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
- 감독
- 이선경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김진규, 주증녀, 전계현, 구봉서, 최지희, 황해, 이예춘, 김희갑, 박춘, 백금녀, 로날드 F.스월스, 에드워드 T. 코와즈, 서애자, 최삼, 장혁, 이창식, 박종화, 성소민, 이업동, 조석근, 최준, 최성
대중가요와 영화, 쌍끌이 부흥기의 음악영화 한형모 감독의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1966)는 제목과 감독, 제작연도만으로도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세 가지가 주목할 만한 중요 키워드인 셈이다. 첫 키워드는 워커힐이다. 1963년에 개장한 호텔인 워커힐은, 주한미군을 비롯한 외국인을 위한 호텔로 만들어진 시설로 1973년에 선경(현 SK)이 인수하기 전까지 국제관광공사 소유였다. 미8군 사령관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의 이름을 딴 것이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선호텔·반도호텔 등과 달리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 광나루 언덕에 지어진 것, 1968년 카지노장까지 개장한 것 등도 워커힐이 지닌 이런 성격 때문이다. 당연히 워커힐에는 극장식당이 갖추어져 있고 주한미군 등 외국인의 취향을 고려한 쇼로 채워졌다. 워커힐의 쇼는 당시로는 세련된 고급의 쇼인 동시에 다소 높은 수위의 노출도 가능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에서 한국의 관객이라면 ‘호텔’이 아니라 ‘쇼 공연장’에서 만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작품의 제목에서 워커힐 쇼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많은 쇼 장면을 보여주는데, 비단 워커힐 쇼만이 아니라 다양한 호텔 쇼와 방송국 쇼 프로그램까지 망라한다. 노출된 여자무용수의 허리의 꿈틀거리는 동작을 클로즈업한 오프닝 화면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에 비하자면 쇼의 관능성 수준은 시원찮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이 정도가 ‘19금’ 등급이었다. 둘째 키워드는 한형모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 작품과 이듬해의 < 엘레지의 여왕 >으로 끝이 난다. 1950년대 후반 < 자유부인 >과 < 청춘쌍곡선 > 등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세련된 촬영과 편집으로 전후 상업영화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했던 한형모 감독으로서는, 두 편의 음악영화로 마지막 피치를 올린 셈이다. 그는 줄곧 음악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꾸준한 시도를 해온 사람이었고, 음악영화가 요구되는 때에 그가 불려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유부인>에서 가수 백설희의 노래와 댄스홀의 라틴댄스 쇼 장면을 화려하게 보여준 그는, <청춘쌍곡선>(1958), < 나 혼자만이 >(1958)에서는 좀 더 음악과 춤의 비중을 높이거나 뮤지컬적인 장면을 시도했다. 그러니 아무리 1960년대 후반이라 해도 노래와 춤을 영화에 버무려 넣는 기법에서 그는 확실히 많은 노하우를 지닌 독보적인 감독임에 틀림이 없었다. 셋째 키워드는 1966년이라는 시기이다. 영화사에서 1960년대가 보기 드문 전성기였음은 두루 아는 사실인데, 대중가요사에서도 역시 전성기였다. 한 해가 다르게 양적으로 팽창해가는 한국영화계는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온갖 장르를 시도하게 됐고 음악영화 역시 그중 하나였다. 대중가요사로 보자면, 1960년대 초에 한 번도 선두 장르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트로트의 기세가 꺾이고 ‘양풍’ 가요인 스탠더드팝이 가요계의 선두를 차지한 후, 196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이미자 열풍과 작곡가 이봉조 시대의 개막, 록그룹 키보이스 등장 등 다양한 경향이 함께 솟아오르는 시기가 이때였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남진, 문주란, 배호, 정훈희 등 폭발적이라 할 만큼 여러 신인 가수가 두각을 나타내는데, 1966년은 그 직전의 상승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가요를 활용한 음악영화의 출현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대중가요를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까지 만족시키며 즐기고 싶은 관객들의 요구란 늘 있다. TV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당시에, 대형 컬러 화면으로 다양한 종류의 쇼를 구경한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부터 < 청춘대학 >( 김응천 , 1966), < 엘레지의 여왕 >(1967), < 폭풍의 사나이 >( 박종호 , 1968), < 이 강산 낙화유수 >( 조길현 , 1969) 등 음악영화가 쏟아져나왔고 이 흐름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인기 가수의 노래 장면을 틈틈이 배치한 국책영화 < 팔도강산 >( 배석인 , 1967), 영화로 만든 한국대중가요사라 할 만한 < 가요반세기 >( 김광수 , 1968) 등도 이런 흐름 속에 놓여있다. 그러니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는 무엇보다도 틈틈이 화려한 대중가요 쇼를 보여주는 것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시골 사람의 어리바리 서울 구경,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의 극적인 만남 같은 극영화의 기본 얼개는 매우 상투적이며 부실하다. 심지어 한형모 감독이 무려 10년 전에 시도한 <청춘쌍곡선>의 뮤지컬적 장면조차 이 영화에는 없다. 대사를 대신하는 노래는 전무하며 모든 노래는 가수들의 쇼 장면으로만 소화되고 있다. 사건은 그저 쇼 장면을 연결해주는 느슨한 끈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 대중가요 쇼의 배치는 공들여 다채롭게 배치된 티가 역력하다. 트로트부터 스탠더드팝, 경음악까지 두루 능란하게 다루는 작곡가 박춘석이 음악을 맡았으니 음악의 질도 나쁘지 않다. 당시 최고의 사회자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여러 장면에서 쇼의 진행자로 등장하고,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자니부라더스의 <방앗간집 둘째 딸> 등 박춘석의 작품뿐 아니라, 1960년대 초중반을 휘어잡은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그 외 이금희와 위키리 등의 외국 곡도 두루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익살스러운 복장의 윤항기가 <울리불리>를 부르는 키보이스 연주 장면까지 넣어 당시 아주 젊고 새로운 록 음악까지 선사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악과 쇼를 보여주기 위해, 위해 ‘부르스’ 추는 호텔 나이트클럽과 공연의 중심인 시민회관 쇼, 회전무대를 갖춘 화려한 워커힐 쇼, KBS TV의 쇼 스튜디오, 젊은이들이 소울풀한 몸짓으로 춤추는 명동의 뮤직홀까지, 어리바리한 두 시골 사람이 돌아다니도록 만들었다. 주인공인 신인가수 남보라(남정임 분)가 부르는 주제가 격인 노래는,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의 중간쯤 되는 <파란 이별의 글씨>(전우 작사, 박춘석 작곡, 성태미 노래로 영화에서는 립싱크로 처리되었다)를 배치해 안정감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켰다. 거의 모든 쇼 장면에는 무용이 들어있어, 당시 쇼의 무대미술과 연출, 백댄스의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충분히 의미를 발한다.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부민관은 1935년 12월 지금의 서울 중구 태평로 1가에 세워진 다목적 회관으로 각종 연극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 장소이다. 부민관은 경성전기회사의 기부금으로 경성부에서 지었다. 1932년 전기사업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를 획득하고 있던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대해 경성부민들을 중심으로 부영 계획을 세우는 등 움직임을 보이자,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100만원의 기부금을 경성부에 내놓는다. 거액의 기부금을 받은 경성부는 부민의 복리향상을 위해 이 기부금의 절반을 다목적 회관인 부민관을 짓는데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자료] “불원 착공할 부민관 정면도”(《매일신보》, 1934.06.27) 경성부는 일본기독교청년회관 부지 1,083평과 이왕직 소유의 덕안궁 터 873평을 매수하여, 부미관의 터를 마련하였다. 매수비용으로 이왕직에 4만원을 지급, 일본기독교청년회관에 대해서는 장곡천정 사회관 건너편 테니스장 561평을 대체부지로 제공하고 별도로 4만 2천원의 매수비용과 2만 3천원의 건물 이전 보상비를 지출하기로 한다. 부지 매수비용이 늘어나면서 예산은 60만원으로 증가했다.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지진제는 1934년 8월 15일 개최되었다. 1935년 7월 13일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0일 준공했다. 건축청부는 이키(三本) 합자회사, 냉•난방과 환기는 스기요시(杉由)제작소, 전기 시설은 가토(加藤)상회, 무대조명 시설은 가와베(川部)제작소가 맡았다. 부민관은 부지 1,780평, 건평 1,678평, 철근 콘크리트의 근대식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상자형태의 건물에 7층 높이의 높은 시계탑이 결합된 형태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대강당, 중강당, 소강당, 담화실, 집회실, 부속실 등을 갖추었으며 이중 대강당은 3층 높이에 건평 301평 좌석 1,800석 규모였으며, 400석 규모의 좌석에 147평의 면적의 중강당과 40평에 좌석 160석의 소강당도 있었다. 경성부는 완공을 앞두고 부민관 사용 조례를 만들었다. 입장료는 무료입장, 유료입장, 영리목적으로 구분되어 차등적으로 정했다. 예컨대 1,800석의 대강당의 경우 주야간을 통틀어 사용할 시에는 하루에 60원(무료입장), 120원(유료입장), 300원(영리목적)의 사용료를 받았으며 난방이 필요한 시기에는 30원씩 사용료를 더 책정하였다. 1935년 12월 10일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개관식에는 조선총독이 참석하였고, 3일간 경성 5권번이 총출동하는 연예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부민관에서는 1936년 음력 설을 맞아 무용의 조택원, 만담의 신불출, 영화의 나운규가 출연하는 조선중앙일보 주최 “조선 3귀재 경연회”와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자료] 부민관에서 개최된 <3귀재 경연회> 신문광고(《조선중앙일보》, 1936.01.24) 거액의 운영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책정한 비싼 대관료로 인해 대관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개관초부터 발생했고, 그 타개책으로 토키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와 발성기를 설치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업자들이 부민관을 대관하여 영화상영과 연극공연 등을 진행하자, 부민관이 흥행장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비판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1939년 9월에는 본정서 관내의 명치좌, 낭화관, 중앙관, 약초극장, 희락관 등 5곳의 상설관이 부민관에서 흥행물 공연을 하지 말아달라는 진정을 당국에 제출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흥행업자들의 반발에도 부민관의 흥행은 계속되었다. 1941년 4월 언론에 발표된 1940년 부민관 사용건수를 보면 영화, 음악, 연극과 같은 흥행이 342건, 결혼식 200회, 간담회 162건, 총회 132건, 이하 강연, 강습회, 전람회 순이었다. 부민관이 흥행장화 되는 것에 대한 다양한 방면의 염려는 있었지만 전기료 등 고액의 고정비용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흥행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부민관의 호화로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단체와 인물들이 많았기에 다양한 형태의 무대공연들이 끊임없이 부민관에서 개최될 수 있었으며 텐카츠(天勝)와 같은 일본의 유명 흥행단체들도 경성 공연 시 부민관을 흥행장소로 활용하였다. 최승희, 배구자 등의 무용공연과 계정식, 이인범 등의 서양음악과 아악이나 여류명창대회와 같은 전통예술 공연, 극예술연구회나 조선연극협회, 중앙무대 등의 신극공연과 “째즈와 무용의 밤”이나 “대중연예의 밤”과 같은 이름의 김해송, 이난영, 박향림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개관 초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이었다. 이중 1937년 5월 김영길과 미우라 타마키가 공연한 오페라 <나비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공연으로 기록된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부민관을 시국강연장으로 활용하였는데, 방공방첩을 중심으로 한 사상전을 전개하기 위해 1939년 8월에는 연극인, 영화인, 가수 들을 총동원하는 방공음악영화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필름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연극이나 악극과 같은 무대극이 큰 인기를 끌었다. 박노홍은 부민관 무대에 가장 많이 공연한 단체는 조선악극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 라미라가극단, 반도가극단 등과 극단으로는 극예술연구회, 극단 고협, 극단 아랑, 현대극장 등도 이곳에서 다수 공연을 거듭했다고 전한다. 부민관 공연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개최한 국민극경연대회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극단들이 참여하여 3차례에 걸쳐 개최된 국민극경연대회의 1차, 2차 대회가 부민관에서 열렸다.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개최된 1회 대회에서는 현대극장, 극단 아랑, 극단 고협, 극단 성군, 극단 청춘좌가 각기 1주일씩 공연을 펼쳤고, 1막짜리 국어극(일본어 연극)이 추가된 제2회 대회(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에는 1차 대회에 참여하지 못한 예원좌와 황금좌, 극단 태양이 추가되는 등 참여 극단의 수가 늘었다. 두 차례의 국민극경연대회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자 3회 대회는 부민관이 아닌 부내의 일반 극장에서 나누어 개최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시국강연장으로 활용되던 부민관에서는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민족반역자인 박춘금이 개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이 폭탄을 설치하고 이를 터트려 대회를 무산시킨 소위 부민관 폭탄 의거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사실상의 마지막 의거였다.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던 부민관은 1949년, 서울시에 이관되었다. 1950년 4월 29일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로 2회 공연을 끝으로 국립극장으로써의 역할은 끝났다. 1954년 환도 이후 1975년까지 이곳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여의도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신축되면서 시민회관으로 그 용도가 변경되었고 1976년 시민회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되자 그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의회 건물로 용도가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던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동아일보 》 , 1935.12.06. 부민관 준공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건축 중이든 부민관 ( 府民館 ) 은 드디어 7 일로써 공사는 완전이 끝낫으므로 오는 십일에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엇다 한다 . 그리고 동관을 일반에게 소개하기 위하야 십일부터 십삼일까지는 매야 육시를 기하야 연무 ( 演舞 ) 를 공연한다는 바 그 료금은 일등 오십전 , 이등 삼십오전 , 삼등 이십전씩이라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6.01.29. 오십만원 들인 부민관 , 부민은 비난 부청은 두통 , 사용료는 비싸고 수지도 안맞아 , 사회과는 대책에 고심 경전 ( 京電 ) 이 전긔 독점 기한 연장의 조건으로 경성부에 백만원을 기부하야온 돈 중 오십만원을 뚝 띠어서 사십만 부민의 오락전당 ( 娛樂殿堂 ) 을 맨들겟다고 부내 태평통 ( 太平通 ) 에 지어 노흔 부민관 ( 府民館 ) 은 준공 후 겨우 일개월 밖에 되지 안흔 이즈음부터 부민의 비난에 싸혀 잇으며 또 부 당국으로서는 수입이 예상 의외로 적어서 경영이 곤난하다 하야 그에 대책에 머리를 알코 잇다 한다 . 즉 그 리유는 동관의 사용료 ( 使用料 ) 가 턱없이 비싸다는 것인데 가장 부민이 많이 이용하게 될 대 “ 홀 ” 의 사용료는 하로밤에 이백사십원 , “ 피아노 ” 대가 삼십원 , 겨울이면 “ 스팀 ” 값까지 붙여서 하로밤에 삼백여원의 사용료를 지불하게 된다고 한다 . 이와 같은 현상임으로 일반 흥행업자 또는 음악가협회 ( 音樂家協會 ) 같은 데서는 보고도 못 먹는 떡이라 하야 부에 대한 비난이 자못 높으며 , 따라서 동관의 수입으로써 동관의 유지를 꾀하든 부 당국에서는 수입이 적음으로 어떠케 경영해 갈 바가 문제인지라 직접 관게를 맺고 잇는 부 사회과 ( 社會課 ) 에서는 아직까지 동관의 예산 편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 동관이 준공된 후 지금까지 사십팔일 동안에 대 “ 홀 ” 을 유료 사용한 날짜는 십삼일밖에 되지 안는다 한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39.3.18. 영화연극으로 일할 ( 日割 ) 독점 , 영리장화한 부민관 , 부회 ( 府會 ) 에도 상정되어 상당히 파란 일 듯 , 본정서 ( 本町署 ) 에서 개선에 진출 최근 태평통 ( 太平通 ) 부민관 ( 府民館 ) 은 설립 당초의 취지인 일반 부민에게 이편을 주는 여러 가지 개최물을 하는 동시에 회합장소로 이용한다는 본래의 사명을 전연 망각하야 영리 ( 營利 ) 위주의 영화연극을 매일 같이 상영하야 업자들은 물론 학동을 가진 가정에서도 물의가 등등한데 이 문제는 금일 부회 ( 府會 ) 에서도 상정되어 상당한 파란을 이르킬 것인데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설관과 똑같은 역활을 하고 잇다 한다 . 이리하야 영화 재상연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들이 오 , 육개월 전부터 날짜를 전부 게약하야 노아 보통 사람이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 회합을 하려고 해도 날자가 비여 잇지 안어 부민관을 결국 사용치 못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 특히 모극단 모극장에서는 부민관과 결탁하야 언제나 토요 , 일요 , 휴일이 끼인 조흔 날이면 언제나 사용할 수 잇게 되어 잇다하니 이 역시 상설관 업자들이 불평을 일으키는 초점이라고 한다 . 그리고 상설관에 출입하는 생도 학생이면 학교당국과 보도연맹 ( 報導聯盟 ) 이 취체하야 엄벌에 처하지만 이 부민관은 상설관이 아닌 관게로 학생생도가 나뿐 영화를 보아도 무간섭하므로 이용자의 대부분은 남녀학생들이므로 학생교화상 ( 敎化上 )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 그런데 날짜를 미리 잡아 두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수수료를 받고 파는 뿌로커도 잇다는데 이 현상이 그대로 계속되면 앞으로는 영화 , 연극 상설관과 조곰도 다름없는 상설관으로 화할 터이니 일반은 회합에 이용할래야 도저히 이용할 수 없을 터이니 부민관 창설 본래의 사명은 잊고 말 것으로 이 문제는 학교와 사회 , 영화업자에게 큰 파문을 던질 것으로 그 귀취는 매우 주목되고 잇다 .
개항장에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이후, 이에 영향 받은 조선인들도 극장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은 황제가 사는 공간이라는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성의 극장 역시 황실 의례와 관련해 시작되었다. 조선인이 한성에 설립한 최초의 상설극장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1902년 세운 희대(戲臺)이다. 희대는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 [필자 주: 육순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51세를 가리킴.] 과 어극(御極)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을 위해 봉상시(奉常寺) 내에 500석 정도의 규모로 설치되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원형의 2층 건물로 계단 형태의 객석과 직사각형 모양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다. 황실희대는 통칭 ‘협률사(協律社)’ 혹은 ‘원각사(圓覺社)’라고 불렸다. 이는 희대를 빌려 연희를 공연하던 회사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칭경예식의 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1902년 9월 토사병이 유행한다. 칭경예식은 다음 해 4월로 연기되었으나, 다음해 4월에도 영친왕의 천연두 발병 등을 이유로 또 다시 연기된다. 이후 칭경예식은 유야무야 되거나 약식으로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칭경예식을 위해 많은 예인들이 한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칭경예식에 소용하는 예인들을 관리하던 삼패도감(三牌都監)의 장봉환(張鳳煥)과 모종의 세력이 합세하여 연희 회사를 세우고 이름을 협률사라 불렀다. 협률사는 칭경예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성에 올라온 남녀 예인들의 공연을 희대에 올렸으며 잠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히 전개되던 협률사의 희대 공연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04년 3월경 폐지되었다. 이처럼 협률사는 황실 극장인 희대가 만들어지고, 칭경예식을 위해 전국에서 올라온 예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고자 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예인을 관리하던 삼패도감의 장봉환과 함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협률사의 등장과 더불어 비슷한 전문 연예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단체에서 극장을 대여하여 흥행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빌려 사용한 광무대의 박승필을 비롯하여, 박춘재, 김재종 등 유명 연예패들과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 등 신파극단을 이끌던 인물들이 극단과 더불어 연흥사, 원각사, 개성좌(開城座) 등의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러일전쟁 이후, 극장을 이용하여 수익도 얻고 선전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협률사가 복설(復設)된다. 다방면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2월 하순에 복설된 협률사는 김용제(金鎔濟), 최상돈(崔相敦), 고희준(高羲駿)이 조직한 순 사영(私營)의 연예회사였다. 당시 협률사의 운영비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가 댔으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세력이 후원했다. 협률사의 복설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한 일본이 조선인의 관심을 흥행물에 돌리기 위해 강구한 조치였다. 따라서 협률사를 혁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봉상사(奉常司) 부제조 이필화(李苾和)의 상소로 결국 고종은 1906년 4월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인 임차인이 오히려 위약금 25만원을 청구하면서 협률사 혁파는 흐지부지된다. 1907년 2월,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에서 협률사가 운영하던 희대를 사용하여 각종 연희를 올리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 이어 1908년 7월 26일,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동참하고 있던 이인직(李人稙)과 박정동(朴晶東) 등이 경시청으로부터 희대를 연극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고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연희를 시작했다. 원각사에는 김창환(金昌煥)을 위시한 창부(唱夫) 40명과 가기(歌妓) 24명, 총 64명의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1911년 10월, 한시적으로 《조선신문》 언문판이 발간된 적이 있었다. 그 기념호에 실린 「연극의 월조(月朝)」라는 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엄비국장(嚴妃國葬)> [필자 주: ‘엄비(嚴妃)’로 알려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의 장례를 찍은 실사를 일컬음.] 과 원각사에서 개연한 ‘금강산 환등 대회’가 소개되어 있다. △ 일젼에 엄비국장이라ᄂᆞᆫ 활동광고를 돌이기에 본긔자가 일ᄎᆞ 구경 즉 쳐량 감상도 나고 조션 고속된 졀ᄎᆞ도 젼 야 구경치 못 ᄉᆞᄅᆞᆷ의 안목에 가히 흥감ᄒᆞᆯ 만 즉 연극 즁 활동ᄉᆞ진은 더욱 진젹 거동을 구경ᄒᆞᆯ 만 다고 탄식 얏더니 ... △ 원각 에셔 금강산환등을 갈 가 단 다 기에 슈삼 지긔를 잇글고 완상 즉 금강산 일만이쳔봉이 완연이 안즁에 나렬 지라 ( 중략 ) 일 사십여쳐를 완상 니 △ 본 긔 가 의 금강을 구경 지 우금 삼십이년이라 영숙 산쳔과 긔이 고적이 반가온 마음이 졀로 나고 조션에도 여차 셰게에 랑 만 명산 쳔이 잇슴을 감탄 엿슴으로 연극장 쥬무 를 방문 야 그 환등의 력사를 무르니 리희직 ( 李熙直 ) 김진우 ( 金振宇 ) 량씨 본래 지사인 사진사 신장균 ( 申章均 ) 씨와 동행 야 금년 오월에 금강산 탐험 로 쳔신만고를 불구 고 외산 명승고젹을 촬영 야 환등에 삽입 야 구경치 못 동포의 안공에 구경케 니 삼군의 지긔도 흠탄 거니와 구경 시 동포도 응당 감상이 게시 고 신션 졍신도 환셩 지로다 1 위 기사에서 기자는 <엄비국장>에 대해 ‘진적한 거동을 구경할 만하다’고 언급하는 데 그친 반면, 140여장의 금강산 사진에 대해서는 극장 주무자(主務者)를 만나 환등을 제작, 상연한 내역까지 물어 듣고 감탄 어린 소감을 늘어놓는다. 이는 <엄비국장> 상영보다도 ‘금강산 환등 대회’가 조선의 관객들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금강산 환등’은 조선인 관객들의 환영을 받아 원각사에서 장안사로 옮겨 흥행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관객들은 왜 활동사진보다 환등에 더 흥미를 느꼈을까? 당시 활동사진 설명은 전설(前說)뿐이었다. 다시 말해, 간단한 설명 후에 10분 내외의 활동사진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필름은 대부분 쇼트 몇 개를 일정한 속도로 배열한 것이었고, 그 속도에 맞춰 변사가 설명하는 중설(中說)은 당시로써 구사하기 힘들었다. 반면 환등은 하나의 사진을 변사(설명자)가 자세히 풀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관객들은 활동사진보다 환등의 사진을 보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활동사진을 상영할 때나 환등을 비출 때나 다 변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탄생하고 나서야 조선에 변사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연예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변사의 연행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변사들에게 활동사진 연설의 방침을 전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이다. 사진 2. 변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애국부인회 활동사진 기사(《황성신문》 1908년 6월 24일자.) 위 사진의 기사는 경성고등연예관에서부터 변사 연행이 본격화되었다는 일반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조희문 역시 경성고등연예관 설립 이전에도 직업적 변사는 아닐지언정 일시적으로 활동사진 설명에 나선 인물이 있었으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등 조선인이 세운 극장이 탄생하던 1907~8년 무렵에는 이미 조선인 변사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했음을 여러 명의 변사가 실증한다고 주장한다. 2 나아가 위 기사는 변사의 시조로 불리는 우정식(禹正植)이 원각사에서부터 변사 활동을 시작했다는 심훈(沈熏)의 증언도 뒷받침 해준다. 기사에 언급된 관인구락부는, 상술한바 원각사의 전신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변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 것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관인구락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 혹은 일본의 선진 문물을 조선의 관객들에게 소개해 주는 강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신문물을 경험해 본 관리 중에 선택된 인물들이 주로 변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기사에 언급된 인물 중 정운복(鄭雲復)은 오사카상업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국유학과 구미 각국 시찰을 경험했던 인물로, 일제의 조선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언론 계통의 인물이었다. 김상연(金祥演)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언론 계통의 친일 관료였다. 한석진(韓錫振) 역시 《황성신문》과 그 후신인 《한성신문》에 관여했다. 이처럼 최초의 변사들이라 할 만한 인물들은 서구문물을 경험한 이들로서,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근대화를 주장하는 웅변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할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광관(有光館)이라는 활동사진과 연극장으로 사용되던 원각사는 아쉽게도 얼마가지 못해 영업을 중지했으며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 「연극의 월조」 《조선신문》 1911년 10월 1일자. 2) 조희문, 『한국영화의 쟁점 1』, 집문당, 2002, 130쪽 참고.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0~42, 209~211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황실희대(원각사)의 외관 [자료] "논설: 술객문", 《황성신문》 1903.01.17. ◎歲月 이 荏苒 야 於焉之間 에 陰曆年終 이 又迫 니 歲暮天寒 에 北風其凉 고 梅花淡屋 에 雪月 이 滿庭 이라 有鄕居一客 이 孤枕冷燈 에 耿耿無寐 야 起拂布袍 고 徘徊月庭 이라가 負手緩步 야 行訪一名士之家 러니 適値諸名士 ㅣ 與京鄕友朋 으로 爛漫會飮 이라 客 이 亦參座末 이러니 數盃酒闌 에 滿座酒人 이 詼諧談笑 로 各自論懷 더니 一人曰 吾輩 從今以後 로 無用於世 로다 何事 를 爲業 지 欲看書而懶厭 고 欲聚財而無資 니 除非親舊之尋訪 이면 終日老屋 에 無聊消遣 니 沁沁難耐 일셰 子 有何消日 고 一人曰 吾亦 云云 일셰 近日 某友家 에셔 西廂記 를 借來 얏더니 此亦語錄 을 難解 야 滋味 가 殊沒 일네 一人曰 我 某友某友 로 一分 기쑤시기로 漿羹飯 을 每夜 喫之 지 然 이나 細雨 도 濕衣 라고 그럭저럭 十餘元 을 見失 네 一人曰 吾儕 가 今夕 에 花鬪 나 이볼가 一人曰 且置 고 協律社 귀경이나 가셰 壯觀 일네 眞壯觀 일네 春香 이와 御史出道壯觀 일네 一人 이 顧謂鄕客曰 彼公 은 무엇 려 京來 나 朝飯夕粥 喂牛突 에 進士主 가 上福 이지 一齋郞 一主事 나 宕巾味 를 甞 랴고 旅舘客苦 何如 고 無錢 면 쓸 업 鄕客曰 아모리 無錢 야도 令監 이나 進賜 셔 數生日 만 苦待 오 說麼執事 네가 數生 야 大臣協辦 地境 에 此漢區處 아니 가 一人曰 數 무슨 數 인가 世上貌樣觀之 니 어늬 時節數生 길지 鄕客曰 齋郞借啣 은 何事故 로 아니터지 고 沓沓 여 發狂 이오 一人曰 必也 터지지 면셔 終宵諧謔 다가 聞鷄罷歸 야 爲余道其問答之說 일 余 ㅣ 曰 悲夫 라 彼好地閥 好家數之諸人 이 若在舊日則 淸班華秩 과 監留宰相 이 卽其倘來之職而不幸當此時節 × 야 官雖淸要 나 無一權利 고 如彼冷寞 이 極甚可咄 니 雖一藝一業 과 一文一字 라도 務欲勤苦做工 야 進就學識 然後 可不受他日之欺侮 어 不此之爲 고 閒游懶怠 야 只以骨牌 花套 西廂記 演戲場之類 로 以爲沁沁破寂之資 니 非但此等名士也 라 我韓全國 에 從前 兩班儒士爲名之人 은 擧皆如彼 고 鄕客 은 尙此以依賴求乞於宰相之門 으로 錮筋着髓 야 牢不可破 니 如此細瑣 가 雖若無關係於國勢 나 國勢之萎靡衰頹 에 日漸濱危 며 日漸墜險 은 實因此而然也 니 豈可謂之以細故而不深憂也哉 아 嗟乎咄哉 로다 [자료] "논설: 원각사 관광의 향객정담", 《황성신문》, 1908.10.13. ◎有兩個鄕客 이 來遊京師 라가 一夕 은 月色 이 如晝 야 九街 가 如洗 라 携手同伴 야 料理店 의 盃酒 를 沽飮 고 因 야 圓覺社 의 演劇 을 觀光 고 拾二點鍾 에 歸來旅舘 야 該社情况 을 互相評論 이 如左 더라 甲曰余 가 在鄕 야 新聞 을 閱覽 니 大韓新聞社長李人稙氏 가 我國 의 演劇 이 淫靡不雅 것을 改良 기 爲 야 圓覺社 를 設立 고 人情風化 에 有助 歌舞 로 倡夫 와 妓女 를 敎導 다 얏스니 氏 社會上開明紳士 로 拾餘年海外文明國 에 滯在 야 文明空氣 를 吸収 며 文明學術 을 鍊習 얏고 其歸國也 에 新聞 의 機關 을 掌握 며 小說 의 著術 을 發行 얏스니 國民 을 開導 고 風俗 을 改良 事業 에 對 야 宜乎好個方針 을 研究發明 지라 於是乎演劇 을 改良 主義 로 圓覺社 를 設立 이니 吾儕 가 思惟 기를 該社演劇 에 乙支文德姜邯贊 의 英雄事業 이나 論介桂日香 의 貞烈芳跡等 으로 新演劇 을 發明 야 國民 의 思想 을 鼓發 이 有 리라 얏더니 今 에 該社情况 을 目覩 則猶是舊日風流 에 沈靑歌 、 春香歌等而已 니 何者 로 演劇改良 이라 謂 지 此 로 開明紳士 의 事業 이라 謂 난지 知得 키 難 事 로다 乙曰李人稙氏 의 事業 은 姑舍 고 該社 에 對 야 同情贊成 者 가 誰也 오 면 皆我國上流社會 에 高等官人 이오 昨日今日 에 聯翩觀覽者 誰也 오 면 現政界 에 某某大官 이라 其政治改良 도 圓覺社 의 演劇改良 과 如 지 不知 거니와 目今我韓 에 國步 의 艱棘 과 民生 의 塗炭 이 何如 境遇 에 在 가 若個有志者流 가 國家思想 과 國民義務 로 敎育 을 倡導 다 實業 을 奬勵 다 야 家產 을 傾 고 心力 을 竭 야도 目下經濟 의 困難 으로 一個事業 도 略無起色 니 其舌 이 獘 고 其淚 가 枯 야 晝夜憂嘆 情况 을 凡有人心者 ㅣ 孰小矜惻 이며 加之地方騷擾 가 經年不息 야 一般同胞 의 死亡 이 不絕 고 流離 가 相續 情况 은 骨爲之冷 이오 鼻爲之酸 이거 當局諸公 은 此 를 不聞不知 지 惟是演劇塲 을 愛好 고 顧存 야 無日不額額 니 諸公 의 意向 은 維新 의 功業 을 已建 고 太平 의 福樂 이 無窮 줄노 認 홈인지 果然諸公 으로 여곰 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를 愛 홈과 如 면 演劇改良 보다 政治改良 의 實效 가 有 지어 胡爲乎內閣 을 愛 홈이 圓覺社 愛 만 不如 지 此 도 知得 키 難 事 라 고 長吁浩歎 타가 一大白 을 滿引 고 頹然而臥 야 東方 의 旣白 을 不知 얏다 云 有人 이 其談話顚末 을 報道 其言 이 雖涉於愚戇 이나 其意 가 實出於憂憤故 로 爲之記載如右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