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밀밭과 구름 낀 하늘
- 감독
- 조반니 피스칼리아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
신상옥 감독은 동경미술학교 출신이다. 그의 작품이 유난히 미술적인 매력에 주목하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닐 테다. 화가가 주인공인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반 고흐의 꽃을 닮은 독특한 오프닝 크레딧의 < 자매의 화원 >(1959), 꿈을 꾸는 듯한 몽환적인 장면이 인상적인 < 벙어리 삼룡 >(1964), 또는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암시로서의 마을 전체 풍경의 묘사 등은 신상옥의 미술 취향을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1950년대 후반 신상옥의 멜로드라마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 동심초 >(1959)도 전체 마을을 묘사한 첫 화면부터 미술적인 매력을 압도적으로 보여준다. 롱숏으로 잡은 서울의 어느 마을 풍경인데, 마치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인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20)의 불안한 도시를 보는 듯하다. 비탈진 산의 정상 부근엔 하늘로 치솟은 교회 탑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전통의 존재와 서구 문명의 유입 사이의 불균형이 기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데, < 동심초 >는 그런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 멜로드라마이다. 숙희( 최은희 )는 1950년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캐릭터인 전쟁미망인이다. 대학생 딸( 엄앵란 )과 함께 살며, 작은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다. 출판사 간부인 상규( 김진규 )의 도움으로 겨우 양장점을 꾸리고 있는데, 사실 그와는 비밀리에 사랑도 키워왔다. 하지만 숙희는 남들의 눈이 무서워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상규라고 별로 나을 것도 없다. 이미 약혼녀( 도금봉 )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숙희가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 동심초 >가 개봉될 당시는 더글러스 서크의 소위 ‘최루성 멜로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관객의 눈물을 자극할 때였다. 이를테면 < 순정에 맺은 사랑 All That Heaven Allows>(1955)에서 보듯 서구에서도 미망인이 사랑을 하는 것은 여전히 ‘주홍 글씨’의 일탈이었다. 상규의 친구( 김석훈 )는 물론이고, 자신도 미망인인 상규의 누나( 주증녀 )도 두 사람의 관계는 중단하는 게 옳다고 충고한다. 말하자면 전통의 명령을 따르는 게 순리라는 입장이다. 상규와 숙희의 관계를 지지하는 유일한 인물이 숙희의 딸인 ‘대학생’이다. 곧 당대 소수의견의 대변자이자 새로운 문명의 학습자이다. < 동심초 >는 이 두 진영, 곧 구질서와 신질서의 길항관계를 꾸준히 비교하며 극의 긴장을 끌어가고 있다. 상규와 숙희가 한 번쯤은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육체적 표현도 서슴지 말았으면 하는 순간에도 화면은 두 사람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영화도 사회적 평판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용하는 게 ‘꿈’의 장치다. < 벙어리 삼룡 >에서 말했듯, 꿈은 신상옥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종종 쓰는 모티브다. 숙희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상규는 그곳까지 따라갔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도착한 그 날 밤, 숙희가 숙소를 찾아와 두 사람은 달빛 아래의 들판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역시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같은 들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상규는 숙희를 간절하게 끌어안는다. 바람에 몹시 일렁이는 풀처럼 두 사람의 마음은 흔들리고, 관객의 마음도 흥분된다. 상규가 아침에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말이다. 신상옥 감독은 이 장면을 루이스 부뉴엘의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꿈이라고 예고하는 장치를 전혀 쓰지 않고, 느닷없이 보여준다. 사실처럼 봤는데, 꿈으로 밝혀진 표현법이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사실상 누구의 편을 드는지 다 보여주고, 통념의 비판은 지혜롭게 피해간 것이다. < 동심초 >가 발표될 당시는 신상옥 - 최은희 커플과 홍성기 - 김지미 커플이 본격적으로 경쟁을 벌일 때였다. 두 진영은 멜로드라마를 만들며 서로 힘을 겨뤘고,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 영화의 미학도 발전했다. 홍성기 감독은 김지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 별아 내 가슴에 >(1958), < 산 넘어 바다 건너 >(1958) 등을 내놓았다. 두 진영의 경쟁은 < 춘향전 >(홍성기)과 < 성춘향 >(신상옥)이 발표되는 1961년에 절정을 맞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술적 매력이 돋보였던 신상옥 의 작품 속에 초현실주의적인 요소까지 끌어와, 멜로드라마의 표현법을 확장한 작품이 < 동심초 >이다. 곧이어 신상옥은 < 자매의 화원 >, < 이 생명 다하도록 >(1960) 등 자신의 멜로드라마 대표작들을 연이어 발표한다. 어느덧 신상옥은 멜로드라마 감독으로서의 명성도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술가는 종종 남다른 전기적 사실로 자신의 예술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반 고흐처럼 자살하고, 슈베르트처럼 병사하고, 파졸리니처럼 타살되고···. 그 명단은 제법 길게 이어질 수 있다. 잔인한 운명에 내몰린 이들의 공통점은 통념에 역류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 영화계에서 그런 특별한 전기적 사실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 신상옥 이다. 냉전시대에 남북한을 통과한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될 듯하다. 납북(?), 탈북, 미국망명, 귀국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자기 의지 너머의 운명의 명령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신상옥 감독에의 관심은 우선 이런 전기적 사실의 특별함에서 시작됐다. 통념을 무시하는, 혹은 비웃고 넘어서려는 듯한 태도와 행동에서 보이는 이탈과 도전의 비장함이 그의 영화에는 새겨져 있다. 그런 태도를 한 눈에 알게 하는 작품이 < 지옥화 >(1958)이다. 동아시아의 지역성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영화의 흐름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열정이 되어 관객까지 감염시킬 정도다. 사실 당시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인과율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때였는데, <지옥화>는 단숨에 동시대의 표현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를 볼 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 라쇼몽 >(1950)이 떠오른다. 일본영화의 전통에 서양영화의 역동성을 끌어들인 획기적인 시도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 지옥화 >는 갱스터 장르와 필름 누아르, 그리고 멜로드라마의 특성까지 버무려 놓았다. 한탕을 노려 성공하려는 시골 출신 건달 영식( 김학 )이 시커먼 뻘밭에서 최후를 맞이하고(갱스터), 그의 운명을 시궁창에 빠뜨린 팜므 파탈 소냐( 최은희 )의 치명적인 매혹이 있고(필름 누아르), 그리고 형 영식의 탈선을 막고 그를 가족의 품으로 데려가려는 동생 동식( 조해원 )의 애절함이 있다(멜로드라마). 신상옥 감독은 동경예술학교(동경예대의 전신)에서 미술을 전공한 탓인지, 미장센의 아름다움과 남다름을 담아내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몇 개의 뛰어난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의 미덕은 오래 남을 것 같다. 먼저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를 보는 듯한 미군부대 클럽의 춤 장면이 있다. 기지촌의 소위 양공주들과 미군들이 한데 엉켜 있고, 무대 위에서는 무희들이 선정적인 춤을 추고 있다. 나이트클럽 같은 이런 장면은 범죄와 욕망이 뒤엉키는 누아르 특유의 클리셰인데, 한국영화에서 퇴폐적인 춤동작을 이렇게 어른스럽게 표현한 경우는 지금도 대단히 드물다. 그리고 뭐랄까, 이 장면은 앙드레 바쟁이 말하는 리얼리즘의 정수처럼 보인다. 영화의 허구적 재현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제시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로셀리니가 이 장면을 본다면, 자신과 미학적 입장을 공유한 동양의 한 감독에게 반가움을 느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갱스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추적 장면의 묘사도 압권이다. 기차, 트럭, 그리고 지프들이 함께 달리고, 이를 트래킹으로 찍은 모습은 서양영화의 형식적 완성도에 뒤지지 않으려는 청년 신상옥 (당시 32살)의 안간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 부분이 특히 < 라쇼몽 >과 비교된다. 도입부에서 나무꾼이 산을 오를 때의 역동적인 트래킹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종결부도 갱스터 장르의 전형을 이용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문법에 따르면 사회의 제도를 무시한 갱스터들은 결국 비참한 죽음으로 처벌 받는다. 그래서 밤에 비오는 더러운 뒷골목에서 갱스터 주인공이 개처럼 죽는 게 윌리엄 웰먼의 < 공공의 적 >(1931) 이후 하나의 관습이 됐다. < 지옥화 >는 갱스터의 종말을 뻘밭에서 진행한다. 시커먼 뻘이 얼굴을 뒤덮고 온몸을 더럽힐 때, 처벌로서의 죽음의 순간이 함께 오는 것은 '지옥'을 생생하게 현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뻘밭에서의 갱스터 영식과 팜므 파탈 소냐의 최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동생 동식과의 주먹다짐 등은 우연스럽게도 2년 후에 공개된 루키노 비스콘티의 < 로코와 그의 형제들 >(1960)을 예견케 한다. 팜므파탈로 인한 형제살해의 위협과 근친상간이라는 멜로드라마적 테마까지, 두 영화는 유사점이 많고, 그래서 종결부는 더 없이 풍부한 독해의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 지옥화 >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와 경쟁하려했던 한 열혈청년의 도전의 결과이다. 그 열정이 얼마나 순수한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옥화>는 점점 더 사랑 받고, 평가 받는 작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