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치약 CF
- 감독
- 문달부
- 제작년도
- 1956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 기억 이 나시나요, 이제?” “아냐, 정확하게는 기억 이 안 나네요. (사이)” - 한나리, 「김희진 1차 구술채록문」,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권: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트워크』, 한국영상자료원, 2024, 178쪽. 구술이라는 것은 대상자의 과거 경험을 듣는 일이기에, 구술채록문에서는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기억이 난다’라든가, ‘기억에 남는다’라든가, ‘기억을 잊어버렸다’라든가, ‘기억이 없다’라는 등 우리는 기억을 손에 잡히는 물질적인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무언가 또는 그 공간 자체인 것처럼 표현하곤 하는데, 특히나 아주 머나먼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야 하는 구술자들에게 그 공간은 바다처럼 넓고 깊어서 기억을 꺼내고 다시 넣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구술자가 기억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혼자 기억을 이끌어내기 힘겨워할 때 면담자들은 조심스럽게 구술자와 함께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 사실 매우 불안하고 또 긴장되는 과정이다. 일단 면담자는 구술자에게 어떤 기억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자칫 기억을 이끌어내려는 과정에서 면담자가 구술자에게 선입견이나 면담자의 견해를 심어주게 될 수도 있다), 혹여 특정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이 구술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트라우마를 일깨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면담자와 구술자 간의 이러한 교감은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낯선 두 사람이 기억을 공유해가는 과정에서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는 구술을 지커보는 이의 입장에서, 구술자와 면담자의 라포(rapport)가 형성되는 과정 에 대한 썰을 좀 풀어볼까 한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구술채록문을 통해 구술자의 기억을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읽어나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날씨도 따뜻해지고 하니, 잠시 미스터리 액션 서스펜스 스릴러에서 벗어나서 이번엔 가슴 따뜻한 휴먼드라마다. 그가 과거를 기억하는 법 앞서 ‘구술자가 기억을 꺼내고 넣는 것이 쉽지 않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구술자의 연령대가 높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기억의 쇠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고, 조바심을 내는 순간 오히려 기억은 더 꽁꽁 숨어버리기 때문에, 면담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구술자의 화법과 기억법을 파악하며 천천히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리고 때론 기억의 문제보다도 고령으로 인해 청력이 약해지며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때는 필담을 준비하거나 목소리를 크게 내고 말의 속도를 늦춰 구술자가 입모양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던 시기가 있었으니,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한창이던 2020년이 딱 그랬다. 혹시 모를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 면담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구술자와 면담자 사이에는 투명 아크릴판 가림막을 설치했다. 고령에 청력까지 약한 구술자는 마스크 때문에 면담자의 입모양을 읽을 수도 없었고 발음이 명확히 들리지 않았으며,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판 때문에 필담도 쉽지 않았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달부 선생님의 구술은 진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구술연구팀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술팀은 구술채록문을 보는 이들이 조금 지루하고 산만하다 느끼게 될지라도 구술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여러 번 되묻고, 다소 대화가 반복되더라도 차근차근 사실 관계들을 확인하며 어둠 속을 헤쳐 나가듯 그렇게 나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매번 구술 인터뷰가 진행될 때마다 구술자의 가족분들이 함께 자리하여 쉬는 시간에는 구술자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면담자에게도 구술자의 부족한 기억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맡아주셨다. 그렇게 천천히, 그렇지만 그의 중요한 이력들이 구술채록문에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구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달부가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떠올리기 전에 그는 항상 장소 나 공간 을 먼저 떠올렸는데, 그렇게 해서 떠오른 연쇄적인 기억들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길림성, 자하문 밖에서의 생활, 군 생활을 했던 논산훈련소나 고모가 살았다는 종로5가 등 구술자는 눈앞에 실제의 공간을 그려놓고 그 공간 안에 건물, 물건, 사람들을 하나씩 배치하며 그것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마치 그림을 그려 채우듯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1) 면담자(공영민) : (필담으로) 선생님, 불나고 난 다음에 바로 《아리랑》으로 가신 거예요? 구술자(문달부) : 예. 서울에 있다가, 한옥 뒤에. 그리고 청파동 앞에 칠성사이다 뒤에 있었어요. 밑에는 창고고, 서무과가 있었고, 2층 가니까 김규동 씨, 전봉건 씨, 김희수 씨. 카메라가 김희수 씬데, 섭외는 잘 했는데. - 공영민,『 2020~2021년도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5권: 문달부 』, 한국영상자료원, 2021, 63쪽. (이하 페이지만 표시함) (2) 공 : 잡지사에 처음 들어가셨을 때 이야기를 좀 더 해주세요. 그때 왜 “창문으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도자기도 보이고…” 이러셨다 그랬잖아요. 문 : 청파동이고, 후암동에 조금 후진 사람이 살았고, 나가야 집이 있고. 계단식으로 지어있고. 자하문 밖에서 이제 서정범 씨하고 만나서 후암동에 왔고. …(중략) 자하문 밖에는 임철호 씨 별장에 살았고. 공 : 임철? 문 : 임철호. 공 : 임철호. 문 : 응. 바로 자하문 옆에 있었어요. 공 : 네네. 그리고 후암동? 문 : 후암동부터 서 선생하고 같이 다녔죠. (65~66쪽) 1970년대 청파동의 전경 (사진: 《서울신문》, 2013. 3. 11.) 첫 번째 인용문에서 구술자는 청파동이라는 공간을 먼저 그리고, 자신이 일했던 칠성사이다 건물 뒤에 위치한 《아리랑》 사의 건물을 그린 뒤, 마치 건물의 단면을 잘라내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밑에서부터 각 층에 대해 설명을 해나가며, 2층에 이르러서는 자신과 함께 작업을 했던 인물들을 하나씩, 마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하듯 이야기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그 공간이 조금 더 커졌다. 그의 기억은 청파동에서 후암동으로 지리적 이동을 거치며 그 공간에 연결된 사람 역시 임철호에서 서정범으로 자연스럽게 바뀐다. 특히 마지막 답변에서 ‘후암동부터 서 선생하고 같이 다녔다’라는 말에는 시간의 흐름을 공간의 이동으로 대치시켜 말하는 그의 독특한 화법과 기억법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또 한 가지 문달부의 기억법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과거의 상황들 속에서 그가 느꼈던 정서적 경험은 종종 음식 과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1) 문 : 예. 그래 거기서 역전 에 살다가 해방돼서 북간도 에 잠깐 있다가. 그때는 보안대 시절이니까 남쪽으로 왔어요. 남쪽에 오니까 묘지에 미군들이 있더구만요. 거기 오니까 종이컵에 우유 하고 빵 하고 주더만요. 물론 무료로 받아먹고. 한참 올라오니까 국민학교가 있는데, 거기 오니까 국수 를 주더구만요. 콩가루 넣은 걸. 그때는 저 많이 먹을 때니까 주는 대로 다 먹고. 거기서 군용버스를 타고 남쪽 으로 왔어요. (32쪽) (2) 공 : 선생님, 홍대 얘기를 좀 들을게요, 홍대. 문 : 마포나루 있을 때. 공 : 대학 시절 이야기. 문 : 뭐 대학 시절에 공부했나요. 그때 비락우유 , 깡통에 팔았는데. 그 아가씨 한테 (웃음) 내가 비락우유 많이 먹었는데. 따끈한 물에 타 먹으면 좋고. 그때 뭐 먹고 돌아서면 배고플 때니까, 그 아가씨한테 많은 신세 졌죠. 부잣집 딸이에요. (37쪽) (3) 문 : 거기는 참, 여름이면 좋았어요. 두부집이 있는데 두부를 잘하더구만요. {두부요? 두부 (웃음)} 그래 순두부 를 많이 먹어요. 지금껏 순두부 즐겨 먹죠. 그래 그분 이 주로 세종로의 두부를, 음식점에 리어카로 가져 가다가 나중에는 자동차로 5가까지 배달하더구만요. 그래 그 다음부터 자하문 밖에 떠나오니까 자연지 멀어지고요. (39쪽) (4) 문 : 한국 사람 귀빈 이나, 외국 사람 귀빈들 이 오면 거기서 브리핑하고 논산 소개를 해요. 거기가 계백장군이 활동했던 황산벌판 이에요. 전주비빔밥 이 유명한데 웬만하면 전주고. (모두 웃음) 진주에 가면 이제 진주비빔밥 은 육회 예요. 소 생고기를 넣어 주더군. 그래 논산서 비교적 편안하게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제대했어요. (41쪽) 첫 번째 인용문에서 중국에서 살던 구술자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경로와 그때마다 만난 사람들 그리고 먹은 음식을 함께 떠올린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도 홍익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자신이 살던 ‘마포나루’를 먼저 떠올리고 당시에 만났던 학우를 떠올린 뒤 그녀가 주었던 따뜻한 비락우유를 이야기한다. 그 이후의 인용문들도 모두 특정한 시기 자신이 지냈던 공간을 떠올리고, 그 공간에서 만났던 사람에 대해 떠올린 후, 거기서 즐겨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며, 그곳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이러한 그의 공간-음식-당시 만난 사람이 연결되는 기억법을 이해하면, 다른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커피 ’에 대한 그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1) 공 : 아, 유태인 사장… 그래서 선생님께서 그때 커피 도 드시게 됐다고요? 그 얘기해주세요. 문 : 예. (웃음) 아침에 출근하면 으레, 처음에 가니까 씁쓸한 걸 맨날 줘요. 공 : (웃음) 근데 나중에 좋아하게 되셨어요, 지금처럼? 문 : 그럼요 (웃음) 이제는 완전히 중독자가 됐죠. (58쪽) (2) 공 : 그러니까 유솜(USOM) 관계자들 이 럭키화학에 와서 같이 일도 하고 그랬다는 거죠, 선생님? 문 : 예, 그렇죠. 공 : 그럼 반대로 선생님께서 유솜에 가신 적도 있어요, 유솜 사무실에? 문 : 그럼요! 자주 갔지요. 공 : 자주 가셨어요? 문 : 거기 가서 커피 많이 먹었죠. (모두 웃음) (111~112쪽) (3) 공 : 그때 말씀하시기를 방송국에 계실 때, 외국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셨다고 그러셨잖아요. 문 : 그렇죠. 공 : 외국인들이 가져온 애니메이션이었던 거죠? 문 : 그게 아마 의례인, 어린이 시간에는 외국 만화를 많이 했어요. 공 : 고정된 시간에 외국 만화를 많이 내보냈어요? 문 : 네. 저는 RCA 방송국 에 와서 처음에 커피 를 먹어 보니 ‘씁씁한 거 이걸 왜 먹나’ 했어요. (모두 웃음) 공 : 근데 좋아하시게 되셨잖아요. 문 : 그럼요. 이제 완전히 중독이 됐죠. 공 : 그때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그 외국 사람들 이랑 같이 회의도 하신 거죠? 문 : 그렇죠. (117쪽) (4) 공 : 다 같이 다니시면서 사진을 찍으셨다는 거죠? 문 : 그렇죠. 예. 서광수 씨하고. 공장 사진은 거의 그분이 찍어 줬고. 또 상업 사진은 김한용 스튜디오가 잘 돼서 제품 사진은 거의 그 집에서 찍었어요. 공 : 그리고 유솜의 사무실에도 자주 왔다갔다 하시고요. 문 : 그렇죠. 거기 가서 커피 먹기 시작해서 중독이 돼서 아침저녁으로, 낮에도 전부 커피예요. (135쪽) 그가 커피를 언급하는 부분은 여기에는 인용하지 않은 종로에서 커피를 마시던 이야기(전람회 감상 후 커피를 마시고 집에 갔던 경험, 명동에 있는 커피숍에서 지인들을 만났던 경험 등)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인’을 만났던 기억과 연결된다. 맥락을 끊고 인용을 한 것이라 구술자가 처음 커피를 맛본 장소를 헷갈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확실하게 처음 커피를 맛본 곳은 ‘RCA 방송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RCA 방송국을 다니면서 외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고 그때 아침마다 커피와 도넛 같은,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들을 처음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력을 따라 구술이 진행되면서 유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는 다시 커피 이야기를 꺼낸다. 유솜(USOM)은 주한미국경제협조처(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Republic of Korea)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1952년 체결된 ‘한미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에 따라 한국에 들어와 무상의 경제적 원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RCA 방송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직원 외에도 많은 미국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구술자는 기업 광고 제작 당시 협력을 구하기 위해 유솜 사무실을 방문하면 한국인 직원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문달부에게 이러한 외국인들과의 만남, 미국식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느낌은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보다, 당시 그가 마셨던 낯설고 씁쓸한 커피 의 향과 엮여 나온다. 1956년 개국한 RCA 방송국(HLKZ TV)의 전경 (사진: 《세계일보》, 2011. 11. 15.) 문달부의 구술은 유난히,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에 대한 정서적 표현들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 물론 이는 많은 시간이 흐르며 당시의 감정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화법이나 기억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동안, 그가 직접 언어적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감정들이 기억 안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구술은 여러 번 읽으며 곱씹었을 때 더 그 맛이 살아난다. 파편화된 언어, 흩어진 기억을 조립하기 하나의 사례를 짧게 더 살펴보고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1999~2000년 사이,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목표로 설립된 씨네디비넷에서는 총 109인의 영화인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투자를 받지 못해 사업이 중단되며 이 자료들은 영원히 묻히는 듯했는데, 감사하게도 씨네디비넷의 대표였던 이하영 (현 하하필름스 대표)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2022년 한국영상자료원에 모두 기증해주셨다. 당시 진행된 많은 영화인의 인터뷰 중에서도 여기서 소개할 것은 원로배우 김일해 (金一海, 1906~2004)의 인터뷰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직접 진행한 구술은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구술채록문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파편화된 언어들 가운데 찾아낸 구술자의 기억이 갖는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인터뷰집은 8월 중 공개예정이다!). 인터뷰 당시 김일해는 95세의 고령으로 일반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녀분들이 동석하여 인터뷰어를 도와주었다. 이 인터뷰는 얼핏 보면 마치 인터뷰어의 질문을 무시한 채 구술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술자의 말들 속에 존재하는 일관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매우 재미있는 면이 많은 인터뷰이지만, 여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조금 살펴보겠다. 김 : 그때 조선영화주식회사 라는 게 처음 됐어요. 그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배우로 들어간 사람은 말이야, 그놈들이 뽑아간 건 누군고 하니 그때 벌써 조선이 자꾸 망해들어갈 적이야. 근데 그때 들어와서 그 조선영화주식회사 맹글어 놓은 놈이 꼽춘데, 그게 일화의 제작부장으로, 주인공으로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일화에서 조선영화주식회사란 걸 ‘너 나가서 여기서 이 영화를 잡아라.’ 이렇게 됐지. … 한국에서 유명한 것들을 알지, 다. 그래 나와줘야 하는데, 제작을 해야 하는데 ‘너도 같이 좀 협력 바란다’ 근데 역할을 정했는데 우선 전부 일본놈들만 꽃을 주고 나까정 졸병이야, 모두. 근데 이제 ‘ 한국에 사람들을 유혹시켜서 전부 군대로 나가게 해야 한다. ’ 내가 생각하면 아주 엄청난 얘기거든. 그래서 ‘ 허허, 이거 큰일 났구나. ’ 그러니 내가 이제 제작부장 찾아가서 껍치지. “나 일 그만두겠소.”, “왜 그러냐?” 내 편이 지금 한국에 많다 그거야. 그런데 우리를 꽃을 주고서 해라. 그래도 자꾸 뭐 ‘군대로 나가라’, ‘*노해라’, ‘만세를 불러라’. 그리고 남산으로 끌고 가서 그 친일파들, 여기 나와 가시는 분들, 남산으로 끌고가서 찬물로 목욕시키고 이럴 판이야. … 왜 한국 사람을 큰 이런 이렇게 만들어놓고, 일본 유명한 사람들은 밑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줘야 손님이 그래도 마땅치 않은데, 전부 저놈들이 꽃을 들고 나가고 한국 사람은 전부 **를 가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시시한 걸 주면, … 내가 무슨 사상이 말이여, 한국 사람이니까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이 이러니 내가 그 팬들한테 미안하다 그거야. … 아, 팬들이 그냥, 한국 전체가 팬들이 **한테 있는데 그거 시시한 역할 주면 누가 그 월급 받아 먹어. … 그렇다고 민족주의자라고 그랬다고 어떻게 보면. 자기 사상에 대한 문제, 예술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나중엔 인제, 내가 “무슨 사상에 대한 문제는 그 부분은 떠난 거 아니냐” 이러고. … 사상 문제는 여기 또 난거다. 그러니까 너희 알아서 해라. … 네가 생각대로 하진 않는데 만일 안 한다면 이제 사상범으로 생각하기 쉽다. 오해받지 않도록 해라. 이렇게 됐지. 그래 가만히 보니까 그놈들도 좀 기분 나쁘거든. 그만두자니 이거 이제 사상으로 취급해 가지고, 그래서 전부 출연했**. 여기서 김일해가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가 1937년에 설립된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말하는 것인지, 또는 194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심지어 위에 인용한 이야기가 실제로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맞는지도 알 수 없다. *주1 여러 가지 사실 관계를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김일해가 1939년 무렵부터 조선과 일본이 합작한 선전영화에 출연한 것은 그의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위의 구술은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해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선전영화의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일본 배우들에게만 좋은 역할을 주었고(그는 이를 ‘꽃을 주다’라고 표현한다) 한국인 배우들은 모두 졸병 역할을 맡기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자신을 좋아하는 조선의 영화팬들에게 그런 시시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그는 영화제작자를 찾아가 거절 의사를 표했고, 이를 들은 영화제작자는 ‘당신이 출연 제의를 거절하면 자칫 일본 정부 측에는 사상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오해받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충고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은 배우들의 출연 거부를 ‘사상으로 취급’했고, ‘남산으로 끌고가서 찬물로 목욕시키는’ 상황이 두려웠던 모든 배우가 출연에 응하게 되었다. 김일해가 출연한 <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 >(이익⋅야마나카 유타카, 1939)의 스틸 이 부분이 전체적인 인터뷰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이 구술 바로 앞서 나오는 ‘ 나운규 ’에 대한 그와 아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나운규는 < 오몽녀 >(나운규, 1937) 촬영 도중 사상범으로 경찰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때 일제 순사들을 설득해 그를 경찰서에서 빼내온 것이 김일해였다. 아들 : 아니 그리고 아버지, 나운규 씨가 민족주의자인데, 김 : 그럼, 민족주의지. 그런데 아편을 하기 때문에… 아들 : 근데 나운규 씨가 <오몽녀>를 만들다가 구속이 됐어요, 그렇죠? {응} 근데 구속이 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나운규 씨를 뺐단 말이야. 아버지가 가서 얘기해 가지고 촬영 마무리하게. 김 : 그렇지, 그렇지. 경찰서에 가서. 아들 : 이 얘기가 지금 먼저번에 방송이 됐어요, 이게.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볼 때는, 내가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친일파야. 나운규는 민족주의자고. 김 : 아니, 나를 친일파로 인정한다는 사람은 가짜로 친일파로 맹글어놨지만, 난 *** 있지, 지금. 김일해는 이 대화에서 나운규를 민족주의자라고 말하고,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민족주의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6.25전쟁 당시 월북한 영화인들과, 한강변에서 무언가를(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모조리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섞어가던 중, 이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갑자기 시작한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이 모든 이야기를 이어서 다시 읽어보면 그에게 ‘민족주의’ 내지는 ‘사상’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가 어떤 것인지, 그는 왜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할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영화제작자를 찾아가 선전영화 출연을 거부한 이유로 시시한 역할과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을 영화팬들, 월급 등을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에 사람들을 유혹시켜서 전부 군대로 나가게 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큰일 났다’라는 생각에 제작부장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출연을 결정했기에 그는 스스로를 민족주의자라고 칭할 수 없다. 거기에 6.25전쟁 이후의 냉전 상황은 그에게 ‘사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다소 느닷없이 흐름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지만, 오히려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기’야말로 그가 역사의 평가 속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 - 고령의 구술자들을 만나 면담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경이감이 들 때가 있다. 2022년 주제사 ‘ 1980년대 이후 극장 지형의 변화 ’를 진행하며 만났던 구술자 양재형 (1925~)이나 김기봉 (1931~)은 두 분 다 이미 90세가 넘은 연세로, 우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면담자의 이름을 기억해주지는 못했지만, 이미 6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은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이야기나 군대에서 경험한 전쟁, 1960년대에 영화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과 자신이 일했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구술이 진행되는 2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되새기고, 재구성하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술자의 이야기가 언제나 다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을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재구성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게 기억 창고 안에 차곡차곡 넣어두셨던 걸까를 생각하면 그가 그 기억과 보내온 시간들이 그저 놀랍고, 그래서 타인에게 이렇게 소중히 간직한 기억들을 공유해준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확실히 요즘은 옛날에 비해 스스로 기억해야 할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자주 연락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는 외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휴대폰이 다 기억해준다. 몇 번 갔던 곳은 머릿속에 잘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방문할 때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스스로 길을 찾아가곤 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싶으면 바로 휴대폰으로 지도 검색을 해본다. 우스갯소리로 뇌를 휴대폰에 의탁하고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다는 말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그에 대해 느끼는 감정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으로 남겨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사물이나 인물, 상황들에 직면했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어떻게 이를 재구성하고, 그로 인해 수반되는 감정들은 어떻게 처리하여 기억의 영역으로 넘기는가를 혼자 생각하며, 스스로 자기 자신만의 구술을 남겨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주1. 인터뷰 중반쯤에 한 번 더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언급하며 의정부 촬영소에서 발성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37년 박기채 ⋅ 이필우 등을 주축으로 설립된 영화제작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위 인용된 부분에 등장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전후 맥락을 살펴봐도 구체적 작품이나 시기를 특정할 수 없다. 즉, 그가 여기서 말하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4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회사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출연한 조선⋅일본 합작영화의 제작사인 조선문화영화협회를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한국최초의 키네스타시스 애니메이션- 성웅 이순신 ( 김용환 화백-1958년 추정)-ⓒ Kim YongHwan>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거의 50년이 되었으며, 그 최초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김용환 화백의 ‘ 성웅 이순신 (1958년 추정)’ 삽화가 키네스타시스(kinestasis-정지된 그림, 사진 등을 카메라 워크를 사용하여 촬영한 다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의 일종)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TV쇼-진품명품(KBS1-TV-2007.11.25일 방송분)’-제작진은 “코주부 김용환 선생이 이순신 장군 서거 360주년인 1958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 KBS 아나운서 박종세 가 내레이션을 맡은 이 작품은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부터 임진왜란 상황까지 충무공의 일대기를 30분 분량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애니메이션 형식을 갖춘 작품은 문달부 화백의 럭키치약 CF광고 (1957년 -HLKZ-TV), 또한 정도빈 화백의 단편 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1962년-국립영화제작소)’, 그리고 신동헌 감독, 신동우 화백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 (1967년-세기상사)’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리는 실제적인 신호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최초의 CF광고- 럭키치약 ( 문달부 -1957년) -ⓒ Moon DalBu> <한국최초의 총천연색 창작단편 애니메이션- 개미와 베짱이 (1962)-ⓒCheong DoBin> <한국최초의 총천연색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 (1967) -ⓒSegi SangSa/Shin DongWoo /Shin DongHun> 이처럼 초창기 한국 애니메이션은 지극히 한국적인 창작애니메이션(Creative Animation) 작품들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외국의 캐릭터나 스토리에 어떠한 영향도 없는 순수 한국적인 작품들 이었다. 특히 캐릭터 디자인은 한국의 주변국인 일본이나 중국 캐릭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나 형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출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제대로 된 작품 몇 개도 없으며, 심지어 표절과 모방의 치욕까지 안고있는 것이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이 직면한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발단은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이 최초로 시도되던 초창기인 1962년~1967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에 국내 창작물의 제작비는 매우 심각할 저렴하여 지속적인 제작환경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 다 주었고 그에 따라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의 생계도 치명적일 정도로 어려워졌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던 차에, 제작 단가가 매우 높은 해외용역 작품들이 국내로 유입되었고, 애니메이터들이 그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국내창작 보다는 국외용역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애니메이션-용역 측면에서의 문제> 제일 먼저 삼성의 동양TV(TBC TV/1966년 황금박쥐 , 요괴인간 )가 일본 작품들을 들여오고, 국제아트(1968년)가 미국 보세 작품들을 국내에 들여 오면서, 창작보다는 용역, 보세 작품들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창작보다 보세가공(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상표 부착방식)이 경제적으로 더 윤택해 질 수 있는 길이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약 10년간 진행된 일본과 미국 등지의 해외용역(OEM)은 2D애니메이션 제작을 통하여 국내에 외화를 벌어들이는 효자역할을 하였다. <삼성의 동양TV(TBC-TV)가 일본 작품들( 황금박쥐 , 요괴인간 -1966년)을 들여오면서, OEM 작품들의 제작이 봇물을 이루었다.-ⓒ일본 제일동화/NHK-TV> 그러나 그 초반부터 일본은 제작방식의 노하우를 쉽게 전수하여 주지 않은 반면, 미국은 과감하게 제작방식의 노하우를 전수하여 주었다. 즉 일본은 자체 기술을 어렵게 전수시킴으로서 하청국가를 장기간 손안에 가지고 있겠다는 속셈이었고, 미국이 초반부터 기꺼이 기술을 전수한 이유는, 자신들은 자국에서 편안한 정신적 노동부분(프리 프로덕션-창작 및 기획)을 담당하고, 힘든 육체적 노동부분(메인 프로덕션 전체와 포스트 프로덕션 일부)은 해외용역으로 해소하고자 한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당시 선진국들(일본, 미국 등)은 2D 애니메이션 제작부분 가운데서 주로 고급 두뇌 산업(기획부분)에만 주력하면서, 고되고 힘든 육체적 노동 부분인 소위 막일 (노가다-일본어)에 해당하는 제작부분은 하청방식으로 개발도상국과 중진국들(한국, 대만 등)을 그야말로 스마트하게 이용하였다. 그것도 ‘한국이 세계적인 제작 능력을 가졌다’는 입에 발린(?) 찬사(very good!, wonderful!, fantastic, best 등)와 심지어 한국이 자신들 보다 ‘더 잘 만들고 세계적 첨단기술을 가졌다’는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할 정도의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장기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밀월 관계는 당시에 10여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즉 하청방식의 제작비가 초기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천정부지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에 수익에서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없었던 미국, 일본은 2D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이 약간 떨어지기는 하지만, 제작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면서도 하청 제작비가 보다 저렴한 베트남, 필리핀, 북한, 중국등지로 대부분 하청의 물꼬를 돌렸다. 하지만 이러한 악순환과 연쇄고리는 현재 또다시 3D 산업에서 똑 같은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는 소위 선진국이 일부 합작을 제외하고, 다시 첨단 3D 애니메이션 제작부분 가운데 두뇌 산업인 창작, 기획은 그들의 자국에서 대부분 해소하고, 소위 막노동에 해당할 수 있는 메인 프로덕션과 포스트 프로덕션은 또다시 해외의 하청 국가들에게 떠 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신들 기술은 세계적이다.’, ‘당신들은 첨단기술을 가졌다’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물론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기술은 첨단일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것을 기획, 창작해내는 콘텐츠(contents) 부면에서는 너무나도 빈약함을 금할 길이 없다는 난제를 여전히 안고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인식 측면에서의 문제>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은 국민적인 관심을 받는 분야인 것 같다. 이러한 관심이 30여년 이상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반갑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광적이기 까지 하다. 하지만 흔히들, “나는 어려 서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나는 그림이나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 즉 ‘나(성인이라면 대다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그것들은 주로 아이들이 보는 것이니, 나(성인이라면 대다수)도 만들 수 있다’라는 착각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분야가 애니메이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애니메이션은 주로 아동들이 보는 것으로 인식되어 오면서, 그것을 제작하는 것도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나 직업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속의 인물인 캐릭터는 누구나 쉽게 취급되는 만화적인 2D그림이거나 3D모델일 수는 있지만, 그 가상 공간 속의 인물들도 실사영화 속의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연기자(배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만화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머리 속의 생각이나 상상 혹은 꿈을 애니메이션 적으로 표현하거나 현실화 시키는 것은 그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상을 동작만이 아니라 감동적인 연기로까지 발전시키는 일은 더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애니메이션-교육 측면에서의 문제> 애니메이션 교육 측면에서 우리는 심각할 정도의 문제를 안고있다. 단편이나 실험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영상예술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주요 과정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교육과정이 실험이나 기획, 혹은 툴 위주의 우선순위에 머물러서는 산업적으로 활개를 펼 수가 없다. 대학에서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실험 애니메이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그 이상으로 그라운드(ground-상업 애니메이션)도 활발해지도록 교과과정의 많은 부분에서 현장 맞춤교육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할 것이다. 미술에도 순수미술이 있다면, 상업미술도 있지 않은가! 대학이 순수 애니메이션 제작 교과과정에 대부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졸업작품의 수준은 좋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교과과정이 현장 맞춤교육이 아닌 관계로 졸업 후 취업이 대부분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재학 시절 졸업작품 한편 잘 만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전문 감독이 되는 것이 아니며, 애니메이션 산업현장에 곧바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은 더 더욱 절대 아니다. 또한 전국에 걸쳐 대학내의 애니메이션 전공 교수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미술이나 디자인 계열 전공자가 대부분이다 보니 애니메이션 제작현장에서의 실제 경험이 전혀 없거나, 짧은 경험 만으로 비전공 상태에서 애니메이션 전공 교수가 되어 실제 교육과정은 빈 상자 속과 같이 텅 비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맡겨진 수업도 수치화(numerical)할 수 없는 기획이나 툴(tool) 사용 위주의 손 쉬운 교육 쪽으로 슬그머니 피해가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이성을 가지고 살펴보자면,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실제 미술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을 미술전공 교수로 채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전공에 있어서는 그 순수함이 엄연히 침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환경 아래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전공 학생들이 떠 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빈약한 교육환경 아래서 학생 각자는 그들이 선택한 애니메이션 전공분야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흡족하게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한국의 교육은 아직까지도 암기위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정답 암기 교육방식은 무한한 상상력의 결과물인 소프트웨어적 콘텐츠 생산에 제약을 가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생각은 무한한 상상(unlimited imagination, infinite imagination)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야 하는 영역이지, 단지 정답만을 저장하는 제한된 틀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작, 기획을 진행할 때, 우리의 암기교육 경험이 우주보다 넓은 우리의 무한한 상상력을 가로막고 방해하지 못하도록 분투하여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활발해질 수 있도록 학교에서의 교과과정도 많은 부분 현장 맞춤과정으로 현실적인 초점이 맞추어져야만 할 것이다.> 또 다른 불리한 환경여건은 미주나 아시아, 유럽 등지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자유롭고 뛰어난 교육환경 속에서 수많은 독서생활을 즐기고, 그들 인생의 산 경험인 살아있는 여행문학(travel literature)을 즐기며, 상상력의 나래(wings of imagination)를 펼쳐가는 사이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정답을 맞추거나, 수치화되고 정량화 된 빈약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상력이 부재한 작품들에 오늘도 혼신을 다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국애니메이션 기술이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기술적, 예술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국가적으로 어느 한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약150 여개 대학이 ‘애니메이션’을 하나의 교과과정으로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대표하는 제대로 된 작품하나 없어 국제적으로 망신스럽고 창피스러운 현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하겠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활발하지 않으면 그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관련산업도 위축될 것이다. 실험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위주의 교육으로는 애니메이션 산업을 살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 애니메이션도 살고 상업 애니메이션도 함께 사는 윈윈전략(win-win strategy)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말로만 될 일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전략을 수립하고 실제로 실행시켜야만 가까스로 성취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애니메이션-기술 측면에서의 문제> 최근의 3D 입체 영상기술(아바타)의 성공도 주로 기술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듯이‘컴퓨터는 단지 도구(tool)에 불과할 뿐이다.’ <제임스 캐머론 감독의 ` 아바타 ` -ⓒ이십세기 폭스> 픽사의 토이 스토리 (Toy Story) 감독인 존 라세터(John Lasseter)는 '펜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연필이 아니듯이,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도 컴퓨터가 아닙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창조자는 아티스트입니다.' 라는 그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픽사의 오늘은 그들의 제작 시스템 이상으로 아티스트들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 기술(technology) 강국이라는 주장만큼,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중요한 것은 콘텐츠(contents)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만 있고 프로그램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부실하다면 고급, 첨단장비도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는가! <픽사의 감독인 존 라세터는, '예술은 기술의 발전을 부르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라고 함으로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존 라세터(John Lasseter)는 '예술은 기술의 발전을 부르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The art Challenges technology and technology inspires the art.)' 라고 함으로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픽사의 뛰어난 지적 결과물들은 예술적 창조력과 첨단 기술력이 상호간에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예술가 각 개인에 대한 역량을 중시하는 분위기 아래서 이룩한 결과이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두자면, 그들에게 예술은 창조적인 면에서 1차(primary)이고 기술은 표현적인 측면에서 2차(secondary)인 것이다. 반면에 한국의 현실풍토는 기술의 비중이 1차(primary)이고 예술은 2차(secondary)인 듯이 보여진다. 하지만 전통예술과 첨단기술의 융합(convergence)은 현대에 필연적인 관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가치 측면에서의 문제> 스토리의 질적인 면에 있어서나, 상하계급이 없는 제작진의 인간적인 존중이라는 상호관계에 있어서나,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에게는 휴머니즘, 생명의 존중, 자연친화, 선의 가치, 감동 등도 생활화 되어야 하겠다. 단지 기술적인 제작이라는 틀 속에만 있거나, 상하 계급적인 제작환경에 휘둘리다가 보면, 결국 한국 애니메이션은 인간적인 감동이 없는 기술적인 결과 물로만 남을지 모른다. 기술적 소산물(technical product)을 생산해내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지적 소산물(intellectual product)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그들의 지적가치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많고, 애니메이션 작품에서도 그들의 정신 세계를 담고있는 차원 높은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무국적 캐릭터나 작품들은 많은데, 한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저작물들은 빈약한 것이 현 실정이다. 겉으로는 ‘우리 것, 우리 소재’ 하면서, 정작 결과물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국적의 두루뭉실한 결과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겨우 만들어진 결과물들도 소재나 표현방식이 조악하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3류나 4류 애니메이션들이 대부분이다. 애니메이션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영화이다. 이러한 영화가 초보 연기자의 단순 동작과 같이 동작으로만 마무리가 된 작품들이 90퍼센트 이상이다. 그러나 영화 연기자의 동작(action)이 진정한 의미를 담는 가치 있는 연기(acting)로까지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애니메이션도 동작(action)만이 아닌 살아있고 가치 있는 연기(acting)로까지 승화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전반적인 인식의 제고> 전세계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애니메이션은 입(말만 하는)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정신을 반영하는 표현력)으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 전부터 품어 온 애니메이션에 대한 뛰어난 관심, 혹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 지위, 유명세가 있고 든든한 재정이 뒷받침된다고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은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고 이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님을 진정으로 인식해야 하겠다. 자신이 하고싶다고 해서 누구나 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거나 아동 대상이라는 가벼운 영역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 과학, 수학, 기하학, 공학, 물리학 등이 수반되는 종합적(overall)인 첨단(cutting-edge) 분야이자 독특한(unique) 영역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전문인들에게 맡겨 주어야 하겠다. 또한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채용도 오랜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인들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하겠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미술이나 조각, 음악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에 걸친 작업과 훈련의 고뇌라는 힘겨운 과정으로 이룩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저 전공교수라는 겉 모습만으로 애니메이션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미술전공 교수가 그러하듯이, 애니메이션 전공교수도 오랜 숙련과정을 경험한 교육자들만이 양심의 떳떳함과 자유함으로 맡겨진 직무를 다하게 되지 않겠는가! 또한 3D에서 외국의 하청을 할지라도 외국의 칭찬은 냉혹하게 뒤로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만의 고유하고 차원 높은 지적재산이라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혼신을 다해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진정한 애니메이션 예술작품의 제작은 단지 수년간의 경험으로 될 일이 아니고, 진실로 오랜 세월에 걸친 아마도 수년, 10년, 혹은 그 이상의 오랜 경험의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내일은 한국의 역사 초기부터 그 맥을 이어 온 전문인들을 선두로 해서, 그 유산을 함께 할 신진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들에게 겸허하게 맡겨져야 하겠다. 언제 어디서나 전면에 나서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제작지원을 받는 일 등에서도 그다지 계산적이거나 발 빠르지도 못한, 그렇지만 조용히 뛰어난 장인정신(spirit of artisanship)을 가진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들을 극진히 대우하는 풍토를 조성하여 줌으로서 상업 애니메이션의 성공을 가속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면서, 동사에 지적 재산, 또는 지식 재산 (intellectual property)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에 모두가 전심전력 할 뿐만 아니라, 한국 애니메이션이 세계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 (Renaissance-문예부흥)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전문 예술인들을 극진한 애정과 함께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하겠다. 겸허한 마음과 함께! 부가적으로 창작 TV애니메이션 제작과 관련하여, 현재 한국의 국산 창작 TV애니메이션 제작이 활성화 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각 방송사들이 수익이 안 된다는 이유로 제작비를 터무니 없이 낮추고, 그나마도 만들어진 작품을 방영할 방송시간 부여도 제대로 지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 기사에서 논의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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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구술 컬렉션(1) 문달부 편 | 12건 | 2025-04-25 | 2025-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