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 감독
- 박혜영
- 제작년도
- 2004
2016년 말의 광화문 집회는 80년대를 청년으로 보냈던 많은 사람들에게 기시감을 비롯한 다층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지금의 촛불을 보며 자신들의 운동과 그것이 만든, 혹은 만들지 못한 현재에 대한 어떤 감정을 떠올렸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안에 하동과 채복이 있다. 둘은 함께 노동 운동을 했고 위장취업으로 각기 다른 시기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다. 노동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도 아니고 지금은 귀농해서 나름 순탄한 삶을 살고 있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세대의 ‘평범하게’ 치열했던 운동가들의 삶이다. 두 사람이 회상하는 80년대는 그들이 옥중에서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현재로 소환된다. 편지를 쓰던 그 때처럼 따로 따로 편지를 읽는 이들은 상대방을 향한 편지를 읽는 동시에 이제 과거가 된 자신의 또 다른 현재와 마주한다. 과거가 현재가 되는 순간을 맞는 이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기 위해 영화가 택한 방법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프롬프터의 편지를 읽게 하는 것이다. 두 노인이 가물가물한 기억, 흐뭇한 미소, 복받치는 눈물로 당시를 마주치는 순간이 프레임을 가득 고스란히 담겼다. 평생 주고 받을 연애편지를 모두 감옥에서 주고 받았기에 편지 안에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 재판의 진행 이야기 서로에 대한 감정이 섞여 있다. 젊은 시절 연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남노련을 비롯한 당시의 사회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혼동될 무렵, 이들에게 연애, 가족, 사회 운동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얽혀있는 그 무엇임을 깨닫게 된다. 편지를 통해 가장 강하게 두드러지는 것, 그리고 여전히 담담하게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재판 때 찾아온 동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 등의 감정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생각은 감옥에 자신을 보러 와준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행동이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가장 사적인 소망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세월이 흐르며 대의에 감추어져 이야기되지 않는 많은 관계와 감정의 존재를 수면 위로 떠올린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둘이 다른 공간에서 나누었던 30년 전의 편지를 현재형으로, 바꾸어 교환하게 한다. 여느 연인이나 부부가 하듯 강가에서 마주보고 감정을 나누는 일이 이 영화에서는 가장 어색한 순간이 된다. 정의를 외치는 일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죄스러운 일이었던 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 이렇게 어색함은, 영화 첫머리에서 둘이 이야기하던 ‘봄’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노부부의 사랑의 대화와 사회에 대한 목소리는 비슷한 어색함과 주변성을 가졌다. 그리고 이제 현재의 한 점에 모아진 그들의 이야기는 광화문의 촛불과 겹친다. 귀농한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휴먼 다큐멘터리의 상투성, 시간의 흐름을 재해석하는 구술 퍼포먼스의 실험성, 공간의 상징성에 무게를 둔 연극적 요소 등 쉽게 섞일 것 같지 않은 여러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사이 어딘가 위치한 이 이상한 다큐멘터리는 치열함과 숭고함, 낭만과 상처가 뒤섞여 있는 한국 386세대의 한 숨겨진 얼굴 같다.
<개의 역사>에 나오는 개의 집을 본 적이 있다. 그 옆을 무심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도 매우 익숙하다. 뜬금없는 곳에 붙어 있던 ‘개조심’ 푯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도 같다. <개의 역사>는 나의 ‘갸우뚱’에 답을 줄 것 같은 제목으로, 내게 익숙한 공간을 보여주며, 내 눈길을 화면 속 디테일 하나하나에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감독은 학교 앞 아이들, 동네 할머니 등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개에 대한 같은 질문을 한다.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별로 유용하지 않아 보이는 인터뷰 대답들이 길게 이어지며 영화의 초점은 후암동 어느 건물 옥상에 살던 그 개, 백구의 역사로 좁혀지기보다 그곳을 뒤로 한 채 주변 모든 방향으로 배회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마주한 사람들은 왜 하필 개를 찍는지 의아해하고 좀 더 ‘생산적’인 것을 하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백구의 뒷조사를 가장하고 동네 사람들의 주위를 대하는 여러 시선을 보여주던 영화는 개의 죽음과 함께 가장을 멈추고 ‘생산적’이지 않은 주민들의 삶 속으로 훅하고 들어간다. 이혼녀 독거노인을 비롯해 영화가 소개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매우 낯익은 동시에 생소하다. 누구나 오가며 동네에서 마주칠 법한 사람들이라 낯익지만 ‘중요하지 않기에’ 궁금해한 적 없는 그들을 프레임 안에서 정면으로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생소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과 유사한 인물들을 본 적은 많다. 생소한 이유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지 않고 정말 소소하게도 “새들이 날아왔네”, “옛날엔 사는 게 힘들었지”와 같은 말을 해 줄 뿐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리고는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고 별 궁금증을 자아내지도 않은 채 화면에서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의 역사>는 다수의 시선이 비껴가는 곳에 위치한 존재를 주인공의 자리에 앉혀 목소리를 내게 하는 대신 ‘주인공’과 ‘귀 기울일 만한 이야기’라는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구성을 취한다. 영화 속 대상들 중 누구도 보편적 다수를 대유하는 이야기를 독점하지 않고 하나로는 뭔가 부족한 상태 그대로 존재하며 전체를 구성한다. 별 볼 일 없는 여러 대상 사이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나머지는 소수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마주치는 거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중요하지 않은 거의 모든 것 중에는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중요한 것만 바라보지만 실은 별 볼 일 없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영화 속 별 볼 일 없는 인물들이 그 소외된 공동체 안에서도 배척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감독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처지도 대상들 사이에 끼워 드러내는데, 영화 속 감독의 수줍은 존재 방식은 전략적 어눌함으로는 얻기 힘들었을 진정성을 전달하며 영화의 독특한 구성을 완성한다. 소소한 인물들에게 접근하는 감독의 태도는 시종일관 소심하기 그지없다. 동네 정자에 앉아 소일하는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가장 작은 존재감을 지닌 할머니가 혼자 남을 때를 기다려 예의 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는데요...” 라는 불명확한 문장으로 말문을 여는 식이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며 좁은 집 공간에서 빨래를 넌다. 거의 기억되지 않지만 일상의 속내가 응축된 행위인 빨래 널기를 보여주는 감독의 모습은 대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달하고 해석할지 고민하는 조정자의 모습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다. 이렇게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카메라의 권위를 벗어놓는다. 영화의 제목이 ‘개의 이야기’가 아닌 ‘개의 역사’라는 점은 영화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것만 기록하고 나머지 모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지워버리는 것이 역사라면, 이 영화는 현실을 이루는 중요하지 않은 거의 모든 이야기에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 그 가치를 기억하려는 안간힘이다. 동네에 찾아오는 새들과 백구의 행동을 기억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인터뷰가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는지는 그 인터뷰가 한참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중요하지 않아서 보고도 지나쳤지만 영화가 주인공으로 만들어 들려줄 개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있었던 나에게 세상을 채우는 별 볼 일 없는 것들의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보여준 주인공 없는 이 영화, 참 고맙다.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 이 태초의 소리는 존재가 원형의 어떤 것으로부터 분화되기 시작하는 원초적 힘의 울림이었을 것이다. 흔히 ‘원형의 섬’이라고 불리는 진도의 삶에는 고대에 인간과 그 원형의 존재를 연결해 주던 의례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의례의 중요한 요소는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어딘가 위치하며 그 간극을 채우는 소리이다. 김응수 감독의 <옥주기행>은 바로 그 원형적 울림으로서의 소리를 담아내려는 노력이다. 그렇기에 사라져가는 전통을 기록한 영화라는 표면적 형태 안에 담긴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소리의 근원을 환기시키며 우리를 그곳으로 끊임없이 회기시키는 소리의 존재론이다. 영화의 각 장을 여는 것은 지역의 풍광이다. 부드러운 푸른 곡선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남도의 산하를 소개하는 음악은 서구의 음악이다. 이러한 조합이 전혀 이질감 없이 바로 이어서 들리는 진도의 가락과 연결된다는 영화적 솜씨 이외에도, 이 선곡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민요, 카탈루냐 민요를 포함하는 챕터 간 음악은 마치 영화 안의 소리가 단순히 진도 주민의 노랫가락이기 이전에 땅과 하늘에 스며 있는 보편적 소리임을 전제하는 듯하다. ‘소리는 새 육체를 찾아 떠돈다’,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라는 제목의 첫 두 챕터의 소개는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함께 자못 비장하게 사라질 위기에 있는 소리를 애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영화가 이제는 목소리에 힘이 없음을 호소하는 노인들의 소리에 이어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이루어지는 중장년층의 신명나는 즉흥 소리판까지 담은 후 이어지는 마지막 챕터에서는 정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새는 노래한다’라는 제목의 챕터는 갖가지 새들이 예수의 탄생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새의 노래’와 함께 시작된다. 새는 세계 많은 신화에서 세계 창조에 관여하며 인간계와 천상계,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육체 없이도 존재하며 떠돌던 소리는 새의 노래와 함께 다음 순환의 시작을 기약한다. 이러한 상징적 구성의 장 안에 등장하는 진도인은 산하에 떠도는 소리를 자신들의 삶과 목소리를 통해 육화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항상 존재하는 자연의 메시지를 지금 현재의 세상에 전달하는 새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렇듯 각 장의 소개를 통해 소리의 주체를 보는 거시적인 시각을 제시한 영화는 그 장들을 현재의 공간에서 소리를 재현하는 주체들의 삶으로 채운다. 노래라고 하기엔 담화에 가깝고 말이라고 하기엔 몸을 진동시키는 리듬과 가락이 있는 그것을 ‘소리’라 부르는 것에도 그들이 내뱉는 소리가 가진 원형성이 반영되어 있다. 먼저 간 남편을 그리며, 고기잡이 그물을 걷어 올리며 그들이 소리를 만드는 행위는 ‘부른다’기 보다는 ‘산다’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감독은 녹음된 음원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그 삶을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스란히 담아낸다. 카메라는 소리의 주인공을 굳이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무심한 시골집 잡동사니들과 소주병, 함께 장단을 맞추거나 핸드폰에 열중하거나 하는 주변의 구경꾼이 현재 그 소리와 하나임을 계속 드러낸다. 노래 끝의 탄식과 한숨은 하나로 연결되어 그 시간과 장소의 정서, 몸의 리듬과 하나가 된다. 영화 속 소리하는 노인들은 대를 이을 젊은 세대가 없음을 한탄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소리의 마지막 세대임을 애잔해 하지만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것은 진도 바닷길축제의 행렬이다. 자연이 어김없이 바다를 다시 가르는 기적을 보이듯, 소리는 다른 시간에 다른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감독은 현재 안에 층층이 존재하는 과거를 담았다. 그리고는 그 다차원을 관통하는 힘을 찾아내어 표현하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문화재로서의 소리를 버리고 구경꾼과 핸드폰과 등산복 행렬과 하나 된 소리의 모습을 잡아내기까지, 수없이 재설정해야 했을 자신과 카메라의 존재는 영화의 무게가 되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