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발을 밟다
- 감독
- 박선
- 제작년도
- 2012
< 여자가 더 좋아 >는 1965년 6월에 개봉하여 약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해 국산영화 흥행 2위에 올랐던 코미디 영화다. 그러나 대중이 이와 같이 호응했음에도 이 영화에 대한 당시 저널리즘과 평단의 반응은 혹독했다. 이 영화에는 “C급 저속 넌센스 소극”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고, 1) 청소년 범죄를 부추기는 영화로 지목되었으며, 2) 주제가는 「동백아가씨」가 왜색조로 금지될 때 저속하다는 이유로 함께 금지되었다. 3)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바로 오늘만을 살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어리석은 장사치의 대표적 유형”이자 심지어 ‘영화반역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이때 이 영화의 대척점에 놓인 영화들은 < 자유만세 >(1946), < 성벽을 뚫고 >(1948), < 순교자 >(1964) 등인데,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지닌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좋은 영화’로 일컬어졌다. 그러니 <여자가 더 좋아>는 그 반대의 ‘나쁜 영화’인 셈이었다.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을 논하면서 희극과 예술일반을 비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일반적으로 예술은 비극이고, 희극은 비극보다 열등한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어왔다.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며 근대 계몽에 대한 욕구와 당위가 비등한 데다 이분법적 인식이 공고했던 한국에서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했다. 검열에서 코미디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는 증언은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경직된 규율의 눈으로 바라볼 때 코미디는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는 것, 그야말로 난센스(nonsense)였던 것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것에도 위계가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고 우발성과 과장으로 이루어져 웃음을 유발한다고 해도 마지막에 계몽이나 위로로 귀결될 때에는 희극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 웃음이 계몽에 닿으면 풍자가 되고, 위로에 닿으면 유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미래지향적이고 건전하며 명랑한 웃음으로 웃음 중에서는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엎치락뒤치락’ 소동으로 끝날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상태로 끝난다고 보일 때 그것이 유발한 웃음은 “최저속선까지 철저하게 타락시킨 웃음” 5) 으로 질타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희극에 못 미치는 ‘저속한 C급 소극’으로 평가되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를 시종일관 끌고 가는 것은 코미디언 서영춘 의 페르소나다. 1960년대 초 라디오 방송에서 만담으로 유행어를 연달아 만들어내며 인기몰이를 시작한 서영춘은 1965년에 영화 세편에 출연한다. < 청춘사업 >(4월 개봉), <여자가 더 좋아>(6월 개봉), < 출세해서 남 주나 >(11월 개봉)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제목에서 할리우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유행을 견인한다. 이 영화 이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1년에 <뜨거운 것이 좋아>가 한국에서 개봉하여 크게 흥행하고 1962년 마릴린 먼로의 돌연한 죽음으로 롱런을 하면서 <뜨거운 것이 좋아>의 번안영화가 제작되었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 남자는 안 팔려 >(1963)가 그것인데 눈에 띄게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2년 후에 <여자가 더 좋아>가 나와 크게 흥행하여 ‘여장 남자 코미디’의 유행을 촉발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서영춘이 분한 주인공 규철은 여자직업기술학교에 출강하는 음악 강사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체모도 적은 데다 바느질과 요리를 즐기고 말도 얌전하게 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특징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여성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술학교 학생 영숙( 최지희 )과 엄연히 연인 사이다. 그는 결혼하기 위해 영숙의 부모님을 만나는데, 의학적으로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이유로 파혼을 당한다. 영숙은 박문기( 남궁원 )라는 밴드마스터와 곧바로 결혼하고 이에 상처받은 규철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여장을 하고 규화라는 이름의 식모로 영숙의 시집에 들어간다. 영숙의 시아버지( 김희갑 )는 성정이 ‘괴벽스러워’ 식모를 붙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영감인데 규화의 ‘서비스’에 만족하여 규화와 잘 지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영숙은 규화(규철)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규화는 영숙의 남편 박문기와 악단주 선우광( 양훈 )까지 매혹한다. 규화(규철)가 불행한 영숙을 보며 자신의 복수에 대해 회의할 때쯤 선우광의 구애로 정체를 들킨다. 선우광이 규화(규철)에게 수작을 걸 때 현장을 덮친 선우광의 부인 때문에 그는 슈미즈 바람에 가발이 벗겨진 채 마침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영숙과 문기, 영숙의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까지 모두 보는 가운데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에서는 이 상태로 영화가 끝난다. 그런데 시나리오 상으로는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결국 여성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 여장 남자로서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전개는 서영춘의 규정을 거부하는 ‘난센스 페르소나’를 통해 이분법을 끊임없이 교란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서영춘의 외양과 태도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분방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행동거지와 거기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남녀로 분리된 젠더박스에 진동을 일으키고 균열을 낸다. 이는 1960년대 말 구봉서가 출연했던 ‘남자 시리즈’(< 남자 식모 >, < 남자 미용사 >, < 남자와 기생 >)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확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 는 깔끔하고 자상한 남자로서 여자 흉내를 잘 낼 뿐이지 결국 남자다. 여자로 변장했을 때의 모습과 남자로서 연인과 있을 때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는 데서 젠더 이분법이 잘 드러난다. 그가 여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발언권이 세진 여성들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성들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들은 가부장적인 젠더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안착한다. 이와 달리 <여자가 더 좋아>에서 서영춘이 표상하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독자적 섹슈얼리티다. 이에 대해 박선영은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6) 그런데 따져보면 규철은 영숙과 혼인신고만 안 했지 부부와 다름없이 지냈던 것으로 나온다. 그는 불량배를 만났을 때 그들을 물리적으로 물리칠 완력은 없지만 기지와 헌신으로 여성들로부터 떼어놓는다.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밖으로 나돌지 않고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기에 영숙은 그를 믿고 좋아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남성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음에도 그의 취향이나 태도가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라 하여 그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너는 남자니? 여자니?’ 라는 질문 속에서 경계의 지점은 용납될 수 없기에 그는 자신 그대로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성전환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지막에 제리(잭 레먼)가 가발을 벗으며 “나는 남자야. I’m a man”라고 고백하지만, 필딩이 “완벽한 사람은 없지. Nobody is perfect”라고 받는 것과 갈라지는 지점으로, 당시 한국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난센스의 한계를 보여준다. 당대에 웃음으로 봉합될 만한 수위 차원에서 결말을 생각해보면 규철이 성전환을 해야 영숙이 오해를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규철에게 매혹되었던 모든 인물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규철의 성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안전과 그에 따른 관객의 안심을 위한 사회적 거세에 해당한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더스틴 호프만이 여장 남자로 분한 영화 <투시 Tootsie>(1982)가 흥행하면서 7) ‘남자 시리즈’의 심우섭 감독 연출로 리메이크된다. 8) 이 영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는 유사한데 결말은 오히려 더 계몽적인 양상을 띤다. 주인공 유경진(강태기)이 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젊은 부부들에게 건전한 생활을 유도하다 표창장까지 받고 여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1960년대보다 1980년대가 민주적으로 진보했다고 여겨지나 서영춘이 보여준 난센스와 같은 경계적 특이점이 설 자리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서영춘은 <웃으면 복이 와요>(1969~1985)가 프로야구 붐으로 돌연 폐지 9) 된 이듬해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10) 그는 한동안 잊혔다가 21세기에 대중문화 장르와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비로소 ‘저질’에서 벗어나 ‘독보적인 코미디언’으로 재평가된다. <여자가 더 좋아>가 ‘말할 가치도 없는 난센스 소극’에서 벗어나, 난센스라는 요동으로 경직된 시스템에 파문을 일으키며 젠더 이분법을 일찍이 뒤흔든 영화로 재발견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 여자가 더 좋아 고화질 VOD 보러가기 << 1)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소극붐 수준급 이하의 넌센스들」, 《조선일보》, 1965.11.11.; 「영화 황량한 질 안고 과잉생산」, 《동아일보》, 1965.12.27. 2) 「자극적인 영화제목과 소년범죄」, 《조선일보》, 1965.8.24. 3) 「왜색조를 추방」, 《조선일보》, 1965.9.7.; 「방송음악 日色調 일소키로」 , 《동아일보》, 1965.9.11. 4) 웃음의 유형에 대해서는 박유희, 「총론: 웃음의 서사와 한국 대중문화」,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4.코미디』, 이론과실천, 2013, 22-23면. 5)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6) 박선영, 『코미디 전성시대』, 소명출판, 2018, 529면. 7) 「추석 극장가 외화가 압도」, 《동아일보》, 1983.9.20. 8) 「방화에도 남성 치맛바람 강태기 여장하고 김환진과 주연」, 《경향신문》, 1983.6.15. 9) 「프로 감축 항의 MBC 코미디언들 파업」, 《조선일보》, 1985.4.25. 10) 「코미디언 서영춘씨 별세」, 《매일경제》, 1986.11.1.
정기적으로 필름을 교환하며 영화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상영하는 영화상설관이 서울에 등장한 것은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 1910년이다. 초기 상설관은 대부분 황금정과 남대문통을 잇는 소위 ‘진고개’의 일본인 상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산골 딸깍발이’가 아니면 출입을 꺼릴 정도로 비가 오면 유난히 흙이 질었다는 진고개는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미쓰이(三井) 상점, 히라다(平田) 상점, 미쓰코시(三越) 오복점 등 후에 백화점이 되는 진고개의 대형 잡화상점들은 양복, 포목, 과자, 기계류 등 없는 것 없이 다 갖춘 듯 했다. 흔히 남촌이라고 불렸던 이 거리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의 소비 욕망도 강하게 자극했다. 그래서 진고개에서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가는 조선부인들”은 “여기 물건만 몇 가지 사준다면 몇 번이든지 개가해 갈 것”이라고 빈정거림을 샀다. “일본말이 서투르니 물어보기도 힘들고 공연히 코 밑에 가져다 향내만 맡느라고 쭝긋쭝긋” 1 하는 양복 입은 조선신사가 우스워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종로로 대변되는 북촌 일대는 남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황량하고 어둠침침해 보였다. 그러나 진고개에서 호기롭게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살 배짱이 없는 조선인들에게는 종로가 실질적인 유흥 공간이었다. 1916년부터 해마다 4월부터 10월까지 종로에서는 전등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시끌벅적한 야시(夜市)가 열렸다. 대략 오후 7시부터 12시 사이에 열리는 야시는 ‘싸구려, 싸구려’라고 외치는 소리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는 소리가 한데 뒤엉켜 소란스러웠다. 상인들은 무조건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쳐대거나 물건들을 흔들어대면서 손님을 끌었다. 사주쟁이, 관상가, 작명가도 모여들고, 약장수와 장기꾼도 모여들었다. 고무신, 머릿기름, 참빗부터 지팡이나 구두, 만화경, 석유램프나 호롱 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다양한 상품이 길거리 좌판 위나 천막 아래 전시되었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종로 야시에 구경 오는 사람들은 “살 것이 있거나 없거나 밤이면 이 거리를 한 번 거닐기 때문에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서로 헤치고” 다녔다. 2 남촌이든 북촌이든 서울의 극장은 도시의 여가와 유흥, 소비의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남촌이 일본인 거리, 북촌이 조선인 거리로 이원화되어 있던 만큼 극장 공간의 경험은 식민지의 경험과 중첩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상설관에서는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가며 함께 해설하기도 했지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등 조선인을 상대로 한 상설관들이 생겨나면서는 변사의 해설 언어와 관객의 종족적 구성, 그리고 흥행 프로그램이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영화상설관 시대에 ‘활동사진 구경 가기’는 문화의 경험인 동시에 ‘종족성(ethnicity)’의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먼지 많고 시끄러운 종로 야시의 구경꾼들이 조선인 변사의 해설로 영화를 관람하며 도시의 피로를 위무 받는 북촌 상설관의 관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극장은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오락장이다. 1925년 여름, 서울의 밤거리에 나선 어느 기자는 종로 야시를 지나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극장을 취재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학생과 신사, 기생 등 각계각층의 관객들이 “하룻밤 놀이터”를 향락하는 “여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 3 그런 극장이 소위 ‘일반 민중’에게 완전히 문턱을 낮춘 것은 1926년에 관람료를 ‘최하 10전’까지 인하하면서이다. 그해 여름 극장가는 불경기에 시달린 끝에 파격적인 관람료 인하를 감행했다. 신문에는 관람료가 대인(大人) 30전, 소인(小人) 20전이라고 광고하면서도, 실제로는 극장 앞 호객이나 가두선전으로 ‘10전 관객 몰이’를 하는 식이었다. 극장들은 관람료 인하뿐 아니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프로그램을 교체하면서 주말과 휴일에는 상영 횟수를 늘리는 전략으로 관객을 더 확보하려 애썼다. 상설관끼리 제 살을 깎아먹는 무모한 경쟁이라는 우려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시적인 이벤트가 ‘10전 관객’을 상설관의 새로운 관객층으로 흡수하면서 관객의 폭을 넓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조사한 1926년 한 해 동안 경기도 영화상설관의 관객 수 통계를 살펴보면, 관람료가 인하되었던 8월부터 10월 사이에 관객이 몰리면서 상반기에 비해 관객이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4 위의 글에서 최승일은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가 ‘10전 관객’을 얻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영화 제작비를 생각하면 10전이라는 관람료는 터무니없이 저렴하지만, 도시의 하층계급 노동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에서 영화가 ‘대중오락의 패왕’이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26년 가을,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로서 조선영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자체의 예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 6.10 만세 등 민족적 감정이 분기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그리고 ‘10전 관객’의 흡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아리랑>은 이 ‘10전 관객’을 민족 혹은 ‘조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함으로써 조선영화의 영역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10전 관객 몰이’는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아리랑>이 거둔 성공과 그에 대한 입소문은 수년간 <아리랑>이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관객을 끌게 했다. “일반 대중은 <아리랑>으로 하여 활동사진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5 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1) 双S生, 「대경성광무곡」 『별건곤』 1929년 1월호, 82~3쪽. 2) 유광열, 「종로 네거리」 『별건곤』 1929년 10월호, 68쪽. 3)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4)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8쪽. 5) 안동수, 「영화수감(映畫隨感)」 『영화연극』 1939년 11월호, 45쪽. 상단 그림. 조선일보 기자의 서울의 밤 순례기 (사진은 극장의 관람석) 출처: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서울의 밤은 오다. 때는 일곱 시 반! 종로 큰 거리에 군데군데 벌려 있는 각 극장, 활동사진관 등의 손[客] 끄는 유창한 주악(奏樂) 중에 서울의 밤은 어두워간다. 피리, 나팔, 북, 장구 등의 소리와 북악, 인왕의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종일 뜨거운 햇살에 시들고 시든 억만 장안 사람을 다시 삶의 무대로 불러들여 온갖 연극을 짓게 한다. 돈 있는 탕자는 기생을 다려 홍등녹주(紅燈綠酒)에 무르녹고 돈 없는 건달은 막걸리 한잔에 거리를 헤매며 야시(夜市)의 복판 공원의 벤치에도 사람의 물결이 이루기 비롯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흥겨운 주악을 따라 쏘는 듯한 등불 빛을 몸에 실으며 이곳저곳의 극장 문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역시 수백수천을 이루어 그들의 자취가 끊일 여덟 시경부터는 문 닫힌 극장 안에서 오직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때때로 문틈을 새어 길거리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것이 오직 서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유일의 향락장이다. 아래위층 객석에는 수백수천의 각 계급 각 방면의 젊은 남녀가 희미한 전등 빛에 싸여 죽은 듯 고요히 앉아 있으나 그들의 날카로운 눈은 어둠에서 활약을 하고 까닭 없는 머리는 고요한 속에 음분(淫奔)을 짓는다. 무대와 스크린을 바라보고 좋아하고 웃는 학생이 있으면, 부인석의 아양피는 기생들을 건너다보고 어리석은 기쁨을 짓는 점잖다는 신사도 있다. 이리 하는 동안에 시간은 자꾸 간다. 아홉 시, 열 시! 지루한 중에 십분 휴식이 돌아온다. 기생 건너다보는 신사들은 일분일초라도 휴식을 더 늘이려 한다. 그러나 힘없는 어린이, 학생들은 휴식을 오히려 지루하다 소리친다. 이리하여 극장의 밤이 깊어가고 서울의 밤이 깊어간다. 최후의 일각. 닫혔던 극장 문이 후다닥 열리면서 봇물이 터지듯 사람의 물결이 밀려나온다. 그들의 머리에는 주마등 같이 지금 본 양극(洋劇)이 번듯번듯 거린다. 철없는 아이는 흉내를 내며 시시덕거리고 뜻깊은 젊은이는 머리를 기울여 묵상에 잠기면 탕자와 춘녀는 손에 손을 쥐어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耶)” [필자 주: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던고.”, <운영전>의 한 구절] 를 부른다. 이리하여 여유있는 사람들 하룻밤 놀이터의 문이 닫힌다 2.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4~9쪽. (부분 발췌) -키네마-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대체상으로 소설은 지식적, 사색적이고, 영화는 시선 그것만으로도 능히 머리로 생각하는 사색 이상의 작용의 능력을 가진 까닭이다. 또한 경제상으로도 하룻밤에 3, 40전만 내던지면 몇 개의 소설–연출–직접 사건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이며, 또한 소위 바쁜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을 가지고서 사건의 전적(全的) 동작을 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우리의 힘으로(돈은 말고) 되는 영화가 있어온 지 햇수로는 삼 년도 못 되는데 벌써 기십종(幾十種)은 넘었으리라. 스튜디오도 없이 만들어내는 영화가 벌써 10개를 넘은 지 오래다. 날 흐린 날은 박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해나 번쩍 나면 5전짜리 레프가 번쩍거린다. 5전짜리 레프가 사람의 몸뚱어리에 가로 벗기일 때 “자- 훌륭한 예술이오”, “박읍시다” 하는 소리가 산모퉁이 집 속, 길가에서 일어난다. 이리하여 돈 천 원이나 잡아먹은 조선의 영화가 단성사, 조선극장에서 봉절(封切)이 된다. 사람은 물밀듯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연극이 없는 불쌍한 이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연극을 구경하는 셈으로 몰려들어 고개를 치켜들고 앉아 있다. 백의(白衣)가 영화면(映畵面)에서 펄펄 날린다. 이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도 회포 깊은 정경이냐? 민틋한, 아주 기운을 잃은 듯한 산모퉁이가 나오면서 여기저기, 어린 솔이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그 배경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2, 3의 고대 소설을 각색해낸 것 외에는 <장한몽>, <농중조>를 봤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감독이라는 이가 옷 한 벌을 못 얻어 입어 여름옷을 가을철에 입고 있으면서, 배우들은 점심 한 끼 똑똑히 못 얻어먹어서 눈이 퀑 들어가는 것을 당하면서 박아낸 것이다. 참으로 생각하면 필름에서 주림에 울던–피–눈물–탄식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그나마 자기들의 마음대로 똑똑한 것 하나 박아보지 못하고, 그 알뜰한 돈 천 원이나 내놓는 대자본가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남이 다 구워먹고 남은 찌꺼기를 건져다가 또다시 구워내어, <장한몽>, <농중조>나 얻어 보는 꼴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또 보는 이들의 형편은 어떻고? 조선의 팬들의 주머니가 넉넉하기는 꿈에도 없을 일이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론 채니 [필자 주: Lon Chaney.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23)>,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25)> 등에 출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씨의 일주일 봉급만(1만5천원) 가지면, 적어도 우리 땅에서 그것 가지고 영화 다섯은 만들 만한, 이런 하늘과 땅의 차이, 어찌하여 요 모양일까? 그러나 여기에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이 있으니, 그것은 <아리랑>, <아리랑>이 그것이다. 공연히 학교에 다니다가 미쳤다는 주인공은 지금의 현실 속에 부대끼는 우리는 그가 왜 미쳤는가를 다시금 중언부설(重言復說)도 하기 싫다. 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과 가판 장인 듯한 바깥 기둥에는 ‘청년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긴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려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치아인 박선생.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귀향한 대학생이 양복에다 고깔을 쓰고 농민들과 같이 “풍년이 왔다네. 풍년이 왔다네~”를 부르고 춤추는 씬.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우러난 영화다. 청년회의 깃발이 날리면서 회원들의 행렬이 보인다. 얼마나 그리운 이 장면이냐? 화려하고 정묘한 장면이 없는 대신에, 침울하고 비통한 오뇌(懊惱)의 못 견딤이 이 장면에 나타난다. 기교로 말해도 영화의 역사를 수십 년이나 가진 일본 영화의 그것보다 못지않다. 나는 일본의 소위 신(新)영화라는 것을 남 못지않게 보았지만, 이른바 일본이면 일본의 참된 냄새나는 영화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다만 광선이 없고 세트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 2년 동안의 조선의 영화계에서 이런 수확이 있는 것을 못내 기뻐한다.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려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 개의 거상(巨像)이다. 어쨌든 더욱 조선에서 모든 것을 빨리 실어다가 우리들에게 보여줄 것은 다만 영화밖에는 없다. 오전짜리 레프야? 길이 활동하기를 바란다. 조선의 문화도 차차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 나 할 것 없이 영화, 영화 한다. 한 개다, 한 개. <아리랑> 한 개다. 또 이후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느냐, 조선의 영화계여? 현대의 문명은 아무리 해도 라디오·스포츠·키네마이다. 언제나 이들의 문명(文明)도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려는고? (끝)
2004년 | 튜브픽쳐스 감독, 각본: 김수현 | 각색: 김소정 김봉훈 | 제작: 황우현 황재우 | 촬영: 김철주 | 미술: 박혜성 | 음악: 이병훈 CAST 순이: 예지원 | 963: 김석훈 | 뭐시기: 정재영 | 개코: 박선우 | 장수로: 장선우 | 막내: 박희순 사연은 이렇습니다. 박수무당인 장수로(장선우)는 자신을 찾아온 여인네들에게 씨를 퍼트렸고,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이 탄생합니다. 퀵서비스맨 963(김석훈), 레카차 드라이버 개코(박선우), 그리고 조폭인 뭐시기(정재영). 여기에 순이(예지원)이 가세하며 가족을 이룹니다. 순이는 길에서 뻥튀기를 팔다가 우연히 개코를 만나 가족이 되었고, 장수로는 젊은 순이에게 연정을 품죠. 이처럼 < 귀여워 >는 어느 콩가루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실외와 실내 모두 이뤄졌습니다. 실외는 2002년 11월, 실내는 2003년 1월이었는데요, 영화 개봉이 2004년 11월이었던 걸 감안하면 꽤 간격이 큽니다. 원래는 2003년 5월 개봉이었는데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죠. 공개된 장면은 뭐시기가 아버지 장수로를 찾아온 신입니다. 동네 평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데요, 딱 봐도 건달기가 줄줄 흐릅니다. 역할을 위해 실제 건달과 합숙하면서 연기를 준비했는데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조폭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뭐시기를 바라보는 장수로 역의 장선우입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파와 콩나물 봉지를 들고 있죠. 사실 <귀여워>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은 장선우 감독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 < 꽃잎 >(1996) < 나쁜 영화 >(1997) 연출부 출신인데요, 자신의 데뷔작에서 스승을 배우로 모셔온 셈이죠. 원래는 한진희 씨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지연되면서 무산되었고, 이때 튜브픽쳐스의 황우현 대표가 ‘장선우 캐스팅’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의외로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역할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엔 난처해하던 장선우 감독은 농담처럼 “한번 망해보자”며 승락했다고 합니다. 뭐시기가 앉아 있는 평상 근처의 풍경입니다. 황학동 철거촌 주변 아파트죠.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철거는 서울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황학동 아파트는 60년대 후반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부의 상징이었는데 10년도 못 가 철거가 거론됐어요. 서울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인데요, 끊임없이 변화가 이뤄지지만 실상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요. 세우고 부수기만 반복할 뿐이죠.” <귀여워>는 지금은 사라진 폐허의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서울에 대한 기록의 측면에서도 가치를 지닙니다. <나쁜 영화> 연출부를 끝내고 일란성 세쌍둥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던 김수현 감독은, 장수로와 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이야기가 쉽게 풀렸고 그 결과물은 <귀여워>가 됐습니다. 963의 퀵서비스나 개코의 레카차 운전사는 모두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직업이라고 하는데요, 생계를 위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야생적 느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시기 예지원은 < 생활의 발견 >( 홍상수 , 2002) 이후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니게 된 배우였죠. 그녀에게 ‘순이’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안성맞춤 캐릭터였습니다.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촬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 실내 장면은 양수리 세트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03년 1월에 개봉된 세트 촬영 현장입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둘째 개코가 발톱을 깎으면서 맞이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왠지 낯익다고 느껴지신다면… 맞습니다. ‘하얀 겨울’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남성 듀오 ‘미스터 투’의 멤버 박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의 동국대학교 영화과 후배인데요, 파격 캐스팅을 통해 이 영화로 데뷔해 신인답지 않는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박선우는 영화음악을 맡기는 줄 알고 연락을 받자마자 김수현 감독에게 달려왔다고 하는데요, 기다리는 건 ‘개코’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이날 963은 오토바이에 순이를 태우고 질주하다가 함께 집에 들어오는데요, 순이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는 장수로는, 아들에게 순이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아들의 뒷통수를 갈깁니다. 약간은 비뚤어지고 냉소적이면서 내성적인 963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연기하기 가장 까다로운 역할일 텐데요, 김석훈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역할을 해냈습니다. 집안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가 매우 특이합니다. 철거촌에 있는 집인데. 집 안도 철거되어 있는 셈이죠. 좁은 세트 안에서 앵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 예지원의 매니저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용수 였습니다. <귀여워> 시나리오를 읽고 “혹시 예지원이라는 배우를 잘 알고 쓴 시나리오냐?”고 물을 정도로 적역이었다고 하네요. 배우 역시 순이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준비 과정부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고 현장에서 감독에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배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정재영은 < 킬러들의 수다 >( 장진 , 2001) < 피도 눈물도 없이 >( 류승완 , 2002)로 조금씩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며 거친 마초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뭐시기”라는 말을 붙이는 뭐시기는 철거반을 이끄는 건달인데요, 정재영은 거의 완벽하게 역할을 해냅니다. 장수로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도 섬세한 작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장선우의 연기에 대해 현장 스태프들은 “연기와 연기 아닌 것의 경계에 서 있는 묘한 느낌의 연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김수현 감독은 매우 꼼꼼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감독은 <귀여워>가 결국은 “네 남자가 순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영화”라며, 남자들의 그 귀여운 모습이 <귀여워>라는 제목의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감독은 < 창피해 >(2011) < 우리 손자 베스트 >(2017) 등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남자들은 무엇인가 계속 이뤄내려고 하죠. 세상이든 자신이든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정작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반면에 순이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사람인 것 같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요. 그녀는 변화를 주도하지 않고, 상대에 반응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죠. 남자들이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해서 세상이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자연에 동조하며,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는 모델이 순이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