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 감독
- 방한준
- 제작년도
- 1938
- 출연
- 현순영, 이금룡, 윤봉춘, 최운봉, 김덕심
< 반도의 봄 >(1941)의 첫 장면은 <춘향전>의 한 구절에서 시작된다. 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을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반도의 봄>은 당대 현장에 개입했던 자본과 새로운 스타의 탄생, 그리고 그로 인한 오해가 쌓인 남녀의 관계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일컬어 ‘자기 반영적 영화’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작품을 창작하는 감독뿐 아니라, 반도영화사와 동아레코드 같은 당대의 대중문화 생산 공간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동경으로 떠나는 주인공을 환송하는 사람들의 얼굴 탓이다. 비록 주인공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지만, 그들을 환송하는 인물들은 어둡다. 마치 < 400번의 구타 >(1959)의 마지막 장면과 맞먹을 정도로, 이 쇼트가 주는 인상은 강렬하다. 아마도 현실의 답답함이나, 최소한의 책임감 있는 결말을 주려한 흔적일 것이다. 트래킹 되어 점점 좁아지는 화면에 마침내 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이때 앙각으로 잡힌 그의 표정은 끝까지 암울해 보인다. < 반도의 봄 >이 제작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때문에 대사의 절반 정도는 일본어로 되어 있다.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의 본격적 군국주의에 대한 조선영화의 응답으로 읽을 여지도 있다. 1936년 닛가츠 영화사 연출부에 입사하며 시작된 이병일 의 영화 인생은 이 절묘한 데뷔작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본에서 그의 영화 스승은 아베 유타카였다.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배웠던 인물로, 이 탓인지 언뜻 <반도의 봄>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문법을 추종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다르다. 쇼트의 의미 관계가 소비에트 몽타주, 혹은 1930년대 일본영화의 장식적 스타일에 더 가깝다. 영화는 대체로 ‘팬과 트래킹을 이용한 롱쇼트와 부감, 딥포커스’를 사용해 공간연출을 완성한다. 먼저, 딥포커스 기법은 ‘반도영화사 발대식’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현실적 시간과 공간의 연결성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되진 못하지만, 다양한 공간적 거리감이 단 한 번의 촬영으로 동시에 포착된다. 시기적으로 < 시민케인 >(1941)의 객관적 눈에 다다르지는 못하더라도, 이 장면을 위시해 영화가 꽤나 공들여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가로, 즉 ‘파노라마’를 대체한 팬과 트래킹 쇼트 또한 영화는 강조한다. ‘스태프들의 한옥 합숙소’ 장면이 대표적 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처음부터 세트장 지붕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이때 부감은 직부감 본연의 운명적 뉘앙스보다, ‘현장을 훔쳐보는 느낌’이나 ‘생생한 현실감’을 더하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 파노라마 기법이 줄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려 세 번의 연속적 팬이 삽입된다. 여러 명의 인물들이 화면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아벨 강스가 말한 “시각적 아코디언”을 이룬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상황을 아우르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즉, 인물이나 사건은 이 장면의 주인공이 아니다. 카메라의 회전을 통해, 영화는 물리적 변수까지 포함하는 기하학적 프레임을 노린다. 이 밖에도 외화면(hors-champs)이 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프레임 바깥 공간을 화려하게 보이기보다, 차라리 고개를 돌려 더 많이 ‘보여줄’ 것을 택한다. 물리학적 측면에서 프레임 바깥에서 논의될 수 있는 요소들까지 모두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다. 대사는 물론이고, 민족적 감정까지 화면에 모조리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진짜 찍고 싶었던 작품은 <춘향전>이었는지 모른다. 보통 영화가 액자구조를 취할 때, 액자 바깥의 주인공이 내부의 인물을 살피며 진행되는 ‘중첩 구조’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 반도의 봄 >은 실질적이고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내부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점이 특이하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더불어,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 그리고 별개의 멜로드라마 플롯이 동시에 만난다. 어쩌면 단순한 액자구조가 아니라, 관객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미장아빔(mise en abime)으로 확대될 여지가 있다. 앙드레 지드에 의해 유명해진 이 기법은 말 그대로 ‘심연(abime)으로 끌어당기는’ 중첩된 구도를 뜻한다. 닫힌 액자가 아니라 ‘열린’ 액자이다. 마치 양측으로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마냥, 영화의 이야기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뻗어 나가게 된다. < 반도의 봄 >이 여러 미학적 장치를 통해 추구하는 효과는 일정하다. 바로 ‘사실주의적 성향’이다. 어쩌면 ‘진실감의 확보’라 부를 수 있는 초기 사실주의의 고뇌를 이 작품은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영화 속의 영화로 하필 ‘춘향전’이 선택되었는가 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춘향전이 가지는 의미, 그것은 소설의 내용과 더불어 그 소설 자체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일깨워준다. 일차적으로 춘향의 이야기가 액자 속 영화로 삽입되면서 얻는 효과는 ‘비교’의 힘일 것이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춘향은 명백한 ‘소설’ 속의 인물이다. 이를 통해 <반도의 봄>은 이야기 바깥의 사실성을 역으로 확보한다. 더군다나 이 소설의 결론에 대해 관객들은 ‘보지 않아도’ 안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것과 더불어, 신분의 차이가 지속적으로 그녀를 괴롭힐 것이란 사실까지 말이다. 이제 문제는 마지막 장면이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아니라, 환송하는 자를 마지막으로 비춘다. 이 결말은 좀 더 신중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이병일 의 < 반도의 봄 >은 비교적 자세히 한 소설을 재해석하고, 실제와 비슷한 톤으로 당대 현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 생략이 없는 영화에서 소설의 결말만은 과감히 생략된다. 어쩌면 트뤼포의 앙투완이 그러했듯,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이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감독은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 탈출이 과연 현실과 겹쳐질 때도 승리가 될지, 우리는 짐작하여야 한다. 아무튼 영화는 표면적 해피엔딩을 맞고, 춘향전의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박구 감독님은 나의 아버지이자 나에게 영화 예술의 혼을 불러 넣어주신 스승이시다. 또한 아버님의 생애는 처절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 만큼 인생의 시련속에 예술가로서 긍지를 버리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기도 하다 음악가로, 이 나라 가극의 선구자로, 사진작가로 그리고 영화 연출가로 변신하는 아버님의 모습은 감히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한 예술가의 멋진 모습이였다 생각하며 이 글을 통해 思父曲의 마음으로 나의 아버지 박구 감독님을 회고한다. 박구 감독님은 1911년 함경남도 함흥시 산수동에서 청염한 유학자이신 박치근 의 5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이 시작된 이 땅의 선대들이 그랬듯이 가난과 고통 속에 얼룩진 가슴속에 억눌린 한은 소년 창석(박구감독의 본명)의 감성을 발전시키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16세의 나이로 고향 함흥을 떠나 홀 혈 단신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이유는 보다 넓은 세계에서 예술가가 되어 보겠다는 집념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난생처음 일본 동경에 온 소년 창석은 이국 생활의 우여곡절 속에 동경음악전문학교에 다니며 크라리넷을 전공한다 당시 일본 음악계의 크라리넷 명 연주자였던 와다나베의 수제자가 된 아버님은 열심히 연주법을 터득하여 마침내 어엿한 크라리넷 세션맨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후 일본빅타레코드사의 전속 연주자로 활약하며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재즈에 심취하여 당시 동경의 재즈구룹무대에 참여해 연주자로 경험을 쌓은 후 27세의 나이로 경성으로 돌아온다 귀국후 역시 빅타레코드사의 지점 책임자가 된 후 조선에서 처음으로 창단된 재즈 오케스트라 '히비끼'를 창단 1935년대 재즈를 이 땅에 접목시키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셨다. 그 후 빅타 가극단을 인수 반도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당시로는 드물게 민족시대극을 전문으로 하는 가극을 상연하게 된다 당시 반도 가극단의 레퍼토리는 '견우직녀''''심청전''장화홍련전''콩쥐팟쥐''에밀래종'등 우리 민족의 화려한 야사만을 골라 가극으로 제작했다 그 이유는 일본어로 강제되는 문화속에 유일하게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가기 위해선 조선어 사용이 시대극에 한하여만 가능했던 맹점을 활용 하셨기 때문 이였다 아버님의 민족 색채는 반도가극단의 단장으로 시대극 고집에서 자명하게 들어 나있다 특히 반도가극단은 우리나라 연기자의 산실로 백성희 , 허장강 , 김희갑 , 김승호 ,장치희,서혜영 등 유명인을 많이 키워냈으며 반도가극단 출신이 아니면 행세를 못할 정도로 많은 배우가 양산되었다. 영화의 본격적인 출현으로 사양길에 접어든 가극은 풍전의 등화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 후 아버님은 평소 좋아했던 사진촬영의 실력으로 쉽게 영화에 입문하게된다 우리나라 사진작가협회 창단 발기인으로 영상에 남다른 이론과 실기가 능숙하셨던 이유로 영화계 진출이 가능하셨다 ' 자유부인 (속) '을 필두로 반도영화사의 작품이 선을 보이고 국내에선 처음으로 해외로케이션 작품인 ' 낙엽 '으로 필리핀 올로케이션을 감행 한 것으로 세중에 관심을 모았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후 인생극장 , 백설공주 , 식모 등 고인이 되시기 전 까지 20여 작품을 제작감독 하셨다. 1970년 초 한국영화법의 개정으로 인해 영화제작의 자유가 구속받으며 아버님은 제작에서 손을 놓으셨다 자의든 타의든 열악한 영화제작여건에서 작가가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없는 시대환경을 항상 염려하시던 아버님의 한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5년 마지막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한일합작인'이향에 지다'라는 작품은 한 고려 도공의 비극을 쫏는 르뽀르타쥬형식의 영화로 외인들에게 끌려간 도공을 통해 우리민족의 한을 묘사한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아버님의 유작인 샘이다 그러나 지금 그 필림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다름이다. 스승으로서의 아버지...... 내가 16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님은 항상 사진을 찍으시고 나에게 암실 일을 맡기셨다 난 곧잘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 작업을 했는데 하루는 내가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아버님은 심사숙고 끝에 카메라를 한 대 주셨는데 난 불만 이였다 다름아니라 아버지가 주신 카메라는 연동이없는 구식 주름상자 35미리 카메라인 독일제 '레티나1'이였다 촬영경험이 없는 나에게 그 카메라는 너무 어려운 것 이였다 특히 이 카메라는 초점과 노출을 목측으로 설정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나는 아버지가 주신 카메라의 뜻을 알게 되었다 기본원리를 중시하는 아버님의 가르침은 묵시적이었고 내 스스로의 연구만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자력을 키워 주신 것이다 난 그 후 베트남전선의 종군카메라맨으로 활약하며 아버님의 주름상자 카메라의 철학으로 살아 귀국했다 난 특히 아버님을 좋아했고 아버님 역시 나를 사랑하셨다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꼬박 예술에 대한 강의로 날을 밝히던 그 옛날이 오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이론가였다 그리고 노력가였다 7순이 넘어서 까지 영어 콘사이스를 뒷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며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이셨던 그 분의 열정은 지금 생각해도 존경이 갈 다름이다. 아버님은 우리영화계에서 명장감독은 아니셨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멋을 아는 명감독이셨다는 것은 아버님의 후배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로는 진고개 신사로 후배들의 어려움을 위해 자신을 던저 도와주시던 자상한 모습은 영화계에 유명하다 .영화 감독으로서 감독협회를 창설 회장을 맡으셔 감독협회의 기초를 이뤘으며 또 영화인으로서 영화인협회장 서리를 맡으시는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0년 영화공로자가 되시기도 하셨다 나는 항상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이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현장에서 내뿜는 레디고의 함성에 도취해 공부도 다 버리고 촬영장으로 뛰어가곤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버님이 고인이 돼신지 18년이 되어 온다. 1984년 내가 미국에 유학을 하고 있던때 부고를 받고 허탈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예술가로서 아버지, 인간으로서 나의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 하시고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니 난 갑자기 그리움이 사모 친다 아버지를 뒤이어 같은 길을 가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할 작품 하나 내지 못한 것에 난 늘 마음이 죄스럽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당신이 가르쳐준 영화예술의 진수를 아버지의 무덤 앞에 꼭,꼭 내놓으리라 다짐하며 오늘 이 뜻깊은 나의 아버님 작품 회고전에 다시 한번 내 아버지의 멋있는 잔상을 새겨 보려 한다. 박경삼 (명지대 교수,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교장)/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