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스윗 레코드
- 감독
- 민환기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김시은, 김창환
하나, 김정민의 영화를 보았다. < 감자 >(2018)가 2019년에 가장 뜨거웠던 단편영화 중 한 편이라는 거, 나는 몰랐다. 당연히 김정민이란 감독의 이름도 알 리 없었다. 그러다 < 긴 밤 >(2020)이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2020년에 열린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은근히 < 기생충 >(2019)에 딴지를 거는 듯한 영화에 매혹당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족했다. 너무나 예쁜 컬러 – 근래 김정민이 만드는 영화들의 특징 중 하나다 – 로 포장된 세계는 아마도 반지하나 지하로 보이는 어떤 공간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기괴한 행태, 혹은 사건은 페미니스트들이 기겁하고 입을 막을 그런 류의 것이다. 당연히 영화제마다 받아들이는 형국이 극과 극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터, 사실 그것은 김정민이란 감독이 그간 만들어온 수십 편의 단편영화가 겪었을 수난의 한 예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한 제일 먼저 나온 김정민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라는 제목의 2016년 작품이다. ‘홍상수 영화’라니. 홍상수에 관한 영화인가 싶었는데 그야말로 홍상수 영화를 따라가며 흉내 낸 그런 영화다.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보다 똑같이 베끼는 게 영화제 취향에 맞을 것 같다’라는 논지다. 영화제 취향을 어설프게 간파한 죄인지,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가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영화제의 예심을 보는 수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며 여기저기 떠돌다 사라진, 그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김정민이 방향을 튼 거 같지는 않다. 노골적인 베끼기는 아니어도 특정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거나 오마주를 바친 듯한 영화의 리스트는 끝도 없이 전개되었다. 내가 대충 감을 잡은 감독의 이름만 나열하더라도 ‘홍상수, 봉준호, 왕가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장 뤽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기타노 다케시, 스탠리 큐브릭, 폴 토마스 앤더슨, 허준호, 이마무라 쇼헤이, 미카엘 하네케’ 등이다. 하나같이 위대한 거장의 이름이니 창피함을 무릅쓴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참 겁도 없다 싶다. 그런 경향의 작품 가운데 피식대며 본 작품도 있고, 썩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다. 2018년 작품 <세 아들>은 후자에 해당한다. 4:3 화면비에 흑백으로 찍은 카메라의 눈높이가 정확하게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과 일치하고, 제목(특히 영어 제목 - A Winter Afternoon)이나 음악도 영락없이 오즈의 그것이다. 만약 오즈가 이 영화를 본다면 네 인물이 빚는 관계의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단, 온전히 오즈의 인장만 박힌 것도 아니다. 김정민의 감성과,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21세기 청년의 분위기가 이건 디지털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김정민이 그런 영화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를 찔러대는 시도가 별로 바뀌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색채를 갖춘 작품도 하나둘씩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감자>가 그런 작품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5년에 걸쳐 어림잡아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근작인 <감자>와 <긴 밤> 외에 주목을 받은 영화는 드물다. ‘숏컷 시리즈’라 이름 붙인 영화들은 습작처럼 보이고 완결성이 아쉬운 터라 그간 영화제에서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왼다리>(2019)와 <첩첩산중>(2019)처럼 느슨하게 연결된 영화의 경우 나란히 보지 않으면 매력을 놓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유를 따져 보면 너무나 많은 (영화제) 불합격의 사유를 꺼낼 수 있겠으나, 그중 가장 큰 것 하나를 들자면 ‘이단성(異端性)’ 때문이라 하겠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앨범 재킷을 먼저 보았으면 한다. 그룹 ‘스틸리 댄’의 명반 시대를 연 1972년 앨범 <Can’t Buy a Thrill>의 재킷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정민 특유의 색감이 궁금하다면 이 앨범의 재킷을 보면 된다. 노랗고 빨간 색깔에 변형을 가해 어딘지 인공적이고 조잡한 인상을 주는데, 김정민은 여기에 파스텔 톤을 좀 더 강화해 ‘이것이 김정민의 세계다’라고 주장한다. 위 재킷에서 컬러보다 더 신경 써서 보아야 할 건 소재다. ‘거리의 여성, 나체의 남자와 여자, 욕망을 은유하는 싸구려 물품’은 재킷의 컬러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포스트 히피 시대에나 어울릴 것들인 게 사실이다. 스틸리 댄의 앨범 재킷이 종종 육감적인 소재를 다루긴 하지만, 이 앨범의 키치적 취향은 다른 앨범 재킷의 고상한 톤과 거리가 멀다. 21세기에 저런 재킷을 앨범의 커버로 사용하는 팔푼이는 없을 게다. 김정민의 영화가 저런 소재나 주제를 다루지 않지만, 시대와 주변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생산해 내는 그의 영화와, 위의 재킷이 주는 인상이 스무드하게 오버랩된다. 이상한 세계의 앨리스의 눈으로 현실의 세계를 보려는 정신 나간 시도. 심지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살짝 다룰 때에도 현실감보다 생뚱맞은 시선을 들이대곤 한다. 굳이 김정민의 영화를 독립영화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주류 독립영화의 경향과 그의 영화는 어떤 연결점이 없다. ‘똑같은 고민, 지배적인 정서, 하나의 목소리’가 반복되는 독립영화와도 거리가 먼, 김정민의 영화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발견된다. 만듦새에서 부족할지 몰라도 나는 그의 개성을 찬양한다. 게다가 그는 한 해에 최소 다섯 편 정도의 영화를 쏟아낸다. 그건 열정의 다른 얼굴이다. 아무도 안 봐주는데 이렇게 미치도록 영화를 만들어내는 열정, 무기력한 영화들 사이에서 그 에너지가 어찌 각별하지 않겠나. 둘, 김정민의 집을 찾아서. 몇 개월 전, 어찌어찌 <감자>와 <긴 밤>을 본 뒤로 나는 김정민이란 감독에 대해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엔 그가 그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우연히 지인이 그를 한 영화제에 초대했다는 걸 알게 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짐작했듯이 영화와 별로 상관없는 학교를 나와 주변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찍는다고 했다. 진짜 발견은 유튜브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그는 ‘정민김’이란 집을 지어 그와 친구들이 찍어온 영화 전부를 공개해 두었다(<감자>와 <긴 밤>은 판권이 팔린 건지 제외됐다). 유튜브의 거대한 세계에서 김정민이란 이름으로 집을 지었다간 검색해도 쉬 찾기 힘들 텐데, 정민김으로 검색하면 그가 세운 영화의 집이 바로 뜬다. 동영상 항목을 누르면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와 영상이 쭉 나열된다. 보통은 영화 속 이미지 하나를 따서 영화를 소개하기 마련인데, 김정민은 영화와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따로 구해 썸네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주 예쁜 디자인 하우스의 홈페이지 같은 인상을 준다. 듣기로, 심리학을 전공한 서른 청년이라는데, 예쁘게 세워놓은 유튜브의 집과 과감하고 와일드한 영화 중 그의 본디 모습이 어디에 가까울지 마구 궁금해진다.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김정민은 필름과 거리가 먼 세대다. 그가 열 살을 지날 즈음 세상의 영화는 디지털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러니 극장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가 그에게 익숙하다면 거짓말이다. 당연히 그즈음 영화 매체는 디지털을 화두로 삼아 영화의 미래를 논의했다. 초기에 디지털로 찍은 초기의 박철수의 영화에 대고 비판했던 글들이 기억난다. 그 영화는 디지털의 자세로 찍지 못했다고 뭇매를 맞았다.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느니, 카메라의 움직임이 필름의 그것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느니, 그 영화는 그런 비판을 들어야 했다. 지금 그 평자들이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들이 짧은 시선으로 예상하고 그렸던 디지털 영화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이 디지털로 재편된 현재, 대다수의 영화는 그들이 말했던 영화와 전혀 딴판이다. 적어도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밋밋하고 시시해졌다. 극장에 걸리는 대중영화 사이에서 독특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건 필름 시대와 비교해 더 힘들어졌다. 필름에서 벗어나 뭔가 혁명적인 이미지가 나올 거라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가, 디지털은 그냥 ‘표준화된 컬러와 이미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시대로 발전했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민은 필름 시대의 영화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고전적인 필름 시대의 영화와 뮤직비디오 같은 비디오 시대의 이미지 사이에 위치한다. 필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만, 동시대의 디지털로 영화를 만드는 데 별로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지 않다. 필름의 질감을 흉내 낸 영화도 만들고, 다수의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디지털 질감의 영화도 만들면서 그는 어느덧 김정민스러운 디지털 영화를 하나씩 내놓는 중이다. 물론 내가 본 그것들이 최후의 완성된 형태는 아닐 것이다. 김정민스러운 컬러를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간략한 편집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게 김정민의 디지털 영화다, 라고 말할 생각은 아직 없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고작 4년에서 5년 정도 영화를 만들어온 초보 작가일 따름이다. 무어 그리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겠나. 그렇다면 인터넷, 유튜브에 있는 집을 찾아가면서까지 김정민이란 감독의 영화에 왜 호기심을 보이는지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대답은 그가 영화를 생산하고 관객과 만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포지션을 영화감독이라는 데 두고 있으며, 그 직업에 맞게 꾸준히 영화를 찍는 게 자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렇게 영화를 찍다 경지에 오르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감독이 영화만 찍다 죽었다고 해서 욕을 들을 일은 없다. 코로나 시대에 영화와 극장의 운명을 두고 여러 예측이 오간다. 흥미로운 말씀도 있고 별것도 아닌 걸 대단한 양 예언한 글도 읽었다. 지금은 습관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게 언제 어떻게 문화를 형성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문화가 형성되리라는 것뿐이다. 관객의 수가 줄어든 것을, 극장이 문을 닫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거꾸로,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많은 영화를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마을마다 극장이 들어선 것이, 골목마다 들어선 교회만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의 영화 과소비가 극장을 편의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에도 김정민은 멈추지 않고 영화를 찍는다. 아마 이런 시기를 반영한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다큐멘터리: 일렉트릭 러브>라는 괴상한 영화를 만들었고, 그걸 유튜브의 자기 집에 선물처럼 올려두었다. 향후 영화와 영화 문화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내겐 김정민 같은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으로 족하다. 평범한 감독이 만든 아무 감흥 없는 영화 열 편보다, 내가 사랑하는 감독의 영화 한 편 한 편이 더 소중하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김정민은 그렇게 만든 영화들로 자기 집을 만든다. 그게 꼭 극장이 아닌들 무슨 상관인가.
< 히스테리아 >( 장만민 , 2018)는 어두운 한국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단면을 우리는 가족 혹은 가족주의라고 부른다. 지긋지긋한 가족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낯선 이야기 아니다. IMF 이후 자살률이 급격히 올라갔고, 가족 동반자살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가부장 가족주의가 가족을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해체하고 있고, 가족구성원인 한 개인들을 질식시키는지에 대해 영화는 주인공의 히스테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살기위해서 탈주해야만 했던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재 한국 사회가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영화다. 영화는 주인공인 혜주( 송희준 )의 ‘상상’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닷가에서 혜주가 공놀이 장면에서부터 가족들의 시선이 심상찮다. 가족들이 반려견을 부르는 소리와 아버지가 주인공의 뺨을 때리는 장면, 그리고 현실 병원으로 장면이 넘어간다. 집으로 귀환한 혜주. 가족들은 환영을 하는 것처럼 연출하지만, 혜주와 가족들 사이에 이내 균열이 발생하고 균열을 봉합하려는 아버지-가부장의 강요와 억압 그리고 체벌이 동시에 진행된다. 결국 혜주는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차를 전복시키고 탈출한다. 혜주의 히스테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지 영화는 심플하게 보여준다. 가부장이 지배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왕국에서 개인은 존재하기 쉽지 않다. 혜주의 히스테리는 가족이다. 명령하는 자와 명령을 따르는 자들 사이에 기묘한 연대(가족)가 숨 막힌다. 명령을 어길 시에는 그에 따른 처벌이 꼭 이뤄진다. 가부장의 질서가 어떻게 가족들의 몸과 마음에 각인되는지에 대해, 반복되는 체벌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주인공인 혜주는 아버지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잘못에 대한 벌로 자신에 볼에 키스를 강요한다. 강요되는 사랑은 학대다. 사랑이라 부르고 폭력이라고 읽게 되는 체벌을 통해 가족은 탄생한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상상 장면이다. 상상 장면에서의 시간성에 주목해보고 싶다. 영화의 첫 장면이 주인공인 혜주의 머릿속 상상이다. 상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혜주가 경험했을 폭력적인 ‘장면’이다. 슬로모션이다. 현실에서 가족들의 시간과 혜주의 머릿속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가족들의 시간과 혜주가 경험하는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같은 공간(가족이라고 상상되는 어떤 영역들)에 있지만,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개인은 같을 수 없다. 균질하게 만들기 위해서 체벌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이 동원된다. 가부장의 법을 준수해야 하고, 그것을 어길 시에는 처벌을 받거나, 미쳐야 한다는 슬픈 사실이다. 자신만의 시간으로 현재를 살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는 철저히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탈주하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미친 시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혜주역의 송희준 영화에서 혜주 역을 맡은 배우는 송희준 이다. 이 영화가 첫 영화라고 한다. 주인공 혜주 역할은 내면 혹은 정신의 불편함을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인데, 나른하면서도 느리게 혜주만의 시간을 표현해낸다. 송희준 배우의 행보가 기대된다. 제17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절대악몽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두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들이 있다. 조성희 감독의 중편 < 남매의 집 >도 그렇다. '연기는 딱딱하고, 사운드도 거칠고, 편집도 서툴렀고, 미술도 부족했고, A부터 Z까지 허점투성이였다'는 감독의 겸손을 곧대로 믿어서는 아니다. <남매의 집>은 지난해 단편에 주어지는 영예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칸국제영화제, 미쟝센단편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수상했고, 올해 1월 < 사사건건 >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단편들과 함께 묶여 개봉했다. 굳이 말하자면, <남매의 집>은 2009년 `그랜드슬램` 이다. 모두들 `잘했어요`라고 박수 보낸 작품인데, `두번 다시 보기 싫다`고? < 남매의 집 >의 주인공은 반지하 방에 사는 오누이다. 아버지는 전화를 걸어와 집 밖에 나가서는 안되며, 누구도 집에 들이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어린 남매는 `물만 마시고 가겠다`는 낯선 남자들에게 속아 문을 열어주고, 보이지 않던 공포는 눈 앞의 현실이 된다. <남매의 집>은 관객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영화다. 악몽에 가위눌린 듯한 기분이라고 말하면 적절할 것이다. 불한당들이 난동을 벌이는 동안 관객들은 `한계상황`을 체험해야만 한다. 남자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동생을 납치하려는 그들에게 식칼로 대항해 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만다. 조성희 감독은 '알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라오우, 안경, 대머리라고 불리는, 영화 속 침입자들은 흉측한 몰골의 사내들이다. 그러나 끔찍한 외모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건 비정상성이다. 그들의 행동은 종잡을 수가 없다. 안경이 여자아이의 귓볼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라오우는 남자아이의 학습지를 푸는데 골몰한다. 대머리는 자신에게 욕을 한 집안의 앵무새를 쇠망치로 내려친 뒤 잘못했다고 실수였다고 싹싹 빈다. 그들이 주춤거릴 때 공포는 외려 배가된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고, 보는 이의 공포는 비등점까지 끓어오른다. < 남매의 집 >은 무자비한 폭력을 전시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결말 앞에서 도덕과 윤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인간 조건이라기 보다 세상을 회피하는 변명과 허위의 계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죽었던 새가 살아나 새장 안에서 파닥거릴 때, 선과 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몽은 사라지고 또다른 자기 합리화가 남자아이의 마음 속에 들어선다. <남매의 집>은 (세상을)'알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반대로 공포는 (세상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데서 비롯된다. `남매의 집`은 '도덕은 없고,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하는' 닫힌 공간이다. 공포의 유년은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남매의 집>은 두번 다시 보기 싫지만, 그래서 꼭 한 번은 봐야 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