜 그 경계 지대를 삶의 공간으로 바꾸는 데(또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바깥으로 탈출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는 두 가지 이미지로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있다. 하나는 끊임없이 굉음을 내며 그 새로운 삶의 공간을 가로막고 있는 탱크라는 이미지이고(영화 속에는 창호, 헝가이, 순희가 이 탱크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세 번 반복해서 등장한다), 또 다른 하나는 순희가 몽골 병사와 정사를 나누는 것을 아들 창호가 보게 되는 장면이다. 전자를 외부의 벽이라 할 수 있다면, 후자는 순희라는 여성의 마음속에 강고하게 남아있는 내부의 벽(가부장적 가족제도가 강요하는 모성신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망종>의 순희는 조선족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아들 창호를 설득하며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려 하지 않지만, <경계>의 순희는 자신과 몸을 나눈 몽골 병사에게 (헝가이가 엄마를 지키라며 창호에게 준) 총을 겨누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그 여성적 욕망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난다. <경계>가 <망종>보다 여성으로서의 순희의 욕망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영화(아들 창호를 놓아두고 혼자 도망가려는 시도를 하는 순희, 한 밤중에 집을 나가 홀로 나신으로 초원을 자유롭게 걸어보는 순희)라는 점에서, 두 영화의 결말에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담겨있다. 국경을 넘어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라는 벽에 대한 질문 또는 저항은, 현재로서는 그러한 아이러니로 밖에 답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망종>과 <경계>라는 2부작에 담겨 있는 ‘재중 조선족 3세라는 경계인’ 장률 의 근본적인 질문이자 전언일 것이다.
내 인생의 한국영화 중 궁극의 한편은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다. 시각·청각·이야기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종합적’으로 그만한 감흥·충격을 안겨준 우리영화는 아직까지는 없다. 정서적 측면으로 한정하면, 그것은 장선우 감독의 < 우묵배미의 사랑 >(1990)이다. 이 땅의 보통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일상을 그만큼 그럴 듯하게 극화한 사례와 조우하질 못했다. 한편 고심 끝에 선정해 대중음악 전문 사이트 www.izm.co.kr의 CINEMA & OST에 발표한 ‘200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10’ 1위작은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2003)이다. “시대사와 개인사의 환상적 결합! 난 여태 이 영화만큼, 치사할 대로 치사하고 파쇼적일 대로 파쇼적이며 남루할 대로 남루했던 1980년대 우리 사회를 실감 넘치게 포착, 묘사한 예를 기억하질 못한다.” ‘한국영화 걸작선’이란 취지를 감안하면 따라서 이 지면에서 소개해야 할 영화는 위 셋 가운데 하나여야 마땅할 테다. ‘2000년대 이후’로 그 시기를 확대시킬 경우, < 살인의 추억 >과 정상 자리를 놓고 큰 다툼을 벌일 이창동 감독의 < 시 >거나. 하지만 끝내 그 네 걸작 중 한 편을 택하긴 싫었다. 이미 다뤘거나, 너무 ‘뻔해’ 싱거운 선택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였다. 또 다른 함의를 띨, 다소는 의외적인 선정을 하고 싶었다. 그 결과, 장고 끝에 고른 그 한 편은 < 형사 Duelist >(2005)다. 위 ‘200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10’에서 <살인의 추억>과 < 올드 보이 >( 박찬욱 , 2003), < 망종 >( 장률 , 2006), < 복수는 나의 것 >( 박찬욱 , 2002)에 이어 5위에 위치시킨, 이명세 감독의 기념비적 문제작! < 형사 >는 평소 ‘매혹’Attraction/s이라는 프레임으로 영화는 물론 오락·예술 전반을 즐기고 평하는 내 관점·접근에 완벽히 부응했다. 영화에서의 매혹은 시각ㆍ청각ㆍ내러티브ㆍ주제 등 전 층위에서 관객을 끌어당기는, 그로써 관객에게 감각적ㆍ감정적ㆍ심리적ㆍ지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들을 가리킨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왔지만 <형사>는 무엇보다 시ㆍ청각 층위에서 압도적 매혹을 뿜어내는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 텍스트다. 주ㆍ조연 배우들의 호연 등 상투적 덕목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말자. 단적으로 슬픈 눈( 강동원 분)과 남순( 하지원 )의 검투에선 가히 발레적 아우라가 발산된다. 수준급 완급의 리듬 속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검무는 황홀경 그 자체다. 더욱이 그 함의는 외연적 칼싸움을 넘어 맺어질 수 없는 두 연인 간의 사랑 행위다. < 와호장룡 >(이안, 2000)의 그 유명한 대나무 시퀀스에서의 대결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잘 알고 있다. < 형사 >가 내러티브와 연관해 적잖은 평자들로부터 크고 작은 비판·비난 세례를 적잖이 받았다는 것쯤은. 후에 영평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수상 등 크고 작은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영화는 선보이자마자 비평적으로 최악에 가까운 혹평ㆍ질타를 받았다. 흥행적으로도 고작 1백만 선을 넘는데 만족해야 했다. 저주에 가까운 악평의 요지는 “그림은 좋은데 이야기가 영 아니”며 “스타일 과잉”이라는 것이었다. 실패한 화제작들에 으레 쏟아지곤 하는, 식상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천편일률적 단죄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숱한 비판·비난들에 동의하진 않는다. 우선 < 형사 >의 내러티브가 엉터리, 라는 등의 단죄부터가 그렇다. 영화는 조선 왕조를 배경으로, 가짜 화폐 유통 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여느 그렇고 그런 대중영화들과는 달리 영화는 ‘사건’에만 집중하질 않는다. 김성수 감독의 < 무사 >(2001), 장훈 감독의 < 고지전 >(2011) 등이 그런 것처럼, 사건보다는 캐릭터들의 ‘사연’에 방점을 찍는다. 플롯 위주의 단순한 무협 액션물에 그쳤을 수도 있을 영화는 그럼으로써, 여형사 남순과 무명의 자객 슬픈 눈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숙명적 대결을 그리는 멜로 시대극으로 비상한다. 두 연인을 축으로 전개되는 메인플롯에 곁들여진 일련의 서브플롯들이 영화의 입체성을 배가시킨다. 남순-안 포교( 안성기 )와 슬픈 눈-병판( 송영창 ) 간의 유사부성 드라마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복합 플롯의 영화는 기-승-전-결 등 주류 영화 특유의 도식적 구성을 따르는, 손쉬운 노선을 걷지도 않는다. 도입부부터가 그렇다. 설정 쇼트ㆍ시퀀스를 통해 내러티브의 발단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건의 중심으로’In Medias Res 전격 뛰어들어 스토리를 추동시킨다. 따라서 애초부터 안일한 영화보기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도입부 이후 펼쳐지는 사건들은 시간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이야기를 따라가려면 두뇌를 적절히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정한 지적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엉망이라고? 그처럼 관객의 능동적ㆍ적극적 참여를 유인하는 지적 작업이 요구되는 멜로드라마를 가리켜? 천만의 말씀, 이다. 그런 비난은 내러티브의 원 재료로서 스토리와, 그 스토리의 구성ㆍ배치인 플롯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내러티브적 몰이해·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공산이 크다. 역설컨대 < 형사 >처럼 지적 자극ㆍ감흥을 선사하는 러브스토리는, 국적 불문하고 흔치 않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1974>),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 2002)>, 이창동 (< 오아시스 , 02>) 등의 극소수 예가 떠오르긴 해도……. ‘스타일 과잉’도 그렇다. 이명세 감독의 스타일리스트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장편 데뷔작 < 개그맨 >(1988)부터 최근작 < M >(2007)에 이르기까지 그만의 연출 스타일로 개성 만점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문제적 명장이다. 그 정점에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9)와, 이 영화 < 형사 >가 위치한다. 스타일 과잉 운운하며 <형사>를 비난하는 건 따라서 이명세의 영화세계를 부인하는, 몰상식적 처사로 비칠 공산이 크다. 스토리텔링보다 시·청각적 연출에 보다 더 큰 공을 들였다 한들 그게 어찌 스타일 과잉이며 비난거리가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형사>와 여로 모로 비교될 법한 이안 감독의 < 와호장룡 >도 스타일 과잉이라 문제란 말인가? 2000년대 이후 세계 영화사의 그 기념비적 걸작 무협 멜로물이? 사운드 연출에 세심히 주목하면 < 형사 >의 매혹은 한결 더 커진다. 영화는 음악은 말할 것 없고, 캐릭터들의 대사 및 음향효과마저도 음악적 리듬에 실어 표현한다. 촛불의 떨림, 다시 말해 묵음Silence의 순간까지도 사운드 이펙트처럼 구현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 정교한 사운드 연출에서 <형사>와 비견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우리영화는 < 복수는 나의 것 > 정도다. < 형사 >의 더 야심찬 매혹은 특별한 편집으로서 몽타주에서 감지된다. 무용적 이미지와 음악적 사운드 사이의 충돌·조화미는 단연 주목할 만한 값진 성취다.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한 바, ''''''''''''''''''''''''''''''''''''''''''''''''''''''''''''''''내적 몽타주''''''''''''''''''''''''''''''''''''''''''''''''''''''''''''''''Internal Montage는 가히 압권이다. 일찍이 지면이나 강의 등에서 피력한 바 있듯, 코믹하거나 슬프거나 공포스럽거나…대중영화는 대개 단일 쇼트 내에선 어떤 감정 상태를, 하나의 주된 톤으로 표출하기 마련이다. 관객을 영화가 원하는 특정 감상 모드로 몰입시키고, 그로써 관객의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형사>는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 복수는 나의 것 > 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쇼트 안에서 복수 톤을 부여하는, 탈 대중영화적 실험을 감행한다. 그 실험이 긍정적 성공으로만 귀결된 건 아니어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독특한 너무나도 독특한 영화체험을 안겨주면서 말이다.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남순의 성격화Characterization와, 튀는 캐릭터 남순을 예측 불허의 해석력으로 소화한 하지원의 연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하지원은 코믹과 멜로, 액션 연기를 일거에 선보인다. 영화 전체에서만이 아니라 동일 쇼트 안에서 멜로로 시작해 액션으로 넘어가 코믹 연기로 마무리하곤 하는, 전례 없는 고난위 연기를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이만하면 ‘한국영화 걸작선’으로 < 형사 >를 고른 이유가 어느 정도는 전달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