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발레리나
- 감독
- 양성준
- 제작년도
- 2008
< 모어 >는 무용수, 드랙퀸 예술가, 뮤지컬 배우,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인 모지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 ‘모어’는 모지민의 예명으로 ‘more(조금 더)’와 ‘毛漁(털 난 물고기)’를 함의한다. ‘more’는 화려하고 과잉된 드랙퀸 미학을 지시할 수도 있지만, 트랜스젠더인 그를 향한 사회의 잔인한 편견에 의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꿈과 욕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육지에서도 물에서도 이질적인 ‘털 난 물고기’처럼 관습적으로 주어진 자리를 넘어서 그 이상의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선 비규범적 존재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털 난 물고기’에게 ‘털’이 살아가는 데 무슨 소용이냐고 존재 이유를 따져 물으며 괴롭히지만, 모지민은 오히려 그 털의 움직임과 방향, 그리고 길이와 색을 다양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실천해오고 있다. 영화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발레의 길에서 이탈한, 그럼에도 예술가로서 살아남은 모지민의 삶을 예찬한다. 발레 전공으로 예고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발레리노가 아닌 발레리나가 되고 싶던 모지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 길에서 이탈한다. 여성성을 버리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무용계에서 모지민은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레리나라는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세상은 그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드랙퀸 공연은 그 대체제였다. 그래서 드랙퀸 공연은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그가 발레리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비극, 그럼에도 춤과 공연이라는 예술적이고 신체적인 표현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환희의 무대, 그리고 클럽에 놀러 온 관중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엔터테이너로서 감정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노고. 그에게 드랙퀸 공연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영화 <모어>는 드랙퀸으로서의 모지민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클럽에서 드랙퀸 공연을 하고, 뮤지컬 오디션을 보고, 애인에 대한 애정과 소소한 갈등을 드러내고, 농촌지역에 사는 부모님을 방문하는 등 모지민의 일상이 스케치 되는 가운데 화려한 쇼가 계속된다. ‘쇼는 계속 된다’는 뮤지컬 장르의 정언명령에 의해서 말이다. 서울과 뉴욕 같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부모님의 살고 계시는 고향의 논밭 사이에서, 아버지가 운전하는 경운기 위에서, 황량한 항구에서,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그는 화려한 분장과 의상을 더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드랙퀸은 기본적으로 과잉의 미학이다. 여성성의 인위적 과장은 기존 사회에서 규범화된 여성성이 원래 얼마나 과장되고 인위적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해진 자리와 규범을 초과하는 일탈의 쾌락을 공유하고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전시한다. 드랙퀸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무언가를 ‘더(more)’ 덧붙이는 방식으로 모지민을 보여준다. <모어>는 미국의 드랙 리얼리티 경연쇼 <루폴의 드랙 레이스>(2009~현재)나 드랙 문화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포즈>(2018~2021)에 나올 법한 프로페셔널하고 미학적인 드랙 공연을 삽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과장되고 장식적인 아름다운 드랙쇼 만큼이나 집중할 것은 덧붙이기보다는 덜어냄을 통해 만들어내는 공연과 마음들이다. 영화는 자주 삽입되는 야외 공간에서의 드랙쇼 외에 실내의 어두운 무대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모지민의 공연을 길게 보여준다. 이 공연에서 모지민은 어떤 분장이나 의상도 없이 춤을 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모지민이 큰 갈등과 어려움 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냈다고 과거를 기억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어른들은 알 수 없거나 눈치 채도 크게 의미두지 않았던 따돌림과 폭력이 있었다. 나체로 춤을 추는 한 장면에서 모지민의 뒤로 중학교 시절 친구로 은유되는 댄서가 어둠 속에서 등장해 그의 목을 조른다. 그는 강렬한 분장을 하고 있다. 어른들이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면에는 어린 모지민의 혼란, 고통, 분노, 좌절이 공존했다. 영화는 그가 감당했어야 할 어두운 이면이 무엇이었는지 깊고 상세하기 묘사하기 보다는 춤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사실 비수술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모지민은 자신의 신체가 표현하는 주체이자 오브제이기도한 예술가로서 자신과 세계와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과 장식을 덜어내고 어두운 이면을 보여줄 것을 선택한다. 더함과 덜어냄, 넘침과 모자람, 화려함과 단순함 모두 모지민이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고 인위적이고 과장된 독백의 내레이션과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내레이션이 교차해 나오지만 둘 모두 모지민의 목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분명 뮤지컬적인 드랙의 화려한 스펙터클에 매혹되어있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동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동시에 모지민이라는 예술가가 표현하고 싶은 어둡고 미니멀한 춤과 침잠되어 있던 마음을 표현할 자유로운 무대를 펼쳐주기도 한다. 극단의 표현들은 대립적이지 않고 서로를 밀고 당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스크린과 다 보여줄 수 없는 스크린 밖 현실이 그 경계를 끊임없이 이동시킨다. 감독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모지민은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큐멘터리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극영화보다 얇고 투과성도 높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완성된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현실을 변화시키는 식의 일방향으로만 힘이 흐르지는 않는다. <모어>는 영화와 현실, 보고 싶은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 보여줄 만한 것과 끝끝내 보여주지 못한 것 사이의 얇은 경계막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열되고 움직이고 있는 현장을 포착해 낸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1. 미셸 푸코가 이야기했듯이, 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다. 몸은 감각의 원천이자 세상을 받아들이는 영도(point zero)의 장소 그리고 ‘나’라는 환영이 생성되는 물리적 공간이다. 동시에 몸은 내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흔적들로 내 앞에 나타난다. 몹쓸 주름과 벗겨지는 머리, 못생긴 코. 현존하는 몸과 내가 상상하는 몸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존재하며,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몸을 가꾸거나 다른 몸을 꿈꾸거나 혹은 몸을 넘어서는 영혼과 같은 무언가를 소환한다. 이런 방식으로 순화되고 훈육되어 규범화된 몸과 달리, 퀴어한 몸들은 그 간격을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 현존하는 몸과 상상된 몸, 그리고 그사이를 길항하는 가치와 규범, 욕망과 불안은 안전하게 봉합되지 못한 채 몸을 구성하는 물질적, 비물질적인 네트워크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성애중심주의의 규범 바깥의 몸이라는 맥락에서, 퀴어한 몸은 성적 주체의 불안과 공포를 현시하는 철창으로 재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그 철창 바깥으로 몸을 탈출시킬 수 있는 역능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가 환기하는 것은 결국 온전히 자유롭게 사유 되고 경험될 수 있는 몸이라는 상상력이다. 2. 라라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10대 소녀다. 여느 10대 소녀와 마찬가지로 라라 역시 집에서 간단히 옷핀으로 귀를 뚫어버리는 성마르고 조급한 소녀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한 발레지만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한 집념은 누구보다 강하다.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 뒤에는 열정 못지않은 끈기와 성실함이 있다. 라라가 다른 소녀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다리 사이에 달린 자지뿐이다. 가끔은 귀찮게스리 아침이면 커져 있기도 한 자지는 라라의 제일 큰 골칫거리다. 발레 수업을 위해서 매일같이 그녀는 강력테이프로 자지를 다리 사이에 단단히 고정한다. 그래서 그 주변은 출혈을 동반하는 상처가 나기 일쑤다. 라라의 가족은 그 누구보다 라라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차근차근 밟고 있는 그녀의 성전환수술 준비를 함께 한다.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뒤쳐져 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라라는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도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라라는 빨리 실력을 키워 프리마돈나가 되고 싶은 것만큼이나 얼른 이 귀찮은 자지를 없애고 싶다. 루카스 돈트의 < 걸 Girl >은 < 나의 장미빛 인생 My life in pink >(1997)이나 < 톰보이 Tomboy >(2011)같은 영화들과는 달리 수술 전(pre-op) 트랜스젠더의 외부와의 갈등과 이성애 규범적 폭력, 혹은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윤리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보다 영화는 의지와 희망, 집착과 불안 같은 라라의 내면과 그녀의 몸이 맺고 있는 역동적인 관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조직하는 어떤 논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덴 형제의 관찰적 자연주의를 떠올리는 영화의 카메라는 라라의 얼굴과 몸을 그녀의 환경 안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다양한 내적 긴장의 순간을 담아내는 고전적인 핸드헬드로 그녀의 불안한 심경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돈트의 카메라는 춤을 추는 라라의 몸을 보여줄 때 가장 빛을 발하는데, 요동치는 그녀의 내면과 발레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정교하게 계획된 자연스러운 촬영을 통해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관통하는 것은 ‘바라보임(to-be-looked-at-ness)’에 대한 라라의 반응이다. 트랜스젠더 주체에게 있어 자신이 바라보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은 불안을 야기하는데, 이는 자신이 자신의 젠더로 바라보여지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라는 패싱(passing)의 문제에 기인한다. 트랜스젠더 주인공을 다루는 대부분 영화들의 서사적 긴장은 이 패싱이 실패했을 때 규범적 사회가 자행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주체의 좌절에서 발생한다. 한편 <걸>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라라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의 주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통제와 자각이라는 긴장 상태에 놓인 라라를 계속 함께 보여준다. 이 시선이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관심을 패싱이라는 규범적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에 대한 라라의 관찰, 집착, 태도와 같은 반응에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네가 우리의 벗은 몸을 보았으니 너의 몸도 우리에게 보여줘’라며 짓궂게 그녀를 몰아세우는 친구들 앞에서 곤란해하거나, 라라가 타인들과 함께하는 많은 순간 영화는 그 안에 놓여 불안한 듯 시선을 떨구거나 어딘가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라라의 모습을 담아내며 이러한 라라의 불안한 시선은 곧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 마주한다. 이 관음적이지 않은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라라와 그녀의 몸 그리고 그녀의 몸이 처해있는 상황들과 그녀의 반응에 매 순간 적극적으로 그리고 성찰적으로 반응하게끔 한다. 3. 발레는 라라의 몸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치다. 극도로 엄격한 몸의 관리와 움직임을 통해 그 형식미를 획득하는 발레는 라라의 몸에 많은 훼손의 흔적을 남긴다. 발레리나의 서명과도 같은 붓고 무르고 찟겨지고 피 흘리는 발은 그 대표적인 신체 훼손의 이미지다. 이미 신체적 변화를 겪고 있는 청소녀 라라의 몸은 발레로 인한 극도의 통제와 고통, 몸과 마음의 젠더 불일치, 당혹스러운 성적 흥분 등 그녀의 욕망과 기원, 아름다움과 불쾌가 공존하며 경합하는 전장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전장의 주된 적으로 자지를 내세우는데 불편해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 등장하는 라라의 나체와,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라라의 최종선택 중간에는 자지가 있다. 대범하게도, 영화는 자지를 여느 신체의 부분과 다를 바 없지만 귀찮고 얼른 없애버리고 싶은 살덩이로 치부한다.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지에 긴 인류 문명 동안 남근 이미지가 보유해온 이성애 규범의 상징적 무게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누군가 <걸>이 라라의 젠더순응적인 태도나 혹은 자칫 성기 결정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서사의 흐름을 통해 성적 주체와 몸이 맺는 관계를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불평한다면, 그 시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라라가 발, 귀, 종아리, 자지, 엉덩이 등 그녀 몸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반응하고 감각하려 애쓰는 순간들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라라의 여정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녀가 ‘온전한 여성이 되기 위해 겪는 고군분투’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애적이지도 규범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은 몸의 다중성을 자각하는 그 순간들이다.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라라가 그렇게 없애고자 애를 썼던 쓸데없는 자지는 키코 고이프만과 클라우디아 프리실라의 다큐멘터리 <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Tranny fag >(2018)의 린 다 케브라다를 떠올린다. 수술 전 트랜스젠더 펑크 아티스트인 린의 이야기는 어두운 밤 브라질 뒷골목의 린과 “내 안의 무엇이 너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거야?”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공연과 라이오 토크쇼 형식, 영상 일기가 이어지는 75분의 러닝타임동안 린은 다양한 정체성, 감정, 규범, 가치들이 경합하는 적극적인 도전과 질문의 장소로서 자신의 몸을 제시한다. 섹스, 피부색, 게이성(gayness), 여성성, 마초, 항문 등 대담한 소재들로 풀어내는 린의 퍼포먼스는 유색인종으로서의 차별과 가난을 경험한 가족, 암 투병으로 인한 몸의 또 다른 자각을 들려주는 사적 고백이나 자지에 립스틱을 바르는 신체 유희 같은 행위와 병치 되면서 ‘자지 달린 여자’의 몸을 정치화한다. 젠더규범, 성기의 의미, 성별 정체성 등이 끊임없이 교란되고 도전받는 린의 몸은 퀴어 정치학을 교과서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이한 방식이지만,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몸이 이성애 규범이나 젠더 정체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도전하고 있는 라라와 린은 성적 관계들과 그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폭등한 나머지 또 다른 성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어떤 몸의 정치가 요구되는지의 고민으로 우리를 이끄는 주목해야할 여성들이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물건을 배달하는 꼬마 마녀의 성장이야기.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이렇게 한 줄 요약으로 충분할 만큼 가볍게 펼쳐지지만 또 그만큼이나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고사리손이 간질이듯 살며시 다가와 어린 시절 감성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날씨가 좋은 어느 보름날 밤, 열세 살이 되면 수행을 떠나야 하는 마녀들의 전통에 따라, 아직은 빵빵한 호박 팬티가 어울리는 이 사랑스럽고 어린 꼬마 마녀의 홀로서기가 시작된다. 빗자루를 타고 하얗고 둥근 달을 뛰어넘어 별 바다가 넘실대는 하늘 위를 날며, 발 아래론 갖가지 야경이 흐른다. 커다란 빨간 리본이 달린 머리끈에 까만 원피스를 팔랑대며, 새카만 고양이 지지와 짐 가방은 어깨에 둘렀다. 빗자루에 걸린 작은 라디오에서 쏟아지는 발랄한 음악이 밤하늘을 가른다. 상황에 잘 어우러지는 상큼한 음악들도 이 작품의 맛깔스러운 백미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복잡한 도시로 옮겨온 키키의 생활 반경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넓어진다. 번화한 도시의 삶 속에서, 잘 꾸미고 다니는 또래들이나 남자친구 그리고 소중한 것에 대한 다른 시선 등 색다른 환경들과 마주하며 우리의 작은 꼬마 마녀에게도 성장통이 찾아온다.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자신의 본질인 마녀의 피가 약해져서 비행능력은 소실되어 가고 급기야 마녀의 택급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몸이 자라며 옮겨 다니는 무게중심에 당황한 어린 발레리나처럼, 키키도 이러한 종류의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키키에게나 우리에게나 성장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전해 온다. 우리는 공감하고, 키키는 성장 그 자체에 대해 조금씩 배워가게 된다. < 마녀 배달부 키키 >(한국명)는 카도노 에이코 원작 소설 `마녀의 택급편` 이라는 일본아동문학소설을 애니화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럽풍 도시와, 초경이 시작되지 않은 순수한 여자아이 그리고 하늘이라는 소재는, 여타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에서 보여졌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편애할만한 요소를 대거 갖춘 듯 하다. 그래서 애니화 시키는데 별 망설임이 없었을 듯 짐작된다.(믿거나 말거나) 키키의 작은 성장은, 이야기의 절정을 달리며 부러진 옛 빗자루 대신 바닥 닦는 솔을 빌려 날아올라 위기를 해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고는 도시에서 얻은 새 브러쉬를 타고 더욱 능숙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의 자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일상들은 흘러간다. 우리도 그래왔듯이 그녀는 계속 성장해 갈 것이다. 여기까지의 애니메이션 내용은 1권 분량이며 원작은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을 조금 스포일링 하자면 자녀를 낳아 기르고 다시 마녀 수행을 떠나 보내는 기분 좋은 수미쌍관으로 마무리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되어 박스 세트로 판매되니 팬이라면 즐거이 읽어봄직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