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드림! 로젤리아 에피소드Ⅱ: 송 아이 엠
- 감독
- 코다이 카키모토, 미무라 아츠시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아이바 아이나, 쿠도 하루카, 나카시마 유키, 사쿠라가와 메구, 시자키 카논
① 군산좌(群山座), 군산극장(群山劇場) 군산좌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군산부 노정(蘆町)에 있었으며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191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되는데 1926년 당시 군산좌의 좌주는 시마다(島田元三郞)였다. 그는 낡고 오래된 극장을 개축하려 시도하던 중 실패하였고 1929년 극장은 폐쇄된다. 이 무렵 군산 유지 미츠토미(光富嘉八) 등이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극장을 개복동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군산극장이라 지었다. 1932년 8월 군산극장은 채무 문제로 경매에 붙여졌고, 마쓰오(松尾仁平)가 낙찰 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군산극장은 조선인 상설관으로 활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오(松尾仁平)이며 객석수는 61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② 희소관(喜笑館) 군산부 개복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와카미(河上榮)이며 지배인은 히로노(博野登四郞)였으나 화재를 당해 폐관 상태였다. 해방 직전 다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전주좌(全州座), 전주극장(全州劇場), 제국관(帝國館) 전주 지역의 오래된 극장으로 191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무렵엔 이미 시설이 낙후해서 폐쇄된 상태로 새로운 극장 신축을 위한 조합이 조직되어 극장을 건설 중에 있었다. 전주부 대정정에 새로 건설된 극장의 이름은 전주극장으로 정해졌다. 전주극장에서는 각종 공연과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1934년 초등생도음악회 이후 제국관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츠나카 시게루(松永茂), 지배인은 마츠나카 키요시(松永潔)였으며 객석은 76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④ 이리좌(裡里座) 이리읍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14년 4월 개관했다. 1928년 2월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좌주는 가토(加藤方)이었다. 같은 해 7월 말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무라(三村德太郞)이며 좌석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⑤ 김제좌(金堤座) 김제읍 본정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2년 10월 25일 김제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극장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진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34년 8월 삼남수해활동사진이 이곳에서 상영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곽용훈(郭鎔勳)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⑥ 소화극장(昭和劇場)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7년 이곳에서 황군위문학예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광평(창씨명 金本光平)이고 지배인은 우에다(植田英二)였다. 객석수는 3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⑦ 남원극장(南原劇場), 보국관(報國館) 남원극장은 1931년 4월 낙성한 극장이다. 적은 비용으로 건립되었기에 시설과 설비가 좋지 못했다. 1936년 당시 관주인 최두일이 4천 8백원을 투입하여 수리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이름을 보국관이라 바꾸었고, 해방 후 다시 남원극장으로 개칭하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쿠니사다(國定豊)였으며 객석수는 428석이었다. ⑧ 추산좌(秋山座) 정읍군 정읍읍에 있었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2년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명규, 지배인은 아라이(新井純二郞)였다. 좌석수는 355석이었다. 다음은 전라남도지역이다. ⑨ 광주좌(光州座) 광주 최초의 극장으로 광주읍 황금정에 있었다. 1918년 이곳에서 집회를 개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양한 집회와 연극, 영화 상영이 펼쳐졌던 이곳은 1931년 11월 8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당시 관주는 후지가와(藤川)였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⑩ 광남관(光南館), 제국관(帝國館) 광남관은 1927년 설립된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다. 조선인 활동사진관이 없었기에 광남관의 전속 영사기사 조명덕(趙明德)은 1927년 연말에 이 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시민위안영화대회를 열었다. 그는 영사기사, 악사, 변사로 구성된 광주영화삼우회(光州映畵三友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0년에 그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으며 다양한 집회장소와 흥행장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로세(黑瀨豊藏), 지배인은 미에(彌榮正己)였으며 좌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광주극장(光州劇場) 호남 갑부 최선진 외 4명의 사람들이 자본금 30만원 불입금 7만 5천원의 주식회사 광주극장을 조직하여 세운 영화관이다. 광주부 본정에 위치했으며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최선진이며 지배인은 미야가와(宮川昌信)였다. 객석은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상반좌(常盤座), 목포극장(木浦劇場) 상반좌는 목포의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2월 고토 료스케 일좌(後藤良介一座)의 공연과 1916년 5월 어대례활동사진배관회(御大禮活動寫眞拜觀會)가 이곳에서 있었다. 이와 같은 각종 행사를 비롯해 형설회나 토월회 같은 조선인 흥행단의 공연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1926년 11월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목포극장으로 바꾸었다. 김성두, 이상근과 같은 조선인 변사를 두고 있었으며 미국 유니버설회사와 특약을 맺고 있었다. 1934년 김원희(金源喜)가 인수하였으며 이후 2만 3천원의 예산으로 대개축을 하였다. 1936년 대대적인 수리가 끝났고 이후 목포극장은 광주극장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자리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무라(木村巴茂)였으며 7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희락관(喜樂館), 평화관(平和館) 희락관은 목포의 활동사진관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21년 통영청년회활동사진대일행이 이곳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의 유일한 활동사진상설관이던 희락관은 1926년 소실되었다. 희락관이 사라진 후 1927년 8월 새롭게 영화관이 신축된다. 새로운 영화관의 이름은 평화관이었다. 쇼치쿠 영화 중심의 흥행장으로 목포부 무안통에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모토(森本政治郞), 지배인은 모리모토(森本淸)이며 객석수는 513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여수극장(麗水劇場) 여수에 극장을 지으려는 시도는 1925년부터 있었다. 부사옥구락부(富士屋俱樂部)와 영좌(榮座)라는 극장이 있었으나 가설극장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상설관의 건립은 1930년 시작된다. 여수의 일본인 니로(新納寅太郞)가 극장 여수좌(麗水座)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상설 극장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1월부터 여수극장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기 시작한다. 1943년 현재 여수극장의 흥행주는 나카무라(中村克己)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순천구락부(順天俱樂部), 순천극장(順天劇場) 1933년 1월 조선신문에 실린 순천구락부의 새해 광고에 극장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사무네(正宗義智), 키자키(木崎義男), 무라카미(村上義一), 타케우치(武內罷) 등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1937년 7월 13일에는 순천극장이 개관한다. 순천 거주 일본인들의 발기로 3만원을 들여 극장을 지은 것이다. 순천극장의 건립과 함께 순천구락부는 사라진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마사무네(正宗義智)이다. 순천극장은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송정리극장(松汀里劇場)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 있었다.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현재 광주극장 운영자 최선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객석 수는 407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⑰ 창심관(暢心館),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 제주도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창심관(暢心館)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5년 1월 23일 영화 상영 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이어서 만들어진 극장이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이다. 1940년경에 개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제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무라(二村守彦)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제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9.28. 광주극장 개관, 十월 一일부터 【광주】 조선에서 제일을 자랑할 만한 광주극장(光州劇場)은 당지 갑부 최선진(崔善鎭)씨 외 四명의 주식회사로서 총건축비 八만여원이란 거액을 들여 약 一년간을 두고 건축 중이든 바 근근 준공을 보게 되여 오는 十월 一일 부(府) 승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일부터 개관을 하게 만단 준비 중이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5.10.04. 광주극장 준공, 一일에 개관 【광주】 기공 중이든 광주극장은 이에 준공을 마치엇슴으로 十월 一일부터 개관하고 동일(同日)은 관계자 수백명을 초대하야 개관의 피로공연이 잇섯든 바, 동 극장은 천이백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수 잇는 당당한 철근 『콩크리-트』 二층 건물로 본정 五정목의 한 위관(偉觀)을 이루고 잇는데 그 총 공비 七만 五천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야 무대는 회전식 八간(間)의 대규모의 것으로 사장은 최선진(崔善鎭)씨 취체역에 유연상(劉演相) 조규림(趙圭林)의 양씨, 감사역에는 김희성(金喜誠)씨가 취임하기로 되엇다. [자료] 《매일신보》, 1931.04.27. 신축 중의 남원극장, 낙성식 거행 【전주】 작추(昨秋) 이래 신축공사를 급진(急進)하야 오든 전북 남원극장은 이 사이 겨우 준공됨을 ᄯᅡ 라 지난 二十일 오후 七시부터 당지 소방조(消防組) 주최로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얏는데 당일 관람객은 남녀 수천여명에 달하야 장외 장내는 입추의 여지도 업시 대혼잡을 극(極)하야 남원 유사 이래 초유(初有)의 성황을 정(呈)하얏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2.03.09. 군산에 우복(又復) 대화(大火), 극장 등 삼동(三棟) 전소(全燒), 七일 새벽 군산좌에서 발화, 손해는 약 三만원 【군산】 화신(火神)의 작란인지? 지난 三일에 군산 영정(榮町)에서 손해액 二만 二천원의 손실을 보는 큰 화재가 이러남은 본보가 솔선하야 보도한 바이어니와 지난 七일 새벽 一시 四십분 군산부 노정(盧町) 군산좌(群山座)(그전 극장)에서 불이 이러나자 ᄯᅢ 맛침 맹렬한 바람은 소방대의 출동도 못 밋처 부근은 큰 불바다가 되야 여섯 채의 집을 전소하고 세 채의 집을 반소하얏스며 전신주 한 개를 반소하야 손해액은 三만 천원에 달한 큰 화재인바 금년으로 二三일을 격하야 발행한 대화이니만큼 그 원인을 조사 중인바 군산좌주 도전원삼랑(島田元三郞)은 극장으로 쓰든 군산좌의 집을 오래동안 묵혀 비어둔 것으로써 일전에야 화재보험액 一만원을 가입한 관게와 그 집에서 불이 난 것을 미루어 색안경으로써 보게 되는 의혹이 불무하야 방금 군산경찰은 엄중히 조사 중이라 하며 소실된 가옥은 군산좌(群山座)와 동해루(東海樓)라는 중국료리점과 그에 린접한 집 一동 세 집과, 반소로는 주다야여관(ジタヤ)과 서천(西川) 모의 주택과 송미세탁소(松尾洗濯所)라고 한다. (사진은 화재현장 광경) [자료] 《매일신보》, 1913.05.01. 소인연예회(素人演藝會) 별항(別項)과 여(如)히 당지 소방조합에서는 소방용으로 정호(井戶) 16개소를 부내 적의(適宜)의 처(處)에 굴반(掘鎜)하기로 결정한 바 우(右)의 비용은 六白원을 요(要)할터인즉 차(此)를 충(充)하기 위하야 소인연예회를 개(開)하고 기(其) 수익으로 기부한 사(事)로 안무(安武)관리자 급(及) 의원 기타 유력자의 찬조를 득(得)하야 금회 인가를 득하야 래(來) 五월 二일부터 四일 ᄭᅡ 지 三일간 전주좌에셔 개최한다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8.11.12. 극장개관기념식 목포부 죽동(竹洞)에 잇는 목포극장은 목포의 유일한 오락기관으로 유관오(柳官五)씨가 경영하여 오는 바 지난 八일은 동관의 二주년 개관 기념일임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하야 최저요금으로 명화를 영사하얏는데 입장자는 무려 六白명의 대성황을 정(呈)하얏스며 관람자에게 시상 추첨이 잇섯다는데 一등 一인에 금완권(金腕卷) 시계 一개, 二등 二인 은배(銀盃) 각 一개식, 三등 五인 수건 각 이타식(二打式) 주엇다더라. 【목포】
시작부터 알 수가 없다. 개들의 사진을 비추며 주인공 니나가와 스미무라씨는 ‘개는 주인을 고를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말로 시작한다. 영화는 일본 어촌의 작은 마을 쿠로시오쵸의 장을 뽑는 선거를 따라간다. 김지영 감독의 프로듀서 경력이 있는 니나가와 스미무라씨는 살고 있던 교토에서 이사하여 선거에 출마한다. 지역 유지 출신의 두 후보에 맞서 제3의 후보를 자처하며, 자칫 뻔할 수 있는 투표 전 변수로 등장하며 선거 결과를 오리무중에 빠뜨린다. 쇠락한 지역 경제를 위해 새로운 청사를 짓자는 상대 후보의 공약을, 스미무라씨는 건설업자의 이권 챙기기로 단언하며, 자신은 의원 정수를 200명으로 10배 늘려서 젊은이들을 고향에 되돌아오게 하겠다는 뜬금없는 공약을 내세운다. 선거전을 취재하는 기자에게 스미무라씨는 ‘똥고집에, 제멋대로에, 여자 좋아하고, 일 처리 방법이 엉망이긴 해도 어떻게든 결과는 낸다는 특징이 있는 트러블 메이커’로 보인다. 어찌 됐건 본격 선거로 접어들어, 후보 등록부터 유세까지 스미무라씨는 능숙하게(?) 혼자 해낸다. 그는 여러 지역의 선거에 출마한 경험이 있어, 복잡한 선거운동 절차와 방법에도 꿋꿋이 선거운동을 해 나간다. ‘선거는 즐거워야 한다’는 지론대로 노인들과 (투표권이 없어 보이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유세를 한다. 스미무라씨는 ‘고령자투성이의 멸망한 지역`인 쿠로시오쵸에 왜 출마했을까? 왜 ‘선거는 남자의 로망’이라고 하는 걸까? 그는 ‘미래’를 만들고 싶어했다. 예전엔 젊은이들이 타지로 돈 벌러 나갔지만 경제불황인 지금은 타지로 나가봤자 일자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타지에서 미래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고향인 이곳을 떠올리게 하고 싶다고 했다. 쇠락한 마을엔 신축건물이 아니라 젊은이가, 젊은이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젊은이들에게 투자해 되돌아오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스미무라씨의 ‘미래’ 만들기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 말미, 선거 때 보낸 엽서가 무더기로 반송되어 온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노인만 남은 마을에 엽서를 받을 사람들이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인가? 아니면 보스가 이끄는 대로 투표하는 ‘개의 선거’에 불과한가? 스미무라씨는 민주주의는 최악의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스미무라씨가 노인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도 알게 된다. ‘노인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은 스미무라씨의 좌충우돌 선거 출마 과정을 연출, 촬영, 편집, 사운드, 자막, 번역하며 한편의 블랙코미디로 완성해 냈다. 이 영화는 한국의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 프랑스 asian connection film festival in Lyon, 이탈리아 ASIATICAFILMMEDIALE, 콜롬비아 Muestra Internacional Documental 등에서 소개되었다.
지금까지 본 애니메이션 DB사이트 「애니Db」에 칼럼과 애니메이션 추천 글을 몇 번 써왔는데,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 집중하고자 했다. (※원고 후반부 리스트 참조)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싶다. 필자는 1995년부터 여러 잡지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글을 연재해왔는데, 그 중에는 몇 가지 집중적으로 주목해온 테마가 존재한다. ‘한국 작품의 해외 진출’ 등과 같은 테마가 그것인데, 또 하나 애니메이션계에서 여성 스태프의 역할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이번 글에서는 특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애니메이션 작품을 제작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여성 애니메이터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남성 중심의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국내외를 막론하고, 단편애니메이션이 아닌 상업 작품에서는 여성 스태프의 역할이 주로 작화나 각본 분야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즉 캐릭터 디자이너라든지 원화와 동화 등 작화 부분, 그리고 스토리를 쓰는 각본 분야에는 여성 스태프도 많지만, 작품 전체를 통괄하는 ‘감독’이나 제작을 책임지는 ‘프로듀서’ 등의 파트에는 여성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참고로 일본의 TV애니메이션에는 작품 전체의 감독을 ‘시리즈 감독’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와 구분하는 의미에서 각 화별 연출담당을 ‘연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일본의 TV애니메이션의 경우 ‘연출’이라 불리우는 직함이 보통 국내에서 사용되는 ‘감독’과는 조금 다른 의미일 수 있는데, 이 ‘연출’ 부분에는 여성 연출자도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존재해왔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예를 들어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나 『기동전사 건담』의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 공각기동대 』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나 『 신세기 에반겔리온 』의 안노 히데아키 감독 등에 해당하는 ‘감독’은 대개 남성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일본에서 현저한 상황이었는데, ‘00년대’도 끝나 2010년대에 접어든 현재 이 경향이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있지 않나 생각되어 그 부분을 살펴보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일본의 여성 애니메이터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 애니메이션계에는 전통적으로 여성 스태프가 주로 캐릭터디자이너나 작화 감독, 혹은 원화나 동화 담당 등 작화 분야에 존재해왔다. 『 마법의 천사 크리미마미 』(국내 제목 『천사소녀 새롬이』)와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 등의 작품에서 캐릭터디자인을 맡은 타카다 아케미(高田明美), 『미소녀전사 세일러문』과 『세일러문 R』, 『애천사전설 웨딩피치』의 캐릭터디자이너 타다노 카즈코(只野和子), 소위 ‘용자 시리즈’ 중의 일부(『 전설의 용자 다간 』『용자특급 마이트가인』『용자경찰 제이데카』)와 『 마법기사 레이어스 』의 작화감독(일부는 캐릭터디자인까지)을 맡은 이시다 아츠코(石田敦子) 등이 그런 사례이다. 『시티 헌터』 시리즈와 『아르스란 전기(Arslan戰記)』(『아루스란 전기』라고도 표기)의 캐릭터디자인을 맡았고 『루팡 3세 PartⅢ』, 『기동전사 건담ZZ』 등에서는 몇몇 화의 작화감독을 맡은 카미무라 사치코(神村幸子) 역시 일본에서 여성 애니메이터로 유명한 인물이다. 타카하시 쿠미코(高橋久美子) 역시 『시티 헌터』 시리즈에서 작화감독을 맡은 후 『도쿄 BABYLON(바빌론)』『 카드캡터 사쿠라 』 등 만화가집단 CLAMP(클램프) 작품을 애니메이션화할 때 캐릭터디자인·작화감독을 맡은 바 있다. 최근에는 『오란고교 호스트부』『기동전사 건담 UC(유니콘)』에서 캐릭터디자인을 맡았다. 이노마타 무츠미(いのまたむつみ)는 주로 일러스트레이터로 더 많이 활동했는데, 초기에 『 전국마신 고쇼군 』『시티 헌터』에 각화별 작화감독으로 참여하고 『 윈다리아 』『마경전설 아크로번치』『프라레스 산시로』에 캐릭터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았다.또 『우주황자』『바람의 대륙』『퓨처 그랑프리(GPX) 사이버 포뮬러』『브레인 파워드』에 캐릭터원안으로 참가했다. 나카지마 아츠코(中嶋敦子)는 『 란마 1/2 』『 체포하겠어 』 시리즈에서 캐릭터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았고, 『하멜의 바이올린』『트리니티 블러드』『프린세스 프린세스』에서 캐릭터디자인을 맡은 베테랑 애니메이터다. 하야시 아케미(林明美)의 경우에는 거의 주로 원화나 각화별 작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애니메이터인데, 『너스앤젤(간호천사) 리리카 SOS』『 소녀혁명 우테나 』 등이 대표작이다. 『 후르츠 바스켓 』에서는 캐릭터디자인과 총작화감독도 맡았고, 『극장판 소녀혁명 우테나 애덜레센스(Adolescence) 묵시록』에서는 작화감독을 맡은 바 있다. 야마모토 사와코(山本佐和子)는 여성 애니메이터로서 메카닉에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사라키』『진키 익스텐드』『슈퍼로봇대전 OG -디 인스펙터-』에서 메카닉 작화감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 밖에는 『지옥소녀』『학생회의 일존』『전설의 용자의 전설』 등에도 각화별 작화감독으로 참여한 바 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 세인트 세이야 』(다른 번역 제목 『성투사 성시』)의 히메노 미치(姬野美智)도 마찬가지로 작화 분야의 유명한 인물이다. 히메노 미치는 『꽃의 아이 룽룽』, 『 베르사이유의 장미 』 등 1979∼1980년 작품에서부터 캐릭터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았던 베테랑으로, 최근에는 『 유☆희☆왕 』 시리즈의 캐릭터디자인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더 많은 여성 애니메이터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너에게 닿기를』 시리즈에서 캐릭터디자인과 총작화감독, 각화별 작화감독 등을 맡은 시바타 유카(柴田由香), 『12국기』『미도리의 나날』『영국사랑이야기 엠마』 등에서 캐릭터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은 쿠스모토 유코(楠本祐子), 『강철천사 쿠루미』『플라네테스』『브레이브 스토리』 등에서 캐릭터디자인과 총작화감독을,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시리즈에서 메인 애니메이터와 총작화감독을 맡은 치바 유리코(千羽由利子) 등이 그 예이다. ■일본의 여성 애니메이션 감독 위에 소개한 것 이외에도 작화 분야에서는 많은 여성 애니메이터가 활약했고, 그밖에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 애니메이터의 이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주지한 바와 같다. 하지만 유독 작품 전체를 통괄하는 ‘감독’이나 작품의 기획 단계를 진행하는 ‘프로듀서’라는 직함에서만큼은 여성 감독의 이름을 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소녀만화(국내에서는 주로 ‘순정만화’로 분류되는) 원작 작품이나, 여성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조차도 감독은 남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여성 애니메이션 팬은 남성 대상의 작품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았고, 혹은 캐릭터 중심의 팬, 성우 팬으로 넘어가는 케이스도 적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다. 애니메이션의 여성 팬들에게서 소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소위 ‘BL(보이즈러브)’ 패러디나 동인지가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에는 어쩌면, 이와 같이 작품 기획 단계에서는 철저하게 남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특성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공고한 듯 보이던 남성 중심의 애니메이션 감독직에 여성이 기용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났끼 때문이다. 우선 1990년대에 애니메이션 작품의 감독을 맡은 여성으로서는 『마루코는 아홉살(꼬마 마루코)』 시리즈의 스다 유미코(須田裕美子), 『YAWARA!(야와라)』『 미라클 걸즈 』『쾌감 프레이즈』의 토키타 히로코(ときたひろこ), 『미소의 세상(키코 스마일)』의 시부이치 세츠코(四分一節子), 그러던 것이, 『에비츄』(1999년), 『부탁해! 마이멜로디』 시리즈(2005년~2009년), 『탐정오페라 밀키홈즈』(2010년)의 모리와키 마코토(森脇眞琴), 『 최종병기 그녀 』(2002년), 『리스토란테 파라디조』(2009년)에서 감독을 맡은 카세 미츠코(加瀨充子), 『신백설공주 전설 프리티아』(2001년), 『뱀파이어 기사』(2008년), 『스킵 비트!』(2008년)의 사야마 키요코(佐山聖子) 등 점점 TV시리즈를 연출하는 여성 감독이 늘어나는 추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점점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주류적인 히트작을 내놓는 여성 감독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물론 위에 언급한 작품 중에도 『부탁해! 마이멜로디』(모리와키 마코토 감독)는 4년 이상 이어진 장편이고, 그 이전의 『마루코는 아홉살』(스다 유미코 감독), 『미소의 세상』(시부이치 세츠코 감독) 역시 1년 이상의 장편 TV애니메이션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전부 유아 내지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징이 있다. 『YAWARA!』『미라클 걸즈』의 토키타 히로코 감독 정도가 예외적으로 아동용이 아닌 장편 TV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는 예외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2000년대 후반 이후에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2000년대~2010년대의 일본 여성 애니메이션 감독 2000년대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게임의 화제작으로서 관심을 모은 『쓰르라미 울 적에』의 TV시리즈(2006~2007년), 그리고 유명한 『 노다메 칸타빌레 』 시리즈(2008~2010년)는 콘 치아키(今千秋) 감독 작품이다. 콘 치아키 감독은 그 외에도 『순정 로맨티카』 시리즈(2008년), 『괭이갈매기 울 적에』(2009년)도 연출했다. 『AIR(에어)』『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러키☆스타』『CLANNAD(클라나드)』에서 원화를 맡았던 야마다 나오코(山田尙子)가 첫 감독 작품으로 내놓은 『케이온!』은 2009년과 2010년에 일본 애니메이션 최대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초대형 인기작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2011년 개봉 예정인 『 케이온! 』의 극장판 감독으로도 내정되어 있고,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연출자로서 자리잡고 있다. TV판은 아니지만, 2006년에야 애니메이션 업계에 데뷔한 1985년생의 젊은 마츠모토 리에(松本理惠)는 경력의 대부분이 『두 사람은 프리큐어』 시리즈 뿐인데, 2010년 『영화 하트 캐치 프리큐어! 꽃의 도시에서 패션쇼…인가요!?』로 약관 25세에 시리즈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발탁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2000년대 후반 이후 주목받는 여성 애니메이션이 늘어나고 있는데,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1990년대에도 이미 여성 애니메이션 감독은 존재했으나 대형 히트작을 담당한 경우가 없었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에 비해 크게 달라진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전까지의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의 특징으로 여성 캐릭터의 기호성(소위 ‘모에’, ‘츤데레’ 등)이나 데이터베이스성(아즈마 히로키 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등의 서적을 참조할 것)이란 측면이 주로 지적받았던 점은, 어쩌면 남성 중심의 연출이 일반적이었던 2000년대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특징과도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케이온!』과 『쓰르라미 울 적에』로 여성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주목받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계가 어떤 변화를 보일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케이온!』으로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2009년 일본의 잡지 「오리콘 biz」와의 인터뷰에서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기호화되기 쉬운데, 그런 단어(분류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면서 작화 담당자에게 애니메이션의 여자 캐릭터가 자주 하는 포즈를 금지하는 등의 변화를 주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케이온!』은 기존의 남성 애니메이션 팬들에게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초대형 히트작이 되었기 때문에, 캐릭터의 ‘기호화’를 쓰지 않고도 인기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명을 한 셈이니 향후 업계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궁금하다. ■여성 애니메이션 감독과 사회 변화 출판만화나 문학에서는(일본에서는 세계 최고(最古)의 장편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겐지 이야기』의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부터가 여성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당연히 존재해왔던 것이 여성 작가인데, 크리에이터 단독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르에서는 당연했던 여성의 존재가 집단 제작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단체를 통솔하는 역할인 감독으로서 드물었던 것은 결국 일본 사회에서의 여성이 가지는 위상과 연관이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만화연구서 『만화! 문화 사회학적 읽기』(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년 발행)의 공동저자인 최흡은 2011년 1월 20일에 열린 「망가: 일본만화의 새로운 표현」전 심포지엄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같은 예술 작품이 사회 변화를 반영한다는 사회학 이론을 소개하면서 그 사례로 작중의 여성 인물의 위상 변화에 관해 지적한 바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30년 이상 시리즈가 이어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시대별 여성 캐릭터를 망라하여 그 특징을 설명했는데, 1979년 발표된 『기동전사 건담』에서는 군대 내의 여성 캐릭터가 주로 통신을 담당하는 통신사였고 로봇의 파일럿이나 전함의 함장을 맡은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임시직 정도의 대우였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던 것이 1985~1987년의 『기동전사 Z건담』『기동전사 건담ZZ』에서는 정식 파일럿이나 메카닉 기술자로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2년의 『기동전사 건담 SEED』에 이르러서는 여성 캐릭터가 군대 내에서 함장이나 부함장 등 ‘지도자’ 역할로도 등장하게 되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2007년 작품 『기동전사 건담 00(더블오)』에서도 마찬가지로서, 70년대로부터 8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이르면서 여성 캐릭터가 점점 전문직으로, 커리어우먼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애니메이션 작품 내에서의 여성 캐릭터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업계 내에서의 변화에도 시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을까. 여성이 단순한 동화나 채색을 담당하던 것에서 캐릭터디자인이나 각본과 같은 전문직으로, 나아가서는 집단을 통솔하는 지휘자로서도 변화해온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내부의 변화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사회학적인 연구에도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