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수탄도
- 감독
- 밀리수탄도 봉겔라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밀리수탄도 봉겔라, 제시카 두차, 매리언 아이작스, 베티나 말코메스, 소미카지 은티킨카
<소년시절의 너> 중 / 사진: Far East Film Festival 대만, 중국, 홍콩을 아우르는 동시대 중화권 청춘영화는 어딘가 안전한 자리로 호출되곤 한다. 이는 가볍고 말랑한 감정의 외피를 두른 ‘틴 로맨스’나 ‘학원물’이 지배적인 인상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과 방 한 칸을 배경으로 한 ‘도시 로맨스’, 혹은 성적 지향이나 계급적 주류 범주에서 벗어나는 ‘아웃사이더’의 지난한 성장 서사 또한 그 반경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거짓 없는 미소와 서툰 고백에서 길어 올린 풋풋한 청춘의 초상과, 체제와 현실의 제약 속에서 너무 이르게 마모되어 버린 성장의 잔혹한 기록. 두 계열은 서로 다른 미학과 정서를 지닌 채 엇갈린 방향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의 희미한 슬픔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교차하고 중첩된다. 우리가 중화권 청춘영화로 부르는 범주는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이 영화들은 어떻게 하여 이토록 ‘범아시아적’ 생명력을 유지하는가? 질문은 자연스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누군가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구파도, 2011)나 <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조미, 2013)을 기점으로 삼을 테고, 또 다른 이는 < 남색대문 >(이치엔, 2002)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더 긴 역사적 궤적 속으로 옮기면, 중화권 청춘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동시대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우선, 대만 뉴웨이브와 중국 6세대 영화, 그리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되어 온 홍콩 뉴웨이브의 성취 속에서 그 정서적, 미학적 뿌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나 아닌 여럿: 중화권 청춘영화의 기원들 누구나 겪지만 결국 지나간 과거로 남게 될 통과의례의 순간. 대만 뉴웨이브는 이러한 청춘을 형상화하는 데 탁월했던 시기로 기억될 만하다. 교복 입은 인물들의 초상이 전면에 놓인 작품도 가히 많았다. 그 출발점에 자리한 <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외 3인, 1982)의 옴니버스 구성 가운데 타오더천과 에드워드 양이 각각 연출한 첫 두 에피소드(“작은 용 머리”와 “기대”), 그리고 진곤후 감독의 < 샤오피 이야기 >(천 쿤하우, 1983)는 소년·소녀들의 작고 애틋한 바람결 같은 초상을 내세운다. 그 물밑으로는 미국 이민, 대학 진학, 도시 중산층 진입이라는 당대 사회적 분위기의 기대와 규범이 조용히 도사리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의 반복을 미묘하고 리드미컬하게 포착한 이 감각은 <남색대문>과 같은 영화들의 정서적 결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오늘날 중화권에서 ‘작은 청신함’이라 불리는 샤오칭신(小清新, Xiao qingxin)의 감정 구조와 그것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체화되어 온 흐름의 잠재태를 내포하고 있다. [1] 그러나 이 계보는 허우샤오셴의 < 연연풍진 >(1986)을 비롯한 성장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까지 대만 뉴웨이브 1세대가 소외된 젊은 세대를 응시해온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들은 포스트-경제 기적 시기에 접어든 관점에서 계엄령 시기의 역사적 조건을 되비추는 장치로서 청춘을 호출하며, 어쩔 수 없이 감내하며 통과해야 했던 국면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담담한 일상으로, 때로 서늘하고 비정한 상태로 각인되는 한편으론 감독들의 노스탤지어와 자전적 경향을 투사한다. 도시로 향한 젊은 연인들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흘려보낸 기억으로 남기거나(<연연풍진>), 백색 테러의 광풍과 외성인이라 불린 본토 이주민들의 불안정한 삶의 궤적을 통과하던 청년이 끝내 파국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시간(<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속에서, 청춘은 이미 상실을 예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광음적고사>,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중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 Asian Film Archive ) 이러한 정조는 중국 6세대 영화에 이르러 또 다른 시선으로 변주된다. 1989년 이후 중국에서 독립영화 [2] 로 분류될 수 있는 체제 외부의 작품들이 활성화되어, 급격한 시장화 한복판에서 방향성을 잃은 청춘의 초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아장커의 < 소무 >(1997)를 기점으로 가시화된 이 흐름은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장위안 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6세대라는 미학적 진영으로 일컬어졌다. 소매치기인 주인공과 ‘사업가’로 변신한 옛 동료를 대조하며 중국 소도시 시장경제의 비루한 풍경을 날것으로 포착한 <소무>의 감각은 < 쑤저우강 >(로우예, 2000), < 여름궁전 >(로우예, 2006), < 북경 자전거 >(왕샤오슈아이, 2001), < 북경 녀석들 >(장위안, 1992) 등에서 목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머물고 떠밀리며 시간을 견디는 젊음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6세대는 이처럼 국가 주도 계획경제와 개혁개방 사이의 격변기에 놓인 청춘이 조기에 소진되어버리는 감정 상태를 대변하는 성취를 보였고, 이는 세계 영화제 회로에서 환대를 받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중국 본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독립영화’ 정신이 만개했던 때로 기록된다. 작가영화마저 상업영화 및 주선율 영화의 논리에 함몰되어가는 현 풍경을 떠올릴 때, 동아시아 청춘영화의 한 모델―즉, 비관적이지만 정직한 모델―을 제시한 당시 6세대의 성취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2010년대에 들어서며 독립영화의 ‘죽음’이 목격되기 전 [3] , 이러한 계보를 근과거까지 계승하며 그 정서적 맥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리위 감독의 < 관음산 >(2010)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무>, <관음산> 중 / 사진: IMDb( 1 , 2 ) 홍콩영화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할 만하다. 서극의 < 제일유형위험 >(1980)이 보여주듯, 초기 홍콩 뉴웨이브에서는 청춘의 권태와 분노를 폭발할 듯한 폭력과 뒤섞어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담가명이 호화롭고 자신감 넘치던 당시의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 노마드들을 그려낸 < 열화청춘 >(1982)과, 왕가위의 < 중경삼림 >(1994)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들은 청춘의 감정 구조를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이어진 프룻 챈의 < 메이드 인 홍콩 >(1997)은 포스트-반환 시기 처음으로 등장한 뛰어난 청춘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두 소년과 이에 합세한 소녀로 구성된 아웃사이더들이 비가역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는 점에서는 <제일유형위험>을 환기시키면서도, 한결 차분한 시선으로 홍콩의 내면적 심상에 집중한다. 한편 왕가위와 같은 홍콩 뉴웨이브 2세대의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임영동의 <학교 풍운>(1988)은 전형적인 청춘영화의 문법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학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성장기 소년·소녀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 가장 ‘홍콩적인’ 작품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 <제일유형위험>, <메이드 인 홍콩> 중 / 사진: IFFR , IMDb 중국 문혁 세대와 Z세대의 초상: <방화>, <소년 시절의 너> 그렇다면 지난 10년으로 범위를 좁혀 중화권 영화로 시선을 옮겨보자. 동시대 작품들은 어떤 청춘의 풍경을 담아내왔을까? 이 작품들을 한눈에 조망하기란 쉽지 않고 필자의 한계도 있기에, 이어지는 글은 그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몇몇 인상적인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중국에서 제작된 청춘영화들은 대만발 ‘샤오칭신’ 장르가 중화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입증하듯 캠퍼스 로맨스가 주류를 이룬다. 매력적인 주연 배우들의 청신함, 푸르른 여름 하늘, 첫사랑과 서투른 고백 등 이 장르의 관습으로 간주될 만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공부’ 자체가 단순한 성장담의 소재를 넘어 과열된 입시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짓눌린 청춘 서사의 엔진이 된다는 점은, 중국 청춘영화만의 독특한 지점이다. 모범생 소녀가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문제아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며 사랑이 싹튼다는 대만 영화의 공식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보여주듯 다소 귀여운 수준에 머물지만, 중국의 대히트작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2013)에 이르면 사뭇 다르게 변주된다. 이는 공부만이 ‘흙수저’인 자신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라 믿으며 로맨스를 아예 거부하는 주인공의 철벽같은 마음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중 / 사진: IMDb( 1 , 2 ) 증궈샹 감독의 < 소년시절의 너 >(2019)는 중국발 학원 영화들의 흐름 속에서 가장 성공한 판본인 동시에 사회성 짙은 텍스트로 각인된다. 대입 시험인 ‘가오카오’를 코앞에 둔 시기, 주인공 첸니엔(주동우)이 한 소녀가 학교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 죽은 소녀는 교내 가해자들의 악명 높은 괴롭힘에 희생되었음이 드러난다. 가해자들의 다음 표적이 된 첸니엔은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십대 거리의 소년(이양천새)과 운명적으로 엮인다. 영화는 입시 위주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잔혹함의 심리를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탐구하며 시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온 세상에 맞서 싸우는 두 십대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로맨스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육의 살풍경과 두 연인의 낭만적 비극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미덕이라기엔 다소 한계를 노출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에 책임이 있는 체제 내부의 어른들(교사와 경찰들)이 지나치게 선량하고 도덕적인 인물로만 묘사되고, 가해자들 역시 충분한 전사나 깊이 없이 평면적 캐리커처에 가깝게 제시되면서, 두 상처 입은 영혼들의 고립은 사회적 압박 못지않게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관계의 내향성에 의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오카오’ 점수가 부르주아로의 격상과 잔인한 빈곤의 삶 사이 간극을 결정짓는 상황에서, 첸니엔이 통과해야 하는 절박함의 정동은 한 편의 ‘십대 오페라’ 같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일 테다. <소년시절의 너> / 사진: IMDb <방화>(2017)는 문화대혁명 말기, 문공단(문화예술선전대)에 입대한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공간이 당대의 예술학교나 사실상 다름없었던 현실이 재현될 뿐 아니라, 영화 역시 학원영화의 문법을 상당 부분 따르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블록버스터와 풍자극을 넘나들며 < 집결호 >(2007), < 아부시반금련 >(2016) 등을 연출해온 중국의 대표적 감독 펑샤오강의 야심작이다.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는 샤오핑은 문공단에 입성한 첫날, 자신을 마중 나온 선배 류펑에게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이타적이고 충직한 성정의 류펑은 정작 자신의 호의를 이용하기만 하는 피아노 반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영화는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그리고 1979년 중-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약 5년간의 격동을 통과한다. 그 사이 샤오핑은 재교육 시설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류펑과 샤오핑 모두 전쟁에 참전한 뒤 정신적·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로 귀환한다. 하지만 <방화>는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전면적인 비극을 정면으로 성찰하기보다는, 학교 청춘물의 형식을 빌려 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공산당 간부나 상하이 상류층 자녀들과의 격차를 부각한다. <소년시절의 너>의 첸니엔처럼, 샤오핑 역시 수줍음과 서투름, 그리고 계급 지위로 인해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즉, 시대의 광기보다는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비판 가능한 엘리트 부유층의 부패와 계급적 소외에 비극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제목인 방화(芳华)는 ‘꽃다운 청춘’ 혹은 ‘향기로운 시절’을 뜻한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중반, 두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문공단 시절은 노스탤지어 깃든 기억으로 남고, 그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해산식 장면에서 샤오핑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대만 청춘 영화의 속삭임: <조니를 찾아서>,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 한편 오늘날 대만 청춘영화의 흐름이야말로 젊은 시절을 ‘아팠지만 예뻤던’ 감정으로 재배치하는 ‘샤오칭신’ 감성 구조와 떼어내 설명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 한편에서는 이전 세대 영화들이 간직했던 불안과 공허의 정조를 일정 부분 봉합하면서도, 이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하려는 흐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 청춘 영화들은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기 위한 하나의 정서적 피난처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 곧 ‘작은 행복과 미세한 슬픔’을 섬세하게 건드리는 이 방식은 개인주의적 정서를 중시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로부터 물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려는 태도를 전시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평론가이자 제작자인 페기 차오는 자신의 제작 영화 <남색대문>이 ‘샤오칭신’ 장르로 호명되는 데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는다. 그 미덕이 “대만 사회에 뿌리를 둔 일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그려낸 삶의 초상이자, 자비로 가득하며 악의가 없는 세계”의 포착에 있다는 것이다. [4] 후앙시 감독의 < 조니를 찾아서 >(2017)는 이러한 설명에 잘 부합하는 텍스트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세 젊은 인물의 이야기는 인상 깊은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작은 상자를 들고 탄 여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와 새장이 아니냐고 묻는다. 여자는 나중에 답을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에 그런 상자에 새를 담아온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 같은 빌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긴 시퀀스를 통과할 때까지도 이들이 우연히 스친 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앙시는 허우샤오셴의 < 남국재견 >(1996)과 < 자객 섭은낭 >(2015) 제작부를 거치며 선배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롱테이크를 체득한 인물이며, 이 영화에는 실제 허우샤오셴이 제작자로 참여했다. 영화는 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주변을 어떠한 판단 없이 평등한 시선으로 관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일상의 미스터리를 낯설고도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화면에 익숙해진 뒤에야 청년의 티셔츠 무늬가 작은 새들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순간처럼, ‘조니’라는 사람을 찾는 이상한 전화들을 계속 받아오던 여자는 문득 옛 애인을 조니라고 부른다. 앵무새를 키우는 여자와 자폐 성향을 지닌 청년, 그리고 탈출한 앵무새를 계기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 수줍음 많은 집수리공이 왜인지 모를 기분 좋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이야기. 이는 느슨하며, 너그럽고,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삶에 대한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조니를 찾아서>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2020)을 논하기 위해서는 대만발 청춘영화의 또다른 국면을 호출해야 한다.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여성성보다는 강인하고 때로 보이시한 여성 캐릭터가 선호되고, 완성된 사랑보다는 첫사랑의 어슴푸레하고 틀이 잡히지 않은 감정에 집중해 온 흐름 말이다. <남색대문>, < 영원한 여름 >(2006), <여친 남친>(2012) 등이 보여주듯, 대만 청춘영화에는 퀴어 서사와 삼각관계의 묘사를 통해 장르의 영토를 확장해 온 하나의 계보가 존재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긴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촉발되는 모호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섬세한 터치는 대만 청춘영화만의 고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패트릭 류 감독의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막 계엄령이 해제된 1980년대 후반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아한은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버디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고, 두 소년 사이에 형성된 감정은 학교가 여학생을 받기 시작하면서 시험대에 오른다. 신입 여학생 반반의 등장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직면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표면적으로는 삼각관계를 통한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테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네 마음>은 정통 퀴어 영화라기에는 터치가 다소 가벼웠던 기존의 청춘영화 흐름에서 한 발 더 묵직하게 나아간다. 기숙학교 내에 공공연히 만연한 호모포비아와, 스스로 게이였음에도 아한에게 ‘교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인 신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계엄령 해제라는 조용한 변화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시간으로 닿는다. 과거의 고통과 열정을 다시 마주하며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대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듯, 주제곡 ‘네 마음에 새겨진 이름’이 흐르는 가운데 두 주인공은 죽은 신부의 교구가 있던 퀘벡의 밤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결말로 향한다. 홍콩 독립 청춘영화의 새로움: <쪽빛 하늘>, <좁은 길> 마지막으로 최근 홍콩 독립 청춘영화는 대만의 청춘물이 제공하는 감정의 완충 지대나, 중국 본토 학원영화의 서사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려낸다. 이 글을 준비하며 마주한 가장 큰 수확은 홍콩 반환 이후 감독들의 본토행에 따른 영화 산업의 공동화나 정체성의 약화라는 오랜 우려를 불식시키는, 독립영화 진영의 새로운 세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면서도 도시 청춘들의 표정과 삶의 결을 세밀하게 기록해 온 이 영화들은, 때로는 홍콩을 향한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모스 와이의 <닷 투 닷>(2014), <냅핑 키드>(2018), <먼 곳에서>(2022)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주목할 점은 홍콩영화발전위원회(Hong Kong Film Development Council)가 주관하는 신인 감독 지원 사업(First Feature Film Initiative)을 통해 입봉하는 신예가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은 신인 감독의 데뷔작을 지원할 때 홍콩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나 베테랑 제작자를 멘토로 매칭해 주는 방식을 취한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이 세대 간 유기적 결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 덕분에, 최근 홍콩 독립영화를 보면 타이틀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익숙한 홍콩 감독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쪽빛 하늘> 중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그중에서도 <쪽빛 하늘>(2017)은 동시대 홍콩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하나인 청킹와이의 극영화 데뷔작이다. <천하태평>(2008), <음악 인생>(2009), <하나의 국가, 두 개의 도시>(2011), <테이스트 오브 유스>(2016) 등 홍콩의 현실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들과 허안화의 <밤과 안개>(2009)의 각본을 쓰며 다져온 청킹와이의 서늘한 시선은, 부모 살해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통해 홍콩 사회가 청춘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냉정하게 응시한다. <쪽빛 하늘>에서 부모의 시신이 지역 저수지 인근에서 발견된 뒤, 어린 코니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이 강렬한 스릴러는 누가 저질렀는가를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기에, 질문의 중심은 ‘왜’라는 동기로 집중된다. 빈곤과 학대로 점철된 코니의 가정환경, 그녀가 학교 친구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과정, 그리고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점차 자신의 사적인 삶까지 흔들리기 시작하는 여성 수사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지는 이 탐구의 형식은 평소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코니와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유도한다. 대만이나 중국의 청춘 학원 영화에서 ‘파란 하늘’이 젊음의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의 어스름한 ‘쪽빛’은 홍콩의 비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짓누르는 색채로 활용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못한 채 위협받는 십대들을 압박감 가득한 스릴러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학교풍운> 같은 홍콩영화의 고전적 전통이 환기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부모 살해를 자행한 소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거부하는 젊은 여경의 윤리적 딜레마는 평행선을 달리는데, 이는 세대 갈등의 단면이자 출구 없는 미로 같은 도시에 갇힌 홍콩 현세대의 실존적 질식 상태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좁은 길>(2022)은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자살을 예고한 어린 시위대를 구하려는 청년 구조대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를>(2021)을 렉스 렌과 공동 연출했던 람섬 감독의 단독 연출작이다. 이 영화 역시 대만의 낭만이나 중국의 열망과는 또 다른, 도시 속에서 존엄을 지키려는 홍콩 청춘들만의 정직하고도 아픈 초상을 그려낸다.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세 청소 대행업체의 일원인 노동자 자크가 늦은 밤 식당을 방역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로 가라앉은 팬데믹 시기의 밤 장면으로 구성된 <좁은 길>은 조용한 노동계급의 고독을 포착하지만, 음울하거나 비관적이기보다는 사회 주변부의 고단한 상황을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미묘한 위로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일손이 절실하지만 도시를 덮친 팬데믹 탓에 자크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충동적으로 지원한 캔디의 비공식적인 구직 요청을 받아들이고, 매일 밤 일당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비교적 어린 여성인 줄로만 알았던 캔디는 사실 어린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두 사람은 감정적 방어 기제를 세우면서도 서서히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만, 영화는 연애담을 전형화하지 않는 선에서 결말을 열어둔다. 람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홍콩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우리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5]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는 <좁은 길>의 가장 큰 미덕이자, 고립 속의 유대를 형성하는 두 주인공의 서사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동력일 것이다. 청춘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자면 입체적으로 그려진 젊은 청소 노동자와 싱글맘의 묘사 자체가 인상적인 ‘캐릭터 스터디’라 할 만하다. <좁은 길> / 사진: IMDb *** [1] Papan Yang, “The Taste of Ice kacang: Xiaoqingxin Film as the Possible Prospect of Taiwan Popular Cinema”, The IAFOR JOurnal of Asian Studies, 2:1, 2016, p. 75. [2] Chris Berry, “Cinema: Reconsolidation of Party-State Hegemony in a Market Economy,” in M Dahl, M. Szatkowski & H. Kups (eds.), China under Xi Jinping: An Interdisciplinary Assessment , Leiden & Boston: Brill, 2016, p. 351. 중국 독립영화는 일반적으로 정부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영화를 말한다. 이는 체제 내 상영이 허가된 예술영화(艺术片, yishupian)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공식적으로 상영되지 못하는 독립영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내 독립 영화제(난징, 베이징 등)나 대안적 상영 공간을 통해 소개되거나, 주로 해외 영화제를 거점으로 유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3] Chris Berry, ibid., p. 350. [4] Song Hwee Lim, Taiwan Cinema as Soft Power: Authorship, Transnationality, Historiography , London &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p. 129에서 재인용함. [5] Elizabeth Kerr, “ Portrait of a City: The Narrow Road ” , ZOLIMA citymag (접속일: 2025. 12. 26.). 박은지(영화 연구자) l 프랑스 탈식민주의 영화와 동시대 동아시아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쓴다.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및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지은 책으로 『지중해의 영화』, 주요 논문으로는 「장-뤽 낭시를 경유한 클레르 드니의 여정: ‘신체-지리학’ 영화, 생태적으로 그려내기」, 「부산 프랑스문화원과 트랜스로컬 시네필리아」, 「홍콩 누아르에서 포스트-홍콩 누아르까지 성찰적으로 바라보기」, 「두기봉의 밀키웨이 제작사와 포스트-1997 홍콩영화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군사 기록 영상을 분석한다는 것 한국영상자료원에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문서고(National Archives) 2관에서 2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 관련 기록영상 223편 280릴이 있다. 그 중 현재 < 미국 NA II 소장 노획영상 컬렉션 >으로 공개 중인 37편을 제외한 나머지 영상들은 대부분 미군 내 각종 촬영조직들이 6.25 전쟁기와 전후 재건기에 한국에서 촬영한 기록들이다. 올해는 4차에 걸쳐 이 컬렉션들을 공개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할 계획이다. 그 첫 단계로 얼마 전에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1) >을 통해 61편의 VOD와 자료집이 공개됐다. 미군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때부터 이미 통신부대에 사진 촬영 임무가 지정되기 시작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카메라 친화적인 조직이었다. *주1 미군의 전투 카메라 부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더 정교하게 조직화됐고, 체계적인 매뉴얼과 프로세스를 가지게 됐다. 모든 촬영은 전투 및 행사 기록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작전 분석, 지도 제작, 군 내 교육, 대외 선전, 다큐멘터리 제작 등 다방면에 활용할 것을 의도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 체제로 진행됐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컬렉션은 판문점 정전회담과 정전협정, 전쟁포로 수용소 및 상병포로(傷病捕虜) 교환, 부평 제24군수지원사령부(ASCOM City) 등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당혹스럽고 불가사의한 전쟁 중 하나였던 6.25 전쟁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이나 주제를 담백하지만 생생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군 기록 영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기록영상을 분석할 때보다 더 많은 지식과 공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선 군 조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 군 편제, 복잡다단한 부대 명칭의 역사, 군복과 계급의 군종별 차이, 군 장비와 무기의 식별과 제원 정보 등을 밀리터리 마니아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영상에는 음향이 없어서 상황 파악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대부분 야외에서 촬영됐다는 것 자체가 큰 장벽이다. 벌판과 숲과 능선과 망망대해와 구름을 보고 그 곳이 어디인지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판문점 정전회담 영상만 해도 늘 같은 방법으로 도착하고 떠나는 대표단들과 비슷하게 생긴 천막들을 보고 이날의 회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거의 운에 좌우된다. 등장하는 대표단의 면면을 보고 대략 본회의인지 분과회의인지 구분하는 것으로 출발해, 다행히도 슬레이트 장면이 있고 날짜 정보가 있다면 회담록 자료와 대조해서 범위를 좁히는 정도가 최선이다. 원 소장처인 National Archives의 카탈로그 정보가 제법 충실한 경우에도 안심할 수 없다. 이따금 명백히 틀린 정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주2 조종사의 전공(戰功) 증빙, Movie of Bullets *주3 가장 곤란한 부류는 건 카메라(Gun Camera) 영상이다. 이번 컬렉션에는 건 카메라 푸티지가 4점 있는데, 대체로 이런 식이다. 바다 수평선과 하늘과 구름 장면 사이로 작은 점처럼 등장하는 MIG-15기가 있다. 짧은 빔이나 점 같은 모양으로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라지는 기관총 발사 장면에 이어 MIG-15기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거나 도주한다. 여긴 어디이며, 어떤 작전 과정에서 이뤄진 교전인가? 이 MIG-15기는 격추(shot down)됐는가, 피해(damaged)만 입고 생존 귀환했는가? 미군 제트기가 저고도로 기동하며 지상에 기총소사(strafing)를 가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작전에 의해 어떤 지역의 무슨 목표물을 폭격하고 있는 것인가? 애초에 이런 영상은 왜 촬영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두를 알아내는 것은 힘들다. 최선을 다해 식별할 뿐이다. Bell & Howell의 Gun Camera(Type M-4A, 미 해군 납품 모델). (출처: aeroantique.com ) 건 카메라는 육군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말 그대로 총에 달린 카메라(였)다. 기관총을 발사하여 목표물에 적중했는지 여부를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의 방향을 조준선과 일치하도록 달았으므로 정확히는 GSAP(Gun Sight Aiming Point) 카메라라고 한다. 마침 항모항공단(CVG)을 운용하기 시작했던 미 해군은 이에 착안하여, 지형도 작성을 위해 사용하던 항공촬영 카메라(Aerial Camera)처럼 공중교전이나 지상폭격 장면을 기록할 수 있는 GSAP 카메라를 만들고자 했고, Fairchild Aviation사가 이 요구조건에 맞는 카메라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주4 이후 여러 가지 모델이 출시됐지만, 공통적으로 일반 영화용 16mm 필름을 최대 50피트까지 담은 카트리지 형태의 매거진을 소형 카메라 본체에 장착하는 구조였다. 촬영 속도는 초당 16, 32, 64프레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는 기관총의 연사속도를 고려하여 고속촬영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고고도 저온 환경에서의 촬영이 가능하도록 온도조절기와 히터가 달렸다. 카메라는 제트기 기종에 따라 날개, 동체 하부, 조종석(Cockpit), 기수(Nose) 등에 장착했다. 제트기 조종간의 발사 스위치와 연동시켜서, 스위치를 누르면 촬영이 시작되고, 더 누르면 기관총이 발사되며, 스위치를 해제해도 1~2초 더 촬영이 되도록 고안됐다. 사격 직후의 목표물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F9F-2 Panther의 경우, 우측 날개 공기 인입구 밑에 장착했다. *주5 어느 참전용사의 수기 *주6 에 따르면 GSAP 푸티지를 촬영하는 목적은 작전의 성공 여부와 조종사의 전공(戰功)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격 작전에 투입된 전투비행대대가 돌아오면 건 카메라의 필름 매거진을 일본으로 보내 현상을 맡긴다. 며칠 후 프린트 필름이 돌아오면 조종사들과 장교들이 브리핑룸에 모여 차례로 필름을 영사한다. 영사가 끝나고 불을 켜면 조종사마다 본인이 주장하는 작전 수행 결과가 필름 영상의 내용과 맞는지 판정한다. 이 글에서는 적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던 한 조종사가, 경황이 없는 중에 아군기를 격추시키는 장면이 찍힌 필름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 건 카메라 자체를 둘러싼 약간의 궁금증은 풀렸다. 다시 컬렉션의 건 카메라 푸티지로 돌아가서 분석을 시도해 보겠다. 영상은 컬렉션 페이지 에서 VOD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푸티지: GUN CAMERA FOOTAGE (Korea) (local ID: 428-NPC-13233) *주7 1. 이 영상에는 슬레이트가 딱 한 번 등장한다. 이외의 단서는 없다. 슬레이트 정보는 “Lt. Davidson, VF-31, 50.” 이다. 2. 건 카메라의 촬영자는 언제나 조종사 자신이므로, 이 푸티지는 VF-31(제31전투비행대대) 소속의 Davidson 대위가 수행한 어떤 작전의 기록영상이다. ‘50’의 의미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필름 매거진에 최장 길이 50피트를 담고 출격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8 3. VF-31은 1948년부터 F9F-2 Panther로 구성된 최초의 제트기 전투비행대대로 출발했고, 1952년부터는 F2H Banshee 기종으로 교체됐다. *주9 슬레이트 다음 컷의 7프레임 동안(51초 부근) 항모 활주로 위에서 정비 중인 제트기의 뒷모습이 나오는데, 꼬리날개의 높이로 봤을 때 F9F-2일 가능성이 높다. 즉, 촬영시기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2년 중 어느 시점, F2H로 개편되기 전으로 좁혀진다. 428-NPC-13233 (00:00:51:02) (좌) F9F-2 Panther / (우) F2H-2 Banshee 4. VF-31은 CVG-3(제3항모항공단)에 편성되어 1950년 9월 6일부터 1951년 2월 3일까지 미 항공모함 USS Leyte(레이테, 항모지정코드는 CV-32 *주10 )에 소속됐다.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활동 기록이 없고, 다시 항모항공단으로 배속되어 등장하는 시기는 1972년이므로 이 영상과 무관하다. *주11 5. 영상에는 기관총에 맞은 MIG-15기가 연기를 뿜으며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USS Leyte(CV-32)의 작전 기록 및 다른 출처의 ‘1950년 이후 해군과 해병대의 적기 격추 기록’을 보면, 1950년 11월 18일 에 VF-31의 베버 소위가 압록강 철교 폭격 작전 중 MIG-15를 격추시켰다. 이 목록에 포함돼 있다는 것은 미군과 소련군 양측에서 격추를 인정했다는 말이다. CV-32의 항모항공단 CVG-3은 이후 12월 26일까지 주로 장진호 전투의 항공근접지원(CAS)과 흥남부두철수작전 지원 임무를 수행한 후 바로 일본 사세보로 간다. 이듬해 1월 7일에 한국 동해상으로 복귀하지만 원주 지역에 잠시 투입됐다가 1월 19일에 미국으로 귀환한다. 따라서 1950년 11월 18일의 주목할 만한 작전 이후에는 영상과 크게 관련이 있을 만한 활동은 없었다. *주12 428-NPC-13233 (00:01:56:11), 피격당해 연기를 뿜으며 퇴각하는 MIG-15 6. Davidson 대위의 건 카메라 푸티지도 11월 18일에 촬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해군과 항모 관련 문헌들을 종합한 미 해군 포럼 사이트의 한 아티클 *주13 에 따르면 이날 VF-31의 F9F-2 2개 편대가 공중전투초계(TARCAP, 공대지폭격기의 엄호 임무)를 위해 출격했고 제2편대장이 Davidson이었다. 그는 만주로부터 공격해 들어온 MIG-15의 무리 중 1기에 손상을 입혔다. CV-32의 활동 보고서(Action Report) *주14 와 대조해 보면, MIG-15 1기가 (Weber에 의해) 격추됐고 1기가 (Davidson에 의해) 타격을 입었음이 명확해진다. U.S.S. Leyte(CV-32)의 활동보고서 중: 압록강 철교 상공 교전 보고 내용 7. National Archives 카탈로그는 이 영상이 ‘ 1950년 12월 8일 ’에 촬영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CV-32의 작전 기록 *주15 에 따르면 이 날은 작전을 쉬고 연료를 보충한 날이었으므로 잘못된 정보이다. 그래서 영상을 중심으로 다른 자료들을 찾아 대조하다가 또 다른 단서를 얻었다. National Archives의 사진 컬렉션 중 2장이 이 영상의 장면과 일치했다. 다만, 이 사진과 관련된 기술(description)에는 지명 정보는 없고 날짜만 ‘ 1950년 11월 23일(Photograph is dated 23 November 1950) ’로 적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도 CV-32가 출격을 쉬고 연료와 탄약을 보충한 날이었다. *주16 이 경우는 현상이 끝난 필름이 도착한 날 또는 카탈로거가 사진 자료를 정리한 날 기준으로 기재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영상 428-NPC-13233 (00:01:34:03) 사진 80-G-424090 (원문 열람: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영상 428-NPC-13233 (00:00:45:07) 사진 80-G-424091 (원문 열람: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결론. 이 영상은 미 해군 제31전투비행대대 소속으로서 USS Leyte의 제3항모항공단에 배속됐던 Davidson 대위가 1950년 11월 18일 압록강 철교 폭격 작전에 공중전투초계 임무를 띠고 F9F-2 제2편대를 이끌던 중, 만주 쪽에서 공격해 온 MIG-15와 교전하고 그중 1기에 타격을 입히는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지금까지의 수집된 모든 단서를 충족하는 유일한 출격 기록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이 영상에는 ‘Davidson’의 슬레이트 전과 후에 각각 MIG-15기가 피격되는 장면이 하나씩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는 Weber 소위의 격추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푸티지: CARRIER AIR STRIKES (Korea) (local ID: 428-NPC-20247) 앞의 영상은 운이 좋았다. 이번에는 보다 일반적인 경우이다. 우선, 7분 14초 지점에 전투기가 항모를 이륙하는 장면에서 함상 활주로 바닥에 “37”이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주17 이 숫자는 미 항공모함 프린스턴(USS Princeton)의 항모지정코드였던 ‘CV-37’을 의미한다. 프린스턴 호는 코드가 몇 차례 바뀌었고 바뀐 일자도 기록으로 남아 있으므로 촬영시기를 대략이나마 판정하는 데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일단은 이 단서를 기억해 두자. *주18 428-NPC-20247 (00:07:34:11) 하지만 이 외에는 슬레이트도 없고 지역을 알아볼 만한 장면도 없으니, National Archives 카탈로그의 정보 로부터 출발해 보겠다. 경기천년바탕체 R (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여기서 ‘Kyosen’, ‘Pukchong’ 등의 지명은 미군이 사용하던 표기인데, 현재의 지도와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지도를 비교하여 원 지명을 찾아 한글로 바꿔 놓은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은 한반도의 작전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사용하던 지도를 기반으로 개량해 나갔으며, 극동사령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작전 영역으로 취급되기도 했으므로 *주20 자연히 일본어 발음의 지명이 지도에 섞여 들어갔다. 거기에, 미국인에게 들리는 발음대로 표기한 지명도 상당 부분 있었으니 적어도 1950년 초에 미국 육군지도국(Army Map Service, AMS)이 제작한 한반도 작전 지도와 이를 사용했던 미 해군들 사이에서 통용됐던 지명은 종종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다. 다음의 지도 발췌본을 보면 ‘Chosin Reservoir’가 ‘장진호’로, ‘Fusen Reservoir’가 ‘부전호’로 수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10~12월, 미 해병대 1사단 작전지역 지도(부분확대) *주21 AMS L552 NK52-10 (Edition 4) 중 부분확대 이 정도의 정보가 주어졌다고 해도, 장소 식별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영상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고원, 부전, 회령, 북청인지 알 길이 없다. 구글어스에서 동해안을 따라 샅샅이 훑어봤지만 유일하게 고원 다리 폭파 지역만 찾을 수 있었다. 일치하는 정보가 있으니 National Archives의 장면 설명이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음을 확인하는 성과는 얻었다. 다만, 이로써 (a) 부전 수력발전소 폭격 시퀀스와 (b) 고원 다리 폭격 시퀀스 순서가 뒤집힌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점은 있다. 어쨌든 장소 식별은 더 이상의 진전이 있을 것 같지 않다. Google Earth: 현재 고원군 다리 지점 (39°26'56"N 127°14'52"E) 영상 428-NPC-20247 (00:04:59:05), 폭격으로 검은 연기가 솟고 있는 고원군 다리 장면 다음으로, CV-37의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위 National Archives의 정보 (g)항의 J. Sweeny 중령의 소속은 VF-192가 아니라 VF-191(제191전투비행대대)이 맞다. 기록에 따르면 위 정보에 등장하는 VA-191, VF-192, VF-195는 다른 비행대대들과 함께 제19항모항공대(CVG-19)에 소속됐다. CVG-19가 ‘CV-37’ 상태의 USS Princeton에 배속되어 있던 시기를 헤아려보면 영상의 촬영 시기를 좁힐 수 있다. 그런데, CVG-19와 USS Princeton의 관계는 조금 복잡하고 관련 기록 *주22 이 명확하지 않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다음과 같이 개조식으로 정리해 보겠다. ♦ 1950년 11월 9일 : USS Princeton이 ‘CV-37’로 지정받고 CVG-19와 함께 하기 시작 ♦ 1951년 5월 29일 : CVG-19가 USS Princeton을 떠나 일본 요코즈카 기지로 이동 ♦ 1951년 5월 31일 ~ 8월 29일 : USS Princeton(CV-37)이 새 항모항공단 CVG-19X를 받아 임무 수행 ♦ 1951년 8월 29일 : USS Princeton(CV-37)과 CVG-19X 임무 종료 ♦ 1952년 3월 21일 ~ 11월 3일 : USS Princeton(CV-37)이 CVG-19와 다시 임무를 시작. 10월 1일부터 CVA-37로 지정코드가 변경됨 마지막이 석연치 않은데, 이 기간에 대한 활동보고서 *주23 에는 지정코드가 변경됐다는 언급이 없고, 그 다음 회차에 제출된 보고서 *주24 에는 발신자가 CVA-37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1일부터 11월 3일까지 USS Princeton의 코드가 실제로 CVA-37로 바뀌었던 것은 맞고 CVG-19도 이와 무관하게 계속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결국 CVG-19 항모항공대의 VA-195, VF-192, VF-191 비행대대 *주25 가 “CV-37” 또는 “CVA-37”에 배속되어 출격할 수 있었던 기간은 1950년 11월 9일부터 1951년 5월 29일, 그리고 1952년 3월 21일부터 11월 3일까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전투기의 출격과 건 카메라 촬영은 이 기간 중 언젠가에 발생했다. 장소에 대한 단서가 명확하지 않아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National Archives가 제시하는 ‘1952년 9월’이라는 촬영 시기는 이 추론 범위 안에 들어온다. 두 번째 푸티지를 둘러싼 맥락 추정 : 공중작전의 변화 양상 추정 범위를 좁히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국내외에 아카이빙되고 있는 항공사진을 모두 모아 영상의 각 시퀀스와 일일이 대조할 게 아니라면 이 정도가 최선이다. CV-37의 활동보고서를 전수조사하는 방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다. 6.25 전쟁기의 미군의 공중 폭격은 늘 있었기 때문에 시기를 특정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6.25 전쟁기의 해상과 공중은 미국 제7함대의 기동전투단 ‘Task Force 77’에 의해 완벽히 장악됐다. 소련이 ‘비공식 참전’이어야 했던 정세적 상황과 ‘가용 비행기지의 부족’으로 당대 가장 진보한 스펙의 MIG-15을 가지고도 대체로 활동영역이 압록강 이남의 평안도 영역, 소위 ‘미그 회랑(MiG Alley)’ *주26 에 집중됐던 것에 반해, 미국은 Task Force 77의 작전 통제에 따라 미국 항공모함이 동서해안을 봉쇄하고 여기서 항모전투단들이 자유롭게 이륙하여 해안과 내륙을 지배했다. “MIG Alley” vs. Task Force 77 *주27 이 시기 Task Force 77의 전략폭격 방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적의 포대, 전차 등 원거리 무기체계를 사전에 무력화하고 아군 진로상의 위험요소를 해제하여 지상 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근접항공지원(CAS, Close Air Support)으로서, 연합군은 CAS에 의해 전쟁기 내내 우위에 서서 전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CAS는 육군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공군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은 ‘차단(Interdiction) 작전’이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병력 이동 및 보급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하여 전력을 약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 거점의 철로, 트럭, 보급소는 수시로 파괴됐지만 빠른 시일 내에 복구됐다. *주28 따라서 차단 작전은 ‘대규모 공세의 지속기간을 줄인다’는 정도의 목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어야 했다. 차단(Interdiction) 작전 목표: 북한 동해 연안 주요 수송 거점들 *주29 마지막으로는, 주요 수력발전시설을 집중 폭격하여 북한군의 피해복구 역량을 원천적으로 저지하자는 것이었다. 근접항공지원과 차단 작전이 전쟁기 내내 지속됐던 반면, 이 마지막 안은 파괴 자체의 어려움, 막대한 전후 복구 비용, 중국 측 전력수급과의 관련성 등 여러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년 5월에 와서 이 작전이 승인된 것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다른 작전의 효율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군의 피로감이 누적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1년 가까이 지지부진하게 끌어오고 있던 정전회담에서 더 나은 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한 무력행사, 즉 공중압박작전(Air Pressure Operation)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6월 23일과 24일에 수풍댐 등 북한 주요 수력발전소에 대한 집중 공격이 실행됐으며, 7월 10일에는 극동공군의 작전 기조가 그간의 ‘지연, 방해’에서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파괴’로 바뀌었다. *주30 북한지역 수력발전소 공중타격 대상 분포 (원 지도 중 일부) *주31 두 번째 푸티지: 촬영시기 2차 추정 이런 맥락에서 프린스턴함(CV-37)과 제19항모항공대도 1952년 6월을 기점으로 폭격의 규모와 빈도가 달라지는데, 이 시기는 영상의 추정 기간 중 후반기에 해당한다. 아울러 National Archives가 언급하는 수력발전소 공격 에 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추정 시기 중 전반기, 즉 1950년 11월에서 1951년 상반기는 제외하고 후반기 내에서 일정을 좁혀 보기로 하자. 먼저, 1952년 6월 4일부터 21일까지는 안변, 원산, 함흥, 길주, 청진까지 이르는 북한 동해안 지역의 주요 거점을 순회하며 건물, 철로, 수송차량, 수력발전소 등을 집중 폭격했다. 이 시기의 활동보고서에는 작전 지역을 ‘원산에서 청진까지’, ‘함흥에서 안변까지’ 등으로 넓게 뭉뚱그려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 일대는 ‘차단 작전’에 의해 전에도 간헐적으로 공격해 왔던 곳이다. 다만 특별히 이 기간 동안은 2~3일 폭격하고 1일 정비하는 3~4일의 일정을 한 주기로 하여 쉼 없이 반복했으니, 폭격의 집중도는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들은 이어 1952년 6월 23일 오후 4시경, 압록강 수풍댐 폭격에 참가하는 한편 같은 시각에 부전 제3수력발전소를 동시 타격했으며, 24일에는 오전 9시 30분과 오후 4시 30분 2회에 걸쳐 부전 제3수력발전소와 풍산 제1~3수력발전소를 공격했다. *주32 25일에 ‘원산에서 안변까지’ 공격한 것까지 하여 CV-37의 6월 대폭격 임무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영상은 6월의 장면일 가능성이 높을까? 과연 활동보고서만 놓고 보면 이후에 발전소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시 차단 작전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수력발전소에 대한 집중 공격은 이듬해 봄까지도 계속되었다. *주33 무엇보다, 6월까지의 모든 활동보고에서 아직 ‘회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 CV-37의 활동보고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령’이 언급되는 부분은 ‘ 9월 13일 ’의 기록이다. 이날 ‘회령의 운수시설, 저장소, 병영을 폭격했다’는 기록은 National Archives의 정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리하면, 6월 기록에는 회령에 대한 언급이 없고, 9월 기록에는 수력발전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렇더라도 활동보고서의 기술 상세화 수준이 때마다 달랐던 것을 감안하면, 6월에 실제로 회령 공격이 있었을 수도 있고, 9월에도 부전 수력발전소의 재공격이 있었을 수 있다. 다만 6월 작전의 규모와 중요성, 이에 따른 당시 보고서의 상세한 내용을 고려했을 때 이때 회령 공격이 있었는데 누락됐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될 것이다. 이에 따라 9월 가설이 힘을 얻는다. 또한 건 카메라 푸티지는 짧게는 2~3일의 작전 주기 단위로, 길게는 통상 1개월 안팎이었던 TF77의 항공모함 투입 주기, 즉 하나의 활동보고서가 다루는 기간 *주34 내에서 하나의 필름 릴에 묶여 브리핑실에서 영사됐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회령 공격이 있었던 9월 13일을 중심으로 앞뒤 며칠을 포함한 기간의 작전 상황이 영상에 담겼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후자라면, 회령 폭격을 언급한 보고서가 포괄하는 기간인 1952년 8월 20일부터 9월 17일까지 를 촬영 시기로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의 추정은 회령 공격 장면이 있다는 National Archives의 정보가 맞다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전쟁기록영상: 불편한 사료의 딜레마 기록영상에 찍힌 모든 것을 식별하고 이로부터 시기와 맥락을 정리하는 일은 이후 진행될 모든 분야의 연구를 위해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유한한 인간이 다른 시공간을 넘나들며 엿보는 즐거운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기록영상은 얘기가 다르다. 여기에는 실제 일어났던 인명살상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희생을 각오하고 전쟁에 동의했을 리 없는 민간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CV-37의 활동보고서에는 “1:50,000 축척의 AMS L751 지도를 참고하여 정확한 목표지정(pin-pointing target)이 가능했다”라는 등 작전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문구가 수차례 들어가 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의 공대지 폭격은 기동 중에 기총소사와 낙하 또는 비유도탄을 발사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북한군이 고의적으로 민간 거주지 인근에 기지를 구축했을 경우에 타겟만 선별 폭격한다는 것은 당시의 정확도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선악을 구분하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전쟁에는 불가항력이 내포되어 있고, 선악을 명확히 나눌 수 없는 총체적인 혼란이 수반된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는 침략을 막아내었다. 그렇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전쟁기록영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정한 기록일지라도 사실관계를 캐내어 정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전쟁은 의외로 다른 모든 분야의 역사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받는 불편한 사건이고, 자료를 쥐고 있는 자는 그 첫 열쇠를 진열해야 하는 책무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주1. “ Before APC ,” Army Pictorial Center . 주2. 이해한다. 기록영상의 식별과 카탈로깅은 100% 정확하기 어려우며, 새로운 정보가 발굴되면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National Archives의 카탈로그 정보도 계속 수정되고 있다. 주3. Bailey, R. H. “Movies of Bullets,” American Cinematographer (April 1944): 114.; Bill Todd, “The Korea Files 6: The Gun Camera.” Disciples of Flight . 주4. 이후에는 Kodak이나 Bell & Howell사도 협력 또는 단독 생산의 방식으로 출시했다. 주5. U.S. Navy, Pilot’s Handbook: Grumman F9F-2 Panther (ca. 1952). Public domain. (WorthPoint.com에 게재된 스캔 이미지 중 발췌) 주6. Bill Todd, 앞의 글. 주7. ‘local ID’는 원 소장처인 National Archives가 부여한 자료 식별 번호 중 하나로서, 문서군(Record Group)과 시리즈 정보를 직관적으로 담고 있어서 유사한 제목의 푸티지들을 서로 구분하기 용이하다. 주8.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건 카메라 장비는 게이지상의 수치가 매거진의 생필름 길이에 맞도록 조정해 주는 부분이 있었다. 주9. “ VF-31 (VFA-31) the Tomcatters ,” Military Aircraft Historian. 주10. Hull Classification Number, 또는 Hull Designation Number를 ‘항모지정코드’로 번역한 것이다. 주11. Grossnick, Roy A, William J Armstrong, and Naval Historical Center (U.S.). United States Naval Aviation, 1910-1995 . Fourth ed. Washington, D.C.: Naval Historical Center, Dept. of the Navy, 1997., pp. 700, 714. 주12. “ Leyte III (CV-32) 1945-1969, ”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Appendix 33, p. 767. 주13. Tillman, B. (2021, August). “ Naval aviators vs. the MiGhty MiG-15, ” Naval History Magazine , U.S. Naval Institute. 주14. Commanding Officer, U.S.S. LEYTE(CV-32), Narrative Report of Action for the period 5 November 1950 through 30 November 1950 . 주15. Commanding Officer, U.S.S. LEYTE(CV-32), Narrative Report of Action for the period 1 December 1950 through 26 December 1950 . 주16. 주11의 문헌. 주17.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카메라가 전투기 진행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주18.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425. 주19. 기총소사(strafing)란, 전투기가 이동하면서 지상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기의 전투기들은 보통 20mm 기관총을 장착했다. 주20. 김경록(2021). 「6・25전쟁과 미 공군의 항공지도 제작과 활용」, 『한일관계사연구』, 74, pp. 433, 475-515. 주21. Montross, L., & Canzona, N. A. (1957). U.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 III.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Historical Branch, G-3 Division, Headquarters, U.S. Marine Corps. p. 12. 주22.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p. 700-701. 주23. Commanding Officer, U.S.S. PRINCETON (CV37), Action Report for period 28 September 1952 through 18 October 1952 . 주24. Commanding Officer, U.S.S. PRINCETON (CVA-37), Action Report for the period 8 March 1953 through 3 April 1953 . 주25. VA-195는 AD-4 Skyraider, VA-192는 F4U-4 Corsair, VA-191는 F9F-2 Panther 제트기로 구성됐다. 주26. ‘Alley’는 골목, 회랑 등 좁고 긴 형태의 길을 의미하므로 MIG-15의 제한된 영향력에 대한 미군 측의 멸칭일 수도 있겠다. 주27. (왼쪽)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New York: Duell, Sloan and Pearce, 1961, rev. ed. Washington, D.C.: Office of Air Force History, 1983), p. 292; (오른쪽)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the Korean War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2), p. 317. 주28. William T. Y'Blood, “ The Korean Air War ”, Air Force History and Museum Program , Seventh Air Force . 주29. 원 지도에 일부 지점 표시. U.S. Navy Department, Navy Interdiction Korea, Volume II (Washington, D.C.: Naval Historical Center, 1953), p. 1. 주30.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파주: 창비, 2013), pp. 363-366. 주31. Robert F. Futrell,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New York: Duell, Sloan and Pearce, 1961, rev. ed. Washington, D.C.: Office of Air Force History, 1983), p. 484. 주32. 제트기 1,200기(sorties) 이상이 출격한 이 2일 동안의 폭격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였고, 6.25 전쟁에서 모든 미군 군종이 최초로 연합한 작전이었다.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194) 주33. 김태우, 앞의 글, p. 366. 주34. 이 시기에 CV-37을 비롯한 항모들은 대체로 1개월 가량의 기간 동안 Task Force 77 작전지역(주로 동해안)에 투입된 후 일본 요코즈카 제7함대 기지로 귀환했고 7~10일 안팎을 보낸 후 다시 TF 77 지역으로 투입됐다. 또한 활동보고서는 이 주기에 따라 제출됐다. 주35. 6.25 전쟁기에 유도탄(Guided Missile)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저고도 비행으로 비유도탄의 정확도를 올리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1952년 8월 28일에 무인기(drone)로 개조한 F6F-5K가 흥남의 철교 폭격에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Grossnick, Roy A 등, 앞의 책, p. 194)
<플란다스의 개>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질문. 영화평론가와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때는 비평의 태도로 영화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비평’의 의미를 정의해보려고 했고, 내 안에서만 작동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씨네21》이나 《부산일보》 등 매체에서 평론상을 받고 등단한 사람? 적어도 영화 관련 전공 대학원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자?) 요즘은 그냥 본인을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하느냐 마느냐, 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엔 쓰는 글에 차이가 없는데 누군가는 “어이쿠, 제가 감히? 어떻게? 영화평론가인가요? 그냥 리뷰어, 리뷰어!”라고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라고 본인을 수식하며 강연을 다닌다. (이것을 자신감의 차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영화력’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아니었나. 이를테면 내가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었고 ‘취재’를 직업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며 12년 동안 일했던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기자’라고 먼저 정의하는 것처럼. 어찌 됐든 자아 성찰 끝에 스스로를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할 근거를 찾고 주변에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라고 얼렁뚱땅 정의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정체성이나 비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취미로 영화평론을 한다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뉴스레터를 발행해도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권장된다. 영화 잡지가 여럿 존재했던 전성기(너무 아득해서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 같다)를 지나 지금은 비평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이 시장이 충분한 독자층을 갖고 있나? 구독 매출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성 지면 매체는 결국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영화 관련 지면에 가장 많이 들어올 법한 광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화다. 광고 집행을 결정하는 광고주 그리고 그들이 파는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실리는 매체의 협력 때로는 신경전은 그 역사가 참 유구해서 새삼스럽게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 와중에 영화 시장은 어려워지고 마케팅 트렌드가 급변했으며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멋진 독립 잡지들을 기획하고 발행하는 업계 동료들은 매체의 딜레마와 극장 산업 하락세, 비평의 위기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갖고 비평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확장해 가고 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어느 20대 학생에게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없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더니 “관객과의 대화(GV)를 다수 진행하며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겠다. 영화글과 GV 모더레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매달 원고지 200자 기준 70~100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원고료를 후려치지 않고 입금이 밀리지도 않는) 안정적인 지면이 마련되어 있고 매달 5~10개의 GV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최저 임금 수준의 돈을 벌 수 있다.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든 GV든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든 선배들과 한정된 자리를 갖고 경쟁해야 하는 것도 명심할 것. 이 와중에 진행비를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고 하겠다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 PR’의 기회로 삼아 방송 출연 기회까지 가닿는다면 돈벌이 면에서 나아질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방송 출연료가 원고료나 모더레이터 진행비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수입이 높다. 방송 경험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방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여도 나름 괜찮은 수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고정 방송 스케줄이 존재하는 영화평론가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영화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GV 문화가 사라진다면? 지금이야 존재하지만 딱히 대체할 마케팅 방식을 찾지 못해 지속되는 것일 뿐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모더레이터 일을 병행하는 사람 중에 “언젠가 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그밖에 대표적인 부업으로는 대학이나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 등등이 있다. 그렇게 믿을 구석 없는 프리랜서는 알아서 경력 쌓고 인맥 만들고 일거리를 따와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들은 비평 기고, 모더레이터,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했다. 역시 저 정도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살아남는 걸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길이 생각났다. 바로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본업은 교수, 부업은 평론가라니,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싶은 부러운 삶이다. 그러려면 석박사 학위부터 필요하겠지? 물론 쉽지 않다. 십 년 전쯤 “다 때려치우고 뉴욕의 모 영화 학교나 갈까?” 하고 정보를 알아볼 때 억대 학비와 생활비가 들어간다는 그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 “여기 한국인이 되게 많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럼 우리끼리만 해도 경쟁률이…. 저요? 요즘 《씨네21》 영화평론상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석박사 학위, 그리고 꽤 많은 돈이 깨지는 유학 경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2000)였다. 예술가보다는 인문대 시간 강사가 영화기자 및 평론가의 상황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곤궁과 선택이 닮아서였다. 윤주( 이성재 )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 순위 48위 광부, 49위 농부”보다 순위가 낮은 “50위 인문계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문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개 짖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그는 결국 강아지들을 납치해 감금 혹은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정작 임신한 아내가 반려견을 집에 데려온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후 윤주의 입장도 달라진다. 아파트 경비실 경리 현남( 배두나 )과 함께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걸고 자신이 독거 할머니의 강아지를 죽인 범인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만취한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일상적 공간에서 장르성과 정치 역학을 포착한 뒤 치밀하게 때로는 분방하게 교차해 온 봉준호 감독의 인장을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 지하실, 경비 사무실은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자 한국 소시민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남은 사회 정의 실현으로, 윤주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노리지만 완벽히 실현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현남에게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부족했고, 윤주는 윤리를 저버린 타락한 소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남의 행위는 대가가 허무했고(할머니가 남긴 건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그는 인터뷰에 응하지만 TV 뉴스는 그의 존재를 지운다). 강아지를 구한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에서도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고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피한다. 윤주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바치면서 교수 임용에는 성공하지만, 마지막 양심 고백이 가닿지 못해 윤리의 최저선을 방어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현남과 윤주 새로운 영화 담론을 제시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에는,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직업적 자아실현과 ‘먹고사니즘’이 충돌할 때 우리는 때로는 타협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A지만, 꾸준히 A를 할 수 있는 미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B와 C까지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계 압박이 낳은 조바심이 내가 설정한 하한선을 위협할 때, 아니 그 하한선을 어디까지 더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온다.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현실적 고민은 대체로 윤주와 현남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윤주의 선택이 현실에 가깝다고 자조하기보다는 현남의 소우주에서 싹튼 정의감이 소소하게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런 성향의 인간이라 아직 좋은 글과 좋은 영화가 주는 성취감을 믿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임수연(영화기자) l 어렸을 때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씨네21》에서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업계 전반을 취재하며 다양한 심층 리포트를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