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데이 보이
- 감독
- 박세종
- 제작년도
- 2004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메뇨? 박세종 의 < 버스데이 보이(Birthday Boy) >는 2004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당시 단편 경쟁 작품을 보면서 익숙한 캐릭터와 배경 때문에 드디어 한국에도 제대로 된 작가가 나왔구나, 이렇게 잘 짜인 작품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카탈로그에서 작품정보를 찾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작품은 호주 국립영상학교 것이었다. 나는 분명 주요 상을 받을 거로 생각했다. 그만큼 애니메이션의 동작과 구성이 탄탄하고 뛰어났으며 영화적 장치와 주제가 돋보였다. 작품은 2004년 안시(Annecy)의 신인상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34개의 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단편부분 후보작으로도 올랐다. 그때 박세종 감독과 나는 안시에 같이 있었다. 그러나 만난 건 박 감독이 아닌 그의 호주인 아내와 어린아들 그리고 시누이였다. 그때 나는 스위스에 갔다 오려고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안의 여자가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는 이리저리 장난을 치며 엄마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의 작품에 대해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 버스데이 보이 >는 1951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션에서 실제 전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기찻길이 있는 어느 마을, 사람들이라곤 보이지 않는 폐허를 보여준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 마을은 고적하지만 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앉은 잠자리가 쇠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날아가고 카메라의 시선이 지상으로 내려오면 집을 뚫고 추락한 전투기의 잔해 안에서 “흑곰아, 내 쉴 곳은 어디냐”는 노랫소리와 볼트와 너트를 주워 모으는 어린 주인공이 보인다. 이렇게 첫 시퀀스(sequence)를 통해 영화의 배경과 스토리 세계, 주인공 소개와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첫 시퀀스를 통해 전쟁을 통해 파괴된 가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시퀀스에서 주인공 만욱은 전투기 부품인 볼트를 철로 위에 올려놓는다. 이윽고 기적소리와 함께 기차가 빠르게 지나고 지켜보던 만욱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만욱이 만들려던 장난감 탱크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탱크가 기차에는 실려 있다. 만욱의 눈빛은 환하게 빛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기차의 굉음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해 정적 속의 마을에서 혼자 상상의 전쟁놀이를 하는 주인공, 그의 상상은 아빠와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다. 폐허의 마을에서 혼자 전쟁놀이를 하는 어린 소년 만욱의 가슴 리본에는 한자로 ‘祝生日’이라 쓰여 있다. 오늘이 만욱의 생일인가 보다. 만욱이 돌아온 집 마루에는 군사우편으로 온 소포가 놓여있다. 만욱은 그것이 아버지가 보내온 자신의 생일 선물이라 여긴다. 소포는 아버지의 유품인 지갑, 군번줄과 군화다. 소포의 의미를 모르는 만욱은 자신의 발보다 큰 군화를 신고 군번줄을 목에 걸고 군인 흉내를 낸다. 햇살이 들이치는 방안에는 만욱이 볼트로 만든 탱크와 무기들이 즐비하다. 새로 만들어온 볼트로 탱크를 만들다 잠든 아이, 그리고 벽에는 가족사진이 보이고 암전되며 아들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은 아버지의 유품을 생일 선물로 생각하는 어린 소년은 전쟁놀이하다 잠든다. 전쟁영화에서는 전쟁의 가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어린 소년 소녀들이 종종 캐스팅된다. 그만큼 흔한 주제여서 전쟁을 다루기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뻔한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전쟁의 의미를 잘 몰라야 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영화의 전략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서 주제를 증폭시키는 방법에 주목했다. < 버스데이 보이 >의 스토리는 위에 보여주었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만욱이 전쟁의 폭력, 즉 자신에게 다가온 폭력의 실체를 모른 채 아이러니하게 전쟁 기계들을 끊임없이 복제한다는 것이다. 첫 시퀀스에 집을 관통하여 추락한 전투기는 가정을 파괴한 전쟁의 상징이다. 그리고 친구와 어울려야 할 만욱은 전투기의 부품으로 혼자 전쟁놀이를 한다. 세상을 모르는 순수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전쟁의 폭력과 상처는 미래 세대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은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만욱의 상황만을 보여줄 뿐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다. 애니메이션이 이렇게만 끝났다면 어딘가 싱겁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디테일을 담고 있다. 바로 햇살에 대한 표현이다. 영화의 전반에 충만하게 차 있는 것이 햇살이다.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영화 속에는 너무도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어린 ‘만욱’이 혼자 전쟁놀이하는 폐허의 골목길은 물론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선물로 오해하는 장면에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든 방안에도 햇살은 애니메이션이 주는 무거움에도 역설적으로 밝게 빛나고 있다. 감독은 생일 선물의 아이러니를 통해 전쟁의 폭력을 배치하고 햇살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주제를 무한 증폭시킨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은 햇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작품의 무거운 주제와 상반되게 표현된 햇살에 관객은 따스한 마음을 얻는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조차 모르는 천진난만한 만욱과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생일선물로 착각하는 만욱의 고통은 햇살에 의해 무한 증폭된다. 제목은 아버지의 죽음과 중첩하여 축복받지 못하는 탄생이라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엔딩은 전쟁놀이에 지쳐 잠든 만욱의 모습에서 페이드 아웃되지만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 하나로,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이라는 상징을 완성한다. 어쨌든 돌아올 사람이 있어서 그의 생일은 축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가슴에 ‘祝生日’이라는 리본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건 사족으로 보인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대한민국은 60년 전 시작된 전쟁이 끝나려 하고 있다. 그때 시작된 전쟁으로 현재까지도 850만 명의 이산가족이 아픔을 겪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나는 살리라」(1949)를 변용하여 결론을 대신한다. 일촉즉발의 공포 가득한 오늘 / 난 민중을 향해, 삶을 향해 떠난다, / 총잡이들이 옆구리에 미국문화를 / 끼고 어슬렁거리는 오늘, / 나 여기 굳은 결의 되새긴다. / 중동에서 살육을 자행하는 손들 /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교수대 / 한국을 지배하는 치욕 / 나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리라 / 나 여기에 머물리라. / 또다시 나를 기다릴, 별처럼 빛나는 / 손으로 나의 문을 두드릴 / 말과 민중, 그리고 길과 더불어.
피폐한 삶을 어떻게 보여줄까?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흔적을 어떻게 보여줄까? 예를 들어 우리 몸의 상처를 얘기할 때는 보여주면서 이건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거고, 이마의 상처는 친구들과 싸우다 난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남은 상처를 어떻게 보여줄까. 그래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영상이거나 글로 묘사하는 문학이거나 우리는 그런 예술가를 천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라이언 라킨 어떤 예술장르이거나 그런 천재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천재들의 삶이 그렇듯 예술적 비범함만큼이나 삶을 과감하게 탕진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애니메이션계에서는 라이언 라킨(Ryan Larkin)이 그런 천재 중 한 명이다. 보통 그의 천재성을 말할 때 10살부터 유화를 그리고 13살에 미대((Montreal School of Fine Arts)에 입학한 사실을 거론한다. 또한 19살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음에도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이 꿈꾸는 캐나다국립영상위원회(NFB)에서 거장 노먼 맥라렌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자신만의 독창적인 제작기법과 표현 방식을 개발하여 주목받았다. 그는 영감에 의해 작업을 해왔던 애니메이터로 첫 작품부터 재능을 단번에 드러냈다. 마지막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메타모포시즈metamorphosis 기법(나비가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화여 가듯 한 사물이 조금씩 변하여 전혀 다른 사물로 형상화하는 기법)을 최대한 활용한 걸작이었다. 그럼에도 라이언 라킨은 바라던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했다. 오늘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 라이언 >은 라이언 라킨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이를 제작한 크리스 랜드레스는 2004년 라이언 라킨의 삶을 그린 14분짜리 < 라이언 >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과연 누가 표현의 천재일까? 라이언 라킨(좌) 캐릭터와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우) 캐릭터 <라이언>은 첫 장면부터 사람이 약물과 마음으로 입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그려내며 관객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감독인 크리스 랜드레스가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로 직접 출연, 인터뷰어의 역할을 하고, 라이언 라킨 역시 인터뷰이로 출연하여 자신이 캐릭터에 직접 목소리를 입혔다. 애니메이션은 공중화장실의 어둠 속에서 물 내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크리스 랜드레스가 첫 장면부터 등장, 거울 앞에서 과거의 상처를 애기하며 분열된 내면과 작가로서의 불안을 자조하듯 중얼거린다. 인터뷰는 노숙자 급식소 같은 곳에서 진행된다. 라이언의 인터뷰지만 그와 관련 사람들이 소환된다. 첫 번째로 한 때 애인이었던 펠리시티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컬러의 선으로 표현되어 라이언이 그녀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라이언이 인생에서 항상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주목받던 작품 < 걷기Walking >과 < 거리음악Street Musique >이 소개되는데, 그의 애니메이션은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 보여주는 필름이다. 라이언은 거울 앞에 서기를 좋아했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몸과 살이 움직일 때 어떤 상태인지 관찰하며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회화만이 아닌 음악과 결합된 움직임을 창조하고 싶어 했다. 이어서 그가 잘 나가던 시절 프로듀서인 데렉 램이 소환된다. 그는 라이언이 자신감을 잃고 분노만 남은 사람으로, 코카인의 힘으로 뭔가 대단한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그를 파괴했다고 증언한다. 이후 인터뷰어인 감독은 라이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상실감이 가장 파괴적인 것이라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라이언에게 술과 담배를 끊고 재기했으면 좋겠다고 권한다. 급식소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흡사 라이언이 지나온 모습 같다. 라이언의 모습을 보며 감독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알코올중독을 떠올리고, 마지막은 라이언의 거리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라이언 뒤의 배경(상점 유리)에는 잘 나가던 시절의 라이언이 비춰지며 암전된다. <걷기>(1968) <라이언>에는 라이언 라킨이 그린 독특한 작품도 맛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유튜브 에 올라 있으니 전편을 보면 좋겠다. 특히 1968년 작 <Walking>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걸음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마치 로토스코핑(rotoscoping)을 사용한 듯 실감나는 인체 묘사와 다양한 포즈, 액션이 인상적이다. 수채화로 채색한 그림과 선의 움직임은 음악의 비트에 맞춰 라이언 라킨의 독특한 타이밍 감각을 보여준다.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한 육신으로 연신 술을 들이키며 예술적 영감으로 넘쳐났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노쇠한 남자, 라이언 라킨.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제시하며 당시의 애니메이터들을 놀라게 했지만, 거리의 노숙자로 살아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감독은 라이언 라킨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걸 드러낸다. 부서지기 쉬운 사람,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은 연결된다. 그들에게 세상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뭔가 유동적이고 왜곡되어 있다. 예술가로서의 동질감을 크리스 랜드레스의 애니메이션은 보여준다. 이 작품은 3D 그래픽만이 표현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 렌드레스는 <라이언>이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 정확하게 답했다. 3D그래픽은 감독 자신의 캐릭터는 물론 라이언의 절망감과 생애, 특히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의 특징과 상처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라이언>의 캐릭터 디자인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보통 파편화된 삶이라는 표현을 쓸 때, 파편화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여기저기 벗겨진 피부와 앙상한 뼈대 사이로 텅 빈 내부가 고스란히 보인다. 감독은 라이언 라킨을 뒤틀린 신체의 일부만으로 표현한다. 파격적이고 기괴한 캐릭터를 통해 라이언의 분열되고 상처 입은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관객은 이러한 시각적 표현과 기이한 이미지를 접하며 강렬한 충격에서 영화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한다. 또한 끝나고 나서도 파격의 이미지가 던져주는 시각적, 기술적 새로움을 넘어 두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동질감에 감동받는다.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우연히 라이언과 어울리게 된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는 부랑아 정도로 여겼던 라이언에게서 비범한 예술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채고, 4년여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라이언 라킨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기록했다.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그의 삶은 여러 가지로 상징적이었어요. 그의 삶은 예술가라면 가져야 할 열정과 나이를 먹으며 어떻게 삶을 마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모두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예술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서 살고 있었지요. 최악의 상황에 처한 한 남자의 삶은 어떠할까? 저는 이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비극이지만 유머나 인간미 역시 담고 있습니다.”감독의 말처럼 <라이언>은 그저 불행했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좌절한 애니메이터 라이언 라킨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감독 자신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예술가, 라이언 라킨과 크리스 랜드레스의 공허감은 채워질 수 없는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으로 보인다. 드로잉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던 라이언 라킨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 움직임을 만들었던 전통적인 애니메이터였다. 그런 그가 노숙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피폐한 라이언의 모습과 그것을 재현하는 크리스의 3D 표현력은 마치 컴퓨터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전통적인 애니메이터의 현재를 보여주는 동시에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도 삶의 현실을 담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보들레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매우 일상적이고 처연한 실생활과 순간적이고 소멸되는 성격의 현대 도시의 삶 속에서 독특한 것과 개인적인 것을 통해 새로운 미(美)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미를 보여준다. <라이언>은 2004년부터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아카데미 등의 굵직한 시상식에서 앞서 소개한 박세종의 <축생일> 과 경쟁하며 주목을 받았다.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트라우마까지 형상화한 독특한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은 시각적 충격과 탄탄한 서사로 강력한 매력을 뽐낸다. 후일담이지만 <라이언> 성공 이후 라이언 라킨은 여성 감독 로리 고든과 함께 2008년 < 한 푼 줍쇼Spare Change >라는 7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재기했다.
박세종 감독의 < 버스데이 보이 Birthday Boy >는 2004년 프랑스 안시의 영화제에서 처음 보았다. 영화를 보고나서 너무나 익숙한 배경과 스토리 때문에 감독을 알아본 것이 아닌, 너무나 잘 짜인 작품이었기에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당시의 카탈로그에서 작품정보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영화는 대한민국 국적인 아닌, 호주의 작품으로 출품되었다. 그는 이름으로는 분명 한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국적은 호주로 되어 있어, 대충 짐작으로 교포거나 2세쯤으로 생각했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분명히 이 작품은 대상은 아니어도 주요 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동작과 영화적 장치,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구성이 탄탄하고 뛰어났다. 그때 그와 나는 프랑스 안시에 같이 있었다. 사실 박 감독보다는 그의 아내(호주인)와 아이, 그리고 그의 시누이를 먼저 만났다. 안시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스위스에 잠깐 갔다 오려고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안의 여자가 동양의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린 아이는 이리저리 장난을 치며 엄마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의 작품에 대해 매우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수상을 기대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페스티벌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1953년의 한국전쟁 말기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전투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부산의 기찻길이 있는 어느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폐허에 가까운 마을이 소개된다. 첫 장면은 한옥의 지붕 위에 앉은 잠자리를 보여주며 지상으로 내려앉으면 집을 뚫고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에서 볼트와 너트를 주워 모으는 어린 소년 ‘만욱’을 보여준다. 이 첫 장면을 통해 영화의 배경과 하고자하는 스토리의 세계를 요약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주인공 ‘만욱’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 주제를 암시한다. 전쟁의 폐허와 어린 소년의 배치는 기존의 많은 영화에서 전쟁의 가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많이 활용하는 구도이다. 그 만큼 흔한 주제인데, 이런 주제를 다루기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조그만 잘못 다루면 너무 흔해빠진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전쟁의 의미를 잘 몰라야하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아이러니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영화의 전략이다.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주제를 어떻게 드러내고 어떻게 증폭시키는가이다. < 버스데이 보이 >의 스토리는 아주 간단하다. 아들 ‘만욱’이 군대 간 아빠를 기다리며 전쟁놀이에 심취하다 아버지의 전사를 모른 채, 군사우편으로 온 아버지의 유품인 군번줄과 군화를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낸 생일 선물로 받아들이고 천민난만하게 즐긴다. 전쟁의 아픔, 즉 자신에게 다가온 아픔을 모른 채 아이러니하게 전쟁기계들을 끊임없이 복제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영화가 그냥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어딘가 싱겁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디테일을 담고 있다. 바로 햇살에 대한 표현이다. 영화의 전반에 충만하게 가득 차 있는 것이 햇살이다.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영화 속에는 너무도 밝은 햇살의 눈부시게 쏟아져 내린다. ‘만욱’이 혼자 전쟁놀이 하는 폐허의 골목길은 물론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선물로 오해하는 장면에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든 방안에도 햇살은 영화의 주제가 주는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밝게 빛나고 있다. 박세종 감독은 햇살이라는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주제를 무한 증폭시킨 것인데, 그래서 이 영화는 햇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작품 속 무거운 주제와 상반되게 표현된 햇살에 우리는 매우 감동하게 된다. 따라서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조차 모르는 천진난만한 소년과 아버지의 유품을 자신의 생일선물로 착각하는 소년의 슬픔을 햇살에 의해 무한 증폭시키고 있다. 박 감독과 서울에서 처음 만나는데, 그때 그의 아내를 만났었다고 하니 마구 웃어대며 알고 있노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가족과 스위스 국경을 넘다 호텔방에 두고 나온 여권 때문에 국경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 망신스런 상황을 나중에 그의 아내는 그에게 소상히 얘기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