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효
- 참여 작품
- 사마리아 (2004)
채플린의 영화는 항상 서글프고 처량 맞았다.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요상한 것 (이를 테면 ‘ 황금광 시대 ’에서의 고무부츠 같은것) 을 우걱우걱 씹어대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결국 그의 이야기는 웃음 뒤로 지긋지긋한 가난과 계급적 불평등을 이고 살았던 노동자와 이민자들의 역사를 드러냈다. 그의 사회적 일침이 더더욱 드라마틱하고 절실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채플린의 영화들이 언어가 아닌 몸으로 이야기하는 무성이었고 화려함과 꾸미가 빠진 흑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진 건 ‘몸’ 뿐인 노동자들의 설움이 슬랩스틱과 피상의 색(色) 이 빠진 현실의 명암(明暗)만으로 시대의 고통을 공유했다. 고봉수 연출의 < 다영씨 >(2018) 역시 비슷한 화법으로 세상의 고달픔을 나눈다. 색과 언어의 소란함없이 노동의 처절함을, 노동계급의 집단적 서러움을 로맨틱 코미디의 형태로 그린 흑백무성영화, <다영씨>는 2000년대에 재등장한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 영화는 보름달 빵과 바나나 우유를 입에 꾸겨넣고 있는 퀵 서비스기사, ‘민재’의 클로즈 업으로 시작된다. 오토바이 위에 엉거주춤 앉아 빵을 먹고나면 본격적으로 민재의 부역이 시작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빌딩을 등반 하듯 올라갔다 내려오고, 배달 중에 물건을 들고 넘어져 박스 안 상품이 깨지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민재의 일상에선 다반사다. 맨날 먹는 보름달 빵 만큼이나 지겨운 일상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다영씨’에게 온 택배를 배달하는 일이다. 작은 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그녀는 밤낮 피곤과 구박에 쩔어있지만 민재가 나타나면 함박미소를 머금는, 그에게는 달콤상큼 귤 같은 존재다. 민재의 착한 동료들은 다영씨 앞으로 온 모든 택배를 민재에게 몰아준다. 그녀에게 택배가 도착할 때 마다 민재는 싱글벙글하며 귤을 챙겨 주머니에 넣는다. 자신의 쑥쓰러운 미소를 들키지 않기위해 헬맷으로 얼굴을 덮고 다영씨 책상에 몰래 귤을 얹어 놓으면 민재의 비밀스러운 임무가 끝난다. 가끔 마법처럼 생겨나는 귤 말고는 다영씨에게도 인생의 낙이 없다. 사무실에는 다영씨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네 명의 찌질한 남자 상사들과 그들을 여왕벌처럼 군림하는 사장의 딸이 있다. 상사들은 시도때도 없이 다영씨에게 커피 심부름과 각종 잡일을 시켜며 그녀의 하루를 지옥으로 만든다. 한편 민재는 다영씨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택배일을 그만두고 그녀의 회사에 입사원서를 낸다. 민재의 낮은 학력과 경력을 비웃던 상사들은 이력서에 쓰여진 그의 희망 월급 ‘50만원’에 눈을 번쩍 뜨고는 그를 고용한다. 민재가 다영씨의 회사로 출근을 시작하면서 택배기사의 삶으로 보여졌던 고단한 노동자의 촌극은 중소기업으로 공간을 이동한다. 비정규직인 다영씨는 정규직 직원들의 회식에 초대를 받지 못하고, 늘 컵라면으로 때우며 야근을 하지만 회사는 계약기간을 늘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웃픈’ 슬랩스틱은 꿋꿋이 이어진다. 코미디의 대부분은 여왕벌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비위를 맞추는 상사들 4인방과 다영씨를 위해 그들을 골탕먹이는 민재의 소소한 복수극으로 채워진다. 궁극적으로 <다영씨>는 노동현장에서 마주하는 비정한 현실을 다루고 있으나 민재의 직업전환으로 인해 대비되는 전반과 중반이후, 즉 노동직과 사무직의 대비를 통해 기업 내에서의 계급구조를 극명히 드러내기도 한다. 가령, 민재의 짝사랑을 위해 택배기사들이 민재를 도와주고 (동등한 위치에서) 연대하는 반면, 회사의 직원들은 대리, 과장, 부장의 서열을 통해 분리되어있을 뿐 아니라, 이를 지배하는 금수저 출신 사장 딸의 존재를 통해 계급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음을 명시한다. 결국 이 엄청난 서열과 계급의 벽은 다영씨의 수호천사로 회사에 ‘헐값’에 입사했던 민재도 어쩔수 없는 불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결국 민재는 회사를 나와 퀵서비스 기사로 돌아가고 다영씨는 고난 뿐인 그 언덕에 남는다. <다영씨>에는 코미디영화에 있을법할 유쾌한 엔딩이 없다. 커플의 진한 키스신으로 끝나지도 않고 주인공의 팔자 전복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퀵서비스 기사로 다시금 나타난 민재와 다영씨의 재회는 절절하게 느껴진다. 러닝타임 60여 분에 담긴 노동자의 고단한 삼라만상 끝에 보여지는 이들의 교감은 분명 로맨스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대와 교감의 온기가 넘치는 이 영화의 엔딩은 참으로 귀한 코미디적 엔딩이자 노동자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엔딩이기도 하다.
이번 원고를 위해 < 검은 장갑의 여인 >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해독하려 시도하는 중이다. 심우섭 감독, 이경재 원작, 박옥상 각색의 이 1962년 영화가 특별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연배우가 최무룡 , 황해 , 김혜정 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주인공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은근히 해독이 어렵다. 이유는 계속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교통사고(지문에는 ‘부레키 소리, 황인성 차에 치운다’라고 나와 있다.)로 시작하는 영화다. 차에 치인 황인성이란 사람은 한명건설 영업부장으로, 죽기 전에 목격자인 사진기자 윤덕호에게 “서류, 서류... 검은 장갑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말 그대로 검은 장갑을 낀 누군가가 그 서류를 훔쳐갔다는 말로, 지문에도 그 장면이 나온다. 겨우 페이지를 한 장 넘겼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상하다. 일단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는 사고 직전에 어떤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그 여자가 우리의 타이틀 롤인 ‘검은 장갑의 여인’일 텐데, 왜 얼굴과 이름을 알면서 ‘검은 장갑’이라고 했을까? 장갑이란 벗어버리면 그 뿐, 어떤 단서도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암만 봐도 교통사고를 위장한 계획 살인인데 그렇다면 운전사는 왜 브레이크를 밟았을까? 여기에 대한 어떤 논리적인 답변 같은 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란다. 호기심이 당긴 덕호는 독자적인 수사에 나선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이미 그가 그 검은 장갑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장갑은 미스 추라는 사람의 것인데, 덕호는 이미 미스 추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 사람은 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연실이라는 모델과 룸메이트인 모양이다. 그리고 은주란 여자도 같은 방을 쓰는 모양이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도대체 장갑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그게 여자친구 룸메이트 것이란 건 어떻게 안 건데? 사라진 서류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설계도이기 때문에 한명건설의 주 사장은 난리가 났다. 엉뚱하게도 덕호는 이 회사의 긴급회의 안에 버젓하게 들어간다. 주 사장이 고용한 이 변호사는 덕호를 믿을 수 있는 부하라고 소개하는데, 왜 그런 사람이 지금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를 하고 있을까? 죽은 남자가 남긴 수첩이 단서다. 박미라와 서장석이라는 이름이 있고 장효숙이란 여자 이름도 있다. 덕호가 장효숙을 찾아서 물어보니 죽은 남자는 사실 송 마담이라는 여자에게 빠져 있었단다. 송 마담을 찾아낸 덕호는 그 사람과 대충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덕호: 나같은 돈판이 지나치기에는 과거의 경력이 용서를 해야지. 송마담: 문제의 미인을 미행했군. 덕호: 그런데 그 미인이 지금 막 이빠 안으로 들어왔거든. 송마담: 지금? 응... 아무도 안 왔는데? 박원식: .... ‘나같은 돈판이...’가 어떻게 ‘문제의 미인을 미행했군’으로 연결되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덕호는 송 마담이 검은 장갑의 여인이라고 우기다가 바에서 쫓겨나고 정체불명의 악당에게 얻어맞는다. 알고 봤더니 주 사장은 과거가 있다. 옛날엔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였고 죽은 황 부장은 그의 앞잡이였다고 한다. 하긴 60년대 초. 일제시대 친일파들이 아직 팔팔한 장년층이던 때다. 이건 내가 이 시나리오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실이다. 송 마담은 여전히 자기가 검은 장갑의 여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주 사장의 오른팔인 박 상무의 여자친구란다. 그리고 덕호가 입원한 병원엔 아까 ‘...’로 첫 등장을 했고 잠시 뒤 그를 두들겨 팬 박원식이 전화를 걸어와 검은 장갑을 찾지 말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장갑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자기를 찾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꽃다발을 보내온다. 덕호는 꽃집을 찾아내 그 꽃을 사간 사람이 박미라라는 여자라는 걸 알아낸다. 하지만 이틀 동안 땡땡이를 치느라 잡지에 낼 화보를 찍는 걸 잊었다. 연실은 더 이상 모델을 안 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부터 덕호는 어디서 만났는지 은주를 찍고 있다. 은주에게 자기가 맡은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당연. 덕호가 서장석을 찾으러 대구로 내려간 동안 황인성을 죽인 운전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바텐더인 박원식과 아는 사이다. 경찰은 박원식을 체포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엉뚱하게도 그의 알리바이를 대주는 사람은 덕호이다. 이유는 그냥 안 나오고. 물론 둘이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장면도 안 나온다.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진상의 일부를 공개한다. 알고 봤다니 주 사장의 오른팔인 박 상무와 박원식은 형제이고 둘은 모두 주 사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이름이 혜린이라는 송 마담은 박 상무의 연인이기도 하지만 검은 장갑의 여자이기도 하고 그들과 한패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 주 사장의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이 뒤부터는 그나마 말이 되기 시작한다. 주 사장은 고등계 형사였던 때에 은인이었던 친구를 배반했다. 그의 세 남매는 서장석이 키웠는데 그게 박 상무, 박원식, 은주다. 물론 은주는 박미라이기도 하다. 덕호에게 설득된 은주는 경찰 편이 된다. 박 상무는 주 사장의 재산을 정리한 뒤 그를 살해하고 자살한다. 박원식은 주 사장의 아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이다 갑자기 안 나오는데, 마지막 대사가 ‘앗’인 걸 보면 떨어져 죽거나 뭐 그랬나 보다. 송 마담도 자살했나 보다. 인물 관계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앞에 벌여놓은 이상한 난장판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몇십 년 전 한국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에겐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태평스럽게 늘어놓았고 나 역시 여기엔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각본은 그렇게 이해되는 수준의 무책임함을 넘어선다. 분명 여기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상자료원으로 각본이 넘어가는 동안 잘려나간 장면이 있거나, 없어진 지문에 설명이 있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 시시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진짜 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읽은 각본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밴쿠버국제영화제에서 `젊은 영화를 위한 용호상`을 수상한 데 이어 로테르담을 비롯한 국제 영화제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있는 장건재 감독의 < 회오리바람 >을 2010년 또 하나의 독립영화계의 `사건`이라고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 하다. 더 나아가 최근 제대로 된 청춘영화가 없다는 영화계 항간의 볼멘 소리도 이 영화의 출연을 통해 당분간 잦아들 것이라 장담한다. < 회오리바람 >은 말 그대로, 멜랑꼴리를 끌어안고 있는 청춘영화다. `이 사랑 모두가 안 된다고만 한다`라는 영화 포스터 헤드 카피가 정확히 적시하듯 10대 청춘들의 그 열병과도 같은 사랑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얼핏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고등학교에서 제작되는 단편 영화들이 숱하게 스케치 하는 그저 그런 10대들의 무모한 사랑 이야기들의 반복일 수도 있겠고, 관객의 오감을 관통할 정도의 색다르고 새로운 소재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전형적인 이야기는 감독의 절제된 영화 언어를 통해 충분함 이상의 사실감을 성취하고 있다. 힘을 뺄 때와 힘을 줄 때를 감독은 정확히 알고 있고, 이 효율적인 에너지 배분은 상투적 소재가 어떻게 훌륭하게 영화적으로 요리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의 오프닝 컷은 신인 감독의 재능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뛰어난 청춘영화로 한국 영화사에 기록되리라는 것을 마치 선언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배치된 뛰어난 씬이다. < 회오리바람 >은 내러티브의 순서를 살짝 비틀어놓은 회상구조를 취하고 있다. 고등학생인 김태훈과 박미정이 부모 몰래 바다 여행을 떠난 지 3개월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들 여행의 기록은 중간중간 회상을 통해 현실 속에 틈입한다. 이들의 밀월 여행이 발각되어 부모들은 패닉 상태에 빠지면서 김태훈의 시간은 뒤틀리기 시작한다. 여자 친구 박미정은 더 이상 만나주지 않고, 방학 동안 중국집 아르바이트를 하다 교통 사고를 내고, 보충 수업을 빼먹다가 선생한테 들켜 두들겨 맞는 찌질함의 연속. 이 청춘의 찌질함은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고백처럼 읽혀지는데, 정교하게 계산된 컷과 편집의 리듬을 통해 녹록치 않은 여운을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다. 가령, 박미정이 이별을 통보하는 순간에 무릎을 꿇는다든지, 박미정을 위해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두 털어 선물을 산다든지 하는 십대의 어리숙한 열정의 클리셰조차 미학적 절제를 통해 전혀 상투적이지 않게 보일 뿐만 아니라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고백에 대한 스스로의 연민까지도 독해하게끔 만드는 힘이 그것이다. 물론 영화에 배치된 여러 에피소드들이 사랑의 열병에 데인 십대 남자의 고난과 역경을 드러내기 위해 수동적으로 배치된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또한, 토니 레인즈가 과찬한 그 두 개의 오토바이 질주씬과 사막을 홀로 거니는 판타지씬으로 과연 회오리바람같이 외상에 반응하는 청춘의 그 들끓는 내면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도마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자 친구한테 채이고, 부모한테 인정도 받지 못하고, 학교 울타리를 넘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소심한 10대 남학생의 그 찌질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감독의 우직한 시선은 근래 보기 드문 영화적 뚝심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뚝심은 영화의 공기를 섬세하게 장악한 뛰어난 씬들로 화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건재 라는 새로운 감독의 출현을 증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상사병에 걸린 자는 우울한 자다. 상사병에 걸린 자는 그가 소유했던 대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우울한 것이 아니라 외려 우울하기 때문에 그 상실된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고, 자기 안으로 손짓을 하여 불러들이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아감벤의 `식인증적 주체`에 다름 아니다. 상사병에 걸린 자들은 잃어버린 자들이 아니라 잃어버렸다 착각하는 대상들을 자기 내면의 땅에 파종을 해놓고 물을 주며, 자장가처럼 홀로 노래를 불러주는 자들이다. 한국 청춘영화들이 너무 멜랑꼴리적이라는 비판도 더러 있지만, 되려 멜랑꼴리아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회오리바람’ 같은 영화들은 대상의 상실에 따른 퇴행적 반응이라기보다, 오히려 상실된 대상을 살아있게 만드는 몽환적인 능력에 대한 성찰을 품고 있다. 사랑의 열병이라는 성장통을 견뎌낸 소년 김태훈은 아마 다시 꿈을 꾸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