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 감독
- 윌리엄 코트렐, 데이비드 핸드
- 제작년도
- 1937
- 출연
- 해리 스톡웰, 루실리에 라 베르네, 아드리아나 카세로티, 모로니 올슨, 로이 애트웰, 핀트 콜빅, 스카티 매트로, 빌리 길버트, 오티스 할란, 제임스 맥도날드, 김수경, 이선영, 김성희, 박상일, 온영삼, 유동현, 이재용, 노민, 이호인, 황원, 조동희
그야말로 ‘디즈니 세상’이다. 올해 7월까지 한국 극장가 흥행 성적을 들여다보자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십여 년 전부터 전 세계 극장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의 수퍼 히어로 영화 대부분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이름을 달고 전 세계에 배급된다. (디즈니는 2009년 12월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사들였고, 특히 마블의 영화 제작사인 마블 스튜디오는 2015년 8월부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직속 산하에 두고 있다). 해마다 이 영화들 한두 편이 국내 극장가에서 크게 흥행 몰이를 하는 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디즈니가 배급한 마블의 수퍼 히어로 영화’ < 캡틴 마블 >(3월 6일 개봉)과 < 어벤져스: 엔드게임 >(4월 24일 개봉)이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서 8월 2일 집계한 결과, 각각 580만 명과 1392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7월 24일까지 집계한 수치에서 올해 흥행 순위 2위와 6위를 차지했다. 올해 디즈니의 맹위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5월 23일 개봉해 53일 만에 ‘천만 영화’에 등극한 <알라딘>과 7월 17일 개봉과 함께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14일만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라이온 킹> 역시 디즈니의 이름으로 배급된 ‘디즈니 영화’다. 더욱이 이 두 작품은 2010년대 들어 디즈니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명성을 쌓은 스튜디오답게 디즈니는 < 신데렐라 >(2015) < 정글북 >(2016) < 미녀와 야수 >(2017) <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2018) 등에 이어, 올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을 거쳐, 2020년에 <뮬란>, 이후 <인어공주> <피노키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등,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작품의 제작 계획을 빽빽이 늘어놓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중에서도 올해 개봉한 <덤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이 한국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개봉해 국내 극장가에서 관객 513만 명을 기록한 <미녀와 야수>도 빼놓을 수 없다. <신데렐라>(71만 명) <정글북>(253만 명)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49만 명), <덤보>(34만 명)의 흥행 성적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이 국내 관객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프로젝트가 리메이크하는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은, 디즈니가 1990년대에 발표한 작품이다. ‘디즈니 르네상스’, 그러니까 디즈니가 고전적인 이야기를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 평단의 박수를 받는 동시에 전 세계 극장가에서 높은 흥행 수익을 올렸던 시기 말이다.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라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디즈니’의 브랜드 가치를 굳건히 한 때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때는 국내 비디오 시장이 활성화됐던 때다.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을 극장에서 보지 못했어도 비디오로 몇 번이고 돌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은 디즈니’라는 공식, 아래 어릴 적부터 이 영화들을 수없이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20~30대다. 더군다나 이 세 작품 모두 뮤지컬 형식의 애니메이션이다. 장면장면이 아름다운 노래와, 그와 하나 되는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올해 개봉한 실사영화 <알라딘>을 볼 때 깨달았다. 이 영화가 일깨우고 있는 건 ‘세대의 기억’이라는 걸.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첫 노래 ‘아라비안 나이트’가 흘러나오는 순간, 이 영화가 재미있는지 없는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는데도, 내 안의 어떤 기억이 깨어나 영화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보고 또 봤던 애니메이션의 기억, 그러면서 빠져든 노래와 뮤지컬 장면에 대한 기억,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나면 난 어떤 소원을 빌면 좋을까’ 밤새 고민했던 기억…. 한 세대의 공통된 기억, 그것도 눈과 귀가 함께 기억하는 즐거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 강력한 문화적 경험은 없다. 찬란한 상상력에 빛나는 애니메이션을 감쪽같은 실사 영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술력, 달라진 시대를 반영하는 재치 넘치는 각색 등, 새로운 <알라딘>의 즐길거리를 더 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이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는, 20~30대 이상 관객들에게 ‘세대의 기억’을 생생히 돌이키고 그걸 새로이 할 장을 마련해 줬다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진정 놀라운 것은, 1990년대 ‘디즈니 르네상스’가 일군 ‘세대의 기억’이 2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를 통해 보다 젊은 세대로 계속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관객이 실사 버전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에 열광하고, 그 노래를 따라 부른 경험은 수십 년 뒤 ‘디즈니 월드’의 또 어떤 자산이 될 것인가. 조금 다른 예로, 십 수 년 뒤 디즈니가, 개봉 당시 세계적인 흥행기록과 함께 수록곡 ‘렛 잇 고’ 열풍을 일으킨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의 실사 버전을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또 어떤 진풍경이 일어날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세대의 기억을 창조하고, 그것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계승하고, 그 유산을 바탕으로 무너지지 않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해 가는 디즈니의 전략이 이쯤 되면 영리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정도다. 마블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히어로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하고, 그들을 때로는 개별 시리즈로 헤치고, 때로는 ‘어벤져스’ 시리즈로 한데 모으는 전술로 그 세계를 매력적으로 확장하는 전략 역시 감탄스럽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디즈니는, 이 시대의 가장 크고 강력한 영화적 기억을 일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앞으로도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겠다고 벌써부터 탄탄한 기초 공사를 다지는 치밀함까지. 감탄을 넘어 그 치밀함이 무섭기까지 한 ‘시네마 수퍼 히어로’다. 말 그대로 ‘디즈니 왕국’이다.
스웨덴의 인기 동화 ‘핀두스’의 작가 스벤 느르드그비스트는 “(작품 속에) 염소와 고양이를 키우며 살았던 시절과 내 아이들을 키울 때의 추억이 다 담겨 있다”며 자기 내면에서 그려지는 이미지에 따라 동화를 써나가는 작업과정을 한국의 일간지를 통해 소개했다. 유사한 사례로 이란에서 태어난 한 소녀의 자전적 성장통을 독특한 그림체로 녹여낸 그래픽노블 < 페르세폴리스 >(마르잔 사트라피)는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했고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되면서 관객에게도 깊은 몰입감과 감성을 배가로 전달했다. 영화의 경우 캐릭터의 삶이 자기 몸에 밸 때까지 연습하고 공부한 뒤 고도의 열정으로 촬영에 임하는 지독한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 나의 왼발 >과 < 데어 윌 비 블러드 >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2013년 8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링컨>으로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서 영화사의 한 줄을 새로 썼다. 그는 촬영이 없을 때도 링컨의 목소리와 억양으로 살았다고 한다. 스벤 느르드그비스트와 동화 <핀두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영화 < 링컨 > 화두로 펼친 몇 가지 이야기들은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는 작가와 배우의 경험, 연륜, 그리고 열정과 신념 등에 의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좋은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 공식’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30년간 일본, 나아가 전 세계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한 획을 긋고 시대를 풍미하던 스튜디오 지브리가 개점휴업상태로 해체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가슴 아픈 일이다. 지브리의 위기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기도 하지만 사실 몇 년 전부터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 일본 최고의 역량을 가진 애니메이터들이 이상적 노동환경에서 최고의 작품을 지향하는 지브리의 유토피아적 제작 시스템이 이제는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브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테크놀로지와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수작업의 노동집약적 제작방식 고수, 재미와 상상력을 넘나드는 감독의 신화적 메소드 결핍, 소비층이 두꺼운 10~20대의 신세대 가치관이나 관심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높고 좁은 스펙트럼의 무거운 주제가 핀포인트에 어긋나면서 결국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더욱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걸출한 개인적 역량과 남다른 감성의 상상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지브리 공방 시스템에 2013년 미야자키 감독 은퇴로 생긴 리더십의 공백이 무엇보다도 큰 붕괴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브리의 위기는 1937년 <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 이후 50년이 지난 1980년대까지도 고루한 2차원 셀과 뮤지컬 형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변화의 혁신에 둔감했던 최고경영자의 무능으로 이미 두 번의 심각한 사태를 맞이했던 미국의 디즈니 위기와 다를 바 없다. 디즈니의 첫 번째 위기는 창업주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에 찾아왔다. 1966년 탁월한 능력과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기업을 이끌었던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뒤 후계자들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의사 결정력이 떨어지면서 창의적인 사업 대신 테마파크를 중심으로 한 부동산 운영에 치중함으로써 부실경영의 여파가 1980년대 초반에 찾아왔다. 1985년 개봉한 < 타란의 대모험 The Black Cauldron >(테드 버만, 리처드 리치)은 10년간 제작 기간을 가졌음에도 구태한 파스티슈로 흥행실패는 불 보듯 뻔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한 최고경영자(CEO)가 마이클 아이즈너다. 1984년 파라마운트사에서 전격 영입된 아이즈너 회장은 영화사업에 진출했다가 위기를 맞은 디즈니를 다시 애니메이션 왕국으로 돌려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기 탈출에 대한 그의 전략은 첫째, 비전을 제시하고 둘째, 유능한 인력을 뽑는 데 주력하고 셋째, 조직개편을 통한 창조적 조직을 구성하고 넷째, 사업을 다각화하는 것이었다. 아이즈너의 전략과 더불어 특히, CG 기술을 도입한 < 인어공주 >( 1989), < 미녀와 야수 >(1991), < 라이온 킹 >(1994) 등은 예술성과 아울러 흥행 성공작이 된다. 이렇게 아이즈너 회장의 위기 극복으로 얻은 이익은 1984년 16억 달러에서 1997년 220억 달러, 시가총액도 20억 달러에서 670억 달러로 크게 성장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마이클 아이즈너, 로버트 아이거, 제프리 카젠버그 디즈니의 두 번째 위기는 아이즈너 회장 자신이 스스로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 이상 재직하면서 스스로 독재자가 되어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했다. 결국 아이즈너 회장은 내부 직원들의 반발과 경영진과의 다툼으로 인해 주주들의 신뢰를 잃고 2005년 사임했다(대표적인 실책으로, 침체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부활시킨 제프리 카젠버그를 1994년 해임하지만 그가 설립한 드림웍스는 < 슈렉 >(2001)으로 디즈니와 아이즈너를 조롱하며 대박을 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05년 후임자인 로버트 아이거가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다시 한 번 창의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ABC방송 기상캐스터로 출발해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아이거는 아이즈너 밑에서 일할 때 그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거의 리더십으로 인해 창의적인 회사 분위기를 해치는 관료적 경영이 점차 사라졌다. 테마파크, 리조트, 스튜디오 등 각 사업부 단위는 스스로 권한을 갖고 책임 있게 일하게 됐고,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3D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나 있을 때 루카스 회사로부터 1000만 달러에 매입한 회사)와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두 제작사 간 계약이 만료된 2005년에 이어 2006년 1월 24일에는 스티브 잡스 애플 CEO로부터 픽사 지분을 모두 인수해(74억 달러 M&A) 2D 셀 애니메이션 명가인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3D 애니메이션 명가인 픽사의 환상적인 결합으로 애니메이션 분야의 세계적 위상을 굳건히 다졌다. 아이거 회장이 경영을 맡은 뒤 실적은 다시 상향세로 돌아섰다. 2011년 408억300만 달러의 매출액에 88억2500만 달러의 순익을 내 매출액과 순익 면에서 모두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2012년에는 루카스 필름까지 인수한다. 이러한 성장은 그가 창의력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마케팅 목표 계층을 기존 유아 중심에서 10대와 20대, 나아가 중·장년층 등 전 연령층으로 확대시킨 것이 턴어라운드에 주효했다. 경영 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방대한 양의 실증 조사를 통해 ‘단기간에 성장한 기업들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지만, 위대한 기업들은 대부분 수십 년간 꾸준히 성장하고 전환점을 거쳐 도약한다’고 했다. 그 전환점이란 바로 ‘위기와 극복의 모멘텀’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다. 실패를 통한 경험을 좌절로 끝내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가지고 극복해야 한다. 최근 tvN 배낭여행 프로젝트 <꽃보다 청춘>의 배우 조정석, 정우, 정상훈은 모두 무명기간이 길었고 고생 끝에 현재의 자리에 올라왔다는 공통점으로도 많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받으면서 관심을 모았다. 음반시장에서는 10년 전 음반판매량에 비해 20% 줄어든 침체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위한 음악이 아닌 귀를 위한 음악을 만든다’는 영국 여가수 아델의 강한 신념을 담은 3집 앨범 ‘25’가 스트리밍 없이 작년 11월 20일 발매 이후 1주일 만에 338만 장의 판매량을 올리면서 존재감을 굳혔다. SF영화 단일작품으로 38년을 이어가는 시리즈 ‘스타워즈’의 7번째 영화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가 개봉 이틀 만에 전 세계 매표실적 2억500만 달러(2,960억 원)로 제작비 2억 달러(2,360억 원)를 넘어선 오늘, 30년이란 시간을 지브리의 열정으로 꽃피운 상상과 창조력의 연륜을 믿으며 테크놀로지 시대의 혁신과 비즈니스의 통찰로 < 가구야공주 이야기 >가 희망하던 ‘다시 살아나는 생명체’처럼, ‘애니마(Anima)’로 부활해 진화하길 기대하고 응원한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여,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 < 바람이 분다 >(2013)의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가 허둥대며 만든 영식함상전투기 ‘제로센(零?)’의 망상으로 우월에 찬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허황되고도 참담한 부활은 꿈도 꾸지 마시고.
21세기 중국은 과거와 달리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문화소비도 커졌고 영화시장도 세계적 수준으로 커졌다. 애니메이션 시장과 투자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인정받을 만한 좋은 작품은 안타깝게도 드물다. 스타일에서도 미국과 일본 것이 혼재되어 방향 없는 정체 모를 것들이 많다. 중국 애니메이션의 뿌리가 있을까 싶은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현존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중 세계 9번째 작품을 내놓았던 애니메이션 강국이었다. 가장 먼저 아시아 애니메이션의 여명을 밝힌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최초로 장편을 선보인 것이다. 이 기록을 보유한 작품이 바로 중국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 철선공주 >다. 완 라이밍과 그의 형제들이 제작을 이끌었다. 해외의 선진문물이 상해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1920년대, 미국의 디즈니나 플라이셔 사의 단편 만화영화들도 함께 유입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을 ‘가통(?通)’라 불렀다. 영어 카툰(Cartoon)의 중국식 한자표기다. 중국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매체에 매력을 느꼈다. 화가를 꿈꾸던 완 라이밍도 그랬다. 그래서 동생 셋과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짧은 애니메이션을 실험했다. 그렇게 1926년 <화실대소동>이란 중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발표, 중국 가통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 철선공주 >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와중에 기획되었다. 완 라이밍은 상해사변을 피해 각지를 떠돌다가 상해로 돌아와 신화연합전업공사에서 장편을 구상한다. 1940년 초 디즈니의 <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한 영향이 컸다. 완 라이밍은 중국의 문화가 들어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야기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삼차파초선’이다. 화염산을 무대로 손오공 일행과 우마왕의 대결을 그린 부분이다. 무엇보다 철선공주란 여성도 나오니 백설공주와 대비해 동양의 여성미를 보여주기에 적격이라 싶었다. 처음 시도한 장편이다 보니 애니메이터 인력도 턱 없이 부족했고 스케줄도 지연되었다. 그에 따라 제작비도 예상보다 훨씬 늘어났다. 때문에 한동안 제작이 멈추는 위기도 겪었다. 다행히 한 재단의 도움으로 재개해 제작에 착수한 지 18개월 만인 1941년 11월에 마침내 완성, 상해 3대 극장에서 일반 개봉을 하게 된다. < 철선공주 >는 로토스코핑 기술에 의한 실사의 움직임을 더해 당시로써는 훌륭한 영상을 선보였다. 때문에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고도 상해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았다는 호평까지 받았다. 전시 중의 중국인들에게 자국의 애니메이션은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일본이 상해를 점령한 후에도 인기몰이는 이어졌다. 요괴 우마왕의 반사경이 일본을 상징하는 태양이 아니냐는 추측 속에 중국인들은 <철선공주>를 관람하고 항전의식을 고취시켰다. 1942년에는 일본에도 수출되어 상영되었다. 당시 중국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먼저 제작했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일본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어린 시절 < 철선공주 >를 보며 애니메이션 제작을 꿈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철선공주>로 중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화려하고 의미도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