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
- 감독
- 정강우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권호웅, 노동우
(사진: “ Häxan ”,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반드시, 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자처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일시적으로 이상한 영화를 찾아보느라고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재빨리 빠져나오고 다른 누군가는 여기에 머문다. 그 영화들이 ‘불법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스너프 필름, 아동성애 영화, 기타 등등) 각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 영화들을 ‘이상한 영화’의 수호성인 아모스 보겔은 ‘전복적인 예술영화(subversive art film)’라고 불렀다. 아모스 보겔을 이야기할 자리는 1974년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여기서 질문은 영화사의 순간들에서 ‘이상한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가 언제 나타났느냐는 것이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계보를 열거하게 될 것이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회적 위반, 법적 금지의 경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선을 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한계를 부수길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돈을 원했다. 누군가는 예술적인 실험을 하고 싶어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쾌락을 향유했다. 여러 영화 제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해보겠다고 결심했다.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은 그렇게 가끔 하나의 선처럼 느껴지는 앞과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옆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내가 ‘이상한 영화’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가 가장 멀리서 마주친 영화는 벤야민 크리스텐센의 스웨덴 영화 < 헥산 >(1922)이다. “Häxan”은 번역하면 ‘마녀’라는 뜻이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19세기인 1879년에 태어났다. 처음에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8년부터 ‘흑마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서점을 뒤지던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 서점에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사본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1486년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하인리히 크라메르가 쓴 마녀 처단에 관한 책이다. 주술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마녀로 규정된 여자의 마법의 악을 ‘끝내기 위해서’ 자백을 끌어내는 고문 기술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에 유럽에서는 마녀로 내몰린 여자들이 산채로 화형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하인리히 크라메르는 마녀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하고, 더 나아가 마녀사냥을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고, 심지어 이 책은 마녀재판의 법전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소설에서 사용된 장면들, 마녀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실려 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 책은 논쟁이 되었으며, 오히려 그래서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1519년에 야콥 스프렝게르가 이 책에 새로운 저자로 나서서 마치 개정 증보판처럼 추가해서 1533년에 출간하였다. 손에 손을 거쳐 이 책은 마녀를 자백시키는 안내서가 되었고, 잔인한 고문 기술자들은 상상으로 쓰인 이 책의 내용을 감옥에서 불행한 여자들에게 실행하였다. 『마녀의 망치』는 일시적으로 판금 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왕실 궁정에서 공공연하게 읽히는 금서가 되었으며, 16세기 이후에 마녀재판에서 더 잔인한 기술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마녀의 망치』 표지와 <헥산> 포스터 (사진: “ Häxan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구한 사본 『마녀의 망치』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여러 개의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본이 15세기라는 것을 셈에 포함해주길 바란다. 1부에서는 먼저 마녀의 존재와 악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2부에서는 마녀들이 저지른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범죄와 악마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3부에서 마녀재판의 실제 절차와 고문을 통한 자백 유도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마녀의 망치』에 만족하지 않고 벤야민은 1919년부터 거의 2년 동안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 사례,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과정을 담은 삽화들, 여기에 더해 각종 문건을 모았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벤야민은 1920년까지 발표된 마녀들에 관한 소설과 희곡도 모았다. 그런 다음 자료들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을 결심하였다. 벤야민이 준비한 것은 단지 마녀에 관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준비한 <헥산>은 유럽 중세로부터 400년에 걸친 마녀사냥과 재판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벤야민은 제작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구한 도판들을 그 앞에서 전시하다시피 했고,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재판기록과 집행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기괴하지만, 분명히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스웨덴 필름 인더스트리가 관심을 보였다. 벤야민과 촬영 감독 요한 안케르스트예르네는 덴마크에 오직 <헥산> 촬영을 위한 영화 스튜디오를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야외는 중세를 재연하였고, 실내는 모두 밀폐시킨 다음 어두운 그림자와 빛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가 떨어진 다음에만 촬영을 시작해서 새벽이 오면 멈추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헥산>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제단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가장 비싼 무성영화가 되었다. <헥산>은 1921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해서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 간 대조가 두드러지는 장면 / 우주를 둘러싼 천사 합창단의 모습 (사진: “Häxan( 1 , 2 )”, IMDb) 영화 <헥산>은 7개의 연대기로 나누어져서 진행된다. 첫 번째 시작은 마치 학술 발표를 위한 도판 설명처럼 이어진다.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주변에 공기와 불이 둘러싸고 별들이 주변을 떠돌면서 천사 합창단이 보인다. 그런 다음 악마와 마녀의 조각상, 목판화, 삽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 화면자료들이 펼쳐지면 IMAX 스크린으로 벽화처럼 보고 싶을 것이다. 사탄이 나타나서 부부가 잠든 침대에서 아내를 유혹하고, 질식시키고, 살해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의 묘약을 구하는 여인, 성에 눈뜨는 여인, 그 여인이 몰래 먹이는 묘약에 흥분하는 승정(僧正), 게걸스러운 폭식, 들린 자들(the possessed)이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한밤중에 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축제,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이 장면들을 종종 멜리에스 영화에서 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오싹해지는 것은 만들고 있는 쪽에서 지금 이걸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라는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민담과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들처럼 보였지만 여기에 교회가 개입하면서 고문이 등장한다. 벤야민 크리스텐센은 그 과정의 세부를 묘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여기서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들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단 생각을 해야 한다. 게다가 신성모독 장면을 재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헥산>을 보고 있으면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상) 마녀와 악마에 관한 삽화 / (하) 사탄의 북소리에 맞춰 춤추는 들린 자들(the possessed) (사진: “Häxan( 1 , 2 )", IMDb) 벤야민 크리스텐센이 1921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로이트의 저술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아직 살아있었고, 『쾌락원칙을 넘어서』를 발표한 직후이다. <헥산>의 마지막 연대기는 동시대에 이른다.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여성은 몽유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당시 정신병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셀 푸코의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고문 장면뿐만 아니라 성상 모독, 마녀에 관한 찬양, 중세 교회에 대한 적나라한 재판 장면과 함께 여성의 누드, 신체 훼손, 시체 손상에 이르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 개봉 당시 스웨덴과 덴마크의 검열은 통과했지만, 독일과 프랑스, 특히 미국에서는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개봉을 위해 재편집이 불가피했고 상당 부분이 삭제되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가장 흥미로운 판본은 1968년 메트로 픽쳐스 코퍼레이션이 <헥산; 옛날 옛적부터의 마녀들(Häxan; Witchcrafts through the ages)>이다. 이 판본에서는 『네이키드 런치』의 윌리엄 버로스가 영어 나레이션을 한다(고 한다). 이 무렵 윌리엄 버로스는 마약중독 상태에서 장 주네를 둘러싼 친구들과 친교를 맺던 시기였다.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작 이 판본의 복원 소식은 들리지 않고 1976년부터 1922년 판본을 원본에 가깝게 몇 차례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물론 원본을 복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윌리엄 버로스의 판본이 궁금하다. 아마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은 없다’. 가끔식 남의 집 가훈을 들으면 실소가 나올 때가 있다. 가훈이란 원래 성경의 한 구절 같아 실천하기 어렵고 이루지 못할 이상향 같은 것 아닌가. 그래서 영화 ‘잠’에서 둘이 함께를 강조하며 남편과의 분리를 극도로 경계하는 아내의 집착이 처음부터 매우 불안해 보였다. 급기야 남편에게 귀신이 씌였다는 무당의 한마디에 의해 불안은 공포로 급격하게 전환되는데. 그 말이 아랫집 할아버지의 말이든 혹은 남편의 속마음이든 둘이 함께라는 말은 이제 둘 이외의 것들은 모두 제거되어야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남편의 몽유병, 아내의 불면증 남편은 잠이 들고 아내는 그런 남자를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본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어쩐지 함께 잠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밤이란 시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유한다. ‘둘이 함께라면’이라는 가훈의 전제는 영화 시작부터 어긋나있다. 한 공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밤 시간을 공유하던 부부에게 마침내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남편이 자다가 얼굴에 피가 나도록 뺨을 긁고, 잠든 상태에서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갑자기 거칠고 낯선 사람으로 돌변한다. 더없이 편안하고 안락해야 하는 둘만의 밤이 당장 해결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하지만 몽유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내가 밤새 함께 꾸었던 악몽으로 인해 그들의 신혼집은 불길하고 뒤숭숭한 꿈자리로 바뀐다. 의사의 치료, 무당의 치유 악몽과도 같은 현실로부터 발생한 문제를 의사는 수면장애로 진단하고, 무당은 빙의라 점을 친다. 적극적인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데, 의학은 환자의 상태를 시각화된 그래프로 제시하고 무당은 부부 사이에 보이지 않은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점을 친다. 어쩐지 의학의 이성적 치료와 무속의 영적 치유라는 극단의 처방으로 인해 부부의 불면증과 몽유병 증세가 더욱 악화되는 것 같다. 이제 남편의 잠은 현실을 더 끔찍한 악몽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아내는 펄펄 끓는 솥에 토막난 아이가 들어있는 악몽에 시달린다. 이런 부부에게 의사는 잘 듣지도 않은 약을 처방하고, 무당은 집안 곳곳에 붙일 부적을 주며 굿이 최선의 방법이라 조언한다. 애초에 몽유병과 불면증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증상에 시달리는 부부에게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은 정신과 영혼을 다루는 정신의학과 무속 외에 달리 기댈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남편은 몽유병 완치 판정을 받지만, 이번엔 아내의 편집증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각해진다. 아내는 이미 무속에 깊이 심취해 남편의 빙의를 확신한다. 남편의 연기(혹은 빙의), 아내의 프레젠테이션 이제 막 아이가 태어난 젊은 부부의 집은 방문마다 자물쇠가 걸려 있고, 냉장고는 한때 그들이 키우던 애완견이 죽어 있던 곳이다. 아기와 엄마는 욕조에서 문을 잠근 채 잠들고, 아이 아빠는 잠든 채 거실을 배회하다 아이 침대에 소변을 본다. 급기야 거실에서 귀신 쫓는 굿이 벌어지고, 온 집안이 부적으로 뒤덮인다. 그리고 기어이 일이 벌어지는데. 이때 남편이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빙의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여자가 남편에게 지금 그들의 가정이 처한 상황과 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방법이 다름 아닌 프레젠테이션이다. 남편의 몽유병과 아내의 편집증으로 인해 고조된 긴장감이 이 부분에서 와르르 무너지며 당혹감을 안겨준다. 극도의 불면증과 불안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여자가 남편(에게 씌인 귀신)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PT라니. 게다다 남편과 관객은 그 PT 속 사진 자료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집에서 귀신을 쫓는 굿이 벌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그처럼 중요한 굿 장면이 하필 PT속 사진 한 장으로 제시된 걸까. 생각해보니 앞서 냉장고에서 애완견이 발견되었을 때의 충격도 아내의 비명과 몸짓으로 전달했는데, 이번에도 남편의 몸에 귀신을 봉인하는 글귀를 세기고 무당이 굿을 하는 장면을 사진 한 장으로 갈음해버린다. 공포와 미스테리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가장 끔찍하고 강렬한 공포 이미지를 굳이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있을 터. 문득 아내가 남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과도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설득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니 남편이 직장을 관두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남편의 재능을 추켜세우고 용기를 복돋는 말로 그의 중도 포기를 막는다. 본인의 수면장애가 가족의 안위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남편이 잠깐 방을 따로 얻어 나가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을 때 아내는 가훈을 이유로 단칼에 거절한다. 대기업 사원인 아내에게 중도 포기는 지독한 경쟁 속에서 자멸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 또한 기업 시스템의 통상적인 보고 방식에 길들여져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서 PT는 그녀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인 대화마저 그녀가 공적인 장에서 습득한 방식으로 이뤄진 장면으로의 전환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하게 와닿았다. 아내에게 ‘둘이 함께’는 어떤 상황에서도 실천하고자 했던 개인적 믿음에 가까운 말인데, 이 또한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 아닐까. 남편 또한 아내의 광기에 가장 공적인 소통 방식으로 맞선다. 긴급한 순간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학교와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왔던 연기를 응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말처럼 남편은 진짜 빙의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기 정신으로 연기를 했든, 진짜 빙의된 상태였든, 그 또한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배우고 익힌 연기 혹은 타인이 일생에 걸쳐 사용해온 언어로 아내를 진정시키게 된다. 노인과 아파트 이 영화에서 부부의 아파트를 침범한 외부인은 아랫집 노인이었다. 물론 귀신일 수도 있고, 아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다. 영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난해하게도) 부부의 불면증과 몽유병의 원인이 된 노인이 귀신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에 대해 끝내 밝히지 않는다. 다만 무당의 말 “개 짖는 소리 없이 애기 우는 소리 없이 둘이서만 살고 싶어”가 남편과 노인 중 누구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인지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에 남편의 빙의(혹은 연기)를 통해 어쩌면 노인은 그 아파트란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부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노인의 딸은 아내를 볼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혼을 권한다. 남편에게 노인은 조금 더 먼 미래일지도 모르며, 아내에게 노인의 딸은 조금 더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 전형적인 공통의 삶은 윗집의 후추와 아랫집의 앤드류를 통해 드러난다. 마치 복제한 것 같은 두 반려견을 통해 윗집과 아랫집이 바닥과 천장을 공유한 것을 넘어 실은 더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서로에게 타인이란 당장 베란다와 창문 밖의 가파른 벽과 같은데, 그 단단하고 차가운 벽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신경 쓰게 된다.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벽을 통과해온 소음과 베란다 창을 타고 올라온 담배연기, 화장실 천장의 누수를 통해 타인을 감지하게 된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감정선과 억측 또한 그로부터 생성된다. 단단하게 굳은 철근콘크리트 벽과 바닥으로 인해 우리는 보이지 않고 대화하기 어려운 타인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오해하며 망상한다. 영화에서 아랫집 노인은 살아서는 불쾌한 이웃이었고, 죽은 뒤에는 광기와 공포의 원인으로 내쫓아야만 하는 악귀가 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인은 부부가 나눈 대화, 아내가 아랫집에서 발견한 흔적, 그리고 남편의 몸을 통해 빙의 혹은 연기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타인의 삶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과정이 어딘가 익숙하다. 지금 우리가 매끈하고 스마트한 콘크리트 박스 안에서 잘 알지 못하는 이웃을 규정하는 방식과 닮아 있어서다. 영화를 보다 몇 년 전에 한 어르신이 들려주신 태몽 이야기가 떠올랐다. 태몽이란 흔히 부모가 태어날 아이에 대해 꾸는 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노인들의 태몽은 이웃집에 살고 있던 어르신들이 꾸기도 했다. 한 아이의 탄생이 자기 부모와 가족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누군가에 의해 암시된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때 한 아이에게 이웃의 노인은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몽상가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를 알고 있었음에도 영화 ‘잠’에서 무당의 한 마디에 남편의 몸에 빙의된 존재를 추적하는 아내를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아랫집 노인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생각의 흐름이 소름끼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꼈던 찝찝함과 다소 무서웠던 감정의 실체가 이와 같다. 인물들이 무심코 던진 말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내용과 결말을 유추하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영화를 보고나서 타인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혐오를(아내의 불안과 공포의 원인) 만든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초반에 부부의 가훈을 유독 강조해서 드러내는데, 이미 그 가훈의 ‘둘이 함께’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곳에 둥지를 튼 부부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까 부부가 된 두 사람에게 닥칠 숱한 문제 속에서도 오직 둘만 바라보고 살아남겠다는 다짐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미 두 사람은 함께 누워 각기 다른 잠을 자고 꿈을 꾸며 살고 있고, 이제 둘은 셋이 되었다. ‘셋이 함께’ 겪을 문제는 또 어떤 잠과 꿈을 불러올까. 아랫집 여자의 말처럼 그냥 다 놓고 헤어지면 그만인데 부부는 기어이 또 함께 살며 또 다른 악몽을 감내하게 되었다. 셋이 함께 말이다.
대부분 영화팬들은 이용민 을 60년대 한국 호러영화의 대표작인 < 살인마 >의 감독으로 기억할 텐데, 그는 이 작품 이외에도 < 악의 꽃 > < 목 없는 미녀 > < 공포의 이중인간 >과 같은 구미 당기는 제목의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김일안 이 원안을 쓴 < 무덤에서 나온 신랑 >은 63년 작인데, 포스터와 캐스팅만 봐도 알겠지만 코미디 비중이 높은 편이다. 시작하자마자 타이틀롤이 나온다.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길가에 쓰러진 그는 지나가던 택시에 올라타고 부상을 당했다며 집으로 데려달라고 한다. 집에 도착한 그는 돈을 주겠다며 기사에게 따라오라고 하지만 겁에 질린 기사는 달아나고 만다. 이 정도면 혁이 정말 귀신이긴 한 건가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귀신 맞나 보다. 그러니까 귀신이 택시 타고 집에 찾아오는 영화다. 택시에 탄 귀신 이야기는 역사가 꽤 긴 편이니 이는 호러가 될 수도 있고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 살인마 >의 도입부를 생각해보면 둘 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날은 당연히 혁의 제삿날로, 그의 친구 맹갑과 삼룡이 제상 앞에 앉아 있다. 혁은 자기가 귀신과 결혼해서 신혼 첫날에 이 꼴이 되었으니 오대산 백년골이란 곳에 가서 원수도 갚고 저승길에 갈 때 꼭 필요하니 거기 있는 자기 양복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맹갑과 삼룡이 가는 백년골이란 곳은 ‘삼칠 기도를 드리면 병 가진 사람이 완쾌해서 백 년을 산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좋은 곳인 거 같은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호러 경험의 연속이다. 무시무시한 할머니가 나타나기도 하고 선경이란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달걀귀신과 만나기도 한다. 단지 시나리오에 그냥 ‘달걀귀신’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 진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선경이란 여자가 목욕하는 걸 훔쳐봤는데 선경이 갑자기 달걀귀신이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훔쳐보고 있는 맹갑 앞에 갑자기 달걀귀신이 나타났단 말인가. 계속 읽다 보면 후자인 것 같지만. 둘은 탈박노인이 살고 있는 폐옥에 도착한다. 그들은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 이야기하고 노인은 원수를 갚을 생각이냐고 묻는다. 그냥 사연을 듣고 원혼을 위로할 생각이라고 하자 노인은 그들에게 방을 내어준다. 단지 조건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날까 봐 한 달 스무날 동안은 장사를 지내지 않는데, 마침 한 달 스무날이 된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두 개 있으니 두 사람이 차례대로 다녀와 못을 박으라는 것이다. 삼룡은 허겁지겁 임무를 완수하지만 겁에 질린 맹갑은 온갖 소동을 연출한다. 임무를 마친 둘은 오월이라는 여자가 약사대전에 들어가는 걸 목격한다. 몰래 훔쳐보니 오월과 탈박노인은 고양이에게 약을 먹여 독살하고 있다. 이 묘사를 보면 걱정이 된다. 당시 충무로 사람들이 고양이를 얼마나 험악하게 다루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 살인마 >에도 수상쩍은 장면이 하나 있다. 엿보다 들킨 둘은 화살을 쏘며 쫓아오는 탈박노인을 피해 달아나지만 결국 잡히고 만다. 이제 그들은 억지로 마을에 머물며 삼칠기도를 드려야 한다. 노인은 계속 약초를 기르며 무슨 실험을 계속하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아까 잠시 등장한 선경이라는 여자가 그 노인의 딸이고, 노인은 딸의 치료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삼룡은 선경이 혁의 신부라고 확신하고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지만 선경은 오히려 결혼해달라며 삼룡을 유혹한다. 그러는 동안 맹갑은 오월이와 엮인다. 그 뒤로 사람인지 귀신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들과 벌이는 소동들이 이어진다. 이 장면들을 보다 꼼꼼하게 묘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갖고 있는 시나리오의 지문은 빈약하기 짝이 없으며 몇몇 장면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아마 내가 이렇게 탈락시킨 장면들이 진짜로 괜찮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말에 가서야 진상이 밝혀진다. 알고 봤더니 선경은 몽유병 환자였고 탈박노인은 지금까지 그 병을 치료하려고 연구 중이었다. 혁은 선경이 몽유병에 걸려 떠도는 선경을 보고 놀라 죽었던 것이고. 다행히도 선경은 치료가 되었고 삼룡은 선경의, 맹갑은 오월이의 짝이 된다. 합동결혼식을 올리겠다며 호들갑 떠는 결말은 발랄하기 그지없는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승에 입고 갈 양복을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는 혁의 귀신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아 조금은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