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반의
- 감독
- 박찬경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이민지, 오태경, 엄효섭, 박지환, 양현민, 강기영, 윤만달, 이정경, 임시준
영화란 지진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크고 작은 요동을 일으키는 불가시적 힘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 힘의 근원을 찾아 지각 밑을 답사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필경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기에, 결국 우리는 이런저런 관측과 경험을 통해 그 힘의 운용 원리를 간접적으로 추론하는 데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보다 정교한 추론을 위해서는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의 요동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며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따금 여행을 떠나거나 다른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 불가시적 힘의 효과가 지진계(seismograph)에 기록된 그래픽적 형상과 수치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상과 수치가 그 힘과 모종의 지표적 관계, 혹은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만, 곧바로 힘 자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에 대한 유일한 기호표현이라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우리는 요동을 청각기호로 나타내는 지진계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와 그 변형들이 영화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영화적인(cinematic) 것의 특권적 기호표현을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역사 속에서, 지진계가 지진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지진적인(seismic) 것의 특권적 기호표현을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식의 전도를 본다. 하지만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시청각적 지진계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고,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그것과 관련된 구성물들 상당수가 ‘영화적 인터페이스’를 위한 강력한 은유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가 영화라는 지진을 감지하기 위한 유일한 장치는 아니라는 점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나 슈클라다노프스키 형제의 비오스코프 같은 사례들이 보여주듯)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 장치의 사용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이들은 바야흐로 인위적인 요동을 가미해 그래프의 형상을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시네마토그래프의 특권에 일찌감치 의문을 품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돌이켜보면 놀랄 만큼 현명하게도, 섣불리 대안적인 장치에 눈을 돌리거나 지진과 유사한 인공적 요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고안하기보다는 지진의 역량을 다시 살피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가령 1930년대의 르느와르는 지진계를 활성화된 지진대로 다시 가져다 놓고 인공적 요동과 본래의 지진이 함께 빚어내는 그래프의 형상을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영화라는 지진과 맺고 있던 비인격적 자동주의(impersonal automatism)의 관계를 다시 살피려는 시도(앙드레 바쟁)가 나올 무렵, 지진은 이미 지진대를 넘어 확산되어 지각의 곳곳을 강타하고 있었다. 이른바 ‘모던 시네마’란 가공할 대지진의 충격파에 맞서 지진계가 오작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빚어낸 매혹적인 그래프이다. 그런데 만일 대지진의 충격파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의 임계값을 넘어선 것이라면 이 지진계는 오직 그것의 오작동을 통해서만 지진의 역량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오작동하는 지진계가 그려내는 혼란스러운 그래프 또한 지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었다. 이러한 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과격한 방식으로 지진계의 ‘다른’ 사용법을 한꺼번에 제시한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레트리스트(Lettrist)들이었다. 이지도르 이주의 <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Traité de bave et d’éternité >(1951) 및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 Hurlements en faveur de Sade>(1952) 등과 더불어 레트리즘 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모리스 르메트르의 <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à commencé? >(1951)를 우리 리스트의 첫머리에 둔 것은 그 때문이다. 동요하는(unquiet) 영화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레트리즘은 누벨바그와 더불어 “실험영화의 두 커다란 라이벌 분파”(니콜 브레네즈)라고까지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찌감치 영화의 전당에 그만의 자리를 잡은 후자와는 달리 오래도록 망각 속에 파묻혀 있다 비교적 최근에야 다시 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는 오직 그것의 오작동을 통해서만 영화라는 지진의 역량을 더듬을 수 있다는 과격한 주장이 제기된 이후, 이를 전적으로 수긍하거나 반신반의하거나 거부한 여러 작가들이 자기만의 길을 따라 흔들리는 대지 위를 방랑했지만, 이들이 영토와 영토를 가로지르는 방랑의 과정에서 산출된 기기묘묘한 그래프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공식적인 영화사(史)의 가장자리나 여백에 묻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실험영화’나 ‘아방가르드 영화’라는 다분히 부적절한 명명으로 인해 오해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매 작품이 그 자체로 온전히 하나의 창조여야 할 예술에서 실험이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타르코프스키 식의 비판은, 그저 특정한 종을 명명하는 이름을 그 종의 속성과 동일시해 버리는 오류에 입각해 있다. 즉, 바다표범이란 바다에 서식하는 표범이라고 간주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적절한 명명을 바로잡기보다는 실제 그 이름이 사용되는 맥락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이라는 제목의 본 코너는 한국의 영화애호가들에게 그러한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2017년 1월부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의 본 코너를 통해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편에 대한 리뷰와 더불어 각각의 영화를 둘러싼 영화사적 정황, 영화집단 그리고 사조와 경향에 대한 가이드를 3주 간격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그러니 여기서 당장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의 역사를 무리하게 요약하려 들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선정 과정과 기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밝혀두어야 할 듯싶다. 본 리스트는 서울국제실험영화제 프로그래머 이행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오준호 그리고 필자를 포함한 3인이 각각 20편씩을 추천한 후에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35편으로 압축해 얻은 것이다. 우리는 초기 아방가르드, 즉 무성영화 시기의 추상영화, 절대영화, 다다와 초현실주의영화를 비롯해 1940년대에 마야 데런과 케네스 앵거 등의 작가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싹튼 미국 아방가르드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했다.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데런의 < 오후의 올가미 >(1943) 등은 이제는 예술영화의 정전이 되어 세계영화사 강의에서도 흔히 다루어지곤 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실험영화, 보다 폭넓게는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과 공연 등 여러 예술영역들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오디오비주얼 실천들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할 수 있는 역사적 작업들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과 영국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실험영화의 구조적(structural)이고 물질적(material)인 전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레트리즘 운동을 비롯해 이후의 확장영화(expanded cinema) 실천을 가로지르는 퍼포먼스적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점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35편 가운데 22편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아시아 및 한국의 선구적인 작가들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했다. 이 작품들 가운데는 여전히 DVD와 블루레이, 그리고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접하기 쉽지 않은 것들도 꽤 있고 영화관에서의 관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추후 한국영상자료원과의 논의를 거쳐 비정기적으로 상영 프로그램을 꾸려 관객들에게 소개할 계획도 있다. ※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 리스트 (리뷰 연재는 본 리스트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질 예정임)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à commencé? 모리스 르메트르 Maurice Lemaitre / 1951년 / 프랑스 요정의 빛 Nymphlight 조셉 코넬 Joseph Cornell / 1957년 / 미국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 렌 라이 Len Lye / 1958~1979 / 미국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피터 쿠벨카 Peter Kubelka / 1960년 / 오스트리아 천상과 지상의 마법 Heaven and Earth Magic 해리 스미스 Harry Smith / 1962년 / 미국 노트북 Notebook 마리 멘켄 Marie Menken / 1940~1962년 / 미국 영화를 위한 선 Zen for Film 백남준 Nam June Paik / 1964년 / 미국 순열 Permutations 존 휘트니 John Whitney / 1966년 / 미국 찢어진 오른쪽 눈을 위하여 For the Damaged Right Eye 마츠모토 도시오 Matsumoto Toshio / 1968년 / 일본 생필름 Rohfilm 비르기트 하인 Birgit Hein & 빌헬름 하인 Wilhelm Hein / 1968년 / 독일 손 Hand 유현목 Yoo Hyun Mok / 1967년 / 한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 Tom, Tom, the Piper’s Son 켄 제이콥스 Ken Jacobs / 1969년 / 미국 24분의 1초의 의미 The Meaning of 1/24' 김구림 Kim Ku-lim / 1969년 / 한국 한글 Korean Alphabet 김인태 Kim In Tae / 1967년 / 캐나다 도색영화 Blue Movie 앤디 워홀 Andy Warhol / 1969년 / 미국 월든 Walden 조나스 메카스 Jonas Mekas / 1969년 / 미국 초른의 보조정리 Zorns Lemma 홀리스 프램튼 Hollis Frampton / 1970년 / 미국 자신의 눈으로 보는 행위 The Act of Seeing with One’s Own Eyes 스탠 브래키지 Stan Brakhage / 1971년 / 미국 퀵 빌리 Quick Billy 브루스 베일리 Bruce Baillie / 1971년 / 미국 중심구역 La Region Centrale 마이클 스노우 Michale Snow / 1971년 / 캐나다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 안소니 맥콜 Anthony McCall / 1973년 / 영국 룸 필름 Room Film 피터 기달 Peter Gidal / 1973년 / 영국 거울을 든 사람 Man with Mirror 가이 셔윈 Guy Sherwin / 1976년 / 영국 드림랜드로 향하는 5분 10초 Take the 5:10 to Dreamland 브루스 코너 Bruce Conner / 1976년 / 미국 원 웨이 부기 우기 / 27년 후 One Way Boogie Woogie / 27 Years Later 제임스 베닝 James Benning / 1977년/2005년 / 미국 천사 L’ange 파트릭 보카노프스키 Patrick Bokanowski / 1982년 / 프랑스 ABCD 록스리 Roxlee / 1985년 / 필리핀 화염 속의 도시 City in Flames 슈멜츠다힌 Schmelzdahin (요헨 뮐러 Jochen Muller, 요헨 렘페르트 Jochen Lempert, 위르겐 레블레 Jurgen Reble) / 1984년 / 독일 극지에서 적도까지 From the Pole to the Equator 안젤라 리치 루키 Angela Ricci Lucchi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Yervant Gianikian / 1986년 / 이탈리아 30 X 30 장 페이리 Zhang Peili / 1988년 / 중국 미디어 매지카 Media Magica 베르너 네케스 Werner Nekes / 1986년 / 독일 외부공간 Outer Space 피터 체르카스키 Peter Tscherkassky / 1999년 / 오스트리아 더블 타이드 Double Tide 샤론 록하르트 Sharon Lockhart / 2009년 / 미국 데카지아 Decasia 빌 모리슨 Bill Morrison / 2002년 / 미국 안더스, 몰루시아 Differently, Molousia 니콜라 레 Nicholas Rey / 2012년 / 프랑스
2013년 여름, 급하게 써낸 트리트먼트가 운 좋게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CJ E&M이 공동 주관하는 산학협력프로젝트 2기 개발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한창 상업영화 현장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는 중이었지만, 이창동 감독님께서 기획총괄에 시나리오 멘토로 참여하시는 과정이라 어떻게든 병행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던 순간도 문득 떠오른다. 드디어 모임 첫날, 나와 함께 뽑힌 3명의 동기들과 함께 설렘과 기쁨에 잔뜩 들떠 감독님을 기다렸고, 조금 늦게 오신 감독님은 우리가 제출했던 트리트먼트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세심하고도 날카로운 피드백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 작품에 이르러서는, 아주 짧고 굵은 한 방만을 날리셨다. “이야기가 너무 가짜 같지 않니? 핵심만 남기고 처음부터 다시 써봐. 진짜를 찾아봐.” 충격이 너무 커서 창피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난 그 후 한 달 넘게 글은 한 자도 쓰지도 못했고, 그저 멘붕 속에서 방황하며 그간 억지로 피해왔던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당시 내가 썼던 이야기는 서사적인 재미와 자극을 준답시고 소화도 못 하는 여러 장르와 장식들을 그저 전시하는 수준이었는데, 나 스스로도 왠지 모르게 이야기가 붕 뜨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고민하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이후 다시 간신히 마음을 붙잡은 나는, 8개월의 시나리오 개발 기간 동안, 대체 내 이야기 속에 ‘진짜’가 있긴 한 건지, 정말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이었는지를 끝없이 자문하며, 새로 쓰고, 엎고, 또다시 쓰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이듬해 최종 제작지원작에 당선되고 나서도, 예상보다 훨씬 줄어든 예산에 맞추느라, 또다시 ‘진짜 중의 진짜’와 ‘핵심 중의 핵심’만 남기는 수정을 감행해야 했다. 그렇게 2년이 넘는 시나리오 작업 기간 동안, 이야기 속 사건을 확장하는 대신 인물의 감정을 깊이 파고들려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쩐지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고 평이해졌다. 그래서 한편 또 다른 걱정이 들고,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아이들이 주인공인데, 이야기가 너무 작고, 유치하고, 사사로워 보이는 건 아닐까. 하지만 긴긴 고민 끝에, 결국 내가 그토록 영화로 드러내고 싶었던 세계가, 바로 그런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들이 오가는 평범한 아이들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세계에서, 같은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솔직히 직면하게 되었다. 인정하고 나니 편해졌달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깐 되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달까. 그다음부터는, 그냥 그런 나 자신을 믿어주기로 결심했고, 에라 모르겠다, 내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가장 큰 행운이 찾아왔다. 초짜 감독인 나와 이런 작은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고 큰 힘을 실어주는 영화사와 스태프들을 만난 것이다. 특히 조감독을 맡아주었던 나의 절친 슬기와 민준원 , 김지현 촬영감독님은 이후 계속된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서도 늘 아낌없이 거침없는 조언을 해주었고, 스크립터 유라와 연출부 리아는 때때로 나 자신보다 더 나를 믿고 진심으로 격려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엔딩 신은 촬영 전날까지 붙들고 고민하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는데, 그런 미친 나를 대체 무슨 마음으로 다들 지켜보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줄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다들 나만큼이나 이상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시나리오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힘을 쏟은 작업은 캐스팅과 리허설이었다. 사실은 2014년 중순에 작품을 준비하다 중단했으므로, 전체적으로 대략 8개월을 캐스팅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동안, 영화사 아토의 김순모 제작 PD님이 나와 함께 직접 발로 뛰며 아역배우들을 찾았고, 직접 프로필을 받고, 직접 연락해, 방방곡곡 아역배우들을 만나러 다녔다. 사실 나는 이런 발로 뛰는 캐스팅 과정을 굉장히 좋아해서 프리 작업 중 가장 설레고 신나는 순간들이었는데(사실 예산이 없어 이 일을 맡길 다른 스태프도 없었다), 제작 PD님은 그 바쁜 와중에 그 모든 과정에 어떻게 참여하실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오디션은 우선 배우와 1:1로 만나, 30분가량을 일상에 관한 잡담만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차에서 추려진 배우들을 대여섯 명의 그룹으로 묶어, 2-3시간 동안 일종의 ‘연극놀이’ 오디션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나와 연출부들은 ‘선생님’으로 참여해 배우들을 이끌었고, 함께 간단한 게임부터, 몸풀기, 재연극, 즉흥극, 그리고 미리 준 대본을 바탕으로 한 상황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촬영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드디어 ‘선’의 최수인 , ‘지아’의 설혜인 , ‘보라’의 이서연 , 그리고 보라의 두 친구를 맡은 김채연 , 김희준 배우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들>의 촬영 현장 이후 리허설을 진행하며 아역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텍스트에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서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생생한 연기를 펼쳐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역할인지, 어떤 감정을 연기할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연기경험이 없는 어린 배우들을 불안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특히 연기 중에 진짜 마음이 다치는 일은 절대 없게 하는 게 제1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뭇 상반돼 보이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 고민이 있었고, 늘 조언을 구하던 연극놀이 선생님을 초빙해 특별 세미나부터 열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체 연기가 뭔지,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에서부터, 각자 일상에 겪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걱정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때의 이야기들은 아직도 우리들만의 비밀로 남아있다!) 이렇게 나와 배우가, 또 배우와 배우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믿고, 의지하게 된 다음 최대한의 리허설 시간을 확보해 시나리오의 모든 신을 즉흥극으로 풀어보는 과정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내가 시나리오 속 상황을 직접 설명하고 필요한 대사를 알려주면, 배우들이 그 상황에 몰입해 자신만의 언어와 몸짓으로 그것들을 표현해보는 연습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며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새로운 디테일들을 찾아내기도 했고, 인위적이고 불편한 부분들은 함께 고민해 수정해나갔다. 확실히 배우들과 직접 이야기하며 함께 장면을 만들어 가면서 비로소 명확히 보이는 지점들이 있었다. 또한 콘티작업도 리허설을 관찰하며 병행했기 때문에, 그만큼 촬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대비를 해나갈 수 있었다. 단편 <손님> 때부터 함께해온 김세훈 라인 PD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지만, 특히 로케이션계의 황금손이었다. 때로는 감독보다 더 예민하게 시나리오를 분석해 여러 조건들을 따졌고, 직접 발로 뛰어 끝끝내 장소를 섭외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한편 영화 속 선의 집으로 나온 연립주택은 사실 재개발 지역의 빈집이었는데, 안지혜 미술감독이 집 내부에 가벽까지 세우면서 가구와 소품들을 채워 넣어, 마치 선네 가족이 평생 살아온 집처럼 보이는 마술을 부리기도 했다. 내가 콘티와 배우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스탭들은 각자 초저예산과 싸우며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여러 조건들을 가능한 것으로, 더 좋은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7-8월의 무더운 한여름 동안, 1억5천의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무려 30회차의 기염을 토하며 < 우리들 >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찍어나갔다. 촬영 내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기적을 만났다. 교육청의 도움으로 학교 섭외가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린 배우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챙겨주는 스태프들(특히 이시현 조명감독과 강나루 동시기사, 김동위 미술팀장은 모든 배우 친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현장의 아이돌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배우들은 더위와 피로와 나의 잔소리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을 만난 것, 회차 때는 쨍하다가 휴차 때만 비가 온 것, 깊이 몰입한 배우들이 시나리오에 없던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낸 것 등, 지금 꼽으래도 3박 4일은 이야기해도 모자랄 기적들이 가득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난 만큼 충격과 공포의 순간도 많았다. 나는 촬영 5회차 만에 현장을 뛰어다니다 발가락이 부러져 내내 깁스를 하고 다녔고, 더위를 먹은 어린 배우들이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급기야 토하기도 해 촬영이 중단된 적도 있다. 또 우리는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담아내기 위해 한 번에 5분가량의 롱테이크를 소화해야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촬영감독님들과 붐맨의 팔과 어깨는 매번 부서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촬영 말미엔 촬영감독님이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혼자 조용히 심각한 건강 검진을 받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매일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엎고 메고 다니다 생긴 산업재해로 밝혀졌다. 게다가 30여 명의 4-6학년 초등생을 10회차 가까이 매일 상대해야 했던 연출부 친구들의 정신건강은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 (내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매일 자신의 인내심과 피로도의 수치를 새롭게 갱신하는 작업이다. 사실 우리 연출부들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천사 같은 친구들이었는데, 어쩌면 바로 이번 촬영을 통해 평생 절대로 아이를 낳지 말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후반 작업 역시 천국과 지옥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번 작품은 즉흥적으로 연기한 장면이 많았고, 대사도 넘쳐났으며, 온전히 감정으로 진행되는 서사였기 때문에 더더욱 편집이 중요했다. 만약 박세영 편집감독(우리는 단편 <손님> 때도 합을 맞췄다!)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소스를 함께 세심하게 훑고, 조각내면서, 그야말로 장면을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는 주말도 반납한 채 장장 3개월을 볕도 들지 않는 편집실에 몽땅 쏟아부었다. 특히 많은 대사를 잘라내고 압축하는 과정에서, 사운드까지 아주 미세하게 편집해야 했는데, 때론 음절 단위로 대사를 조각내서 이어 붙일 정도였다. 덕분에 진도가 느려 때론 하루에 한 신을 편집하고 탈진해 앓아눕기도 했지만, 어떻든 반쪽이라도 완성하고 나면 또 묘하게 쾌감이 일어 종일 신나하기도 했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강박적으로 편집을 하다가는, 결국 둘 다 편집증에 걸리고 말 거야!”라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종종 주고받았는데, 사실 둘 다 진짜 그렇게 되고 있는 거 아닌지 몰래 서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단편 < 콩나물 >부터 함께 했던 고아영 믹싱감독은 주인공 소녀의 깊은 감정들을 ‘호흡’을 통해 드러내려는 계획이 있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까 반신반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함께했던 경험으로 믹싱감독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결국 최수인 배우는 장장 이틀에 걸쳐 영화 전체, 모든 장면의 호흡을 재연하는 녹음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중에 전체 믹싱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그 자연스럽고도 디테일한 표현에 무릎을 탁 칠 수 있었다. 한편, 연리목 음악감독의 스코어는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아이들의 호흡과 목소리, 공간의 앰비언스 안으로 녹아들었다. 애초에 나는 메인 악기로 기타를 원했는데, 연리목의 적극적인 주장에 피아노곡을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가 바로 설득당해버리고 말았다. 감정을 억지로 과장하거나 일부러 고양시키지 않으면서도, 다만 그 자체로 감정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놀라운 음악이었다. 나의 애매한 주문에도 이렇듯 멋진 음악을 만들어준 연리목에 아직까지도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영화를 쓰고, 찍고, 완성해 어느덧 개봉을 앞두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동안 그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는 것에만 무식하게 덤벼들었지, 정작 ‘개봉’이란 과정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또 이렇게 닥쳐서 헐레벌떡 개봉준비를 하면서야, 영화산업에 대해 간신히 하나둘 배우고 있다. 결국 관객을 만나야지만, 그 긴긴 시간 멋진 사람들과 꽃 같은 시간을 바쳐 만든 이 무언가가 비로소 ‘영화’가 된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이제야 매일매일 새롭게 깨닫는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이제 개봉까지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까지도 내가 정말 진짜를 쓴 건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을 잘 담아 찍어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여러 가지 착각과 잘못된 판단, 실수로 인해 빚어진 오류만 눈에 보이는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갖은 부끄러움과 후회가 치고 올라 매일 밤 몰래 훌쩍 도망쳐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론, 나 혼자라면 절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모든 여정에 진심을 담아 함께 달려와 준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라 어떻든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벌써 이 영화가 완전히 내 손을 떠났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남은 건, 오로지 관객분들의 평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결과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두렵고 또 두렵지만, 그래도 뭔가 배우는 과정은 되겠지. 그래 뭐, 잘 배워서 다음 영화 때 잘 하면 되지 뭐! 하면서, 다시 출발선에 서있는 나를 매일 매일 달래는 중이다.
취업준비생으로 만화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영식은 언제나 바다 여행을 꿈꾸지만 현실은 만화카페 사장으로부터 휴가 때도 나와 일하라는 요청(을 가장한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우울한 20대다. 어느 날 축지법과 비행술을 가르쳐준다는 학원 간판을 발견하고 이곳에 들어간다. 어쩐지 수상한 ‘사부’( 오달수 )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몸이 무거우면 날 수 없듯, 수강료가 무거우면 날 수 없으니 깎아주겠다”는 말에 이곳에 드나들며 축지법을 수련하기 시작한다. 관객들 모두가 이 허름한 학원의 초라한 사부가 사기꾼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우보법, 호보법, 용보법, 운보법 등의 용어를 주워섬기지만 이 또한 아마도 무협지깨나 읽었다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단전을 통한 호흡이 중요하다는 가르침 역시 무협지를 몰라도 누구나 짐작 가능한 부분. 우리의 주인공인 영식 역시 사부가 가르쳐 준다는 축지법과 비행술이 진짜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가 피 같은 아르바이트비를 털어 이곳에 등록한 이유는, 아마도 도피처와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무협지나 만화를 탐닉하고, 누군가는 TV 드라마에, 또 누군가는 와우나 그 밖의 온라인 게임에 빠지는 것처럼. 영화의 초반, 사장의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며 우물거렸던 영식은 이 학원에 드나들고 사부와 교분을 나누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래도 무언가 몰두할 거리를 얻는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호흡법을 연습하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겨우겨우, 아주 소심하게나마, 사장의 요청을 거절한다. 물론 우리는 이후 영식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이 예상은 그리 빗나가지 않는다. < 축지법과 비행술 >이 기술적으로 아주 뛰어나고 참신한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하긴 어렵다. 앵글과 컷의 연결은 종종 서투르고 매끄럽지 못하며, 이야기의 전개 역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을 그리 넘어서지 않는다. 심지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장면의 비상 역시도 이런 류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기대 가능한 무엇이다. 그럼에도 이 ‘뻔한’ 비상이, 그리고 그때 내레이션으로 다시 반복되는 ‘사부’의 가르침이 위안과 해방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너도나도 믿지 못하는 그 뻔한 속삭임이,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CG가 동원된 이 장면에서 나는 감독의 어떤 간절함이 화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배 세대로부터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으나 스스로는 ‘잉여’라 자조적으로 일컬는 청춘들에게, 또래 세대인 감독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우리, 힘내자!”며 건네는 작은 위로라고나 할까. 그 위안이 ‘축지법과 비행술’이라니, 이것은 또한 얼마나 고약한 농담이자 자조인가, 싶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