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
- 감독
- 박재민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최희화, 김다혜, 양윤서, 송송화, 임수정
이만희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몇 안 되는 천재로 회자된다. 15년간 만든 51편이란 숫자도 놀랍지만, 작품 간 기복이 심하지 않고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했다. 유독 비범한 영화도 있고, 1970년대 영화처럼 범작처럼 보이는 영화도 있지만 이만희의 치밀한 미장센과 유려한 리듬, 자기파괴적인 운명과의 싸움 같은 인장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5년 제대한 후 조감독 생활을 했다. 이후 < 주마등 >(1961)으로 데뷔했고 (고작) 다섯 번째 영화인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을 통해 미학적 성취와 흥행 성적 모두를 성공시켰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전쟁영화의 원형을 만들어냈으며, 그해 관객동원 1위의 기록을 갖게 되었고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이만희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뛰어난 대중영화, 사실적으로 전쟁에 접근한 전쟁영화의 장인, 사실성을 위해 실탄을 쏠 정도로 영화에 미쳐 있는 완벽주의자, 반공 이데올로기에 타협하지 않는 강한 품성의 소유자, 높은 개런티를 받는 A급 감독으로의 도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듬해 느와르의 관습을 과감하게 몰아붙인 < 검은 머리 >와 호러의 법칙을 보다 치밀하게 고안한 < 마의 계단 >을 만들었는데, 두 영화 모두 고유한 무드를 따라 넘실거리는 정념과 가혹하고 파괴적인 운명과 대결하는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만희가 연달아 발표한 걸작 < 물레방아 >(1966), < 귀로 >(1967), < 휴일 >(1968)도 전작들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감하게 넘어선다. 귀기 서린 여인의 얼굴과 새하얀 버선, 그 아름다움에 홀린 남성의 집착과 파멸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서울의 낮과 밤을 부유하며 자신이 정한 계율과 투쟁하다 죽음을 선택한 여인의 불안과 공허는 무심히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와 공명한다. 또 담배 한 개비조차 편히 피울 수 없는 젊은 룸펜과 그의 연인의 육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의 운동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은 우연히 튀어나올 리 없는 창조적 역량과 그의 무드가 온전히 결합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유작 < 삼포 가는 길 >(1975)까지 이어지는 이만희의 영화들은 반공영화와 문예영화처럼 국가와 영화산업의 필요에 따른 규칙을 뛰어넘어 살아 생동하며, 원작과 다른 정취를 표현함으로써 고답적인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또 전쟁영화, 멜로드라마, 스릴러, 첩보물, 만주 웨스턴 같은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고 장르의 규범을 탈바꿈시켰으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나들며 인간과 삶, 가변적인 감정과 불변하는 운명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힌 인물의 도덕성을 가혹할 정도로 밀어붙였다. 이만희는 프레임에 인물의 감각과 감정을 새겨 넣고 그 시대의 무드를 기입했으며 빛과 어둠을 새롭게 조직하고 그만의 속도와 리듬을 창조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인간됨에 대한 믿음과 캐릭터의 생생함, 스펙터클과 정감을 조율하는 뛰어난 영화적 감각, 운동하는 존재와 갇힌 존재가 숏 안에 배치되고 격돌하는 미장센과 리드미컬한 편집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시작해 서울 수복을 거쳐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과 대치한 전선에서 끝을 맺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가장 강력한 사건을 향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만희는 마지막 참호전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찍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중공군과의 전투에 모든 힘을 쏟는다. 이를테면 첫 번째 전쟁 시퀀스인 상륙작전은 오프닝에 등장해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두 번째 전투 시퀀스인 텅 빈 건물에서 벌어진 매복과 총격전은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시민들의 주검으로 이어지는데, 시선의 방향에 따른 빈틈없는 편집과 시각적 스펙터클 뿐 아니라 심리적 긴장까지 녹여낸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압권은 마지막 전투 장면이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전선에 합류한 분대원들은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진지를 방어하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 영화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한 이 장면은 4번의 전투 시퀀스로 구성되어 휴지기/전투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주검으로 뒤덮인 참호로 향한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분대원들과 호랑이 분대장(장동휘)이 전쟁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을 수시로 체험하며, 군인으로서의 의무와 전우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후방에 맡겨둔 아이 영희(전영선)의 편지를 받고 눈물 흘리는 집단 초상화에 가까운 얼굴들이다. 분대원 각각의 클로즈업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반면, 군인이라는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사람 살아가는 곳 어디에나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총원 42명”이던 분대원들이 하나씩 프레임에서 사라져 2명만 남게 되는 순간, 우리는 분대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얼굴에 압도된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면서도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라고 너스레를 떨던 봉구(구봉서)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분대원들은 진흙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개인의 얼굴로 포착된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분대원들에게 “14시 이후의 생존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죽지 말고 살아남길 당부한 분대장의 말은 마지막 전투 시퀀스에서 살아남은 대원에게 “너희 둘만은 꼭 살아 돌아가서 전쟁의 증인이 되어라.”는 명령과 연결된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채 가시기 전에 구일병(이대엽)마저 죽어 엎드러질 때 눈물 흘리는 최해병(최무룡)과 흐느끼는 분대장의 얼굴은 전쟁의 실체를 겪은 자의 무참함을 드러낸다. 셀 수 없는 주검과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분대원의 얼굴, 전쟁 후 복구되지 못한 당시의 황폐한 산천도 참담하고 고통스런 얼굴에 다름 아니다. 이만희의 실제 경험과 영화적 역량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 장면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고백과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도 놀랍지만,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백미는 전투를 치르지 않는 후방의 막사나 럭키 클럽에서 드러나는 분대원 개개인의 놀랍도록 선명한 기질처럼 세부적인 것들이다. 영희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별명을 듣고 껄껄 웃거나 불만을 표하는 모습, 시가전에서 잡은 인민군 포로에게 그 흔한 매질 한 번 없는 모습, 눈이 녹은 땅을 보며 “전장에도 양지는 있구나.”라며 감탄하던 봉구의 구성진 말소리, 최해병이 건넨 총을 받아들고 그의 손에 이끌려가는 분대장의 휘청거리는 발걸음, 어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진, 민둥산에 가까운 산등성이의 나직하고 고운 모습 등이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원이 몇 천 명 참여했고, 탱크와 총기를 지원받아 실탄을 쐈다는 기록보다 귀중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실제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당대 영화인들의 노력과 이만희의 천재적인 연출력과 서정민의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카메라 움직임처럼 다양한 힘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감동적이다. >> 돌아오지 않는 해병 고화질 VOD 보러가기 <<
< 휴일 >의 주인공 허욱( 신성일 )은 몹쓸 인간이다. 돈도, 직업도 없는 남자가 여자를 임신시키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내뱉는다. 아무 대책도 없는 남자임을 뻔히 아는 여자는 남자에게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묻거나 결혼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아이는 둘을 낳을지, 셋을 낳을지, 결혼식을 예배당에서 할지 어디서 할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자는 여자가 임신중절을 염두에 두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훈계부터 내놓지만 그 외에 아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수술비를 마련하러 나선다. <휴일>은 허욱이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녀의 수술비를 마련하러 돌아다닌 하루를 다루고 있다. 허욱은 “난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난 차라리 바보”라고도 한다. 택시비도 없는 그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담뱃값까지 덮어씌우는 장면은 그가 거짓말을 잘 하는 남자라는 진실을 보여준다. 커피 한잔 살 돈도 없으면서 길에서 만난 점쟁이에게 오늘의 운세를 보는 걸 보면 그가 바보인 것도 사실이다. 허욱은 그런 자신을 잘 안다. 그래서 그걸 자신의 핑계로 삼는다.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라는 것이다. 허욱이 못난 남자인 것은 그가 겁쟁이의 면모를 보여줄 때 가장 도드라진다. 여자와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간 남자는 당장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수술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여자를 혼자 두고 병원을 나온다.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낯선 여자를 만나 함께 술에 취한다. 심지어 육체적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휴일의 끝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여자가 죽어버린 후이다. <휴일>은 영화의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당대에 개봉을 못 했다. 지금 다시 봐도 <휴일>에는 내일의 희망을 꿈꿀만한 여지가 없다. 영화 초반부에 연인이 대화를 나누는 늦가을 남산의 풍경은 <휴일>이 감상적인 로맨스영화로 해석될 길을 열어놓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런 기대는 무참히 짓밟힌다. 모래바람이 계속 불어대는 남산 공원의 메마른 나무 옆에 가녀린 여자가 커피 한잔 마실 돈이 없어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서 있다. 남자는 수술비를 마련하겠다고 여자 혼자 남산에 남겨둔 채 떠난다. 어떻게 보면 가난이 원죄일 수도 있다. 그들이 다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이유도 수중에 돈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그들의 시련이 해결될 것인가? 영화는 가난의 원인을 추적하거나 가난의 양상을 펼쳐 보이는 데 관심이 없다. <휴일>은 여기서 보통의 리얼리즘영화들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 가난이라는 조건 안에서 영화는 그저 한 남자의 자기 파괴적인 행보를 쫓는다. 허욱은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리며 돈을 훔치고 여자를 배신한 뒤 후회하고 자책한다. 모든 잘못은 이미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휴일>의 정조를 완성한다. 이것을 ‘60년대의 비관’이라 부르건 ‘시대의 우울’이라 부르건 이 정조는 <휴일>의 독보적인 성취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나 캐릭터가 아니라 무드이다. 지독히 낭만적인 무드에서 참으로 암울한 무드까지 <휴일>을 보는 경험은 어떤 무드에 흠뻑 젖어 드는 일이다. 오직 영화를 통해 시를 쓰는 대가들만이 이런 영화를 만든다. <휴일>은 이만희 감독이 그런 대가였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남는다. 어떻게 보면 <휴일>은 시종 기다리는 사람과 그날 그곳에 뒤늦게 도착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뤄진 영화다. 영화는 다방 앞에서 기다리는 여자와 뒤늦게 도착해 “왜 안 들어가 있냐?”고 묻는 남자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남산을 향하고 남자가 돈을 구해올 동안 여자는 그곳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남자를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병원에서 헤어진다. 여자는 병원에서 남자를 기다렸을 테지만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 남자는 그 시간에 다른 여자와 술에 취해 있었다. 남자는 오직 연인이 죽은 뒤에야 그곳에 도착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남자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에,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시간에 서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부터 깎아야지”라는 중얼거림뿐 이다. 남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을 배반한 대가로 전차의 종점에서 비틀거리는 중이다. 불현듯 이곳이 이 남자가 맞이할 삶의 종점일 거란 생각이 든다.
영국 정보국의 장교 맥스 바탄(브래드 피트)은 상부로부터 아내 마리안 부세주르(마리옹 꼬띠아르)가 마리안으로 위장한 독일군 스파이로 의심된다는 말을 듣는다. 맥스와 마리안은 카사블랑카에서 독일 대사를 암살하는 작전에 함께 투입되었다가 사랑에 빠진 사이다. 아내가 스파이라는 걸 믿을 수 없는 맥스에게는 그 사실을 증명할 72시간 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맥스는 마리안 덕에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던 영국군 가이 생스터(매튜 구드)를 기억해내고, 그가 머무르고 있는 요양원으로 찾아간다. 이제 < 얼라이드 >에서 잊히지 않는 끔찍한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가이 생스터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왼쪽 눈 주위에 상처가 난 그의 얼굴 한 측면만이 화면에 담긴다. 맥스는 아내의 사진을 그에게 건네며 그 여자가 마리안 부세주르가 맞는지 묻는다. 그때 가이 생스터가 고개를 돌려 얼굴 정면을 보인다. 오른쪽 눈이 아예 제거된 그의 얼굴 한 편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다. 그는 눈 망막이 박리되어 사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순간, 우리가 체감하는 충격은 단지 시각적으로 흉측하고 처참하게 무너진 그의 얼굴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이 얼굴에 그가 지나온 시간의 역사가 오롯이 잔혹하게 새겨져 있지만, 그 얼굴은 정작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섬뜩함을 안긴다. 온전히 드러난 가이 생스터의 훼손된 얼굴은 마치 < 얼라이드 >의 세계를 감싸던 환상의 막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벗겨져 버리고 만 순간처럼 느껴진다. 환상이 거둬진 후, 우리가 대면하는 건 마리안의 정체를 판별하는 눈이 아닌, 그저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텅 빈 얼굴이다. 사실관계를 밝혀 서사를 추동하는 힘을 일순간 멈춰 세우는 압도적인 ‘무(無)’의 형상이 여기 불현듯 끼어드는 것이다. 마리안의 실체를 밝히는 데 어떤 기능도 하지 못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가이 생스터의 이 짧은 장면은 < 얼라이드 >라는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아직’ 폭로되지 않은 앎의 주변을 맴돌며 이 영화의 환상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리안 부세주르로 불리는 여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물음이 결국 <얼라이드>의 표면적인 축이라면, 그 과정에서 영화는 자신의 환상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말이다. 첩보물로 보건, 멜로로 보건 이 영화의 구조는 균형적이지 않다. 낯선 남녀가 만나 부부행세를 하며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마침내 함께 임무를 완수하기까지 영화가 할애하는 시간은 전체 분량 중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이 카사블랑카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와 포탄이 날아다니는 한복판에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장면도 압축적인 편집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대신, 영화의 나머지는 상부가 맥스에게 허용한 단 3일, 즉 아내의 정체를 알아낼 시간에 모조리 사용된다. 말하자면 영화의 절반은 서사가 포괄하는 사건의 비중과 범위에 비해 어딘지 서둘러 다급하게 다뤄지고, 이후는 반대로 그 세계를 의식적으로 느리게 연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전자를 사건의 시간으로, 후자를 심리의 시간으로 간명히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 불균형한 구조 혹은 서사의 속도에 대해서는 더 해야 할 질문이 있을 것 같다. 맥스와 마리안은 첫 만남부터 부부의 모습을 연출하는 가운데, 독일 대사를 피살하는 공동의 목적을 추진하면서도, 매혹적인 낯선 남녀의 위치에서 서로를 탐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펼쳐내는 능숙한 표면의 활동이 우아하게 막힘없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그 흐름에서 빠져나와 표면의 활동을 물끄러미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정면을 응시하거나 자신의 정면을 노출하며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표출하는 대신, 마주 보는 순간에도 시선을 살짝 어긋나게 두거나, 제3의 시선들을 경유해서 상대에게 도달한다. 그들은 주위의 모든 것들을 의심하면서도 정작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는 어느 이상 묻지 않는다. 하지만 내내 불명확하고 모호한 눈빛으로 상대를 관찰하는데, 그 눈빛은 상대에게 닿기 전에 이미 카메라의 눈 안으로 흡수되어버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정면이 아닌 측면의 방향으로 함께 존재한다. 그 방향성은 무언가와의 대면을 최대한 미룸으로써 어떤 상태를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남겨두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다. 이들이 나눈 감정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연기인지 묻는 일은 무용하다. 진심과 연기 사이를 오가는 활동이 빚어낸 어떤 상태만이 지금, 이들의 세계에서는 중요하다. 두 남녀가 독일군들을 죽인 후, 차를 타고 현장을 빠져나오면서 마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것처럼 결혼을 언급하는 장면은 감정적으로나 서사적으로나 아무래도 성급해 보인다. 하지만 그 성급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을 쫓아오는, 한번 마주하면 다시는 떨쳐낼 수 없을 그림자로부터 맹렬하게 달아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 얼라이드 >의 마지막 72시간 안에 등장하는 비행기 추락장면의 강렬함과 기괴함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맥스의 집에서는 마리안의 주최로 파티가 벌어지는 중이다. 맥스는 마리안을 스파이로 확신하는 상부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의 행동을 쫓는다. 그러던 중,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밤하늘은 한순간 폭격의 굉음과 빛으로 가득 차는데, 공격을 받고 하강하는 적기 하나가 맥스의 시야에 잡힌다. 그런데 갑자기 그 비행기가 그의 집 쪽으로 방향을 틀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맥스가 마리안과 아기가 있는 2층으로 황급히 올라가자 창문으로 불에 탄 비행기가 돌진하고 있다. 맥스와 마리안은 불에 탄 채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창밖 비행기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무방비하게 쳐다볼 뿐이다. 우리가 가이 생스터의 얼굴 정면을 보고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과 불길함이 이들의 표정에서도 스쳐 간다. 이 찰나는 카사블랑카에 두고 온, 아니, 그곳을 떠난 후 이들이 내내 회피하던 그림자가 위압적이고 파괴적인 형상으로 돌아와 이들의 현재를 기어이 삼키기 직전의 순간처럼 경험된다. 다행히 비행기는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들을 덮치지 않고 집 뒤편의 언덕에 추락한다. 그리고 다음 날 이들 가족은 다시 평화를 되찾은 언덕으로 소풍을 나온다. 그들 뒤로 부서진 비행기가 보인다. 이 장면은 마치 의미를 규명할 수는 없으나 그 막강한 힘만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은 실재의 무시무시함과 마주한 뒤, 더 이상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미 불구가 된 환상을 목격하는 것 같은 기분을 안긴다. 혹은 그것은 죽음을 바로 등 뒤에 두고 마지막으로 기어이 애를 써보는 환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국 환상을 허락하지 않는 멜로의 비극일 뿐이라고 말해야 할까. 마리안 부세주르가 실은 ‘마리안 부세주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뼈아픈 과정에 그 비극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 얼라이드 >가 혼신의 힘으로 영화의 절반을 할애한 72시간은 단지 그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일까. 맥스가 마리안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 홀로 고투하는 3일이 펼쳐지는 동안,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바라보는 곳은 사실관계가 밝혀지는 목적지가 아니다. 영화는 그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그 목적지에 닿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마리안과 맥스의 표정, 몸짓, 시선, 동선을 주시한다. 그들은 무언가 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직감한 상태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종종 서로를 몰래 응시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들은 카사블랑카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서 연기한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지금까지 내내 서로에게 연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후반부에 도달해서야 우리가 절실하게 깨닫는 건, 이 연기를 누구도 거짓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진짜와 가짜, 본질과 연기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바로 그 육체의 속삭임과 숨소리와 미소가 전부가 아니라면 여기, 다른 무엇이 있겠냐는 듯 이 세계는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카사블랑카의 사막 위에서 이들이 벌이던 섹스 장면을 떠올려보라. 위협적인 모래바람으로부터 차단된 좁은 차 안에서 그 모래바람에 둘러싸여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몇 시간 후 임무에 실패하면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죽을 운명이며, 당장 일보만 걸어 나가도 모래바람에 휩쓸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한계로 뒤덮인 상황과 운명에 들러붙은 어둠에 잠식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확보하는 중이다. 작지만 촘촘하고 위태롭지만 관능적인 딱 그 정도의 시공간이 그들이 지켜내려는 어떤 상태고 환상이고 우주다. 그러니 < 얼라이드 >는 과연 우리는 환상과 싸워 우리의 진실을 어디까지 알고 대면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환상을 얼마나 끝까지 필사적으로 책임지고 지키며 사랑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다. 이 두 질문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이 영화는 알고 있다. 강하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그 환상의 힘을 바라본다. 가이 생스터의 얼굴 정면에서 우리가 대면하고 만 무(無)가 아니라, 두 남녀의 시선이 측면의 방향에서 포기하지 않은 힘겨운 활동의 가능성을 이 영화는 믿고자 한다. 설령 그 끝에서 죽음이라는 필연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 영화는 배신과 거짓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그 환상을 온전히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