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손
- 감독
- 배수천
19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의 ‘정전’(canon)이라면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과 < 산딸기 >( 김수형 , 1982)에서 시작해 < 어우동 >( 이장호 , 1985)과 < 변강쇠 >( 엄종선 , 1986)를 거쳐 < 매춘 >( 유진선 , 1988)에 이르는 계보일 것이다. 당대 상업영화의 트렌드였던 이 작품들은 불륜 멜로드라마, 궁중 사극, 문예 영화, 호스티스 영화 등 한국영화의 장르적 전통을 변형시키며 그 위에 에로티시즘이라는 ‘시대정신’과 여배우를 토대로 한 스타 시스템을 결합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정전의 뒷길엔 ‘외전’의 계보도 존재한다. < 반노 >( 이영실 , 1982)와 < 빨간 앵두 >( 박호태 , 1982)에서 시작해 < 색깔 있는 남자 >( 김성수 , 1985)와 < 사방지 >( 송경식 , 1988)를 경유해 이후 에로 비디오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일종의 ‘B 무비’의 전통이었다. 이 영화들은 ‘에로 정전’들이 지닌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나름의 엄숙주의를 파괴한다.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고 내러티브는 불균질적으로 전개되며, 때론 급진적인 테마를 관객에게 갑작스레 들이밀어 당황스럽게 만드는 영화. 지금 소개할 <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 박용준 , 1985)(이하 <서탱고>)는 그 전형이다. 사건은 1박 2일 동안 일어난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정주부 한수진( 오수비 )은 서울에서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 수진의 남편인 신 박사( 김동현 )는 저명한 가정 문제 전문가. 세미나 때문에 부산에 내려간 그는 아내에게 내려오라고 한다. 오랜만에 바닷가에서 데이트를 즐기자는 제안이다. 경부선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협( 유승무 )이라는 청년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이후 부산에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조우한다. 남편은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너무 바쁘다. 환영 리셉션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새벽에 겨우 숙소로 들어올 정도다. 홀로 남겨진 수진. 여기저기 다녀 보지만, 그 누구도 외로움을 채워주진 못한다. < 서탱고 >가 특별한 건, 이 영화 속엔 1980년대 에로 영화의 굵직한 관습들이 심하게 과장된 방식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폭력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초반부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가 연상될 정도로 공포스럽다. 수진은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데, 이때 바바리코트에 마스크를 쓴 남자( 배수천 . 이하 ‘마스크 맨’)가 갑자기 그녀를 공격한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수진이 대학생 시절 때부터 쫓아다니던 스토커였다. 영화엔 여러 차례 플래시백으로 마스크 맨과 수진의 과거 장면이 삽입되어, 그녀의 삶 자체가 ‘강간 공포’라는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부산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는 청년 협은 수진을 지켜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수진이 외로울 때나 위험에 처할 때 항상 그는 나타난다. 하지만 그 역시 호시탐탐 수진의 육체를 노린다는 점에서 마스크 맨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이외에도 해운대의 천막 나이트에서 수진을 바라보던 남자들의 음험한 눈빛이나, 술에 취해 수진의 숙소에 난입해 그녀를 범하려 했던 남자처럼, 그녀 주위엔 항상 남성의 거친 시선이 존재한다. ‘성-폭력’을 동력 삼아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에로 영화의 민낯은 <서탱고>의 중심 내러티브를 이룬다. < 서탱고 >가 따르는 또 하나의 장르적 관습은 여성의 욕망에 대한 분열증적 표현이다.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들은 여성의 욕망이 일단 억눌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 애마 부인 >은 선구자적인 영화일 텐데, <서탱고>는 이 전통을 한층 더 기괴한 방식으로 확장한다. 대표적인 장면은 마스터베이션 신이다. 숙소에서 남편만 기다리던 수진의 외로움은 급기야 분노로 변한다. 그녀는 갑자기 숙소를 뛰쳐나와 해변의 숲속으로 뛰어간다. 그녀는 이곳에서 그네 타는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수진에게, 자신의 엄마는 죽었으며 그네는 아빠가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수진은 그네를 타다가 숲속에서 섹스를 나누는 젊은 커플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녀는 다시 뛰기 시작해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도착한다. 그곳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수진. 그녀는 ‘무릎과 무릎 사이’로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기며 황홀경에 빠진다. 그 흐름을 따르면, 해소되지 못한 욕정, 아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 격렬한 섹스에 대한 열망 등이 (< 서탱고 >의 명장면 중 하나인) ‘파도 마스터베이션’ 신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다. 실험영화에 가까운 매우 격한 방식의 장면 연결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밤 장면과 낮 장면은 무질서하게 배열된다(갑자기 낮에서 밤이 되고, 그러다가 낮으로 이어진다). 물론 촬영 과정에서 생긴 실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퀀스의 급진적인 플롯 구성은 이 영화의 스토리가 마치 여주인공의 의식(욕망)의 흐름에 의해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자의 억눌린 욕망에 대한 테마는, 자연스레 남성 캐릭터가 지닌 모순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 에로 영화에서 묘사되는 부부 관계의 대전제는, 부부 사이에선 절대로 성욕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대부분 성불구이거나 먼 곳에 있거나 섹스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가 차지한다(이것은 < 애마 부인 >이 세운 전통으로, 애마( 안소영 )의 남편( 임동진 )은 교도소에 있고 그 자리를 미술학도 동엽( 하재영 )이 채우는데, < 서탱고 >에선 ‘협’이 그 역할을 한다). < 서탱고 >의 신 박사와 수진은 섹스리스 커플인데, 남편은 아내의 과거가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남편을 가정 문제 전문가로 설정한다. 그는 TV에 출연해 말한다.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결혼 전에 일어났던 일은 서로 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성 문제에선 여자보다 좁쌀스러운 게 남자요.” 그러면서 과거에 마스크 맨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할 것을 강요한다. 의처증에 걸린 가정 문제 상담가라는 극단적 모순 상황. 이것은 당시 에로 영화가 지녔던 남성 중심적인 보수 이데올로기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 서탱고 >는 당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한껏 과장하고 뒤틀며 계승한다. < 애마부인 >의 틀을 가져와 그 안에서 < 무릎과 무릎 사이 >( 이장호 , 1984)의 강간 모티프를 변형시키고, < 애마부인 2 >( 정인엽 , 1984)의 히로인 오수비 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러면서 외국 영화의 섹슈얼 코드들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접합시킨다. 내용상 전혀 상관이 없으면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72)를 차용한 제목은 어쩌면 1990년대 이후 성인 비디오 시장을 휩쓰는 ‘제목 패러디’의 효시다(게다가 <서탱고>의 무대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다). 남편이 면도할 때 옆에서 샤워하는 아내를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 드레스드 투 킬 >(브라이언 드 팔머, 1984)에서 가져왔다. 이런 이질성은 <서탱고>를 더욱 불균질적 텍스트로 만든다. 특히 <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메어 자르치, 1979)를 가져온 엔딩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지점이다. 마스크 맨 역할을 맡은 배수천 은 이두용 감독의 ‘발차기 액션’ 영화의 악역으로 유명한 배우인데, 이 영화에서 길이 남을 사이코 연기를 보여준다. “너를 가질 수 있다면 내 인생의 막을 내려도 좋아.” < 서탱고 >의 엔딩은 마스크 맨의 이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협과 처음이자 마지막 정사를 나눈 후, 수진은 숲속으로 달려간다. 그곳 그네에선 마스크 맨이 기다린다. 과거 같았으면 겁에 질렸을 수진은 담담하게 옷을 벗고 그를 받아들인다. 마스크 맨도 마스크를 벗고, 드디어 스토커가 아닌 ‘남자’로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절정에 오르기 직전의 순간, 그녀는 그넷줄을 올가미로 만들어 마스크 맨의 목에 걸고 마치 교수형 집행자처럼 남자를 나무에 매단다. 욕망에 억눌렀던 수진은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남자에게 복수한다. 하지만 반전과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찰에게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있는 수진 앞에 남편이 나타나자, 그녀는 말한다. “난 댁을 모릅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난 댁의 여자가 아닙니다. 남의 여자입니다.” 그리고 신 박사에게 싸늘한 시선을 날린다. 이 시선엔 그녀를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수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단번에 뒤엎는 서늘함이 있다. 그리고 이 전복성은 < 애마부인 2 >에서 오수비가 남편에게 했던 대사를 환기시킨다. “이제 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어요.” 사실 < 서탱고 >는 ‘한국영화 걸작선’이라는 코너 제목에 어울리는 영화는 아니다. 컬트나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영화?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건, 이 영화를 통해 당대 한국영화가 지닌 분열증의 극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박용준 감독은 오혜림을 내세워 < 서울의 탱고 >(1986)를 만들었고 <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 2 >(1992)로 ‘탱고 3부작’을 완성했으나 전편의 충격을 넘어서진 못했다.
< 팔도사나이 >(1969)를 시작으로 < 실록 김두한 >(1974)과 < 협객 김두한 >(1975), 그리고 허경 필자가 소개한 < 김두한형 시라소니형 >(1981)에 이르기까지 김효천 감독의 ‘김두한 사랑’은 남달랐다(<팔도사나이>와 1982년작 < 종로 부루스 >에서는 주인공이 김두한으로 짐작이 가긴 하나 구체적으로 호명되지는 않는다). 물론 김두한의 흔적이 지워진 액션영화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영화는 일본 야쿠자 장르와 반공영화가 결합한 < 오사카의 외로운 별 >(1980)이다. 그 매력의 핵심은 역시 김희라 의 화끈한 남성미로 인한 것이다. 장동휘 , 박노식 , 이대근 , 김희라, 이강조 , 윤승원 으로 이어지는 ‘김효천의 남자들’ 리스트에서 그는 단연 돋보인다.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이 카리스마와 별개로 뭔가 ‘토속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면 이강조는 실력에 비해 유명세가 떨어지고, 김효천 액션영화의 피날레라 할 수 있는 < 일본대부 >(1989)의 윤승원은 뭔가 더 보여줄 것이 남은 상태로 작별을 고했다. 그에 반해 김희라는 진정 세련되고 멋지다. 남자 중의 남자다. 김효천 의 남자들,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김희라 이강조 윤승원 영화가 시작하면 오사카 아오야마 조직의 ‘오야붕’이 습격당하고, 평소 그를 친아버지처럼 여겼던 가네모도( 김희라 )가 혈혈단신 복수를 하러 떠난다. 적의 본거지에 도착한 그는 자신을 ‘아오야마가의 불사신 가네모도’라고 (자기 입으로 직접) 밝히고는 분노의 주먹을 날린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문을 확 열어젖히는 박력부터 남다르다. 역시 김희라! 그리고는 단검 하나로 여러 개의 좁은 다다미방을 저벅저벅 옮겨 다니며 싸운다. 굳이 ‘가오 상하게’ 뛰어다니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적들 앞에서도 ‘어차피 너희들은 다 죽었어’라는 듯 시종일관 언짢은 표정으로 대결에 임하는 그 표정이 딱 ‘쓰바키 산주로’ 도시로 미후네의 그것이다. 상대 오야붕 신타로( 배수천 )가 마사오( 조춘 )를 이용해 가네모도를 처리하고자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잠시 수세에 몰리려는 찰나, 가네모도의 동생 아라이가 멋지게 슬로모션으로 마당에 등장해 졸개들을 화려한 돌려차기로 제압하기 시작한다. 발기술이 약한 김희라의 우직함을 보완하는 김효천 감독 특유의 연출이리라. 그래도 무게중심이 아라이로 기울 수는 없는 법. 가네모도가 창호지 문을 뚫으며 몰래 숨어있던 야쿠자를 주먹 한 방으로 제압하는 장면도 일품이다. 하지만 저 멀리서 경찰차 소리가 들려오고 가네모도는 아라이에게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 말한다. 남자답게 혼자 뒤집어쓰겠다는 말일 것이다. 도망치라 했다고 진짜 혼자서 달아나버린 아라이가 야속하긴 하지만, 뭘 거추장스럽게 줄줄이 끌려간단 말인가. 혈혈단신(feat. 스틸과 캡쳐 화질의 간극) 이처럼 도입부부터 숨 가쁘게 펼쳐지는 습격신은, 김효천 감독 특유의 박력 넘치는 액션 연출과 김희라 의 선 굵은 연기가 결합하여 탄성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제야 영화제목이 뜨면서 체포와 동시에 히로시마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가네모도의 모습, 그렇게 감독이 ‘갔다 왔다 치고’라고 말하는 듯 역시 숨 가쁘다. 또 다시 이어지는 크레딧 ‘제작 김치한’. 바로 김효천 감독의 다소 민망한 본명이다. ‘치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초 감독이라니. 그의 액션영화를 흠모하는 것과 별개로 < 오사카의 외로운 별 >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빨갱이를 극도로 혐오하는 우파 감독의 성향으로 인해 불편한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이미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고나 할까. 그렇게 다시 도시로 돌아온 김치한, 아니 김희라의 뒤로 “사나이 전성시대... 외로운 별, 세월은 간다... 낭만은 있다...”라는 가수 김동아의 주제가가 흐른다. 히트곡 ‘나를 두고 가려무나’로 유명한 김동아는 1970년대 초반 불난 집에서 아버지를 구하려다 화상을 입어 반년 이상 입원했고, 결국 그 흉한 얼굴로 인해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가수다. 뭔가 그러한 사연도 김효천 감독의 남자영화에 어울리는 느낌이다. 이제 가네모도는 출소와 함께 못 다한 복수를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복수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일본 라멘을 먹는 모습이 귀엽다. 하지만 몇 젓가락 밖에 되지 않는 일본 라멘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먹고 난 다음 젓가락을 아그작 뽀개버리는 모습 또한 박력 넘친다. 그리고 술이 빠질 수 없다. 제목도 어울리게 ‘이방인’이라는 바에 들른 가네모도에게 나이 많은 바텐더가 묻는다. “여행을 다녀오셨나 보군요.” ‘깜빵’ 생활을 여행으로 돌려 표현한 바텐더에게 가네모도는 미소를 띠우며 답한다. “인생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길이야.” 이윽고 바텐더는 ‘귀향’이라는 이름의(물론 자체 작명) 술을 건네는데, 가네모도가 “난 돌아갈 고향이 없네”라고 말하자 “그럼 (고향을 몰라도 그리워한다는 의미에서) 망향이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여행과 유학, 그리고 고향과 망향, 거의 직접 시나리오를 썼던 김효천 감독 특유의 낭만성이 부각되는 장면이다. 심지어 바텐더는 자신의 가게를 처음 찾은 손님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며 ‘또 들러 달라’고만 한다. 마초의 낭만 “자네 망향 잊지 않겠네.” “난 술을 이렇게 마십니다.” 다시 출출해졌는지 그는 한 초밥집에 들른다. 알고 보니 재일교포 겐이찌( 한지일 )와 하루미( 이경실 )가 운영하는 초밥집이다. 초밥을 2인분으로 달라고 하고, 술은 5인분으로 달라고 하는 가네모도에게 하루미는 하트를 뿅뿅 발사한다. 심지어 하루미가 술을 따라준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원래 술을 이렇게 마십니다”라며 도쿠리를 원샷하는 신공을 선보인다. 그렇게 배를 채운 가네모도는 신타로 일당의 도박장으로 찾아가 속임수를 쓰는 도박사의 손목을 단검으로 잘라 버리고 “주인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어 7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며 ‘히로시마의 표범’ 마사오의 목숨마저 가져간다. 그러다 숨어있던 다른 졸개에게 허벅지에 칼이 찔린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이리와, 이리와!”라는 단 두 마디에 칼을 찌른 그 놈은 얼어붙는다. 진정 카리스마 넘친다. 말 그대로 감독 또한 배우의 매력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다리에 찔린 칼을 뽑으며 “이리와, 이리와!” 졸개는 정말 이리와서 얻어 맞는다. 얄궂지만 얻어 맞는 건 고화질로...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일본 야쿠자 영화의 모방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겐이찌와 하루미가 조총련의 협박을 받는 재일교포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게다가 가네모도는 물론 그를 보살폈던 오야붕이 한국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조총련=북괴’라는 등식의 반공영화 컨벤션이 침투해 들어온다. 당시 영화포스터에도 ‘이 영화는 일본영화가 아닙니다!’라는 카피가 덧붙여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김효천 의 이전 김두한 시리즈가 일종의 반일(反日)적인 성격을 띠었다면, 이제 북괴가 등장하며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는 형태를 취한다. 아오야마가의 새로운 오야붕이 된 쟈니( 박근형 )가 가네모도의 빨갱이 소탕을 적극 돕고 나선 것이다. 가네모도와의 대화 도중 영국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는 등 어딘가 낭만적인 모습의 쟈니는(그래서 그는 ‘센티멘털 쟈니’라 불린다), 북조선의 만경봉호가 뭔지도 모르는 그를 향해 “가끔은 자네처럼 신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해”라며 은근히 ‘디스’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조총련에 속아서 북송선을 타기 위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물로 최후의 대결을 벌이러 떠난다. 그들이 결전을 준비하며 일본도를 닦고 온천에서 피로를 풀 때 흘러나왔던 사운드트랙은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1악장’이다. 난감하다고 해야 할지 비장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그 대목에서, 어쨌건 그들은 국경을 초월한 형제애를 나눈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며 이미 죽을 각오까지 하고 아래위는 물론 넥타이까지 하얀 색으로 ‘깔맞춤’ 한 가네모도에게 쟈니는 말한다. “나도 함께 가는 거다. 난 회장님의 복수를 하고 아우의 큰일을 돕고, 내가 가야할 이유는 너무나 많아.” 죽음을 예상하고 거의 즐기는 표정으로 싸우는 가네모도와 ‘폐병’을 앓으며 힘겹게 싸우는 쟈니의 모습은 거의 장철 감독 영화의 적룡과 강대위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싸우는 와중에 남자들끼리 간절히 손을 맞잡는 마지막 장면의 정서(오우삼의 < 첩혈쌍웅 >에도 수혈됐던)는 장철의 < 대결투 >(1971)의 판박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센티멘털 쟈니는 “너 때문에 내가 멋있게 죽을 수 있다”며 오히려 그를 다독인다. 반공영화답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가네모도의 마지막 모습만 아니었다면, < 오사카의 외로운 별 >은 더욱 진하게 가슴에 새겨졌을 것이다. 남자들이 손을 맞잡는 마지막의 비장함 끝으로, 김효천 의 액션영화를 흠모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발췌해 본다. 감격스럽게도 < 킬리만자로 >(2000) 이후 두 번째 영화 < 무뢰한 >을 촬영 중인 오승욱 감독은 <한국 액션영화>에서 “밑바닥 사내들의 야비함과 비겁함, 그리고 그들의 이상향적인 <수호지>적인 의협, 이런 것에 대한 과잉 애정이 너무나 지나쳐 오히려 그것이 장점이 되어버린 과잉의 영화”라며 ‘노골적인 빨갱이 혐오’ 정서에 대해서는 “그 꽉 막힌 혐오와 증오가 왜 우리의 바탕인지를. 그의 영화를 보며 우린 그 시대의 오줌 지린내 고약한 우리 동네의 뒷골목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또 < 돌려차기 >(2004)를 만들기도 했던 남상국 감독, 남정욱 이 쓴 「한국영화, 황금기를 찍다」에서는 김효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상찬하고 있다. “김효천 감독의 영화에는 ‘감정’이 있다. 어지러운 시대에 살면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나이의 격한 감정이 살아있다. 주인공을 분노의 끝까지 몰아넣고, 관객이 마음 속 깊이 주인공이 복수를 해 주길 원할 때, 마음 같아서는 관객이 스크린으로 뛰쳐 들어가 악당들을 쳐 죽이고 싶을 때, 바로 그 때! 주인공의 분노를 터트리고, 주인공의 주먹에 악당들은 지리멸렬 나가떨어지고, 관객들은 가슴이 뻥 뚫리면서 주인공의 복수에 박수를 치게 하는 그런 연출의 대가다.” 김희라 이경실 박근형 감독: 김효천 각본: 김효천 개봉극장: 중앙(서울) 관람인원: 30,271(서울)
류승완 감독의 <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2008)라는 제목이 박노식 감독의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1976)에서 온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미처 몰랐지만 이명세 감독의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8)와 최호 감독의 < 사생결단 >(2006)도 각각 과거 독고성 , 장동휘 주연, 이신명 감독의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65)와 이두용 감독의 < 사생결단 >(1975)이 있음도 알게 됐다. 그렇게 재미삼아 찾다보니 나홍진 감독의 < 추격자 >(2007) 이전 김수용 감독의 반공영화 < 추격자 >(1969)와 김선경 감독의 ‘짝퉁’ 합작 액션영화 < 추격자 >(1979)도 발견하게 됐다. 사실 류승완 감독의 경우처럼 장르적 자의식이 새겨진 제목 모방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무척 흥미로웠다. 같은 제목 다른 영화 포스터들 그러면서 다소 덜 알려진 B무비 감독 김선경 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 추격자 >는 사운드트랙 ‘Run and Run’은 물론 올리비아 핫세가 다소 육감적으로 등장하여, 올드팬들에게는 지금도 굉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탈리아 B무비 < 섬머타임 킬러 >(1972)의 주인공 크리스 미첨(로버트 미첨의 아들)이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다. 소련에 있는 한 한국 과학자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고, 미국 CIA 요원(크리스 미첨)이 그의 망명을 돕는다는 내용의 첩보액션영화였다. 멋진 태권 액션을 선보인 권부길이 크리스 미첨의 태권도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캐스팅이 이뤄졌고, 재미교포가 제작자였기에 한미 합작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선경 은 < 잘 살아다오 내 딸들아 >(1972)로 데뷔했는데 이형표 , 최영철 , 김시현 , 고영남 , 이혁수 , 김정용 감독의 경우처럼 장르를 가리지 않았던 한국 장르영화 감독 계보에 포함시킬 만한 인물이다. 조감독으로는 김시현 감독의 < 필살의 검 >(1969)에 참여하기도 했다. 데뷔 이후로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항일 액션영화 < 빌리쟝 >(1974)을 시작으로 < 흑룡 >(1975), < 밀명객 >(1976), < 흑룡강 >(1976), < 금호문 >(1977), < 무림대협 >(1978), < 노명검 >(1980), < 산동반점 >(1982), < 산동여자물장수 >(1983) 등 주로 권격 액션영화나 한홍합작 액션영화들을 만들었다. 가공할 뱀떼가 등장하는, 아마도 실제 동원한 뱀 숫자만으로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법한 동물 공포영화 < 인사대전 >(1983)도 떠오른다. 김선경 감독, < 밀명객 >, < 흑룡강 > 주로 트렌드에 편승한 액션영화들을 만들긴 했지만, 그의 영화들은 나름의 선 굵은 액션 연출과 이야기 전개로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특히 호쾌한 발차기가 일품이었던 액션배우 왕호가 주연을 맡은 < 밀명객 >과 < 흑룡강 >이 그러했으며, 이를 통해 왕호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로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영화제를 통한 필름 상영이 아닌 VOD나 DVD로 감상 가능한 김선경 의 액션영화는 < 특명 >(1976)과 < 산동여자물장수 >(1983) 정도다. 최근 TV 드라마를 통해 다시 주목받은 캐릭터 ‘각시탈’이 최초로 등장했던, ‘권격영화의 결산시대가 왔다’는 당당한 카피와 함께 김추련 이 각시탈로 출연한 < 각시탈 철면객 >(1978)도 그의 영화다. 영상자료원에 DVD가 있는 것으로 검색되지만, 영상자료실에서 재생해본 결과 왕우가 등장하는 엉뚱한 액션영화였다(자료원 담당자 분께서는 꼭 참고해주시길). 라호용 의 첫등장과 한참 후의 얼굴 공개 김선경 감독의 영화들 중 베스트 서너 손가락으로 꼽긴 아쉽지만, 어쨌건 < 특명 >은 그의 전체적인 스타일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던져준다. 용( 라호룡 )은 독립군인 아버지 황대인을 잃고 한 도사 밑에서 자랐는데, 이제 그는 독립군의 지령을 받아 아버지가 목숨을 잃으며 탈취당한 불상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현주( 김정란 )가 자신의 정혼자였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 라호룡은 김선경 감독이 야심적으로 발굴한 배우로, 액션을 시작하기에 앞서 목을 쭉 빼고 자세를 낮춘 포즈가 독특하다. 하지만 역시 액션스타도 ‘얼굴’이 중요해서인지 <특명> 이후 그의 별다른 활약상을 들어본 적 없어 안타깝다. 현주를 연기한 김정란은 태권도 3단으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진출해 < 여신탐 >(1976)을 찍기도 했으며 성룡이 한국에서 촬영한 < 사학비권 >(1978), < 오룡대협 >(1978) 등에 출연했다. <여신탐>에서는 홍콩경시청의 요청으로 홍콩으로 파견된 한국 여경이었다. 당시 ‘한 액션’했던 대표 여배우 중 하나였으며 < 애권 >(1980)에서는 사부(배수천)의 애권 연마를 도운 화류계 여자였다. 기본적으로 ‘불상’을 ‘금괴’로 바꾸면, < 특명 > 역시 당시 전세계적인 트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셀지오 레오네의 < 황야의 무법자 >(1964), 그러니까 이만희 의 < 쇠사슬을 끊어라 >(1971)나 < 용호대련 >(1974) 등 이두용 감독의 태권액션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파게티 웨스턴’의 변형에 가깝다. 가짜 불상이 판 치고, 서로 다른 세력들이 주인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처럼, “불상을 노리는 사람이 많지만 불상이 하나뿐이라는 게 비극”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영화에서, 흑장미를 협박하며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흑장미가 똥장미가 될 줄 알아라!”라는 식의 언어유희도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특명>은 이두용 감독의 영화들처럼 만주 독립군들이 가죽점퍼에 나팔바지를 입고 화려한 발차기를 구사하는 ‘무술 레지스탕스 영화’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수원화성 표현주의, 아수라 백작, 꺽기도 스타일 수원 화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후반부 심야의 추격 결투신은 거의 표현주의적인 명장면이다. 불상을 찾으러 나타난 아수라 백작 스타일의 선글래스 쓴 금발 남자를 비롯해, 성곽 이곳저곳에서 총을 겨누고 뛰어내리며 옥죄어오는 악당들의 위압감도 좋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은 느닷없이 <개그콘서트>의 ‘꺾기도’ 스타일로 느닷없이 ‘대’자로 드러누우며 적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후 현주가 자신의 오래전 정혼자임을 알게 된 순간 찾아오는 황당한 연애장면들(사이좋게 자전거 타고 가다가 괜히 쓰러지는 그런) 만큼이나 당황스럽지만, 어쨌거나 설득력은 있다. 실력도 없는 사람이 비현실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니까. 나중에 다나까( 박동룡 )의 본거지를 습격할 때의 활력도 좋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느닷없이 ‘쌍부채’ 액션을 펼치고, 급기야 모터사이클에서 뛰어올라 악당( 권일수 )에게 날아 차기를 후려갈기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이때도 멈춘 오토바이의 돌아가는 굉음은 멈추지 않는다. 승부는 끝났으되 관객의 감각은 여전히 열려있다는 액션영화 연출의 장인적 감각인 것. 그렇게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서야 주인공이 사실은 멀쩡하고 의협심 강한 ‘태권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요즘 사람들이 래프팅 하러 많이 가는 동강 혹은 한탄강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끝으로, 그때서야 영화 제목이기도 한 ‘특명’을 받들어 떠난다.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이 비로소 ‘특명’을 받기 전까지의 이야기인 것. 한 송이 특명을 받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안타깝게도 인용하고 보니, 영화의 정서와 반대로 서정주 시인의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의 한 구절일세). 라호 룡 김정란 감독: 김선경 각본: 최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