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 해변
- 감독
- 하워드 혹스
- 제작년도
- 1935
- 출연
- 미리암 홉킨스, 에드워드 G. 로빈슨, 월터 브레난, 조엘 맥크리, 브라이언 돈레비
홍상수 감독의 영화 < 오! 수정 >(2000)에는 의미와 맥락을 추정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다. 소(小) 제목이 부여된 5개의 장으로 구성된 플롯에서 2장 ‘어쩌면 우연’과 4장 ‘어쩌면 의도’의 3일째(번호 ‘3’이 붙어있다)에 해당하는 삽화에 등장하는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이 대표적이다. 그저 지나가는 여인에 불과하여 관객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여인은 2장과 4장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타난다. 2장에서 재훈(정보석)과 수정(이은주)이 호프집에 있는 시간, 영수는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박 기사와 출근 문제를 두고 크게 언쟁을 벌인다. 이어서 재훈과 수정의 술자리에 합류하기 위해 영수가 호프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직후, 이 여인은 영수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간다. 4장에서는 수정이 호프집을 나와 머플러를 매고 유니콤 서울 프로덕션 사무실로 이동한 직후 바바리 코트 여인이 나타나 호프집 안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영수가 호프집으로 들어가고(2장), 수정이 호프집에서 나와 시야에서 사라진 뒤(4장)에도 이 여인이 호프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직하게 기다려준다. 시간과 기억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유희하는 <오! 수정>의 플롯에서 이 성명불상의 여인은 시간을 나타내는 기호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영수와 수정의 시간이 교차하는 좌표 위에 이 여여인이 서 있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보다 더욱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요리사이다. 이 인물은 1장 ‘온종일 기다리다’와 5장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에 등장한다. 1장에서 우이동의 호텔방에 있는 재훈이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쇼트에 이어 누군가의 시점을 암시하는 듯한 부감 쇼트가 뒤따른다. 호텔의 노상 주차장을 찍은 이 기울어진 구도의 쇼트에서 요리사는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을 향해 사선으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한다. 그의 이동 경로와 속도에 맞춰 카메라는 틸트-업하면서 요리사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야기가 종결되는 5장에서 요리사는 다시 나타난다. 1장에서와 동일한 구도의 쇼트에서 이번에는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걸어 내려온다. 즉, 요리사가 이동하는 형상은 두 장안에서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어떤 중요성도 부여되지 않은 것 같은 이 남자는 왜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가. 스토리나 인물, 사건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비 서사적인 존재로, 어떤 극적 기능도 담당하지 못하는 잔여로 그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시간과 기억을 조각내고 나란히 그것을 대조하도록 디자인한 <오! 수정>의 내레이션 전략에 의해 기능을 부여받은 에이전트이다. 요리사가 프레임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하는 이미지와 걸어간 길을 다시 되밟아 오는 이미지는 1장과 5장에 나란히 놓여 두 개의 시간을 종합하도록 한다. 여기서 요리사는 1장의 표제를 장식하고 있는 ‘온종일’이라는 시간의 층위를 함축한 정보-기호가 된다. 1장에서는 재훈이 택시를 타고 우이동 호텔방에 들어가 수정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가 묘사되는데, 이 시간은 하루 중 이른 아침에 해당한다. 전날 재훈은 수정과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짝을 이루기’ 위한 충동에 사로잡혀 너무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조급한 마음에 잠을 많이 자지 못한 재훈은 호텔방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고 그 시간 요리사는 노상 주차장을 걷고 있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요리사의 쇼트는 따라서 이른 아침 자신의 일터인 호텔 식당을 향해 출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5장에서는 마침내 수정이 호텔에 당도하여 재훈과 ‘짝을 이루고’, 두 사람이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삽화가 기술된다.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다는 수정의 고백에 환희에 젖는 재훈의 이전 반응에 비추어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5장의 메시지는 남자의 아둔한 믿음을 희화화한다. 섹스를 한 후 침대 시트 위에 묻은 수정의 피를 욕실 안에서 씻어내면서 재훈과 수정이 나누는 미신을 주제로 한 대화에 이어 요리사의 쇼트가 삽입되어 있다. 1장에서의 묘사와 차이는, 요리사가 향했던 식당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5장에는 없으며 주차장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요리사의 쇼트 뒤에 수정이 호텔방 창문 앞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처리된 쇼트가 이어진다는 점이다. 1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모호하지만 5장에서는 시선의 주체가 암시된다. 요리사가 근무하는 식당은 1장에서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서 출발하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것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요리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1장과 5장에서의 두 쇼트를 종합하면 재훈은 ‘출근에서 퇴근까지’ 수정을 기다린 셈이 되고, 비로소 ‘온종일’이라는 지속된 시간의 형상이 완결된다. 재훈이 호텔에서 온종일 수정을 기다렸다는 명시적 증거가 이 요리사인 것이다. 서사 정보를 제시하는 홍상수의 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홍상수는 구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긴요한 정보-기호들을 은폐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어떤 기능도 부여받지 못한 행인이나 아낙네, 사물들이 인상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를 입은 여인, 오프닝에 프레임의 앞을 가로질러 가는 약수 물통을 끄는 여인, 한식당 ‘큰기와집’의 주방 아주머니, 재훈과 수정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의 주인, 재훈의 벤츠를 모는 김 기사 등이 이런 존재들이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프레임의 앞과 뒤를 서성이면서 미스터리를 자아낸다. 혁신적인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이들은 발견을 기다리는 보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오! 수정>의 흑백 이미지는 이들을 위한 조력의 형식이다. 흑백은 동일한 세팅 위에서 차이를 감지하는데 요긴한 스타일 상의 전략이다. 요리사와 바바리 코트 여인은 그 차이를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이미지 특성에 따라 구분된다. <오! 수정>은 버려지는 디테일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내러티브의 꼴을 보여준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유습화된 권력 관계로부터 떠밀려 있던 사소한 것들의 위력, 그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성립되는 대안 서사의 한 유형이다. 홍상수는 쇼트의 형태를 결정하는 구도와 앵글, 프레이밍, 거리, 크기 등의 조형적 요소들이 어떻게 서사 정보에 대한 관객의 인지작용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구조를 활용한다. 여기서 홍상수는 조각난 쇼트를 조립하여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관객들에게 엄청나게 큰 책임을 지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19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의 ‘정전’(canon)이라면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과 < 산딸기 >( 김수형 , 1982)에서 시작해 < 어우동 >( 이장호 , 1985)과 < 변강쇠 >( 엄종선 , 1986)를 거쳐 < 매춘 >( 유진선 , 1988)에 이르는 계보일 것이다. 당대 상업영화의 트렌드였던 이 작품들은 불륜 멜로드라마, 궁중 사극, 문예 영화, 호스티스 영화 등 한국영화의 장르적 전통을 변형시키며 그 위에 에로티시즘이라는 ‘시대정신’과 여배우를 토대로 한 스타 시스템을 결합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정전의 뒷길엔 ‘외전’의 계보도 존재한다. < 반노 >( 이영실 , 1982)와 < 빨간 앵두 >( 박호태 , 1982)에서 시작해 < 색깔 있는 남자 >( 김성수 , 1985)와 < 사방지 >( 송경식 , 1988)를 경유해 이후 에로 비디오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일종의 ‘B 무비’의 전통이었다. 이 영화들은 ‘에로 정전’들이 지닌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나름의 엄숙주의를 파괴한다.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고 내러티브는 불균질적으로 전개되며, 때론 급진적인 테마를 관객에게 갑작스레 들이밀어 당황스럽게 만드는 영화. 지금 소개할 <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 박용준 , 1985)(이하 <서탱고>)는 그 전형이다. 사건은 1박 2일 동안 일어난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정주부 한수진( 오수비 )은 서울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 수진의 남편인 신 박사( 김동현 )는 저명한 가정 문제 전문가. 세미나 때문에 부산에 내려간 그는 아내에게 내려오라고 한다. 오랜만에 바닷가에서 데이트를 즐기자는 제안이다. 경부선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협( 유승무 )이라는 청년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이후 부산에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조우한다. 남편은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너무 바쁘다. 환영 리셉션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새벽에 겨우 숙소로 들어올 정도다. 홀로 남겨진 수진. 여기저기 다녀 보지만, 그 누구도 외로움을 채워주진 못한다. < 서탱고 >가 특별한 건, 이 영화 속엔 1980년대 에로 영화의 굵직한 관습들이 심하게 과장된 방식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폭력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초반부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가 연상될 정도로 공포스럽다. 수진은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데, 이때 바바리코트에 마스크를 쓴 남자( 배수천 . 이하 ‘마스크 맨’)가 갑자기 그녀를 공격한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수진이 대학생 시절 때부터 쫓아다니던 스토커였다. 영화엔 여러 차례 플래시백으로 마스크 맨과 수진의 과거 장면이 삽입되어, 그녀의 삶 자체가 ‘강간 공포’라는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부산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는 청년 협은 수진을 지켜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수진이 외로울 때나 위험에 처할 때 항상 그는 나타난다. 하지만 그 역시 호시탐탐 수진의 육체를 노린다는 점에서 마스크 맨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이외에도 해운대의 천막 나이트에서 수진을 바라보던 남자들의 음험한 눈빛이나, 술에 취해 수진의 숙소에 난입해 그녀를 범하려 했던 남자처럼, 그녀 주위엔 항상 남성의 거친 시선이 존재한다. ‘성-폭력’을 동력 삼아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에로 영화의 민낯은 <서탱고>의 중심 내러티브를 이룬다. < 서탱고 >가 따르는 또 하나의 장르적 관습은 여성의 욕망에 대한 분열증적 표현이다.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들은 여성의 욕망이 일단 억눌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 애마 부인 >은 선구자적인 영화일 텐데, <서탱고>는 이 전통을 한층 더 기괴한 방식으로 확장한다. 대표적인 장면은 마스터베이션 신이다. 숙소에서 남편만 기다리던 수진의 외로움은 급기야 분노로 변한다. 그녀는 갑자기 숙소를 뛰쳐나와 해변의 숲속으로 뛰어간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네 타는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수진에게, 자신의 엄마는 죽었으며 그네는 아빠가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수진은 그네를 타다가 숲속에서 섹스를 나누는 젊은 커플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녀는 다시 뛰기 시작해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도착한다. 그곳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수진. 그녀는 ‘무릎과 무릎 사이’로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기며 황홀경에 빠진다. 그 흐름을 따르면, 해소되지 못한 욕정,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 격렬한 섹스에 대한 열망 등이 (< 서탱고 >의 명장면 중 하나인) ‘파도 마스터베이션’ 신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실험영화에 가까운 매우 격한 방식의 장면 연결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밤 장면과 낮 장면은 무질서하게 배열된다(갑자기 낮에서 밤이 되고, 그러다가 낮으로 이어진다). 물론 촬영 과정에서 생긴 실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퀀스의 급진적인 플롯 구성은 이 영화의 스토리가 마치 여주인공의 의식(욕망)의 흐름에 의해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자의 억눌린 욕망에 대한 테마는, 자연스레 남성 캐릭터가 지닌 모순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 에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부부 관계의 대전제는, 부부 사이에선 절대로 성욕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대부분 성불구이거나 먼 곳에 있거나 섹스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가 차지한다(이것은 < 애마 부인 >이 세운 전통으로, 애마( 안소영 )의 남편( 임동진 )은 교도소에 있고 그 자리를 미술학도 동엽( 하재영 )이 채우는데, < 서탱고 >에선 ‘협’이 그 역할을 한다). < 서탱고 >의 신 박사와 수진은 섹스리스 커플인데, 남편은 아내의 과거가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편을 가정 문제 전문가로 설정한다. 그는 TV에 출연해 말한다.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결혼 전에 일어났던 일은 서로 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성 문제에선 여자보다 좁쌀스러운 게 남자요.” 그러면서 과거에 마스크 맨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할 것을 강요한다. 의처증에 걸린 가정 문제 상담가라는 극단적 모순 상황. 이것은 당시 에로 영화가 지녔던 남성 중심적인 보수 이데올로기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 서탱고 >는 당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한껏 과장하고 뒤틀며 계승한다. < 애마부인 >의 틀을 가져와 그 안에서 < 무릎과 무릎 사이 >( 이장호 , 1984)의 강간 모티프를 변형시키고, < 애마부인 2 >( 정인엽 , 1984)의 히로인 오수비 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러면서 외국 영화의 섹슈얼 코드들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합시킨다. 내용상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72)를 차용한 제목은 어쩌면 1990년대 이후 성인 비디오 시장을 휩쓰는 ‘제목 패러디’의 효시다(게다가 <서탱고>의 무대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다). 남편이 면도할 때 옆에서 샤워하는 아내를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 드레스드 투 킬 >(브라이언 드 팔머, 1984)에서 가져왔다. 이런 이질성은 <서탱고>를 더욱 불균질적 텍스트로 만든다. 특히 <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메어 자르치, 1979)를 가져온 엔딩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지점이다. 마스크 맨 역할을 맡은 배수천 은 이두용 감독의 ‘발차기 액션’ 영화의 악역으로 유명한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 길이 남을 사이코 연기를 보여준다. “너를 가질 수 있다면 내 인생의 막을 내려도 좋아.” < 서탱고 >의 엔딩은 마스크 맨의 이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협과 처음이자 마지막 정사를 나눈 후, 수진은 숲속으로 달려간다. 그곳 그네에선 마스크 맨이 기다린다. 과거 같았으면 겁에 질렸을 수진은 담담하게 옷을 벗고 그를 받아들인다. 마스크 맨도 마스크를 벗고, 드디어 스토커가 아닌 ‘남자’로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절정에 오르기 직전의 순간, 그녀는 그넷줄을 올가미로 만들어 마스크 맨의 목에 걸고 마치 교수형 집행자처럼 남자를 나무에 매단다. 욕망에 억눌렀던 수진은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남자에게 복수한다. 하지만 반전과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있는 수진 앞에 남편이 나타나자, 그녀는 말한다. “난 댁을 모릅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난 댁의 여자가 아닙니다. 남의 여자입니다.” 그리고 신 박사에게 싸늘한 시선을 날린다. 이 시선엔 그녀를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수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단번에 뒤엎는 서늘함이 있다. 그리고 이 전복성은 < 애마부인 2 >에서 오수비가 남편에게 했던 대사를 환기시킨다. “이제 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 사실 < 서탱고 >는 ‘한국영화 걸작선’이라는 코너 제목에 어울리는 영화는 아니다. 컬트나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영화?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건, 이 영화를 통해 당대 한국영화가 지닌 분열증의 극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박용준 감독은 오혜림을 내세워 < 서울의 탱고 >(1986)를 만들었고 <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2 >(1992)로 ‘탱고 3부작’을 완성했으나 전편의 충격을 넘어서진 못했다.
“봄이 왔다. 봄날과 함께 그도 왔다. 아직 소녀는 오지 않았다.” 봄은 이미 왔지만 겨울 끝자락의 신작로 오솔길.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외롭게 걷고 있는 남자. 그리고 아무도 없는 기차역 벤치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 그 남자가 기다리는 소녀는 한 마리 나비처럼 훨훨 날아서 올 것이다. 쓸쓸한 통기타 선율에 흘러내리는 허밍. 잎이 떨어진 마른 가로수. 텅 빈 기차역. 벤치가 풍겨내는 서정은 기이하게 등장하는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의 모습마저 낭만으로 채색해 버리는 마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 나비소녀 >는 이제는 우리가 레테의 강으로 흘려보냈다고 생각하는 그 옛날의 낭만과 순수를 추억하게 한다. 그렇게 어린 연인들의 슬픈 러브스토리가 촉촉하게 감겨오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78년에 개봉된 < 나비소녀 >는 송영수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 <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 등과 스타일이 전혀 다른 영화라 그다지 중요한 필모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7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하이틴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아류작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할 만 하다. 1977년 초 < 고교얄개 >의 흥행 성공은 ‘얄개’라는 아이콘을 탄생시키면서 고교물 혹은 하이틴 영화라고 불리게 되는 일종의 장르를 만들어 낸다. 이 영화들은 남고를 배경으로 철없는 주인공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교훈을 얻고 성장한다는 스토리를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히트하기 이전에 이미 임예진을 주인공으로 한 순정 하이틴물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진짜 진짜’ 시리즈로 불리는 세 편의 영화는 낭만적 혹은 비극적 사랑의 판타지를 전면화하면서 소녀의 순정, 만화적 감수성을 자극했다. 이후 2년 동안 하이틴 영화는 이러한 두 개의 소재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우후죽순 아류작들이 속출하게 된다. 결국 < 나비소녀 >는 하이틴 영화의 끝자락에 개봉되어 안타깝게도 아류작의 외피를 쓴 채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만다. 두 주인공이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하이틴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직접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 속에는 얄개 이승현 과 김정훈 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있다! 송영수 감독은 < 나비소녀 >에서 기존의 얄개영화가 강조했던 모범과 건전한 이미지를 양창수( 강태기 )에게 할애한다. 그리고 임예진의 이미지는 이선희( 명현숙 )에게로 이입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하이틴 영화와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비소녀>는 하이틴 영화의 장점만을 취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명현숙 중심의 스토리라인을 통해 소녀 취향의 낭만적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강태기를 중심으로 한 친구 관계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사회현상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하이틴 영화가 강조했던 모범과 건전은, 실은 기성세대의 질서를 그대로 청소년들이 수용해줄 것을 강요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이틴 영화가 당시 학생들의 고민을 제대로 장면화하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했다. 하지만 송영수 감독은 두 주인공 창수와 선희를 고등학생에서 바로 대학생으로 만들면서 기존의 하이틴 영화가 잔소리처럼 강요했던 청소년에 대한 모범과 건전에 대한 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주인공들이 성인이 되는 순간 그들의 시각과 발언권은 좀 더 확장되었고, 당대의 사회적 경향을 스토리에 반영할 수 있었던 셈이다. 창수의 친구 기훈( 이계인 )의 에피소드를 통해 경제개발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던 시절, 노동하는 부모의 무관심으로 괴로워하는 학생의 모습을. 캐나다로 이민 가는 친구를 통해 선진기술 습득을 통한 나라발전이라는 사명감을. 창수의 낙도 봉사활동을 통한 농촌계몽 등 당시 사회의 모습과 가치관을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수에게 주어졌던 농촌계몽이라는 대의가 선희와의 사랑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결국 그리워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 당시 잘 살아보세 혹은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대의에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분명히 희생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장치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치 쓸쓸한 가을 같은 영화. 아니면 소녀 취향의 신파멜로드라마로 치부해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지점은 또 있다. 바로 송영수 감독의 < 나비소녀 >에는 70년대 중요한 영화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이 영화의 원작은 < 별들의 고향 >의 이장호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유현목 감독과 영상시대 출신의 변인식 영화평론가는 배우로서 참여하고 있다. 시나리오의 송길한 . 귀에 착착 감기는 영화음악을 선사한 뚜아에모아 출신의 이필원 의 음악까지. 알고 보면 이 영화는 70년대 새로운 한국영화를 주창했던 이들의 그림자가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면면만 보고 영화를 걸작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신인감독의 패기는 느껴지지만 분명 과잉과 거칢이 있는 영화다. 하지만 외적인 요인을 다 떠나 이 영화는 낭만과 순수의 서정이 있어서 좋다. 그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기도 하고 말이다. 강태기 명현숙 감독 송영수 각본 송길한 촬영 김영대 1977년 100분 칼라 판매원 비젼비디오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