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인형
-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배두나, 아라타, 이타오 이츠지, 오다기리 조, 후지 스미코, 요 키미코, 에모토 타스쿠, 테라지마 스스무
<플란다스의 개>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질문. 영화평론가와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때는 비평의 태도로 영화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비평’의 의미를 정의해보려고 했고, 내 안에서만 작동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씨네21》이나 《부산일보》 등 매체에서 평론상을 받고 등단한 사람? 적어도 영화 관련 전공 대학원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자?) 요즘은 그냥 본인을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하느냐 마느냐, 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엔 쓰는 글에 차이가 없는데 누군가는 “어이쿠, 제가 감히? 어떻게? 영화평론가인가요? 그냥 리뷰어, 리뷰어!”라고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라고 본인을 수식하며 강연을 다닌다. (이것을 자신감의 차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영화력’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아니었나. 이를테면 내가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었고 ‘취재’를 직업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며 12년 동안 일했던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기자’라고 먼저 정의하는 것처럼. 어찌 됐든 자아 성찰 끝에 스스로를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할 근거를 찾고 주변에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라고 얼렁뚱땅 정의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정체성이나 비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취미로 영화평론을 한다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뉴스레터를 발행해도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권장된다. 영화 잡지가 여럿 존재했던 전성기(너무 아득해서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 같다)를 지나 지금은 비평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이 시장이 충분한 독자층을 갖고 있나? 구독 매출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성 지면 매체는 결국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영화 관련 지면에 가장 많이 들어올 법한 광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화다. 광고 집행을 결정하는 광고주 그리고 그들이 파는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실리는 매체의 협력 때로는 신경전은 그 역사가 참 유구해서 새삼스럽게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 와중에 영화 시장은 어려워지고 마케팅 트렌드가 급변했으며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멋진 독립 잡지들을 기획하고 발행하는 업계 동료들은 매체의 딜레마와 극장 산업 하락세, 비평의 위기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갖고 비평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확장해 가고 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어느 20대 학생에게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없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더니 “관객과의 대화(GV)를 다수 진행하며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겠다. 영화글과 GV 모더레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매달 원고지 200자 기준 70~100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원고료를 후려치지 않고 입금이 밀리지도 않는) 안정적인 지면이 마련되어 있고 매달 5~10개의 GV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최저 임금 수준의 돈을 벌 수 있다.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든 GV든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든 선배들과 한정된 자리를 갖고 경쟁해야 하는 것도 명심할 것. 이 와중에 진행비를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고 하겠다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 PR’의 기회로 삼아 방송 출연 기회까지 가닿는다면 돈벌이 면에서 나아질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방송 출연료가 원고료나 모더레이터 진행비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수입이 높다. 방송 경험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방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여도 나름 괜찮은 수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고정 방송 스케줄이 존재하는 영화평론가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영화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GV 문화가 사라진다면? 지금이야 존재하지만 딱히 대체할 마케팅 방식을 찾지 못해 지속되는 것일 뿐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모더레이터 일을 병행하는 사람 중에 “언젠가 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그밖에 대표적인 부업으로는 대학이나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 등등이 있다. 그렇게 믿을 구석 없는 프리랜서는 알아서 경력 쌓고 인맥 만들고 일거리를 따와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들은 비평 기고, 모더레이터,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했다. 역시 저 정도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살아남는 걸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길이 생각났다. 바로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본업은 교수, 부업은 평론가라니,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싶은 부러운 삶이다. 그러려면 석박사 학위부터 필요하겠지? 물론 쉽지 않다. 십 년 전쯤 “다 때려치우고 뉴욕의 모 영화 학교나 갈까?” 하고 정보를 알아볼 때 억대 학비와 생활비가 들어간다는 그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 “여기 한국인이 되게 많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럼 우리끼리만 해도 경쟁률이…. 저요? 요즘 《씨네21》 영화평론상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석박사 학위, 그리고 꽤 많은 돈이 깨지는 유학 경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2000)였다. 예술가보다는 인문대 시간 강사가 영화기자 및 평론가의 상황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곤궁과 선택이 닮아서였다. 윤주( 이성재 )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 순위 48위 광부, 49위 농부”보다 순위가 낮은 “50위 인문계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문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개 짖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그는 결국 강아지들을 납치해 감금 혹은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정작 임신한 아내가 반려견을 집에 데려온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후 윤주의 입장도 달라진다. 아파트 경비실 경리 현남( 배두나 )과 함께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걸고 자신이 독거 할머니의 강아지를 죽인 범인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만취한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일상적 공간에서 장르성과 정치 역학을 포착한 뒤 치밀하게 때로는 분방하게 교차해 온 봉준호 감독의 인장을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 지하실, 경비 사무실은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자 한국 소시민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남은 사회 정의 실현으로, 윤주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노리지만 완벽히 실현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현남에게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부족했고, 윤주는 윤리를 저버린 타락한 소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남의 행위는 대가가 허무했고(할머니가 남긴 건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그는 인터뷰에 응하지만 TV 뉴스는 그의 존재를 지운다). 강아지를 구한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에서도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고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피한다. 윤주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바치면서 교수 임용에는 성공하지만, 마지막 양심 고백이 가닿지 못해 윤리의 최저선을 방어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현남과 윤주 새로운 영화 담론을 제시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에는,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직업적 자아실현과 ‘먹고사니즘’이 충돌할 때 우리는 때로는 타협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A지만, 꾸준히 A를 할 수 있는 미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B와 C까지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계 압박이 낳은 조바심이 내가 설정한 하한선을 위협할 때, 아니 그 하한선을 어디까지 더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온다.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현실적 고민은 대체로 윤주와 현남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윤주의 선택이 현실에 가깝다고 자조하기보다는 현남의 소우주에서 싹튼 정의감이 소소하게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런 성향의 인간이라 아직 좋은 글과 좋은 영화가 주는 성취감을 믿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임수연(영화기자) l 어렸을 때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씨네21》에서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업계 전반을 취재하며 다양한 심층 리포트를 써왔다.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다음 소희 >(2023)의 서사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정의감 넘치며 할 말 똑 부러지게 하던 소희(김시은)가 점진적으로 빛을 잃어가다 결국은 자살로 사라지는 전반부와, 이미 소진된 상태에서 직장에 복귀한 형사 유진(배두나)이 소희가 죽게 된 진실을 쫓는 후반부로 구성된다. 소희는 열아홉 살 특성화고 애완동물관리과 졸업반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이고, 유진은 어머니의 오랜 병간호 이후 복직한 경찰이다. 삶이 그다지 녹록치 않은 둘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생존을 넘어 살아가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자기 삶에 남겨두는 현명한 이들이다. 춤이 그렇다. 둘이 직접 만나는 순간은 실습 나간 콜센터 회사에서 고객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후 힘들어하던 소희가 퇴근 후 댄스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가 유일하다. 소희는 말없이 함께 춤추던 옛 동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신입이어서 전혀 교류가 없었던 유진은 소희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반부에서 둘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다. 유진이 콜센터와 학교에서의 극심한 압박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유진이 소희의 사건을 담당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희와 유진의 서사는 일종의 반복형식을 갖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전반부는 피해 당사자의 시점으로 끌어나가고, 후반부는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폭력과 착취의 교육/노동 구조를 파악하려는 유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개로 나눠진 서사구조는 윤리적 형식을 갖는다. 윤리적인 것이란 서로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나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하며 그 사건이 어째서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고 함께 ‘책임’지려는 태도다. 여기서 책임은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응답-가능성(responsibility)과 설명-가능성(accountability)이다. 응답-가능성은 어떤 피해가 일어났을 때 응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응답하기 위해선 먼저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소희는 콜센터에 취직한 후 학생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성실하게 직장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콜센터는 소희를 비롯한 직원들을 사람이 아닌 숫자로 환원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콜 수, 방어율, 성과 그래프 등으로 기입된다. 그들의 감정은 회사가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따라서만 표현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 된다. 사실 ‘해지방어팀’이라는 조직은 폭언을 구조화한다. 인터넷 해지를 하고자 하는 고객들이 해지를 하지 못하도록 수십 번씩 전화를 돌리고 고객들이 화가 치밀게 만든다. 콜센터 직원들은 그 폭언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정노동으로 인해 노동환경은 열악해진다. 이 열악한 일은 본청의 관리를 받으면서도 본청이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하청회사에 맡겨진다. 회사는 노동자를 쉽게 대체가능한 소모품처럼 취급된다. 심지어 이들은 학생과 노동자라는 이중적 구속에 놓인 실습생들로 그 자리를 채운다. 소희가 속해 있는 두 개의 조직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위계적이고 착취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주의와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뼛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본청, 하청, 본부장, 팀장, 직원/실습생 그리고 교육부, 지역 교육청, 교감, 교사, 학생’이라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모두가 단일한 기준의 숫자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의 능력도 키워주지 못하며,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다. 실습생뿐 아니라 팀장, 교사들도 피해자를 자처한다. 소희가 담임 선생님에게 여러 번에 걸쳐 콜센터의 부당함과 맡겨진 일의 부적절함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만 담임은 자신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핑계 삼아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의 입을 막는다. 심지어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면 취업률에 문제가 생겨 반과 학교가 지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소희의 죄책감을 부추긴다. 소희는 부모님에게도 말해보지만 그들 역시 들을 수 없는 조건에 있다.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하는 부모님은 삶에 지쳐있고 많이 피곤해 보인다. 피곤하고, 더 나아가 소진된 이들은 가능성이 다한 상황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전 팀장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을 견딜 수 없어 죽음을 통해 바꿔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무산된다. 소희가 논리적으로 따지며 항의하고, 회사가 원하는 서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며 행동으로 저항하고, 진심을 토로해보고, 눈물도 흘리고, 소동을 부리고, 심지어 자해를 해도 어른들 누구도 듣지 않으며, 파국의 상황을 멈추지 않는다. 학교와 직장이 피해자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응답할 수도 없다. 실제 책임을 나눠가져야 하는 어른들은 타자의 자리를 상상할 여지가 없다고, 그러기엔 세상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라고 주장한다. 버티던 소희가 끝내 무너진 것은 전 팀장이 내부고발을 하며 자살을 했을 때보다, 그 자신이 회사가 원하는 감정과 이데올로기를 매뉴얼로만 읽는 것을 넘어서 내면화하기로 결심했을 때였을 것이다. 괴로워하던 소희는 동료와 비교하고 경쟁시키며 방어율을 높이는 새로운 팀장이 전하는 동기부여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스스로 자신을 수단 삼아 회사가 정해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소희는 아들이 죽어 해지를 하려하는 고객조차도 성과를 위한 숫자로 대하게 된다. 단순히 감정을 관리하고 매뉴얼을 수행하는 데에서 심층적 차원에서 회사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감정노동을 하며 스스로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한 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희가 성과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했을 때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인격의 일부와 거래해 받을 대가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설명-가능성의 책임은 이러한 피해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한다. 구조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누가 그것에 책임이 있는지, 서로의 관계는 어떤 역학 속에서 맺어져 있는지 질문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을 위해선 타자뿐 아니라, ‘나’ 역시도 설명해야 한다.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런 피해가 일어난 구조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는 어느 위치에서 그 피해를 듣고 있는지 등을 포함한다. 유진은 모두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들도 손해를 봤다고 억울해 할 때 소희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유진은 댄스 스튜디오에서 소희와 마주쳤지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일을 기억해 낸다. 처음에는 단순 자살로 처리하려던 유진은 두 번째 만남에선 첫 번째처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착취적인 실습생 고용구조를 파헤친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많지 않다. 전반부는 주로 핸드헬드로 진행되는데 소희가 빛을 잃고 무너져갈수록 카메라는 점점 더 많이 흔들린다. 영화는 종종 소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특히 전반부의 마지막 씬에서 소희의 클로즈업 얼굴은 빛, 물, 눈과 같은 자연적인 것과 교차편집 된다. 가게에서 맥주를 먹다 문틈 사이로 다가오는 빛이 차가운 맨발에 닿았을 때, 저수지 앞에서 물을 응시하는 뒷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눈을 바라볼 때, 소희의 얼굴은 자연적인 것들과 교차된다. 눈 내리는 장면은 소희가 유진을 처음 봤던 댄스 스튜디오에서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도 동일한 구도로 반복된다. 그때 소희는 힘든 일이 있었지만, 까만 밤에 흩날리는 눈을 보며 잠깐의 위로를 받는다. 위를 올려다보는 소희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로 잡힌 흩날리는 눈의 쇼트가 교차된다. 아름다운 것은 한번은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될 수는 없다. 소희는 저수지 앞에서 응답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위를 바라보지만, 소희에게 내려온 답은 ‘견디고 참아라.’ ‘피해주거나 손해 끼치지 마라’ ‘나도 힘들다’이다. 위에서 층층이 책임져야할 어른들과 단위들은 그 위가 문제라고 말한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답을 들을 수 없는 소희는 사라져 간다. 소희가 저수지로 들어가는 전반부의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다. 고정된 프레임에서 소희는 프레임의 아래쪽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카메라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소희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면서, 응답하지 않았던 우리(사회)를 응시한다. 프레임 밖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 카메라는, 스페이스-오프에 또 다른 ‘다음 소희’가 사라지고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들에게 응답하기를 요청한다. 소희에게 다가와 주었던 빛은 실습을 나가며 소희가 잃었던, 사회가 대가로 내주기를 강요했던 빛들의 모음처럼 보인다. 그 빛은 유진이 소희가 마지막에 앉아있던 가게의 간이 테이블을 찾았을 때, 다시 한 번 다가와 응답과 설명을 요청한다. 그리고 소희의 휴대폰에 유일하게 남겨진 혼자서 춤을 추고 잘 해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는 동영상으로 시처럼 응축된다.
< 괴물 >(2006)은 서울 도심의 한강에서 거대한 돌연변이 생물이 나타나 사람들이 붐비는 공원을 날뛰다가 여중생을 꼬리에 움켜쥐고 납치하는 기둥 설정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장르에 대한 성공적인 전복의 사례인 < 살인의 추억 >(2003)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꼴을 갖추고 있는 <괴물>에서 봉준호는 괴수영화의 관습을 이용하여 현대 한국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다룬다. 미군 기지를 발원지로 하는 환경 사고의 산물인 괴물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쉽게 읽히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더 복잡한 그림이 드러난다. 납치된 소녀 현서(고아성)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경제 기적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박씨 집안의 구성원이다. 현서의 가족은 느리지만 헌신적인 아버지 강두(송강호)와 강변 매점을 강두와 함께 운영하는 할아버지 희봉(변희봉)으로 구성돼 있다. 결정적인 순간 얼어붙는 버릇이 있는 양궁 선수 이모 남주(배두나)와 한때 급진주의자였으나 지금은 실직한 주정뱅이인 삼촌 남일(박해일)도 있다. 국가는 이 가족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괴물의 공격이 있은 후 정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숙주라며 가족을 비롯한 괴물과 접촉한 모든 사람을 격리한다. 하지만 강두는 괴물에게 납치당한 뒤 한강을 따라 배치된 미로 같은 하수구에서 노숙자 소년과 함께 숨죽이고 있는 현서의 전화를 받는다. 박씨 가족 일행은 아둔한 병원의 통제 시스템을 벗어나 현서를 찾기 위한 자경단의 여정을 시작한다. <괴물>은 장르와 양가적 관계를 구현한다. 봉준호는 괴수 장르의 발전 도상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할리우드와 더 밀착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괴물의 충격적이고 갑작스러운 등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위기에 처한 여러 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용감한 행동으로 절정에 이르는 고전 괴수영화의 시각적, 서사적 관습을 따른다. 스토리는 전국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무대, 즉 수도 서울의 상징인 한강변을 배경으로 한다. 시각효과 스튜디오 오퍼니지와 협력한 할리우드 수준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퀄리티 이면에 놓인 봉준호의 야심은 괴수영화와 슬랩스틱 코미디의 관습이 충돌하는 장르의 미학을 전개하는 것이다. 노란색 방호복을 입은 방역 요원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강두에게 총알이 한 발 남았다는 말을 들은 희봉이 아들이 총알의 수를 잘못 세었다는 것을 깨닫고 괴물에게 최후를 맞는 장면 등에서 이런 충돌이 가시화된다. 봉준호는 괴물의 실체를 초반에 드러내거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괴물의 입에서 빠져나온 현서가 가족의 간청에 화답하지 않고 비극을 맞이하는 가슴 아픈 장면 등에서 할리우드 주류 장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장르의 관습을 전복한다. 봉준호는 장르 관습의 조각들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배열하는, <살인의 추억>에서 시작한 연출 전략을 이어간다. 가장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 중 하나는 클라이맥스, 거리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격렬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강두의 가족들이 한강변의 노숙자(윤제문)와 함께 괴물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는 신이다. 정치적인 함의가 강력하게 폭발하는 이 장면에서 노숙자는 남일이 배낭을 벗어 던지고 불타는 화염병을 던질 준비를 하는 동안 괴물의 목구멍에 휘발유를 붓고 병이 손에서 미끄러져 발밑에 부딪히자 놀란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때 남주가 활을 들고 나타나 절묘한 타이밍에 화염이 이는 화살을 괴물의 입을 향해 발사하고 강두는 쇠파이프로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 장면이 강렬한 이유는 할리우드의 장르 관습과 한국의 역사적 현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불덩어리가 되어 쓰러지는 괴물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은 괴수 영화의 전형적인 관습 아래 있다. 괴물을 처단하는 공격의 수단은 너무나 한국적이다. 배낭을 멘 청년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은 민주화시대를 통과한 한국인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선명한 도상은 1980년대 민주화 시위부터 2000년대 초반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미선이, 효순이 사건, 세계화 및 자유무역 반대 시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젊은이들이 참여했던 20여 년간의 거리 시위를 환기한다. 이러한 시위 중 상당수가 억압적인 군사정권을 지지하거나 점령군의 부당한 지위를 남용하고, 신(新) 자유주의 경제 의제를 추진한 미국을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저류에는 뚜렷한 반미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활과 화살을 든 남주의 이미지에는 한국의 여성 양궁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싹쓸이해 온 국가적 색채도 담겨 있다. 괴물과 미국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이 장면들은 글로벌한 미국인-타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치적 주장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것은 노숙자, 실직자, 정치적 액티비스트, 삼류 운동선수 등 사회적, 경제적 주변성과 실패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성을 표현하려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봉준호는 국가의 대리인이 아닌 이들을 도덕적으로 정당한 한국성의 구현으로 지지한다. 범죄 드라마가 아닌 괴수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표면적 범죄와 심층적 범죄라는 <살인의 추억>의 구조를 이어받는다. 납치와 실종의 상황은 <괴물>에서 반복되는데 괴물은 내러티브에 구조를 부여하는 장치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초점은 아니며 실제로 괴물은 플롯이 전개되는 동안 점차적으로 중요성을 상실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의 표면 아래 숨겨진 현서를 찾는 가족의 여정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자리한 범죄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박씨 일가가 관료 조직과 자본에 얼키고 설키면서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의 상징물인 한강 다리 아래를 전전할 때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고 그저 경멸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부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거짓을 말하고, 경찰은 현서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병원은 현서를 찾기 위해 격리를 해제하지 않으며, 강변을 소독하는 방역 요원들은 쉽게 뇌물에 굴복한다. 남일은 급진주의 액티비스트 시절의 정치적 이상을 고액 연봉과 교환한 친구 뚱게바라(임필성)에게 배신을 당한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경제적 성공을 연상시키는 고층 빌딩 꼭대기에 있는 통신회사 사무실에서 뚱게바라는 휴대폰 추적을 통해 현서의 위치를 찾아내지만 카드빚을 갚기 위한 신고 포상금을 노리고 경찰에 남일을 신고한다. 이러저러한 삽화들을 통해 봉준호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환상을 야유하고 경제적 기적을 돌연변이 괴물로 재탄생시켜 근대화를 얻기 위해 지불한 사회적, 도덕적 비용의 크기를 가늠하고자 한다. <괴물>이 폭로하고자 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범죄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이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프롤로그는 돌연변이 생물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장면은 주한미군 사령부이자 서울 중심에 위치한 용산 미군기지(이곳 근처에 현재 한국 정부가 터를 잡았다는 사실도 기이한 반향을 불러온다)의 영안실을 배경으로 한다. 미국인 영안실 의사가 한국인 부하 직원에게 포름알데히드 병을 하수구에 버리라고 명령하고, 소극적으로 항의하던 부하는 이내 순순히 복종하여 수백 병의 독극물을 싱크대에 쏟아 붓는다. 이 장면은 고전 공포영화의 클리셰인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더 미묘한 공포는 부하가 미친 과학자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이 장면은 자국민에 극도로 해로울 수 있는 범죄를 종용하는 미국의 명령에 순응하는 한국 정부의 종속성을 재현한다. 한 병원 장면에서 기괴한 방호복을 입은 미국 관리가 한국인 의사에게 강두의 뇌를 뚫으라고 명령하는데 이 가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행위를 한국인 의사는 묵묵히 수행한다. 이와 같은 장면들은 괴물이 자연이나 과학, 심지어 미국의 군사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종이라는 정치적 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주장한다. 괴물을 만드는 것은 미국인 영안실 의사가 아니라 한국인 조수이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숙주’는 미국에 기생하는 한국의 지위를 가리키면서 심오한 범죄의 본질을 암시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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