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값
- 감독
- 박보검, 송강호, 봉준호, 임권택, 이의현_테스트, 이의현, 유성관
- 출연
- 홍경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 류(신하균)는 신장병을 앓고 있는 누이(임지은)의 수술비를 변통해야 한다. 언어소통의 불가능성은 영화 내내 류와 누이의 대화를 자막이나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도록 만든다. 이야기의 도입부, 한 라디오 방송에 류가 보낸 사연이 DJ의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카메라는 라디오를 든 류의 손, 환자복을 입은 누이의 손을 차례로 클로즈업한 뒤 이어폰 줄을 더듬으며 느리게 올라간다. 류와 누이는 옥상에서 각자의 귀에 이어폰을 하나씩 꽂고 라디오 사연을 듣는다. 마른 눈물이 흐르는 누이의 얼굴, 류의 뒤통수가 보이고, 다음 쇼트에서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그리고 옥상의 전경이 사선 앵글의 익스트림 롱 쇼트로 제시된다. 액션이 벌어지는 공간을 총체적으로 조망해주지 않고 세부로부터 시작해 전체로 나아가는 쇼트의 위계는 일반적인 장면 구성 방식을 뒤집는다. 원경에서 전경으로 쇼트의 크기를 점진적으로 증감함으로써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돕지 않고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거리를 증감하면서 장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지연시킨다. 말보다 이미지를 통해 스토리를 기술하는 박찬욱의 시청각적 스토리텔링은 쇼트 구성의 관습을 파괴하고 하나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두 개 이상의 맥락으로 확장하는 편집의 전략을 구사한다. < 복수는 나의 것 >은 자연스러운 쇼트의 배열이 스토리의 흐름을 매끄럽게 잇는 스타일의 표준 관행을 파괴한다. 다른 기술적 요인들보다 편집은 마음의 눈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새로운 관람의 경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소비에트 몽타주 편집 전통의 재래(再來)를 볼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에이젠슈테인이 ‘어트랙션(attraction)’이라고 부르는 몽타주의 효과는 폭력적인 결말을 향하는 캐릭터의 나선형 여정과 그것을 기술하는 편집 스타일을 통해 보증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는 관습적인 쇼트-리버스 쇼트 체계를 찾기 어려운데 대화 장면에서 이를 대신하는 것은 카메라를 보고 말하기이다. 카메라를 보고 말하게 하는 것은 정면 클로즈업이 배우의 표정과 그것이 자아내는 인상을 가장 잘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류와 그의 여자 친구 영미(배두나)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정면을 향한 두 인물의 얼굴을 수직으로 찍는다. 류는 벙어리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영미 혼자이고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건 저들의 표정, 특별히 대사를 읊어주는 영미의 입술 모양이다. 몽타주 체계와 관련하여,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둘 이상의 상황을 나란히 배열하는 평행 편집의 활용이 잦다. 일련의 병렬 편집은 딸 유선(한보배)의 유괴 사실을 알게 된 절망에 빠진 아버지 동진과 류 사이에서 시점을 앞뒤로 이동한다. 여기서 유선의 장난감 인형은 그래픽과 주제를 연결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인형은 캐릭터를 연결하며 장면의 초점을 류에서 동진으로 옮기며 이들의 융합을 예고한다. 어느 시점에서 유선이 가지고 놀던 인형의 클로즈업 쇼트와 함께 동진의 목소리가 “아빠는 유선이를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유선이도 아빠를 사랑해요, 진짜”라는 유선의 목소리와 함께 끔찍하게 분장을 한 새로운 인형으로 이행한다. 인형을 둘러싼 조명은 어둡고, 눈에서는 피가 흐르며, 흥정을 위한 몸값 메모가 첨부되어 있다. 인형의 몽타주는 류와 동진을 연결하며 몸값 흥정을 기술하는 서사적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유선, 류의 누이, 영미가 죽은 후, 류와 동진은 각자의 복수 계획에 의해 인질로 잡혀 이 나란한 이미지들의 뒤틀린 변주를 형성하게 된다. 평행 편집을 활용한 쇼트의 연속성 패턴은 장면을 하나로 모아 캐릭터 개발에 도움이 된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도 평행 편집이 나타나며 라스트의 강력한 대결 장면에서 류와 동진이 만날 때까지 속도와 강도는 높아진다. 이처럼 해설적이기 보다 묘사적인 편집의 맥락을 따라갈 때 모든 플롯 요소를 하나의 응집력 있는 스토리로 연결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대화가 최소화되기 때문에 관객은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쇼트의 배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창의적인 사운드 몽타주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사례도 있다. 사운드 몽타주는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 스토리 세계에 흩어진 위치들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동원된다. 류가 누이의 자살을 알고 울부짖는 신에서 절묘한 사운드 몽타주의 사례가 나온다. 류의 감정적 상처가 깊은 이 신은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시퀀스이다. 누이의 자살 메모와 핏물 속에 잠긴 그녀의 팔을 보고 류는 울부짖는다.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유선이 보는 동물 만화가 재생되고 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세상을 잠식해가는 동안 몸값 거래가 이루어진 공원에서는 검은 비닐이 얼굴에 씌워진 채 묶여 있는 동진의 앞에서 개가 짖고 있다. 그 짐승 소리의 질감과 리듬에 맞춰 동진도 울부짖기 시작한다. 카메라의 주관적인 시점은 비명을 지르는 동진과 멀리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도시를 응시한다. 이 신에서 사운드 편집 및 청각 신호는 다른 위치의 캐릭터들을 나란한 좌표 위에서 연결하고 고도로 양식화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편집 스타일에 담긴 영화적 효과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은 동진에게 류가 죽임을 당하는 신이다. 먼저, 관객은 동진이 류를 끌고 냇가를 가로지르는 조감 쇼트를 본다. 두 번째로 물속에서 류의 발목이 보인다. 이어 동진과 류의 투 쇼트로 커팅하여 동진이 복수의 정당성을 고지한다. 탁한 물에 잠기는 동진. 카메라는 방금 절개된 류의 아킬레스건을 클로즈업 쇼트로 잇는다. 류의 소리 없는 절규나 고통받는 노동 계급의 외침을 들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심이 낮은 시냇물에 빠져 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진. 핏물이 얼굴에 튀었을 때 동진은 눈을 깜박일 뿐이다. 마침내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 동진은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다. 자본가의 노동계급에 대한 가혹한 승리를 함축한 류의 죽음 신은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복수’라는 아이러니한 주제를 달성하였다. 결국 모든 캐릭터는 복수를 찾는다. 그러나 관객은 복수심에 불타는 캐릭터 둘 다에게 공감하는지, 공감하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영화는 복수의 길을 택하면 아무도 이길 수 없고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이들의 죽음과 복수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유선을 인질로 삼으려는 류의 계획을 알게 된 누이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누이의 자살에 이어 류는 유선과 함께 죽음을 향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유선의 납치는 불필요했고, 누이를 돕기 위한 류의 노력은 연쇄적인 죽음의 원인이 된다. 류가 비극적으로 죽은 누이를 냇가 돌무더기에 안장하며 애도하는 동안 유선은 우발적으로 익사한다. 관객들은 류보다 먼저 위험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관객들은 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전에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박찬욱은 이 플롯 기법을 자신의 해석적 관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용하여 스토리와 주제를 연결하도록 촉진한다. 에이젠슈테인에 따르면, 쇼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트 간의 전환이 특정 시청각적 자료를 생략하여 관객을 오도하는 것처럼 보일 때 종종 의미는 모호해진다. 시공간을 오고가는 편집은 미지의 상태로 관객을 데리고 가서 인상과 느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캐릭터가 생각하는 것을 해석하도록 한다. 스토리의 더 큰 세계로 이끌려가기 위해 이 견인의 과정은 진정한 의미의 어트랙션을 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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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풍경과 친절한 예의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가 한편의 나무 그늘 아래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가 농작물을 작은 소쿠리에 담아 팔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목에서 할머니는 맹목적일 정도로 성실하게 자리를 지킨다. 매일 늦은 오후 퇴근해 자전거를 타고 동생이 있는 집에 돌아가는 계란장수 청년은 말도 없이 비닐봉투에 계란 다섯 개를 담아 할머니에게 주고 떠난다. 눈이 부시도록 쨍한 연두 빛 논밭을 가르며 달려가는 자전거 위로 분홍과 연보라가 섞인 노을이 하늘에 스며든다.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 소리도 없이 >는 인스타그램의 여행 포스팅에 등장할 법한 무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오프닝의 시체 처리 장면 바로 다음에 붙인다. 시골 장터의 평범한 계란 장수처럼 보였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조직 폭력배들에게 고문과 살인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깔끔하게 시체처리까지 해주는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일은 공유오피스 대여사업처럼 일상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꼼꼼하게 우비, 고무장갑, 위생모자를 착용하던 창복은 자신이 입은 노란색 우비가 태인이 어린 시절 입던 것이라며 회상에 젖기까지 한다. 때리는 사람의 신장에 맞춰 사람을 매달고, 피가 묻지 않게 겉옷을 보관해주고, 바닥에 넓게 비닐을 깔아주는 작업과정은 전문적이고 분업화되어있다. 이들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업계의 프로다. 하지만 창복과 태인은 왜 그 사람이 납치되어 살해당하는지 절대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잠시 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거기까지이다. 곧 살해당할 그는 조립라인 위의 처리해야할 일거리에 불과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폭력과 살인의 끄트머리에서 포장과 폐기를 담당하는 창복과 태인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특히 창복은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 다종다양한 종교에 기대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 버리고, 근면성실과 겸손을 강조하며 지루한 충고를 쏟아내고, 소소한 배려와 선행을 베풀며 자신을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라 믿는다. 창복은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복신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태인은 불만이 있어 보이지만 창복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는다. 태인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도 그의 의견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마지막 ‘판단’을 내린 후 생각을 멈춰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더 이상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창복과 태인은 가능한 다른 이들의 삶에 얽히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를 최대한 축소하고 경량화한다. 그들의 삶에 타인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류하고 돈 벌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친절과 예의이다. 이 영화에서는 언뜻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 드러난 행위만 보면 모두가 성실하게 자기 일 잘 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예의바른 태도가 도덕과 윤리를 대치한다. 그들은 꼬박꼬박 ‘선생님’ ‘실장님’ ‘부장님’이라 부르며 서로를 높이는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한다. 일이 끝나면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조직 폭력배 실장은 태인이 말을 안(못) 한다고 하자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말하며 입술을 읽게 하는 ‘배려’를 베푼다. 유괴 아동을 인계한 범죄자들은 아이들이 잠시라도 편하게 머물도록 알록달록한 가구와 장난감이 있는 놀이방을 갖춰둔다. 하지만 이 모든 친절과 예의범절, 상대방을 배려하는 ‘선한’ 행위에 실제로 타인의 의향과 행위의 맥락은 빠져있다. 그들이 공들여 제공하는 태도와 형식은 자기 목적과 이익을 위한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오프닝에서 상세한 시체처리 과정과 목가적인 농촌풍경을 붙여, 형식과 내용의 뒤틀어짐, 순간적인 기분과 지속적인 정동의 불일치, 사건의 맥락과 단발적 행동의 모순이 팽배한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창복의 ‘노란색 우비’ 대사는 둘이 오래 함께 일한 사이좋은 직장 선후배나 유사 부자관계인 것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창복이 태인을 어릴 때부터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가늠해볼 수 있다. 혹은 창복이 태인을 납치한 걸 수도 있다. 창복과 태인의 관계에서 태인은 분명 피해자다. 토끼의 기지와 별주부의 어리숙함 홍의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별주부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별주부전>에서 별주부는 용왕의 병 치료에 쓸 약으로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다. 별주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수궁으로 토끼를 유인하지만, 토끼는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구한다.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은 별주부이고 유괴 아동 초희(문승아)가 토끼다. 납치된 초희는 토끼 가면까지 쓰고 있다. 창복과 태인은 유괴조차 자기들의 의지로 행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엉겁결에’를 강조한다. 수동성의 강조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피치 못했다’는 모두 가해자들의 반복되는 전형적인 대사가 아닌가?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진행되는 사건 속에서 선택의 계기는 늘 존재했다. 분명 피해가 발생했고 돈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이 된 초희는 그 피해자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질적인 세계의 초희가 태인의 삶의 반경에 들어오게 되면서 태인은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인 초희가 역으로 자신과 동생을 도와주는 행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초희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창복과 태인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난장판인 집안을 치우고 태인의 동생 문주를 씻기고 식사예절을 가르친다. 방치되어있던 문주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가족의 초희를 만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태인조차도 이러한 초희에게 마음을 연다. 마음의 동요는 타인을 인지하게 하고 그것은 생각과 판단을 요청한다. 별주부 역시 창복과 태인처럼 자기 의지보다는 용왕에 대한 충심과 자기 관직의 수호를 위해 움직인다. 이 우화에서 토끼는 낯선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뭍에서도 토끼는 약자이기 때문에 늘 포식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용왕이 간을 원할 때 발휘한 기지는 갑자기 생겨난 능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을 초희는 부모의 맘에 들기 위해 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태인의 집에서 초희가 한 행동은 토끼의 기지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태인과 문주, 부모를 향한 초희의 마음이 완전히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순간적으로 진짜일 수 있다. 태인이 초희를 장기밀매업자에게 보냈지만 마음을 바꿔 구한 것, 초희가 무서울까봐 화장실 밖에서 손뼉을 쳐준 것, 유괴와 몸값 요구에 참여했지만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도 진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 선행이 애초의 가해를 뒤집을 순 없다. 반복해 말하지만 태인은 유괴범이고 가해자이며, 초희는 유괴된 아동이며 피해자이다. 영화는 이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태인을 약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창복을 제거한다. 태인의 선택을 대리하는 창복이 사라지면서 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게 된다. 그 순간에 태인은 조직폭력배 실장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양복을 입는다. 양복은 좁디좁은 자신의 세계 밖의 다른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과 가치를 사유하는 주체적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태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가장 선한 일을 했다고 판단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홍의정 감독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피해 생존자이자 머리를 잘 쓰는 주체적인 토끼보다는 어리숙하고 용왕의 말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별주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별주부는 용왕만큼은 아니지만 토끼를 납치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초희는 가해자를 정확하게 지목하고 호명한다. 태인은 그 지명이 힘에 겨운 듯 도망치며 동경했던 ‘사유하는 주체’의 양복을 벗어 던진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의 알레고리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낭만주의 예술에서 상징에 비해 폄하 당하던 수사인 알레고리를 재개념화하고 조명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순간적으로 총체성을 이루며 명징하고 스스로 완결성을 갖는 아름다운 기호이다. 반면 알레고리는 우연적이고 무정형적이며 여러 시간적 계기 속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역사적 번역과 파편적 몽타주의 작동을 요구한다. 알레고리에서 의미는 은폐되어있음으로 해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다의성이라는 의미작용 그 자체를 노출시킨다. <소리도 없이>는 <별주부전>처럼 피해와 가해, 즉 도덕의 알레고리이다. 벤야민이 재개념화한 알레고리처럼 현대 사회에서 피해와 개해의 문제는 명징하지 않으며 복잡하다.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라는 통일된 정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위치도 다중적이고 뒤집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주체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가해자는 소소한 선행을 베풀고 예의바르거나 어리숙할 수 있다. 또한 한 사건에서 가해자인 이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형식은 쉽게 뒤집어진다. 무해한 아름다운 풍경, 선행, 예의 이런 것들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고객이고 모든 행위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거래일뿐인 시대에 단순히 서비스의 형식일 뿐이다. ‘착한 가격’, ‘착한 소비’처럼 말이다. 역으로 사람은 손쉽게 상품이 된다. 유괴범과 장기밀매업자들의 대화에서 아이들은 고객 만족을 위해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거래 품목일 뿐이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형화된 모습도 부재하고 그 위치성도 복합적인 시대에, 알레고리의 서사는 그 불일치와 혼란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레고리가 각 사건에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와 가해 사실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레고리는 피해와 가해가 발생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양상이 기대한 바와 다르다며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고전 서사 <별주부전>이 토끼의 ‘간계’와 별주부의 ‘충심과 어리숙함’을 강조하며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뒤집지만 납치 사건에서 피해자는 토끼요 가해자는 별주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피해와 가해의 서사와 캐릭터는 복잡하고 기대를 벗어나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피해와 가해 사실을 규정하고 밝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양복의 무게 태인은 양복을 입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그의 삶에서 이 계기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는 사유와 판단의 주체로서 가해자임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사유 없는 행동을 수행하며 테이프에 녹음된 기도소리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즉석 사진의 인화과정처럼 검은 무지 화면 이후 서서히 드러나는 ‘소리도 없이’라는 제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는 태인처럼 뒤늦게 자신을 호명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게, 의도치 않게 ‘괴물’이 된 태인은 사유를 통해 대면한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 영화의 처음 제목은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된다’였다). 타이틀씬 이후 영화는 창복, 태인, 초희, 문주가 따뜻한 햇살 아래 즉석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멜랑콜리한 이 사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희가 부모에게 보낼 사진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던 사진과 비교해 무엇이 더 진실인가. 둘 다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저 순간의 넷은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초희가 유괴된 아동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미지는 상징처럼 순간적이다.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 이미지는 알레고리 속에서 총체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해진다. 말하기를 멈췄던 태인은 그 스스로가 소통불가능성 시대 의미작용의 알레고리였다. 사유를 시작하고 가해자가 스스로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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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센트럴파크를 설립했을 당시, 홍성윤 대표는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살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다. 1년 정도 해보면 감을 잡을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1년이 지나자 2년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설렘과 걱정, 기대와 의심을 고루 품으며 해를 넘기다 보니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0대 중반의 영화학도가 배급사 대표로 성장하는 동안, 센트럴파크 역시 수많은 작품을 만나며 개성과 깊이를 더해갔다. 이번 센트럴파크 10주년 기획전 “오늘이 어제와 마주하는 법”에서 선보이는 10편의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찾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떠나간 이의 발자취를 좇으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가 하면, 우연한 계기로 인해 한동안 잊고 지낸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에 따른 결과는 제각각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최선을 다한다. 안부를 전하고, 응원을 건네고, 도망치다가도 결국 다시 돌아가서 대면하기를 선택한다. 어쩌면 이는 센트럴파크와 홍성윤 대표가 통과해온 10년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어제와 마주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영화에는 지나간 시간을 격려하는 마음과 더불어, 다가올 시간을 향한 환영 또한 담겨 있다. 홍성윤 대표는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는 법을 궁리한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하고 싶어서, 앞으로도 더 많은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축하한다. 기획전 준비하면서 감회가 새로웠겠다. 언제 이렇게 됐지 싶다. 탈출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 하나. (웃음) 시작할 당시에는 단편영화 배급사도 적었을 뿐더러 새로 뛰어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10년을 버티다 보니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센트럴파크 설립 이후 다른 배급사도 여럿 등장했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 셈이고 나 역시 든든한 동료를 얻었다고 느낀다. 단편영화의 경우에는 권리를 침해당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도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 같이 의논하고 힘을 모을 사람이 늘어나서 다행이다. 센트럴파크 홈페이지 소개에 “가장 젊고 열정적인 한국의 독립영화배급사 중 하나”라고 썼더라. 10년을 보내는 동안 젊음과 열정에 관해 곱씹는 순간이 있었을 거 같은데. 6년 전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필름마켓에 처음 나가면서 썼던 문구다. 이제 마냥 젊다고만은 할 수 없을 거 같다. 다만 얼마나 경력을 쌓고 인지도가 올라가든 초심을 잃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대규모 자본력을 갖춰서 창작자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닌데, 꼰대는 되지는 말아야지. 초심을 지키며 계속해서 친근한 배급사로 남고 싶다. 결국 센트럴파크가 말하는 젊음과 열정은 영화를 대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1년에 단편영화 900편 정도를 본다. 늘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보려고 애쓰지만, 사람이다 보니 무뎌지는 순간도 있다. 200편쯤 보고 나면 지칠 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때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딱 나타난다. 그럼 다시 200편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 피로감이나 아쉬움은 없나. 단편을 학생영화라든지 장편을 위한 발판쯤으로 축소하는 시선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말한 것처럼 독립된 창작물로서 매력과 강점을 드러내는 단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창작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창구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개봉 기회조차 없는 단편으로서는 영화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관객 이전에 영화제로부터 선택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영화제는 그해 이슈로 떠오른 사회 문제와 현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을 높은 확률로 선정하다 보니, 창작자 역시 비슷한 주제를 쫓아가는 듯하다. 그럼에도 자기 세계를 드러내는 참신한 영화는 꾸준히 나온다. 이런 작품이 관객과 만나도록 돕고 싶다. 기획전 프로그래밍 과정은 어땠나. 1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작품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기억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도 많았으니까. 영화를 통해 지난 시간과 장면을 한 번쯤 회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12번째 보조사제>(장재현, 2014) <몸값>(이충현, 2015) <자유연기>(김도영, 2018) 등 소위 말하는 ‘간판’ 작품 대신, 비교적 생소하면서도 주제에 어울리는 작품들로 알차게 꾸렸다. 소개 겸 자랑을 해본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남는 영화들이다. <아지랑이>(박지윤, 2014)는 정서로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하고 촬영도 무척 훌륭하다. 풀샷을 그토록 잘 잡아낸 단편도 드물다. <글리제>(정누리, 2018)는 오래된 전설을 다루는 SF영화다. 엔딩을 마주할 때 굉장히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글리제>의 유이든, <복숭아>(심수경, 2018)의 문혜인, <미나>(박우건, 2018)의 심달기처럼 영화에 자신만의 색을 칠하는 배우들도 만나볼 수 있다. <보강촬영>(임현희, 2018)과 <졸업>(한태희, 2017)은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영화가 기억이라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거 같다. 영화는 결국 시간예술이니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의 테마 중 하나가 시간여행이기도 하고, 모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간여행적 요소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고 미래를 보여줄 수도 있는 게 영화의 매력인 거 같다. 두 작품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말하면서도 끝내 보편적인 감정으로 설득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단순히 감독 본인의 이야기를 했다기보다는 다각도로 고민을 거쳤다는 게 느껴진다. 어제와 마주하는 오늘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내일과 닿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인으로서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숫기가 없는 편이라 먼저 다가가기를 어려워하는데, 영화를 통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영화는 내게 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나를 외부와 연결해주는 끈이다. 그러다 보니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날 때 참 힘들더라. 센트럴파크를 시작할 무렵에 만났던 단편영화 일을 하시던 분들도 하나둘씩 흩어졌고, 감독님들 역시 단편이 잘 되면 장편으로 옮겨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로운 만남 자체는 즐겁지만, 때로는 동료가 성장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이 힘에 부치기도 한다. 그래서 센트럴파크를 좀 더 튼튼히, 오래 지속하고 싶다. 10년 동안 단편을 배급해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어쨌든 10년째 회사가 굴러가고 있으니 아주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웃음) 머무르기가 쉽지 않은 이곳에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영화를 꿈꾸는 누군가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센트럴파크 10주년 기념전: 오늘이 어제와 마주 하는 법] * 상영 링크: https://www.kmdb.or.kr/vod/plan/575 * 예고편 : https://youtu.be/RDrnGR2ihoo * 상영 기간: 2020.10.12.(월)~10.26(월) * 센트럴파크 홈페이지: http://centralparkfilm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