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결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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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53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아메리카 타운
- 감독
- 전수일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김단율, 임채영, 김세진, 박기림, 서갑숙, 최광덕, 김현숙, 지대한, 김낙균, 김형석, 조민욱, 박하준, 최원희, 김민준, 유연미, 황용연, 김승준, 박현준, 박휘준, 김나현, 박채현, 강희택, 이수미, 송현종, 정환희, 박건우, 이진호, 정의담, 이승규, 이건, 신동수, 김동훈, 한다솔, 손용훈, 송성모, 손용훈, 김현수, 이재웅, 김영철, 고병주, 이희찬, 이원욱, 장병수, 김승욱, 박정헌, 송종윤, 최낙진, Gareth James Fannin, Dave, Antoine, Will, Alexandre Labruffe, 김민경, 현은영, 주민경, 한소현, 김정연, 송문정, 박경화, 김미화, 김연희, 김인자, 박정숙, 안동녀, 이재선, 황미나, 황윤아, 정지영, 백승균, 김하영, 김나연, 강다정, 김예인, 박지원, 이루리, 정수빈, 서윤교, 김효주, 김혜연, 백결, 박수현, 류지승, 이솔, 남슬아, 박서란, 송유리, 최연주, 고은해, 김미애, 장한슬, 강수민, 신두희, 박소영, 이재원, 이가령, 강정여, 신창우, 임용택, 김영철, 오대섭, 채영수
K스쿨
- 감독
- 박미경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다원, 양예나, 백결, 의연, 김영민, 구설이, 김소현, 강세희, 김도현, 박도연, 이송이, 강성용, 정요성, 활찬, 호령, 동인, 한을, 다은, 권해성, 김태연, 권혁준, 로윤, 나경민, 송영일, 권혜영
백결
- 참여 작품
- 애 (1999), 제2의 사춘기 (1987), 성리수일뎐 (1987), 블루하트 (1987), 일송정 푸른솔은 (1983), 잃은 자와 찾은 자 (1983), 짧은 포옹 긴 이별 (1983), 불타는 사막 (1982), 종군수첩 (1981), 엄마 결혼식 (1981), 꽃띠 여자(12월 32일생) (1979), 전우가 남긴 한마디 (1979), 오륙도 이무기 (1978), 벽속의 두사람 (1977), 서울, 1974 여름 (1974), 남사당 (1974), 화재와 안전점검 (1973), 헤어져도 사랑만은 (1972), 고보이 강의 다리 (1970), 나교(裸橋) (1968), 외출 (1968), 생명 (1968), 휴일 (1968), 싸리골의 신화 (1967), 방콕의 하리마오 (1967), 귀로 (1967), 원점 (1967), 기적 (1967), 마지막 요일 (1967), 망각 (1967), 물레방아 (1966), 태양은 다시 뜬다 (1965), 유바리 장 (1963)
백결
- 참여 작품
- 너머 (2024), 빈틈없는 사이 (2023), 낭만적 공장 (2022), 반신불수가족 (2021), 불도저에 탄 소녀 (2021), 최선의 삶 (2020), 제인의 썸머 (2020), 감쪽같은 그녀 (2019), 가을 우체국 (2017)
수집자료
이만희 회고전 인터뷰- 백결 촬영본
- 매체규격
- D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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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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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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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 군 현상당선 / 서울 문화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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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영화의 위기, 가정에서 쫒겨난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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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했다고 / 기적 시나리오작가 백결 씨 등 / 일요신문 걸어 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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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인정할 수 있는 심의의 주체는?
좌초된 기대작-이만희의 <기적>(1967) 1967년 초, “한국 최초의 논 뮤직”영화 1) , “스토리 극이 아닌 심리묘사 위주의 새 스타일 실험영화” 2) 한 편이 세간의 주목을 끈다. 일주일의 촬영기간, 일체의 효과음 없이 기차가 달릴 때 발생하는 각종 소리만으로 음향을 대신하겠다는 포부를 앞세운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기적>이었다. 최무룡, 남정임 주연의 <기적>은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석구(최무룡)가 기차에서 지연(남정임)을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담은 것으로 영화 배경의 대부분은 기차 안, 그것도 야간의 기차 안이었다. <만추>의 성공으로 영화계의 기대를 받던 이만희 감독의 차기작 <기적>은 “국산영화의 때를 대담하게 벗”겨 “산뜻한 외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을 받았고, 3) 1967년 3월 30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4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화 <기적>은 개봉 후 실험적인 시도 때문이 아닌 불미스런 이유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기적>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르지 카발레로비치(Jerzy Kawalerowicz) 감독의 <야간열차 Trem Noturno>(1959) 4) 라는 폴란드 영화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1년이 넘는 공방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60년대 많은 영화들이 표절의 의심을 받았으면서도 국외 작품에 대한 표절(대부분은 일본)은 도덕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며, 당시 많은 문제가 되었던 국내 소설을 영화가 표절한 경우에는 소설가가 제작사 대표를 저작권침해로 고소하는 식의 개인적인 소송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시작됐다. <기적>의 시나리오를 썼던 백결은 처음으로 이 문제를 거론한 관련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자 했으며, <기적>의 제작사였던 대한연합영화사는 표절여부를 가려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기적>의 심의서류는 신문지면 등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꼼꼼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 산하 각본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사이의 미묘한 알력관계, 제작사가 인식하던 민간심의기구의 의미, 공보부 영화위원회의 무능 등을 확인시켜준다. 필사적으로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려 했던 제작사의 노력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 심의기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공보부의 행태는 왜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가 1년 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주면서 당시의 검열체계와 위상을 추측케 한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의 시각으로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을 둘러싼 더 흥미로운 면면들을 지금 확인해보자. 민간심의기구 사이의 알력 : 업자협회 VS 예륜 영화 <기적>의 심의서류를 살펴보면 <야간열차>와의 표절시비가 있기 전 또 다른 표절시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나리오 작가 이희중이 1967년 3월 27일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공보부에 제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기적>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 자신의 작품 <빙화>를 도용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희중은 진정서에서 백결이 자신의 작품을 윤색하여 한 잡지에 연재하겠다고 합의한 후 연재는 하지 않고 <기적>의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기에 형사소송을 제기할 것이며, 이 작품의 상영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을 보낸다. 그러나 같은 날짜로 영화 <기적>의 영화검열허가신청서, 영화학생관람허가신청서 등이 접수되고, 역시 같은 날 <기적>의 제작사 대한연합영화사 대표인 홍의선은 <빙화>와 <기적>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며, 표절을 운운하는 것은 이희중과 백결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이것으로 영화 전체가 피해를 입는 것은 억울하다는 요지의 글을 보낸다. (그림 1) 극영화 <기적> 상영허가 보류신청에 대한 회신 이희중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가 접수된 지 이틀 후인 3월 29일 공보부는 이희중에게 위의 공문을 회신하는데, 저작권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 간에 해결되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상영허가와 관련한 것은 공보부가 정하는 공적인 영역의 문제이며 시나리오 표절의 건은 작가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사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공보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 초 소설과 표절시비가 일어났던 영화들이 왕왕 있었고, 이 문제를 부풀리기보다는 개인적인 선에서 처리하려던 당시의 관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희중은 본인이 냉철히 판단해보니 본 문제로 제3자인 제작사가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제출했던 상영허가 보류신청서를 철회한다는 서신을 공보부 측으로 보냈고, 6) 이 문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채 조용히 마무리 된다. 이후 <기적>은 어떠한 지적이나 수정사항 없이 필름검열을 통과했고, 1967년 3월 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을 받아 다음날 개봉한다. 문제는 개봉 후 《일요신문》 4월 9일자 기사에 <기적>이 폴란드의 영화 <야행열차>를 본뜻 것이라는 영화평이 실리면서부터이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시나리오 작가 백결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4월 15일 일요신문의 편집국장 최병욱과 공보부 영화자문위원 이순근, 취재기자 조관희 등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동시에, 7) 업자협회 측에 <기적>의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는 건의서보내기에 이른다. 제작사가 표절의 판단여부를 공보부가 아닌 업자협회에 의뢰한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이는 당시 실질적인 시나리오의 심의가 업자협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당시 업자협회는 공보부의 요청으로 1967년 4월 1일부터 산하기구 각본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영화의 제작신고 전 자체적으로 각본을 검토한 후 문공부에 제작신고서를 내도록 했는데, 제작사는 <기적>의 표절여부를 바로 이 업자협회의 산하기구에 요청했던 것이다. (그림 2) 심의의견서 업자협회는 각본심의위원 이청기, 이진섭의 심의의견서를 첨부하여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을 공보부로 보낸다. 사실 업자협회는 <기적>의 표절 여부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구로 보기는 힘들다. 당시 영화가 공보부에 제작신고의 신청을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업자협회를 경유했어야 했는데, 이미 자신들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보부로 경유시킨 이 작품에 대해 표절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해 4월 1일자로 각본심위원회를 설치, 공식적으로 공보부보다 먼저 각본을 심의하게 된 업자협회의 높아진 위상으로 볼 때, 제작사들에 대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쉽사리 표절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업자협회 측은 이 작품이 표절이 아니라는 점을 공보부로 회신했는데, 공보부는 이 결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륜 쪽으로 다시 한 번 의견을 물으면서 신경전이 벌어진다. (그림 3) 극영화 씨나리오 심의결과 회신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6월 10일 예륜에 영화 <기적>의 표절여부를 심의하여 줄 것을 의뢰하고, 약 열흘 후인 6월 19일 예륜에서는 줄거리, 주제 및 구성, 무대설정, 등장인물, 사건, 효과 및 분위기, 기타 소도구 등 일곱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유사성을 분석한 후 “누가 보드라도 표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는 없다고 결정한다.” 이는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가 내린 결과와 정반대의 것이었고, 제작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한다. 예륜의 결과가 나온 직후인 6월 21일 제작사 대표 홍의선은 바로 공보부 장관에게 예륜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통고문을 발송한다. 심의기구에 대한 영화계의 인식 : 제작사 VS 예륜 (그림 4) 예술문화윤리위의 결정에 대한 불인정통고의 건, 극영화 <기적> 표절결정 불인정 통고 홍의선는 이 통고문에서 예륜이 내린 결정에 대한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 통고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연 예륜이 영화에 대한 심의를 할 수 있느냐?’는 제작사 대표의 물음이다. 홍의선은 이 영화가 이미 공보부에 제작신고, 상영허가신고를 한 후 검열에 합격한 작품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쳤다는 점,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 영화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와 같은 영화 ‘전문가’들이 표절이 아니라고 인정했다는 점을 들며 영화전문가도 아닌 이들이 이 영화의 표절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 아니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예륜의 어정쩡했던 지위에 대한 일침이라 할 수 있다. 1966년 1월27일 발족한 예륜은 4.19이후 자율적인 검열이 필요하다는 요구 하에 생겨났던 많은 민간 심의기구들 즉, 각종 윤리위원회들의 발생과 흐름과 함께 한다. 그러나 예륜이 발족 준비의 아이디어, 발족 후 모든 예산이 공보부에서 나온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예륜이 완전한 민간기구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민간기구였지만 정확히 민간기구도 그렇다고 정부기구도 아닌 예륜의 더 큰 문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각본은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맡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영허가의 신청은 공보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예륜은 만약 이 각본에 대한 심의조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판단하는 정도에 그쳤다. 8) 어떠한 제재를 가할 수 없는 예륜은 의견을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말한다 해도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사 측이 예륜의 결정에 흥분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텐데, 이만큼이나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던 것이 업자협회이다. 업자협회는 공보부가 자신들의 심의의견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륜 측으로 다시 한 번 표절 심의를 넘겼다는 것에 매우 불쾌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그림5) <기적> 표절문제에 관한 건의 6월 30일 업자협회가 공보부에 보낸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공보부 스스로 업자협회에게 준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의사가 엿보인다. 이 공문에 따르면 ‘업자협회의 표절 여부’를 ‘참고’하여 공보부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재심 처리’하는 ‘타당한 순서’를 무시하고 ‘전문분야가 아닌 구성원으로 된 예륜’에 의견을 묻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홍의선과 마찬가지로 업자협회 역시 예륜은 이 공식적인 절차에서 끼어들 만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무용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사의 통고문이나 업자협회의 건의서에 대해 예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각본 심의에 대한 전문성을 들어 항의하고 있는 업자협회의 태도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웠다. 영화의 제작을 위해서는 업자협회를 거쳐야만 하고, 업자협회가 내린 의견을 공보부가 바로 수용을 해오던 이전까지의 과정에 끼어든 예륜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사의 입장에서 표절여부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실질적인 피해로 남는 것이었다. 업자협회와 예륜의 의견이 정반대로 나뉘고, 이 사이에서 공보부 영화위원회가 표절여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기적>은 해외영화제의 출품작에서 모두 제외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외영화제 출품작은 공보부 영화위원회에서 선정했는데, 제작사는 그 해 베니스, 베를린, 아시아 영화제에 <기적>을 출품작으로 신청했지만 표절시비 문제로 인해 어느 곳에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해외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이었던 외화쿼터는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 날아가 버렸고, 제작사는 그만큼의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눈치 보는 공보부 : ? VS ? 상반된 두 심의의견서를 받아든 공보부는 꽤 긴 시간이 지나도록 이 작품의 표절 여부를 가리지 못했고, 급기야 10월 6일에는 아시아 영화제의 국제심사위원으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던 여석기 교수, 조경희 여사에게 표절여부를 판단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림 6) 대한민국주일공보관의 업무연락, 영화소견서 그러나 공보부의 요청으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이 자체로는 표절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에 매우 애매하게 작성되어 있다. 유사한 부분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크게 달라진 것인지, 혹은 무엇이 표절여부를 판단할 만큼 결정적인 차이인지 등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업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나 예륜에서 보낸 심의의견서 등이 정확하게 표절이다 아니다를 결정한 마지막 문장을 포함시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견서라 할 수 있다. 당시 기사에서는 동경에서 보내온 심의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알려왔다고 기술했지만 9) 이 의견서만으로는 그러한 확답을 얻기에 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공보부는 이 의견서까지를 받고서야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는데, 이때에도 깔끔하게 마무리 한 것은 아니었다. 공보부는 영화의 시나리오와 스크린에 비친 결과의 차이점을 중시했다 10) 고 말하거나 예륜 사무국장의 말을 옮기고 있는 한 기사에서 공보부의 최종 결단은 시나리오는 표절일 수 있겠으나 영화는 표절이 아니라고 나올 것이라는 추측이 11) 새어나올 만큼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업자협회와 예륜 측 모두의 손을 들어주는 것일 수 있지만 사실상 책임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 7) 극영화 <기적> 씨나리오 표절에 관한 건 공보부의 태도가 애매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기적>은 표절이 아닌 것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1967년 11월 21일로 공보부는 <기적>이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화했고, 신문들은 <기적>이 억울한 일을 겪었으며 끝내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유일하게 <기적>이 표절작임을 주장했던 예륜은 공보부 장관에게 위의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공보부의 이러한 결정은 ‘본 위원회의 심의는 불필요한 것이며 동시에 본 위원회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니 주의해 달라는 항의에 가까운 공문을 보내지만, 이후 특별한 회신은 받지 못한다. 앞서 업자협회나 제작사의 항의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예륜이 공보부의 최종결정에 항의하는 것은 예륜이 공보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공보부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는 단체였다는 점 등을 추측케 한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적>은 표절의 오명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제작사는 큰 피해를 입은 후였고 영화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진 뒤였다. 영화 <기적>의 표절시비 문제를 두고 오간 서류들은 당시의 영화 심의에 어떤 기구들이 관계하고 있었는지, 그 절차는 어떠했는지, 각기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이를 관장하고 있는 공보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등을 잘 보여준다. 민간심의기구였던 업자협회와 예륜의 알력, 제작사들이 인정하는 민간기구, 그리고 이 사이에서 뚜렷이 어느 한 편의 의견에 비중을 두지 못하는 공보부의 태도 등은 검열을 무조건적인 상하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 후반의 영화검열은 아직 업자협회처럼 영화계 내 민간 기구의 입김이 세게 작용할 수 있었고, 예륜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약 10년 후 예륜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발족하고 강력한 사전검열기구가 되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1) 《경향신문》, 1967.2.11. 이하 본고에서 인용하는 신문기사 중 《신아일보》, 《서울신문》의 기사는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1967)』, 한국영상자료원, 2008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두 신문사의 기사를 인용할 때에는 신문의 발행일자와 함께 위의 책의 면수를 함께 표기할 것이다. 2) 《신아일보》, 1967.2.14.(160면). 3) 《서울신문》. 1967.3.30.(281면). 4) 당시의 심의서류와 신문기사 등은 이 작품의 제목을 <야행열차>와 <야간열차>로 혼용한다. 이 작품은 2012년 부산영화제에서 <야간열차>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공개되어, 현재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에는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이 글에서 역시 확인이 용이한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사용할 것이다. 5) 영화 <돌아보지 말라>가 단편소설 「임진강」의 표절이라며 제작사의 대표가 피소되거나(《동아일보》, 1964.3.4.), 영화 <진성여왕> 역시 동명의 소설 『진성여왕』의 작가에게 제작사 대표가 피소되었고(《경향신문》, 1964.4.18.), 영화 <흑산도>의 경우 표절시비 작가가 공보부에 상영허가취소요구를 하기도 한다(《경향신문》, 1963.6.19.). 6) 이희중의 진정서취하신고서는 정확한 일자의 표기 없이 1967년 3월로만 적고 있다. 때문에 본 서류를 받은 후에 보낸 것인지 그 전에 보낸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여러 정황상 공문을 받은 후일 확률이 크다. 7) 《서울신문》, 1967.4.15.(318면). 8) 배수경, 「한국영화검열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논문, 2004, 37면. 9) 《신아일보》, 1967.11.25.(750면); 《경향신문》, 1967.12.2. 10) 《신아일보》, 위의 기사. 11) 《서울신문》, 1967.12.12.(800면)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해룡 - 배우
배우 이해룡 은 1936년 서울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만주로 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손이 귀했던 외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개구쟁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고, 성동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기에는 피난과 귀경의 반복이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삶은 호기심 많던 그를 공부보다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휴전 후인 1954년 대동상고를 중퇴하고, 마도로스가 되어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꿈꾸며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을 마쳐야 했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김명제 촬영감독을 만나 윤봉춘 감독을 소개받게 된다.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구술자에게 많은 문학예술인들이 모이는 명동은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늘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 하는 영화 일은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1955년 < 처녀별 >( 윤봉춘 , 1956)과 < 피아골 >( 이강천 , 1955)의 단역 겸 제작부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김승호 , 양일민 , 조항 , 성소민 등의 선배들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논개 >(윤봉춘, 1956)에서 장군의 비서인 사동 역할을 맡게 되는데, 장군의 부인이 운명했다는 비보를 알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때 윤봉춘 감독은 이해룡 에게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라는 연기를 주문했고, 배우로서 재능이 있었는지 눈물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이후 < 유관순 >(윤봉춘, 1959)에서의 유관순 오빠 관옥 역할 등을 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자의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과 ‘17클럽’으로 만난 영화 동반자들 이해룡 을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한 사람이 윤봉춘 감독이라면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관계, 동료애를 통해 영화 현장의 참맛을 알게 한 사람은 이만희 감독이다. 5.16 직후인 1961년 말 구술자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해병연예대에 소속되어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 많이제작되었는데 연예대 소속이었던 구술자는 군 생활 내내 수많은 전쟁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만희, 1962)에 출연한 구술자를 눈여겨본 이만희 감독은 이후 대부분의 영화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을 중심으로 장동휘 , 최무룡 , 허장강 , 박노식 , 문정숙 , 태현실 , 이대엽 , 독고성 , 장혁 , 김운하 , 최성 , 구봉서 등의 배우들과 서정민 촬영감독, 전정근 음악감독, 시나리오작가 백결 과 한우정 , 그리고 구술자 등으로 조직한 ‘17클럽’은 ‘이만희 사단’이라 불리며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공유하며 영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영화에 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 이 시간을 통해 동료애를 돈독히 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서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는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해룡 의 구술은 이 작업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이 되었다. 영화계 안팎으로 보여준 끊임없는 영화 열정 1960년대 홍콩과의 합작영화 붐이 일던 시기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어 1969년 홍콩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 13인의 무사 >(장철, 1970), < 철낭자 >( 고버슈 , 197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했고, 다시 대만으로 가 < 5천리 대도망 >( 강대선 , 유가창, 1974), < 금강혈인 >( 김진태 , 198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이 시기의 구술을 통해 홍콩 쇼브라더스의 촬영 환경과 합작영화, 위장 합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당시 합작영화가 만들어지는 풍경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불황기라 하는 1970~80년대 이해룡 은 한국과 홍콩, 대만을 오가며 촬영을 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한국영화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고, 임권택 , 이두용 , 김호선 감독 등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인정받는 감독들과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1년 배창호 감독의 < 흑수선 >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고 있지만 대신 현재는 1957년부터 몸담았던 영화배우협회 내 복지회 활동을 통해 원로 배우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스태프, 배우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후대에까지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레딧에만 존재한 채 잊혀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구술 사업을 통해 한국영화 전면에서 목소리를 낸 영화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갔던 스태프들, 조연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까지 주도적인 몇 명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사의 빈틈을 메우고, 새로운 시각을 형성해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이해룡 은 낯설지만 친숙한 배우로서, 한국영화를 만들어간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따뜻한 시선으로 배우의 삶 전체를 바라보고 스스로 살아가는 영화인으로서, 후대 연구자들에게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영화의 중요한 지점들을 미시사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해주었다.
[시나리오상상극장]외출
오늘도 원고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받아온 시나리오를 읽으며 악전고투를 하는 중이다. 악전고투란 말은 많이 과장됐다. 하지만 첫 문단에서 같은 인물의 이름이 오일태, 오리태, 오열태로 변주되는 글을 읽고 있다면 그 정도의 표현은 써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전산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라고 볼 수 있을 텐데, 6페이지에서 오일수라는 남자가 갑자기 등장해 딱 오일태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오일태와 오일수가 동일인물이기 때문이다. 원래 각본에서는 오일수였는데 민수라는 이름의 의사가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 보다 악당스러운 이름인 오일태로 바꾼 걸까? 그래도 이렇게 큰 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포스터 이 시나리오의 제목은 < 외출 >이다. 영화는 영상자료원에 필름이 보관되어 있지 않은 이만희 의 68년 작 스릴러로, 최수원 원작, 백결 각본이다. 최수원은 ‘주간한국’의 추리소설 당선작가이고 백결은 이만희의 굵직한 대표작들에서 이만희와 함께했던 파트너다. 한동안 이만희의 67년 작으로 알려졌던 <흙바람>과 이 영화는 최근에야 동일작으로 확인되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겨우 반세기도 안 되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고학적인 탐정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뒤져도 <외출>에 대한 정보는 얻기 어려운데, 여러 모로 아쉽다. 굉장히 재미있는 60년대식 스릴러였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은 ‘치밀함’과 연결되는 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만희의 스릴러들을 언급할 때 ‘치밀한’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스릴러는 대부분 재미있고 인상적이지만 치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치밀한 스릴러가 되려면 치밀한 각본이 따라야 할 텐데, 그의 영화 스릴러 각본은 그냥 구멍이 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앞뒤가 안 맞고 오리무중이며 논리 따위는 가볍게 튕겨버린다. 옛날 영화라서 그렇다고 우기기도 뭣한 게, 겨우 반세기 전 영화들이라니까! 그러니 있지도 않은 ‘치밀함’을 붙잡는 대신 왜 반세기 전 한국 장르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이런 비정상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고찰해보는 게 맞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지금 디지털 본으로 읽고 있는 < 외출 >의 녹음 각본엔 커다랗게 ‘공갈’이라고 메모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그 메모를 쓴 사람은 이 영화의 내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최수원 의 원작은 말이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 언급한 오일태는 거물 밀수꾼인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TNT를 품고 자폭했다. 그에겐 한 달 전에 결혼한 혜미(또는 해미?)란 아내가 있고 6개월 전에 정신병원을 나온 여자 친구 문옥이 있다. 문옥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이 결혼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두 여자는 경찰서에서 처음 만나고, 혜미는 문옥에게 말을 걸려 하지만 문옥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오일태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문옥은 몸이 아파 약국에 들르는데 주머니에서 정체불명의 메모를 발견한다. 문옥의 독백에 따르면 오일태는 10월 15일에 죽었는데 그 메모는 10월 22일 것이다. 그게 왜 거기 있었는지, 왜 날짜가 22일인지, 내용이 무엇인지는 각본이 끝날 때까지 안 나온다. 하여간 문옥은 그 뭔지 알 수 없는 메모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6시 30분 김포가도 해태탑 앞으로 가는데, 거기서 오일수란 남자가 차를 옮겨 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일수는 그냥 오일태다. 죽은 사람을 목격한 문옥은 친구인 윤 사장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만 메모는 사라지고 그만 중간에 정신을 잃는다. 처음부터 악당처럼 보였던 윤 사장은 문옥을 정신병원에 가둔다. 여기서 박민수란 의사가 등장하는데, 문옥이 정상임을 확신한 그는 문옥이 가진 정보를 이용하면 오일태/오일수가 숨겨놓은 거액의 현금을 찾아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는 탐정질 끝에 메모의 내용을 확인하고 (문옥은 그 메모를 일기장에 끼워놓았는데 내용이 일기장 페이지에 묻어났던 모양이다. 물론 우린 여전히 그 내용이 뭔지 모른다) ‘연구실’로 들어가 오일태가 자신의 시체로 위장한 죽은 사람의 틀니 또는 ‘잇빨이’를 확보한다. 이걸 멋대로 들고 나가 어떻게 증거로 쓰고 협박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냥 “감독이 공인한 맥거핀이니 의심하지 말고 그냥 따르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물관계도 이후로부터는 완전히 난장판이다. 민수와 그의 아내 진숙은 이 일로 협박당하고 문옥과 진숙은 납치된다. 납치당했던 문옥은 왜인지 몰라도 다시 풀려나고 민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문옥을 죽여야 한다는데 이미 윤 사장은 정 여인이라는 킬러를 보냈고 그걸 알아차린 오일태는 분노하고, 그러는 동안 진숙과 민수는 물건 정리하는 것처럼 살해당한다. 물론 메모에 뭐라고 적혀있는지는 여전히 안 나온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오일태가 문옥을 구출하기 위해 소동을 벌이고 그와 대결하던 윤 사장은 체포되고 자잘한 악당들은 죽고 마지막에 오일태는 자살한다. 돈은 경찰에 압수당하고. 이 소란통에 혜미와 문옥은 다시 만나는데, 알고 봤더니 오일태를 밀고한 건 혜미였다. 각본을 보면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텍스트만으론 감이 잘 안 온다. 이만희 가 이 난장판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을까? 그의 다른 영화들을 보면 그랬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 외출 >이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의 악몽과도 같은 작품으로 나왔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그 결과물을 확인하고 싶어 죽겠는데, 아마 한동안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