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아 함께 가자
- 감독
- 김소원, 이세빈, 주수연, 김주리, 신윤정, 오아란, 정종인
- 제작년도
- 2013
올해로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 일본 개봉 10주년을 맞이했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이 국내 정식 개봉한 것은 2년 후인 2009년 이야기지만, 적어도 회고하기엔 적절한 핑곗거리긴 하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을 처음 만났을 때 그 감흥은 아직도 선명하다.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박력과, 거기에 대비되는 서늘한 우수, 일말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활극 애니메이션이라고 할까.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써도, 하나의 영상 작품으로써도 훌륭한 이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을 수작이라 생각하며, 이런 애니메이션을 툭 하고 데뷔작으로 내놓은 안도 마사히로 감독은 분명 좀 더 주목받아야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을 이루고 있는 재료는 뻔하다. 어두운 과거를 지닌 고독한 무사 나나시가 어린 아이 코타로의 의뢰를 받아 그를 호위하고, 코타로를 쫓는 색목인 무사 라로우와 숙명적인 대결을 벌인다. 아마 당신이 이 얼개를 들고 제작사나 편집자를 찾아간다면 “잘 먹히는 소재긴 한데 뻔하지 않냐”라고 들을 것이다. 1960-70년대 일본 어딘가 동시 상영관에 걸렸다가 사라졌을 법한 찬바라 영화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할까. 아마 이 기획을 주도한 미나미 마사히코나 각본을 쓴 타카야마 후미히코 (<기동전사 건담 0078> <라제폰> <푸른 꽃>), 감독 안도 마사히로도 그런 점을 의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장르 영화/애니메이션들이 그렇듯이,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은 그런 뻔함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그 뻔함을 뛰어넘는 힘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액션 퀄리티의 훌륭함을 언급할 것이다. 실제로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에 드러나는 육체를 베어내고 해체하는 액션에는 강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에는 나카무라 유타카라는 일급 애니메이터가 참여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원펀맨> < 카우보이 비밥 > <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가 있으며 현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본 애니메이터라 할 수 있다. 그가 맡은 마지막 액션 시퀀스는 한마디로 굉장하다. 여기서 나나시와 라로우가 벌이는 검술 액션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 예술이며, 카와지리 요시아키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이 이뤄낸 도검 액션 연출의 새로운 경지다. 비단 마지막 액션 시퀀스 뿐만이 아니라, 안도 마사히로와 나카무라 유타카, 그리고 애니메이터들은 가상의 카메라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철과 살이 서로 맞닿는 극적인 순간에 인물들의 움직임과 환경이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이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는, 뻔한 이야기를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정서’를 잡아내며 액션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독히도 클리셰적인 관계에서 시작하지만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왕이 없던 시절''의 비정함과 그럼에도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석적이지만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관계는 나나시와 코타로처럼 계약 관계에서 시작했다가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하기도 하며 나나시와 라로우처럼 강렬한 애증으로 뒤얽힌 라이벌 관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의 각본과 연출은 한 인물이 그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그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가지는 감정이 어떤건지, 그리고 이런 관계와 감정이 액션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도 잘 알고 있다. 타카야마와 안도는 농담삼아 이 애니를 남자들 간의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정확한 기술이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원형적인 관계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이 액션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애니다. 상술한 나나시와 라로우의 행위 예술적인 액션조차 뛰어난 감정 묘사가 없었다면 그저 작화 견본 쇼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은 인물을 감싸고 있는 색채와 공기가 가져다주는 분위기가 어떤 건지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에는 쾌청한 날이 별로 등장하지 않으며 광량도 많지 않아 어딘가 텁텁하고 짓눌린 느낌을 준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날씨는 더욱더 차가워지고 광량은 적어진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물들을 보여줄 때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어딘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마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계속 표류하며 강한 자와의 싸움만을 목적으로 삼는 라로우나 참혹한 과거에 괴로워하며 정을 숨기려는 나나시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쓸쓸한 색채와 공기는 상술했던 불같이 이뤄지는 액션과 만나 폭발한다.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이 그랬듯이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먹구름, 눈과 비가 가져다주는 엄혹한 이미지를 장르로 끌어와 이방인인 인물들이 서 있는 시대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려내는 애니메이션이다. 그 점에서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자극적이지만 총잡이나 칼잡이의 쓸쓸한 감정을 그려냈던 1970년대 서부극 영화나 찬바라 영화의 후예기도 하다.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이 이룬 성취를 일부러 과장할 생각은 타카야마와 안도의 대담에서도 그들은 자의식 없는 활극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 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영상 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캐릭터에게 무게를 부여하는 활극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그 쉽지 않은 일을 근사하게 해낸 활극 애니메이션이다. 그 점에서 타카야마 후미히코와 안도 마사히로는 그들이 좋아한다고 밝힌 돈 시겔 감독이 해냈던 성취를 애니메이션에서 이뤄내고 있다. 비록 그들의 현재 커리어는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에서 떨어져 있긴 하지만 (과도기적인 < CANNAN >을 거쳐 나온 안도 마사히로의 후속작인 < 꽃이 피는 첫걸음 >이나 <빨강머리 백설공주>는 화사한 색채와 밝은 감수성으로 소녀들에게 초점을 맞춘 애니메이션이었다.) 언젠가 그들이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이 이뤄냈던 그 순간을 다시 그려 내길 기대하고 있다.
흔한 TV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의 단체 스태프 사진. 이들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포부 또한 거대하다. 하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애니메이션 만듭니다” “네?” “아.. 만화영화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아~ 그래요? 우리 애들도 만화 좋아하는데”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건, 아니면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든, 대화에서 어쩌다 직업을 말하게 되면 백중팔구는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끝난다. 우리 애들이 좋아하는 만화. 그렇다. 나는 (사실 원고 작성하면서 개인적으로 ‘나는’과 같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것도 TV 시리즈,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말하자면 현재까지 두 시즌 정도 방영을 하였고, 차기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한국의 대표하는 유명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소박한(?) 스튜디오에서 작은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실제로 몇몇 큰 스튜디오를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제작·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들의 제작사는 모두 작고 소박한 회사들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시장에서 만들어지고 있거나 기획되고 있는 작품들의 내부 과정을 조금씩 정도는 귀동냥으로 듣거나, 실제로 직접 보는 경우가 많다. 재밌는 상황도 있고, 즐거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많으면서도 제작 중에 생기는 우여곡절, 기획 마케팅 과정에서의 절망과 환희 등도 있다. 많은 작품들이 ‘애’들만 보는 ‘만화’영화 정도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또는 실제로 그렇게 기획되기도 하였지만, 원대한 꿈으로 시작했던 작품들도 많다. 이 글은 한국의 작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TV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연작의 첫 번째 시작 글이 될 것 같다. 워낙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이 있어서 이 모든 이야기를 담기엔 지면과 내 의지가 좁고 얕아 한계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뭐 ‘최선을 다하면 우주가 도와줄 것’이라 믿고, 시작해 보자. 작품의 기획은 가장 즐거운 과정이면서도, 험난한 여정이다. 작품의 얼개를 정하고, 각각의 아트팀에서 (반드시 이렇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임의로 작품을 직접 만드는 여러 팀을 아트팀으로 하고, 프로듀서, 행정, 마케팅 담당을 임의로 기획팀으로 부르겠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생각을 던지는 그 과정은 정말로 즐거운 과정이다. 하지만 점점 작품의 색이 정해지고 설정의 경계가 명확해질수록 여러 험난한 과정이 시작된다. 보통 기획과정에서는 작품의 콘셉트, 메인 스토리, 캐릭터, 배경 등을 설정하는데, 보통 프로듀서와 총감독, 시나리오 작가, 디자이너가 참여하여 회의를 통해서 진행된다고 알려져 있다. 뭐 사실 기획의 시작에 대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본격적인 기획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예의 언급한 거의 모든 아트팀들이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TV용 애니메이션의 최초 아이디어는 회사의 대표 또는 사장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지점이 많다. 투자 때문이다. 회사의 규모가 크고 돈이 많은 회사라면 제작비에 대한 걱정 없이 어떻게 해보겠지만, 뭐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투자가 되지 않으면 인건비가 생기지 않으니 작품 제작이 되겠는가? 험난한 기획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국내에서 TV용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는 기관은 일반적으로 국내 방송사, 투자사, 각종 펀드와 관의 지원 사업 등등이 있는데, 거의 모든 제작비가 이러한 투자금들이 모여서 구성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투자사는 결국 투자한 만큼 돌려받든지, 아니면 그 이상의 수익을 발생시켜야 한다는 점인데, 국내에서의 방영만을 통해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영료 산정방식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다시 말해 애니메이션 자체로만 가지고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회사가 별의별 사업 기획을 해서 외주를 주든지, 아니면 직접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캐릭터를 이용한 머천다이징이나(젓가락부터 핸드폰 껍데기까지), 교육용 출판 사업, 봉제 인형, 완구, 심지어는 어린이 뮤지컬 제작, 키즈카페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사업을 무지막지하게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보통 TV 시리즈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한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15분 포맷에 26부작 정도로 볼 수 있다. 총 제작비는 보통 적게는 10억부터 많게는 25억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냥 한 15억 정도로만 보고,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3억, 투자사가 7억, 방송사가 5억 정도를 투자했다고 치자. 이때 제작사는 돈이 없으니 국가 지원사업에서 지원을 받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대출을 이용한다. 그렇다면 제작사의 경우는 전체 제작비 15억 에서 투자 비율이 20%밖에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품 관련된 전체 수익의 20%만 수익으로 돌려받는다. 그마저도 계약에 따라서는 투자사 선리쿱 이후 제작사 지분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수익을 더욱 내야 하는 상황이고, 투자사도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는 성공모델을 갖춘 작품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국내 TV용 애니메이션 시장이 ‘키즈’+‘변신완구’+‘교육’이라는 공식이 구성된 것에는 이러한 수익구조와 투자 방식에서부터 기인한다. 작품의 기획 초기 아트팀의 즐거운 기획이 점점 시간이 갈수록 먹구름이 끼게 되는 것은 “그러면 투자받기 힘들다”라는 애니메이션 제작 내부의 자기 검열부터인 것이다. 그마저도 없으면 투자는 없고, 제작사는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길고 긴 보릿고개가 시작된다. 그래서 보통 국내 TV용 애니메이션의 주된 타깃은 3~5세, 5~7세에 치중된다. 물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내 완구시장의 메인 고객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완구 판매는 매년 5월과 12월이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완구 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어느 정도 홍보 효과와 노출 시기, 방송 시기를 예를 기준으로 기획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황과 연결해서, 디자인이 정해질 경우에도 남아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변신 장난감, 경찰차, 공룡이라는 일반적인 완구 공식에 컬러는 블루와 레드가 안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일반적인 큰 틀을 형성하고 있고 이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여아의 경우는 그렇게 다양하진 않지만, 동물을 기본으로 디자인된 봉제인형과 전통적인 바비 스타일의 인형을 기반으로, 컬러는 핑크와 옐로우 등으로 구성된다. 한때 < 겨울왕국 > 때문에 여아 시장에서의 핑크파워가 블루에 다소 밀리는 듯했으나, 최근 다시 전통의 핑크가 유지되는 형세다. 최근에는 유아용 애니메이션과 완구라는 조합에 의해 기획 초기부터 완구회사가 함께 참여하여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보통 완구 시장의 경향과 디자인에 대한 조언들을 함께 주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사와는 접근 방식이 조금씩 달라서 아트팀과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아무래도 완구시장에서는 복잡하고 잘 넘어지는 캐릭터를 지양하며 상품이라는 입장으로 접근하지만, 제작사의 아트팀의 경우는 캐릭터의 성격과 레이아웃 등 디자인과 캐릭터라이징에 더욱 집중하기 때문이다. 흔한 TV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의 기획실 모습. 기획 단계는 작품 전반의 설정과 함께 투자에 대한 준비를 동시에 병행하는 괴로운 작업이다. 스텝들 책상 곳곳에 자양강장제와 영양제 등이 숨어 있다. 이처럼 작품의 기획과정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과정뿐만 아니라, 작품의 마케팅과 투자 등의 과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국내 작품의 경우 제작과정을 보통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로 생각하고 기획에 들어가는데, 작품 기획에 대한 대충의 얼개와 제작에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 과정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기획팀은 투자 미팅을 준비하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간다. 투자미팅은 주로 기획서를 가지고 진행되는데, 주로 스튜디오의 대표가 직접 진행한다. 국내 작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대표들은 주로 아트디렉터 출신이 많아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을 면치 못하는데,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아트디렉터에서 비즈니스맨으로 진화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많은 제작사들이 프로듀서를 못 구해서 힘들다는 의견이 많은데, 이는 정말 사실이다. 국내 애니메이션 전공과정에서는 프로듀서 과정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보통 애니메이션 제작 전공자가 프로듀서를 맡게 되면 보통 심적 고민에 휩싸이게 되고 금방 스튜디오를 떠나게 되는데 (프로듀서 일은 아티스트 전공자들이 하기엔 너무나 경직되고 규율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이 때문에 오랜 시간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경력자들이 적다. 그러다 보니 보통 투자 상담은 스튜디오의 대표가 직접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게 된다. 투자사는 작품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투자심사를 하게 되고 이후 투자결정을 하게 된다. 이때 제작사는 콘텐츠 진흥원,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각 지역 정보문화산업진흥원 등에서 진행하는 지원사업, 또는 다양한 R&D 사업 등에 참여하여 제작사가 투자해야할 자금을 모은다. 국내의 경우는 또한 다양한 마켓과 영상 견본시 등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참여하여 파트너 사를 모으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제작사는 자신들의 제작비를 모았고, 약간의 투자가 되어서 제작비가 어느 정도 모였다고 생각되면 본격적인 제작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 투자비가 다 안 모였는데 어떻게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제작비가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다 가는 일정을 맞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제작에 들어간다. 전체 투자비가 다 모이는 것은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일단 제작이다. 방송일정도, 방송사도 잡히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자 이제 ②프리프로덕션이다. 시나리오 작가도 필요하고, 캐릭터 디자인도 수정해야 되고, 콘티도 그릴 준비를 하자. 아 그런데 뭐지? 이 불안함은. (다음 편은 ‘한국에서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만들기 ②프리프로덕션’입니다.)
여행의 출발지는 1939년이다. 1917년에 시작되어 1966년까지 이어진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의 중간쯤에 해당된다. 물론 첫 작품에서 출발해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무난하고 합리적인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망설여졌다. 향후의 모든 코스가 정해져 있는 여행은 뭔가 지루하지 않을까. 더 중요하게는 그 길은 우리가 경계하려 하는 진화론적 관점, 체계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음 기착지를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여행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1939년이라는 연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 1939년인가. 단순한 이유 하나는 이 해에 세 편의 존 포드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중 두 편이 존 포드의 10 베스트 목록을 작성한다면 도저히 뺄 수 없는 걸작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중 한편은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며, 다른 한편은 비교(秘敎)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표현주의적’ 영화다. 한 해에 한 감독이 이 두 영화를 연이어 만들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 영화는 < 역마차 >와 < 젊은 날의 링컨 >이다. (또 다른 한편은 < 모호크족의 북소리 >다) 이 두 편만으로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될 자격이 있다. 1939년은 존 포드의 이력에서도 특별한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1939년의 세 영화들 태그 갤러거는 약간 다른 의미로 1939년~1941년을 ‘영예의 시기’(prestige period)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7편의 영화는 모두 10개의 오스카상을 받았고(주로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덕이긴 하지만) 34번 후보에 올랐다. 뉴욕 비평가협회는 3년 연속 그를 최고의 감독으로 꼽았다. 존 포드는 명실상부한 할리우드 최고 감독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이 시기가 특별하다면 그것은 < 역마차 >와 < 젊은 날의 링컨 >이 이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존 포드를 만날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어떤 야유나 비하의 뜻도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라도, ‘나’라는 단독자와의 만남에는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본 건 20대 후반이었지만, 그를 ‘만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3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다른 이유 하나는, 최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 변호인 >이 75년 전에 만들어진 < 젊은 날의 링컨 >을 바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만든 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것과 유사한 선택을 한 과거의 영화들과의 대화 자리에 초대된다. 영화사의 정전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영화들과 대화하고 긴장하고 불화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물론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위대한 예술이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아마도 그것의 영원한 동시대성에 있을 것이다. 오늘 말하려는 영화는 < 젊은 날의 링컨 >이다. 이 영화는 2013년의 한국영화 < 변호인 >과 마찬가지로 한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의 취사선택과 극적 디테일의 가미를 거쳐 하나의 영화적 허구를 구성했다. 나는 평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동시대인으로서 <변호인>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다른 지면에 썼다. (「씨네21」 942호 참조). 여기선 <변호인>의 표준적 선택에 비추어 <젊은 날의 링컨>의 특별한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두 영화는 외견상 공통점이 꽤 있다. 이는 주로 두 영화가 다루는 실제 인물의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링컨과 노무현은 모두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내세울 만한 학력을 얻지 못했으며, 개인적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변호사를 거쳐 유명 정치인 및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자신의 국민들에게 단순한 존경 이상의 특별한 감정적 애호(혹은 격렬한 거부)의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 젊은 날의 링컨 >과 <변호인>은 많은 공통점을 지닌 두 인물의 변호사 시절, 그것도 그들이 변호를 담당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기획의 유사성도 있다. 하지만 유사성은 여기까지다. < 변호인 >은 영웅설화의 오래된 표준 양식을 따른다. 여기서 영웅은 도덕적 진리의 예시자다. 갈등은 오직 그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놓여있을 뿐, 진리 자체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다. 해당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은 이 진리를 기준으로 취사선택된다. 존 포드가 말년에 만든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하라.”는 이 양식의 적절한 요약이다. 전설에 부합되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호인>의 선택이다. 네 아들 (1928) < 젊은 날의 링컨 >은 불가사의한 영화다. 앞에서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 영화엔 F. W. 무르나우에게 영감을 얻은 < 네 아들 >(1928)이나 < 사형집행인의 집 >(1928)과는 달리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전영화의 규칙과도 거의 무관하다. 어떤 범주화도 난감해지는 괴이한 영화가 뜻하지 않은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영웅설화를 구성하는 극적 사건과 결단의 행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사건과 행위에 포섭되지 않는 일화와 농담들, 표정과 몸짓들, 기운과 예감들, 그리고 빛과 음영과 풍경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잉여들이다. 반복해서 보면, 이 영화는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를 끝없이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하면, 잉여들이 살아 움직이며 극적 사건들의 전개를 끝없이 교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고전영화와 모던영화가 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은밀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링컨의 주의회 선거 연설 교전의 한 가운데 젊은 날의 링컨, 정확히 말하면 헨리 폰다라는 배우의 육체가 있다. 그는 긴 다리와 팔을 허공에 느리게 휘저으며 망설이듯 움직인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832년 일리노이 주 샐럼 지역에서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이는 동료에 의해 주의회 선거 후보로 소개된다. 동료가 네거티브 연설을 열심히 하는 동안 프레임 안에선 보이지 않던 링컨이 다음 장면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걸어나와 소박한 연단에 선다. 기댈 곳을 잠시 잃은 것처럼 보이던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연다.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에 실린 느리고 아주 짧은 연설. “...저는 전국은행(national bank)과 내부 증진 시스템과 테러 방지를 지지합니다. 이것이 저의 가치관이자 정치이론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정치적 신념의 소유자인지 잘 알 수 없을뿐더러, 그가 정말 정치가의 야심이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이후로도 그가 망설이듯 움직일 때, 그가 가려는 곳에 가기를 정말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잘 알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언가가 그를 이끄는데 그것이 무언지 그도 모르고 그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없다. 한때 사랑한 여인 앤의 묘비 앞에서 그는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혼자 중얼거린다. “내 쪽으로 넘어지면 마을에 남고, 네 쪽으로 넘어지면 법 쪽으로 갈게” 나뭇가지는 묘비 쪽으로 넘어진다. 다시 혼잣말.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그리고 자문한다. “내가 네 쪽으로 살짝 민 걸까?” 수수께끼와도 같은 마지막 말을 기억해두면 좋겠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그의 의지가 정말 작용한 걸까. 이 질문은 대답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의문문으로만 남겨져야 한다. 이 인물에게 운명과 의지는 식별 불가능하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망설임과 움직임은 식별 불가능하다. 우리는 편리하게 운명의 편에 풍경과 시간을 두고, 의지의 편에 각성과 결단의 행위를 둠으로써 일련의 대립항 다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의 영원한 내적 교전을 도해(圖解)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의 도해야말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식별 불가능한 것은 식별 불가능한 것이다. 이 동어반복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가까울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것은 오프닝 크레딧 직후에 등장하는 시다. 젊은 링컨의 표현을 빌리면 “적게 말하고 많이 일하는” 어머니의 사무치는 물음들. 낸시 행크스가 귀신이 되어 사랑하던 아들을 찾으면서 내 아들 어디 있소? 그가 무슨 일을 했소? 내 아들에 대해 아시오? 키는 많이 컸나요? 재미있게 살았나요? 읽는 법은 배웠나요? 그가 마을로 갔나요? 그의 이름을 아나요? 성공했나요? 라고 물을 것이다 - 로즈마리 베넷 (낸시 행크스는 링컨의 어머니이며 그가 9살 때 죽었다) 혹은 이 시가 쓰인 화면 뒤에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이다. 혹은 그가 앤과 거닐던 강물이다. 어쩌면 강물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귀신이 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말이며(극 중의 링컨은 이 시를 보지 못했고 보았다 해도 이것은 시인의 상상된 말이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옛 연인의 육체다. 극 중 등장인물의 말을 빌리면 젊은 링컨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듯 강물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초반에 등장한다. 봄빛 가득한 강둑에서 빨강머리 처녀 앤은 링컨에게 법 공부를 권하며, 링컨은 그녀에게 구애의 말을 전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떠난다. 미묘한 엇갈림. 강물이 그들 뒤로 고요히 흐른다. 그녀가 떠나자 링컨은 조약돌을 강물에 던지고, 강물에는 작은 동심원이 인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장면은 적막하고 충격적이다. 강물에는 험상궂은 얼음이 떠다니며 들판에는 눈이 덮여있다. 털모자를 뒤집어쓴 링컨은 꽃을 들고 앤의 묘비를 찾는다. 그 사이에 5년이 지났고 그녀는 죽은 것이다. 존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몽타주다. 링컨이 돌을 던진 행위와 얼음투성이로 변한 강물 그리고 앤의 죽음 사이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돌을 던진다는 우발적이고 사소한 행위 ‘바로 다음에’ 그 행위에 대답하듯 가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영화에서 무언가가 ‘바로 다음에’ 그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엄중하며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그것은 벌어졌으며 되돌릴 수 없다. 의지와 행위가 개입할 수 없는 장대하고 고요한 흐름, 우리가 보통 운명 혹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압도적 표정이 그 순간 섬광처럼 스쳐 간다. 어쩔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역량 앞에서 젊은 링컨은 지금 나뭇가지로 운명과 의지의 식별 불가능성을 유희하고 있다. 헨리 폰다의 육체는 망설이듯 움직이고 < 젊은 날의 링컨 >은 주춤거리듯 진행한다. 그 망설임과 주춤거림의 시간 사이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음성, 앤의 그림자, 강물의 침묵과 변덕의 아름다운 흐름, 그리고 경박한 유머, 덧없지만 생동하는 행위들과 몸짓들이 활동하고, 영웅설화적 사건과 진리의 발화들과 행위들, 숭고한 소명과 고결한 의지가 그들과 몸을 섞고 수시로 서로 자리를 바꾸며 소란스럽고 더럽고 아름답고 고요한 음악이 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젊은 링컨의 용기와 지혜만큼이나 그의 반칙(줄다리기 시합에서의)과 야비한 유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의 링컨>은 소명과 의지의 송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훼손하거나 따돌리는 오점과 얼룩들의 난장이며, 그들 모두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음성과 죽음과 풍경의 노래다. 그들의 소란스런 화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전설은 진리의 언명에 순종하는 정태(靜態)의 구조이지만, <젊은 날의 링컨>은 흐르고 번잡하고 활동하는 삶의 시학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 젊은 날의 링컨 >을 보고 뭔가 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런 영화는 권위 있는 최종적 견해라는 걸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가도 보지 못한 걸 당신이 볼 수 있으며 어떤 전문가도 쓰지 못한 것을 쓸 수 있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The Man and His Movies」(1986)을 2006년에 고쳐 쓰면서 “<젊은 날의 링컨>을 지금까지 50번 넘게 봤지만,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미학적 시대적 범주화도 초라하게 만드는 < 젊은 날의 링컨 >을 말하면서 산만한 도취가 아니라 뭔가 정리된 언어들로 끝맺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번잡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몇 마디 말을 덧붙여보자. 지난 회에 서부극에는 인물의 사적 시간, 역사적 시간, 풍경의 시간이 교차하며, 그것은 존 포드의 영화에서 잘 구현된다고 썼다. 그리고 존 포드의 비서부극조차 서부극적이라고도 썼다. 나는 비서부극인 <젊은 날의 링컨>에 대한 위에서의 어수선한 찬미만으로 이 말들이 약간은 설명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앞으로 다른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할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 역사적 시간은 여전히 애매한 말이며, 나는 어느 정도 수사학적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을 포기하긴 힘들다. 역사적 시간은 우리에게 이미 구현되고 알려진 시간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그 시간은 거의 운명과 유사한 무게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알지만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어떤 종말을 향해 그는 걸어간다. 알고 있는 우리 앞에 모르는 그가 걸어간다. 전기 영화에서 그리고 서부극처럼 역사적 소재를 극화한 허구의 서사에서 역사적 시간은 우리의 지식과 영웅의 무지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것은 불안한 공기처럼 인물을 감싼 채 떠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 젊은 날의 링컨 >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를 아름답게 시각화한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는 사건을 훌륭하게 영웅적으로 해결했는데도 웃지 않는다. 젊은 링컨이 구름 낀 언덕을 천천히 걸어가 프레임에서 빠져나가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표정, 먹구름과 비가 미래의 비극에 대한 암시라는 수사학적 해석은 명쾌하지만, 이 장면의 물질성을 말하진 못한다. 그것은 미래의 암시 이전에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의 곁에서 흐르는 이미지다. 역사가 기입된 허구 안에서 역사적 시간은 텍스트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활동하는 이미지다. <젊은 날의 링컨>은 역사적 시간의 이미지에 관한 한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