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근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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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엄마 미안해요
- 감독
- 민용근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윤혜림, 임진아
혜화,동
- 감독
- 민용근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노영애, 최희원, 김나연, 김주연, 신지민, 진종민, 김유진, 안유미, 허차민, 배미주, Remeikis Amy Louisa, 강신, 지용도, 이우정, 한인미, 조현서, 유다인, 유연석, 박혁권, 김주령, 최희원, 정재민, 손영순, 길혜연, 박성연, 박성준, 이진숙, 조덕제, 별님이, 김태인, 권오진, 구재연, 이선주, 박진수, 정순원, 최성준, 한서윤, 정경희, 장리우, 김대중, 서명국, 김종권, 이우진, 나현, 이성은, 김수현, 오운백, 이현주
민용근
- 참여 작품
- 크로스 (2022), 소울메이트 (2021), 고양이춤 (2015), 자전거 도둑 (2014), 어떤 시선 (2012), 사랑해! 진영아 (2012), 두 개의 문 (2011), 나나나: 여배우 민낯 프로젝트 (2011), 열병 (2010), 사랑은 100℃ (2010), 혜화,동 (2010), 원 나잇 스탠드 (2009), 친구사이? (2009), 소년, 소년을 만나다 (2008), 도시락 (2007),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07), 도둑소년 (2006), 순간접착제 (2001), 와니와 준하 (2001), 봄 (2000), 느린 여름 (1998), 엄마 미안해요 (1997), 주말 (1996)
수집자료
[코난][영상] 서울독립영화제2010 최우수작품상 받은 영화〈혜화,동〉 민용근감독
- 매체규격
- 디지털파일
- 상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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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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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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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잇 스탠드
- 매체규격
- DVD
- 상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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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
- —
-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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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잇 스탠드
- 매체규격
- HDCAM
- 상영시간
- —
-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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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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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동> 사운드 원본
- 매체유형
- MOD 광자기
- 연주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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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소년> 사운드 원본
- 매체유형
- MOD 광자기
- 연주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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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근 감독 "부르면 갑니다">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 —
'혜화,동' 민용근 감독 관객과의 대화
- 실물구분
- 아날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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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스크랩
-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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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근, "혜화의 마음 따라가는 영화죠"<혜화,동>의 민용근 감독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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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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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초이스]꿈의 제인
* 글에 내용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스포일러 주의) 누구에게나 마음의 구멍은 있다. 고통스러운 경험 뒤에 오는 충격의 여파로 구멍은 생기기도 하고, 언제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른 채 뒤늦게 뻥 뚫린 구멍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크기와 연원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마음의 구멍은 누구나 안고 가야 하는 존재의 일부일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커져 버린 구멍에 잠식되어 쓰러지는 사람들을 볼 때나, 자신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칼바람에 한기와 통증이 느껴질 때, 고민은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이 구멍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이때 부터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진실하지 않았어요. 그거 아세요?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저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 < 꿈의 제인 >의 주인공은 ‘소현’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녀다. 영화는 그녀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처음 배운 말이 왜 거짓말이었는지, 왜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단언하는지 알 수 없다. 영화는 그 말이 남긴 물음표를 화두 삼아, 소현과 함께 미로 같은 길을 걸어간다. 영화는 소현이 트랜스젠더인 제인의 팸에서 살았던 전반부와, 제인이 세상을 떠난 뒤 병욱의 팸에 들어가 가혹한 삶을 사는 후반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시제가 연속적으로 이어진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각기 다른 역할로 등장하는 같은 인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중첩되는 비슷한 사건과 공간 등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전체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하게 만든다. 영화의 어떤 부분은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어떤 부분은 소현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말이다. 결국 그 재구성을 통해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자기 마음의 구멍을 메우려 발버둥 치는 소현의 안간힘이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자신에 대한 환멸,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현은 ‘거짓말’이라는 자구책을 찾아냈다. 소현의 거짓말은 진실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점점 커져가는 마음의 구멍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내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인 것이다. 영화의 서두에 던져진 소현의 말은 그녀가 자기 마음의 구멍을 어떻게 메우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그리고 자신의 안간힘이 결국 미봉책이 될 것임을 그녀도 이미 알고 있다. 가출 팸의 아빠로 나오는 병욱 역시 마찬가지다. 팸의 권력을 쥐고 있는 그는 얼핏 소현의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럴듯한 미사여구와 폭력적인 방법을 교대로 써가며 가출 팸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병욱 역시 소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의 위선과 권위적 행동들 역시 소현의 거짓말과 방법만 다를 뿐 근원은 같다. 결국 지수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그는 급격히 무너지고, 인정욕구에 목마른 연약한 존재였을 뿐인 자신의 밑바닥을 들킨 순간 친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어릴 적 어미나 또래 고양이들과의 함께 뒹굴며 생활해온 고양이는 ‘배움’의 경험을 통해 날카로운 이빨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습득한다. 공격을 위해 무는 강도와 애정 표현을 위해 무는 강도가 어떻게 다른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움이 없는 고양이가 행하는 애정의 스킨쉽은 상대방에겐 기피와 공격의 대상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소현과 병욱, 그리고 아이들은 너무 일찍 홀로 되었다. 오직 생존을 위해 살아온 그들에겐 본능적인 인정욕구만 있을 뿐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적당한 시기에 올바른 배움이 체화되었을 때 사람은 인위적인 노력을 애써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관계에 녹아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놓쳤을 때 악순환의 굴레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구멍이 커지고 그 커진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이 오히려 구멍을 더 크게 만드는 악순환. 그래서 어쩌면 소현은 ‘영원히 사랑받지 못 할 거’라는 예감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 소현에게 제인이 나타난다. 소현은 제인으로부터 ‘UNHAPPY’ 라 각인된 손목 도장을 받는다. ‘UNHAPPY’라는 이름의 혜안. 그 짧은 스침을 통해 소현은, 배움의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을 품게 된다. 그 간절함이 결국 실현됐는지, 그냥 상상으로 그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제인을 바라보는 소현의 얼굴은 그 눈빛과 미소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결국 마음의 구멍은 완전히 메울 수 없다는 것. 그 구멍을 껴안은 채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런 체념이 오히려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소현은 이미 자신도 알고 있는 그 배움을 제인에게 다시 확인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배움의 시기를 놓쳐버린 존재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 방법을.
[칼럼]독립예술영화관의 포스
영화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무엇일까 떠올려보면 좀 가물가물하다. < 해돌이의 대모험 >이라는 영화를 보았던 세종문화회관이었나, 아니면 < 이티 E.T. >를 보았던 푸른극장이었나. 암튼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나는 영화관이라는 곳을 처음 갔었고, 그 이후엔 아버지 친구분이 주시던 극장 초대권을 받아 대한, 명보, 스카라 등의 영화관을 누비곤 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없던 당시에는 영화 자체에 대한 기억만큼 큰 추억을 주던 곳이 바로 ‘영화관’ 그 자체였다. 각 극장이 가진 각기 다른 공간적 매력이 있었다. 건물 전면을 커다랗게 차지하던 영화 간판부터, 매표구, 로비, 화장실까지 모든 공간 하나하나가 퀴퀴한 향기와 함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또 당시엔 각 영화관이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올겨울 대한극장이 당신을 위해 선택한 영화’라는 식의 카피가 가능했고, ‘화양, 명화, 대지’ 극장은 당시 홍콩 누아르의 붐을 일으켰던 성지와 같은 곳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관들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곳’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넘어선 남다른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 영화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영화+영화관’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기업의 멀티플렉스가 대부분의 영화관을 차지하고 있다. 시설 및 편의성의 측면에서는 옛 극장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세련되어졌지만, 지금은 영화만 남고 영화관은 사라져버린 것 같다. 지금의 극장은 편하고 화려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 단순히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장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래도 이러한 대세는 변할 리 없겠지만, 한편으로 당시의 영화관이 뿜어내던 ‘포스’가 사라져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포스를 뿜는 영화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몇 편의 독립영화를 개봉하는 과정에서 나는 각 지역에 있는 독립예술영화관을 만났다. 서울, 인천, 강릉,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등에 있는 각 독립예술영화관에서는 옛 극장들에 비견될만한 개성 넘치는 포스가 느껴졌다. 그곳에서 나는 사라져버린 옛 극장에 대한 향수만을 느낀 건 아니었다. 우선 상영되고 있는 영화들이 달랐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 형식을 가진 독립, 예술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고, 때론 상업, 정치적인 이유로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외면받은 영화들도 상영되었다. 획일적인 상업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이 그 영화관을 통해 문화적 욕구를 해결하고 있었고, 때론 제작진과 관객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앉아 확장된 수다를 나눌 수 있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당 영화관의 프로그래머와 운영진의 개성에 따라 그 방법과 분위기는 각기 달랐고, 그 각기 다른 방식이 주는 재미 역시 각기 달랐다. 영화만 남는 곳이 아니라 ‘영화+영화관’이 함께 기억될 문화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우리는 그 영화관들을 하나씩 잃어갈지도 모른다. 그동안 이런 극장들이 유지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각 극장의 자유로운 영화 선택권을 보장해주던 기존 제도가 폐지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위탁한 단체에 의해 선정된 영화를 반드시 상영해야만 지원해준다는 일종의 ‘조건부’ 지원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보다 자유로운 프로그래밍이 보장되어야 할 독립예술영화관에 있어서, 지원을 전제로 프로그래밍의 폭을 제한하는 것은 독립예술영화관의 정체성을 버리라는 일종의 사형선고와 같다. ‘영화’라는 것은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이 있고,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이 있고,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철학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를 우리는 ‘문화적 토대’라 부르고, 영화관은 그 토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의 독립예술영화관은 어떤 문화적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는가. 통계상 관객 숫자, 벌어들이는 돈, 얼마나 이슈가 되는가, 혹은 자유로움을 억누르려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만 우리의 문화적 토대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는 현재 개정하려는 ‘예술영화 유통 배급 지원 사업’이 어떤 개악의 요소가 있는지 돌아보고, 영화계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개성 넘치는 독립예술영화관들의 포스를 지켜주어야 한다.
[초이스]꿈보다 해몽
꿈. 이라는 글자를 적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양에서 조금 묘한 느낌이 든다. 또 모양만큼이나 발음 역시 묘하다. 꿈. 꿈. 의뭉스럽기도 하고 초탈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여튼 뭔가 꿈꿈한 느낌이랄까. 또 하나 재미난 점이 있다. 우리가 ‘꿈’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보통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잠을 자면서 나타나는 어떤 정신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꿈’(꿈1)과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나타내는 ‘꿈’(꿈2). 이 두 가지 의미는 언뜻 봐선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같은 모양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신기한 점은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영어에서 Dream이라는 단어 역시 꿈1과 꿈2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일본어에서도 꿈을 나타내는 ‘유메(ゆめ)’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꿈’이라는 단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는, 인류학적으로 뭔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광국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 < 꿈보다 해몽 >을 보며 나는 꿈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두 가지 의미의 연관성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더 이상 관객이 찾지 않는 연극을 때려치우고 나온 한 여배우( 신동미 분)가, 과학수사보다는 꿈 해몽에 능한 형사( 유준상 분)를 만나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여배우가 꾸었던 꿈으로 들어갔다가 그것을 해석해주는 형사의 이야기와 형사 누나가 꾼 꿈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여배우가 1년 전에 헤어졌다는 전 남자친구 ( 김강현 분)의 꿈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영화는 쉴 새 없이 현실과 꿈 사이를 들락날락거린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영화를 두 번 보았는데, 처음 볼 땐 자연스레 꿈1에 집중하며 보았다. 즉, 꿈1의 관점으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와 그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이야기에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꿈과 현실의 불분명한 경계와 그 상호작용이 꽤나 흥미로웠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 인셉션 >이 비교적 논리적인 체계 아래에서 꿈속의 꿈으로 들어간다면, < 꿈보다 해몽 >은 논리적 전개과정이 무의미한, 말 그대로 꿈에 가깝게 꿈을 그려낸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번째로 영화를 보았다. 같은 영화였지만 다른 영화였다. 이번엔 꿈2에 포커스를 맞춰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연기라는 꿈을 박차고 나온 여배우, 그녀와 헤어진 뒤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 세계로 사라져버린 전 남자친구,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소년과 그것을 끊임없이 지우려고 하는 소년의 엄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 표면적으로 꿈1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모두 자신의 꿈2에 대해 갈등하고 성찰한다. 영화는 연기를 그만두겠다며 무대를 박차고 나온 여배우의 모습으로 시작해, 곧 시작될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은 여배우의 미소에서 끝을 맺는다. 그 미소에서 느껴졌던 긍정의 에너지가,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꿈(1+2)에 대한 해몽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 구조에 이끌렸다면, 영화를 다시 보며 더욱 깊게 다가왔던 건 각박한 현실 속에서 꿈2에 대한 용기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응원의 메시지였다. 꿈1을 통해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된 꿈2라는 존재. 꿈2에 대한 자각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는 꿈1의 모습들. 비록 아직 현실에서 일어나진 않았지만, 어떤 기대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꿈이라는 존재. 서로 마주 보며 닮아가는 두 개의 꿈은 하나의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했다. 어쩌면, 꿈의 어원에 대한 영화적인 답변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