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라: 악령의 부활
- 감독
- 댄 앨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티파니-엘렌 로빈슨, 빅토르 토스, 베카 히라니, 리타 시디퀴, 조지아 우드
< 작은 빛 >(2018)은 독학으로 영화를 익힌 조민재 감독이 각본, 연출, 편집을 도맡아 만든 첫 작품이다. 소박하고 겸손한 제목처럼 영화는 가녀린 빛을 향해 더디지만 진중한 행로를 따라간다. 주인공 진무는 뇌수술로 인해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을 캠코더에 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엄마의 고향집이다. 주변 건물에 둘러싸인 데다 서향인 탓에 좀처럼 빛이 들지 않는 허름한 음지의 집이다. 영화는 고향집을 거점으로 진무가 다른 가족 구성원인 누나와 형을 찾아다니는 과정을 따라간다. 여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 가족들에게는 미움과 원망의 대상인 아버지의 무덤에 나무뿌리가 박혀있어 이장을 해야 하는 과정이 얹혀 있다. 진무의 수술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여서 과거의 상처를 헤집고 화해하는 서사로 흐를 것 같지만, 의외로 영화 속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장면이 없음에 주목하자. 어머니는 홀로 식당일을 하며 고향에서 살아가고, 누나는 이혼한 채 아들을 홀로 키우는 워킹 맘이며, 배다른 형은 자동차수리소에서 일하며 그 자신의 어머니와 산다. 하나의 단란한 가족으로 묶이기 어려운 이들의 사정은 정도의 고향집 벽에 걸린 가족의 사진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벽에는 가족들이 모여 찍은 사진인 소위 ‘가족사진’이 없다. 대신 크기와 스타일이 제각각인 사진들이 걸려있는데 감독은 얼룩진 벽의 이미지만으로 가족의 과거 내력을 자연스럽게 추측케 한다. 다른 벽에 있는 낡은 전기 전깃줄에는 온통 테이프가 붙어있는데 가까스로 허물어지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처지를 즉물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영화가 주는 정서는 일반적인 가족드라마와는 다르게 어딘가 이질적이다. 스토리 전개로 이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실 <작은 빛>은 자연스러운 시간 순서로 진행되는 영화도 아니며 끝내 전후 관계가 불분명한 장면들도 존재한다. 가령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저해하는 장면이 중간에 불쑥 틈입하는데, 이는 흔히 영화에서 과거 회상을 보여주는 플래시백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앞서 말했듯 <작은 빛>은 진무가 자신의 캠코더로 가족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그렇기에 우리는 영화 전체를 보여주는 감독의 카메라 외에 진무의 캠코더로 찍힌 조악한 화질의 장면도 때로 보게 된다. 그런 탓에 이러한 당혹스러운 장면들이 있다. 진무가 햇빛이 들어와 잠자리에서 일어나 밥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다. 서사적으로는 자연스럽지만 진무가 잠에서 깨는 곳은 그가 홀로 사는 옥탑방이고, 밥을 먹는 곳은 고향집으로 이 장면은 어머니가 캠코더를 들고 찍은 장면이다. 한편 형의 집에서 자려고 잠자리에 든 다음 장면에 고향집에 누나와 엄마 등 가족이 모인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다음날이 아니라 형에게 캠코더에 담긴 가족의 근황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이어 같은 날 밤 잠자리에서 일어나 캠코더를 보는 형제의 모습이 비친다. 다음으로 누나의 집에서 고장 난 가구를 고쳐주는 장면 다음에 고향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밥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캠코더 장면은 다들 쓸쓸히 살아가는 가족들이 캠코더를 통해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무, 엄마, 누나, 형, 조카는 영화 속 단 한 번도 한 장소에 모이는 법이 없지만 진무의 캠코더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다른 지면에서 <작은 빛>이 카메라를 통해 기억의 잠상을 드러내는 ‘현상’의 영화이자, 본래의 요소로 돌아가기 위한 ‘환원’의 영화라고 언급했다. 진무가 캠코더로 가족을 찍는 것은 오랫동안 묵혀왔던 그들의 삶의 기억들을 드러내는 현상의 과정이고, 아버지의 무덤을 열어 20년 넘게 썩지 않은 아버지의 시체를 썰어 이장하는 과정은 본질을 되돌아보는 환원의 과정이라는 취지였다. 당시 미처 부연하지 못했던 바가 있는데, 이는 카메라와 빛의 점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의 화면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등장한다. 하나는 진무가 든 캠코더로 이를 통해 진무는 자신과 가족을 찍고, 때로는 가족이 진무를 찍는다. 영화의 중간에 다른 하나의 카메라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짐에서 발견한 필름 카메라다. 그리고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카메라, 즉 감독의 카메라가 있다. 이 카메라는 캠코더로 자신을 찍는 진무를 찍는다. 또는 이 카메라는 진무가 돌아간 다음 쓸쓸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형과 누나의 모습을 찍는다. 영화는 카메라들을 통해 진무의 병을 계기로 이들이 다시 모이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엔 관심이 없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두운 밤바다에 저 멀리 등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가녀린 안도를 주기만, 여전히 강퍅한 삶을 감당하며 고독을 감내해야 할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한편 카메라는 가족의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단속적이며 돌발적인 흐름이 있는데 관련해서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고향집 형광등이 낡아서 고친 후에 시험 삼아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장면이다. 껐다 켜는 스위치의 소리가 연속되는 동안 암전에 이어 멀리 떨어진 형과 누나의 가족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치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흰 바람벽에 그가 ‘귀애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이 명멸하는 것처럼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는 마지막 가족들의 사진이 걸린 벽을 배경으로 한 정도와 엄마의 장면에서 멈춘다. 둘째는 아버지의 카메라와 함께 과거 사진이 삽입된 장면이다. 사진이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이어 장면은 사진과 카메라를 발견했던 과거 고향집의 부감 숏으로 이어지며 어두운 밤에 정도가 카메라의 플래시를 연속해서 터뜨리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명멸하는 빛의 이미지 속에서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암전이며, 암전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양태를 만들어낸 ‘부재하는 기원’인 아버지와도 통한다. 하지만 나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추념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혹은 반대로 그를 무시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미이라가 된 아버지의 시체를 톱으로 조각내 새로운 장소에 이장하는 행위, 즉 공손하면서도 불경한 관여를 통해 다시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에 깔린 의도라고 보았다. 명멸하는 가녀린 빛 속에서 이미지들을 부여잡는 태도 속에서, 굳건하지만 부드럽고 과묵하면서도 소박한 근성이랄까 기품 같은 것을 보게 된다. 비록 첫 작품이기는 하지만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조급하지 않고, 영화 속 체험에 깊이 잠입해 그 정서적 경험에 우리를 조응시켜가는 뚝심에서 그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 섬뜩한 이미지들이 많으니 심약한 분들은 주의를 요합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주기는 파란만장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장르는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상상력은 다양했다. < 악의 꽃 >(1961, 이용민)처럼 흡혈 식물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고, < 불가사리 >(1962, 김명제)와 < 대괴수 용가리 >(1967, 김기덕)같은 괴수 영화도 있었다.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던 이용민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 살인마 >(1965)나 < 목 없는 미녀 >(1966) 같은 걸작을 내놓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권철휘)는 한국 공포영화의 정전이 되었고, 유현목 감독의 <한>(1967)은 큰 흥행을 기록하며 ‘옴니버스 호러’의 전통을 세웠고 속편으로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영화사였던 신필름도 이 장르에 결코 무관하지 않았는데 < 천년호 >(1969, 신상옥), < 사녀 >(1969, 신상옥)는 당대의 흥행작이었다. 박윤교 감독의 <마계의 딸>(1983) 1960년대에 ‘준 메이저’ 장르로 시작한 한국 호러는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용민, 박윤교, 이유섭, 김인수 등의 감독들이 꾸준히 작품을 이어갔고 사극의 서브 장르로서 1960년대의 유산을 양적으로 확장시켰다. < 설야의 여곡성 >(1972, 임원직), < 며느리의 한 >(1972, 박윤교) 등이 이때 등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크리처 쪽으로 트렌드 변화가 왔다. < 반수반인 >(1975, 김기)의 늑대 인간, < 정형미인 >(1975, 장일호)의 고양이 인간, < 원무 >(1976, 박윤교)의 미이라 등 더 이상 소복을 입지 않는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대만, 홍콩, 필리핀, 태국 등과도 합작이 활발히 이뤄졌다.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는 귀신의 손길. <삼국여한>(1982. 김인수)의 한 장면. <깊은 밤 갑자기>(1981. 고영남)의 이기선은 세련되면서도 당돌하지만 한편으론 백치미를 지닌, 복합적 이미지의 배우였다. 1980년대 마지막 호러인 <하녀의 방>(1987. 김인수). 이 시기에 이르면 호러와 에로의 경계를 거의 무너진다. 1980년대 호러의 가장 큰 특징은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의 경향이다. 즉 ‘노골적인 상업영화’라는 강력한 상업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한국영화의 산업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1970년대에는 크리처와 합작이 그 타개책이었다면, 1980년대엔 에로티시즘과 하드고어였다. 1980년대 호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신 표현 수위의 강도를 상승시키며 생존하려 했다. ‘여인의 한과 피맺힌 복수’라는 전통적 가치는 오롯이 살아 있지만, 그 정서와 방법론과 비주얼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에로틱 호러’의 창궐은 시대정신에 발맞춘 것이었다.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불기 시작한 ‘살색 열풍’은 모든 장르를 잠식했다. 단지 ‘야한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크게 보면 ‘선정주의’의 확장이었다. 성적 표현뿐만 아니었다. 액션 스펙터클이든 폭력 묘사든 감정 표출이든 ‘80년대식 표현’은 이전에 비해 한두 눈금 더 올라가 있었고, 호러 장르는 그 표현에 최적의 토양이었다. 당대의 에로티시즘 영화와 일맥상통했던 ‘1980년대산 호러’는 비주얼의 관능성과 폭력성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김인수 감독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1990년대엔 비디오 시장으로 건너가 <젖 소부인 바람났네 >(1995)를 연출하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는, 1980년대에 마치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끈적끈적한 공포영화를 선보였다. 그가 1982년에 연출한 < 삼국여한 >의 예고편 문구인 “치정과 욕정이 얽힌 성인용 공포 드라마”는 당대 공포영화 감독들의 좌우명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호러였던 <삼국여한>은 단순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도착적 성을 다룬 ‘섹스 과잉 공포’로서 여기에 하드고어를 결합했다. 그의 < 미녀 공동묘지 >(1985)에는 시체와의 섹스까지 등장하니, 1980년대 한국 호러의 성적 상상력은 에로티시즘에서 사도마조히즘을 거쳐 네크로맨틱에 이르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호러 장인’ 박윤교 감독의 < 춘색호곡 >(1981)의 오프닝도 ‘섹슈얼 호러’라 불러도 될 만큼, 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고 < 천년백랑 >(1983)에서는 근친적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춘색호곡>과 <한녀>(1981, 이유섭)의 ‘귀신 액션’. 스타일과 비주얼도 더욱 자극적이며 적나라한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호러와 무협 액션의 결합이었다. 이 시기 귀신들에게 텀블링은 기본이었으며 피아노 줄을 달고 경공술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춘색호곡>은 대표적이며, 한중일 콘셉트의 옴니버스 영화인 만큼 <삼국여한>은 중국식 무협과 사무라이 액션 등을 선보였다. 남기남 감독의 < 흑삼귀 >(1985)는 강시 영화를 좀 더 하드고어 버전으로 만든 듯한데, 1970년대 액션 전문 배우였던 권영문이 등장하며, 도사 캐릭터의 활약이 펼쳐진다. <천년백랑>의 후반부는 호러보다는 무협 액션에 가깝다. <깊은 밤 갑자기>는 다양한 광학 효과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효과는 1980년대 호러의 클리셰였다. <천년백랑>에서 사람이 여우로 변하는 장면. 디졸브를 이용해 꽤 그럴듯하게 변신을 표현한다. <공포의 축제>와 <월하의 사미인곡>. 특수분장의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호러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삼원녀>의 잘린 팔과 <제4의 공포>의 잘린 머리. 다양한 효과들이 호러 장르의 시각적 쾌감을 위해 사용되었다. 1980년대 호러는, 지금 보면 약간 조잡하게도 느껴지지만 다양한 광학 효과를 통해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화면을 흐리는 블러 효과를 비롯, 렌즈를 통해 왜상을 만들고 프리즘 효과를 냈으며, 이중노출이나 디졸브 등을 통해 변신이나 빙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엔 대부분 자극적인 사운드가 결합되어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더했다. 특수효과와 특수분장도 빼놓을 수 없다. 소복 소매에서 흰 연기가 나오는 <원한의 공동묘지> 스타일의 초보적 수준도 있었지만, 때론 실감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 분야의 기술적 발전 역사에서 1980년대는 초기에 해당하는데, 자본의 취약성에 때문에 그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공포영화가 원하던 ‘쎈’ 표현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켰다. 신체를 절단하고 괴물 같은 얼굴을 필요로 했던 하드고어 콘셉트가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다. 특히 김철석(특수효과)과 장인한(분장)이 만난 < 월녀의 한 >(1980, 김인수), < 마계의 딸 >(1983, 박윤교), < 제4의 공포 >(1984, 노진섭), < 월하의 사미인곡 >(1985, 박윤교) 등은 이 분야의 초석이 된 작품들이다. 기술적 발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영화도 있다. 김인수 감독의 <제4의 공포>와 < 공포의 축제 >(1986)는 기형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 한녀 >(1981, 이유섭)은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성형 수술을 소재로 한다. < 삼원녀 >(1981, 김시현)와 <삼국여한>엔 팔이나 머리가 잘리는 신체 절단 요소가 있으며, <월하의 사미인곡>이나 <여곡성> 등 1980년대 중반 사극 호러에 오면 더욱 괴물 같은 메이크업을 선보인다. <관 속의 드라큘라>와 <흡혈귀 야녀>. 서양의 뱀파이어 캐릭터는 1980년대에 직접 도입되거나 귀신으로 변형된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인 <괴시>, 좀비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육체의 문>. <제4의 공포>와 <여곡성>. 메이크업을 통한 섬뜩한 ‘괴물적 캐릭터’의 탄생. ‘스네이크플로이테이션 무비’(snakeploitation)라고 불러도 무방할 <인사대전>. 이 영화에서 뱀은 무차별한 학살의 대상이며, 건물 한 채를 혼란에 빠뜨리는 재난의 원인이며, 인간과 액션 대결을 하는 가공할 만한 크리처다. 1960~70년대의 전통적 공포영화에서 벗어나 더욱 자극적인 요소로 호소하려는 1980년대 호러의 노력 중 하나는 이국적 요소의 도입이었다. 중국인 며느리의 한을 담은 <삼원녀>나 중국과 일본의 요소를 끌어들인 <삼국여한>, 혹은 국적 불명의 <흑삼귀> 등은 대표적이다. 여기에 한동안 한국영화에선 선보이지 않았거나 최초로 등장하는 호러 크리처들이 등장했다. 흡혈귀들이 대표적인데, 사극 공포영화에서 여자 귀신들은 종종 흡혈을 하며 <삼국여한>에는 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는 귀신마저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영화는 < 관 속의 드라큘라 >(1982, 이형표)다. 영미권의 호러 캐릭터인 드라큘라를 도입해 한국적 맥락에서 퇴마를 가한다. < 흡혈귀 야녀 >(1981, 김인수)는 기존의 사극 귀신에 흡혈의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결합시킨다. 좀비 영화도 등장한다. < 괴시 >(1981, 강범구)는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평가되는데, 해충 박멸을 위한 초음파 실험이 시체들을 깨어나게 한다는 설정이다(방사능이 원인이 되었던 조지 로메로의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1968)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기환 감독의 <육체의 문>(1981)엔 좀비 연쇄살인마가 등장해 여자들을 연달아 살해한다. <제4의 공포>엔 화상으로 흉측한 얼굴을 지니게 된 남자가 마치 미이라처럼 얼굴을 붕대로 휘감고 등장하며, <여곡성>엔 괴물처럼 변해버린 마님이 등장한다. 독사에 물린 여자가 뱀파이어가 되는 < 몽녀한 >(1984, 강범구)과 기형 인간이 등장하는 <공포의 축제>도 언급할 만한 영화다. 동물들도 한몫 했다. 고양이, 뱀, 까마귀 등의 동물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한의 매개체’가 되는 전통적 소재였는데 1980년대에 와서는 더욱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학살’의 대상이 된 것. 홍콩과의 합작 영화인 < 인사대전 >(1983, 김선경)은 < 홀로코스트 >(1980, 루게로 데오타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많은 뱀들을 무차별로 죽인다. <원한의 공동묘지>에선 수많은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런 살풍경은 이전 호러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잔인한 스펙터클이었다. <여곡성>엔 전설의 ‘지렁이 국수’ 장면이 있다. <망령의 웨딩 드레스>의 계단 신. 김기영 감독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무당의 딸인 하녀는 주술적 위력과 함께 섹슈얼한 힘으로 집을 장악한다. 1980년대 공포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별장이나 외딴 곳의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이른바 ‘맨션 호러’의 등장이다. 할리우드의 ‘하우스 호러’가 집에 깃든 악령이나 저주로부터 섬뜩한 기운을 가져온다면, ‘맨션 호러’는 집 자체에 영혼을 부여하진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서 억울한 죽음과 복수극이 벌어진다. 그런 면에서 < 하녀 >(1960, 김기영)나 < 마의 계단 >(1964, 이만희) 같은 1960년대 한국 스릴러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듯하다. 1980년대 ‘맨션 호러’는 공포 장르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 속에서 과거의 유산을 되살리는 시도였다. 그 전형은 < 망령의 웨딩드레스 >(1981, 박윤교)다. 회사를 운영하는 남자는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여자를 자신의 별장 하녀로 고용한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마치 <하녀>의 하녀처럼 남자를 차지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남자는 여자를 죽이고 우물에 던져버리지만, 마치 <마의 계단>처럼 그녀는 다시 출몰한다. 귀신인지 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구도는 < 귀화산장 >(1981, 이두용)에서 병원장과 간호사의 관계로 변주되며, <깊은 밤 갑자기>에선 주술적 요소가 가해진다. 특히 <깊은 밤 갑자기>는 전원 저택의 안주인(김영애)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망상 속에서 미쳐가는 여성을 보여준다. <살인마>를 리메이크 한 < 목없는 여 살인마 >(1985, 김영한). 외딴 폐가와 병원을 오가는 <제4의 공포> 등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들. 한편 < 악녀의 밀실 >(1984, 김선경)이나 < 요색유희 >(1985, 강대선)는 집에 깃든 악령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80년대, 작게나마 호러 전문 배우진이 형성된다. 정세혁과 박암은 대표적. 사진은 <망령의 웨딩 드레스>와 <삼국여한>이다. <미녀 공동묘지>의 진봉진과 곽은경. 그들도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다. 1980년대 호러엔 이국적 이미지의 배우들이 종종 등장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괴시>의 유광옥, <여곡성>의 홍명진, <월녀의 한>의 박병순, <제4의 공포>의 정현숙. 서양의 호러가 가톨릭 사제를 주로 퇴마사로 내세운다면, 한국의 공포영화엔 대사나 법사의 존재가 있었고 십자가 대신 불교의 상징인 ‘卍’(만)이 있었다. <여곡성>과 <월녀의 한>에 등장하는 ‘卍’.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흥행을 위해 좀 더 강렬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침체와 낙후한 자본 구조 속에서 장르적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클리셰를 반복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충무로에서 더 이상 호러는 생산되지 않는 멸종 상황에 이르며, 이 암흑기는 < 여고괴담 >(1998, 박기형)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진다. 10년 넘게 제작되지 않은 셈인데, <여고괴담>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왕성하게 부활한 호러는 2010년 이후엔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한국영화의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흥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장르, 호러. 지금은 잠시 침체되었지만 언제 또 새로운 모습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등장할지 모른다. <원한의 공동묘지>의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자막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원한은 죽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맴돌고 있다.”
# 1 (Tracking) 런던, 테이트 모던 4층의 한 전시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급하다. 사이렌의 목소리에 최면이 걸린 듯싶다. 오스카 피싱어Oskar Fischinger의 작품이 소개된다는 정보만 한 줄 주워듣고는, 안내 데스크에는 묻지도 않고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몇 층인지, 몇 번째 전시실인지 확인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스스로의 발걸음에 나머지 몸은 따라갈 뿐이었다. # 2 (Close-Up) 칸딘스키와 후앙 미로의 추상화, 그 속에서 환청으로 들려오는 음률. 모홀리 나기의 흑백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빛의 안무. 무작정 향한 그 전시실 (“Structure and Clarity”)은 평소에도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기존의 회화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모로 공들였던 결과물들로 들어찬 상설 전시관이었다. 몇 개의 파티션을 지나서 비로소 멈추어 섰다.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자리. # 3 (Black Out) 까만 파티션 벽을 따라 들어가다 꺾어져야 비로소 그곳이 나온다. 일반 작품들이 걸려있는 전시 공간 속에서는 쉽사리 알아챌 수 없는 곳. 마치 벽 속 어딘가에서 홀연 나타나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블랙홀과도 같다. 들어가는 순간 공간은 컴컴하고, 오직 한쪽 벽면에 우주의 모습이 펼쳐진다. 긴 전시벽 한편을 가득 채운 세 개의 스크린, 그 면을 제외하고는 직육면체 공간의 나머지 다섯 면은 암흑 속에 비어있다. 대신 인도네시아의 전통 음악 Gamelan이 진공 속 우주를 채운다. # 4 (Multiple-Composition) 오스카 피싱어의 < Raumlichtkunst (Space-Light-Art) >는 이처럼 비로소 현재의 관(람)객을 만난다. 그 작품은 그렇게 기획되었다.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스크린 (영화 시대의 삼면화)에 영사되면서, 라이브 음악을 동반하는 작품. 각각의 스크린 위에는 오스카 피싱어의 작업을 대표하는 이미지들?구상과 추상, 기하학적 구성과 비정형성의 운동?이 각자만의 리듬감을 지니면서 어우러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애초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각 이미지들은 파편들이었고, 여러 개의 필름 릴 속에서 뒤엉켜 있었다. 피싱어 자신도 그 어떤 완결된 형태를 규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현재의 아티스트들이 미디어 아트, 비디오 아트, 설치 미술,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포스트 미디엄 아트, 확장 영화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하더라도, 약 85년 전에 피싱어가 구상한 프로젝트 앞에서는 여전히 설익어 뵌다. # 5 (Insert) 필름 복원(학)의 최고 권위자인 파울로 체르치 우사이Paolo Cherchi Usai는 잠언서와도 같은 <영화의 죽음: 역사, 문화적 기억, 디지털 암흑 시대 The Death of Cinema: History, Cultural Memory and the Digital Dark Age> (2001)라는 책의 상당 부분을 필름의 물리적 죽음에 관련한 이미지들로 병치하였다. 필름도 사람처럼 제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만다. 디지털 시대의 복원은 미라를 방부 처리하던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한창때의 생기 그대로를 가지고, 더이상 소멸과 손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생불사하는 경지. 하지만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미이라, 박제일 뿐이다. 피싱어의 작품은 적어도 테이트 전시실 속에서는 환생하였다. 어쩌면 1920년대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였다면 ‘촤르르르’ 돌아가는 세 대의 영사기 소리와 라이브 연주 소리가 뒤엉키고, 루프 반복 속에서 필름 프레임의 이미지가 열화 될 수도 있었을 테니. 그러나 우사이는 디지털 복원이 죽음을 극복한 부활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필름의 물리적 유한성과 파편성을 부정하는 순간, 오히려 그러한 파편의 흔적들이 가리켰던 역사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이다. # 6 (Director’s Cut) 아티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기록자를 만나야 한다. 그것이 큐레이터이든, 평론가이든, 역사가이든 간에.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난 예술 형식과 장르는 특히나 그러한 행운이 있어야 한다. 생전에 그것을 기록하거나 사후에 그것을 발굴해주거나. 피싱어는 그 점에서 행운이 있었다. 윌리엄 모리츠William Moritz라는 연구자를 만날 운명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모리츠가 맡은 역할은 단지 발굴, 기록, 복원에 머물지 않는다. 테이트 모던의 전시 공간에서 상영된 < Raumlichtkunst >는 피싱어의 작품이면서도, 모리츠가 재구성한 작품이기도 하다. 즉, 본래의 모습 고스란히 영원토록 간직하는 복원이 아니라, 소멸 가능한 파편들로 새롭게 현재의 생명을 얻은 윤회이다. # 7 (Flash Back) 테이트 모던 전시실의 어두운 방에 펼쳐진 오스카 피싱어의 우주는 내게는 데자뷰와도 같다. 내가 윌리엄 모리츠의 마지막 수업 조교를 맡았던 학기 첫날, 모리츠는 나에게 자신의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 보여주었다. 연구실 가득 들어찬 작품들은 그의 보물이자 우주였다. # 8 (Epilogue) 테이트 모던은 < Raumlichtkunst >를2012년 6월 1일부터 2013년 3월 24일까지 전시하였고, 3월 12일은 윌리엄 모리츠의 9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비주류 영화에서 아키비스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삶으로 보여준 모리츠 선생님께, 한국영상자료원에 쓰는 나의 첫 칼럼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