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는 웁니다
- 감독
- 문석봉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이덕화, 박준규, 나문희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전 세계는 물론이고 영화계도 큰 폭의 변화를 맞아왔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났고, 그동안 얼마나 적은 수의 영화가 여성의 크레딧을 달고 생산됐는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영화계가 남성들만의 친목과 우정, 그리고 지배 카르텔 안에서 굴러왔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후 변화는 극적이라 할만하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지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나서는 영화들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도 줄어드는 분위기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전기영화 붐이다. 방사능 연구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 < 마리 퀴리 >(마르잔 사트라피, 2019), 멜버른컵이라는 경마대회에 우승한 최초의 여성을 다룬 < 라라걸 >(레이첼 그리피스, 2019), 여성의 정체성을 노래로 승화했던 호주 가수 헬렌 레디의 이야기 < 아이 엠 우먼 >(문은주, 2019),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스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을 네 배우(주로 줄리안 무어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통해 들려주는 <더 글로리아스 The Glorias>(줄리 테이머, 2019), 1960년에서 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린 영화배우 진 시버그의 이야기 <시버그 Seberg>(베네딕트 앤드류, 2019), 어린 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주디 갈랜드에 관한 < 주디 >(루퍼트 굴드, 2019) 등이 실존했던 굵직한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 전기영화다.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을 그린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은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두 여성과 폭스뉴스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일체화한 가공의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며, 1970년 미스 월드 대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여성들의 < 미스비헤비이어 >(필리파 로소프, 2020)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기영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Mrs. America>(크리에이터 다비 월러, 연출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엠마 아산테,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자니크자 브라보, 2020)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걸출한 인물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옴니버스 전기영화'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기영화/ 드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을 통해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온갖 제약을 뚫고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인공을 다루거나(<마리 퀴리> <라라걸>)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담아낸다(<아이 엠 우먼> <더 글로리아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미스비헤이비어> <미세스 아메리카>). 상당수가 여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 깊다. <라라걸> 같은 경우 여성 스태프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들 여성 전기영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생산 방식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수산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 미스 마르크스 >도 여성 전기영화다. 이 전기의 주인공은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1855~1898)다. 그 옛날 마르크스주의를 익혔던 사람들조차 채 알지 못했겠지만, 엘리노어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중후반 온갖 분야에서 열렬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55년 런던에서 카를과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의 일곱째 아이(이중 넷은 사망했다)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사회주의 신동’의 면모를 드러냈다. ‘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자본론> 저술을 도왔고 16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여러 투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성인이 된 뒤로 그녀는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최초의 여성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도 올랐다. 또한 맹아 단계에 있던 여성운동에서도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었다. <미스 마르크스>는 엘리노어 생애의 후반기인 1883년부터 1898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카를의 장례식식장에서 시작된다. 이 첫 시퀀스에는 이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모든 인물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카를부터 그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미 사망한 큰 언니 예니첸의 남편 샤를 롱게와 아들 조니, 또 다른 언니 라우라의 남편 폴 라파르그,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엘리노어의 사랑이자 원수가 되는 에드워드 에이블링까지. 이들 인물을 담은 영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는 운동가 엘리노어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속히 퍼져감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적 계승자는 절친 엥겔스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유산 관리권을 물려받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됐던 엘리노어 또한 이 '운동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엘리노어가 여러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습을 직접 화법으로 보여준다. 엘리노어가 <자본론>의 자본 축적 법칙에 관한 구절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읊는다든지 당대로선 매우 급진적이었던 여성 평등에 관한 연설 장면을 꽤 길게 편집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바가 19세기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두 번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카를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했던 데무트에게는 프레데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무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엘리노어는 여자 관계에선 방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엥겔스가 프레데릭의 친부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엥겔스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엘리노어는 혼란에 빠진다. 또한 언니 예니첸이 사망한 뒤 자신이 돌보고 있던 조카 조니가 아버지 롱게에게로 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축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질적 남편 에드워드 에이블링과의 이야기다. 엘리노어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당대의 틀을 깨는 파격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마르크스 가문이나 엘리노어 마르크스에 관한 대다수의 전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에게 아킬레스의 건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곳곳에 설파한 운동가로 기록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낭비벽과 쉴 줄 모르는 성편력으로 엘리노어의 삶을 자글자글 갉아먹었다. 이 영화에는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에이블링은 미국 유세여행에서 고급 와인과 꽃을 마음껏 질러대며 비용을 낭비해 이들을 초청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노어가 물려받은 유산 또한 펑펑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노어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링을 신뢰하려 애썼고 그것이 그녀 삶 최대의 불운이었다. 영화는 가뜩이나 힘겨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나날을 살아가던 엘리노어가 아버지의 과거사에 배신당하고 에이블링에게 연달아 결정타를 맞으면서도 분투하지만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사실, <미스 마르크스>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을 그려서인지 영화는 순간순간 에피소드를 단순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운동가로서의 엘리노어 보다는 한 남성과 가족 관계에 휘둘리는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며, 워낙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풍부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감독은 나름의 '필살기'를 보여준다. 한때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던 전설적 가수 니코가 1980년대를 맞아 독자적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린 여성 전기영화 < 니코, 1988 >(2017)로 데뷔한 수산나 니키아렐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전기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기영화의 한계라 하면 실재했던 인물의 삶이라는 굴레에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니키아렐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영화적 삶'을 부여하려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후반부 엘리노어가 펑크록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과 버젓이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성과 결혼한 에이블링을 보는 괴로움에 둘러싸여있던 엘리노어는 이 장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도록 몸을 마구 내던진다. 어쩌면 진혼 의식이나 살풀이와도 같은 이 장면을 통해 니키아렐리 감독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순간의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 한 장면은 앞서 언급한 여성 전기영화보다 이 영화가 한 발 앞선 지점이며, 어쩌면 이 지점이 앞으로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P.S. 영화 속 ‘살풀이 의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국 밴드 다운타운 보이즈 Downtown Boys의 음악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서 사용된 'Waves of History'부터 엥겔스가 사망하는 장면 직후에 흘러나오는 '인터내셔널가 L'Internationale'까지 여러 장면에서 곁들여지는, 좌빨 성향 농후한 이 미국 밴드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어릴 적부터 "Go Ahead"라는 인생의 모토를 갖고 살아온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
「검열서류를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 I」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대복덕방> 사건으로 한창 강화된 검열 속에서, <내것이 더 좋아>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본의 상당 부분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어야할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필름 자체에는 검열의 흔적이 그다지 기입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을 잘 드러낸 영화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이 영화는 구봉서와 서영춘이 공동주연을 맡고 있으나 서영춘이 여장남자 역할을 하면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서영춘 코미디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영춘이 중심인물을 맡았던 <내 것이 더 좋아>는 ‘저속’을 검열 차원에서 단속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문제적인 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1968년부터 1971년은 ‘섹스영화’가 ‘폭발’했던 시기였다. 특히 1969년에는 ‘섹스’가 한국영화의 주류로 부상했다고 할 수 있는데, 남성동성애를 다룬 김수용 감독의 <시발점>과 동성애적 표현 수위가 상당히 높았던 신상옥 감독의 <내시> 등이 이 해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또한, 이 해 이형표, 신상옥, 박종호는 외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제작되었던 <내 것이 더 좋아>는 동성애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제기하는 영화였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가진 돈을 몽땅 소매치기 당한 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봉수(구봉서)에게 얹혀 살게 된다. 봉수는 성춘 만한 덩치를 가진 ‘여편네’와 함께 살다가 얼마 전 헤어진 상태로, 하숙집 아주머니가 맞선을 주선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얼결에 성춘을 시골에서 올라온 ‘본 마누라’라고 소개한다. 이때부터 여장을 하게 된 성춘은 봉수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마음껏 뽐낸다. 한편, 맞은 편 집에 살고 있는 부부 역시 여성 동성애 부부로, 두 쌍의 동성 부부가 엮이게 되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성춘은 부부 중 아내 역할을 하는 분임(고은아)에게 마음을 두고, 그녀에게 “정상적인 부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이금희)와 연결되면서 두 쌍의 동성 커플은 두 쌍의 남녀 커플로 ‘정상화’된다. 그런데 제작신고 시 제출했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와 상당히 다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하루만 재워주겠다고 성춘을 집으로 데려 갔던 봉수가 먼저 성춘에게 “마누라”가 될 것을 제안하는 다음의 장면이다. #20. 봉수의 방 성춘: ... 근데 혼자 사세유? 봉수: 그래 한달 전에 내쫓았어! 난 여자라면 신물이 난다구! 여편네라구 어디서 바가지만 박박 긁구 귀찮구 재수없는 존재란 말야.. 하다가 성춘을 천천히 뜯어본다. 성춘: 뭐가 잘못 됐시유? 봉수: 너 밥도 잘한다고 했지? 성춘: 그쯤이야 누워 코풀기지 뭐유. 힛힛... 봉수: 그럼 너 내 마누라 안돼볼래? 성춘: 예? 마누라유? 제가유? 아이고메... 남자가 어찌 여자가 된단 말이예유? 봉수: 그럼 넌 아내로서 언제까지나 이 집에서 살아두 되는 거야 성춘: 허지만 난 가수가 될려고 왔지, 아내가 될려고온 건 아닌데유? 봉수: 야 여기 살면서 저 전축으로 열심히 배워서 가수가 되는 길을 더듬어 보는 거야! 성춘: 오라 그것도 좋은 생각이유! 봉수: 그럼 우리 간단히 초례나 올릴까? 성춘: 어떻게유? 봉수: 찬물 떠놓고 올리면 되는 거지. 예식장에 갈 필요가 없잖아. 성춘: 허지만 여자옷도 한 벌 없는데. 봉수: 옷이 왜 없겠니. 봐라 보구만 죽으라구! 하며 양복장 문을 드르륵 열어 보인다. 쪼옥 걸려있는 옷가지들. 봉수: 양장에 한복에 수두룩하다! 먼저 살던 여편네가 등치가 너만 했으니까 잘 맞을거야. 아무거나 골라 입으라구. 난 냉수 떠올게. 하며 나간다. 놓여지는 냉수 한 그릇. 밤이다. 정한수 떠놓고 마주서서 예를 올리고 있는 봉수와 성춘. 봉수가 절하면 성춘도 절하고. 봉수: 우리 두 부부 일생을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 주시고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하게 해 주시옵소서. 성춘: 여봐. 아들 딸을 어떻게 낳아 봉수: 글쎄 우선 그렇게 해두는 거야. 자! 식은 끝났구.... 사랑의 선물로 키쓰나 한 번 하자! 하며 성춘의 뺨에 입술을 갖다댄다. 봉수: 아이 따거! 야 수염이나 좀 깎어라! 성춘: 정말 별꼴이야... 에이 퇴! 봉수: 여보 이제부터 우린 부부야. 남편 말 잘 듣고 착한 아내가 되라구! 이어지는 첫날 밤, 봉수와 성춘이 자고 있는데, “서로 다리와 다리를 엉키구 부둥켜 안고 자고 있는 두 사람의 꼴이 가관”이다. 다음 날 아침 봉수는 “그럼 다녀오리다”하는 인사와 함께 성춘의 뺨에 뽀뽀를 하고 출근하며, 퇴근하는 길에는 성춘에게 주기 위해 “케키집”에 들러 “케키상자”를 들고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모두 삭제되었으며, 봉수가 성춘을 끊임없이 ‘이 새끼야’ 등으로 칭하고 구박하는 장면과 대사로 대치되었다. 두 사람이 애정을 표현하거나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장면 역시 성춘을 귀찮아하고 내보내고 싶어하는 봉수의 대사들로 바뀌는데, 검열 이후 재녹음된 이 대사들은 화면의 입모양과 동조되지 않는다. 한편, 맞은 편 집에 살고 있는 여성 동성애 부부에 대해서는 ‘부부’임을 암시할 수 있는 모든 단어들을 지워져 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는 처음 분임과 강자를 본 성춘이 부부냐고 묻자 봉수는 “그야 부부지만 예사 부부가 아니지”,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동성연애가 뭐냐고 묻는 성춘에게 “여자끼리 남편이 되구 여편네가 되구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그림 1) <내 것이 더 좋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신 #20 분임-강자 부부의 성적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이 대화는 영화에서 저들이 부부냐고 묻는 성춘의 질문에 “아니야. 둘 다 여자야.”라는 봉수의 대답으로 부정되고 축소된다. ‘부부’라는 표현이나 ‘남편’이라고 칭하는 분임의 대사 역시 ‘강자 씨’ 등의 일반적인 호칭으로 대치되며, 이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들도 대부분 삭제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애정 표현 또한 거의 삭제된다. 그런데 여성 커플의 다정한 장면이 대부분 삭제된 것과 달리, 남성 커플의 애정 행각은 좀 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성춘이 “여보 나 예쁘지? 난 당신이 좋아 죽겠어”라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 노래 자랑 대회에 나가 ‘코미디언 서영춘’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삐빠빠룰라”를 부를 때 다정하게 봉수의 이름을 부르고 “여보”라고 칭하는 장면, 팔짱을 끼고 음식을 서로 먹여주며 데이트 하는 장면 등 이들의 애정이 드러나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진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는 서영춘의 행위가 ‘코믹함’을 위해 상당수 남겨질 수 있었던 반면 여성 동성애를 묘사하는 장면은 삭제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당대 검열이 구분했던 ‘불온’의 위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다시 검열 서류로 돌아가 보자. 전술했듯이, 이 영화는 제작신고 시 시나리오 검열에서 제작불가 통보를 받았다. 무엇보다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등장시켜 동성애 커플을 다뤘다는 것과 여장남자의 ‘저속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으며,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돈을 안 내는 도주 및 사기 행각, 도둑놈의 도둑질 행위, 깡패들의 돈 갈취 행위 등도 불가의 사유로 지적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검열에 의해 여장 남자의 저속한 행위로 규정되어 삭제되어야 할 것으로 구체적으로 지적된 것들이 매우 일상적인 행위들이며 또한 이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검열에서 지적한 ‘저속한 행동’에는 빨래하는 것, 시장보고 음식하는 것, “식모노릇”, 마사지 하는 것, 여장남자의 부부생활, 산부인과 소동, 얼굴을 할퀴는 등의 난동, 남장 여인 부부 침실에 뛰어드는 행위가 포함된다. (그림 2) 작성자 불명, 「극영화 “내 것이 더 좋아” 각본심의의견」, 1968.11.(추정) 이 심의의견서는 ‘씨나리오검토의견’이라는 제목이 명시된, 일정한 형식이 있는 문서 네 건(심사 날짜가 11월로 되어 있는 것 두 건, 심사 날짜가 12월로 되어 있고 ‘재심분’이라고 표기된 것 두 건)과 달리 수기로 쓰여 있으며 특정한 문서의 형식이 없다. 그리고 당부의견에서 영화 제작 ‘불가 또는 개작 통보’ 중 불가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고 있다. 제작 불가 판정을 받은 한 달 뒤인 12월 10일, 제작자인 합동영화사의 곽정환은 27곳의 대사를 삭제하거나 삽입했다고 하면서, 시나리오의 재심을 요청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서류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12월 14일 시나리오검토의견에서 또 다시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12월 23일 검토에서는 제작 ‘가’ 판정을 받았다. 재검토 이후 10일 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한 번 검토가 이루어진 것인데, 12월 26일 제작사에 통보된 「제작신고수리 및 시정사항통보」에 “12월 23일에 제출된 극영화 ‘내것이 더 좋아’에 대한 검토”라고 명시된 것으로 미루어, 이 문건은 12월 14일 이루어졌던 재검토에서 제작 불가 판정을 받은 이후 한 차례 더 수정이 이루어진 뒤 세 번째 시나리오 검열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12월 26일에 통보된 검열의 내용에서 지적하는 바 역시 그 이전에 적시되었던 불가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 3) 공보부, 「극영화 “내 것이 더 좋아” 제작신고수리 및 시정사항 통보」, 1968.12.26.) 이 통보서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수정된 시나리오 중 12곳을 더 삭제하거나 시정하도록 요청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지적은 “동성끼리 부부를 가장하여 생활하는 설정 자체가 불건전”하기 때문에 “모든 장면 묘사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치로 건전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 부부관계의 애정 묘사 등 비정상적인 표현을 일체 삭제”하라고 주문한다. 또한 “여장남자의 저속하고 추잡한 모든 장면이나 대사를 건전하게 시정”하고 “동성부부가 서로 성감을 느끼는 듯한 일체의 묘사를 삭제하거나 달리 시정”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곧 동성애는 그 자체가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므로, 삭제되어야 하거나 혹은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취”로 그려질 때만 “건전”하게 취급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즉, ‘동성 부부’라는 설정 자체가 없어지면 이 영화의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제작이 불가능한데, 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동성애자 부부’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취”를 통해 이 영화의 불온함을 가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의 웃음 유발 장치로 활용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저급’하므로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검열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지키면서 코미디영화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이 영화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딜레마 속에 놓인 이 영화가 살아남은 방식이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재검열을 위해 자진 삭제하였다고 제시한 부분을 제외하고, 제작신고 수리 시 시정사항으로 통보된 내용들, 그리고 필름 검열합격 후 삭제 또는 단축할 제한사항으로 지적된 26개의 장면 또는 대사 대부분이 필름에 남아있다. (그림 4) 공보부, 「장편영화 “내 것이 더 좋아” 검열합격」, 1968.12.31. 서류에 따르면 심지어 이 영화는 사전제작 위반작이었는데, 1차 개작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 검열을 거치면서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지적되어 ‘시정’ 혹은 ‘삭제’되어야 했던 부분들은 대부분 서류상으로만 삭제되었던 것이다. 임검까지 가능했던 당시의 검열 속에서 ‘저속’하므로 삭제되어야 했던 이 영화는 삭제되지 않은 ‘저속’함으로 남은 경우였다. 서영춘 코미디와의 비교를 위해 이 영화와 거의 동시기에 제작되었던 구봉서의 코미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이나 <남자 식모>(심우섭, 1968), 그리고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는 검열에서 훨씬 관대한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시장을 보며, 청소와 식사준비, 바느질 등의 집안일을 도맡고 마사지를 하기도 한다. 특히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요정에서 남성들에게 술과 웃음을 파는 기생 역할을 맡는다. 그럼에도 검열에서 구봉서의 코미디는 서영춘의 코미디와 결이 다른 것으로 취급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는 검열에서 대체로 ‘건전’하며 ‘명랑’한 ‘풍자 코미디’로 평가 받았다. <남자기생>은 제목이 “너무나 직선적인 퇴영적 인상”이 강하므로 “건전한 이메지의 것”으로 개제하라는 지적에 따라 <남자와 기생>으로 변경되었고 그 외 섹슈얼리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에 ‘주의’를 요하면서 “각별히 저속하지 않게 묘사”할 것을 주문하는 정도가 검열에서 지적된 내용이었다. (그림 5)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극영화 “남자 기생” 각본심의결과통고서」, 1968.9.14. <남자 식모>에서는 여성 식모들을 비하하거나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듯한 발언들, 예를 들어 “식모 주제에”, “예쁜 식모라도”, “여자 식모들 살맛이 나는데” 등의 대사 등을 삭제하라고 지시한 것을 제외하면, 제명에 대한 언급 정도가 검열에서 지적한 사항이었다. “제명은 일기경박하고 저속한 감 불무하나 작품자체가 코메디텃취이고 주인공이 남성이기 때문에 원제명을 인정”한다는 것 정도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극영화 “남자식모” 각본심의결과보고서」, 1968.3.29. 1967년까지 ‘씨나리오심의의견서’ 또는 ‘각본심의의견서’였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서류는 1968년 초 ‘각본심의결과보고서’를 거쳐 1968년 4월 이후 ‘각본심의결과통고서’로 변모했다. 한편, <남자와 기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자기생 태호(구봉서)가 요정에서 술 마시는 남자들을 앞에 놓고 춤과 노래로 풍자하는 대목인데, 검열에서 일부 삭제되었다. 삭제된 부분은 “네놈들 때문에 우리들은 돈벌이 잘 되지만 너희들도 국가를 위해 무언가 할 생각을 해 보아라”라는 대사였는데, 노골적으로 교훈을 설파하는 구절이 삭제된 것이다. 검열 서류에서 따로 적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대사가 삭제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코미디 영화에서 ‘국가’를 거론하는 것 자체의 ‘불온함’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진 삭제의 구절은 차치하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봉서 코미디에 대한 지적들은 서영춘 코미디가 ‘저속함’을 이유로 검열에 의해 제지되었던 것과 다른 결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구봉서가 영화에서 여장을 하거나 여자들의 직업(<남자 식모>, <남자 미용사>)에 도전하는 것은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타락한 사업가’나 ‘일부 유한계급의 여성들’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므로 대체로 “건전”하고 “명랑”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반면, 서영춘의 여장은 이와 다른 위치에 놓인다. <내 것이 더 좋아>의 마지막 부분, 봉수와 크게 싸우고 집을 나가는 장면에서 성춘은, 내가 여태 갈 데가 없어 안간 줄 알아유! 너 인생이 불쌍해서 못갔다! 네 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여자 구실하다 그 좋은 육체마저 요렇게 갈비처럼 살이 쏙 빠졌다! 먹고 싶은 오징어 다리 하나 안 사먹고 하고 싶은 가수 한 번 못하고 너 구린내 나는 양말쪽 깁느라고 허송세월만 했어! 라고 화를 낸다. 생계를 위해서만 여장을 한 것이 아니라 봉수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함께 살고 있었음을 고백한 성춘의 문제적 위치는 ‘남자시리즈’의 구봉서의 행위와 달리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성춘은 분임과 있는 장면에서는 남성성을 과시하지만, 봉수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풀 메이크업에 브래지어까지 갖춰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목소리도 가냘프게 변조하는 등 여성성을 적극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대상도 의미심장하다. 남성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끼리, 여성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끼리 사랑을 느껴 파트너를 바꾸는 마지막 씬은 ‘정상화’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동성애적 코드이다. 우여곡절 끝에, 삭제하라는 모든 부분을 삭제하지는 않은 채 개봉된 이 영화에는 검열로도 채 다 삭제하지 못한 ‘불건전한’ 성적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 (2004)에서 1960년대 후반이 “저속취향의 풍조”를 보이는 “이상 현상”의 시기였다고 규정하면서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가 “서민대중 관객의 저속취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영일이 건전한sound 코미디로 언급했던 것이 사회적 교훈, 경구를 풍자적으로 그린 코미디들임을 감안할 때, 1960년대 후반 코미디가 ‘저속취향’이라고 단정한 이면에는 ‘풍자’하거나, 적어도 ‘풍속’을 그리는 ‘건전’한 코미디가 코미디의 위계상 상위에 놓인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대를 살았던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영일을 비롯한 당대 평론가들이 이 시기의 코미디를 ‘저속취향’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코미디들이, 당대 검열의 언어를 통해 말하자면, 국가가 규율한 ‘명랑’과 ‘건전’으로 수렴되지 않는다고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서민대중’의 ‘취향’을 형성할 정도의 대중적 파급력과 일종의 장르성을 가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영춘이 영화에서 담당했던 역할들이 주로 시골에서 올라온,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노동계급의 남성이었다는 점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서영춘 코미디의 특성은 그가 맡은 캐릭터들의 성적, 계급적 위상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서영춘의 젠더 형상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경우(<여자가 더 좋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부장으로 복권되면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결말(<내 것이 더 좋아>)이라고 해도, 서영춘의 코미디에는 ‘시각적’으로는 여성적인 포지션을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그로테스크한 신체’가 중심에 놓인다.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적 모호함은 특히 1960년대 후반이라는 경직된 시대에 맞닥뜨렸을 때 한층 더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서영춘의 코미디가 직업,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과 같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규범 및 영역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독해될 여지를 남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구봉서의 코미디가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남성성’을 재설정하면서 종결될 때, 서영춘 코미디는 ‘도착적’ 남성성과 성적 에너지를 드러냄으로써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서영춘 캐릭터의 계급성과 이로부터 비롯된 언어적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술했듯이 서영춘은 주로 시골에서 상경하여 곤란에 처한 구직자 역할이나 실직자, 수위, 중국집 배달부, 세탁소 직원 등 도시 하층계급의 저임금 노동자 역할을 맡으면서 비속어, 욕설, 그리고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사용했다. ‘저속’한 언어를 활용한 코미디는 ‘건전’한 코미디가 줄 수 없는 해방감과 일탈의 만족을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소 뻔뻔할 정도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비속한 언어로 감정을 표출함으로 인해, 서영춘이 맡은 캐릭터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거나 간혹 골탕을 먹게 될 때도, 불쌍한 느낌과 연민을 자아내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굳이 비교해서 말하자면, 동일시와 위안의 즐거움이 구봉서 코미디의 몫이었다면, 가학과 위반의 쾌감이 바로 서영춘 코미디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요컨대, 서영춘의 코미디는 성정체성이 모호한 여장 남자,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계급의 남성, 비속어와 욕설, 성적 뉘앙스가 담긴 저급한 언어의 사용 등으로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서의 규율’로서의 ‘명랑’과 ‘건전’을 벗어나는 위반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와 하층 계급 남성의 ‘상’스럽고 생생한 언어는 “성스러운 것, 두려운 것, 권력, 지배체제”로부터의 “해방” 1) 을 선사해주는 것이자 ‘불온한’ 공범자로서의 웃음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영춘의 코미디 스타일은 검열을 통해 ‘저속함’으로 규정되었으나 시대가 강제했던 ‘명랑’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명랑’을 구현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으로써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위반의 쾌락을 근간으로 했던 서영춘 코미디는 ‘명랑하라’는 시대적 명제와 더불어 공생할 수 있었다. 1)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지음, 바흐친의 산문학 , 2006. * 참고문헌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차승기, 이진형 옮김, 바흐친의 산문학 , 책세상, 2006.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 51집, 2016.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도서출판소도, 2004.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마 제목을 보고 먼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 원한의 두 꼽추 >는 무협영화이다. 그렇게 부르기는 했지만 그 시절 충무로에서는 일부러 (해서는 안 될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칼쌈’ 영화라고 부르거나 칼 소리가 부딪친다고 해서 의성어를 빌려 ‘짠짠바라’라고도 불렀다. 물론 이 표현은 일본영화에서 시대활극이나 임협물(任俠物)의 ‘殺陳’ 활극 시퀀스를 부르는 짠바라(チャンバラ)에서 온 말이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무협영화는 1967년 < 풍운의 검객 >으로 일시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다음 < 잡초 > ‘이후’ 그의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진 장르이다. 종종 무기력한 방향상실. 나는 지금 < 뇌검 > < 월하의 검 > < 비검 > < 요검 >, 그리고 < 삼국대협 >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 제목들을 연도별로 순서대로 썼다. 이 영화들이 기괴해 보이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점점 나빠져 갔다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들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시절 연달아 서울에서 개봉한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 >와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 )>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영화적으로 아무런 공명을 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임권택은 이 실패들을 이미 준비된 결과처럼 받아들였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직업감독으로 그저 제안을 받으면 찍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던” 영화들이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권택은 이 영화들을 만들면서 반대로 직업감독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사라져 가는 과정에 놓인 증명은 아닐까. 몰락해가는 영화산업. 참혹한 이중검열. 한국영화에서 1970년 혹은 1971년은 설명하기 까다로운 시간이다. <뇌검> <월하의 검> <삼국대협> 이 영화는 제목이 두 개다. 다른 제목은 <흑룡가의 쌍검>인데 (영진공 시절에 정리한) 예전의 감독 연보에는 두 편의 제목이 마치 다른 영화처럼 각각 등재되어 있었다. 같은 영화사. 같은 감독. 같은 배우, 같은 각본, 같은 촬영. (정리된 문헌에 따르면) 거의 같은 내용. 그래서 처음에는 한 편의 영화 스텝들과 배우들을 이끌고 동시에 두 편의 영화를 만들 줄 알았다. 1970년대에는 종종 그렇게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들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감독이 제작자일 때 스텝들과 배우와 한 편의 영화 계약을 한 다음 시침 뚝 떼고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척하면서 약간씩 대사와 세트를 바꾸면서 두 편의 영화를 찍고 나중에 편집해서 둘로 나누어 개봉했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정리된 자료에서 <흑룡강의 쌍검>이라는 제목은 사라졌고 영화 자막에 올라오는 대로 < 원한의 두 꼽추 >만 남았다. 그런데 사라진 제목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우선 이 영화에는 중국 동북부와 내몽고 국경 사이를 흐르는 헤이룽강(黑龍江)은 고사하고 강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쌍검은 한 명의 무사가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인데 아무도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자루의 검이 각자 나뉘어서 운명을 따라 순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가 되는 천검(天劍)은 단 한 자루의 명검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기구한 운명으로 서로 헤어져 자란 두 쌍둥이 형제를 비유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조롱하듯이 말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좀 기묘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내 관심은 여기에 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 원한의 두 꼽추 >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임권택 에 대해서 미처 다른 영화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거의 외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자포자기가 항상 가로막고 있던 어떤 방어선을 일시적으로 치워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어선? 그렇다. 내가 1960년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약간 추상화된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문법과 다소 두렵다는 듯이 공동체의 운명에 복종하기라도 하는듯한 굴복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공백이다. 서로 비대칭인 둘 사이의 거리는 임권택이 그것을 조선 시대, 혹은 한국전쟁의 전쟁터, 그리고 휴전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려는 데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런 다음 그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임권택은 풍경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보았고, 다시 한 번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의 시간이 근대의 역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밀고 나아갔다. 나는 먼저 임권택이 이상할 정도로 웨스턴 영화들에 대한 열렬한 애호가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물론 웨스턴이 일본 시대활극 영화들을 경유하여 홍콩에 도착했고 그런 다음 대만 무협소설과 결합하여 무협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임권택은 그런 계보에 관심이 없었다. 분명히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 돌아온 왼손잡이 > < 황야의 독수리 >나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를 만들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자신이 본 웨스턴 영화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는 안소니 만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오토 플레밍거를 찾아낼 것이며, 아마 대부분은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스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들은 웨스턴 영화들의 거의 끝나가는 종말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악당들은 이제 더 이상 바깥에서 찾아오지 않으며, 주인공은 불안에 떨고 있고, 정의가 지켜지는 것은 종종 서사의 차원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계보를 그려보는 것은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이다. 하지만 임권택에게 좀 이상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영화의 고전주의가 지닌 우아한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다소 당혹스러워진다. 이를테면 드라마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한순간 그 신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를 몰두하는 것만 같은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예상치 않은 상황이 나타난다. 임권택은 고전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을 가진 것처럼 보존하고 싶어 한다. 단지 이것은 권선징악이라든가 아니면 비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여튼 결말을 맺어야 한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비극은 다른 데서 온다. 임권택은 어떤 경우에도 차라리 주인공이 희생될지언정 세상이 몰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영화에서 기쁜 엔딩이 드문 이유인지도 모른다. 약간 과도할 정도로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가끔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미 바로크 시대에 접어든 웨스턴 영화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명받은 데서 오는 흔적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이 바로크적 미장센들은 1969년 혹은 1972년을 통과하면서 대부분 망가져 버렸다. 장기적인 과정에서 그 자신의 탈색과정, 하지만 일시적으로 그것이 이 시기의 임권택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원한의 두 꼽추>는 이 시기에 놓인 영화이다. 첫번째 시간: 약을 탄 술을 마시는 지원필 두번째 시간: 꼽추가 된 지원필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여기서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한 파편 속에서 무엇을 물구나무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몹시 번잡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다소 따분하지만 도식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우선 세 개의 시간. 첫 번째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다. (이 장면은 이야기 도중에 흑백으로 되돌아간 다음 (flash_back) 진행된다) 검술의 한 유파에서 다음 장문을 가리는 자리인데 사형인 지원필은 가장 무술이 뛰어나지만 장문의 딸인 달래는 그의 경쟁자인 진수왕을 사랑한다. 그래서 장문을 가리는 자리에서 진수왕이 이길 수 있게 음모를 꾸며 지원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척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을 탄 술을 권한다. 지원필은 대결을 하다 쓰러지고 진수왕은 그의 등을 내리쳐 꼽추로 만든다. 뛰어난 무술을 가진 남자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사악한 계획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의 비열한 애인. 공모 앞에서 좌절한 미래의 시간. 그러므로 이 남자는 이제 미래의 시간을 되찾고자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구가 되어버린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벌려놓은 다음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가 영화의 첫 장면이다) 꼽추가 된 지원필이 돌아와 진수왕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무술로는 지원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진수왕에게 그의 아내가 된 달래가 그의 친구인 정태성을 찾아가 모든 검을 잘라버리는 명검 천검(天劍)을 빌려오면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는 검을 빌려 줄 리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빼앗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재촉한다. 새로운 음모. 새로운 적. 새로운 복수의 계열이 여기서 생겨난다. 진수왕은 그의 친구를 죽이고 후환이 두려워 마침 절에서 아이를 낳은 그의 아내까지 참하려 한다. 그의 아내는 쌍둥이 청과 용을 낳았는데 진수왕의 부하들이 절에까지 찾아오자 자신은 청을 감싸 안고, 그리고 하인은 용을 안고 도망친다. 낳자마자 헤어진 형제, 그들의 기구한 사연. 그들은 성장한 다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째 시간의 복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둘로 나뉜 그들 사이를 확인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나를 둘로 나누고 그런 다음 이중으로 동여맨 세 개의 이야기. 아내는 부하들에게 쫓기다가 청을 절에 숨겨놓은 채 자신의 몸만 피신하고, 하인은 용을 나무에 숨겨놓고 부하들의 눈을 자신에 돌린 다음 죽음을 맞는다. 마침 진수왕과 대결을 하러 가던 지원필은 숲에 숨은 진수왕의 부하들과 싸우다가 그만 나무에 숨겨놓은 아이를 적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상처를 입히고 급히 달려간 의원으로부터 이 아이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미처 계산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던 실수. 자신의 원수에게 꼽추가 된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이번에는 자신이 꼽추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운명에 떨어진다. 무엇이 무엇을 삼켜버리고 있는 것일까. 비극 안의 비극. 참극 속의 참극. 죄 값을 받기 위해 찾아간 자가 새로운 죄 값을 치르는 자리에 간다. 지원필은 진수왕과의 대결에서 천검에 그의 칼이 잘리자 몸을 피신한 다음 꼽추가 된 아이와 함께 산에 묻혀 살아간다. 여기까지 영화가 시작된 지 17분 동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시간: 꼽추가 된 용 그런 다음 세 번째 시간이 시작한다. 마치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의 서론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서 갑자기 긴 시간을 건너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벌어질 사건들은 시간의 기호들을 놓고 다투는 해독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꼽추가 된 용은 어른이 되었고 지원필을 아버지로 삼아 산속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청은 산사의 절에서 스님으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고 속세로 돌아온다. 당신이 상상하는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청과 용은 형제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여기에 지원필이 가세해서 진수왕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렇게 풀려나간다면 < 원한의 두 꼽추 >가 당신을 안심시키기는 하겠지만 너무 진부해서 더 이상 볼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세 번째 시간이 복수의 활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임권택 은 차례로 우리의 기대를 차단시킨다. 우선 지원필은 용에게 복수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진수왕에게 복수를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는 그냥 주어진 세계 자체를 인정한다. 그는 마치 복수 대신 다른 어떤 것을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어떤 것? 아버지의 자리.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리. 그는 용이 자기 품에 안겨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게 자신의 진정한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은 지원필로부터 어떤 무술도 전수받지 못했다. 청은 (아마도 과거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하는)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며 속세에 나가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무술을 지닌 고수들이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그러므로 청은 자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동생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 그 둘이 쌍둥이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를 오간 재빠른 이미지의 교환을 통해서(parallel_editing)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중요한 순간은 스승의 교훈이다. 늙은 노승은 청이 지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복수 따위란 처음부터 청이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는 기회를 준다. 의무로부터 풀려난 자유. 하지만 영화가 이제부터 할 일은 당연히 청의 자유를 다시 의무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때 여기에는 정말 그 의무가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뒤따라 올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두 사람을 셈에서 빼놓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은 물론 복수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시간에 돌아온 지원필이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수왕은 친구 정태성의 명검 천검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청과 용은 헤어질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용은 꼽추가 될 이유가 없으며, ...으로 이어질 연쇄적인 사건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용을 키운 지원필은 정반대로 복수를 완전히 포기한다. 그는 용에게 마을로 내려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 이유는 다시는 진수왕과 다시 얽히는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용이 모피를 팔기 위해 마을에 내려가 진수왕의 아들과 만나면서 마찰이 벌어지고 지원필은 자기 발로 진수왕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그 둘 사이의 멋진 대결의 순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지원필은 이미 대결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지팡이에 의지하고 몸을 불균형하게 뒤뚱거리면서 가까스로 진수왕의 성에 이른 다음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용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복수를 포기한 지 오래이며 이미 그럴 수도 없는 처지임을 몇 번이고 호소한다. 여기엔 나중의 결정적 장면을 위한 카타르시스를 상승시키기 위해 무언가 우리를 괴롭히면서 준비된 어떤 카드도 없다. 정말 그는 복수할 의사가 없으며 또한 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오로지 감옥에 갇혀있는 용을 구하겠다는 생각뿐이다. 말하자면 지원필은 여기서 완전히 아버지가 되어있다. 그가 겉보기에는 비루해졌지만 오히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복수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에 누구보다도 충실해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두 번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원한의 두 꼽추 >가 몹시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원인이 있자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통적인 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 부여된 의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고전적인 주인공에로의 어떤 점핑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임권택 은 분명 여기서 카타르시스와 냉소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청과 용의 어머니 두 번째 인물은 아마도 당신이 잠시 잊었을 청과 용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두 번째 시간에서 청을 버리고 무사히 도망쳤으며, 그런 다음 의미심장하게도 용과 청이 진수왕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녀도 마을의 주막을 찾아온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야겠다. 그녀는 청과 함께 마을에 들어선다. 물론 아직 그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마치 거기에 모성의 직감이 작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이 그녀 얼굴로 다가간 카메라(zoom_in)를 통해 드러난 약간의 놀라움을 담은 표정이 말없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야 용이 빼앗긴 모피를 찾기 위해 주막에 찾아오면서 세 사람은 처음 한자리에 모인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두 쌍둥이의 어머니는 청을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용을 볼 때에는 그저 사태를 구경하듯이 쳐다본다. 이 장면만을 떼어놓고 보면 잘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한참을 더 지난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롱 테이크와 마주하게 된다. 문제의 신. 마침내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이자 정태성의 아내를 만났을 때의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장면의 대사는 전부를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임권택은 수없이 잘게 쪼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을 끊지 않고(long_take) 한 번에 찍었다. 지원필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대사를 하고 두 번 마치 심리적인 마음의 동요를 찍는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 다가간(zoom_in) 다음 다시 물러난다(out). 01:06:59 ~ 01:08:18 롱테이크 _ “용을 어디다 숨겼나?” _ “당신이 가진 검법을 용에게 전수해준다는 약속을 해주면 만나게 해드리죠” _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_ “용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진수왕을 죽여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남편의 원혼을 위로해드려야죠” _ “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_ “아직은...” _ “댁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_ “물론...” _ “댁은 내가 용을 어떻게 키웠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핏덩이 어린 것을 그저 안고 비바람 눈보라 치는 긴긴 세월 헤매면서 이집 저집 돌며 동냥젖을 빌어 먹이며...” _ “말씀을 안 하셔도 짐작은 갑니다. 하지만 용은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_ “어린 것을, 그 불쌍한 어린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 _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 _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 드린다면?” _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_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 _ “...물론” 나는 처음에 이 장면 앞에서 몹시 당황한 나머지 이제까지 영화를 보면서 이들 사이의 인물 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했다. 대사를 따라가면서 차례대로 열거해보자. 우선 첫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을 만난 다음 용을 그동안 길러준 것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용을 납치한 사람은 그를 낳은 어머니이다. 그런 다음 기른 아버지를 협박하고 있다. 그녀는 용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용에게 검술을 가르쳐줄 것을 요구한다. 누구라도 반대의 판본을 떠올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지원필이 이제 생모가 나타났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며 내 갈 길을 가야겠소, 그러니 나머지 일은 당신들이 서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난 이미 복수를 포기했소, 라고 해도 사실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다. 그런데도 용의 어머니는 용을 볼모로 삼으면 지원필이 반드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의 이상한 주술관계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여기서 마치 그 두 사람은 부모의 자리가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넷째, 용의 어머니는 용이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그에게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용은 왜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의 행위는 복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용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면 용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다섯 번째, 더 이상한 것은 지원필의 반응이다. 그는 생모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용의 부모는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를 키운 지원필인 것처럼 보인다. 여섯 번째, 가장 이상한 대화는 마지막 순간에 벌어진다. 지원필은 차마 용이 피를 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준다면?”이라고 말을 한다. 잠깐만. 그런데 진수왕은 동시에 지원필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이 꼽추가 된 사연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말하겠다. 여기서 지원필에게 첫 번째 시간의 계열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제부터 지원필은 그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용을 위해서 진수왕과 “죽음 속에 몰아넣는” 대결로 뛰어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용의 어머니이다. “그 불쌍한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 행위는 사실상 자살적 몸짓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을 계산해보고 싶다. 지원필은 복수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경고하는 데 그래도 그걸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용의 어머니는 만일 그걸 할 수 없다면 자식으로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머니로서의 그녀뿐만 아니라 죽은 남편의 아내로서의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다음 가장 이상한 질문과 대답이 등장한다. 지원필은 그래서 자신이 대신 복수를 하겠다는 질문을 하자 용의 어머니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 앞에 약간 멍해졌다. 용은 물건이 아니다. 혹은 금은보화가 아니다. 용은 사람이다.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심지어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먼저 지원필의 뜻을 잘 알기라도 하듯,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한 번 더 반복하자면)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심지어 지원필은 그 대답을 받아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고 다시 묻는다. 용의 어머니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은 다음(zoom_in)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라고 했나요? 그 질문에 대해서 용의 어머니의 올바른 대답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이라는 일망의 망설임이 거기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요구에 대해서 “...물론”이라는 대답이 가져오는 의미의 반사적인 메아리는 얼마나 이상한가. 그 대답에는 만일 당신이 아들을 대신해서 남편의 복수를 수행한다면 나는 기꺼이 아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이 압축되어 있다. 그건 남편의 복수가 아들의 의미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용의 존재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잠시 동안 그 둘 사이에서 어리둥절해진다. 지금 이 두 사람의 거래는 얼핏 보기에는 장르의 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서로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이런 거래를 보는 영화는 무협영화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이다. 그때 이 두 사람은 언제나 아이를 사이에 놓고 낳은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의 만남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어머니가 찾아오고 기른 어머니는 차마 기른 정 때문에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다소 아이러니한 심정으로, 희미하게라도, 하지만 누구라도, 정소영 의 < 미워도 다시 한 번 >을 떠올렸을 것이다. 1968년 7월 16일에 개봉한 다음 가장 유명한 멜로드라마 중의 한편이 된 영화. 어린 아들 김정훈을 사이에 둔 두 엄마 문희와 전계현. 물론 둘의 거래는 여기서 갈라선다. 가난한 형편의 낳은 어머니는 부잣집 기른 어머니를 만난 다음 그녀가 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를 부탁하고 돌아선다. 아이를 낳지 못해 기른 엄마는 낳은 엄마에게 그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맹세한다. 물론 그다음 다시 우여곡절이 있다. 하지만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와 낳은 어머니라는 비대칭을 사이에 둔 다음 고통스럽게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감의 감상적인 눈물을 냉소적으로 뒤틀기 시작한다. 낳은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에게 그 정을 미끼로 하여 자기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얼핏 보면 그녀는 아내로서 충실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비대칭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죽은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포기하는 것과 이제 돌이킬 수 없게 이미 죽은 자신의 헛된 복수를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권했을까. 지금 지원필이 빼앗으려는 것은 사실상 용의 아버지의 자리, 그러니까 용의 어머니의 남편의 자리인 것이다. 차라리 그녀는 용을 지원필로부터 빼앗아 강제로 삭제된 남편의 자리에 돌려보내서 가문을 잇게 만드는 것이 진정해야 할 일이 아닌가. 좀 더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령이 되어버린 남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아들인 용이 가문으로 돌아와 공백을 메울 때 비로소 그녀의 진정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마더>(2009) 그러나 우리를 좀 더 복잡한 심경으로 이끄는 것은 그 둘의 자리 그 자체이다. 우리들에게 모성애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문화의 거의 모든 코드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식에게 희생적이며, 자애롭고, 언제든지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가족 안의 희생양. 이 사랑의 과잉을 실재의 자리에서 가까스로 다룬 영화가 봉준호 의 < 마더 >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이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것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 기른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낳은 어머니를 대립시킨다. 그런데 그 대립은 성립하는 것일까. 누구라도 여기서 멈칫 한 다음 그 둘 사이에 어떤 비밀이 담긴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 건 없다. 이 설명을 위해서 여기에 미처 등장하지 않았지만 셈에 포함시켜야 할 세 번째 등장인물을 생각할 차례이다. 그건 이 자리에 없는 다른 한 명의 쌍둥이 청이다. 내가 영화를 다 본 다음 다소 의아하게 여긴 것은 청과 용 둘 사이에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단 한 번도 구분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는 물론이고 이 순간을 지난 다음 마지막 장면까지 그들은 서로를 부른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이 형제는 끝내 힘을 합쳐 아버지의 원수 진수왕과 싸우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지원필이 힘겹게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의 아들과 싸우는 동안에도 청은 자신의 원수를 위해 용과 싸우다가 (이미 그럴 필요가 지난 서사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목 하나를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청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어떤 때는 지원필과 용을 돕고, 어떤 때는 진수왕의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편을 든다. 마침내 청이 용의 칼에 찔려 숨지면서 그의 옷 속에 숨겨져 있는 형제임을 밝히는 문신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둘은 비로소 포옹한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중인 것일까. 임권택 에게는 기이한 계산법이 있다. 너무나 이상한 계산법. 누군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공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건 계산법 자체를 무시한다면 그 이후를 더 이상 따라오기 힘들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신기하게 바라본 것은 청과 용이 힘을 합치는 대신 죽을 때까지、장르의 컨벤션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정말 죽을 때까지, 그 둘이 마주 싸운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만 남아야 한다는 듯한 칼부림. 이때 이 장면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처음부터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머니는 용에 대해서 별다른 욕심이 없다. 그녀는 두 명의 쌍둥이 중에 청은 알아보면서 용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다음 용이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은 지원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을 담보로 하여 지원필을 협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본 청에게는 단 한 번도 복수를 요구한 적이 없으며 그걸 전달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지금으로 충분하고 앞으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달라는 것만 같은 태도.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 벌어진 이 이상한 채무관계. 이와 비슷한 관계를 임권택 의 영화에서 십 년 후에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영화는 < 길소뜸 >이다. 물론 <길소뜸>과 < 원한의 두 꼽추 > 사이에는 단순하게 시간적인 간극 이상의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요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줄거리의 환기. 낳은 어머니 화영은 한국전쟁 때문에 그만 아들을 피난통에 잃어버린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재혼을 하고 다른 자식들을 낳는다. 그 아이의 아버지 동진은 그녀를 오랜 시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역시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는다. 그런 다음 KBS 방송국이 벌인 이벤트인 ‘이산가족 찾기’를 위해 여의도에 펼쳐놓은 만남의 광장에서 우연히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다. 잃어버린 자식을 함께 찾던 두 사람은 어쩌면 아들일 지도 모르는 석필이라는 사내를 만나러 춘천에 간다. 석필도 결혼을 했고 자식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석필은 고아로 함부로 자랐으며, 교양도 없이 거칠고, 사사건건 화영과 부딪친다. 아니, 그보다 화영은 석필을 보자마자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이 사내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한다. 단지 세월이 이 두 사람을 낯설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인 계급이 어머니와 아들을 갈라놓는다. 그 둘 사이엔 어떤 정도 없다. 석필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며 자신을 어떤 조건도 없이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인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화영은 그걸 느낀다. 이 사내가 지금 자기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복원 혹은 화해)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본다. 화영은 유전자 검사를 요구해서 그걸 구실로 하여 석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다음 현재의 가족들을 만나러 떠난다. <원한의 두 꼽추>의 아들과 어머니 <길소뜸>의 아들과 어머니 두 어머니는 거의 동일한 이유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부정한다. 그것은 그 아들의 사회적으로 추락한 지위이다. 그리고 그 추락의 과정을 통해 학습된 행동이 즉각적으로 거부의 태도를 불러일으킨 다음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좀 더 괴상할 정도의 유사한 장면을 지적할 수 있다. (< 원한의 두 꼽추 >에서) 용은 죽은 동물의 껍질을 벗긴 모피를 들고 와 진수왕의 아들과 흥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머니와의 첫 번째 대면이다. 좀 더 정확하게 용은 어머니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그가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쳐다본다. 서로에 대한 지식의 바깥에 놓여있지만 총체적인 국면의 지식 속에 놓인 그들. (< 길소뜸 >에서) 화영과 동진, 그리고 석필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지나가던 개를 그만 치어 죽인다. 석필은 피 흘리며 죽은 개를 안고 횡재를 한 표정으로 보신탕을 해먹자고 할 때 화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치를 떨며 내다 버리라고 소리 지른다. 여기서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차이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세월의 간극이 이 둘 사이에서 공백의 정치학을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물론 임권택 은 그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역사적인 인과관계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현존재의 시간이 자기 앞에 놓인 공백의 간극과 마주쳤을 때 그 앞에 놓인 가늠할 수 없게 깊은 심연의 무시무시한 재난을 임권택은 영화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그 두 개의 시간을 오간 다음 몸서리치게 쳐다본다. 내 질문은 여기에 있다. 한쪽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되는데(< 길소뜸 >) 다른 한쪽은 어떻게 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장면에서 작동하는 모성애의 기계는 완전하게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여기서 기계라는 말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완전하게 (캉길렘에서 출발하여 푸코를 경유한 다음 가타리를 거쳐 흘러들어 간) 들뢰즈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무언가 잘못 배치된 것 같은 이 장치들은 얼핏 보면 오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그것은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중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순간에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동일하게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이 대답을 임권택의 전기로 덮어쓰고 싶지 않다. 그건 아무 해결도 아닐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복수는 성공적이었다. 지원필은 진수왕이 여전히 천검을 지니고 있는데도 대결 끝에 죽이는 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진수왕과 결혼한 달래를 죽이는 데도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청이 죽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때 청은 이 대결 끝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용과의 싸움에서 죽은 것이다. 그는 죽기 전 끔찍하게도 용의 한쪽 손을 자르는 데 성공한다. 용은 이기기는 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다른 형제로부터 한쪽 손을 잃는다. 이제부터 용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 그 형제로부터 자신의 한쪽 손을 잃었다는 분노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청은 지원필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청이 죽은 것은 지원필에게 어떤 감정도 끌어내지 않는다. 남은 또 한 사람. 쌍둥이의 어머니는 자신의 소원대로 복수에 성공하긴 하지만 자신이 한눈에 알아본 아들 청을 잃고 기꺼이 지원필에게 양보하기로 약속한 용은 살아남는다. 그녀는 분명히 지원필에게 약속했다. 만일 지원필이 대신 복수를 한다면, 그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다음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는 지원필의 요구를 지키지 못했다. 그만 대결 중에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가 끝난 다음이다. 용을 볼모로 지원필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복수를 해준다면 자신이 용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용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지원필과 용, 그리고 용의 어머니가 무수한 시체를 뒤로하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긴 하지만 이 장면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유사 가족의 성립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완전한 파국이다. 마지막 장면, 은실의 시선, 참혹한 쇼트들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pont_of_view)에 있다. 나는 아직까지 거의 이 영화의 서사에서 얼룩에 가까운 한 인물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건 진수왕과 달래 사이의 딸 은실이다. 은실은 지원필이 용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성을 찾아왔을 때 갑자기 등장한다. 그런 다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저 영화에 의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오로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필과 용의 편을 들면서 아버지에게 자비를 요구한다. 나는 이런 장르에서 적의 딸이 갑자기 주인공 혹은 그이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순간을 수없이 알고 있다. 다만 이 서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계열의 탄생. 거기에는 예상치 않게 두 사람 사이에, 혹은 둘 중 한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여기엔 그런 코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은실은 용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는 어떤 기호도 제공하지 않으며, 용은 그녀의 호의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의심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 둘 사이는 어떤 감정의 계산도 없이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희생만이 있는 것만 같은 윤리적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가 은실웰염≠랜옇泉飴句옅개ぐ?#영?사이에서 나눌 감정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임권택 은 사실상 이 서사에서 완전히 외곽에 놓여있는 은실의 시선으로 어느 순간부터 이 마지막 신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시선의 논리에 아주 엄격하게 대응하듯이 차례로 쇼트를 소개한다. 그래서 구태여 서사의 관점으로나 혹은 감정선의 흐름에서나 아니면 리듬의 화음에서 무언가 불균질 하거나 불편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죽은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 둘 사이의 아들의 시체를 은실의 시선으로 차례대로 보여준다. 세 개의 참혹한 쇼트. 딸이 바라보는 부모의 시체. 여동생이 바라보는 오빠의 시체. 그런 다음 떠나가는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실을 보여준다. 그때 우리는 은실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호의는 가장 나쁜 형식으로 돌려받은 것인가.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은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의 시선.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가족 모두를 잃었으며 뿐만 아니라 성의 태수의 딸로서 안락하게 살아가던 삶 전체를 상실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 결말 ‘이후’에 복수를 맹세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녀를 탓할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즉각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원한의 두 꼽추 >는 아직 충분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표면의 설명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권택 의 이상한 계산법에는 어떤 메타 서사가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은밀하게 감춰진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계산법 아래 숨겨진 침묵은 무엇일까. 대부분 숨은 듯이 가려져 있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나타나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나는 수없이 예를 들 수 있다. 이 계산법은 < 화장 >의 마지막 시퀀스에까지 이어진다. 김훈 작가가 미처 쓰지 않은 오상무와 추은주 사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 이상한 작별의 방식, 이때 거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선택의 전도가 있다. 여기에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있는가? 없다. 그러기는커녕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어리둥절해진다. 기른 아버지 지원필은 용을 위해서 모든 희생적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는 용이 자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마을에 내려와 소동을 벌인 끝에 진수왕에게 붙잡히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옛 원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빈다. 달래가 황금불상을 훔쳐오면 교환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둑질을 오로지 용을 위해서 한다. 하지만 황금불상을 훔쳐오는 데 성공을 했음에도 진수왕은 교활하게 지원필이 그 과정에서 무공을 되찾은 것임을 걱정한 나머지 그의 한쪽 팔마저 잘라버린다. 하지만 꼽추에 한쪽 팔마저 잃은 지원필은 이 지경이 되어도 단 한 번도 용을 원망하지 않는다. 당신은 임권택의 계산법이 이 모든 우여곡절을 치르고 난 다음에 낳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제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계산법은 어떤 법칙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극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환상이 침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때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 환상이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계산법이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에서 모든 계산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수식화이다. 핵심은 이 계산법이 어떤 이득을 취하느냐가 아니라 이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임권택은 자신의 계산 과정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때 진실이란 실재의 일부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계산속에서 우리는 임권택이 드러내는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영화의 방법이란 자신의 계산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힘겹게 그 셈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용은 꼽추가 되고 한쪽 손이 잘려나가면서 기꺼이 그 계산의 미끼가 되었다. 나는 <원한의 두 꼽추>를 가혹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맞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공포. 진실이라는 네트워크의 공포. 찢어진 네트워크 사이의 실재의 공포. 무엇보다도 방법의 공포. (계속) 1971년 7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영화 각본 박철민 촬영 구문석 안길원 김택수 한숙 김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