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수비대: 모나리자를 지켜라!
- 감독
- 바실리 로벤스키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스테픈 피터 크리셀, 조던 워슬리
2월은 겨울의 막바지로 봄이 오기 직전의 달이기도 하지만, 긴 겨울을 지나오면서 뼛속까지 냉기가 배인 달이기도 하다. < 이월 >은 봄에 대한 기대보다 몸에 깊게 스민 냉기를 담은 영화이다. 냉기를 다루되, 냉기에 감정을 담아 설명하거나 판단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냥 인생에 있어 이월의 냉기 그 자체를 오롯이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주인공이 계속 되뇌는 말처럼 몹시 “춥다.” 아주 잠시 온기를 느끼는 순간도 여지없이 ‘겨울’임을 각인시킨다. 주인공 민경은 이월을 살아가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이월 그 자체이기도 하다. 냉기로 인해 생겨난 단단한 얼음이기도 하고, 얼음을 깨고 올라오려는 새싹이기도 하다. 단, “자라지 못하면 이름이 없는” 존재이다. 영화는 이월이 가진 냉기와 함께 이월의 이중성 혹은 역설을 담는다. 여러 결의 모호함을 질문으로 던지면서. 영화는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방안에서 흐르는 따뜻한 음악 소리, 날카로운 겨울바람 소리 그리고 찬 공기 속에 손 비비며 후-하고 내쉬는 민경의 입김 소리가 들린다. 이어 까치발로 창살에 매달려 방 안을 들여다보던 민경은 조용히 웃는다. <이월>의 오프닝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마주하는 민경을 응축하고 있다. 차가운 겨울 머물 곳을 찾는 민경은 동정과 연민을 바라지 않고 자기를 지키며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종종 정체불명의 희미한 모나리자 미소를 짓는다. 다음 장면에서 민경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음악은 자살을 시도한 친구 여진이 틀어놓은 것이고, 여진은 유언 대신 중국집 쿠폰을 남기고, 방에 누워있다. 민경은 그런 여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특유의 웃음을 짓고 숨을 내뿜는다. 처음에는 간지럽히듯이, 다음은 생명을 불어넣듯이 긴 숨을 쉰다. 그러나 영화는 민경이 왜 웃음을 머금고 긴 숨을 여진에게 내뿜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 여진이 마저 민경에게 소리쳐 묻는다. “왜 웃어? 왜 웃냐고?” 민경의 웃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마치 민경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그냥 음악이 아니듯이. 민경 곁에는 이처럼 낯선 결을 동반한 오브제는 더 있다. 앞서 언급한 중국집 쿠폰과 원피스 그리고 5만 원이 그들이다. 따뜻함과 동시에 차가움이 내재되어 있다. 함께한 기억으로, 뭔가 남겨주고 싶어서, 선물이자 용돈으로 건넨 물건이지만, 그 속에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대가가 존재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간에 위태로운 의미가 교차한다. 그 ‘위태로움’의 경계에서 민경은 이 겨울을 나고 있다. 민경은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민경 자체도 그렇지만 영화도 민경의 내면을 아는 척하지도 들추지도 않는다. 그런 민경이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그녀는 여진이 들려준 이모할머니가 빠져 죽었다는 웅덩이를 무서워한다. 미쳐버린 이모할머니 이야기 때문인지, 늪과 같은 웅덩이의 존재 때문인지, 아님 웅덩이 속에 비친 자기 모습 때문인지 민경은 웅덩이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민경 자신과 미쳐버린 이모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미치면 아프지 않다”는 민경은 미칠까 봐 두렵고 동시에 미치지 않아 아픈 거다. 그저 아프지 않은 척할 뿐이다. 그녀가 보이는 공격적인 행동과 말은 한 번만 더 곱씹어보면, 공격이 아니라 상처의 흔적이자 상처받은 자의 방어이다. 친구의 자살시도를 목격한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노래로, 자살의 방법으로, 원피스로 말하고 있는 거다. 차가운 냉기가 스며든 순간의 기억들은 자신이 상처받는 또 다른 순간에 공격이 되어 방어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세 번 배경음악이 등장한다. 음악으로 거의 감정을 강제하지 않는 영화가 희미하게나마 감정을 부여하는 세 장면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민경이 몰래 들어간 자기 집에서 빚 청구서 더미를 볼 때이고, 두 번째는 여진의 집에서 도망 나오다 웅덩이에 빠질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컨테이너 박스가 하늘을 날 때다. 세 경우 모두 민경이 막바지에 몰렸을 때이다. 특히 웅덩이는 그녀가 잠시 온기를 느끼려는 순간 내리치는 냉기와 함께한다. 여진과 생애처럼 보름밥을 먹는 순간, 자신과 꼭 닮은 성훈과 함께 지내는 법을 익혀가는 순간, 착각하지 말라고 찾아온다. 웅덩이는 온몸에 냉기가 배여 있는 그녀조차도 느끼는 두려움의 형상이다. 민경은 머물 곳이 없다. 집은 이미 보증금까지 날린 상태이고, 여진의 집은 동생의 등장으로 쫓겨나고, 아저씨 집도 아저씨의 사고로 머물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만둣집에서 쫓겨나고, 학원에서도 버티다 나온다. 민경은 그때마다 컨테이너로 찾아든다. 컨테이너로 찾아들기 전 사이 시간은 일종의 “비변증법적 시간”이다. 별다른 사건도 행동도 없이 먹고 자는 시간들을 보내고 그것마저 거부당할 때 민경은 컨테이너로 찾아든다. 온기라곤 없는 곳에서 추위에 떨며 웅크리며 잔다. 컨테이너는 웅덩이와 달리 그녀의 마지막 보류의 공간이다. 그러나 곧 묻게 된다. 민경에게 웅덩이와 컨테이너는 다른 곳이었을까? 마지막 춥고 어두운 컨테이너에서 민경은 성훈이를 부탁하는 진규의 전화를 받고 여진의 자살시도 때 들은 노래를 부르며 잠이 든다. 이어 거대한 균열과 함께 컨테이너가 하늘을 난다. 환한 분위기와 달리 영화는 마냥 해피엔딩 같지가 않다. 컨테이너 박스 속 민경은 어쩌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닐지, 그녀의 환한 웃음이 이제 통증을 느끼지 못한 (미친) 단계로 들어선 건 아닌지, 혹은 삶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인지 모호하다. < 이월 >은 치우치지 않으면서 삶의 냉기가 가진 양면을 모두에서 만나게 하는 힘 있는 작품이다. + 제목 ‘이월’을 달력의 2월이자 이월하다의 이월로 읽어낸다면, 남겨진 아이 성훈이 너무 아프다. 민경과 꼭 닮은 성훈은 민경의 어린 시절 같기도 하고, 민경과 같은 냉기를 고스란히 담아 겪어나갈 다음 세대일 터. 2월이 3월로 이월되었으면 좋겠다.
지난해 6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프랑스의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자그레브에서 안시로 넘어온 첫날, 안시에서는 개막작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의 기자회견이 한창이었다. 그때는 무심히 넘기고 축제의 다른 부분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오히려 돌아온 이후 9월 한국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조용히 개봉함을 알게 됐다. 그리고 작품을 본 순간 제대로 해석된 칼릴 지브란의 위대한 언어와 아트 애니메이션계 거장들이 모여서 만든 이 작품의 순간순간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안시에서의 화제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칼릴 지브란의 지혜를 이 애니메이션이 새삼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소녀 알미트라는 동네에서 사고뭉치로 통한다. 엄마 카밀라는 알미트라를 혼자 둘 수 없어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집에 데리고 간다. 그곳에는 불온한 시를 썼다는 죄로 7년간 구금상태인 시인 무스타파가 머물고 있다. 무스타파는 밖에서 놀고 있으라는 엄마의 말 따윈 무시하고 집안으로 숨어들어온 알미트라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을 읽는 친구가 된다. 알미트라가 갈매기와 함께 마을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두 팔을 펼치고 바람을 맞을 때부터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는 결코 평범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무엇보다 독특한 점은 이 작품이 한편의 멋진 장편인 동시에 8개의 단편으로도 엮여있다는 점이다. 무스타파와 알미트라, 카밀라와 마을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 얼개는 작품의 총감독 로저 알러스(< 라이온 킹 > 연출)가 담당했다. 이야기 사이사이 무스타파가 알미트라, 카밀라,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진리를 들려줄 때 그 내용으로 칼릴 지브란의 영적 잠언인 ‘예언자’ 중에서 8편의 시를 발췌했다. 이때 시의 내용을 <계단을 내려오는 모나리자>의 조앤 C 그라츠를 비롯해 톰 무어, 빌 플림턴, 니나 페일리 등 현재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유명 독립 애니메이터들이 각각 맡아서 8개의 단편으로 만든 것이다. 장편 애니메이션 속에 8개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담되, 서로의 영역을 침범치 않고 개성을 드러내는 예술의 경지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실현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무스타파는 알미트라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갇혀 있는 줄 알지만 사실 날아다닐 수 있다며 말한다. “진정 자유로워짐은 근심 없는 낮이나 설움 없는 밤이 아닌, 이러한 것들이 삶을 옭아매도 속박되지 않고 그 위에 우뚝 설 때니...” 무스타파의 몸은 이때 이미 창문 너머 대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새들이 땅에 깊이 뿌리 박힌 나뭇가지에 앉아 처음엔 온갖 줄에 속박되는 듯하지만 그 줄을 몸에 감고 날갯짓을 하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곧 나무의 뿌리가 통째로 뽑히고 새들이 나무와 함께 하늘로 날아간다. 카밀라가 알미트라 때문에 골치다, 통제가 안 된다고 하소연할 때는 무스타파가 이렇게 답한다 “당연하죠. 아이는 당신 소유물이 아니니. 당신을 통해 올 뿐, 당신에게서 온 게 아닌 생명의 아들딸들.” 그리고 무스타파가 마침내 7년 만에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던 중 어느 가문의 결혼식을 접하게 된다. 그때 그가 사랑과 결혼에 대해 하는 말도 아름답다. “당신들의 영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이 시를 읊을 때 화면엔 한밤중 춤을 추는 한 쌍의 연인이 등장하는 단편이 펼쳐진다. 그들의 춤과 움직임 속에서 영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남겨둬야 하는 ‘결혼’의 이미지가 환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무스타파에게 고향으로 가는 배 안에서 먹으라면서 산처럼 쌓아주는 음식들 사이로, 한 남자가 알미트라의 엄마 카밀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에게 무스타파가 전하는 사랑에 대한 잠언은 < 바다의 노래: 벤과 셀키 요정의 비밀 >로 알려진 감독 톰 무어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승화시킨다. 두 남녀가 하나로 결합되는 모습을 단아하고도 황홀하게 그려낸다. 내려다보는 대신 마주 보면서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는 무스타파의 언어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지혜로 가득하다. 알미트라, 엄마 카밀라, 마을 사람들이 다정한 예언자 같은 무스타파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시에 귀를 기울이듯 우리의 귀도 열리고 눈도 열린다. 무스타파를 연기한 리암 니슨의 목소리가 명징한 발음으로 품격을 더하고, 싱글맘 카밀라 역을 맡은 샐마 헤이액의 활기찬 목소리도 함께 한다. 특히 샐마 헤이액은 이 작품의 기획 단계부터 제작자로 참여해 칼릴 지브란의 시를 함께 묶어낼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게 했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적인 음악감독인 가브리엘 야레와 데미안 라이스, 글렌 한사드, 리사 해니건의 노래, 요요마의 첼로 연주가 각 단편 애니메이션의 주제에 맞게 흘러나와 더 큰 감흥을 전한다. 영혼의 세계를 이토록 아름답게 보여주다니,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또 한 번 만나는 보석이다.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개념 정의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영화의 시각적 요소는 인물, 장소, 풍경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극영화는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어떤 인물(들)의 어떤 사건을 담는다. 공간적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장소는 사건에 연루되는 반면 풍경은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들)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장소가 아니라 풍경이다. 오늘의 영화에도 지배적인 고전영화의 규칙은 모든 시청각적 요소가 서사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풍경은 언어화된 서사의 내적 요소로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영화들은 종종 인물, 장소, 풍경의 지위를 은밀히 혹은 공공연히 교란한다. 존 포드가 “내 영화의 진정한 스타는 대지(land)”라고 할 때, 그는 의도된 교란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 회에서 나는 풍경과 사건을 동시에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예컨대, < 역마차 >라는 한 편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링고 키드 일행이 겪는 사건을 보면서 동시에 모뉴먼트 밸리를 볼 수 있는가. 관람 습관과 능력이라는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원론적인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학자 마틴 르페브르(Martin Lefevre)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 양자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작동시키면서 영화의 한 대목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Between setting and Landscape in the Cinema’, 「Landscape and Film」) 회화에서도, 이 문제의 양상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예컨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도 우리는 모나리자의 얼굴과 그녀의 등 뒤에 있는 풍경을 역시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녀의 모호한 표정에 주목할 때 이것은 인물화가 되며,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미묘하게 어긋난 지평선의 풍경에 주목할 때 이것은 풍경화가 된다. 우리가 하나의 그림을 그려져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기대와 습관에 따라 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곰브리치는 정신적 반응기제(mental set)라는 인지심리학의 용어를 원용했다(「예술과 환영」). 정신적 반응기제는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행사하여, 다른 것보다는 바로 이것을 보거나 듣도록 예비시키는 마음의 자세나 기대를 뜻한다. 우리는 이 기제 없이는 그림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한번 확립되고 나면 일종의 경직성을 갖고 있어서 한 번에 복수의 기제를 작동시킬 수 없다. 곰브리치가 예시하는 유명한 토끼-오리 그림(아래)에서 우리는 이 그림을 토끼로 볼 수도 있고 오리로 볼 수도 있지만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토끼-오리 그림 이 논의를 영화에 고스란히 적용시킬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유비(類比)에는 무언가 빠져 있다. 우리는 토끼-오리 그림에서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지만 번갈아 볼 수는 있다. 그림은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나지라’를 볼 때 우리는 인물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는 아니라도 번갈아 작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화 관람에서 그럴 수 있는가. 영화는 흐른다. 실험영화가 아닌 극영화에서 우리의 관람 습관은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는 것이다. 모던 시네마가 그러하듯 사건을 중단시키고 풍경을 따로 비추지 않는 한, 영화가 어떤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림 관람에서와는 달리 번갈아 바라볼 수도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도 언젠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는 바로 잊어버리지만, 몇몇 장면들은 오래 기억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위대한 비평가 역시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림에서 번갈아 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의 반복 관람이란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반복 관람을 통해 한 편의 영화를 한 번은 사건 중심적으로 또 다른 한번은 풍경 중심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반복 관람은 사운드와 음악, 인물의 표정과 몸짓, 색체와 구도 등에 각기 집중함으로써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하위 관람 전략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 담긴 여러 요소를 분리시켜 매번 다른 관람 초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본 다수의 관객이 서로 다른 관람 초점을 가질 때에도 이런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떤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온 일행들 사이에서 “영상미가 뛰어나다” “인물 묘사가 훌륭하다” “이야기가 짜임새가 있다”라는 식으로 각기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세심한 반복-분리 관람이 또다른 영화체험을 낳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화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마니 파버(Manny Farber, 1917~2008)가 강의시간에 영화를 상영하면서 화면 대부분을 가려놓고 학생들이 한쪽 귀퉁이만 보게 한 것도 이런 반복-분리 관람을 통한 예기치 않은 발견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극단적인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리가 아닌 복합화의 측면이다. 사운드(음악, 음향, 대사)를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한 프레임에 담긴 모든 시각적 요소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초점화한 한 가지 요소를 제외한 다른 요소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뜻할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목격되는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나가는 관람 습관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종종 이야기를 ‘듣는다’ 혹은 ‘읽는다’의 방식에 가까워진다. 반복 관람을 통해, 혹은 자신만의 관람 초점을 가짐으로써, 혹은 디지털 기술을 동원해 영화를 멈춰 세움으로써, 보이는 것들을 분리해서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면 풍경은 사라지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정한다. 한 편의 영화에서 우리의 눈앞에 스쳐지나간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보지 못한다 해도 복합적으로 감각한다. 우리의 의식과 기억이 그것들을 모두 길어 올리지 못하지만 그것이 복합적 감각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반복 관람은 일종의 재복합화 체험이다. 반복 관람할 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분리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감각과 새로 결합해 전체가 다시 체험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물리적 첨가가 아니라 화학적 재결합이다. 사실은 회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앞서 모나리자 그림과 토끼-오리 그림은 정신적 반응기제의 동일한 적용 사례로 예시되었지만 두 그림은 다르다. 토끼-오리 그림에서는 분명히 토끼와 오리가 분리되어 지각된다. 하지만 모나리자 그림에서도 그러한가. 이 그림에서 어떻게도 해석되지 않는 여인의 기묘한 표정과 지평선이 미묘하게 어긋난 풍경은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게 아니라 의미화할 수 없는 모종의 주술적 친연성 아래 드러나지 않는가. < 역마차 >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모뉴먼트1과 2는 의미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 기괴한 형상이 잔상으로 남는다. 지난 회에 모뉴먼트1과 2의 암석봉이 실제 이야기와는 맞지 않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스틸 장면을 통해 설명했지만, 실은 나도 <역마차>를 너댓번 볼 때까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 역시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이야기가 모뉴먼트 밸리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느낌은 후반부의 모뉴먼트1과 2를 또다른 형상의 암석봉이 대체했다 해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뉴먼트 밸리의 강렬한 잔상은 그것의 기괴한 형상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모뉴먼트 밸리는 서사 외부에 있지만, 모나리자의 신비한 표정과 어긋난 지평선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모종의 다른 층위에서 서사와 내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내통의 층위와 경로를 해명할 수는 없지만 징후를 말할 수는 있다. 그 징후는 광기, 도취, 유머, 음악과 같은 잉여적 디테일로 드러난다. < 역마차 > 뿐만 아니라 존 포드 영화의 서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이 잉여적 디테일들의 놀라운 활력이다. 다소 과장한다면, < 역마차 >의 승객들은 조금씩 미쳐 있다. 닥 분은 의사 노릇을 하는 한 장면을 제외하면 항상 만취해 있고, 위스키 판매상 헤이콕은 공포감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링고 키드는 정의로운 무법자처럼 보이지만, 아파치와 싸우느라 모두의 총알이 소진된 위기 상황에서도 사적 복수를 위해 총알 3발을 남겨둔다.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만나러 동부의 버지니아에서 서부 끝가지 온 정숙한 장교 부인 루시 맬로리는 도박사에게 수차례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맬로리 부인을 보호하는 신사 노릇을 자임한 도박사 핫필드는 가장 광적인 인물이다. 그가 악명이 높으며 며칠 전 누군가의 등에 총을 쏘아 죽였다는 사실은 초반에 제시되지만, 아파치의 습격 장면에서 광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1 #2 #3 아파치에게 총을 쏘는 핫필드의 표정은 살인의 기쁨으로 가득하다(#1). 그러다 총알이 한발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2), 자신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던 맬로리 부인에게 총을 겨눈다(#3). 아파치에게 ‘더럽혀지기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이려는 것이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를 연상케 하는 남부연합군 출신의 이 사내는 살인광의 피를 지닌 광적인 인종주의자다. < 역마차 >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 출신 여인이 멕시코계 카우보이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장면이다(#4). 지금 안에서는 맬로리 부인이 출산 중이며, 부드럽고 감미로운 여인의 노래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카우보이들에게 아파치의 임박한 습격을 몰래 알려주고 있는 중이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뒤, 황야의 코요테 장면이 삽입되고(#5), 댈러스에게 링고 키드가 청혼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6). 출산, 청혼과 같은 의례의 사건들과 아파치의 임박한 습격이라는 절대적 위협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는 여인의 노래는 기적처럼 아름답고 불길하다. #4 #5 #6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형상과 인물들의 잠재되거나 표출되는 광기, 그리고 아름답고 불길한 노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있을 리는 없지만, 원시적 정념 혹은 전(前)의식적 율동이라고 부를만한 힘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요소들은 언어화된 서사로 포착되지 않는 주술적 이미지로 보는 이에게 육박해오며, 서사는 이 이미지들과 긴장하거나 그들과의 대결과정에서 부차화한다.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은 서사 밖에 있지만 서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 역마차 >는 B급 서부극이 유행하던 1930년대의 마지막 연도에 등장해 고전적 서부극 서사를 완성했다는 칭송을 받아왔다. 그 칭송이 틀린 건 아니라 해도, 이 영화의 진정한 위대성은 안정되고 균제된 고전적 서사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고요한 수면 밑에서 벌어지는 논리와 마술, 질서와 광란,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언어와 이미지가 벌이는 결투 혹은 격렬한 이중주의 매혹에 있다. 그리고 그 결투 혹은 이중주는 존 포드의 다른 서부극 혹은 다른 영화에서도 어떤 층위에서든 벌어진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 곳에 서 있으며, 강물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곳에 흐르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세심한 관객이라면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