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
- 감독
- 김주연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전소니, 김예성
* 본 글에는 < 연애소설 >과 < 텔 미 썸딩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 장르영화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성소수자들의 가시화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정된 시공간에 허용된 젊은 여성들의 낭만적 동성애는 대중적 정서를 크게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을 가미해줄 수 있는 장르적 도구로 종종 사용되었다.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와 <텔 미 썸딩>(장윤현, 1999)이 그 시작이었다. 두 영화는 2000년대 장르영화에 등장한 레즈비언 캐릭터들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학교라는 억압적 시스템과 어린 여성들의 사랑, 우정, 질투, 불안, 분노 등의 복잡한 감정을 공포영화의 장르적 약호로 그려내 컬트팬을 양산했다. 이 영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그들 관계의 주 무대가 되는 학교 옥상이라는 열려 있지만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불안정하고 비규범적인 저항 가능성의 지점이 된다. 그러나 십대와 학교라는 특정 시공간에 한정된 여성 동성애의 초상이 ‘여고괴담 시리즈’와 이후 유사 영화들에서 반복되면서 역설적으로 여성 동성애에 대한 상상력이 제한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반복된 재현은 여성 동성애가 강력한 규범 체제에 대한 십대 사춘기의 반항이자 안정된 이성애 체제로 편입되기 위한 일시적 통과의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성 동성애는 학교 밖에서는 불가능하거나 허용되지 못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시은(이영진)과 동성애 관계에 있던 효신(박예진)의 자살 후 아이들은 전염병처럼 귀신에 들린다. 여기서 동성애 욕망은 쉽게 감염되고 임시적이고 제의적인 것이며 그래서 정체성으로는 기입할 수 없다. 엔딩에 등장하는 학교 지붕을 덮칠 정도로 거대해진 효신의 유령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면 효신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지속하기 위해선 유령이라는 형상으로라도 학교에 남아야 하는 것일까?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레즈비언 유령은 이후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반복된다. 동성애 관계가 2세대에 걸쳐 등장하는 < 여고괴담 4-목소리 >(최익환, 2005)처럼 말이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재자각하기 위해서는 교사로서 학교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들은 레즈비언이 되기 위해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한다. 한편 스릴러 장르인 <텔 미 썸딩>은 캐릭터와 서사에 여성 동성애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비밀로 꽁꽁 숨겨놓다가 연쇄살인의 전모가 마침내 밝혀질 때 핵심적 실마리로서 폭로된다. 사실 남자 주인공인 조형사(한석규) 입장에서나 폭로이지 채수연(심은하)과 그녀를 사랑해 남자연쇄살인을 도운 오승민(염정아)은 영화 내내 진실을 말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그 관계를 진작 상상할 수 있었던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게 된다. 영화는 분명 타겟 관객을 조형사에 동일시되어 동성애 관계를 알아채지 못한 이들로 상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성애가 반전으로 작동할 수 없다. 냉철한 추리력으로 정평이 난 조형사도 여성 동성애는 상상력 밖에 있다. 채수연은 승민과의 동성애 관계를 조형사에게 여러 번 흘린다. 심지어 수연은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던 자신의 집에서 승민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자세하게 진술한다. 그 아이가 승민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여기서 플래시백이 삽입되고 아이의 성별이 남자인 것처럼 묘사되면서 의도적 오인을 유도한다. 그래서 그 주관적 플래시백이 수연의 것인지, 아니면 수연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한 조형사(와 동일시된 관객)의 것인지 모호하다. 여자 둘과 남자 한명의 관계 속에서 여성 동성애 관계를 숨겨놓았다가 뒤늦게 폭로하는, 그래서 동성애는 과거의 비밀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서사구도는 2000년대 영화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연애소설>(이한, 2002),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이무영,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이 그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 역시 결국은 이성애 관계가 서사를 추동시키는 큰 틀이 되면서 ‘여고괴담 시리즈’처럼 여성 동성애를 한 때의 ‘순수한 감정’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대상화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는 과거의 것이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의 결정체로서 대상화 되지만 그래서 궁극의 진정성을 갖게 되고 언제든 내부로부터 서사를 불안정하게 만들 잠재성을 갖는다. 위의 영화들 중 이십대 초반의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이 주인공인 <연애소설>은 오랜 투병생활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십대들을 보는 것 같은 풋풋함을 그리고 여성 동성애라는 비밀의 폭로가 영화 전체의 서사구조를 뒤흔드는 측면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텔 미 썸딩> 모두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프닝부터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창문 밖 풍경을 비춰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진을 주요한 소재이자 주제적 메타포로 사용한다. 사진은 순수했던 순간을 결정화하는 동시에 그 프레임 바깥에 있는 맥락이나 다른 진실을 지워버린다. 서사구조에 있어서도 프레이밍은 중요한 장치가 된다. <연애소설>은 영화 전체가 지환(차태현)의 지속적인 플래시백, 즉 지환의 주관적 프레이밍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20대 후반인 지환은 택시기사를 하며 등록금을 벌어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순수하게 좋아했던 사진도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직접 찍은 흑백사진에 하얀색 물감으로 쓰인 편지 한 장을 받는다. 주소도 이름도 없지만 짐작 가는 이가 있다. 사진은 과거를 상기시키고 이때부터 지환의 플래시백이 시작되며 영화는 현재와 5년 전을 오고간다. 5년 전 지환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수인(손예진)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뒤따라가 고백하지만 곧 거절당한다. 이후 수인과 늘 함께 다니는 경희(이은주) 그리고 지환은 절친한 친구가 된다. 지환은 처음에는 청순하고 조용한 스타일의 수인에게 반하지만 이내 활발하고 명랑한 경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경희는 처음부터 지환을 좋아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일만 남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내 몸이 아파 늘 조심하며 살았던 수인과 경희가 일생의 일탈처럼 지환과 여행을 갔다 온 이후 수인과 경희는 연락이 끊기고 지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홀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요약된 서사는 지환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비밀과 폭로가 등장한다. 하나는 수인의 첫 사랑이 경희로 첫 만남부터 죽을 때까지 경희를 사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인과 경희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불러왔다는 것이다. 즉 수인의 본명은 경희이고, 경희의 본명은 수인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환은 현재 시점에서 수인과 경희를 수소문할 때 경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곧 (경희가 본명인) 수인(손예진)이 죽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상상 가능한 일부 관객들은 여성 동성애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게 하면서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비밀이 폭로되지 않도록 의도적인 오인 장치들을 흩뿌린다. 그것은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것이다. 긴 생머리, 프릴 달린 흰색 블라우스와 치마, 기운 없는 목소리, 얌전하고 의존적인 태도를 가진 수인은 겉보기에는 이성애 남성의 관습적인 이상형을 구현해 놓은 모습을 갖고 있다. 반면 짧은 머리에 늘 바지를 입고 히피 스타일의 장신구를 착용하며 직설적이고 크게 웃는 경희는 상대적으로 더 병약한 수인을 챙긴다. 경희는 전형적인 톰보이다.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에 따르면 수인은 이성애자이고 경희는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정작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는 수인이고 경희는 지환을 사랑하는 이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이다. 영화는 수인과 경희가 이름을 바꿔 부르고 지환의 사랑이 수인에서 경희로 바뀌는 것처럼 관계와 욕망을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구성되지만 유일하게 지환의 것이 아닌 플래시백 장면이 있다. 수인과 지환이 단둘이서 각자의 첫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수인은 경희와의 첫 만남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경희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플래시백에서 경희는, 분홍색 환자복을 입고 머리가 긴 수인과 비교해 파란색 환자복을 입고 민머리를 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남자아이로 오인되게 만든 이 장면에서 <텔 미 썸딩>의 조형사처럼 지환에게 동일시된 관객은 수인의 플래시백을 관람하게 된다. 이 플래시백 역시 수인의 주관적 플래시백인지 지환이 수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각화한 것인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여기서 지환이 그 아이를 남자아이로 오인하고 있으며 수인의 첫 사랑이 경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로맨스 이야기는 대부분 둘 다 사랑하는 여자를 교환하는 것으로 남성 동성관계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지환은 교환되지 않는다. 수인은 지환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인과 지환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경희가 교환되는 것도 아니다. 경희는 초반에는 수인과 지환이 서로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지환의 사랑을 깨달은 후에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오인의 과정에 놓이고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발화하는 유일한 관계는 수인과 경희다. 수인은 경희에게 죽기 전 분명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경희도 수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죽음으로 결부되고 서로의 이름을 바꿔가며 생존을 격려했던 둘의 사랑은 이성애적 사랑을 초과한다. 심지어 수인은 지환에게 자신의 사랑인 경희를 부탁하는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 편지엔 경희가 좋아하는 것들이 적혀 있다. 아마도 잡지에 나와 있는 성격운세가 말했던 것처럼 수인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시한부가 아니라면 경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인과 경희를 시한부로 만들면서 여성 동성애 관계의 가능성을 한정시키는 한편, 시한부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 욕망을 단단하고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오히려 가장 실패하고 가능성 없고 끝까지 무지에 빠져있는 것은 지환의 이성애적 욕망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가장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이성애가 도달하지 못한 혹은 개발해야 할 (영화학자 레이 초우가 개념화한) ‘원시적 열정’의 장소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가시화될 수 있는 조건에 놓이게 된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겨루거나 혹은 우정 때문에 양보하는 삼각 구도로 보였던 영화는 수인의 사랑의 대상이 경희라는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서사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언제 서사를 재구성하게 되느냐는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영화를 관객들 역시 다시 쓰게 된다. 지환은 그 새로운 정보를 끝까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환에게서 벗어나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레즈비언인 수인의 시점을 갖게 된다. 관객들은 수인의 레즈비언 편집술에 동화된다. 이 영화에는 시계바늘을 돌리는 행위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지환은 첫 눈에 반한 수인에게 고백 후 거절당하고 관계를 우정으로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경희는 수인이 죽은 후 장례식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후회와 슬픔에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을 되돌린다. 수인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계바늘을 되돌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수인이 분명하게 자기 욕망을 발화하고 응답을 들은 인물로 후회 없는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 그 자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성애 지배적인 사회에서 늘 자기만의 편집술을 육화할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주변의 서사와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수인은 이 삼각관계에서 가장 많이 아는 자로(지환과 경희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 주어진 것들을 재편집해 사용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수인은 지환의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 오인의 가능성을 품은 채로 자신만의 플래시백을 트로이 목마처럼 침투시킨다. 어떤 면에선 자기만의 (레즈비언) 편집술을 일상화하고 육화한 수인은 시계 그 자체가 되어 있기에 물리적으로 시계바늘을 돌릴 필요가 없다. <연애소설>은 결말에서 지환과 경희의 재회를 서사화하면서 뒤늦게 이성애 프레임으로의 봉합을 시도하지만, 이미 레즈비언 편집술의 역량을 경험하게 한 작은 플래시백의 침투는 의심과 실패 속에서 서사의 솔기가 끊임없이 뜯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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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