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월
- 감독
- 정진우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신종섭, 최재호, 김신명, 신성일, 문희, 박암, 최삼, 최창호, 조덕성, 김주오, 태무진
하길종 의 문제적 데뷔작 < 화분 >(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 테오레마 >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 화분 >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 화분 >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 남궁원 ),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 최지희 ), 애란의 동생 미란( 윤소라 ), 집안의 가정부 옥녀( 여운계 )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 하명중 )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 화분 >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 화분 >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 의 음악과 유영길 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 화분 >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 화분 >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 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 화분 >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하길종의 문제적 데뷔작 <화분>(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화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화분>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남궁원),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최지희), 애란의 동생 미란(윤소라), 집안의 가정부 옥녀(여운계)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하명중)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화분>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의 음악과 유영길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화분>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화분>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화분>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한국 영화아카데미 심화과정에서 내놓은 4번째 장편 영화들 중에 한 편인 < 밀월도 가는 길 >은 참 복잡한 영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조는 고향 인천에 찾아온다. 그리고 웜홀의 존재를 믿던 특이한 친구 기정을 떠올린다. SF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기정은 왕따였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동조는 웜홀에 대한 집착이 점점 커지는 기정이 버겁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해 그 둘은 나란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후 사라진 기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지만 그를 다시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동조는 이미 비어있는 기정의 예전 집을 찾아가 그를 모티브로 쓴 소설로 탄 상장과 상금을 조용히 올려놓고 떠난다. 마치 뒤늦은 속죄를 하듯이. 라고 내용을 요약해 보지만, 사실 요약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감독의 욕심이 굉장히 많다. 현실, 비현실, 현재,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이야기, 멋진 앵글을 만들려는 노력이 빚어낸 사진엽서에 나올 것 같은 장면들이 그렇다. 하지만 과욕이다. 이야기는 벌려놓은 판을 수습도 잘 안되고, 카메라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친 채 부유한다. 민망한 유머는 덤이다. 잘 만들었다고는 보기 힘든 영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저 `망작`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실패한 데뷔작으로 치부하기는 불편한 기분이 든다. 잘 납득은 안 가지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 나는 동기화 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한 시퀀스에 있었다. 동조와 기정이 일진 패거리들에 잡혀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는 끔찍한 장면. 이 장면의 잔혹함만 떼고 본다면 아마 학원폭력을 다룬 여러 영화들과 비교를 해도 높은 순위에 자리할 정도다. 이 장면은 마치 폭주기관차 같다. 구타, 피는 물론이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아주 질 나쁜 린치까지도 이어진다. 가해자, 피해자는 물론 침묵하는 비겁자가 모두 한 공간에 존재한다. 감독은 그것을 똑바로 보라는 듯 망설임 없이 까발려 스크린에 뿌린다. 마치 이 시퀀스를 위해 존재하는 영화인 듯 파워풀하게 보여지는 폭력에서 나는 스스로를 본다. 나는 어디에 서 있었나? 그간 한국 독립 영화 진영에서는 학교 폭력을 다루는 인상적인 작품도 적지 않았다. < 밀월도 가는 길 >은 학교 폭력을 다룬 많은 영화 사이에서 수작의 카테고리에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정호 감독이 보여준 파워풀한 연출은 지금껏 나오지 않은 다른 종류의 영화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어떤 감독이든 평생 단 한번만 주어지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밀월도 가는 길>을 뛰어난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