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
- 감독
- 김유라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장호인, 민효경, 정우진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 본 글에는 극중 일부 장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세계의 주인 >(윤가은, 2025)을 아무런 정보 없이 관람할 때, 관객은 필연적으로 오류 혹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초반의 시퀀스들은 수수께끼에 가까운 불규칙한 배열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은 교복을 입은 커플이 학교로 보이는 폐쇄된 장소에서 키스에 몰두한 모습이다. 곧 영화의 중심이 될 주인( 서수빈 )은 키스 도중 남자 친구( 김예창 )의 얼굴이나 손을 지속해서 교정한다. 이 장면은 성행위를 묘사한 웹툰 스케치로 넘어가는데, 마치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방금까지 키스를 나누던 주인은 단짝 유라( 강채윤 )가 그린 웹툰이 담긴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음 상황을 궁금해한다. 체육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배구 연습을 하는 도중 자리를 이탈해 장난을 치다가 다른 학생에게 부딪히기도 한다. 이때 부딪힌 남학생 수호( 김정식 )와 주인은 이후에도 부딪히는 일이 잦다. 수호의 어린 여동생은 주인의 엄마( 장혜진 )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주인은 엄마를 따라 방문한 병원에서 팔에 깁스를 한 수호의 동생을 만난다. 그날 수호는 동생을 씻기다가 목덜미 근처에 난 꼬집힌 자국을 본다. 다음날 어린이집에 찾아가 CCTV를 보여달라고 말하지만, 어린이집 교사는 곤란해하며 자리를 피한다. 수호는 마을 어귀 담벼락에는 빨간색 라카로 성범죄자의 집이라고 적힌 곳을 지나친다. 주인의 동생 해인(이재희)은 마술을 배워서 가족 앞에서 상연하는 것을 좋아한다. 빨간 공을 손안에서 사라지게 하는 마술 등 대부분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다. 해인은 주인의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숨겨두거나, 신발에 흙을 묻혀 오는 등 어떤 비밀이 있어 보인다. 주인의 엄마는 텀블러에 양주를 넣어서 몰래 마시곤 한다. 주인은 진로를 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선생님( 이상희 )과 개별 면담 시간에 파티션 위에 놓인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쉬기 곤란해하는데, 알레르기가 있냐며 당황해하는 담임에게 주인은 장난이었다며 웃어버린다. 정확한 숏의 순서를 정리하기 어려운 일련의 몽타주 속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마음 두기 힘들다. 그러다 개별적인 상황을 한데 모으는 꼭짓점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복역 기간을 끝낸 성범죄 피의자의 학교 인근 마을로의 복귀가 임박해지자, 수호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범죄자 복귀 반대 서명을 받는다. 주인은 홀로 서명에 반대하는데, 이유는 서명을 독려하는 문구 중 피해자의 아픔을 과장해서 묘사한 부분 때문이다. 피해자는 이 일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문구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이것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성을 강요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주인이 문구에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어쩌면 그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네가 뭐 성폭력 피해자라도 돼?”라는 일갈에 주인은 “그래, 나 성폭행 피해자다.”라고 답한 뒤 곧이어 농담이라고 무마해 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관객은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주인과 그를 둘러싼 모든 비밀스러운 상황과 행동에 하나의 질서가 생긴다. 아버지의 부재도, 편지를 숨기거나 마술을 배우는 동생도, 술을 마시는 엄마도, 주인의 활발함도, 모두 성폭력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불규칙한 것처럼 보였던 배열이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질서로 통합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이러한 해석이 결국 인물을 사건에 가둬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서명문 속의 클리셰와 비슷한 짓을 내가 인물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느낀다. 서명을 부탁하는 수호와 반대하는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사실 확정을 위한 고백은 일종의 법정에서 이뤄진다. 문구를 수정했다는 수호의 말이 거짓임을 간단히 확인한 주인은 자리를 피하지만, 수호가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표출된 주인의 분노는 그가 가진 본래의 성격만을 표시할 수 있는가. 그 안에 잠재한 성폭행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의 행동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제의 그 문구를 상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과연 영화가 지속하는 동안 인물은 이러한 잣대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교장실에 불려 간 주인과 수호는 서로를 마주 본 위치에 앉는다. 수호는 서명받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주인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며 결국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차분히 고백한다. 가장 문제적인 장면이 이어진다. 차 앞좌석에 나란히 앉은 엄마와 주인은 세차장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다소 노골적인 의식이자 클리셰다. 세차가 이뤄지는 공간 내부의 소음이 주인의 울부짖음을 가리는 동안, 주인은 엄마를 향해 원망의 말을 마구 쏟아낸다. 세차가 끝나고 울음이 잦아질 즈음 엄마는 말없이 휴지와 물을 건넨다. 그러고는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수호가 쓴 서명문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가 속절없이 떠올랐다. 세차장 장면은 이를테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씻으려 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상처의 당사자인 이들은 상처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그 안에서 주인은 혼자가 아니다. 주인의 엄마는 바깥에서 상처를 바라보거나 낫게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상처 안쪽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들과 함께 뒷좌석에 무단 탑승한 카메라 역시 상처 안쪽에 자리 잡으려 한다. 세차장 장면의 핵심은 무언가를 씻어내는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위치에 있다. 외면했던 안쪽에서 여전히 울부짖거나 억눌린 상처들이 존재하고, 주인은 잠시 그 상처가 되어 아우성쳐 보았을 뿐이다. 세차장 기계 속 차 안, 엄마 태선과 주인 (사진: “ [세계의 주인] 메인 예고편 ”, 바른손이앤에이) 안쪽에 자리한 사람들이 있다. 법정 장면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미도( 고민시 )가 피고 측 변호인의 심문에 맞서 증언할 때, 미도의 뒤편에서 슬쩍 손수건을 건네주는 인주( 백현주 )와 동료들은 상처의 안쪽에 있는 사람이다. 심문을 마치고 식당 부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미도는 가족이 찾아왔다는 동료의 말을 듣는다. 두려운 듯 커튼 뒤에서 슬쩍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뜻밖에도 창밖에 있던 주인이 시선에 잡힌다. 미도는 주인을 그 장소에서 가장 깊은 곳인 주방 안쪽으로 들인다. 둘은 그렇게 상처의 안쪽에 있다. 사건 이후 주인은 무리 짓던 친구들과도 어쩐지 데면데면해진다. 주인의 교실 책상 서랍 안쪽 깊숙한 곳이나 책 사이에서는 적대적인 느낌을 주는 쪽지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 쪽지를 쓴 자가 누구인지는 관객 역시 알 수 없다. 그리고 복도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점이 불현듯 등장했을 때, 카메라 뒤에 있는 자가 쪽지를 쓴 미지의 인물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카메라 앞을 스치고 지나간 주인이 갑자기 렌즈 가까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방금까지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깨어진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사건 이후 유독 멀어진 친구 유라다. 유라와 주인은 머리를 대고 방금 찍힌 영상을 함께 확인한다. 이로써 유라, 혹은 미스터리한 쪽지를 쓴 이들 역시 상처의 안쪽에 자리한 사람이 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대개 카메라 안에서 벌어진 일들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이라 여겨지지만, 이들 역시 내부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침범과 공유다. 영화는 거의 모든 이들을 상처의 안쪽으로 초대한다. 나 역시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 켄 로치의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에서 제목이 곧 개인의 존엄을 표시하는 모두의 구호가 된 것처럼, <세계의 주인>에서도 ‘나, 주인’임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을 소환한다. 내 몸과 내 상처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 상처의 안쪽에서 때로는 욱하는 마음이 들고, 상처의 바깥에서 이 마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러워도 상처와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물론 여기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탓은 아닐 것이다. 사진: “ 세계의 주인 ”, 네이버영화 김소희(영화평론가) ㅣ 영화를 보는 동안 느낀 감정의 격랑이 내가 쓴 글 안에 거짓 없이 찍혀 있기를 바랍니다.
중반부에 영화의 스타일을 요약하는 한 장면이 있다. 늦은 밤, 열아홉의 영하( 권한솔 )는 거실 소파에 잠들어 있다. 그가 잠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영하를 안아 들고 침대에 누인 계부 영진( 박종환 )이 훤히 드러난 영하의 쇄골 부근에 찍힌 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성장기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하는 듯한 이 삽화는 자식을 향한 애틋한 부정(父情)과 자신의 충동에 굴복한 남자가 느끼는 자괴 사이를 진동한다. 연출자 김유리 의 개성은 이처럼 스토리의 흐름을 함축하는 중요한 정보, 인물의 감정을 다루는 복합적인 방식에서 나온다. 부분적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플롯은 관객들이 영하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무심한 말과 행위로만 전달한다. 생면부지의 영진이 이삿짐 트럭 앞에서 서성대는 열두 살 영하(문성안)를 안아 올릴 때, 등교를 준비해야 하는 부산스러운 아침, 머리를 감는 열다섯 살 영하( 안진현 )의 목덜미 위에 그가 물을 부어줄 때, 바람이나 쏘이자며 차를 몰아갔던 비 오는 날 영진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서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감지한다. 김유리 감독은 단편영화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있었던 거지?>(2013)에서부터 눈여겨보았다. 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처리된 장면들을 모아 진실을 이야기할 줄 아는 연출자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주인공의 초점을 상실한 내면 상(像)을 묘사하는 이 단편에서 김유리는 스토리와 감정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 팽팽하게 제어하는 연출의 힘을 보여주었다. 김유리의 장편데뷔작 < 영하의 바람 >(2018)은 주인공 영하의 성장기를 그의 삶에 중대한 전기(轉機)가 된 세 개의 시기를 이어 붙여 구성한다. 열두 살, 열다섯 살, 열아홉 살로 도약하는 세 개의 시간 프레임에 걸쳐서 세 명의 다른 배우들이 영하를 연기한다. 이 조각난 7년의 시간 안에서 영하의 세계는 격동한다. 친부가 떠난 뒤 그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신동미 ) 슬하에서 계부와 새 가족을 이룬다. ‘박영하’에서 ‘김영하’로 전환된 이 시기 영하는 믿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또래 사촌이자 친구인 미진( 옥수분 )과 유대감을 형성한다.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녀는 병적으로 안수에 집착하는 어머니, 종종 다정하기도 한 계부로부터 방치된다. 가족의 붕괴와 타락한 종교, 아동 학대, 여성의 독립, 불안정한 주거 등 많은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 안에서 영하는 이 무수한 문제들과 싸우고 있다. 세 개의 챕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상술하지 않는 플롯에도 불구하고, 김유리는 영하를 덮친 외풍과 세계로부터 밀려나는 존재의 비의를 침착하게 쌓는다. 보호받지 못한 성장기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그린 이 영화의 핵심 의제는 좌초된 가족이다. 집과 연결된 문제는 10대 소녀가 직면한 고독과 소외의 교차점에 있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영하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이삿짐과 함께 버려진 채 서럽게 울고, 스스로 집을 떠나 골방에 들었다가, 마지막에는 집 없이 떠돈다. 거처를 상실한 유랑의 상태로 영하를 몰아가기까지 대다수의 사건은 극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생략과 뉘앙스로 전달된다. 이를테면 신앙의 외피를 두른 어머니의 욕망과 의뭉스러운 계부와의 관계는 은근하게 암시된다. 점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탐사 과정은 영하의 의식이 성장하는 속도와 흐름에 맞춰져 있다. 바람은 중요한 순간마다 불어온다. 낯선 운전기사가 모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열두 살 영하에게, 완전히 혼자가 되어 폐허의 골목길을 걷는 열아홉의 영하에게도 바람이 분다. ‘영하’는 극중 인물의 이름이자 기온을 표시하는 단위이고, ‘바람’은 자연현상인 동시에 기분전환이라는 의미를 품은 메타포이고,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는 교회 예배에서 신에게 무언가를 기원하는 어머니와 영하의 모습으로 열리고, 휑한 거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리는 영하를 끝으로 닫힌다. 의미의 다원성을 가지고 유희하는 제목처럼 인간의 말과 행위는 하나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고, <영하의 바람>은 단일하게 고정되지 않는 스토리의 경계를 진동한다. 존재의 기반을 매섭게 휩쓸고 가버리는 바람, 상실감에 대한 이 이야기 안에는 애조 띈 이미지들이 많다. 특별히 신성함이 느껴질 만큼 초연해 보이는 영하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과묵한 영하가 의미심장한 사건을 겪는 동안 관객들은 캐릭터의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그의 얼굴을 통해 짐작한다. 대사가 전달하는 감정을 모두 합친다 해도 무감하고 스스럼없는 영하의 얼굴을 이길 수 없다.
* 글 안에 애니메이션 시리즈 < 진격의 거인 >에 대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공포가 엄습하는 것은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떠돌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이다.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한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 그것에 맞서 싸우려 해도, 싸워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저, 함규진 역, 산책자, 2014)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 글에 적합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 진격의 거인 >이 그것이다. 이시야마 하지메의 원작 만화를 <데스노트>의 감독인 아라키 테츠로가 연출한 25편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이다. 채널 애니플러스를 통해 한일 공동 상영된 이 작품은 한때 인기를 얻어, 우리 방송과 인터넷에 밑도 끝도 없이 ‘진격의 00’으로 여러 상황들이 패러디되었다. 식인 거인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왜 인기를 얻었을까? 일단 이야기에 작동하는 세계를 보면, 먹이사슬의 최종 소비자이던 인간에게 서기 845년(실제 인간의 역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천적이 나타난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몇 배에서 수십 배에 달하는 거인이 나타나 인간을 마구 잡아먹기 시작한다. 인류는 전멸하다시피 했으나, 그나마 남은 인류는 3중으로 된 거대한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살게 된다. 인류는 폭압적 공포에 움츠러들어 거대한 성벽 안에서 겨우 연명한다. 거대한 성벽은 그런대로 100년간 거인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조사병단을 성 밖으로 내보내지만 매번 성과 없이 죽어서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조사에 회의적이게 되고 거인에 대한 정보는 극히 피상적이다. 공간적 배경인 3중으로 된 성벽 도시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마음의 구조인 3층 구조를 떠오르게 한다. 알다시피 프로이트가 말하는 마음의 구조는 ID(원초아), Ego(자아), Super-Ego(초자아)로 구분된다. 애니메이션 속에 인간들이 사는 3중 벽은 바깥부터 월 마리아, 월 로제 그리고 월 시나로 구성된다. 공간 구조를 인간 마음의 구조로 치환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이나, 향후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의 대립을 통해 그들의 성격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를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주인공 ‘앨런 예거’와 ‘미카사 에커만’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거인에게 잡아먹히는 어머니를 목도한다. 그러나 압도하는 공포 앞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군인 한네스의 도움으로 미카사(이후 회상 장면에 의하면 미카사의 가족은 누군가로부터 살해당하고, 그때 앨런의 도움으로 미카사만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앨런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자라며,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와 살아남는다. 공포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인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긴 ‘앨런’과 ‘미카사’는 복수를 맹세하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거인(공포)에 대항하는 인간 사회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이 작품의 관람 포인트다. 어떠한 의도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인간을 잡아먹는 무지막지한 거인과 왜 잡아먹히는지도 모른 채 잡아 먹히는 인간들, 자신에게만 거인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나약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월 시나로 가려고 경쟁한다. 그러나 삼중 구조로 된 도시의 좀 더 안전한 월 시나는 한정되어 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군대도 훈련 성적순으로 갈린다. 거인을 물리치기 위해 훈련을 받는 군대조차 우등생은 거인으로부터 멀어지는 헌병단으로 배치되고, 성적 나쁜 훈련생은 오히려 밖에 나가 거인과 대치해야 된다는 아이러니한 사회 시스템을 보여준다. 강자가 약자를 먹는 이런 사회는 그 자체가 이미 괴물이다. 인간을 단순히 거인이 소비하는 먹이로 그려지고 있어 자본주의 사회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일단 접어두고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해 보자. 3중의 벽으로 100년간의 평화가 이어지고, 성 밖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어린 앨런과 아르민은 인간을 벽 안에 갇혀 사는 가축으로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성 밖의 정보가 든 책을 훔쳐보며 바깥세상에 대한 꿈을 꾼다. 하지만 어른들은 성 안이 안전하니 그냥 안에서만 살자고 한다. 아예 사제들은 성벽이 신의 예지로 만들어졌으며, 벽은 신 그 자체라고 찬양한다(물론 이건 시즌 2의 복선이다). 그래서 희생을 하면서 성 밖을 조사하지도 말자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갑옷 거인이 나타나 거대한 성벽을 뚫어버린다. 그리고 인간들은 월 마리아를 버리고, 두 번째 성인 월 로제로 도망을 간다. 갑옷 거인의 침입 이후 미지를 탐구하기 위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초자아적 신념을 버리고, 안전 본능과 현실 인식으로 인간의 공간은 월 로제와 월 시나로 축소된다. 따라서 월 마리아는 인간이 가진 초자아의 공간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공포에 지혜와 용기로 맞서는 인류의 노력은 눈여겨 볼만하다. 갑옷 거인이 뚫은 월 마리아의 성벽을 통해서 4m~7m급의 거인들이 들어와 인간을 잡아먹는다(여기서 앨런의 어머니가 잡아먹힌 것이다). 하지만 거인은 인간을 배고픔 때문에 먹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거인은 인간만 먹지 다른 동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간을 어구적어구적 씹어 먹을 뿐이다. 이 거인은 인류에게 있어서 공포 그 자체이다. 거인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1화부터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거인은 생식기가 없으니 자체적으로 번식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지 못한다. 팔다리가 잘려도, 머리가 깨져도 다시 재생되는 등 자기복원력이 대단히 뛰어난 종족이다. 다만 그 동안의 전투의 결과 거인들은 벽 바깥에서 오며, 유일한 약점은 목 뒤를 칼로 베어내야 재생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9화에서 앨런 예거의 거인화 능력이 알려지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성형 거인의 실체인‘애니’를 보면 거인은 또 다른 인간의 자아가 아닐까 추측된다. 또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인간,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권력, 인간의 호기심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이 바로 거인이 아닐까, 그런 거인을 우리는 누구나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거인의 비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말한 개인의 성격은 앞에서 말한 Id, ego, super-ego가 함께 존재하며, 이들 간의 역동적인 관계에 의해 개인의 성격이 결정되고, 세 가지 요소가 항상 움직이며 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조건, 발달단계에 따라 세 요소 중에 상대적 우위에 차이가 있으며, 항상 상호 갈등 관계를 이루게 되고, 긴장 관계 또한 변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요인물을 살펴보자. 앨런 예거는 초자아의 상징으로 보인다. 초록 괴물로 변하는 헐크처럼 자기 스스로 고통을 가하든 타인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든 극심한 고통과 분노 속에서 거인으로 각성된다. 그러나 앨런에게는 거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분명하고도 잊을 수 없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어 거인으로 각성되어도 거인을 공격하는 특이한 성향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괴물을 뛰어넘으려면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초자아적인 신념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친구 아르민의 말대로 그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일단 앨런이 거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작가가 주인공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겠다. 13화 ‘원초적 욕구 토로스토구 공방전9’에서 인류가 거인으로부터 처음 승리를 거둔 날의 작전에서 앨런은 거인으로 변해서 성벽의 구멍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거인으로 변한 앨런은 기대와 달리 미카사를 공격하다 쓰려져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때 거인 속에 있던 앨런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꿈처럼 빠져있다. 거인으로 변한 후 원초적 욕구(행복한 기억)를 떠올리는 건 거인이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그를 본능에서 깨워낸 건 작전을 제안했던 친구 아르민이다. 그는 어떤 자극에도 그가 깨어나지 않자, 어린 시절 함께 꿈꾸던 성 밖의 세계,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그로 인해 얻을 자유를 속삭인다. 어린 시절 갈망을 자극하여 그를 각성시킨 것이다. 성 밖에 대한 호기심과 세상 최고의 자유라는 이상이 다른 거인과 달리 앨런 예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야! 그걸 막는 자가 아무리 강해도 관계없어, 불의 물이라도, 얼음의 대지라도.”인간의 본능을 뛰어넘는 초자아적 의지가 있어야만 거인이 되어서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 드디어 앨런은 각성하고 거인으로 인간의 의지를 갖고 작전을 수행한다.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은 무엇에 갇혀 있는지 알아야 한다. 지능형 여성 거인을 제외하고 거인들은 모두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입으로 가져가는 구순기의 특징을 보여주며, 피부 없이 근육과 골격만으로 이루어져 꾸미지 않은 원초적 이드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시리즈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작품의 미스터리한 안타고니스트가 밝혀진다. 지능을 가진 여성 거인은 104기 훈련생 동기인 ‘애니 레온하트’다. 앨런의 동료였던 애니는 언제나 시니컬하고 세상일을 시시하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격투술만큼은 생기가 돌고 본능처럼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그녀가 거인이 되었을 때 온몸이 경화되어 칼도 소용없어진다. 이는 자기보호 본능의 상징처럼 보인다. 거인화 된 앨런과 애니의 대결에서 애니의 사연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애니, 세상이 전부 적으로 변해도 원망하지 마라. 아버지는 네 편이다. 약속해줘 돌아온다고” 에피소드를 통해 어린 애니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격투훈련(수능공부)만 하던 그때, 거인화 되는 방법(약물)을 택했고, 그로 인해 그녀가 거인(괴물)이 된 것으로 보이며, “애니, 내 생각이 틀렸다. 돌아와다오!”라고 절규하는 아버지에게 “이 세상을 모두 파괴해버릴 거야!”라는 애니의 대답은 그녀가 거인이 된 사연을 짐작게 한다. 훈련소에서 애니는 세상 따위는 관심 없고 난 살고 싶을 뿐이라며, 가장 안전하다는 헌병단을 원했고, 앨런이 조사병단에서 죽더라도 거인과 싸우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화되는 것이 중요한데,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일방적으로 격투 훈련에 내몰린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버지로부터 주입받은 훈련 때문에 자기 자신의 방어를 위한 격투기계로 내재화되면서 자신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녀의 자아이상은 아버지의 선별적 인정(격투)을 내면화하면서 인간성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자아이상을 달성하여 자존감과 자긍심을 키우고 찾는 데 실패한 그녀는 부모 통제를 벗어나 자기통제의 순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이드가 폭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르민과의 에피소드를 보면 애니도 관심과 사랑을 받고 인정받는 아이고 싶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애니는 훈련소 시절에도 앨런과의 대결하는데, 그때 그녀는 거인을 모두 죽이겠다고 큰소리치는 앨런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앨런에게 연약한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격투로 앨런을 가혹하게 몰아붙인다. 그런 그녀도 겁 많고 자신에게 다정했던 아르민에게는 거인으로 변해서도 죽이지 않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세상에 관심 따위는 없어!” 그녀의 외로운 절규가 들린다. 관심을 받고 싶다고! 시리즈의 중반에 초자아를 지닌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거인의 정체를 연구하는 인물로 조사병단의 한지 조에 분대장이다. 언젠가 죽은 거인의 머리를 걷어찼을 때, 생각보다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거인의 존재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뒷목덜미를 잘려서 죽으면 염산에 타듯이 몸이 사라지고 뼈만 남는 것에 궁금증이 생긴다. 그녀의 주장은 증오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인을 알고자 그 뒤로 거인의 생체실험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는 보이는 것과 실재하는 본질이 다르다고 주장하게 된다. 바우만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나타났을 때 두 가지로 반응한다고 한다. 도망하느냐, 아니면 맞서 싸우느냐 중에서 선택한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2차적 공포가 발생한다. 사회와 문화적으로 순환되는 파생적 공포가 그것이다. 이런 공포는 실제 위협이 출연했든 안 했든 인간의 행동을 제약한다. 즉, 경험자들의 인식을 왜곡하고, 인식에 따라 취하는 행동의 선택지를 바꿔버린다. 2차적 공포는 그런 위협과 직접 마주쳤던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런 과거 경험은 실제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경험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불안의 감각, 취약함의 감각이랄까. 그런 불안과 취약함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실제 위협이 없을 때조차 위험에 직면한 때에나 보이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파생적 공포는 자가 발전 하는 공포이다. 상상 속에서 위험의 실체를 한껏 부풀리고, 압도되어 꼼짝도 못한다.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공포물이가 가능한 사회는 정보가 통제되고, 언론이 통제된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식인 거인이 등장한 것 같다. 종북이라는 공포 몰이로 사회가 마비된 듯 보인다. 거인은 빨갱이다. 거인은 북한이다. 예전에는 선거 때만 출몰했는데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 그런 거인을 우리는 누구나 내 안에 가지고 있지만, 서로 소통하며 괴물로 성장하는 상황을 막는다. 거인은 당신이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그 거인을 만드는 것은 술이든 약이든 이성과 초자아를 망각시키는 그 무엇이다. 작가 이시야마 하지메는 인터뷰에서 거인의 아이디어를 PC방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술 취한 진상 고객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같은 사람(종족)임에도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익숙한 동물(인간)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면 악몽이 될 거라고 생각하였단다.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괴물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학교에도 가정에도 직장에도 사회에도 국회에도 행정부에도 말이다. 식인 거인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왜 인기를 얻었을까? 인류의 존폐 위기를 형상화하고, 잔인한 묘사가 거침없으며,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이동 가능한 ‘입체기동장치’ 등 액션이 화려하다. 인간과 거인의 대결 구도만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까지 비정한 세계관으로 더욱 구체화하며 작품 곳곳에 배치한 상징과 은유는 디스토피아에 만연한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매회를 거듭하며 벗겨지는 미스터리 요소는 보는 내내 긴장감을 만든다. 또한 인류를 위협하는 거인을 피하기보다 폭압적 공포에 맞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는 주인공의 초자아적 신념을 통해 우리도 자유를 선취할 수 있다는 자각과 성취감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 집단을 위해, 사회를 위해, 타인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며, 약육강식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는 불편하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이런 장면들, 특히 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영웅으로 만들고 조직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역겹기도 하다. 이는 집단주의고,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이 작품의 독이고,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기로 밝혀둔다. 당의정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