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 감독
- 황철민
- 제작년도
- 2000
하길종 의 문제적 데뷔작 < 화분 >(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 테오레마 >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 화분 >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 화분 >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 남궁원 ),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 최지희 ), 애란의 동생 미란( 윤소라 ), 집안의 가정부 옥녀( 여운계 )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 하명중 )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 화분 >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 화분 >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 의 음악과 유영길 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 화분 >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 화분 >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 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 화분 >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하길종의 문제적 데뷔작 <화분>(1972)을 나는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근 20여 년 만인 최근에 다시 보았다. 아주 가끔씩은 생각나기도 했고 접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기 어려운 작품도 아니었는데 재회하기까지는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한 가지 거리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와 비교되며 지적됐던 표절 논쟁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는 다른 거리낌이 있었고 그게 <화분>을 다시 보지 않게 했다. 내게 <화분>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강렬한 상징의 저택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예컨대 영화의 배경이 되는‘푸른 집’은 당시 박정희 독재 정권하의 청와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화분>은 당대 한국사회에 관한 상징인가. 감독 하길종 자신도 영화를 개봉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대담 자리에서“어디까지나 저로서는 <화분>을 대표작으로 생각”한다며, “금권만능주의의 몰락을 테마로 해서 미래의 한국을 진단”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 지성적인 팬들의 심판을 받고자 했었던 거지요”라고 말한다(「하길종 전집 3」, 262~263p). 그런데 20여 년 만에 <화분>을 다시 보며 나의 기억에도 감독의 말에도 의문을 갖게 됐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고 메시지가 없다. 그것들의 완성을 목표로 한 감독 자신의 의지와 의중이 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완의 상태거나 실패의 상태다. 상징은 빗나가면 안 되고 메시지는 혼동되면 안 될 것인데 <화분>은 비약의 내러티브, 과잉된 제스처, 모호한 관계 등을 거치며 오히려 오발과 혼선의 흔적들로 가득해진다. 그 명료하지 않은 웅성거림이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에 해당한다고 말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푸른 집의 주인 현마(남궁원), 그 집에 살고 있는 현마의“첩”애란(최지희), 애란의 동생 미란(윤소라), 집안의 가정부 옥녀(여운계) 그리고 현마가 데려온 그의 부하직원 단주(하명중)는 계층과 욕정과 질투와 비하와 차별과 억압과 폭력 등의 문제로 서로 모호하게 얽힌다. 단주가 미란과 사랑에 빠진다, 단주와 현마는 동성애적 관계였다, 따라서 현마가 단주와 미란의 관계를 질투하고 분노하게 된다, 등으로 이야기를 요약해볼 순 있지만 정작 주조되고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감정의 결 등은 불명료하거나 불투명한 편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웅성거림의 영화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를 기민하게 포착해 낸 것으로 자타 공인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요인은 여럿일 것이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느낌을 앞세워 한 가지 정도만 말해 볼 수 있겠다. 나는 그동안 <화분>이 푸른 집을 주 무대로 하여 모든 장면을 촬영한 영화라고 기억해왔는데 그 기억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집안에서의 장면들이 전부이기는커녕 적어도 절반에 가까운 장면들이 푸른 집 바깥에서 형성된다. 단주와 미란은 아주 괴상한 서사적 동기에 힘입어 푸른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일단 벗어나자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영화는 핍진성의 희생을 감행하면서까지 집 바깥에서의 둘의 시간을 연장하려 한다. 미란은 기어이 단주와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푸른 집을 벗어나 단주와 밀월여행에 오른다. 신중현의 음악과 유영길의 촬영이 더해져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안가 장면. 뒤쫓아 온 현마에게 붙들려 단주와 미란은 푸른 집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에야 푸른 집은 마침내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데 이때 이 집은 평범한 집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감옥이고 이물스러운 정사와 비명이 횡행하는 유령 들린 묘지가 된다. 인물들은 어느 찰나마다 "제발 절 이 집에서 내보내 줘요"라고 외치거나 “왜 이 집을 안 떠나는 거지?”라고 질문받게 된다. 끌려 들어온 미란은 모든 걸 포기하고 현마의 지배 아래 다시 놓인다. 끌려 들어와 폭행당하고 감금된 단주는 마치 억울한 유령처럼 혹은 이 절망의 나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자인해 버리는 어느 순교자처럼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내 배회한다. <화분>에서는 두 개의 힘이 무작정 겨룬다. 한쪽은 무작정 벗어나려는 힘이고 또 한쪽은 무작정 붙잡아두는 혹은 끌고 들어오는 힘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영화 속 젊은이들인 단주와 미란을 중심으로 벗어나려는 힘이 우세하다. 때문에 영화는 그 힘의 강세를 위해 얼마간의 핍진성이 훼손되는 것도 감수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을 넘어설 즈음 현마를 중심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고 그 힘이 강해지는 동시에 푸른 집은 더 기괴한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지만 막강한 독재자처럼 보인 현마 조차도 이 힘에 관한 한 부차적 인물이다. 힘의 소용돌이의 중심부는 현마라는 인물이 아니라 푸른 집이라는 공간이다. 예컨대 종반부에 이르면 이 집의 주인으로 기승을 부렸던 현마 자신이 빚쟁이들을 피해 저 혼자 푸른 집을 벗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화분>에서 푸른 집은 상징의 공간이 아니라 장력(張力)의 공간이다. 이곳을 독재자 박정희의 거처라거나 혹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명명할 지표를 우린 영화 속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화분>이 당대 한국사회에 팽배했을 법한 한 가지 불운한 정서는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화분>이 당대 우리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영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대개는 그럴 수 없었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화분>에서는 힘의 충돌로 발현된다. 이 벗어남과 잡아둠이라는 힘의 충돌과 그 충돌로부터 발생하고 드러나는 소음과 비명과 불쾌감들이 다시 현실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분>은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가 아니라, 당대 우리 사회에 관한 상징적 영화로 착각될 수밖에 없었던, 낯선 불온과 부조리의 영화다. 미국에 머무르며 오랜 시간 동안 바깥의 사람이었다가 안으로 들어온 하길종에게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얼핏 역설적이어서 더 그럴법하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단주의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만의 모든 것들을 밀어 버리는 부르도저가 되고 싶지 않을까” 젊은 하길종이 <화분>으로 성취하고 싶었던 일면이었을 것이다. 20년 만의 재회로 나는 이 영화의 일면을 조금은 다시 느끼게 되었다.
김응천 (金應天)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영원한 청춘 감독의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전혀 늙은 티를 내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응천은 32년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70 고희인 셈이다. 그 유명한 경기(京畿)출신이다. 요즘은 경기중고등학교가 한 지역의 평준화된 일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수재들만 모이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교였다. 그러니까 경기를 엄격이 따지자면 평준화 전(前)의 경기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고 아는 척 떠벌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김응천은 그러고 보니 작품수에 있어서도 84개 작품을 감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1위가 김수용 감독, 2위가 고영남 감독, 3위가 임권택 4위가 김응천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작품 경향을 보면 중고생들을 그리는 하이틴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명랑하고 유쾌한 얘기들을 다루고 있다. 음악을 곁들인 빠르고 진취적인 주제가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이다. 아마 40대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김 감독이 영화 팬들이 되겠다.김 감독은 감독 데뷔를 28세에 했다. ' 영광의 침실 '이 데뷔작 타이틀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른 출세였다. 김 감독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우울한 영화도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세계로 둔갑한다. 그것은 김 감독의 천성이 그렇기에 그런 영화들이 생산되지 않았나 싶다. 김 감독이 함께 일한 배우들을 얼른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떠올리자면 우선 이덕화 가 으뜸으로 떠오른다. 전영록 , 임예진 , 이상아 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청춘영화들을 간단히 훑어보면 ' 푸른 교실 ', ' 모모는 철부지 ', ' 꽃밭에 나비 ', ' 이 다음에 우리는 ', ' 고교 우량아 ', ' 여고 졸업반 ', ' 시집가는 날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 청춘대학 ', ' 달려라 풍선 ', ' 내 이름은 마야 ', ' 대학얄개 ',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 스물하나의 비망록 ', ' 춤추는 청춘대학 ', ' 말괄량이 대행진 ', ' 87맨발의 청춘 ', ' 얄숙이의 전성시대 '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청춘영화만 죽어라하고 만든 감독은 아니다. 성인영화도 수두룩하다. ' 지미는 슬프지 않다 ', ' 여인의 종착역 ', ' 진아의 편지 ', ' 목마위의 여자 ', ' 모르는 여인의 종착역 ', '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 ' 애처일기 ' 등등이 있다. 김 감독의 특징은 이른바 제작자를 배려하는 빨리찍기, 필름 아껴쓰기, 초스피드의 촬영 진행은 그로 하여금 제작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면서 흥행감독으로의 위치를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그의 감독 친구는 본인 조문진 , 문여송 , 석래명 , 황학봉 , 김기 등이 아니었을까. 그중에서도 본인과는 무슨 얘기든 흉금을 떨어놓고 상의를 하곤 했다. 그는 외로운 사나이였다. 조실부모를 하고 형제도 없이 충무로 영화판에서는 비교적 외토리로 지냈다. 안동 김씨인 김 감독은 어릴 적에 부유한 집안에서 넉넉하게 자라온 걸로 안다. 그가 집안의 내력을 얘기할 때 보면 양반 집안에서 꽤나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집안이 망하고 떠돌이처럼 지낸 건 그의 성격 자체를 변경시켰다. 그가 가족이 없으므로 해서 하숙집을 전전했는데 오랜 총각시절을 하숙집을 전전한 기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새롭다. 김응천 이코르 하숙집 식으로 . 그러다가 마흔 가까운 나이에 부인 김정수 여사와 결혼, 총각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 당시 김 감독의 결혼은 명동 YMCA에서 올렸는데 이 착하고 점잖은 늦깍기 신랑의 결혼식에는 모든 영화인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인 김 여사께서 김 감독의 영화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만큼 김 여사는 남편의 사업을 돕고 이해했다. 김응천 이 부인의 지원금을 행여 까먹을까봐 전전긍긍했던 걸 나는 기억한다. 좀 손해를 끼친 경우는 응천이 나와 밤새도록 술마시면서 속상해 했다. 그만큼 애처가였던 그였다. 무슨 고민이 있다 하면 나를 불러내 둘이는 맥주를 마셨는데 과묵한 그도 술로만 호소하기엔 역부족이었던지 하로는 날 부르더니 문진아, 이게 마지막 술일세 하고 선언하지 않는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한때 그만큼 폭주를 했던 그였다. 그날 그와 진탕 마셨다. 그후로 그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술을 끊으니 자연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후로 그는 쭉 금주생활을 지켰는데 타계할 때까지 그 신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응천 그 신사 같은 사람도 한번 되게 화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하길종 감독이라고 나하고도 친한 후배 감독 사이의 일이었다. 김 감독이 만든 ' 고교 우량아 '영화를 '뿌리깊은 나무' 잡지에 하길종이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 내용은 '고교 우량아' 영화가 웃긴다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애들 돈을 빨아 먹기 위해 알캉달캉 얍삽하게 만들었는데 어쩌구.......' 이 글을 김 감독이 어떻게 읽은 모양이었다. 인내심 많고 화를 안내는 김 감독이 분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길종 이 묵고 있는 충무로 경화장 여관을 쳐들어 갔다. 편집용 가위를 들고서였다. 방심하고 여관방에 있던 하길종은 불시에 문 열구 쳐들어 오는 김 감독을 피해 신발도 신지 못하고 여관을 뛰쳐 달아났다. 김 감독이 설마 찌르랴 했겠지만 김 감독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통상 영화감독끼리는 동업자임으로 해서 여간해서는 비평 안하는 게 예의이다. 그런데 하길종 그 녀석이(하길종이와 내가 친하니까 그 녀석이라고 표현한다)정신이 나갔지 남의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릴 수가 있는가. 하길종이 원래 비평적 독설가인건 사실이지만 영화계의 선배요, 더구나 고교 청춘물 같은 건 본격 비평에서 제외하는 게 상식인데 알캉달캉이라느니 얍삽하다느니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건 하길종이 백번 잘못한 것이었다. 김응천 감독이 무슨 비평을 예상하고 예술 작품입네 하고 거드럭거렸다면 비평의 잣대를 들여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단순한 명랑물이잖은가. 그때 하길종은 그렇잖아도 충무로 영화계에서 마구 휘두르는 비평으로 인해 미운 털이 배긴 마당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하길종과 친했던 나까지 왜 그런 녀석과 사귀느냐고 압력이 심하게 들어오곤 했다. 하길종 은 이후 그를 혼내준다는 감독들이 벼르고 있어 충무로를 걸어다닐 때 조심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 감독이 아프기 시작한 건 10여 년 쯤 전이다. 수서에 살던 그는 우리들과 드문드문 만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턱에 3개의 빨간 종기가 나서 무심코 낫겠지 했는데 그게 임파선 암, 그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부인 김 여사으 극진한 간호가 시작되었다. 김 감독의 취미를 살려주기 위해서 김 여사는 컴퓨터 신종 기재에서부터 사진 스캐너니 뭐 아무튼 벼라별 기재를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다.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김 감독이 운명하기 전 우리 친구들이 그의 집에 문병가려 전화하면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노쇄한 몰골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만큼 그는 깨끗한, 어느 면에선 결벽증이랄까. 그러나 난 이해한다. 그의 성격이 그토록 갈끔한데 어쩌랴. 지저분하게 인생에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 얼마나 깨끗한가. 2001년 6월 1일 오후 그는 타계했다. 부인 김 여사의 지극한 간호는 부인으로 하여금 이번 감독협회총회에서 아름다운 감독 부인상을 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응천 감독. 귀하는 깨끗이 인생을 살다간 우리들의 친구였오. 고맙소. 명복을 비오. 조문진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5. 3. 2 1959 < 영광의 침실 > 데뷔 작품명 1959 영광의 침실 1960 감나무골의 임서방 1962 사장딸은 올드 미스 1963 지미는 슬프지 않다 1964 밤에 걸려온 전화 / 눈물의 영도다리 1965 청춘을 변상하라 1966 귀신잡는 해병 / 청춘대학 1969 모르는 여인의 편지 1970 여인의 종착역 1971 3인의 검은 표범 1972 부부교대 1973 천사의 메아리 1974 진아의 편지 1975 애처일기 / 여고졸업반 1976 청춘을 이야기합시다 / 푸른 교실 1977 이 다음에 우리는 / 첫눈이 내리 때 / 고교우량아 / 시집가는 날 / 불타는 소녀 / 미스양의 모험 1978 우리들의 고교시대 / 개선문 / 고교명랑교실 / 제갈 맹순이 1979 목마위의 여자 / 너는 여자 나는 남자 / 꽃받에 나비 / 모모는 철부지 1980 낯선 곳에서 하룻밤 / 달려라 풍선 1981 내 이름은 마야 1982 갈채 / 깨소금과 옥떨매/ 대학얄개 1983 대학신입생 오달자의 봄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스물하나의 비망록 / 대학들개 1984 불타는 신록 / 대학괴짜들 / 밤마다 천국 1985 춤추는 청춘대학 1986 말괄량이 대행진 / 87맨발의 청춘 1987 얄숙이들의 개성시대 1988 그녀와의 마지막 춤을 1993 밀월여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