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성
- 감독
- 구로사와 아키라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도시로 미후네, 야마다 이스즈, 시무라 다케시, 쿠보 아키라, 타치카와 히로시, 치아키 미노루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흔히 ‘망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 전설적인 망작이 되어 오래도록 ‘제일 망한 영화’ 리스트에 오르내리는 방법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컬트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 ‘망했다’라고 평가되는 지점이 후대에는 묘한 매력이 되어 이를 즐기는 팬들에게 숭앙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 영화 역사에서 < 인천(오! 인천) >(테렌스 영, 1981, 이하 <오! 인천>)은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개봉 이후 비평계와 대중 양쪽 모두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했고,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악의 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명성에 정점을 찍었다(최악의 작품상 외에도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각본상 등 4관왕에 올라 모름지기 당해 연도 최악의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섣불리 <오! 인천>을 컬트로서 재평가하려 하거나, 혹은 그럼에도 영화팬들에게 감히 시간을 들여 한 번 즈음 볼 만하다고 추천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오직 <오! 인천>을 둘러싼 외부적인 기록들, 그리고 여기에 참여했던 한국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기록된 이 작품이 한국영화계에 몰고 온 변화와 그것이 이후 한국영화들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역대급의 제작 규모 처음 <오! 인천>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는 1978년 3월 신문기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남궁원 , 윤미라 *주 1 등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하고, 미국의 원웨이프로덕션과 일본의 동보영화사가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은 <그린베레>(존 웨인, 레이 켈로그, 1968), < 프렌치 커넥션 >(윌리엄 프리드킨, 1971)의 원작자인 로빈 무어와 폴 사베지가, 감독은 < 서부로 가는 길 >(앤드류 V. 맥라글렌, 1967), <철인들>(앤드류 V. 맥라글렌, 1969)과 같은 서부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앤드류 V. 맥라글렌이 담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는 영화는 그러나, 5월이 한참 지나도록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이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기술협조를 하기로 한 일본의 동보영화사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든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촬영 개시를 지연시킨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였다. 당시 각색을 담당했던 로빈 무어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해 “2시간 안에 담아내기에 너무 방대한 이야기였다. … 등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 다른 작가들이 투입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주2 결국 1978년 5월에 촬영에 들어간다던 영화는 무려 1년을 더 기다려 1979년 5월, 새로 영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하며 다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교체된 감독이 무려 테렌스 영이었다. 테렌스 영은 국내에서 ‘007 시리즈’로 명성이 나 있는 감독이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에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먼저 개봉했다. 실제 007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트렌드에 민감한 수입업자들은 서둘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 007 살인번호 >(테렌스 영, 1962)를 수입해 개봉했을 정도였다. 테렌스 영이 감독한 마지막 007 시리즈 < 007 썬더볼작전 >(테렌스 영, 1965)이 국내에 개봉하고도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테렌스 영은 여전히 국내에 다수의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촬영을 위해 방한한 테렌스 영 감독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6.25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한국이 공산당에 침략당했다는 것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게 될 것(《경향신문》 1979.5.5)”이라는 발언을 한 이후, 북한에서 《로동신문》의 논평을 통해 이 영화가 “악랄하게 중상모독, 헐뜯는 반동 내용(《경향신문》 1979.5.16)”이라고 비난하며 제작 중지를 요구해왔다. ‘테렌스 영’이라는 스타 감독의 참여에 더해 친한(親韓)적인 그의 발언,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화제성을 확보하면서 <오! 인천>에 대한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해외 출연진도 속속 명단이 발표됨과 동시에 배우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물론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누가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냐였다. 놀랍게도 그 역은 영국의 영화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에게 돌아갔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 햄릿 >(로렌스 올리비에, 1948), < 헨리 5세 >(로렌스 올리비에, 1944), < 리차드 3세 >(로렌스 올리비에, 1955) 등 셰익스피어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의 주연을 맡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배우이고, 1947년에는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으며(국내 신문기사에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지칭할 때는 꼭 올리비에 ‘경’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빅터 플레밍, 1939)와 < 애수 >(마빈 르로이, 1940),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엘리아 카잔, 1951) 등의 작품으로 국내 많은 팬을 가지고 있었던 비비안 리의 연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에 잘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 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로 이 영화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미국에서 공수해온 장비와 동원된 스태프, 엑스트라의 스케일이 또 한 번 한국 측 스태프들과 언론,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촬영 현장의 분위기와 이 영화의 규모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 신문 기사와 구술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6.25 당시 피난민들의 행렬을 재현한 촬영 현장(《동아일보》 1979.9.5) 테렌스 영 감독을 비롯해서 로런스 올리비에 경,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등 세계 정상의 배우들이 우리나라에 몰려와 촬영 중인 영화 <오! 인천>은 스태프 캐스트 못잖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계속 화제를 뿌리고 있다. … 현역미군 등 5백명의 엑스트러와 탱크 4대, 장갑차 2대 등이 출연한 서울탈환 장면은 당시 서울 거리와 가장 비슷한 인천 신포동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 지난 6월 28일 촬영을 시작한 영화 <오! 인천>은 용인 민속촌을 비롯하여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강원도 횡성비행장, 경북 왜관, 인천, 서울 등을 돌며 제작됐다. 이중 6.25 당시 낙동강 철교 폭파를 재현한 촬영에는 피난민 차림의 엑스트러 1천 3백명, F86 등 전투기와 탱크들이 동원돼 13일 동안 6대의 카메라에 담았다. *주3 인천에서도 폐기된 수인간(水仁間) 미니열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고 영흥도에 3천만원을 들여 등대를 세우기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모습은 인천 제2부두에서 촬영됐는데, 군함 12척과 상선 10여척이 동원돼 장관을 이뤘다고. … 이 영화는 당초 1천8백만 달러(90억원)의 제작비가 계상되었으나 제작기간의 지연 등으로 이미 3천5백만 달러(1백75억원)가 투입됐단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이 작품에는 6명의 주연급 배우(남궁원 포함)와 테렌스 영 감독이 쓸 캠핑카 8대, 토일렛카, 링컨 컨티넨털 승용차, 지프 2대가 미국에서 운반됐다. 캠핑카는 침대와 화장실, 식당과 에어컨 장치가 돼 있어 촬영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이 쓸 수 있도록 했다. 또 높이 10m까지 올라가는 크레인 카도 제작자인 이탈리아인 기사가 직접 가져와 운전하기도. 이밖에 진행을 위해 1백30대의 차량이 국내에서 동원되고 영화에 등장할 40년대식 승용차 6대,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쓰던 차와 동형의 크라이슬러, 그리고 탱크, 장갑차, 소제(蘇製) 무기 등이 미국에서 옮겨져왔다. 칠순의 로런스 올리비에 경을 비롯해서 재클린 비세트, 벤 가자라, 데이비드 젠슨(TV영화 <도망자> 주연), 리처드 라운트리,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등 세계적인 배우를 포함, 한국인 1백명, 미국인 50명, 영국인 30명, 이탈리아인 30명, 일본인 30명 등 스태프가 참가한 이 영화는 인적 구성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짙게 띠고 있다. - “<오! 인천> 로케 한창, 엄청난 물량작전 한국동란 재현(《경향신문》 1979.9.14.) ” 그때 내가 <오! 인천>을 보고, 카메라가 아홉 대가 다 뭐냐하면, 다 파나비전 카메라예요. 아리플렉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 파나비전 카메라, 제일 좋은 카메라예요! ( 구중모 , 2015, 212쪽) *주4 그때 하얏트 호텔 2층 일체를 썼죠. 그때 뭐 복사하는 데도 있었고, 뭐 신기하게 여겼죠. … 우선, 이 장비가, 장비가 많아, 양이.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장비. 특히 낮에 라이트를 킨다는 게, 이건 못 보던 거거든. ( 김호길 , 2016, 116쪽) *주5 그때 150대의 차가, 그러니까 자동차 배차하는 거 있잖아요? 배차요원을 홍콩에서 데려왔어요. 현장에서 차 관리하는 애가 스무 명. 또 뭐 관리하는, 여하튼 식당이 있잖아요? 식당이 두 팀. 얼마나 웃기냐면요,하얏트 호텔에서부터 문산까지 온다고 생각하면, 시내는 500미터, 긴 거리는 1키로마다 깃발을 꽂아놔요. 잊어먹을까봐. 한 팀이라도 늦게 나오면 안되잖아요. … 엄청난 돈이에요. 은행 차가 쫓아, 현장에서 줘. 은행 차가 다녔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럼 스태프들한테 시간 당 현찰로 줘버려요, 엄청난 돈을. ( 박광남 , 2023, 112~113쪽) *주6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서 촬영된 다리 폭파 장면의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중앙청 앞에서 진행된 서울 탈환 장면 촬영 현장 (박광남 기증 자료) 통일교, 그리고 영화에 쏟아진 혹평들 특히, 당시 <오! 인천>에 참여했던 국내 스태프들은 구술에서 공통적으로 외국에서 온 스태프들이 하얏트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사용했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 하얏트 호텔은 이 영화가 촬영되기 1년 전인 1978년 7월에 개장한 5성급의 미국 체인 브랜드 호텔이었다. 평소 한국영화 촬영을 다닐 때 “5천원짜리 여관방에서 댓 명이 한 방을 쓰는” *주7 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충무로 스태프들에게 최신식 시설이 갖춰진 호텔을 촬영 기지로 쓴다는 것은 꽤나 인상 깊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촬영을 끝낸 촬영팀에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촬영팀의 출국을 앞두고, 하얏트 호텔의 숙박비 22,327,000원을 지불하지 못해 촬영 기자재 등의 유체동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물가를 생각했을 때, 2천여만 원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몇 백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에서, 외국인 출연자들의 주급을 매주 헬리콥터로 실어나르고, 스태프들의 일당 지급에 은행차까지 동원해가며 그때 그때 현찰로 지급하는 등 제작비를 쓰는 데에 아낌이 없던 영화 제작사가 호텔 숙박비를 내지 못해 가압류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자금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며칠 뒤 제작사와 호텔 측이 합의에 도달하며 가압류 기간이 연기되었다는 짧은 기사로 이 사건은 정리가 되었고, 촬영팀도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 인천>를 둘러싼 구설들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한국 체류 당시 테렌스 영의 손목시계와 필름 1,345피트(당시 시가로 350만원 상당)를 도난맞은 사실이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그러나 끝내 범인도 잃어버린 물건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미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과 관련하여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1981년 2월에는 이성구 감독이 재편집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는 와중에 5월에는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아놓고 <오! 인천>의 비공개 시사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시사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케네디센터 주위에서 통일교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며, 영화에 대한 가타부타 평가는 없이 모든 관심이 ‘통일교’에만 쏠려버렸다. 비슷한 시기 국내에서도 <오! 인천>을 둘러싼 아주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81년 8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살던, 일명 ‘원효로 보살’로도 알려진 70대 노파가 그녀의 양녀⋅가정부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평소 유명 정치인들의 점을 봐주거나 복을 빌어주며 고위층과 인맥을 형성한 바 있고, 이를 통해 큰 부를 쌓았던 윤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윤 노파의 <오! 인천>에 대한 투자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주8 이렇게 <오! 인천>에 대한 관심은 작품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는 자꾸 그 주변부로 옮겨가고 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관심이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개봉해서 흥행만 잘 된다면 이까짓 구설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대중에 영화가 공개된 것은 프랑스 칸에서였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제작사 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25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영화 제목이 새겨진 키트 등을 나눠주고 16일 시사회가 끝난 후 호화파티를 열었는데 구매희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조선일보》 1982.5.1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외면당한 원인을 통일교와 연관 짓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 문제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해외 영화시장에서 전혀 판매되지 않았고, 1982년 9월 17일 미국 내 상영만이 힘겹게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평 일색이었다. 급기야 통일교 측에서는 영화제작팀 이름으로 《뉴욕타임즈》,《워싱턴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 《뉴스 월드 인 뉴욕》, 《워싱턴타임즈》 등 6개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미국 기자와 평론가들이 <인천> 영화 자체의 가치는 평가하지 않고 이 영화의 특별후원자로서 문선명 목사의 이름만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라며 “영화 <인천>의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히 평가해줄 것을 미국 국민들에게 촉구(《동아일보》 1982.10.5)”했다. 그러나 영화 <오! 인천>의 흥행 실패를 통일교와의 연관성에서만 찾는 것은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 처음 제작 때부터 그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끌어모았던 <오! 인천>은 왜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던 것일까? <벤허>보다 (제작비가) 더 많이 들었다고 그랬어, 그 작품이, <오! 인천>. 근데 한국에서 상영 못한 거는 뭐냐 하면 너무 북한을 우상화 시켰다는 거야, 영화를. 그래서 안된 거예요. (구중모, 2015, 216쪽) 영화가 안 되는 이유는 … 정치적인 거예요, 그게. 국방부에서 3일 공연을 했어요, 국방부에서만. 그래 그 시대에 그거야, 이북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공연 못하게 한 거예요. 그거 잘했으면 문선명이 자기 일대기를 하겠다고 그랬다고. … 다 영화제작사에서 잘못한 거야. 일개 장교가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이승만 대통령 등때기 탕탕치고 하는데, 그렇게 푸대접을 하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은 사실 아니거든. 한국의 국익이 상하지. 그래서 나라에서 공연 못하게 했는데. 미국에서도 안 됐어. 전혀 안 됐어요. 한 일주일 하고 문 닫았어. (박광남, 2023, 154쪽) <오! 인천> 제작 당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던 박광남은 이 영화가 국방부 내에서 시사회가 이루어진 이후,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만약 그의 기억이 맞다면 이 영화를 본 국방부 관계자들은 북한에 대한 미화는 둘째 치고, 일부 장면에서는 적군보다 더 나빠 보이는 데다가 *주9 전쟁 장면 내내 인민군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민중들보다도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군의 모습을 더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화 속에 드러난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나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고증 실패를 모두 눈 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앞서 이야기했던 구설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인 영화를 국내에서 상영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려 4,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대작 영화는 조용히 사라졌다(IMDb 기준,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익은 52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중 오프닝 수익이 230만 달러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여기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같은 해 1천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영화 < 이티 >(스티븐 스필버그, 1982)는 미국 내에서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한국영화계에 <오! 인천>이 남긴 것들 하나의 작품으로서 <오! 인천>이 가진 수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지만, 한국영화계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이어갔다. 먼저 당시 <오! 인천>에 참여하면서 충무로 스태프들은 소품⋅의상⋅특수효과 등에 쓰일 재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 인천> 촬영 이후 생긴 촬영 소품과 재료들을 같이 관리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오! 인천>에서 재료를 내가 많이 받았거든. 그걸 그냥 활용했으니까. …<오! 인천>이란 영화, 그거 끝나고 인저 삼우회를 결성해가지고, 의상⋅효과⋅소품 해가지고 뚝섬에 큰 창고 건물을 직접 얻어 가지고 그걸 나눠서 썼는데, 1980년도에 큰 화재가 나면서… (김호길, 2016, 103쪽) 그때 어디냐면 뚝섬. 거기 우리 불났어. (웃음) 완전히 탔어. 의상도 완전히 타버리고. 의상하고 우리하고 창고를 하나로 같이 있었거든. 그때 <오! 인천>에 갖다 놓은 물건도 있었구나. 거기 사다리 같은 거, 그 좋은 것들이 몽창 다 탔어. 무기도 몽창 타고. 화약은 거기 안 뒀거든. (박광남, 2023, 127쪽) 구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촬영 소품과 의상, 효과 재료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당시 충무로 인력들이 <오! 인천>에 참여하며 배웠던 것들이 함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한국의 전쟁영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나 규모가 큰 영화를 촬영할 때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살려 활약했다. 이게 촌길에 철조망이 깔려 있으니까 우체부가 자전거 끌고는 못 가는 거야. *주10 “책임지겠습니다. 지나가세요.” 그랬지. 그게 뭐냐 하면은 가짜 철조망이거든. 제가 만든 거예요. 그게 79년도 <오! 인천>이라는 영화 때문에, 거기서 그걸 배운 거야. 이렇게 해서 만드는구나. … <프로페셔날>인가? 전쟁터 나오는 장면에서 라스트가 막 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죽는 게 있어요. ‘야, 저거 되게 아팠겄다. 이렇게 어떻게 했을까’ 했는데, 바로 그런 거야. 그래 인제 79년도 <오! 인천>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았고. (김호길, 2016, 133~134쪽) 상륙작전 하는데, 카메라 아홉 대가 필요한 거예요. 거기서 그런데, 헌팅을 가서 어떻게 했냐면, 봐요. 거기서 뭘 배웠냐? 카메라 아홉 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거를 하루종일 하는 거야. A카메라 이렇게 부감대로 놓고, B카메라 하나, 둘 막 바꿔놓는데, 한국사람 같으면 그걸 연출을 못해. … 한국에서 만약에 이걸 동시녹음을 하게 되면 한 달은 더 찍어야 돼. 그런데 하루에 딱 끝나는 거야, 그날에. 예행하고 정식촬영할 땐 하루에 다 끝나더라고. 또 중요한 게 뭐냐, 폭탄이 터지는데 걔들은 각도를 다 살려놔요, 터지는 각도. 한국 특수효과들은 그걸 다 배우는 거예요, 거기서. 그러면 거기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여기 카메라가 안 보일 거 아니냐고, 응? *주11 고런 머리를 다 써놨어요. 그러니 아홉 대라는 게 말이 쉽지 이걸 연출자가 계산을 할 정도면. (구중모, 2015, 212~213쪽) < 용가리 > 할 때 몸에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데, 실제 화약이 안 좋아서 막 불이 붙기도 하고 그랬어요. *주12 <오! 인천> 할 때 보니까 미국사람이 완벽하게 하는 거, 미국사람들이 와서 터득을 했어요. 터득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거를 다시 응용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 많이 습득을 했죠. … <오! 인천>이란 영화, 외국사람 특수작업 같이 했기 때문에 많이 배웠고, 저희도 많이 응용했고. 저 나름대로도 그 사람들 기술 플러스 우리 기술을 어느 정도 포함시켜서 더 좋게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기도 하거든요. ( 이문걸 , 2006, 40쪽) 그러나 이들의 구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들이 약 20여 년(구술 시기에 따라 길게는 40년)이 흐른 뒤에도 <오! 인천> 촬영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많은 한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그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거나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1979년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오늘날 블록버스터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영화에 참여하며, 할리우드의 기술과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그들만의 경력이다. 그리고 이때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오! 인천> 이후 더 많은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불려 다니며 1980~1990년대 내내 활동했다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저희가 <오! 인천>에서 영화발전에, 특수효과에 많이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12쪽) … 한국영화계가 <오! 인천>이라는 거를 하기 위해서 차량이라든가 기동력이라든지 이런 거를 많이 배웠어요. 어떻게 보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해도, 영화 개념적으로 많이, 영화 바뀐 것이, 제작자 바뀐 것이 <오! 인천>이지 않았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문걸, 2006, 21쪽) ※ 인용 구술 (인용된 페이지는 각 구술 뒤에 표기) 심혜경,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이문걸 편[특수효과⋅소품⋅미술]』, 한국영상자료원, 2006.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이정아, 『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 한국영상자료원, 2016. 남기웅,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박광남』, 한국영상자료원, 2023. *** 주1. 윤미라는 후에 출연을 거부했다. 그리고 윤미라가 연기하기로 했던 배역은 리디아 레이(Lydia Lei)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남궁원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 한국 측 출연 배우들은 직접 테렌스 영을 만나 오디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이때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고 한다. 주2. “<Inchon> Trivia”,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84132/trivia/?ref_=tt_trv_trv >. 주3. 신문 기사에서 상술한 장면은 경북 왜관에서 촬영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해당 장면은 1950년 6월 28일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다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술자들 역시 기억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 장면을 ‘한강 다리 폭파’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촬영기사로 참여했던 구중모의 구술에서는 테렌스 영이 원래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 제3한강교를 폭파시키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경북 칠곡군 왜관면에 있는 다리를 폭파시킨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배수경,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 2권 김정란 이남기 구중모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5, 215~216쪽.) 주4. 구술자 구중모 는 <빨간 마스크의 여인>(김인수, 1971)을 통해 데뷔하여 <티켓>(임권택, 1986), <결혼이야기>(김의석, 1992) 등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였으며, 1986년에는 <씨받이>(임권택)로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5년 <합작영화> 주제사를 통해 <오! 인천>에서 한국 측 촬영팀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주5. 구술자 김호길 은 1960년대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하여, 1968년 임권택 감독의 <몽녀>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소품 담당 스태프로 일했다. <오! 인천>에서도 소품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6. 구술자 박광남 은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입문, 1960년대 본격적으로 특수효과 스태프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80년대부터는 CF, TV드라마, 연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특수효과 전문가로 활약했다.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주7. 이정하,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호길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73쪽. 주8. 사건의 내용이 다소 복잡한데, 당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경찰에 의한 강압적인 수사와 고문이 있었으며, 자신의 자백은 모두 이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피의자의 결백에 대한 근거로 피해자의 사망시각이 중요한 쟁점이 되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주장하는 사망시각에 피해자가 <오! 인천>의 한국 제작총괄이었던 박경도와 원웨이프로덕션의 대표 이시이 미츠하리를 만났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피의자 측에서는 윤 노파가 <오! 인천> 제작에 20억의 거액을 투자했고, 이를 통해 한국 측 상영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원웨이프로덕션 측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박경도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부정하며, 그들이 윤 노파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영화가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고, 흥행이 될 수 있도록 불공을 부탁드리고자’ 했으나, 약속한 날 윤 노파는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한 채 이시이 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주9.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인도교 폭파 장면이다. 미군 장교의 부인이 자신의 차량 안에 한국인 어린이와 소녀들을 가득 태우고 다리를 빠져나가는 도중, 미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다리를 폭파시킨다. 끊어진 다리 끝에 걸린 차량 안에서 모두 무사히 구출되기는 하지만, 이것도 주위 피난민과 미군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주10. 영화 <뽕>(이두용, 1985)을 촬영할 당시 뽕밭에 친 철조망을 보고 마침 촬영장 쪽을 지나가던 우체부가 자전거를 멈추고 섰다는 의미이다. 주11. 어떤 각도에서 폭탄이 터져도 9대의 카메라 중 어느 카메라에도 다른 카메라가 잡히지 않도록 구도를 잘 맞춰놓았다는 의미이다. 주1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촬영 당시 사람의 몸에 작은 화약을 넣고 터트려 총에 맞는 듯한 효과를 내야 했는데, 그 기술이 부족해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괴수 용가리> 촬영 때는 일본의 특수효과 기술자들을 초대해 함께 작업을 했었는데, 본문과 이어지는 구술에서 일본 특수효과 기술자들도 ‘미니어쳐’ 전문가들이라 당시에는 작은 화약을 활용한 특효 기술을 잘 배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구술자 이문걸 은 박광남과 함께 <오! 인천>에서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참여했다.
몹시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 신궁 >을 보러 간 날을 기억한다. 날짜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날의 날씨는 어제처럼 생생하다. 바람이 몹시 차갑고 메마른 하늘. 알 수 없게 스산한 공기. 애매하게 늦은 겨울 저녁. 그해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 종로구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경호실장 차지철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다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갑자기 모든 학교는 휴교를 했고 처음에는 모두들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들은 다방에서 만나 한가하게 음악도 듣고 줄곧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이다가 헤어졌다.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듬해 정치의 봄이 올 때까지 서울은 조용했다. 갑자기 서둘러 시작된 겨울방학을 보내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고 미아 삼거리에 있던 대지극장에 가서 <신궁>을 보았다. 나는 그해 봄에 ‘林權澤’을 발견했다. < 족보 >를 본 다음부터 이 이름의 ‘監督’ 영화를 모두 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나 DVD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켜 주시기 바란다. 영상자료원은 영화진흥공사 산하 기구였으며 단지 필름을 ‘보관’만 했고 (지금과 달리) 어떤 영화도 상영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명화극장에서는 할리우드 영화만을 방영했다. <신궁>은 내가 <족보> 다음에 본 임권택 의 ‘두 번째’ 영화였다. 그래서 <신궁>이 개봉했다는 소식에 조금 흥분했다. 구태여 조금, 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당시 대지극장이 재개봉관이었고 그 말은 제작사가 개봉을 포기한 영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많은 한국영화들을 제작사가 거의 버리다시피 개봉시켰다. 그들은 외화수입 쿼터만이 관심이었고 한국영화는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그때 나는 마치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국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보고 있었다. 이 영화들을 달리 볼 방법이 없었던 나는 그 무렵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재개봉관을 돌아다니면서 찾아보고 있었다. 대지극장에서 <신궁>을 보았을 때 객석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극장 안은 추웠고 헐벗은 누에처럼 웅크리고 코트를 내내 양손으로 저미며 영화를 보았다. 첫인상. < 신궁 >을 보면서 몹시 당황하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 족보 >에서 나를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가 없었다. 차라리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언지는 그때 잘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느 쪽이 이 사람의 영화였던 것일까.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궁>을 보았을 때 즉시 내가 이미 이런 영화를 어디선가 보았음을 깨달았다. <신궁>은 어딘가 김기영의 <이어도>를 닮아있었고 동시에 유현목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와 겹치고 있었고 하길종의 < 별들의 고향(속) >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때 내가 즉각적으로 반응한 그것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궁>에서 고유한 그 무언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두 가지 배움의 간극. 그것임과 그 무언가. <신궁>은 내게 어떤 대결의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는 용기를 내서 좀 더 솔직하게 그때의 심정을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는 여러 힘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들이 서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뒤죽박죽으로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 힘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전술적으로 여겨졌고, 그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부여받고 창조에 봉사하는 대신 서로의 존재방식을 증명하기 위해서 웅성거리는 것만 같았다. <족보>는 무엇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있었다. 그건 단지 영화의 내용이나 인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그러했다. <신궁>은 폭력적이고 독립적인 쇼트들이 침범하듯이 등장하였다. 마치 다른 임권택 이 있는 것처럼 <신궁>은 다른 설명을 요구하였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족보>는 하나의 결론처럼 보였다. <신궁>은 지금 막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둘이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둘이 임권택의 영화를 이루는 원심력이자 구심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잡아당기는 힘과 벗어나려는 힘. 수렴하는 힘과 분산하는 힘. 거의 서로 닿을 듯이 서로 가까이 있는 두 영화. 나는 먼저 둘 사이를 마주 보게 할 필요를 느꼈다. 단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주석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하나 옆에 다른 하나가 있을 필요가 생긴 것일까.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심리적인 소설을 쓰는 것은 비평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변수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면 어떤 출현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일성 촬영감독 그 둘 사이의 사건은 정일성 이다. 1929년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 공보관에서 일을 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은 사람. 김학성 밑에서 촬영부 생활을 했고 1957년 조긍하 의 < 가거라 슬픔이여 >가 촬영감독 ‘입봉’작이다. 이력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은 1963년 아시아 영화재단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대목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 붉은 수염 >을 찍을 때 내가 B 카메라를 잡았”다. 1965년 4월 3일에 도쿄에서 개봉한 흑백 시네마스코프 영화. 미후네 도시로가 붉은 수염이 난 지방 의사로 나와 도시에서 온 젊은 의사에게 진정한 의술이란 단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는 것이란 배움을 전수한다. 상영시간 3시간 5분. 누군가는 구로사와가 도스토옙스키와 셰익스피어에게서 배운 예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 진정한 걸작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1960년대 전공투 세대에게 태평양 전쟁세대가 베푸는 역겨운 계몽교훈극이라고 불렀다. <붉은 수염>의 촬영감독은 나카이 아사카즈다. 이미 구로사와와 < 들개 >로 시작해서 < 7인의 사무라이 > < 거미의 성 > < 천국과 지옥 >을 찍었고 이후에도 < 데르수 우잘라 >와 < 란 >을 찍었다. 하지만 정일성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촬영감독은 미야가와 카즈오라고 대답했다. 구로사와의 <라쇼몽>을 찍은 사람. 미조구치 겐지의 수많은 영화들, 그중에서도 로 유명한 촬영감독. 그리고 종종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작업한) 스벤 니크비스트를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정일성 이 갑자기 놀라운 촬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산업 안으로 돌아왔고 촬영은 감독의 결정 아래 놓여있다. 정일성은 유감스럽게도 충무로에서 미조구치 겐지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1971년 김기영 을 만났다. < 화녀 >를 찍은 다음 이어서 < 충녀 >를 찍었다. 이때부터 정일성은 양식적인 그만의 스타일을 화면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 화면의 주인을 찾는 것은 난처한 일이다. 우선 그 당시의 현장이 지금과 매우 달랐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장에서 모니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 현장에서 연출은 그저 배우를 바라보며 카메라에 담겨질 구도를 ‘미루어 짐작하면서’ “레디 액션”을 불렀고 그런 다음 ‘감으로’ 오케이와 엔지를 구별해냈다. 이건 전 세계 영화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그때의 현장은 위계질서가 엄격했으며 감독은 모든 문제를 결정했다. 하지만 촬영의 ‘순간’을 보는 사람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촬영감독뿐이었다. 게다가 이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촬영이 끝난 다음 필름을 현상소에 보내서 프린트를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편집실에서 하는 탄식은 의미 없는 후회이다. 나는 1978년 처음으로 영화 촬영현장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현장은 하길종 의 마지막 영화 < 병태와 영자 >(1979)였다. 촬영은 장석준 이었고 제작은 그 당시 가장 안정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화천공사였다. 연출부와 촬영부는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감독은 촬영감독의 허락 없이 카메라의 구도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촬영감독은 이따금 마치 자신의 관대함을 보이려는 듯 감독이 구도를 확인하는 것을 허락하곤 했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필름은 최소의 재촬영을 허락했으며 여분의 촬영은 상상할 수 없었다. <화녀>의 현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기영은 정일성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이어서 이듬해 <충녀>(1972), 비구니들에 관한 이야기 < 파계 >(1974), < 만추 >를 다시 찍은 < 육체의 약속 >(1975)을 이어서 함께 찍었다. 거의 동시에 유현목 과 < 불꽃 >(1975)과 < 문 >(1977)을 찍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결정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는 하길종 과 찍은 < 바보들의 행진 >(1975)일 것이다. 그리고 김수용 과 < 가위 바위 보 >와 < 화려한 외출 >을 찍었다. 김기영, 유현목, 하길종, 김수용. 그들은 단지 이름이 아니다. 한국영화라는 발명.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시대에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영화가 아름답게 작동하는 방식을 창조해냈다. 물론 정일성의 목록이 항상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은 촬영이라는 자리의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선택하는 대신 선택 당했다. 그는 같은 시기에 < 고교얄개 >(1976), <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 >(1977), 그리고 < 여고얄개 >(1977)을 찍었다. 임권택 은 1970년대에 들어선 다음 거의 매번 다른 배우들과 작업했지만 촬영감독은 고작 서너 명의 이름들을 돌아가면서 반복해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서정민 , 이석기 , 구중모 가 그 이름이다. < 신궁 >은 임권택이 정일성과 함께 작업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때 두 사람은 모두 한 해에 몇 편의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맨 처음 본 임 감독의 영화는 < 왕십리 >였어요. 그 이전 영화는 별로 본 기억이 없어요. <왕십리>는 정돈이 대단히 잘 된 영화였어요. 그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의 힘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나는 < 과부 >( 조문진 , 1978)로 대종상에서 촬영상을 받고 임 감독은 < 족보 >로 감독상을 받아 함께 해외연수를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거기서 함께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 임 감독은 듣고 또 들었어요. 그게 임 감독의 매력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 마침 나는 샤머니즘에 관한 영화를 몇 편 작업하면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어요. < 이어도 >나 < 을화 > 같은 작품들을 찍었어요. 그때 < 신궁 >을 만나게 된 거지요”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렌즈의 문제 분명한 사실은 첫 번째 작업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망쳤다는 것이다. < 신궁 >은 영화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화면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게 말이에요, 촬영을 떠났는데 미처 카메라를 테스트하지를 않은 거예요. 찍는 동안에는 몰랐죠, 그게 섬에 가서 촬영을 했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현상을 해보니 그냥 화면이 그렇게 된 거지요. 초점이 다 나간 거지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렌즈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일부 화면들은 잘못된 아이리스 같은 효과가 생긴 장면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아마 현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술적 결함이라는 외피를 잠시만, 하여튼 잠시만, 옆으로 치워놓고 질문을 진행시킬 생각이다. 촬영이라는 문제. 정일성 의 촬영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와 함께 작업한 연출자들은 각자의 공간을 만들어냈고 각자의 구도를 찾아냈으며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정일성과 작업하기 전에 이미 자기의 세계를 갖고 있었다.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 정일성은 무언가를 했다. 영화에서 촬영이 하는 무언가. 그때 임권택 은 그들의 영화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나는 약간 사태를 단순화시켜서 설명하고 싶다. 정일성의 촬영이 아름다운 순간은 대부분 롱쇼트를 찍을 때였다. 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그의 구도 안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건 단지 멀리서 찍었다는 뜻이 아니다. 정일성은 롱쇼크를 찍기 위해서 대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할 지, 얼마나 높이 있어야 할 지, 그때 렌즈가 어떤 깊이를 가져야 할 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어떤 빛이 화면 안에 스며들어야하는지를 예민하게 느껴보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일성은 충무로에서 대부분의 촬영감독들이 와이드 렌즈 촬영을 잘 해낼 때 정반대로 망원렌즈로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곤 했다. 그는 여름보다 겨울을 선호했고 눈이 내릴 때보다 눈이 녹을 때가 촬영을 해야 할 ‘진정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엔 아픔이 있잖아요” 몇 번이고 그 말을 썼다. 심지어 촬영현장에서 만족스러운 장면을 얻어냈을 때에도 그렇게 말을 했다. 이미지 안의 아픔. 그런데 그건 어떤 아픔일까. 아니, 이미지가 아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당신께서 생각하는 촬영은 무엇인가요? “난 말이에요, 칼라로 찍었지만 그게 흑백처럼 보이는 장면을 해내고 싶어요. 영화는 암부(暗部)가 살아나야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영화를 보다가 아, 세상이 사라져가는 거였구나, 라는 걸 거기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가 슬퍼지는 거죠. 왜냐, 세상 앞에서 자기가 보잘 것 없으니까” 정일성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담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충무로에서, 그걸 그려내려는 감독을 만나야만 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구부릴 차례이다. 좀 이상하게 말하자면 임권택 은 < 신궁 >에서 이전에는 해본 적이 없는 방식의 장면들을 만난다. 그건 이전까지의 그의 영화에서 나타난 주제나 소재, 이야기, 등장인물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물론 <신궁>에서 다룬 무속신앙은 임권택에게 새로운 주제이다. 그는 그 이전까지 이런 주제 안의 인물을 다룬 적이 없다. 갑자기 이 문제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 불의 딸 >을 경유해서 < 축제 >까지 이 관심을 이어갔다. 임권택은 무속신앙이 사실상 한국의 모든 종교의 뿌리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잖아요, 부처님에게 극락왕생시켜달라고 비는 건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소원이지요, 욕심을 버리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공양을 해가면서까지 제 남편 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하는 건 사실상 절에 가서 굿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거예요. 그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교회에 가서 자기는 천당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건 내세를 믿는 무속 신앙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거죠”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임권택이 <신궁>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미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밀고 나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에게 <신궁> 주변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전해에 임권택은 < 족보 >를 찍었다. 그리고 <신궁>을 만들었던 1979년 그는 < 깃발 없는 기수 >를 찍었다. 그 이듬해 < 짝코 >를 찍었고, 그리고 1981년 < 만다라 >를 찍었다. 하지만 이건 촬영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임권택은 이미 1973년(< 잡초 >), 혹은 1976년(< 왕십리 >)부터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질문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궁>은 심지어 그 변화의 과정에서조차 그 이전 영화들과 단지 다르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고 무언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정식화도 허락하지 않는 대립. 여기서 형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외양의 차이라고 하고 싶은 어떤 단락이 나타났다. 나는 처음 보았을 때 이것이 왠지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만큼 강제적인 균열로 보였다. 어쩌면 <족보>의 감흥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략한 줄거리. 1977년 7월 한국문학에 발표한 천승세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 신궁 >은 섬에서 세습무로 유명한 당골네 왕년이의 이야기다. 그녀는 주로 뱃사공들을 위해 고기잡이가 풍년이 되게 해달라는 굿판에서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그녀의 굿판 장구잽이 (이자 남편인) 옥수는 배를 타고 싶어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배를 사서 선장이 되지만 이 섬의 부자 최판수의 흉계에 빠진 채 빚에 몰려 배를 팔고 그 배에 선원으로 올라탔다가 그만 태풍에 배 밑창에서 죽는다. 실의에 찬 왕년이는 아들 용수와 자기 굿판을 물려줄 쪼깐년을 데리고 지내면서 더 이상 굿판에 벌이지 않는다. 집을 나간 용수가 일 년 만에 돌아오고 고기잡이는 흉년이 들어 모두들 왕년이가 굿판을 벌여주기를 조르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그런 어느 날 쪼간년이 돈에 눈이 멀어 최판수와 자기 몰래 통정을 나눈다는 사실을 알고 굿판을 잡겠다고 자청한다. 왕년이는 굿판을 벌이기 전에 최판수의 운수대통을 위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궁으로 운세를 내려주겠노라며 굿판 복판에 앉힌다. 그런 다음 바가지를 씌운 최판수의 이마에 활을 쏘아 내리꽂는다. 그녀의 복수. 왕년이의 거절 임권택 은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구성하면서 다시 한 번 복습하듯이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시킨다. 첫 장면. 왕년이의 집에 섬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굿판을 벌여달라고 간청하지만 왕년이는 다 물리친다. 왕년이의 아들이 돌아오고 그런 아들을 바라보면서 왕년이는 남편 옥수를 떠올린다. (flash_back) 임권택은 언제나처럼 이야기 안에 시간의 주름을 만들고 마치 그 시간의 주인이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걸려 넘어지듯 그 안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 신궁 > 가까이 있는 < 짝코 >는 이 구조를 쫓는 송기열과 쫓기는 ‘짝코’ 백공산 두 사람의 복수의 주름으로 만든 다음 번갈아 오간다. < 길소뜸 >은 화영과 동진을 번갈아 오가면서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눈다. 이번에는 왕년이의 차례이다. 무속신앙을 다룬다고 해서 임권택은 이야기의 구조를 뒤틀거나 인물의 줄거리에 특별한 형식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해왔던 방식에 따라서 전기적 구성을 해나간다. 여기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혹은 인물이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 신궁 >은 영화의 경제학에 따라 둘로 나누어서 촬영되었다. 풍경이 나오는 외부는 모두 섬에서 로케 촬영을 했고 왕년이의 집으로 들어서면 세트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일부 낮에 문을 열어놓고 바깥 풍경이 걸리는 왕년이 집의 일부는 섬에서 촬영했다. 이전까지 임권택 은 인물이 방 안에 들어가면 함께 들어갔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인물들 사이의 시선을 설계하고 장면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시네마스코프로 촬영을 시작한 임권택은 방 안에 들어가면 인물들의 동선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은 일단 한 번 앉으면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면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방 안에 들어가게 되면 카메라를 중심으로 타원형 구조로 앉힌 다음 옆으로 펼쳐놓았다. 먼저 위치를 확인시키고 나면(master_shot) 재빨리 대화의 내부로 들어가 인물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약간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배치를 한 다음 나루세 미키오의 방식으로 분할해 들어갔다. 하지만 임권택은 1970년대 어딘가에서부터 이런 분할 방식을 버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임권택의 장면들은 눈에 보이게 시간적으로 분할 없이 지속되기(long_take)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따금 문득 멈춰 서서 바라보듯이 보여준 영화는 < 아내들의 행진 >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형태의 좌식 배치에 관한 여러 가지 변형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여러 명을 앉혀놓았을 때는 인물들의 집합 효과가 있지만 단지 두세 명의 인물이 있을 때는 시네마스코프의 경우 일부 공간이 지속적으로 비어있거나 빈 공간이 주는 효과가 엄습해올 때 그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불필요하게 인물에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이른바 문법에서 말하는 일정 거리 안으로까지) 인물에게 다가가면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오즈만이 다가가 본 거리. 임권택은 < 족보 >에서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방 안에서 가끔 카메라의 위치를 사각형의 사각에 가져다 놓았다. 문제는 그때 그 자리가 영화적으로는 성립된다 할지라도 한국 가옥구조에서 건축적인 선을 기형적으로 왜곡시키거나 종종 파괴적으로 침범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마 그걸 나보다 임권택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frame_in_frame_ 문 안의 혹은 문 밖의 풍경 < 신궁 >은 이 문제를 이상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종종 여기서는 카메라가 왕년이의 방 안에 들어가기를 망설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저 바깥에 머물면서 방 안을 들여다본다. 이때 핵심은 문이 화면 안에 또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낸다는(frame_in_frame)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로로 펼쳐져 있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가로로 긴 문이 마치 불필요한 면을 잘라내는 것만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면서 자유자재로 영화의 화면 구도를 다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두 개의 전통이 있다. 하나는 이미 비스콘티가 < 센소 > 혹은 < 레오파드 >에서 귀족들의 집에 들어간 다음 늘어서 있는 방과 방 사이의 문, 혹은 창문을 사용하면서 다시 화면을 분할한 경우이다. 물론 그는 이 방법을 장 르누아르에게서 배워왔고, 장 르누아르는 연극에서 가져왔다. 다른 하나는 이미 1930년대 일본영화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미조구치 겐지는 전통적인 일본 가옥에 들어서서 여러 개의 미닫이문을 겹쳐놓듯이(layers_in_depth) 여닫으면서 인물들의 여러 개의 동선을 전경과 후경에 놓은 다음 가깝고 동시에 멀리(deep_focus) 움직일 때 이 구도를 사용하였다 무엇보다도 < 기온의 자매 >에서의 실내장면들, 혹은 오즈 야스지로가 적산가옥의 마루에 인물들을 앉힌 다음 미닫이문을 애매하게 열고, 혹은 애매하게 닫고, 말하자면 바로 이 애매함의 정취의 자리인 방 안쪽에서 인물들을 찍을 때 사용하였다. 종종 오즈는 그렇게 스탠다드 화면에서 세로가 더 긴 것만 같은 효과의 화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전통을 하나의 영화에서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허우 샤오시엔이다. 이를테면 < 동년왕사 >. 하지만 여기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방 안의 방, 문 안의 문이라는 유럽 건축양식, 혹은 일본 가옥 구조라는 전제이다.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린 시절 아하가 할머니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살았던 집은 일본 식민지 강점하에 세워진 일본식 가옥구조였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것은 건축의 문제이자 동시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적산가옥은 재빨리 사라졌으며 여기서 사용되는 집은 전통적인 초가집이다. 그러므로 방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외부 공간이 된다. 이 가옥에 문을 사용하여 공간을 다시 분할하면 첫째, 반드시 방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구도는 겨울에 찍을 수 없다. 계절이라는 절대성. 기후의 요구. 혹은 강제로 문을 열어놓고 내버려두어야 한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단지 동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이며 인물의 심리 상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방문을 열어놓고 외부에서 찍으면 방문 옆의 벽이 문제가 된다. 오즈나 미조구치, 혹은 허우 샤오시엔은 이 문이 문 안의 문이거나 방 안의 방이기 때문에 문을 겹쳐놓거나 미닫이문의 종이 질감이나 문양을 사용하였다. 정일성 은 이 벽을 단지 어둡다기보다는 마치 지워버린 것처럼 ‘블랙에 가까운’ 어둠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정일성의 구도는 종종 기하학적인 양식처럼 보였다. 이 구도는 항상 성공적이지 않았다. 때로는 마치 화면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마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다소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세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 방에 두 개의 문을 만든 다음 어떤 장면에서는 앞쪽의 문을 열어놓고 그 바깥에서 찍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 뒤편의 문을 열어놓고 방 안에 들어와서 찍어나갔다. 그렇게 되면 다른 문제와 만난다. 세트에서 찍은 장면과 로케에서 찍은 장면을 하나의 씬 안에서 붙여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전혀 다른 날, 전혀 다른 장소, 전혀 다른 시간에 찍은 쇼트를 하나의 씬 안에서 연결시키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임권택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어나간다. <이어도> 정일성 은 이미 이 구도를 다른 영화에서 해보았다. 김기영 과 전해에 찍은 < 이어도 >는 같은 방법을 거의 극단적인 구도까지 밀고 나아갔다. 그래서 마치 이 영화는 단지 공간이 가져다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화면의 비례에 대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어쩌면 < 신궁 >에서는 한발 물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구도가 김기영의 요구인지 정일성의 제안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한다. 김기영은 이미 < 고려장 >에서도 (정확하게 동일하진 않지만)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김기영은 자신이 연극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영화를 연출하면서 숨기지 않았으며 때로는 거기서 가져온 방법(들)을 폭력적으로 밀고 나아갔다. 하지만 정일성과 작업한 첫 번째 영화 < 화녀 >는 그렇게 찍지 않았다. 내게 나쁜 인상을 준 것은 <신궁>을 보기 얼마 전에 <이어도>를 보았고 서로 다른 감독의 이름 아래 동일한 방법을 만났을 때 교집합의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름의 영토에서 만난 동일한 구도. 게다가 <이어도>와 <신궁>은 둘 다 섬에서 촬영되었고 동일한 기후 환경 아래 거의 유사한 신비주의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도>로 미루어 보건대 <신궁>에서의 구도는 정일성의 제안이 분명하다. 그리고 임권택 은 이 구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구도는 이후에도, 이를테면 < 만다라 > 혹은 < 길소뜸 >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 이 구도는 (거의) 사라졌다. 이 구도가 임권택 으로 하여금 훨씬 수월하게 멈추지 않고, 분할하지 않고, 대화의 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long_take) 도와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구도는 임권택의 화면을 멈춰 세우곤 한다. (fixed_camera) 물론 여기엔 어떤 주장이 있다. 주장? 그렇다. 하나의 교육. 하나의 개념. 나는 거기서 임권택의 새로운 긴장을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 신궁 >에서 가끔씩 마치 호흡을 멈추는 것만 같은 화면을 보여주곤 한다. 거기서 종종 리듬은 죽은 듯이 숨을 죽인다. 나는 두 번 반복해서 죽은 듯이, 라고 썼다. 임권택의 우아한 선은 오히려 왕년이가 굿판을 앞두고 부정 탄다면서 남편 옥수가 집요하게 접근하며 옷을 벗기려는 몸짓을 거부하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부주의하면 놓칠 만큼 느리게, 하지만 거의 몸짓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그머니 이동하는 장면에 있다. 정지와 이동. <신궁>은 이 두 개의 운동이 시종일관 긴장을 만들어낸다. 바다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카메라 하지만 실내에서의 기하학적인 구도보다 좀 더 이상한 순간은 야외에서 장면이 진행될 때 갑자기 선 바깥으로 나가는 쇼트들의 존재이다. 왕년이가 굿판을 벌일 때 종종 이런 쇼트들이 등장한다.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혹은 등지고 왕년이는 제사 단을 차린 다음 신령님께 굿을 올린다. 이때 임권택 은 왕년이와 굿판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쇼트를 진행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바다 저 멀리서 굿판을 바라본다. 바다 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또한 그 굿판 주변으로 배가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일성 은 배 위에 카메라를 싣고 멀리서 굿판을 벌이는 주변을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다. 우선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지적하고 싶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건 일종의 상황 설정을 설명하는 쇼트(master_shot)가 아닌가요. 첫째, 그러기에는 굿판으로부터 너무 멀리서 찍었다. 둘째, < 신궁 >에서 이 쇼트는 시퀀스가 시작할 때가 아니라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다.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설정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쇼트는 고전문법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잉여의 자리이다.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 쇼트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스티븐 히스와 닉 브라운은 긴 논의를 제시했다. 스티븐 히스는 오시마 나기사의 < 교사형 >에서 고양이의 쇼트를 예로 들었으며(‘Narrative Space’) 닉 브라운은 < 역마차 >의 식탁 테이블을 문제 삼았다. (‘The Spectator-in-the-Text: The Rhetoric of < Stagecoach >’) 좀 더 긴 논쟁도 있다. 오즈의 < 만춘 >에서 교토에 아버지와 노리코가 여행을 가서 잠든 그 날 밤 료칸 방 안의 화병이 문제가 되었다. <신궁>은 같은 맥락에서 좀 다른 문제와 만난다. 여기서 정일성이 달리는 배 위에서 굿판을 멀리서 바라볼 때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도 아니다. 바다에는 어떤 배도 떠 있지 않았고, 또한 사실주의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신비한 제3의 시선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장소는 바다 위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이 광경을 이 위치에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멈춰 서서 바라보는 대신 배가 달리면서 찍었기 때문에 카메라의 운동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배와 카메라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혹은 이 쇼트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이제까지 일관된 어떤 미학적 원칙에 따라 사용된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그냥 간단하게 이 쇼트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인상적으로만 말한다면 진행되던 쇼트의 선 바깥으로 나가버렸다기보다는 차라리 갑작스러운 쇼트가 진행되던 리듬을 찢으면서 침범했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 누군가는 로셀리니가 < 전화의 저편 >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빨치산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무심하리만큼 객관적인 쇼트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궁>에서의 이 쇼트는 보는 자리를 관객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질문한다면 차라리 이 쇼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게 영화 안의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무언가 빠져나온 것 같지만 어디선가 멈춰버린 쇼트가 씬 안에서 존재한다는 뜻. 나는 이 애매함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임권택 은 왜 이런 쇼트를 허용한 것일까. 그 쇼트의 효과는 무엇인가. 여기서 쇼트 사이의 새로운 방향이 생겨난 것이다. 방향?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고 싶다. 쇼트(shot)들이 일종의 면(plan)이라면 영화는 그 면을 연속적으로 세워놓으며 서로 반사하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고전주의의 방법은 이 면들을 어떤 간격으로 세워놓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면 자체에 관한 장황한 이론은 잠시 건너뛸 생각이다. 이때 임권택은 갑자기 일렬로 세워진 면들 사이에서 하나의 면을 더한 다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로로 세워진 일련의 면들의 집합을 바라보면서 하나의 면을 갑자기 세로로 놓은 것이다. 세로의 인서트. 그러나 이 쇼트가 시점 쇼트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왜상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시퀀스 안에서 이야기를 따라 왕년이와 함께 여기에 온 우리가 갑자기 이야기 곁으로 비스듬히 나와 왕년이를 바라보게 된다. 이걸 주관적 씬과 객관적 씬의 분리라고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인 설명이다. 핵심은 이 인서트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씬이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이 인서트 자체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 갑작스러운 쇼트가 주는 운동감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쇼트는 고립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쇼트는 앞과 뒤의 어디에도 달라붙지(raccord) 않는다. 노엘 버치는 그걸 정확하게 설명했다. 쇼트가 달라붙지 않을 때, 버치의 표현을 빌리면 ‘잘못 달라붙었을 때(faux_raccord)’, 우리는 영화에서 시각기호를 가독기호(lecto_signe)로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쇼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면 당신은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거기서 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가요, 라고 해야 한다. 나는 소설을 쓰는 위험을 피하고 싶다. 임권택 과 정일성 이 여기서 어떤 의견을 교환했는지 알지 못한다. “< 신궁 >을 만들었을 때는 서로의 스타일이 있었어요. 내가 앵글을 잡을 때 그 장면에 대해 반드시 임 감독과 나는 토론을 했어요. 그때 임 감독이 그러더군요. 토론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이 쇼트를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한쪽이 제안했고 다른 한쪽이 그걸 받아들였다. 우선 영화의 경제학에 따른 복기. 굿판이 열리는 장면을 바다 위에서 달려가는 배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는 것은 그 순간 갑자기 어떤 영감을 받아서 촬영의 위치를 옮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배를 준비하는 것은 제작비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결정이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콘티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 더. 촬영팀이 모두 배로 옮겨 이 쇼트 단 하나를 찍기 위해 시간을 보낼 때 다른 모든 팀은 그저 구경을 하고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섬에 가서 촬영을 하는 것은 날짜와의 싸움이다. 그 상황에서 임권택은 이 한 장면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이다. 어떤 신호? 임권택 은 질서정연한 시스템을 갑자기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 쇼트는 그 위기를 알리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고 싶다. 왜 임권택은 위기를 필요로 하는가. 용기를 내서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그는 질서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어떤 질서? 가로의 질서. 일단 이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 안정적인 공간이 영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긴밀한 문법의 네트워크. 그 안정 바깥으로 무리하게 나갈 때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들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지 않으면 영화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공간이 안정되고 나면 이 시스템이 거의 물샐틈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거의 고유명사화 된 ‘오즈적인 것(小津的’なもの)’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영화에서 180도란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 라고 탄식하듯이 말한다. 영화는 일단 그 안으로 들어오는데서 시작한다. 임권택은 그 안에서 시작한 감독이다. 그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찍었다. 좀 더 중요한 지적이 남아있다. 충무로에서 이 법칙을 벗어나면 스텝들은 촬영에 협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서 설명할 필요도 없이 < 장희빈 >을 찍으면서 시간에 쫓긴 정창화 가 상상선을 벗어나자 조감독 임권택은 그러면 안 된다, 고 조언을 했다가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로의 쇼트는 탈출의 신호이기도 하다. 물론 임권택은 지속적으로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첫 번째 신호가 < 잡초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탈출이 일시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반복적인 힘을 지속적으로 마주해야만 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나는 수 없는 탈출의 신호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아니, 차라리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반동적인 힘들의 예를 설명할 수 있다. <잡초> ‘이후’의 영화들에서 내가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것은 기괴할 정도로 불균질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임권택이 그 공간의 성질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질문을 한 쇼트들일 것이다. 그는 성질을 바꾸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스스로 항상 외면하려고 애쓴) ‘나쁜 버릇’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신궁 >이 임권택의 일흔 한 번째 영화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 전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시퀀스 전체를 와해시키는 지경으로까지 밀고 나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쇼트의 자리는 약간 애매해 보인다. 이야기는 유지되면서 성질이 다른 쇼트가 그 안으로 뛰어들 때 이 세로의 쇼트는 정확하게 이야기 안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바라보는 쇼트. 하지만 임권택은 이 쇼트의 권리를 보는 쪽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이때 나는 약간 까다로운 가정을 해보고 싶다. 이 쇼트는 현장에서 촬영의 관점에서 관념적인 설명에 기댄 장면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쇼트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출의 관점에서 이 쇼트는 편집의 맥락에서라면 미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지금 둘 중 이 쇼트가 누구의 권리냐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쇼트가 두 사람의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고 정말 믿는다. 그래서 여기서 바쟁이 했던 영화라는 과정에 관한 비평의 방법론에 따라 이렇게 추론하고 싶다. 임권택 은 현장에서 관념적인 관점의 ‘잉여의’ 촬영을 받아들였고 정일성 은 이 장면이 편집실에 가서 미학적인 관점의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는 쇼트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촬영과 편집 사이에 놓인 사전적인 작업과 사후적인 작업 사이에 놓인 간극을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나는 이 장면이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일성 은 자기의 장면이 어떤 쇼트가 될 지를 가정하면서 촬영을 했을 것이다. 임권택 은 그 잉여의 촬영을 허락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두뇌 속에서 영화를 다시 편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임권택의 영화가 불균질을 받아들이면서 안정적인 공간 안에서 정신적인 그것,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는 신호가 되었다. < 신궁 >은 괴이한 신비주의와 따분한 진부함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순간 임권택의 어떤 도약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 내가 그해 겨울 이 영화를 보고 당황한 것은 그 해 봄에 < 족보 >를 보고 느꼈던 아름다움이 일시에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폭력적으로 느슨해져가면서 그 사이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그 정신적인 그것, 앞에서의 당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신궁>이 아니었다면 < 만다라 >는 없었을 것이다. 두 승려가 불가의 가르침에 관한 화두를 끊임없이 토론하며 걸어가고 또 걸어가는 그 정신적인 만행길. 정신적인 그것임. “내가 유현목 감독의 < 사람의 아들 >을 찍을 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때 마침 임감독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병원에 와서 위로를 하며 이번에 퇴원을 하면 자신과 함께 새 영화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수술 결과는 끝나봐야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집에서는 장례식 준비까지 모두 마친 상태였습니다”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 그때 병원에 찾아와서 말한 새 영화가 < 만다라 >이다. 임권택 은 <만다라>를 정일성 만이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신궁 >은 <만다라>로 가는 과정의 영화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조만간에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시작할 생각이다. (계속) 1979년 93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흥업 각색 김지헌 촬영 정일성 조명 손달호 편집 김희수 음악 김동진 윤정희 김희라
이번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서는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여든아홉 편의 영화 중 약 1/3에 해당하는 스물아홉 편을 상영한다. 몇몇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줄거리나 배우를 보고 영화를 고를 필요 없이 무조건 많이 섭취하시라는 당부 말씀드리고 싶다. 한 감독의 영화를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며, 특히 나루세의 영화는 여러 편이 한데 모여 확장되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드시. 많이. 보실 것. 우선 특별전이 구정 직후에 시작함에 착안하여 비교적 유명한 5~60년대 영화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들을 아내와 가족이라는 주제로 묶어 권하고자 한다. 나루세 영화 중에는 집념 어린 사랑의 이야기 < 부운 >이나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독립을 다룬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처럼 집단의 관념 바깥으로 이탈하는 여성들을 다룬 작품이 특히 유명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그 여성들을 안에서 붙잡는 가족의 존재가 있다. 나루세는 이 가족을 ‘어쨌든 우리는 가족’이라는 식으로 끌어안는 대신 안으로부터 생긴 균열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명절 가족 모임에서 원치 않는 내상을 입었다면 (현실 도피가 아닌) 살풀이로 이만한 영화들도 없다. < 아내 >는 < 밥 >, < 부부 >를 잇는 ‘부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세 편 모두 아이를 갖지 않은 채 권태기에 빠진 부부를 다루는데, 그중에서도 <아내>의 설정은 거의 진부하게 들릴 지경이다. 남편이 아내 귀한 줄 모르고 바람을 피운다. 끝. 그런데 핵심은 여기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상대와 다른 살림을 차리지도, 부부가 대판 싸우고 별거하거나 이혼하지도,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집을 나가고 들어오며 이 부부를 흔들어 놓는 세입자와 친구들의 참견이 뜻밖에 코믹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미결정과 불확실의 상태는 가실 줄을 모른다. 아마도 고통스러운 이야기일 테지만, 사건에 변화를 주어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상황 자체를 세밀히 직시하는 담담한 시선이 주는 쾌감이 있다. < 아내의 마음 >의 가족은 규모가 더 크다. ‘아내’에게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이도 있고, 시어머니도 있고, 시동생도 있고, 동서도 있고, 조카도 있다. 게다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부부에게 시동생네 가족이 기약 없이 신세 지러 온다는 설정이다. 그렇다고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을 기대하면 금물. 이 가족 중 누구도 ‘아내’에게 악의를 품지 않으며, 뒷공론을 하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는 데에 열을 올리지도 않는다. 막장 드라마에 단련된 관객에게 이 시어머니나 동서는 차라리 천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안 곳곳에서 상대를 마주치고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점점 더 이들을 견딜 수 없어진다. 급기야 두 인물이 한 화면에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사건이나 인물의 성격 이전에 공간과 동선이 가족의 불편함을 전달한다. 이번 특별전의 포스터에 쓰인 사진이 바로 <아내의 마음>이니 궁금하셨던 분들은 참고하실 것. 참, 그리고 여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인 미후네 도시로도 출연한다. 목소리와 동작이 굵고 커서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배우에게 나루세가 어떤 역할을 주어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재미난 볼거리다. < 딸, 아내, 엄마 >는 나루세 가족 영화의 총결산 같은 영화다. 가족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하라 세츠코와 다카미네 히데코를 필두로 과거 나루세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가 다수 출연한다. 이들이 이전에 맡았던 역할이 남긴 잔상을 끌고 들어오거나 변주하면서 안 그래도 큰 가족을 더욱 확장한다. 달라진 점이라면 젊은이들이 더 늘어났고, 그들은 가족이라는 관념 앞에 더욱 냉정하다는 것. 집안에 갑자기 닥친 위기 앞에 오 남매가 모여 모든 감정적인 반응을 배제하고 실리를 따지며 대책을 논의하는 대목은 나루세의 가족 영화 중 가장 지독하고도 상쾌한 순간이다. 또 아내라기보다는 거의 식모처럼 나와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화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다카미네 히데코가 불현듯 카메라를 독점한 채 그간 품어왔던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토로하는 대목은 가족을 폐기처분하지도, 숭앙하지도 않는 가운데 공존의 조건을 모색해 온 나루세의 결론처럼 들린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떤 유명한 배우가 등장하는 순간, 일본 영화가 빚어낸 전통 가족이라는 하나의 우주가 휘청거린다. 반드시, 하지만 가능하면 나루세의 다른 가족들을 일별하신 후에, 보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