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 감독
- 노진수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정경호, 박인수, 지서윤, 유지현, 조명연, 박주환, 권태진, 송현진, 도균, 정선아, 홍정옥, 김소영, 노을, 맹윤희
영화사가 이영일은 스릴러-액션 영화가 1963년에서 67년까지 5년간, 한국 영화제작의 “주조가 되다시피 했다”고 썼다. 하지만 당대에 누린 상당한 인기나 산업적 파급력에 비한다면 이 장르에 대한 후대의 관심은 그다지 큰 편이 못된다. 이만희 나 정창화 같은, 이 장르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이 연출한 몇몇 영화가 작가주의적인 맥락에서 조명되거나 합작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로 거론되는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 이후 작가로서 재조명된 정창화 감독의 작품들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여전히 한국영화사에 대한 작가주의적인 접근이 지배적인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해당 시기 스릴러-액션 영화의 대표작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랫동안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시선을 견지해왔던 한국영화 비평담론에 의해 그저 그런 상업영화로 치부되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대표적인 영화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재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범구 감독은 매우 불운한 경우다. 1964년 당시 이만희 , 김수용 과 함께 “현역 젊은 감독의 대표선수 격”으로 꼽혔던(경향신문, 1964년 7월 13일) 강범구 감독은, 그러나 문예영화 붐을 이끌면서 영화작가로 입지를 굳혀간 이만희, 김수용과는 달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남았다. 문예영화 감독이 되지 않거나 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스릴러-액션 영화 장르에서 아주 잘 팔리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탓이었다. < 검은 꽃잎이 질 때 >(1962) < 안개 낀 거리 >(1963) < 창살 없는 감옥 >(1963) < 유랑극장 >(1963) 등이 대만과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되었고 그는 곧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66년 그가 한국-대만 합작영화 < 탈출명령 >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작들이 대만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강범구 감독의 네 작품은 1963년과 64년 사이에 대만과 동남아시장을 묶어 작품당 만 달러에 수출되었다. 같은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 성춘향 >이 5천 달러를 받고 일본시장에 판매되었음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성공적인 해외시장 진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만으로 보내진 것이 영화의 원판이었다는 데 있었다. 강범구 감독에 따르면 대만은 원판과 프린트를 가리지 않고 작품 편수에 따라 관세를 매겼기 때문에 대만 쪽에서는 원판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 동남아 시장을 포괄할 여러 벌의 프린트를 한국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것보다는 원판을 가져가 대만에서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1964년 작 < 동굴 속의 애욕 >과 < 소만국경 > 두 편뿐이다.(물론 1960년대 말 이후의 영화들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 장르영화의 전성기이자 감독 강범구 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영화 가운데는 이 두 편만이 남아 있다.) 사라져버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당대의 평가가 높지 않았던 이 영화들을 통해서도 감독의 솜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동굴 속의 애욕 >은 권순영 판사가 춘천지방법원에 있을 당시 재판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이른바 ‘법정 수기’가 원안이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악명 높은 판결문을 남긴, 이른바 ‘박인수 사건’의 담당 판사가 바로 권순영이었다. 그는 박인수 사건 재판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그 해에 「법창(法窓)의 봄」(정문사, 1955)이라는 수필집을 내놓았다. 그 책에는 그가 판결을 맡았던 사건들의 내막이 때로는 소설 형식으로, 또 때로는 수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원안 <동굴 속의 애욕>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의 땅이 되었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반도의 많은 지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지배했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산(山)사람’, 이른바 빨치산이 되어야 했다. 적군에게 협력한 전력이 드러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을 산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 살인사건의 세 주인공인 유동록과 안태선, 그리고 이옥녀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공산치하의 마을에서 리(里) 세포위원장으로 권세를 누리던 동록은 태선의 아내 옥녀를 겁탈한다. 세 사람의 치정에 얽힌 관계는 9.28수복 이후 북으로 진격해오던 국방군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동록의 동생 동관과 그의 애인이자 여맹위원장인 정숙, 그리고 세 사람은 국방군을 피해 대성산 산마골의 동굴로 숨어들고, 그곳에서 그들의 ‘짐승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옥녀의 마음은 점차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편 대신 억세고 강인한 동록에게 기울어간다. 사건의 폭발은 태선이 마을로 내려가 자수하겠다고 하면서 시작된다. 옥녀는 인민군에 나간 전력을 가진 남편이 자수한 뒤에 겪게 될 불안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공포를 잠재워줄 억센 팔을 가진 동록을 택한다. 그녀는 태선의 자수 의사를 은근슬쩍 정숙에게 흘리고 정숙은 이를 곧바로 동록에게 고발한다. 인민재판을 통해 동록은 태선을 반동으로 낙인찍고 낫으로 그를 살해한다.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에 ‘짐승과도 같은 빨치산의 생태’ 류의 제목을 달고 실렸을 법한 이야기, 또는 얼핏 1950년대의 < 피아골 >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강범구 감독의 영화에 와서 법정드라마의 외피를 입으며 전혀 다른 질감을 확보했다. < 검사와 여선생 >에서 < 어느 여대생의 고백 >에 이르는 한국 법정드라마들은 그 장르 특유의 심문(審問)의 형식을 기구한 운명을 감당한 여인네들의 고백의 장치로 흔히 활용하곤 했다. 죄지은 여성의 억울한 사연에 대한 공감이 차가운 법의 논리를 압도하면서 흥건한 눈물이 법정을 채우는 것이 한국 법정드라마의 관습이었다. < 동굴 속의 애욕 >은 그런 면에서 예외적인데, 이는 비정한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능숙하게 다뤄온 강범구 감독의 영화적 수완이 발휘된 결과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순간의 정황이 동록의 자백으로 먼저 재현되고, 이후부터 검사의 논고와 피고의 자백,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간부(姦夫)와 내통하여 남편을 죽였다는 이 치정 살인사건은 조금씩 그 내막을 드러낸다. 법정드라마의 장치들은 이야기의 정보들을 적절히 안배하고 그로부터 서스펜스와 스릴을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여러 명의 화자(話者)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은, 그 사건에 연루된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며 정부(情婦)의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동록조차도 절대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로 그려지도록 한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옥녀의 증언 거부가 이야기 정보를 지연시키는,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적인 장치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재판이 벌어지는 현장의 관객 역시 정서적 공감을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는데, 특히 신문기사로 사건을 접하고 호기심을 느껴 법정을 찾아가는 젊은 부부를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설정이다. 전계현과 방수일이 맡은 이 부부는,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은 짧지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사건을 소개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도록 한다. 전계현은 옥녀의 마지막 진술을 듣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은 저 여자를 미워할지 모르지만 전 동정해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사건에 대한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후 남한사회가 품어야 했을 수많은 이적행위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물론 현실 속에서는 관철되지 못했지만) 그려지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3선 개헌에서 유신체제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정세 속에서 한국사회는 점점 더 경직되고 억압적으로 되어갔다. 이와 비례하여 한국영화에서 ‘반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범될 수 없는 영역으로 공고해졌다. 인민군의 묘사를 문제 삼아 감독 이만희 를 구속까지 했던 < 7인의 여포로 > 사태 이후에, 많은 영화감독, 비평가들이 반공의 이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자의 재현에 유연성을 보여줄 것을 검열 당국에 호소하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범죄에 한국전쟁의 경험이나 간첩의 소재를 활용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철저한 반공영화로 변모하면서 점차 대중의 공감을 잃어갔다. 강범구 감독의 < 동굴 속의 애욕 >은 그 이전, 그러니까 한국의 장르 영화들이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의 통념에 도전할 수도 있었던, 그럼으로써 장르 영화의 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의 수작(秀作) 가운데 한 편이다.
오늘날 이민 (李敏)을 모르는 사람도 미국문화가 우리나라에 밀물처럼 밀려 들러와 미제라면 사죽을 못쓰던 시대, 그러나 분단 전쟁의 흔적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에 만든 영화 < 자유부인 >(''56 한형모 감독)의 대학생 신춘호를 기억할 것이다. 약간은 덜렁대지만 뛰어난 춤솜씨를 미끼로 이웃의 대학교수 부인에게 춤을 가르치다가 자신의 입술이 상대의 볼에 닿자 '마담 익스큐즈 미'하며 사과할 줄도 아는 그런 배우이다. 비록 역할은 조연이지만 주연 몫까지 챙기는 인기로 1950년대 한국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사나이. 김진규 , 최무룡 시대가 오기 전 스크린을 사로잡은 배우가 이민이다. 이민 은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50년대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명판결을 낸 박인수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떠오른 은막의 귀공자였다.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으로 젊은 청년과 가까워진다는 내용이 폭발력을 지니면서 사람들을 극장에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 요인의 중심에 신춘호라는 인물을 성공적으로 소화한 이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역할에 특히 여성 팬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교적인 도덕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반적인 인물 패턴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폐쇄된 생활로 욕구 불만에 차 있던 여성들에게 그가 연기한 행동적인 청년상은 오히려 신선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때 심어준 서구적 성향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는 이에 앞서 히트한 < 춘향전 >의 이도령이나 그 뒤의 어떤 작품보다도 강렬했다. 그윽한 눈빛과 세련된 매너로 한 시기를 누볐던 이민 은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 서울대학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다닐 때 길에서 우연히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발탁된 것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었다. 1949년 강춘 (康椿) 감독의 <연화(蓮花)>( 민혜련 주연)가 바로 그 첫번째 영화계 신고작이다. <연화>에 이어 출연한 것이 같은 강춘 감독의 < 화랑도 >(1950. 염매리 공연)였다. 16밀리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그는 북한을 탈출하여 반공 전선에 앞장 서는 애국청년으로 등장하여 시선을 끌었다. 촬영중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활발하게 기획된 < 성벽을 뚫고 >, < 나라를 위하여 >(이상 1949)와 같은 반공물로 이 장르는 뒷날 정책적인 뒷받침 아래 성행하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는 서울로 환도했으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대구 등지에 남아 군관계 영화 일을 보고 있었다. 그해 초겨울 대구에 남아 있던 이민 이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 나갔을 때였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입구 쪽 한 구석에 앉아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때야 이민은 < 임자없는 나룻배 >의 유명한 감독 이규환 임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를 시켜 차 한 잔을 보냈다. 주문한 일도 없는 커피에 의아스런 표정을 갖는 그에게 아가씨는 다방 안쪽을 가리켰다. 이민은 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 일을 맡지 못해 어려웠던 이 감독은 그때서야 긴장을 풀고 반갑게 맞았다. 며칠 후 이 감독이 다시 다방에 들렀을 때 이민 은 곱살하게 생긴 한 젊은이를 인사시켰다. 얼마 뒤 이 감독이 조감독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감독이 되는 발판을 마련케 한 최훈 (崔薰)이었다. 그들은 선배 감독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가운데 이규환 감독이 < 춘향전 >의 메가폰을 잡게 되었다. 1954년 이른 봄,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서울로 올라간 이규환은 제작자를 잡게 되자 이민을 주인공인 이몽룡 역으로 확정하고 상대역인 춘향에 조미령 을 기용하였다. 이민은 이 영화의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을 적극적으로 도았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방소로는 안성마춤이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문제였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광산이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이 쉽게 풀리느라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동기동창생이 이 달성 광산의 소장으로 있어 전기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광산에서 촬영장까지 전주를 세우는 토목공사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촬영에 들어간 지 2주일 만에 장마를 만나 50여 명의 스태프들이 발이 묶이고 진행비가 바닥나는 어려움 속에서 10개월 만에 완성한 < 춘향전 >(1955)은 개봉되자 첫날부터 만원이었다. 상영시간 2기간 15분, 필름길이 1만 2천자, 이 분량은 그때까지 나온 한국영화 중 가장 긴 것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 2백여 만 명, 20일 상영에 10만 명의 관객 동원은 국도극장 개관 이래 최다 관객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이었다. 방자와 향단 역을 맡은 전택이 , 노경희 커플의 해학적인 연기에 밑받침된 이민 의 이몽룡 역은 이 영화를 장안의 화제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열광적인 팬들은 앳된 소녀에서부터 40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잇달아 그는 통속 사극 < 망나니 비사 >(1955. 김성민 감독)의 교리(郊理 : 조선조 때 홍문관의 정오품 벼슬)로 출연했다. 고을의 진사 딸( 이경희 )을 좋아하지만 부친의 반대에 부딪치자 그 진사를 역적으로 몰아 야심을 채우려는 직권 남용과 도망간 진사 딸의 억울한 죽음을 그린 것이다. 이민 이 처음 맡은 악역인 셈이었다. 같은 해 < 불사조의 언덕 >( 전창근 감독)에서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한 후 장렬한 최후를 맞은 용감한 군인 역을 맡아 < 화랑도 >에 이어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연이라고는 하지만 후반부 망나니 전택이 와 진사 딸 이경희 의 비련(망나니 비사)에 눌려 크게 빛을 모지 못한데다 공보처의 계몽물이라는 성격 때문에 대중 동원에 한계(불사조의 언덕)가 았어 소강 상태을 면치 못했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가 열린 것은 앞에서 언급한 < 자유부인 >(1956. 한형모 감독)이었다. ''익스큐즈 미'' ''아일 러브 유'' 따위의 영어와 외제 상품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의식을 풍자한 '최고급품입니다'라는 유행어를 낳은 이 영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예리하게 짚어낼 뿐 아니라 이민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 한편으로 1956년을 장식한 이민 은 작심한 듯 양적인 실적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57년 < 청실홍실 >( 정일택 감독), < 여성전선 >( 김기영 감독), < 찔레꽃 >( 신경균 감독), < 실낙원의 별 >( 홍성기 감독) 등 5편에서 58년엔 < 흐르는 별 >( 김묵 감독), < 별아 내가슴에 >( 홍성기 감독), < 그 밤이 다시 오면 >( 노필 감독), < 유혹의 강 >( 유두연 감독) 등 10편으로, 그리고 59년도에는 < 꿈이여 다시 한번 >( 백호빈 감독), < 비오는 날의 오후3시 >( 박종호 감독), < 애모 >( 신경균 감독), < 동백꽃 >( 정일택 감독) 등 무려 13편으로까지 솟아올랐다. 여기서 그의 주요 출연작을 살펴보면 한 가지 뚜렷한 현상이 나타났다. 55년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을 계기로 사극을 청산한 대신 완전히 멜로드라마의 주역으로 변신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라디오 연속극을 최초로 영화화하여 히트한 조남사 원작 < 청실홍실 >(1957)에서는 한창 뜨기 시작한 엄앵란 의 상대역인 운전기사 나씨 역으로 나와 발랄한 사장 딸의 구애을 받으면서도 전쟁 미망인( 주증녀 )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나이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김묵 감독의 데뷔작< 흐르는 별 >(1958)의 경우는 북에서 월남하다가 헤어진 아내( 문정숙 )을 찾아나선 사나이가 어렵게 상봉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장님이 된 이후였다는 비극을, < 별아 내 가슴에 >(1958)와 < 그 밤이 다시 오면 >(1958)은 독립운동가의 아내 손에서 자라나 양가의 규수( 김지미 )와 결혼하게 되는 청년과 부모없이 자란 고아 남매의 애환을 각기 보여 주었다. 최은희 와 공연한 < 꿈이여 디시 한번 >(1959)은 전선에서 눈에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된 병사가 간호장교의 헌신적인 치료 아래 완치되었을 때는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는 이야기며, <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는 약혼자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재출발하려던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약혼자가 나타나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민 은 두 영화에서 부상당한 병사 역과 김지미의 재출발 상대인 미국인 2세로 등장한다. 13편에 이르는 다작 출연이 말해 주듯이 이민은 이 시기에 영화계 진출 이후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어느새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미 < 주검의 상자 >(1955. 김기영 감독)로 주목을 끈 최무룡 과 < 피아골 >(1955. 이강천 감독)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 의 도전으로 그의 확고한 듯 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났다. 60년 한해 동안 < 추억은 영원히 >( 전택이 감독), < 애수에 젖은 토요일 >( 최훈 감독) 등 4편으로 감량되는 현상이 이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단 한 편의 출연조차 없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역시 당시 우리 영화가 즐겨 다루던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윤락가로 전략한 여자( 김지미 )가 6.25 때 헤어진 애인과 만나게 되자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으로, 애인을 잃는 군인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기는 분단의 역사를 표현했지만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장식했다. 이후 이민 은 62년 한해 동안 < 슬픔은 나에게만 >( 안현철 감독)을 비롯하여 < 여자의 일생 >( 신경균 감독) 등 4편에 출연하는 재기의 의욕을 보였으나 1963년 < 상처받은 두 여인 >( 이규환 감독)에 이어 배역을 맡은 김수길 감독의 < 백마고지 >를 끝으로 14년 동안 여러편의 작품을 남기고 영화계를 떠났다, 그후 대중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전성기의 화려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철저한 자기 관리의 의지를 보여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영화제작에 손댔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1998년엔 78세의 나이로 일본아시아문예협외의 지원 아래 제작, 각본, 주연으로 컴백을 시도했으나 뚯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필> 본 명 : 이시중 출 생 : 1921. 2. 27 / 강원도 춘천 데 뷔 : 1949년 강춘 감독 <연화> 주요작품 : < 춘향전 > 외 3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