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무희, 최승희
- 감독
- 후지와라 토모코
- 제작년도
- 1999
체계를 제대로 갖춘 한국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은 현장 영화인들의 ‘숙원’이었다. 나운규 서거 20주기를 맞은 1957년에 영화계의 총의를 모아 이루어진 < 아리랑 >( 김소동 )의 재영화화 작업이 그 포문을 열었다. 나운규라는 영화인을 통해 ‘민족’영화사의 기원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곧 본격적인 영화사 서술로 이어졌다.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영화사 편찬 작업이 불발로 그친 이후에, 한국영화인협회는 1969년, 마침내 <한국영화전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영화인협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영화전사>를 집필한 이영일이 이 책의 후기에서 스스로를 ‘편저자’로 지칭하고 있음은 단지 겸양이 아니다. <한국영화전사>는 협회가 기획한 한국영화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이었을 뿐 아니라, 협회에 소속된 많은 영화인의 구술 증언을 그 뼈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영일은 스스로 술회한 것처럼 “영화계의 숙원을 구현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떠맡은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영화사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분과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현장 영화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세우는 일에 그토록 헌신해왔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우리는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 직업적 전문성으로 무장한 역사가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역사를 역사가의 손에 놓아두지 않고 그들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던 것일까? 물론 <한국영화전사> 그 자체가 그들이 직접 써야만 했던 ‘역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의 기치 아래 일제강점기의 영화 유산은 남한 영화의 전사(前史)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남한의 영화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과 자아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전사>를 저류하는 발전사관과 냉전적 사고방식은 1990년대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이 책이 자리매김해놓은 한국영화사의 빛나는 걸작과 뛰어난 작가들은 여전히 그 명성을 잃지 않았다. 그 오래 지속되어온 영향력에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순간, 맞닥뜨려야 하는 본질적 질문은 앞서 던졌던 바로 그것, 즉 왜 현장의 영화인들은 그들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는지일 것이다. < 나운규 일생 >( 최무룡 , 1966)을 볼 때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현장의 영화인들이 영화로 쓴 영화사며, 특히 나운규 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를 구성하고 있는 <한국영화전사>의 영화 판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부터 경성촬영소에 이르기까지, 또 < 운영전 >( 윤백남 , 1924) 에서 < 오몽녀 >( 나운규 , 1937)에 이르기까지 당시 영화계의 상황과 영화 제작 현장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기는 해도,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영화가 그려낸 그 시절의 모습이 흡족할 수는 없다. 후대의 여러 ‘전문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 영화계와 관련한 많은 새로운 사실(史實)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 예컨대 < 아리랑 > 상영 당시 실제로 임석 경관의 제재가 있었는지, 나운규가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은 이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심문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1957년의 <아리랑>에서 <한국영화전사>까지를 관통하면서 십수 년간 지속되어온 현장 영화인들의 역사 쓰기에 대한 열정과 욕망이 나운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묻는 편이 더 현명한 일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독립운동가로서 나운규 의 형상이, 후반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몸을 불사르는 예술가로서 나운규의 형상이 압도적이다. 이는 <한국영화전사>가 그려낸바, 민족운동의 지사이자 강렬한 예술의지에 불타는 예술가로서의 영화작가 형상에 정확히 부합한다. 굳건한 민족의식과 예술의지를 가진 영화작가야말로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의 영화사를 지탱해온 주축이었다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전사>와 < 나운규 일생 >이 공히 주장하는 바다. 하지만 민족운동가와 예술지상주의자 사이의 간격은 넓고도 깊다. <한국영화전사>에서도 영화를 계몽적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와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정황이 종종 목격되기는 하지만, 둘 사이의 모순은 영화 < 나운규 일생 >에서 훨씬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독립운동가 박용운의 유지를 받들어 “잠든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영화를 선택했던 나운규 가 자학과 자기연민에 빠져 기생의 치마폭에 파묻혀 살 때, 또 그러던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 오몽녀 >의 촬영 현장에서 마지막 레디고를 부르고 쓰러질 때, 관객은 영화 속 나운규가 보여준 급격한 변화의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나운규 의 극적인 변화가 영화 속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영화감독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차라리 민족영화의 시원(始原)이자 한국영화인들의 지향점으로 구성되어야 했던 역사적 인물 나운규의 무게가 영화 속 캐릭터의 일관성과 설득력을 앗아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영화전사>가 이영일의 것만은 아닌 것처럼 < 나운규 일생 > 또한 영화감독 최무룡 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운규 일생>은 ‘걸작의 재발견’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로 쓴 영화사 <나운규 일생>이야말로, 반세기 가까운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영화사 서술의 특정한 관점을 재고하는 자리에서라면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개봉 직전 재 검열 소동 일으킨 항일 표현 - 이규환 감독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세상에 실체(필름)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명화가 있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 아리랑 >(1926)을 비롯한 < 임자 없는 나룻배 >(1932), 해방 후의 < 십대의 반항 >(1959, 김기영 감독)과 < 젊은 표정 >(1960, 이성구 감독), < 잉여인간 >(1964, 유현목 감독), < 만추 >(1966, 이만희 감독)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규환 감독의 < 임자 없는 나룻배 >(유신柳新키네마주식회사 제작)는 나운규 의 < 아리랑 >(1926)과 더불어 해방 전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불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1932년 9월 18일부터 4일간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칫 첫 상영이 무산될 뻔했다. 그때는 낮 흥행 없이 밤 상영만 일곱 시에 있었는데, 이미 여섯 시 쯤 되자 극장은 설자리가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들떠 있는 이규환 감독에게 극장 직원이 “검열계에서 급히 필름을 갖고 오라”는 말을 전했다. 상영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광화문 조선총독부 도서과 검열계로 달려간 그에게 검열주임은 그날 배달된 석간신문을 내던지며 ‘임자 없는 나룻배’란 조선민족을 암시한 것이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 신문에 실린 < 임자 없는 나룻배 >의 시사 평 가운데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해준 영화”라는 대목이 그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 감독은 어렵게 문제가 되는 마지막 필름 한통만 다시 보이기로 타협하고 주인공 춘삼이 철로를 때려 부스는 장면 1백50여자를 잘라내는 것으로 재검열의 곤욕을 치렀다. 그가 서둘러 극장으로 달려왔을 때는 개봉시간이 40여분이나 지난 뒤였다. ( 이규환 의「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 중앙일보, 1979, 12, 18 1980, 3, 8) 그렇다면 ‘항일표현’으로 의심받은 < 임자 없는 나룻배 >는 어떤 영화일까. 농부인 정춘삼( 나운규 분)은 가뭄과 수해 등 겹치는 재난으로 살 길이 막연해지자 아내( 김연실 분)와 더불어 서울로 올라와 인력거꾼이 된다. 하루는 춘삼이 집에 돌아오니 만삭(滿朔)이 된 아내가 난산을 겪고 있다. 병원비가 없어 남의 집 돈을 훔쳤다가 뒤쫓아 온 순사에게 잡히고 아내는 길거리에서 아이를 낳는 처지가 된다. 그 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춘삼은 자동차 운전수와 동거생활을 하는 아내로부터 어린애를 빼앗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동안 딸( 문예봉 분)은 아버지의 뱃사공 일을 도울 만큼 다 자란 처녀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들 부녀에게 큰 어려움이 닥친다. 그들이 사는 강가 한 가운데에 철교가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내는 배 삯으로 생활을 해왔던 것인데, 이제 그 수입의 기반마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춘삼은 딸에게 욕심을 품고 괴롭히는 공사장의 감독( 임운학 분)을 보다 못해 도끼로 찍어 죽이고, 달려오는 기차에 치어 죽음을 맞는다. 아울러 그가 집에서 달려 나올 때 방바닥에 넘어뜨린 석유등잔이 불길로 번지면서 잠을 자고 있던 딸 애연(愛蓮)마저 삼키고 만다. 이 영화는 관객과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된 영화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온 조선 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치 단순한 스토리로 그만치 성공한 것은 감독, 촬영, 연기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운규 가 주연하는 춘삼이란 한 개 농부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조선 민족이라는 한 민족의 이야기로 볼 때 비로소 그 감격이 커지는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일을 빼앗기고 아내를 빼앗기고 또다시 생명의 줄과 딸을 빼앗기고야 말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거기 대항할 아무런 복안도 없이 오직 신명께 기도나 올리고 있는 춘삼이 그것은 곧 조선 민족의 한 전형이다. (중략) 조선인으로는 한 번 보지 않으면 안 될 사진이다. (허심,「유신 키네마 2회작 ‘ 임자 없는 나룻배 ’ 시사평」동아일보, 1932, 9, 14.) ―「 임자 없는 나룻배 」! 여러 가지 조선 영화에서 가장 시적 표현인 제목이다. (중략)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으로 일관하여 있다. 농촌 생활에 파경을 당한 자의 막연한 상경은 늘 이러한 비극을 지어내기 쉬운 것이다. 생계를 잃어버린 농군들의 도시 진출, 거기에는 항상 빈곤과 도회적 유혹이 쫓아다닌다. 이 빈곤과 유혹 사이에 끼여 싸우는 자, 또 이러한 비극을 빚어내는 자, 어찌 춘삼의 아내뿐이랴. (중략) 나는 이 작품을 가리켜 조선의 현실을 잘 표현한 온건한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송악산인(宋岳山人), 매일신보, 1932년 9월 14~15일) 한마디로 < 임자 없는 나룻배 >는 민족적 비애의 정서를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탁월한 영화였다. < 아리랑 >과 함께 이 영화의 필름을 찾게 되는 그런 날이 언제쯤 찾아올까, 평생에 꿈같은 이런 희망을 가져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