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내리는 강호10년
- 감독
- 나치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서소강, 황행수, 황정리
‘남촌’이란 원래 서울의 남쪽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남산 왜성대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선 이후 그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지금의 충무로역 부근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거류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일본인 거류지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남촌의 범위도 확대됐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일반적으로 청계천이나 황금정길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을 남촌이라 불렀다. 남촌의 일본인 거류지에 언제 처음 극장이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 흥행업자가 19명이나 거주하고 있던 1902년 즈음에는 상설극장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경성 거주 일본인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극장 역시 증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성의 일본인 이주민의 수는 3만 8천명을 넘어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는 6만 6천명으로 러일전쟁 직후보다 6배 정도의 증가를 보였다. 1914년 당시 남촌의 일본인 상설영화관은 대정관(大正舘), 제2대정관, 황금관(黄金舘) 등 세 곳이었고, 수좌(寿座), 수관(寿舘), 어성좌(御城座) 등 몇 곳의 연극장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10년 이전 경성에 일본인 극장이 몇 개나 있었고, 이 극장들을 누가 어떻게 설립했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등의 전모를 알려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경성 거주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에 그러한 내용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이 중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에 대해서는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에 소략하게 설명되는데, 이에 따르면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인 거류지 중 수정(壽町) 3정목에 수좌, 남대문 밖에 어성좌(御成座), 욱정(旭町) 1정목에 가부키좌(歌舞伎座), 본정(本町) 2정목에 본정좌(本町座), 본정 7정목에 경성좌(京城座) 등 총 5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2. 수좌의 모습(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경성번창기』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당시 신문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1906년 11월 일본인 거류지인 본정 7정목에 송도좌(松嶋座)라는 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도좌는 1907년 2월 4일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당시 기사를 보면 건물은 2층 양옥으로 확인된다. 또한 화재 진압에 감사하는 신문 광고를 보면, 일본인 다니가와(谷川與一), 이치가와(市川熊太郞), 미즈노(水野庄太郞) 등이 송도좌와 관련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송도좌의 경우처럼 언제 처음 건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6년 무렵에는 확실히 일본인 거류지에 극장이 존재했다. 당시 경성의 일본인 거류지인 수정 2정목에는 경성좌가 있었다. 경성좌 역시 설립자나 운영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바, 대신 연설회 개최를 알리는 기사가 1906년 9월 《조선신문》에 실렸고 1907년에도 인천가부키좌에서 상연했던 연극을 경성좌로 옮겨 공연한다는 기사가 실리는 등 다양한 공연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1908년 8월 경성좌는 수정 2정목(본정 4정목)에서 본정 7정목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통 새로운 극장은 이전에 극장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경성좌는 화재로 사라진 송도좌 자리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의 충무로역 대한극장 건너편 옛 극동극장 부근이다. <단장록(斷腸錄)>, <금색야차(金色夜叉)> 등 유명한 신파 레파토리를 공연했던 경성좌는 1911년 3월 시설 낙후를 이유로 폐관되었다. 조선인들에게는 혁신단의 임성구가 일하며 신파 연극을 배운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강점 이전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는 곳은 경성가부키좌였다. 1907년 1월 5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개관한 경성가부키좌의 좌주는 이토(伊藤)라는 인물이었는데, 1910년 무렵의 좌주는 노구치(野口松五郞)였다. 건물주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기간을 두고 흥행업자에게 대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키공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의 대극장으로 다양한 흥행물 공연이나 활동사진 상영은 물론, 경성에 주재하던 일본인들의 각종 행사까지도 치룰 수 있는 장소가 경성가부키좌였다. 1911년 8월 26일에는 ‘키네오라마’라는 장치를 설치하여 극장의 설비를 강화하는 등 경성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던 경성가부키좌는 1912년 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경성의 다른 유서 깊은 극장으로는 판본좌(坂本座)와 그의 후신인 수좌를 꼽을 수 있다. 판본좌가 설립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인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뒤에 이야기 할 본정좌와 더불어 경성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었으나 공연 내역을 밝혀주는 자료는 많지 않고, 1907년 5월 사카이(酒井)일좌가 공연했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1908년 판본좌를 헐고 그 자리에 수좌(壽座)가 건립된다. 수좌는 남촌의 일본인 극장을 대표하며 1919년까지 영업을 지속하다가, 같은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면서 사라졌다. 사진3. 수관의 개관 광고(《朝鮮新聞》, 1912년 12월 26일 자.) 사진4. 수관의 무대(岡良助, 『京城繁昌記』, 東京: 博文社, 1915년) 본정좌는 판본좌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심훈이 19세기 말 영화가 처음 상영된 장소라고 지목한바,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보면 1907년 7월 30일 개관했고 당시 흥행주는 이토(伊藤友松)였다. 다만, 1907년 이전 동일한 이름의 극장이 다른 장소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본정좌는 경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일본인 신파 극단 기타무라(北村)일좌의 근거지였으나 1909년 2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다. 1912년 본정좌 자리에 새로운 극장이 설립되어 이름을 수관(壽館)이라 했다. 수관은 1920년대 중반 다시 이름을 본정좌라 바꾸어 운영하기도 했으나 곧 사라졌다. 남대문통에서 명치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낭화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샤미센을 뜯으며 창을 하는 나니와부시(浪花節) 공연을 위해 만든 작은 규모의 극장이었다. 현재 명동1가 65-2번지 자리로, 1909년 12월 1일 개관했으며 관주는 니시다 가죠(西田嘉三)였다. 라쿠고(落語)와 같은 작은 규모의 공연이 주로 펼쳐졌고 1930년대 영화관으로 개축되었으나, 해방 후 낭화관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명동극장으로 바꾸었다. 1974년도에 폐관되었다. 남대문 밖에 위치한 어성좌는 강점 직전인 1910년 5월 31일 낙성식을 열고 영업을 개시했다. 1913년 당시 좌주는 다나카(田中駒次郞)라는 인물이었고 조루리와 인형 연극과 같은 작은 규모의 흥행물 공연을 주로 했다. 1910년대 중반 사라진 어성좌의 현재 위치는 남대문 YTN타워 주변이다. 사진5. 1920년대 초반 낭화좌의 모습 이들 극장 외에 1910년 이전에 만들어진 극장으로 영락정(永樂亭)이 있었다. 강담(講談), 라쿠고(落語), 나니와부시(浪花節) 등 일본의 전통 연희를 전문으로 흥행하는 이른바 요세(寄席)였다. 1910년대 중반에는 신정(新町) 유곽 입구에 극장이 들어섰다. 이 극장은 시기에 따라 문락좌(文楽座), 도하좌(稻荷座도화자? 桃花座?), 낭화좌(浪花座), 조일좌(朝日座)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나아가 1910년 경성에 포함된 용산 지역에는 용산좌(龍山座), 좌구랑좌(佐久良座=사쿠라좌) 등이 있었다. 특히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1910년대, 신용산과 구용산 지역에 각각 한 개씩의 극장이 있었다. 신용산에서 구용산으로 들어서는 길에 위치한 영정(榮町)에는 1906년 용산좌(龍山座)가 들어섰는데, 1910년대에 이름을 개성좌(開盛座)로 바꾸었다. 신용산이라 불린렸는 용산역 앞 한강통에 자리잡은 사쿠라좌(櫻座) 역시 구용산에서 신용산이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1(상단). 황금유원 관련 기사(《매일신보》, 1913.06.23.) [자료] "경성 활동사진계의 내막 - 기대가 무너진 유락관과 수좌는 어떻게 되나?" - 「京城活動寫眞界の內幕-當て事の外れた有樂館と壽座は何うたる」,『朝鮮及滿洲』, 통권 103호(1916년 2월호), 122~124쪽: 김태현 편역, 『일본어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39~47쪽.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아닌지 눈 쌓인 북한산에서 매섭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전봇대 위에 걸쳐 있는 전선이 꽁꽁 얼어서 소리 나는 추운 밤에도, 마음이 굳세고 당찬 과부가 울며 탄식하는 듯 한 겨울 밤비가 조금 내렸다. 지나가는 저녁에도, 시내의 좁은 골목에 위치한 ‘활동사진 거리’로 불리는 앵정정(櫻井町) 부근에는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는 요란한 색채의 그림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다. 그리고 펄럭이는 깃발, 향락적인 느낌을 자극하고 조장하는 녹일(綠日)날 행사의 악대소리, 이 악대 소리가 황금정의 큰 도로를 슬픈 소리를 내면서 가로지르는 노면 전차의 울림 사이사이로 간간히 들리고 있다. 재작년 연말 언저리부터 작년 여름 사이에 경성 흥행계 전체를 장악할 기세였던 활동사진은, 공진회가 결성된 전후부터 금년(1916년)까지 흥행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다소 열기가 식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다른 흥행물과 비교해도 여전히 현격한 차이가 날 정도로 대단한 기세이다. 현재 경성 활동사진상설관은 대정관, 황금관, 유락관, 수좌, 우미관 이외에 용산에는 황금관의 분관 용강관(龍江館)이 있다. 이것들을 세어보면 모두 6관이 있다. 그 중 조선인 전용관 우미관을 제외하면 일본인 전용 상설관이 5개가 된다. 경성과 용산을 합하여 일본인 인구 7만에 불과한 곳에 상설관 5개의 존재는 조금 많은 감이 없지 않다. 비록 조선에 육군사단 설치를 염두에 두고 장래 발전을 기대한 설립이었지만, 지금 상태로 각 상설관이 수지타산이 맞을 것인지 상당한 의문이 든다. 세계관의 권리 5천원! 이중에서 유락관, 수좌 2개관은 한 달에 2주간 밖에 흥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는 2개관의 경영자들은 대정관, 황금관과 마찬가지로 연중 내내 흥행을 하고 싶었다. 수좌는 종전 체재를 완전히 바꾸어 활동사진 흥행 상설 전문관으로 신장개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개축은 어떻게든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흥행은 총독부로부터 장기간 흥행불허 판정을 받았다. 유락관은 수좌의 전례를 여러 방법으로 검토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그 결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 옆에 있었던 세계관의 권리를 5천원 가까운 금액으로 구입하였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불만은 없을 것이며 틀림없이 장기간 흥행허가가 승인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기대가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 근처 다카기 도쿠야(高木德彌), 미쓰코시(三越)오복점, 백삼십은행, 쓰카타니(塚谷)잡화점 등에서 “이렇게 여염집이 즐비하게 늘어진 장소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천만한 활동사진을 연중 내내 상영한다면 과연 괜찮을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도 억지로 활동사진 흥행 전문관을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강한 항의도 있어서 첫 번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5천원으로 구입한 세계관의 권리도 거의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처분, 양도한다면 한 달에 2주간 했던 흥행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동일한 닛카쓰 작품으로 3개 상설관 경쟁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겨우 활동사진관을 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활동사진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도 그리 뜨겁지 않았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 생긴 2개의 상설관을 위해서 시민들이 다시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의 활동사진 열기는 상설관 증설과는 무관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연일 입장객 만원을 꿈꾸고 있던 2개관 업자들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고, 흥행하면 할수록 경영은 점점 악화될 뿐이었다. 왜냐하면 유락관이든 수좌이든 둘 다 대정관과 동일하게 닛카쓰와 계약을 맺어 닛카쓰 영화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 상설관은 서로 제휴도 연락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화는 거의 같은 밭에서 수확한 작품을 반복하여 상영하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회사의 영화로 경쟁하려고 하니 돈은 돈대로 나갔고 관객에게는 ‘아 그래 바로 이것이야’라는 자극도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2주간 정도밖에 할 수 없는 흥행이라고 해도 상설관 입장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악대, 변사, 매표소 직원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자리를 지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힘든 것은 이들의 급여는 일본과 비교하면 이외로 상당한 고액이여서 수좌와 유락관에서는 변사를 융통하는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다. 하지만, 쌍방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펼쳐 결국 협상은 결렬 되고 말았다. (이하 생략)
1.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해설이 필요할 듯하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웬만큼 마니악하지 않으면 보지 않는 장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독립애니메이션 등 일반 관객은 잘 보지 않는, 주로 업계인이나 특수한 소수의 팬`층이 존재하는 애니메이션 분야는 실제로도 많이 있겠으나 그런 계열도 아니고 일종의 ‘팬무비’로서 성장해온 분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극소수의 사람들밖에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동영상 사이트를 통한 아마추어 팬 애니메이션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 아마추어 팬 애니메이션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애니메이션 역사의 초기에 있어서 만들어졌던 수많은 단편 애니메이션은, 사실 딱히 금전적 수입을 만들 방도가 별로 없었을 테니 ‘프로’라고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전부 다 아마추어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패러디’라든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팬’으로서의 요소를 갖춘 팬 애니메이션 쪽이다. ‘패러디(풍자)’ 요소를 갖춘 아마추어 팬 애니메이션으로서는, 1969년 제작되어 1973~74년에 미국에서 화제를 모았던 <밤비, 고지라를 만나다 Bambi meets GODZILLA>를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마브 뉴랜드(Marv Newland)가 만든 이 작품은, 단 2분 남짓의 매우 짧은 단편으로서 디즈니의 밤비가 일본의 괴수 고지라를 만나는(?) 독특한 내용이 특징적이다. (참고로 IMDb에는 이 작품의 릴리즈 연도가 1974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1974년 9월 25일에 미국 애리조나에서 상영되었다는 표시일 뿐이다.) 이 작품의 감독 마브 뉴랜드는 이후 프랑스 동화 원작의 짧은 애니메이션 <바바파파 Barbapapa>(과거에 국내에서 TV 방영되었고, 최근에는 편의점 등에 캐릭터가 그려진 식품이 유통되고 있는 바로 그 작품이다)에 참여하는 등 애니메이션계에서 계속 활동해왔다. (‘마브 뉴랜드’에 관해 검색하다 보니 네이버 지식백과의 『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항목을 찾게 되었는데, 여기 기술된 내용이 전부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인용이 아니라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영어 위키피디아 내용을 읽기 힘든 분이라면 번역판(?)으로서 참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 이 애니메이션은 (보통이라면 상업성을 담보하기 힘든) 엄청나게 짧은 단편이기도 하고, 또 내용상 디즈니로부터도 고지라의 판권사인 일본 토호로부터도 허락을 받기가 대단히 어려울 과격성을 갖춘 작품이기에 그냥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상업적으로 제작된 패러디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 원작 제작사가 직접 만든 경우도 있고, 그냥 과격하지 않은 패러디의 일종으로서 암묵적으로 묵인될 것으로 여기면서 만든 작품도 있는데, 그런 상업 패러디 애니메이션은 제외하고 이 글에서는 주로 현대에 와서 인터넷을 통해 발표되는 팬무비 애니메이션에 관해 써보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1월 베타서비스판이 시작된 일본의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동화’를 통해 발표되어온 팬무비 애니메이션군(群)이다. 본래 인터넷상에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상에 있는 콘텐츠가 다수 업로드되곤 하지만,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도 분명히 존재한다. 니코니코동화도 마찬가지로, 기존 상업애니메이션 작품을 편집하거나 음성을 바꾸는 정도만 처리해서 올리는 ‘회색’ 콘텐츠(말은 회색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저작권 침해 콘텐츠이다)로서 패러디 동영상이 올라오곤 하는데, 그 한편으로는 저작권자(주로 작곡가)가 허락한 곡을 스스로 부르는 형태의 ‘불러보았다’ 동영상이라든지, 본인이 작곡한 음악을 멜로디만 올리거나 노래를 잘하는 이라면 직접 불러서 올리는 등 저작권 측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동영상도 많이 존재해왔다. 그중에서도 2007년 일본의 소프트웨어 업체 크립톤 퓨처 미디어(Crypton Future Media, Inc.)가 발표한 음성합성 보컬 음원 ‘하츠네 미쿠’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는 매우 컸다. 일본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자면 하츠네 미쿠는, 야마하가 개발한 음성합성 시스템 ‘보컬로이드(VOCALOID)’에 대응되는 보컬 음원인데, 멜로디를 달아서 가사를 적으면 합성 음성으로 보컬 파트와 백코러스가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프로그램의 발전에 따라 노래 도중에 숨을 고르거나 음성의 강약 조절 등도 가능한 등 리얼리티를 살린 보컬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보컬로이드 시스템은, 여성 보컬인 하츠네 미쿠 말고도 여러 다른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가 발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하츠네 미쿠의 인기가 일본의 인터넷상에서 크게 높아지면서 하나의 무브먼트, 하나의 장르로서 만들어졌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하츠네 미쿠 관련 음악은 이미 10만 곡 이상 발표되었다고 하며, 일러스트나 애니메이션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저 창작 콘텐츠(소위 UCC)가 만연하고 있다. 기존에는 아마추어가 작곡을 했을 경우, 작곡가 스스로가 보컬 실력이 좋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혹은 본인은 남성인데 여성 보컬 곡을 만들었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 등의 곤란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보컬을 섭외해야만 곡을 공개할 수 있게 되니까…. 프로 작곡가라면 평소에 거래하던 회사라든지 알고 지내는 가수에게 돌리면서 곡을 팔 수도 있겠지만, 아마추어에겐 그마저도 높은 벽이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츠네 미쿠를 필두로 한 보컬로이드 시스템의 등장은, 그런 곤란함을 타개하여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쉽게 스스로의 보컬 곡을 인터넷상에서 공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던 것이다. 또한 이 하츠네 미쿠 보컬 음원에 맞춰 발표된 하츠네 미쿠의 캐릭터를 가지고 2차 창작 형태로 동인지나 CG일러스트도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하츠네 미쿠 캐릭터의 저작권을 갖는 크립톤 측에서 2차 창작에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덕분이었다.(애초에 하츠네 미쿠 캐릭터의 인기가 높아진 배경에는 2차 창작 동인 문화와의 연계성이 컸다는 점이 있었으니, 오픈 마인드를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에 따라 하츠네 미쿠와 관련하여서는 인터넷상에서 온갖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2008년 공개된 ‘미쿠미쿠댄스 MikuMikuDance’라는 프리 소프트웨어(약칭 ‘MMD’)이다. 이것은 하츠네 미쿠를 필두로 한 캐릭터 3D 모델을 조작해서 일종의 3D 애니메이션을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일본의 개인(온라인상의 닉네임 ‘히구치M’)이 하츠네 미쿠를 가지고 3D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제작한 것이다. 그 소프트웨어의 기본 모델로서 하츠네 미쿠가 내장되어 있는데, 이 역시도 일종의 2차 창작으로서 캐릭터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MMD 프로그램 자체는, 캐릭터 모델만 집어넣으면 하츠네 미쿠 외에 다른 캐릭터를 사용해서도 3D 애니메이션 제작이 가능하다.) 이 프로그램이 나온 이후에는 니코니코동화를 통해 하츠네 미쿠를 3D애니메이션으로 사용한 동영상이 다수 발표될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하츠네 미쿠 보컬을 덧입히면 일종의 ‘캐릭터 아이돌’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면서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3. MMD 외에도, 기존 2D 애니메이션 방식을 채용하여 뮤직비디오 형식의 짧은 동영상으로서는 애니메이션이 몇몇 제작된 바 있다. 즉, 캐릭터디자인은 널리 알려진 하츠네 미쿠를 사용하고, 배경 음악의 보컬 역시도 하츠네 미쿠 음원(물론 나름대로의 개조를 가한 경우도 있음)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슈퍼셀(supercell)의 곡들이다. 슈퍼셀은 일종의 음악 집단인데, 일본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작곡가 료(ryo)를 중심으로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가 함께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집단(동인음악 활동 중심)이라고 한다. 멤버 중에 보컬이 없기 때문에, 슈퍼셀 명의의 활동에서는 하츠네 미쿠를 보컬로 대체하여 곡을 발표했다. (현재는 이미 프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작곡가 료 개인으로서는 타 보컬에게 곡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슈퍼셀의 활동에 관해서는, 이런 형태의 온라인에서의 아마추어 곡 발표가 그 전까지 일본에서 흔했던 것은 아니기에 (한국에서는 이미 1990년대 말에 PC 통신 동호회를 통해서 조PD, 싸이 등이 자작곡을 발표한 후 프로 데뷔를 한 사례가 있었다) 초기에는 료가 자작곡에다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그림을 무단으로 붙여서 동영상을 만들어 발표했었다. (2007년 12월 니코니코동화에 업로드한, 료 두 번째 자작곡인 <멜트>.) 그 곡이 1년 만에 조회수 300만을 기록할 만큼 인기를 얻었고, 하지만 댓글에서 해당 일러스트는 허락을 받고 사용한 것인지 지적을 받자 료는 일러스트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사죄하는 연락을 했다가, 결국 마음이 맞아서 함께 활동하기로 한 것이 바로 슈퍼셀 결성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일본어 위키피디아 참조) 그 후 2008년에 <사랑은 전쟁> <월드 이즈 마인> <블랙★록 슈터> 등의 곡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슈퍼셀은 그 유명세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멜트> <월드 이즈 마인>의 경우엔 일러스트(정지화)가 그냥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의 배경으로 깔려 있을 뿐이었고, <사랑은 전쟁>은 정지화를 약간 편집한 정도의 애니메이션이었을 뿐이었다. <블랙★록 슈터>에 와서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움직임이 있는, 그나마 뮤직비디오 형태의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움직임은 매우 적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어차피 상업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아마추어 동인 활동으로서 제작한 것 인만큼 사실 그 이상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자체 제작한 음반을 코믹마켓 등 동인지 판매전에서 판매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서서히 하츠네 미쿠와 그 관련 음원을 이용하여 니코니코동화를 통한 자작곡 발표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어느 정도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배경에 집어넣는 경우도 늘어났고, 이번 글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모래의 혹성 feat. 하츠네 미쿠>도 그런 ‘뮤직비디오형 애니메이션’으로서 발표된 동영상인 것이다. 니코니코동화와 유튜브에서 2017년 7월 21일 동시에 발표된 이 곡은, 하츠네 미쿠의 이벤트인 「매지컬 미라이 2017」의 테마송으로서 작곡가 하치(ハチ)가 만든 곡(작사·작곡·편곡)에 CG나 프로모션비디오 제작 단체인 남방연구소(南方硏究所)가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을 담당한 작품이다. *하치 MV 「모래의 혹성 feat. 하츠네 미쿠」 동영상 ‘하치’는 온라인 활동을 할 때의 닉네임이고, 음악가로서는 본명인 요네즈 켄지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본인이 직접 작곡과 보컬도 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이지만 하츠네 미쿠 보컬로도 자작곡을 많이 발표했다. 2008년에 처음 자작곡을 니코니코동화에 올렸으나 그 당시 곡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후에 전부 삭제했고,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오리지널 곡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높은 인기를 끌게 되어 2013년 메이저 데뷔를 하게 되었다. 메이저 활동을 하면서 CF송이나 개인 음반을 발표했고, 2016년엔 <3월의 라이온>, 2017년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등 애니메이션 주제가도 담당하게 되었다. 한동안 프로로서의 활동이 중심이었는데, 이번 <모래의 혹성>으로 4년 만에 다시금 ‘하치’ 명의로 곡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4. 이 <모래의 혹성>은 뮤직비디오의 애니메이션 내용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표출되었다. 아마추어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째를 맞이한 하치가, 자신의 활동기간과 거의 겹쳐지는 니코니코동화, 그리고 하츠네 미쿠를 통한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인터넷 무브먼트’에 대해 ‘총괄’하는 의미에서 만든 곡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그중에서 상당히 겹쳐지는 내용을 납득이 가게 설명하고 있는 페이지로 한 블로그를 소개하겠다. 이 블로그에서는 뮤직비디오와 가사를 통해서 내용에 관하여 고찰을 하고 있는데, 이 곡과 뮤직비디오가 가진 엄청난 ‘정보량’을 상당히 납득이 가게 설명해놓고 있어서 일본에서도 꽤 화제가 된 바 있다. 예를 들어 곡의 제목인 ‘모래의 혹성’이란 ‘전성기와 비교해보면 이미 황폐해져버린 보컬로이드계의 상황’을 가리킨다든지,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집단으로 걸어가는 가면의 사람들 맨 앞에 하츠네 미쿠가 있는 모습은 바로 보컬로이드의 대표격인 하츠네 미쿠를 선두에 놓고 다른 보컬로이드 음원이나 작곡가들이 같이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겠는가 하는 부분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왜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인터넷상에서 본명이 아니라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실제로 가면 쓴 집단의 일부는 악기를 등에 메고 있기도 한다. 중간에 하츠네 미쿠의 모습 중에서, 위에 설명한 슈퍼셀의 <멜트>에서의 미쿠 디자인이 그대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대로 하츠네 미쿠 초기의 최대 히트 작곡가였던 료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된 명곡 <멜트>가 현재까지 10년간 이어져 온 일본의 보컬로이드 붐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 셈이다. 그다음, 가면의 집단 중 몇몇이 갈림길에서 집단과는 떨어져 나와 따로 걸어가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10년간의 기간이 지나면서 보컬로이드계에서 멀어져 버린 이들, 혹은 사망해버린 이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블로그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치, 즉 요네즈 켄지는 일본의 웹매거진 「Real Sound」와의 인터뷰에서 <모래의 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보컬로이드를 둘러싼 환경도, 제가 즐기던 때와는 많이 달라져 버렸다고 느낍니다. 테마곡을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을 계기 삼아, 지금 하치로서 하츠네 미쿠와 곡을 만든다면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 하고 고민한 결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아온 보컬로이드의 원점이 되는 풍경, 그 시절에 모래밭에서 우리들이 만들었던 성을 되새기면서, 그리운 마음과 새로운 마음 사이의 딱 맞는 지점을 찾아보았더니 거기에 <모래의 혹성>이 있었습니다."(「Real Sound」 2017.07.21) 이제는 프로가 되었고 프로로서 활동해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본인은 “보컬로이드 출신이고 보컬로이드를 통해 음악을 추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보컬로이드 시절의 악곡이나 경험이 지금의 요네즈 켄지를 분명히 받쳐주고 있을 것이다”(위 블로그)는 이야기이다. “보컬로이드는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도 모른다”(위 블로그)고 여겨지는 것 역시, 지금까지 보컬로이드나 니코니코동화를 쭉 보아온 사람들에겐 분명히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일 것이다. 이 뮤직비디오와 곡은 바로 그런 상황을, 지난 10년간의 보컬로이드 붐을 총괄하는 의미를 갖는 애니메이션이고 곡이라는 말이다. 애니메이션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필자 역시도 1990년대 한국의 PC 통신 ‘동호회 문화’를 겪으면서 많은 경험을 해왔고 추억하는 입장에서 <모래의 혹성>이란 뮤직비디오와 곡이 가진 이런 측면이 꽤나 친숙하게 느껴져서, 약간 좀 매니악한 분야이긴 하지만 이 글을 쓰기로 했다.
1. 2016년 6월 30일,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 >(1967)이 수록된 「 신동헌 애니메이션 컬렉션」 DVD를 출시했다. <홍길동>은 만화가 신동우가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 삼아,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연출을 맡아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필름이 유실된 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는데, 2008년에 일본 고베의 고베플래닛영화자료도서관(KOBE PLANET FILM ARCHIVE)으로부터 일본어 더빙이 된 <홍길동>의 프린트를 입수하여 한국어 사운드 필름과 합치는 작업을 통해 상영하면서 실제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신동헌 감독의 다른 작품 < 호피와 차돌바위 >와 함께 디지털 색보정 작업을 해서 DVD가 출시된 것이다. 이 < 홍길동 >을 2012년 11월 29일~12월 2일 한국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메카데미아 학회(미국 미네소타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 팝컬처의 연구 학회)의 콘퍼런스에서, 학회 참석자를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의 협력을 얻어 상영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필자도 메카데미아 콘퍼런스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스토리 메이커」 「이야기의 체조」 저자)의 초청을 받아 같이 관람했었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홍길동>을 본 감상으로 “폴 그리모(Paul Grimault)의 <사팔의 폭군 La Bergere et le ramoneur>을 방불케 한다”며 그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이 비단 일본의 영향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발언은, 일본 내에서는 한국이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일본을 ‘흉내 내’ 발전해왔다는 식의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 셈이다. 물론 한국인인 필자에게 인사치레한 것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많은 개인, 회사, 단체, 기관과 자주 싸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 평론가이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터부에 가까운 ‘덴노’와 그와 관련된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고, 요즘은 아베 신조 정권이 개헌을 논하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헌법에 대한 논의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거침없이 헌법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일본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 재판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어떤 다른 사람에게 배려를 하거나 인사치레를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학자이다. 그런 그가, 단 두 번 만났을 뿐으로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필자를 배려하기 위해 괜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평소에도 오쓰카 에이지가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고 (아무래도 자국이기도 하니) 타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 편으로는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국과 중국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므로, 역시나 단순히 ‘일본에서 만연하고 있는 통상적인 편견’에 대해 반대하는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되도록 중립적으로 보았을 때에, < 홍길동 >이 꼭 ‘절대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폴 그리모 감독의 < 사팔의 폭군 >은 1952년 작품으로 당시 이탈리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애니메이션이다. 다만 개봉 버전은 감독의 의향에 맞지 않은 형태로 1953년에 공개되었던 것이었는데 (제작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나도 완성시키지 못하자 공동제작자가 자금 회수를 위해 억지로 개봉시켰음), 1967년 재판을 통해 폴 그리모가 권리를 되찾은 이후 자금을 10년 걸려 모아서 1980년 < 왕과 새 Le Roi et l’Oiseau >라는 제목으로 다시 개봉했다는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 아무튼 구 버전인 < 사팔의 폭군 >은 일본에서 1955년 개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문부성 선정 및 우수영화감상회 추천 등을 받았다고 함),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하여 여러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팔의 폭군>은 세기영화에서 배급을 맡아 1957년 8월 31일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고 (「동아일보」 1958년 9월 4일 자 기사), 1960년에도 8월 21일부터 재개봉된바 (「동아일보」 1960년 8월 23일 자 기사)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종전 후에 한국에서는 월트디즈니는 물론이고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고, 미국 작품만이 아니라 유럽의 폴 그리모 작품도 상영되었다는 것이다. < 사팔의 폭군 > 중앙극장 개봉 광고. ‘붸니스 영화제 특별대상 및 심사위원상 수상 작품’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구라파 최고의 만화영화의 시인 포-ㄹ·그리모- 제작’이라고, 유럽 감독 폴 그리모가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왼쪽 하단에는 ‘세기영화 주식회사 배급’이라고 수입사가 표기되어 있다. 2. 그뿐만이 아니다. 자주 지적되지 않고 있지만 사실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은 1963년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란 작품이었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DVD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일본에서 1959년 12월 25일에 개봉된 토에이애니메이션(당시는 토에이동화) 제작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 시네마스코프로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첫 번째 작품인데, 토에이애니메이션 사이트의 소개를 보아도 그 당시 첫 시도였기 때문에 “제작에 엄청난 곤란을 겪었으나, 그 성과는 매우 훌륭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 1960년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아동영화 부문 황금사자상(그랑프리)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문부성 선정과 우수영화감상회 추천을 받았다. (< 사팔의 폭군 >과도 마찬가지)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영화 산업의 일각에 안정적인 지위와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라고까지 토에이애니메이션이 자평하고 있을 만큼, 토에이 초창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1958년 개봉된 <백사전> 이후 토에이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몇몇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토에이가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초기작이었던 것이다. 토에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은 중국의 설화, 그것도 「서유기」나 「삼국지」처럼 아시아 전역에서 유명한 고전이 아닌 작품을 원작으로 한 케이스였다. (중국의 4대 민간설화 중 하나라서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도 물론 전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인지도가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만큼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일본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루토비 사스케’라는 캐릭터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말하자면 토에이가 중국 원작인 <백사전>을 만든 다음 소위 ‘신토불이’랄까 일본적인 것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작품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자, “시대극이라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평가가 높았다고 토에이 측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사루토비 사스케는 소위 ‘닌자’라고 하는 일본 창작물 속의 존재를 대표하는 캐릭터인데, 원래는 일본에서 2차대전을 전후하여 유행했던 ‘강담’ 1) 등과 같은 대중소설 비슷한 장르를 통해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 배경이 있다. 그리하여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이후 토에이는 <서유기>(1960), <안주와 즈시오마루>(1961),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배드의 모험>(1962), <개구쟁이 왕자의 큰뱀 퇴치>(1963) 등 장편 애니메이션을 속속 개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축으로 성장해갔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백사전>(왼쪽), <안주와 즈시오마루> DVD 3. 이같은 작품인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일본에서 개봉한 지 4년 만에, 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지 3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빠른 수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약간 편법을 사용한 수입이었고, 그로 인하여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1963년 당시에 국내에서는 반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63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 왜색 영화의 서울 상영에 대해 비판하는 독자 투고가 실렸고, 12월 17일 자 같은 「동아일보」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의 사진까지 인용하여 ‘눈가리고 아웅/판치는 왜색 붐’이란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를 ‘일본 토에이(동영) 작품’이라고 명기하면서, “백 퍼센트 왜색물이라는 것과 그것이 미국을 거쳐 들어온 상품이어서 당국이 관용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일본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공보부(이후 문화부로 이어지게 되는 정부기관)에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만이 아니라 역시 왜색을 이유로 수입이 제한되어 있던(하지만 그 이야기는, 수입 시도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병 동경에 가다> 역시도 수입 규제를 풀어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59년 일본 동영 제작·야부시다 감독인 <사루토비 사스케>를 MGM에서 영어로 자막을 넣어 배급(RELEASE)한 것이 틀림없는 만큼 완전히 일본 작품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 아닌 미국이나 이태리 등지에서 제작 또는 제공, 배급된 일본 작품은 수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결론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동아일보」) (※여기 표기된 ‘야부시다’란 감독 야부시타 타이지를, MGM은 미국의 영화 배급회사 MGM을 가리킨다.)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동아일보」 1963년 12월 17일 기사 이처럼 비판적인 논조이기는 하나, 이 기사를 읽고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일본 작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없을 것이고, 즉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정식 수입·개봉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나중에는 이처럼 비판론이 나오는 바람에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수입을 허가해주지는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초에는 분명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입이 되었다는 것을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입’이라기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지만 미국 MGM이 배급을 맡았으므로’라는 이유로, 크게 검토하지 않고 단지 실무적 차원에서 수입이 이루어졌던 것 같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한국의 여러 신문에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TV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로 비판하는 논조로) 자주, 또 크게 다루었고,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심지어 전문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일컬어지는 “과거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적을 속인 채 한국 작품인 것처럼 방영하였다”는 말이 실은 잘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 MBC나 KBS의 방송국 연감을 살펴보더라도 해당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임을 (굳이 강조는 하지 않았을지언정) 감추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까지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비판 기사를 싣는데 감춰질 수도 없고, 한국이 그때 일본과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신문사에 일본 특파원도 있고 사업차 일본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 방송국이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없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및 극장 상영은 ‘일본대중문화 3차 개방안’에 의해 2000년 개봉된 < 무사 쥬베이 >(원제 <수병위인풍첩>)가 아니라 1963년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당시 개봉 제목은 <요술 소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더불어 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은,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1963년 개봉되면서 당시 국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도 이 작품을 보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당시엔 아직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지금처럼 흔한 장르가 아니었고, 월트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작품에 환호하면서 “우리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초기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가까운 일본이 만들어낸 상업 장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필자가 앞서 2012년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의 < 홍길동 > 관람 소감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에 전달하였을 때에, 2008년 복원 상영 당시 신동헌 감독이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아시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중국의 < 철선공주 鐵扇公主 >(1941년 1월 1일 개봉)였음을 밝혔지만,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도 본 적은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는 2012년 당시 필자에게 이렇게 밝혔다. “초당 24프레임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을 기조로 했으면서도 부분적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점, ‘선 녹음 후 작화’ 2) 방식을 고수한 점, 천체망원경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고안한 그림자의 표현 등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두고 부단히 노력하며 새롭게 고안한 것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클래식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음악과 움직임의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해학’은 오롯이 감독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감독님은 ‘유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고, 그런 감독님의 세계는 유명한 진로소주 등 CF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미 잘 보여지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필자 역시 상영 당일에 오쓰카 에이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 홍길동 >의 배경 그림이나 몇몇 부분이 ‘조선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나 소나무 등의 묘사’와 ‘작품에 흐르고 있는 해학’에 대해 지적한 바 있었는데, 이 같은 필자의 감상이 어긋난 방향이 아니었음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의 이런 설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역시도, “< 홍길동 >에 관한 정보, 감사합니다. 제 안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아주 분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역시 < 철선공주 >였군요. 그리고 디즈니. 제가 마침 지난 11월에 중국에서 <철선공주>는 디즈니의 기법으로부터 ‘로토스코프’를, 일본의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은 ‘멀티플레인’을 채용함으로써 각각 서로 다른 스타일이 성립되었다고 강의를 했습니다. <철선공주>로부터의 영향, 디즈니 수용 형식의 차이점, 그리고 각국의 전통양식과의 관계라는 3가지 시점에서 < 홍길동 > < 철선공주 >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을 대비(對比)함으로써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사(史)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쓰카 에이지가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이처럼 아시아의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관계와 각국 작품의 비교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모색을 시도했다. 2012년 당시 오쓰카 에이지는 혹시 < 홍길동 > 관련으로 나중에 심포지엄이나 세미나가 열린다면, 개런티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강연이든 패널로든 참석하고 싶다고 했을 만큼, <홍길동>과 아시아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연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5. 신동헌 감독은 2009년 11월 7일 일본 나고야의 아이치 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시네마 코리아 2009 ~한국 고전 애니메이션 특집~’에서 < 홍길동 > 상영의 게스트로 초대받아 열린 무대 인사 및 토크 이벤트에서, 참고를 하거나 의식했던 외국 작품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을 했다.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당시 장편 만화영화라면 디즈니 정도. 그리고 존 하라스 3) 가 만든 <동물 농장> 정도였죠.” (「시네마 코리아」 채록) 한국에서는 특히나, 1960년대에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서적이 번역되거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직접 작품 자체를 보는 것 외에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일본에서도 과거에는 비슷한 상황이었으므로,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같은 경우에도 2차대전 종전 후인 1951년 < 밤비 >(1942년 미국 개봉)가 일본에서 개봉되었을 때에 영화관에서 무려 100번 이상이나 관람한 다음 1952년에 (월트 디즈니 사의 허락 없이) <밤비>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만든 만화 판을 출간하기도 했던 것이다. 4) < 홍길동 >도 마찬가지로, 디즈니나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실제로 어떻게 그러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는지 참고할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작품만 보고 어렵게 제작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는 점, 또한 월트 디즈니 역시도 애니메이션이란 장르 자체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므로, 영화라는 장르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역시도 어느 누구 한 명의 천재가 전부를 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새로운 기술이나 창작을 덧씌우면서 발전되어 왔다는 점은,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그와 같은 애니메이션 장르 초기의 교류사(史)를 연구함으로써 당시 세계 각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왔는지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국내의 애니메이션 사(史)에 관한 서적은 물론 일본이나 서양 쪽의 서적에도 과거에 출판된 책 중에는 그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반영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앞으로 애니메이션 학계에서 좀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일본 토에이의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미국 MGM 배급으로 국내 수입되는 바람에 개봉이 가능했다는 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일본에서 필름이 발견된 < 홍길동 > 역시도 수출 자체는 미국 회사인 20세기폭스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신동헌 감독은 ‘시네마 코리아 2009’ 토크 이벤트에서 본인은 일본 수출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당시 제작회사였던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만 언급했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당시 신문에 기사가 실린 바 있다. ‘만화영화 홍길동 등 일본에 첫 수출’(「경향신문」 1968년 6월 12일), ‘<홍길동> <7공주> 수출’(「동아일보」 1968년 6월 13일) 등이다. 국산 만화영화 <홍길동>과 실사영화 <칠공주>를 세기상사가 미국 20세기폭스사의 일본지사에 수출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기상사 작품인 이 두 영화는 폭스사 영화의 한국 수입과 바터로 수출이 결정된 것이다. 폭스사는 < 홍길동 >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 금년 여름에 일본 전국에 공개하며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제작, 배급한다.” (「동아일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선 ‘바터’로 수출이 결정되었다 함은 바터무역(barter trade), 즉 특정 상품의 상호 교환을 통한 수출입거래를 말한다. 바터무역은 본래 금전 거래가 없는 물물교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출액과 수입액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무역을 말한다. 즉 한국에 할리우드 영화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국내 영화사(세기상사)에, 외국영화만 수입해오지 말고 한국영화도 수출해야만 그에 비례하는 만큼의 외국영화를 수입해올 수 있다는 식의 조건을 내걸었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특히나 외화벌이가 중요했던 시기이니만큼 비단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통상에 있어서도 바터제를 조건으로 내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세기폭스사가 일본지사를 통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개봉을 추진했던 것을 보면, 20세기폭스 측에서는 당시의 한국영화가 미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그나마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기사에서 폭스사가 < 홍길동 >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라고 한 부분은 즉 일본어 더빙을 했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홍길동> 필름은 일본어 더빙이 되어 있는 것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복원했을 때에는 한국에 남아 있던 사운드필름을 가지고 한국어 음성을 새로 덧입혔다.) 그리고 실사영화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배급한다고 되어 있는데, 슈퍼판이란 자막판을 뜻한다. 즉 주로 아동이 보게 될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아이들을 위해 더빙판으로, 성인이 보게 될 실사영화는 자막판으로 제작해서 일본에 상영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국 수입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일본 수출도 양쪽 모두 미국의 배급 업체(영화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필자가 평소에 1970년대 초반의 일본 TV 애니메이션 수입에 있어서도 미국 방송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던 점과도 연관되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에 관련해서 올해 들어 일본의 애니메이션 연구자와 논의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한일 간 애니메이션 교류 역사의 일환으로써 언젠가 다른 기회에 발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1. 강담(講談)이란 연기자가 무대 위 책상에 앉아서 관객들에게 역사나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낭송해주는 일본의 전통 예능의 일종. 이것이 일본 메이지 시대에 속기술이 발달되면서 강담의 연기 내용을 속기해서 만든 ‘강담 속기본(講談速記本)’이란 것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강담 속기본의 유행이 일본에서 구어체를 보급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컬어진다. 1911년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코단샤(講談社)가 강담 속기본의 인기를 바탕으로 잡지 「강담 구락부(강담 클럽)」를 창간하는 등 일본 출판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최대 출판사인 코단샤의 회사 이름부터가 바로 이 ‘강담’ 및 잡지 「강담 구락부」에서 따온 것이다. 이 강담 속기본에 대해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찾아본 바로는 국내에 2013년 「최천종 살해사건을 소재로 한 실록체 소설 연구」(경희대학교 대학원 동양어문학과 안대수)라는 논문에서 특정 강담 속기본 작품을 비교 대상으로써 사용했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잡지 「열풍」 2011년 12월호~2013년 8월호에 연재된 「잊혀진 이야기─강담 속기본의 발견」(야마시타 타이헤이) 정도가 강담 속기본에 대해 연구된 얼마 안 되는 사례인 것 같다. 강담 속기본이 ‘줄거리를 가진 대중/통속 창작물로서, 표지와 내지에 그림이 있고 캐릭터를 중시한 표현이 특징이다.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당대와 후대의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라이트노벨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 듯한데, 야마시타 타이헤이는 ‘라이트노벨과 비교할 때 표지나 삽화의 그림이 내용과 전혀 관련없는 경우도 많고, 둘 다 통속 문화로서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단 것은 비슷하나 그나마 라이트노벨은 인터넷 상에서나 소수의 비평가, 연구자들 사이에선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강담 속기본은 당대에나 후대에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양자의 비교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강담 속기본이 일본 근현대에 있어서 현재 알려져 있는 닌자 전설, 사무라이 전설과 그 캐릭터의 태반을 만들어내었다는 점 등 일본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강담 속기본은 일본에서 초기의 소설, 카미시바이(종이연극), 영화, 만화 등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향후 일본에서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강담 속기본은 어디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의 원류 중의 하나일 뿐 그 외에도 현재의 만화나 라이트노벨 등 일본의 대중문화는 할리우드 영화, 미국이나 유럽의 SF·판타지 소설, 펄프 픽션 등 수많은 영향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강담 속기본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일본 고유 문화론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연구자들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테고,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연구할 때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란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2. 프리 레코딩(prerecording; 선 녹음)이란 애니메이션 등 영상 작품에서 대사나 음악을 먼저 녹음하는 수법을 말한다. 다른 용어로는 ‘프리스코어링(prescoring)’이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제작비 절감이나 작화 스케줄 때문에 ‘애프터 레코딩’(후시 녹음)을 주로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보통 프리 레코딩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3. 존 하라스(John Halas)(1912~1995년)는 헝가리의 애니메이터. 4. 테즈카 오사무는 <피노키오>도 마찬가지로 월트 디즈니에 무단으로 만화화한 다음 출간한 바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테즈카판 <밤비>와 <피노키오>는 2005년에야 디즈니의 허락을 얻어 복각판이 출간될 수 있었다. 테즈카 사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 라이언 킹 >(1994)의 내용이 테즈카의 만화(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 정글 대제 >(한국 방영 제목 <밀림의 왕자 레오>)와 유사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디즈니 측에서는 <라이언 킹>은 < 밤비 >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착상을 얻었을 뿐이라고 반박했었는데, 이에 대해 테즈카 프로덕션 측에서 “만약 테즈카 본인이 살아 있었다면, ‘내 작품이 디즈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영광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끝낸 바 있었다. 또한 실제로 <정글 대제> 연재 도중에 <밤비>가 일본 개봉되었으며 테즈카가 <밤비>를 100번 이상이나 관람했던 만큼, 실제로도 <밤비>를 보고 감명을 받게 되면서 <정글 대제>를 당초 구상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던 테즈카 본인의 문장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라이언 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