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요정 통통
- 감독
- 변강문
- 제작년도
- 2001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디즈니와 픽사 스튜디오는 < 인사이드 아웃 >에서 이미 한차례 우리의 머릿속 세상을 비춘 바 있다. < 주먹왕 랄프 >를 통해 게임 속 세상은 물론 <토이 스토리> 시리즈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장난감들의 세계를 엿보는 기회까지 제공해온 그들의 시선은 이번에는 생전 세계를 향했다. 뉴욕 거리에서 맨홀을 타고 한순간 우주로 떨어진 주인공, `조`의 여정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고도 비슷한 세계로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영화는 한 중학교의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밴드부 교실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조`는 "음악은 내 운명"을 외치지만, 현실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마음도 없는 학생들을 데리고 애를 쓰는 음악 교사다. 그런 조에게 어느 날 유명한 뮤지션 도로테아 윌리엄스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꿈에 다가선 그 날, 누구 보다 살아있다고 느낀 바로 그날, 조의 삶은 막을 내린다. 한순간에 떨어진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조는 영혼 `22`를 만난다. 22는 몇 천억 번째 영혼이 태어나는 지금까지도 지구로 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영혼이다. 열정 가득한 조와 냉소로 똘똘 뭉친 22. 영혼들이 지구로 가는 데 필요한 `지구 통행증`의 마지막 조건, `불꽃`을 찾아야 지구로 갈 수 있지만 22는 모든 것에 심드렁하기만 하다.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영혼과 살고 싶지 않은 영혼의 동행은 시작된다.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는 세상 `태어나기 전 세상`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는 묘하게 단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다. 해맑게 굴러다니고,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는 어린 영혼들은 지구에서와는 달리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그들은 경계 없는 흐릿한 형태를 가졌다.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맑고 깨끗한 영혼들이기 때문에, 무지개를 닮은 은은한 색으로 스스로 빛을 낸다. 반대로, 관리자인 제리와 테리는 오직 경계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표정을 짓고, 몸의 방향을 틀어도 경계를 짓는 선은 단지 구부러지면서 모양을 바꿀 뿐이다. 길을 잃은 영혼들이 모이는 영적 세계도 흥미롭다. 어두운 색의 반짝이는 모래로 뒤덮여 있는 세계에서 배는 모래 위를 항해하면서 영혼들을 구제한다. 지금까지 사후 세계를 그린 영화는 꽤 있었다. 웹툰 원작의 <신과 함께> 시리즈, 그리고 제작진의 전작인 < 코코 >. 하지만 < 소울 >은 그보다 훨씬 전,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사후 세계도 탄생하기 전의 생전 세계를 그려낸다. 영화는 스크린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 107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인간의 상상력 너머의 세계로 초대한다.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주인공 조는 디즈니 픽사 영화의 최초의 흑인 주인공이다. 영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그의 현대 뉴욕에서의 삶을 그린다. 감독 켐프 파워스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픽사 문화 자문 위원회는 영화 제작 내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조라는 캐릭터의 깊이 있는 설정은 물론 그가 속해있는 사회까지 사실적으로 스크린에 담아냈다. <소울>에 담긴 다양함은 이뿐만이 아니다. 조가 `머나먼 저세상`에서 허둥지둥 도망치다 부딪힌 한 영혼은 "내 바지 어디 갔어!"라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외친다. 22의 아지트 벽에 가득 붙어있는 멘토들의 이름표는 중국어, 아랍어, 힌디어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 적혀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기 위한, 디즈니 픽사의 더 큰 세상을 위한 발걸음은 <소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 디즈니 픽사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실 아주 흔한 존재들이다. 제작진의 전작 <업>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부인을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 <코코>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는 딸,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영화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을 빌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무거운 질문의 답을 풀어낸다. <소울>은 깊은 영화다. 존재의 시작과 삶의 목적에 대한 답이 없는 질문을 탐구하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엄청난 진리를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삶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영혼들이 지구에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찾아야 하는 `불꽃`은 사실 별거 아니다. 그저 `살 준비`가 되었다는 증표일 뿐이다. 조가 그의 인생 최고의 공연을 끝마친 뒤 자신이 상상했던 기분과 조금 다르다고 말하자, 도로테아 윌리엄스는 대답 대신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은 물고기가 나이 든 물고기에게 헤엄쳐가 물었지. 바다라고 하는 걸 찾는데요.” 나이 든 물고기의 대답은, “여기가 바다야” 라는 한 마디. 젊은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 조는 인생 내내 자신의 ‘불꽃’은 음악이고, 그게 자신이 태어난 이유이자 삶에서 이뤄야 할 유일한 목표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뤄낸 후의 알 수 없는 감정은 뭘까. 그 순간 조의 깨달음은, 화려한 공연장 대신 단풍나무 씨앗과 먹다 남은 베이글, 막대사탕처럼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 온다. 추상적인 꿈을 좇으면서도, 주어진 인생 속의 작은 순간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 그 두 가지가 통합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뭔가를 깨닫게 된다. 디즈니 픽사는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 후, 삶 속에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삶의 목적만 따라가며 살기에는, 우리의 일상 속에도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가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프리퀄 영혼들이 불꽃을 찾기 위해 모이는, 불꽃을 꽃피우기 위한 모든 체험이 모여있는 `모든 것의 전당`. 그곳에서 가장 첫 번째로 조가 22에게 권한 건 바로 제빵사다. 피자를 건네지만 아무 냄새도, 맛도 느낄 수 없는 22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모순적이게도, 피자는 22가 지구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첫 번째 요소이다.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던 생전 세계와 반대로, 모든 것들이 매 순간 풍부하게 느껴지는 세상. 모든 감각으로 몰려드는 세상의 자극에 22는 수백 명의 위대한 멘토도 찾아주지 못했던 자신의 불꽃이 바로 이곳, 지구에 있음을 느끼며 말한다.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 일지도 몰라."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하고 싶은 건 뭘까, 잘하는 건 또 뭘까.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가진 고민이다. “사람은 뭔가를 할 운명을 타고난다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아? 만약 잘못 고르면? 그게 다른 사람의 운명이라면?” 22가 조의 몸속에 들어가 지구에서 고백하는 속마음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대변한다. 유별나 보였던 22는 사실 가장 일반적인 캐릭터다. 재능을 찾지 못할까 봐, 자신의 삶의 목적이 아무것도 아닐까 봐 무섭다는 22의 솔직한 고백은 알 수 없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위로를 건넨다. 지구로 간 22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소울>은 우리 모두의 프리퀄이다.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열정을 불태울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태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는 모두 `살 준비`를 마치고 `지구 통행증`을 받은 어린 영혼들이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숨을 필요도 없다. 삶이 무의미해 보이고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 22처럼 "나 잘 걷잖아." 씩씩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 털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화면이 켜지면 그늘에 몸을 기대고 지루해 보이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린 아이 둘이 등장한다. 이내 한 아이가 달려오며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고, 아이들이 개구지게 웃어 보이며 영화는 생기를 얻는다. 달려오는 아이는 등을 보이며 뛰어온다. 영화는 이렇듯 ‘등’으로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등으로 시작한 영화를 열어보면, 관객은 이내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등’에 위치하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꿈과 환상의 세계인 디즈니랜드 인근의 빈곤한 모텔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디즈니랜드의 어두운 ‘등’에 위치한 사람들의 등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한 아이의 등은 관객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다름이 없다. 관객은 아이의 등을 따라서 영화 속으로 입장하게 된다. 영화에는 수많은 등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등장인물들의 등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등을 수차례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인물들의 등을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은 인물들의 앞면, 즉 얼굴을 관객의 시야에서 차단함으로써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까지 차단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표정과 감정을 관객의 상상으로 채워 넣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정서에 관객 자신의 정서가 섞이게 한다. 이 덕분에 관객은 보다 뚜렷하고 선명한 감정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인물의 등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종류에 따라 인물들의 등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먼저 어른의 등이다. 어른의 등은 정적인 등이라 할 수 있다. 모텔 매니저인 보비나 무니의 엄마인 핼리를 통해서 등장하는 어른의 등은 체념과 포기 같은 씁쓸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가 지고 일과가 마무리 된 저녁에 홀로 담배를 피우는 보비의 등이라던가, 몸을 팔기로 결정한 직후 담배를 피우는 핼리의 등에는 닥친 상황에 굴복한 이들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모텔의 주민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보비는 상사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핼리는 사회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의 온전한 피해자이다. 이 때문에 보비는 보기 흉한 것들을 모텔 뒤편으로 치우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고, 핼리와 무니가 방을 빼게 한 뒤 사장의 등 뒤에서 몰래 꾸며진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래서 핼리는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싸 온 와플을 집어 던질 수밖에 없으며, 향수를 놓고 올 수밖에 없었고, 발을 구르고 응시하는 소심한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모두 각자에게 필연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에 갇혀 있다. 그 때 이들은 등을 보인다. 이 때의 등은 이들이 마주한 현실에서 잠시 뒤돌아서서 숨을 고르는 등이다. 그 때문에 어른의 등은 대체로 움직임이 없고,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이는 어른의 등은 현실을 마주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잠시 등을 지고 서있는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등은 이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품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현실을 등 지지 않을 뿐더러, 아이라는 이유로 현실과 격리되어 있지도 않다. 아이들은 오히려 놓인 현실을 마주본다. 현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것에 나름의 천진한 해석을 덧붙인다. 그래서 어른들의 우는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약 소굴은 수 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이자 댄스룸이고, 소 떼들이 모인 평지는 사파리이며, 다시 집에 찾아 온 성구매자 남성은 화장실이 급해서 돌아온 것이다. 영화는 이렇듯 일면 천진한 아이의 시점을 꾸준히 유지한다. 카메라를 내려 아이의 눈높이로 시선을 맞추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등을 마치 일행이 된 것처럼 따라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대부분 그들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점은 아이들이 보지만 해석하지 못하는 것들을 증폭시킨다. 아이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핼리나 선정적인 노래나 춤을 따라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무니를 보면서 관객은 아이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폭력의 형태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의 등 뒤에서 그들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에 관객마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른들 사이에 놓인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고,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며 목욕하는 무니는 엄마가 자신을 더 이상 씻겨주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관객 역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짐작만 할 뿐이며, 무니의 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관객의 시선이자 아이의 시점인 카메라는 아이들이라는 얇은 가림막에 막혀 한 장면의 다른 앵글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 각도가 잠깐 수정되면서 관객이 그 가림막 너머를 볼 기회가 생긴다. 무니가 욕조에서 위치만 옮겼을 뿐인데, 무니를 보호해주던 커튼은 사라지고 한 남성을 마주하게 된다. 당황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성급히 커튼을 다시 쳐보지만, 가림막 바깥의 현실을 이미 마주한 상태이다. 그래서 무니는 나름의 해석을 붙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들의 등은 역동적인 등이다. 마주한 현실을 천진한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한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 무지개를 보면서 그 밑에 묻힌 황금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요정을 쓰러트리려 달려 나간다. 어른들이 빈대가 드글거리고 내부는 어두컴컴하기만 한 모텔을 예쁜 색으로 페인트칠 하는 동안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계단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운다. 이들은 등 뒤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가리려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찾고, 그것을 향해 달린다. 마지막 시퀀스에 핼리와 무니의 얼굴을 확대해서 보여준 두 장면은 이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등으로 보여지던 인물들은 마침내 돌아서 카메라를 마주하고 감정을 표출한다. 핼리는 여태껏 했던 욕설 중 가장 크고 진심이 담겨있을 욕을 하고, 무니는 울음을 터트린다. 소심한 복수를 하면서 등 지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어른은 비로소 앞을 보고 욕을 내뱉고, 한 구석이라도 반짝이던 현실이 잔인하게 날을 세웠을 때 아이는 등을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들의 삶이 가장 강하게 압박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음’이 가장 극심하게 엄습해올 때 이들은 그제서야 오래 전에 이미 표출했어야 할 무언가를 터트린다. 아이들의 반짝임과 파스텔 톤의 화면에 흐려져 있었던 이들의 현실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야 비로소 저항도 아닌 폭발로써 관객들에게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내몰린 상황 속에서 어른은 비로소 앞을 봤다. 하지만 여태껏 앞을 보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마주한 현실이 두려워 등을 돌리고 쓰러졌다. 그런 무니의 손을 잡아 다시 달린 것은 비슷한 처지인 친구 잰시였다. 잰시 덕분에 방향성을 잃었던 무니의 등은 다시금 움직임을 갖고 디즈니랜드로 향한다. 밴드가 있어도 들어갈 수 없었고 특별한 날에 바깥에서 쳐다만 볼 수 있었던 디즈니랜드, 즉 그들 삶의 앞면을 향해 아이들은 달려나간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질감은 이전까지와 완전히 달라지고, 흔들림은 심해진다. 이전 장면들과 다른 톤과 분절 쇼트 등은 아이들이 정말 디즈니랜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럼에도 단 한가지 명백한 것은 어쨌든 꿈과 희망의 상징인 디즈니랜드의 성을 향해 아이들이 달려나가고 있다는 것이고, 현실에 막혀 쓰러진 무니는 비록 당장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라도 쓰러진 채로라도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성 앞에 다다른 아이들의 등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관객들에겐 디즈니랜드가 남는다. 거대한 성의 등 뒤에서부터 함께 달려온 아이들이 성 앞에 관객을 내려놓고 다시 달려 사라질 때, 이들의 등을 줄곧 따라온 관객은 어딘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들의 등이 올바른 앞면을 향했으므로, 이들이 결국 우리를 디즈니랜드로 데려다 줬으므로, 아이들도 밝은 디즈니랜드로 달려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이들은 관객보다 앞으로 나아가 성의 정문을 열지도 모른다.
영화와 도시는 닮아있다. 둘 다 근대의 산물이고, 집단과 익명을 전제로 하고, 무엇보다 어둠 속에 빛이 발현할 때 둘은 ‘어떤’ 에너지를 뿜어낸다. 여기 ‘도시’를 다루는 두 작품이 있다. 두 영화는 비단 ‘도시’를 제목으로 할 뿐 만 아니라 도시의 속성과 영화의 특성을 활용하고 실험한다. 정한 감독의 < 환영의 도시 >(2018)는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를 담은 실시간 동영상을 모은 작품이고, 박군제 감독의 < 거대 생명체들의 도시 >(2018)는 그래픽적 감각을 동원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면서 도시 재개발을 다룬다. 각각의 작품은 기존의 도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도시와 영화의 ‘본다’는 키워드를 통해 색다른 도시리듬으로 구축하고 있다. 실시간의 감각 <환영의 도시>는 11분 동안 진행된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를 11분 동안 담은 영화이다. 영화는 감독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 온라인상에 오픈된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를 찍은 동영상을 모아 실제 사건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연동시킨다. 다시 말해 11분의 불꽃놀이의 시간과 11분의 영화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각 찍은 수많은 휴대폰 동영상 클립들은 영화의 새로운 시간감과 리듬을 구축한다. 사진과 달리 시간을 현재화하는 속성을 가진 영화는 이제 실시간 동영상이라는 질료와 함께 색다른 시간감을 만들어낸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이미지를 보고 온라인에 올린 동영상은 동시성과 연결성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찍힌 대상인 불꽃놀이 자체의 이미지 보다 불꽃놀이를 찍고 있는 카메라 뒤 사람들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각기 다른 거리와 각도에서 찍힌 불꽃놀이는 카메라 뒤 찍는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실시간 현장의 동시성과 다양성을 구축해낸다. 마치 생중계하듯이 불꽃놀이의 여러 현장을 동시에 드러내는 영화는 불꽃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는 동시에 40억 화약에 대한 자본을, 환경을, 노동을 나아가 동시대 사회이슈인 사드배치까지 소환해낸다. 실시간 다중의 감각은 불꽃축제 중 흘러나오는 아나운서톤 목소리로 인해 보다 강조된다. 전지적 시점의 권위적인 단일 목소리는 핸드폰 뒤의 다중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와 대비된다. 미시적 일상사를 나누는 목소리에 비해 이 목소리는 관습적이고 단호하고 단선적이다. “새로운 기적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믿습니다.” 핸드폰 뒤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비웃기도 하지만 이어 나오는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도 한다. <환영의 도시>는 표면적으로는 대자본 대도시 소비의 정점인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의 스펙터클을 보여주지만, 그를 통해 볼거리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관객의 보기 방식을 다루고 있다. 이제 볼거리는 그 자체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매개된 이미지로 부유한다. 순간을 기록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욕망은 직접 보기를 대신해 이미지를 소유와 소비하고 나아가 박제한다. <환영의 도시>의 진짜 주인공은 그래서 스펙타클한 도시 건물이 아니라 도시에서 환상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일명 ‘소셜미디어적 관람 체험’이라고 할까? 디지털 스펙타클 보기의 방식을 실험하는 또 한편의 도시 영화가 있다. <거대 생명체들의 도시>는 표면과 이면의 역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뚜렷이 연결성이 없는 파편화된 장면들의 연속이지만 영화는 그 자체를 구성으로 본다/보이지 않는다를 도시 재개발과 엮어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첫 장면은 색감대비가 강렬한 그래픽과 비트감 있는 음악에 맞춰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눈에 띈다는 이유로, 징그럽다는 이유로 군화발로 짓밟아 죽이는 무당개구리 일화를 들려주는 장면은 실상 지시적 이미지가 부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이미지와 사운드는 연동가능하다. 특히 무지개빛 그래픽에 이르러서는 본다와 보이지 않는다 사이의 어떤 섬뜩한 관계를 인지하게 한다. 다음 에피소드는 전자와 달리, 선명한 지시적 이미지를 가진 장면이다. 다리 밑 도시 재개발 현장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영화는 이어 해운대 대규모 재개발 광고를 담는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이미지를 보고 있어도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는 지 모호할 뿐 아니라 별 감흥이 없다. <거대 생명체들의 도시>는 이처럼 “본다 (혹은 보지 않는다)” 는 표면을 통해 본다(보지 않는다)의 이면에 대해 고찰한다. 볼거리는 <환상의 도시>처럼 기억과 기록의 욕망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편견의 영역으로도 나아간다. 보이지 않는다면 무심하겠지만 눈에 띄는데 징그러우면 죽인다의 혐오의 감각은, 보이지만 의미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무감각해지는 지점,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보이지 않지만 상상할 때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어지는 장면들이 그렇다. 연가시와 바퀴벌리 그리고 매미로 향하는 일화는 그래픽 이미지와 강한 비트의 음성을 통해 상상 가능한 징그러움을 다층적으로 자아낸다. 한 측은 벌레를 향해 다른 한 측은 개발과 파괴를 행하는 인간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도시 재개발의 문제와 집단 지성의 문제로 확장된다. 도시는 가시적인 자본주의의 거대 스펙타클 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곤충과 벌레와 같은 생명체 (그 생명체 속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도)도 공존한다. 두 작품은 기존에 도시를 거주 공간으로 혹은 생활 공간으로 재현하면서 가난, 청춘, 고립, 차별, 이주를 다른 반면, 도시의 이미지와 리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보기’의 방법을 영화 속 언어로 담아낸 새로운 도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