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 감독
- 존 버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라일리 에건, 엘르 에반스, 케이트 맨시, 루 페리그노 주니어, 맥스 덱커
※ “잊혀진 미래의 영화” 본문( 링크 )에 대한 각주들을 모은 페이지입니다. 위 링크의 본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 본문에 삽입된 각주를 별도 페이지( 링크 )로 정리했습니다. 위 링크에 연결된 각주 페이지를 본 페이지와 나란히 놓아두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이 글은 2000년 겨울,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두었던 글을 2024년 겨울에 수정한 글이다. 과거, 문자로 남겨진 이 미완성 영화를, 현재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읽고 듣고 보며, 미래의 눈과 귀로 만들어지길 희망하였다. 이 가능성을 하나의 ‘포스트-시네마’ *주1 로 꿈꾸며 이전 글을 다시 손보고 주석을 추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면,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의 강과 산들을 둘러보셨으면 이제 부디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을 놓을 것입니다.” 1866년, 조선을 찾아온 이유를 그에게 물으니,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월식을 관찰하러 왔을 뿐’이라고 답했다. *주2 1958년, 그 *주3 는 다시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시대에 취해 있지 않은 유예된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는 지나가며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겼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그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취약한 슬픔을 바라보았다.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눈부신 어둠 속에서 월식을 관찰하던 그에게 ‘어떻게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는지’ 묻자, ‘빛나는 해와 그 빛을 반영하는 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시간을 찾아보라’라는 말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하여 나는 2019년 겨울, 어둠 속의 월식이 아닌 밝음 속의 일식을 찾아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도시 트링코말리(Trincomalee)로 떠났다. 이 여정은 그의 시선에 대한 나의 답장이다. 그의 편지 *주4 는 ‘인간의 얼굴과 선한 고양이는 태양이며 달’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의 편지는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를 향해 돌아보던 하나의 얼굴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마주친 낯선 궤적을 사라져가는 우리의 언어로 담는다. 우리의 언어는 지진 통신(seismic communication)이다. 그중 영화는 움직이는 빛의 그림자로 태어났다. *주5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영화는 빛을 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섬광을 더듬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희망과 절망을 엮어 어떤 기억을 다시 쓰고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트링코말리의 한 작은 마을, 이곳에서 우리는 2004년 12월 26일 *주6 에 일어난 금환일식을 추적한다. 어둠 나라에서 파견된 불개가 이번에는 태양을 삼켜보지만, 너무 뜨거워 다시 뱉어낸다. 일식의 그림자는 15년 후 같은 날 *주7 이곳을 휩쓴 지진 해일을 기억하며 노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를 부른다. 해와 달이 나뭇잎을 연주하며 지구에 떨구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말 알-딘 알-파리시(Kamal al-Din al-Farisi), 이븐 알-하이삼의 『광학의 서』 개정판 Kitab Tanqih al-Manazi (The Revision of Ibn al-Haytham's Optics) 필사본, 1309. “이것은 시각이 작동하는 원리- 수천 년 전 까마귀가 본 것을 중국에서 묵자(墨子) *주8 가 메기가 본 것을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주9 가 두꺼비가 본 것을 아랍에서 이븐 알 하이삼(Ibn al-Haytham) *주10 이 기록하였네” 까마귀는 쉬운 희망과 값싼 절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래한다. 메기는 후퇴하여 돌아온 곳을 새로운 곳으로 만들며 다시 나아가기 위해 노래한다. 두꺼비는 동굴 신화 속 그늘 아래 은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래한다. 게임의 규칙 1. 세 개의 산(山) 정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바라본다. 2. 눈을 감는다. 겜마 프리시우스(Gemma Frisius), 천문학과 기하학 광선(De radio astronomico et geometrico), 1545. - 그 순간 색이 반전되고, 하늘은 어두워지며, 그림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주11 어둠이 실종된 밤 - 구석과 구석 사이에서 우리는 귀 기울여 침묵을 끌어안는다. 새로운 것을 능숙하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관점을 서툴게 취하며- 적정 거리를 찾기 위해 시선의 속도를 끊임없이 바꿔가며- 빛으로 시든 눈을 드러나는 어둠으로 씻는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을 엮고 찰나의 시간 축을 빌어 겹쳐진 실천적 기억 속 마주친 얼굴들, 기적들, 감각들, 구석들을 낯설고도 낯익은 시선으로 새긴다. 낯선 존재를 낯익은 감각으로 낯익은 존재를 낯선 감각으로- 코다(Coda) - 네 개의 벽 안에서 *주12 조용하고 소박한 작은 방, 뚫을 수 없는 그림자, 응답 없는 그림자; 깊은 생각, 슬픈 노래; 뛰는 마음 속 소중한 희망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먼 행복에 대한 움직임 없는 시선 많은 의심과 많은 인내심 여기, 나의 밤, 고독의 밤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도둑맞은 편지 속 이야기다.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광고 홍보물 (사진: Museum Crush )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덤프리스(Dumfries), 1836년 덤프리스와 맥스웰타운 천문학 협회 (Dumfries and Maxwelltown Astronomical Society)는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풍차를 개조하여 핼리 혜성(Halley's Comet)을 관측하기 위한 망원경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설치하였다. *주13 우리는 이 오래된 어둠의 공간 안에서 실종된 밤을 탐색한다. 어두울수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우리는 물구나무를 서고 내부의 바깥쪽과 외부의 안쪽을 바라본다. 우리는 파편적 순간 속 길 가는 사람으로서 취약한 슬픔들을 바라본다. 순간 순간의 고요한 비행 가운데, 나의 슬픔과 같은 너의 슬픔이 있는지. 너의 슬픔과 같은 나의 슬픔이 있는지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우주의 구멍 아닌 구멍 지각할 수 없는 기묘한 천체 - 블랙홀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큐라 우리는 이곳에서 블랙홀 *주14 의 그림자를 겹쳐가며 그 적정 속도와 거리를 찾는다.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증언하지 않는 이 위태로운 시대를 말하지 않고 말하며, 보지 않고 바라본다. 우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이 작은 방 에서 우리의 회환을 감광제와 섞고 톱밥을 가득 채워 박제한다. 사건의 지평선 속 기억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공명하는 순간들을 현상한다. ‘너희가 눈멀었다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말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 *주15 라는 외침에 조응하며-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 속 깊이 새긴 기억조차 떠도는 섬망의 언어인 것을 기억하며- 광기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건져내 지나간 그림자의 반영을 이어 붙이며 - 언젠가 그는 행복이라 부르던 순간을 화산재로 짠 장막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행복을 볼 수 없다면 적어도 어둠을 볼 것’ *주16 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비균질적인 이미지의 표면 위에 어둠을 함께 밝힌다. 우리의 밤은 이 암흑의 빛 속에서 후퇴한 그림자의 목소리를 말없이 조절한다. 우리의 지각이 후퇴하고 탈선하고 겹쳐질 때 이 어둠 속 구멍 이면에는 어떤 잔상이 있을까? 우리는 이 유예된 그림자에 여전히 같은 감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병렬하고 교차하는 시간은 우리의 취약한 기억을 다시 쓸 수 있을까? 겸허하면서도 눈부신 시선들 사이를 우리는 어떻게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이 여정의 끝에는 우정이 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주17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경계는 없지만 한계가 있는 끝은 없지만 유한한 - 밤이 스스로 그 문을 연다. 어둠과 침묵 속 다정한 밤 - 그 운동과 정지 사이 현전과 부재 사이 도둑맞은 우리의 편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필자 제공, 2019년 12월 29일 금환일식, 트링코말리 *** 주1. ‘포스트-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필름 매체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며 기술 장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선형적으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 문화 산업으로 생산된 경제 상품으로서의 가치, 혹은 권력의 정치적 작동 수단으로 도구화된 역사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포스트-시네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영화의 원형으로 돌아가 다가올 ‘포스트-시네마’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주2. 앙리 쥐베르, 「조선 원정기」,《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군인 앙리 쥐베르(M.H Zuber)는 사관으로 강화도 원정에 출정하였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 및 풍습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1873년 프랑스 여행 전문 주간지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에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주3. 프랑스의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는 1958년 프랑스 대표단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 그는 이때 남긴 사진과 글을 엮어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을 쇠이유(Seuil)출판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한국에는 눈빛 출판사가 1989년 「북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집을 번역 출간하였다. 주4. 크리스 마커는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를 사진집 『한국인(Coréennes)』 마지막에 실었다. 주5. 움직이고 변하는 그림자로서의 영화; 끊임없이 여러 존재를 변증법적으로 비추고 반영하는 영화.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 직물을 짜고, 풀고, 다시 짜기를 반복하는 영화. 우리 안의 타자를 위한 빈 공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영화. 복수의 힘과 규칙이 복합적으로 배치되는 사회적 혼합물로서의 영화. 움직이는 시적 감각과 사유가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는 가변적 구성물로서의 영화. 주6.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에서 진도 9.0 지진에 의해 발생한 쓰나미는 총 12개국에 전례 없는 사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쓰나미다. 사망자 숫자만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주7. 2019년 12월 26일 오전 8시 10분부터 11시 26분까지 스리랑카에서 금환일식이 관측되었다. 달이 태양의 중심을 완전히 가리지만, 달의 그림자가 태양보다 작아 태양의 가장자리가 원형 빛으로 남는 불의 고리는 9시 38분부터 2분 43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두 사건의 시점을 교차하여 이야기한다. 주8. 기원전 400년경 중국의 철학자 묵자는 빛이 바늘구멍을 통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대상의 반전된 이미지가 어두운 방 안에 만들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핀홀 현상(Pinhole effect)을 최초로 기록한 역사로 여겨진다. 주9. 기원전 350년경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나뭇잎의 겹쳐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핀홀 현상이 관찰된다고 기록하였다. 주10. 기원후 935년경 태어난 아랍의 물리학자 이븐 알 하이삼은 현대 광학의 아버지이다. 세계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만들어 일식을 관찰하고,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11. 『한국인(Coréennes)』의 여섯 번째 장 「아홉 뮤즈」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썼다. 주12.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연가곡 ‘태양 없이(Song cycle Sunless, 1874)’의 첫 번째 곡 ‘네 개의 벽 안에서(Within Four Walls)’를 인용하였다. 주13.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지역 역사 박물관에는 1836년 이래로 지금까지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 옵스큐라가 있다. 처음에는 천문학 협회의 연구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851년부터는 박물관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였다. 주14. 1997년 크리스 마커는 『한국인(Coréennes)』을 재발간할 때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들어간 후기를 추가한다. "알렉산더 메드베드킨(Alexander Medvedkin)에게 헌정한 영화에서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한다. 인류 역사상 우리와 같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마치 천문학에서의 ‘검은 별들’과 같아요. 제 삶은 이런 블랙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운 좋게도 블랙홀 반대편에서 폭탄을 맞을 수 있었던 우리는 블랙홀의 실패의 깊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주15.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주16. 1983년 크리스 마커의 영화 < 태양 없이 Sans Soleil (Sunless) > 속 문장을 다시 썼다. 주17. 크리스 마커의 ‘고양이 G에게 보내는 편지’ 속 문장을 인용하였다. 임고은(영화감독, 시각예술가) l 영화를 둘러싼 시선의 주체와 객체,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엮어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최근에는 야생을 회복하기 위한 시적인 언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신분을 초월한 세 사람의 우정 영화를 여러 번 보다 보면 처음에는 눈에 안 들어왔던 것들이 보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만 집중하느라 알아채지 못했던 소피와 엘로이즈 마리안느 이 셋의 관계가 그랬다. 백작 부인이 없는 동안 그 세 사람은 신분을 초월한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생리나 임신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서로 돕는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라고 하는 대사가 있다. 나는 이 대사가 세 여자들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이 셋은 예술가와 뮤즈, 귀족과 하녀가 아닌 친구로 지낸다. 나는 그것을 셋이서 함께 있는 장면에서 많이 느꼈다. 소피가 십자수를 하는 동안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모습이나 셋이 함께 약초를 캐는 장면, 카드 게임을 하는 장면 등 여러 번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처음에는 카드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가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촬영 기법 때문이었다. 세 사람을 똑같은 위치에서 하나의 쇼트에 넣는다든지 단독 쇼트에서도 카메라 앵글의 크기를 같게 함으로써 마리안느, 소피, 엘로이즈가 평등하게 공존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카메라의 의도가 돋보인다. 계급사회가 배경인 영화들을 많이 봐왔는데 귀족과 하녀가 가까이 지내는 것은 봤어도 이렇게까지 평등한 위치해 있는 것은 못 본 것 같아 새로웠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인터뷰 중에 이에 대해 ‘평등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계급을 넘어선 하인 소피와의 우정, 욕망과 열망을 지닌 백작부인과의 대화 같은 것들. 인물들 간의 연대와 정직함을 원했다.’고 말했다. 완전한 여성 서사 이 영화 속의 페미니즘과 여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러닝 타임인 120분에서 남성이 나오는 장면은 58초가 끝이다. 소피 아이의 아빠나 엘로이즈가 결혼할 남자, 엘로이즈의 아버지 등 남자들의 서사는 물론 얼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새로움과 신선함을 느꼈던 이유인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오롯이 여성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여성 서사 영화가 많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대화 중에서 여성 화가로서 활동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마리안느는 ‘여성 화가의 활동은 제한되어 있고, 중요한 주제들도 전부 여성을 비껴간다’며 직접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다. 찾아보니 마리안느가 미술을 가르치는 학생들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18세기에는 여성 화가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여성 예술가들의 권리가 조금씩 신장되던 시기였지만 여성 화가의 작품은 전시에 출품할 수 없었다. 마리안느가 전시에 작품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낸 것처럼, 여성 작가들 또한 글을 남성의 이름으로 냈다고 한다. 대를 잇는 정략결혼과 억압의 역사 정략결혼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 당시에 여성이 억압받던 시대상을 잘 드러냈다. 엘로이즈의 언니가 원치 않는 결혼 대신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엘로이즈가 대신 결혼하게 된 것도 상징적인 부분인 것 같다. 엘로이즈가 언니의 대체품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도 그랬듯이 언니와 엘로이즈도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여성 억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 원해요?’ 임신 중단이라는 소재가 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소재를 담담하게 그려낸 것도 인상 깊다. 위에서 언급했건 것처럼 소피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언급하지도 않고 괴로워하는 여성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소피가 낙태 시술을 받는 장면에서 소피의 옆에 아기를 둔 연출도 기억에 남는다. 소피가 아기에게 위로를 받지만 임신 중절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은 가지지 않고 그저 소피의 선택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 당시에 하녀는 출산을 당연하게 해야 하는 존재였을 수도 있는데, 마리안느가 소피에게 아이를 원하냐고 질문한 것이, 또 원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대답에 소피를 도운 것이 출산에서의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는 장면인 것 같다. 소피와 아기를 함께 둔 것이 잔인하다는 사람의 글을 보았는데, 임신 중절을 단순히 살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술 모습을 그리려는 장면도 기억에 남았다. 마리안느는 보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리지만 엘로이즈는 그 모습을 보라고 한다. 여성에게 금기된 행위를 부정적으로 여겨 지우려고 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이 확실히 다른 영화에서 다루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여성이 보는 여성 간의 사랑 셀린 시아마 감독은 여성 성소수자로서 여성들 간의 사랑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다뤘는데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그게 보였다. 타오르는 영화의 초상 gv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질문 중에 하나가 ‘둘은 언제 사랑에 빠졌나’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 <캐롤> 에서 나오는 것처럼 첫눈에 반한다거나 하는 말 그대로 ‘영화적인’ 설정이 없다. 관객들은 언제부터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는지, 엘로이즈가 처음으로 마리안느에게 키스하고 싶었던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둘이 점점 더 사랑에 빠지고 있다는 것은 눈에 잘 보인다. 처음의 엘로이즈는 분노가 늘 이긴다며 잘 웃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어머니에게 그녀가 좀처럼 웃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웃음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 포즈를 취할 때 마리안느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을 보며 둘은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굉장히 현실적으로 여성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싸우는 장면이다. 영화를 볼 때는 이 장면의 감정선을 잘 따라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만약에 남성과 여성인 상황이었으면 이 장면이 의아하지 않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글이었다. 연인이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 싸우는 장면은 사실 아주 많이 봐온 모습인데 둘 다 여성인 연인의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느꼈던 이질감인 것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들처럼 여성에 대한 대상화도 없고 보기 편안한 여성 서사 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재회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정말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못봤을지’였다. 마지막에 본 엘로이즈의 모습이 사실 마리안느의 환영이라는 의견도 보았다. 계속 시선이 평등하게 오고 가는 편집에서 갑자기 극적인 줌인이 어색했고, 마리안느가 이전에 보았던 엘로이즈의 환영이 복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또 엘로이즈가 혼자 올 리가 없는데 혼자였다는 것도 근거가 되었다. 이 의견도 정말 재미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혼자 있으면 자유롭다고 해주었는데, 마리안느는 사계 여름 3악장의 뒷부분을 듣기 위해, 마리안느를 생각하며 자유를 느끼기 위해 혼자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는 곳은 항상 참 재미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엘로이즈가 카메라와 눈이 마주치고 끝나는 결말이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이야기의 끝을 매듭짓는 느낌이 아니었을 것 같다. 원래의 결말이 관객들에게 생각할 만한 여지를 주고 오랫동안 줌 인을 하는 것도 긴 시간이었는데 지루하다거나 그런 느낌 없이 내내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다. 이 영화는 혼자 생각하고 상상할 부분이 많았고, 나는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소피는 두 사람 관계를 눈치챘을지 같은 사소한 부분부터 마지막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정말 마리안느를 보지 못했는지, 둘은 어떤 방식으로 평생 동안 그 5일간의 기억을 추억할지 같은 오래 생각할만한 부분까지 궁금한 점도 많았기에 여러 번 보며 곱씹고 싶은 영화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