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G의 레콘기스타 2: 벨리 격진
- 감독
- 토미노 요시유키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이시이 마크, 시마무라 유우, 후쿠이 유카리, 코토부키 미나코, 오오사카 료타
사진: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5년을 주기로 열리는 현대미술 전시회 ‘도큐멘타 14(documenta 14)’의 예술 감독인 아담 심지크(Adam Szymczyk)가 도큐멘타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헨리에트 갈루스(Henriette Gallus)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갈루스는 심지크에게 “그녀는 영악한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와 자신을 묶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심지크가 대꾸한다. “영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우리와 함께 가라앉을지도 모르니까요.” 1년 후, 그들이 말하는 ‘그녀’에 해당하는 아네트 쿨렌캄프(Annette Kulenkampff)는 540만 유로의 적자를 빌미로 도큐멘타 CEO 직(職)에서 물러났으며 이 스캔들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술행사의 성취를 통째로 가려버렸다. 독일 언론으로부터 ‘무모한 침입자’로 묘사된 심지크는 도큐멘타 14가 남긴 적자의 원흉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나친 예술적 야심이 화를 불렀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예술계에서 비난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끈기와 주견, 고독, 창의성을 지닌 별종들이 있다. 심지크는 그런 인물이며,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exergue - on documenta 14)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 2024)는 이 별스러운 인물에 관한 캐릭터 연구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현대적 예술 제도의 존재 양식과 가치 기준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제시한다. 도큐멘타 14는, 심지크의 담대한 결정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 카셀과 그리스 아테네, 두 도시에서 나눠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적자가 났고 정치인과 미디어 기관의 공격이 쏟아졌다. ‘아테네에서 배우기’라는 제목 하에 개최된 이 웅대한 프로젝트는 유럽 역사에서 식민주의를 탐구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고, 미투 운동과 테러리즘, 유럽발 경제위기, 폭력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어떤 다큐멘터리도 특정 행사의 총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지만, 14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것을 해냈다.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 감독은 큐레이터들의 회의, 스튜디오 방문, 기자회견과 프레젠테이션 따위의 공개 행사, 예산 문제, 설치 과정, 파티를 횡단하면서 위기에 처한 기관의 속살을 들추어낸다. 2015년 여름부터 2017년 가을 도큐멘타 14가 종료될 때까지를 따라가며 14개의 장으로 구성한 이 영화는 사명감에 불타는 예술 큐레이터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기록하였다. ‘아트 바젤’의 디렉터였던 심지크는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는 대신 카메라를 벗어나거나 화면 가장자리에 휴대폰을 두고 사진을 찍는다. 예술이 정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예민하지만 편집증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돈’이라는 주제를 피하지 않지만, 예산은 큐레이터들 간의 대다수 대화에서 나타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오히려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거대한 논쟁을 낳은 열네 번째 에디션이 예술 전시의 개념에 대해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꾀한 내력을 초점으로 한다. 사진: " exergue - on documenta 14 ", IMDb 미술 전시 큐레이팅에 대한 14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볼만한 가치가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가 이룬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매력적이고, 긴장감 넘치고,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다. 3년 넘게 아티리디스는 폴란드 출신의 예술 감독이 전 세계 국가를 돌며 뛰어난 작품을 찾고, 창의적인 큐레이터 팀과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유력한 지식인, 예술가, 영화 제작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금을 조달하는 기관과 협상하고, 작품을 설치하고, 정치인과 만나고, 언론에 답변하면서 도큐멘타 14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조명한다. 이것은 흥미롭고 신명이 나는 광경인 동시에 끔찍한 시간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구조와 큐레이션 담론을 묘사하는 정밀성을 통해 심지크의 큐레이션 팀은 선동적인 정치가 무참하게 무너뜨린 것(예술의 본원적인 가치)을 구제하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거대한 예술 이벤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이벤트의 연속성을 조각조각 모으려는 이 영화의 엄청난 노력은 검열이나 부채로 인해 가려지는 것들,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이상적인 협업 모델, 시대의 쟁점을 가시화하는 과정에 대해 말해준다. 2017년 나는 ‘도큐멘타 14’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다양성과 깊이를 갖춘 전시의 모든 레퍼토리에 감동을 받았다. 7년이 지난 지금도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의 방들, 스탠리 휘트니(Stanley Whitney)의 추상화와 어니스트 만코바(Ernest Mancoba)의 수채화, 올루 오귀베(Olu Oguibe)의 오벨리스크, 기차역의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에게서 받은 영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화려한 축제의 뒷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만성적인 위기에 시달리는 예술계, 이 역설과 씨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고한 에디터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다. 베이루트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전 큐레이터들은 지붕을 타격하는 총소리를 듣는다. 그리스의 극우 정당인 ‘황금의 새벽’은 도큐멘타 본사 바로 앞에 있는 노점상에 불을 지르고 도큐멘타 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본다. 베이루트에서 작가 카엘렌 윌슨-골디(Kaelen Wilson-Goldie)와 미술계의 순회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심지크는 “파티는 끝났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심지크의 허탈한 말과 달리 도큐멘타 14의 현란한 주제 설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폐허, 다중적 시간성, 장애 연구, 반정신의학, 섹슈얼리티의 정치, 트랜스 페미니즘, 포스트 포르노 정치학, 에너지 정치, 죽음과 애도, 의식의 기술, 샤머니즘, 다중 자연주의, 자유의 발명을 위한 프로토콜로서의 건축, 범 아프리카주의, 흑인 전통, 반 식민지주의와 탈식민지주의 지식, 원주민, 토착주의, 급진적 교육학.’ 시대를 통찰하는 예술 행사의 문제설정에서 비판과 창의성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사진: " exergue - on documenta 14 ", IMDb /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전설적인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의 <레산(Resan)>(198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다큐멘터리로 기록된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예술 시장과 외교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연구 작업을 만들어냈다. 지적인 야망을 품고 관료주의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뚫고 가는 이들의 용기가 한 편에 있지만, 독점적인 접근을 통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빛나는 예술 작품의 큐레이션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힘을 얻는 것도 예술의 힘이다. 영화에는 숱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리고 두려움, 분노, 기대, 좌절, 기쁨 등과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 있다. 시를 읽거나 그림에 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거나 무언가를 발명할 때 느끼는 것도 감정이다. 오늘날 영향력 있는 예술 콘텐츠는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다른 수준에 존재하는 예술, 지적이고 영적인 희망을 줄 수 있는 예술의 감정에 관해 묵상하게 한다. 축제 기획자이자 큐레이터로서 나는 이런 주제를 말하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였다. 정부 지원 이벤트의 큐레이터가 정부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 공공 예산을 사용하는 예술 이벤트의 큐레이터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예술과 대중의 간극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가? 이것은 혁신가 아담 심지크의 고뇌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술 전시 축제의 기획자로 일하는 모든 이들의 뇌리를 맴도는 질문이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설을 듣는 청중이나 지켜야 할 조국은 여자다.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을 오르가슴에 이르게 한다. 정치란 창녀와 같아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가 너의 머리를 물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철학은 인간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그 심장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리바이어던Leviathan』과 < 작전명 발키리Valkyrie > 브라이언 싱어가 서른 살에 <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 )>(1995) 를 들고나왔을 때 할리우드는 들썩거렸다. 지금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23년 전 이 영화의 파장은 대단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무슨 ‘석학’이 출현한 것 같았다. 이후 브라이언 싱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유주얼 서스펙트> 케빈 스페이시 그때 주인공인 케빈 스페이시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나는 며칠 동안 세상의 모든 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영화의 작은 소품이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이후 케빈 스페이시가 나온 < 쉬핑 뉴스Shipping news >(2001) 같은 ‘힐링’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도 여전히 그는 내게 <유주얼 서스펙트> 속 모습으로 남았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다른 영화에서 한 코믹한 연기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최근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수많은 상을 탄 베테랑 연기자이다. 젊은 나이에 그런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2008)역시 야심작이다. 톰 크루즈는 말할 것도 없고 < 블랙북Black book >(2006)의 캐리스 밴 허슨, 한국 영화 < 택시운전사 >(2017)의 토마스 크레취만도 반갑고, 케네스 브래너는 언제나처럼 멋지다. 브라이언 싱어 캐리스 밴 허슨 토마스 크레취만 케네스 브래너 2차 대전 말기,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독일 장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은 히틀러 정권의 전쟁에 신물이 났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나치 정권을 비판하다가 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으로 좌천된 그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왼쪽 눈,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둘을 잃은 뒤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3년, 이미 여러 번 히틀러 암살 작전을 시도했던 일군의 장교들과 함께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해 히틀러와 그의 측근을 제거하려 한다. ‘역모’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극적인 정치적 배경에 브라이언 싱어의 재능이 더해져, 두 시간 내내 관객의 심장을 ‘관할한다’. 하지만 영화 <작전명 발키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텍스트는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교재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과 연동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리바이어던』과 <작전명 발키리>는 상호 충실한 해제이다. 메타포로 국가를 만들다 고전의 정의 중의 하나로 “널리 회자되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리바이어던』도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생각보다 않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이 인용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읽혔다면, 절대 몸 이야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언급하는 이들은 대개 ‘딴소리’를 한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비서구 국가 혹은 한국의 (남성) 지식인들 중에서 헤겔, 마키아벨리, 칸트, 홉스, 루소 등을 맥락 없이 ‘들먹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솔직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한 방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염 난 백인 남성’의 지적 권위가 (유학을 다녀온) 비서구 남성 ‘엘리트’에게 ‘내부 통치용’(“그들의 사상을 나만 안다.”)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의 경우, 사람들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짧다. 가장 놀라운 점은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거의 단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몸의 은유(body metaphor)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위대한 업적’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실체(entity)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는 관계와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의 몸처럼 주권, 영토, 인구의 총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 내 모든 영토는 평등하지 않다. 모든 국민도 평등하지 않다. 어디가 국가인가? 서울? 전라도 완도? 경상도 언양? 누가 국민인가? 여성? 장애인?…… 영토나 인구 개념은 상정된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다만, 특정 지역이 국가로 대표될 뿐이다. 어떨 때는 서울이, 어떨 때는 독도가, 어떨 때는 한라산이……. 주권은 어떠한가. 나는 식량 주권, 검역 주권에는 찬성하지만, 군사 주권에는 회의적이다. ‘국가의 영혼’이라는 주권은 하나가 아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서구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지만(영화 <북경의 55일>(1963)을 보라) 공식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관타나모? 지금 그곳은 미국의 군사 기지이지만, 쿠바의 영토다. 『리바이어던』의 역사적 의미는 근대 국가의 개념적 기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쇄술-표준어의 발달 따위가 국가를 탄생시킨 물적 토대라는 주장이다.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다. 홉스 역시 유물론자였다. 그는 가부장제를 자연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구성물로 여겼다. ‘없는 실체’를 ‘존재’로 만들려면 반드시 은유가 필요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몸에 대한 은유는 인류의 오랜 인식 방법이었다. 그리고 몸은 사회적 해석을 반영한다. 그래서 머리(정신)와 몸(수족)의 위계라든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없다면 불가능한 수사가 많다. 서구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공동체로서 조직을 유기체(하나의 몸)로서 조직으로 인지하는 데 결정적인 인식을 제공해 왔다. 사회 조직이 인간의 몸으로 비유되는 유기체일 때, 조직은 (지배-피지배) 관계/제도’가 아니라 실체로 간주된다. 권력은 도처에 있지만(is) 누군가가 가진(have) 것처럼 소유 관념으로 인식되어야,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몸은 모든 상징체계의 기본 도식을 제공해 왔고 서구 사상에서 정치 조직은 언제나 신체에 비유되어 왔다. 몸의 부분에 대한 의미 체계는 사회 규범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 ‘오른팔’ 같은 표현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리바이어던』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창작품이 ‘인간’인데 인체를 모방함으로써 창작품은 한결 더 고급품이 될 수 있다. 정치 공동체, 즉 ‘국가’는 바로 이런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국가의 주권은 몸 전체에 생명과 동작을 주는 인공적 ‘혼’이며, 각부 장관이나 행정부·사법부의 관리는 인공적 ‘관절’이다.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 고문관(顧問官)들은 ‘기억’에 해당하며, 형법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조화는 건강이요, 반란은 병환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합의나 동의는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같다고 하겠다. 이처럼 『리바이어던』은 전편에 걸쳐 국가를 ‘건강한 비장애인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 “화폐는 국가의 혈액”, “식민지는 국가가 출산한 자녀”(제8장),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피정복민은 종기”, “안일함은 기면증”,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마치 노쇠한 아버지의 회춘을 갈망하여 아버지의 몸을 절단하여 이상한 약초와 함께 끓였으나, 아버지를 젊은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펠레우스(Peleus)의 어리석은 딸들과 같은 것이다.”(제13장) 이처럼 국가를 유기체인 인체에 비유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인체를 절단하는 행위와 다름없게 된다. 모든 국가의 외부는 무정부 상태라는 전쟁 중에 있으므로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의 적을 생각할 때,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과 같은 힘의 공백을 노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으며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상 국가는 장애인의 몸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국가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부는 국가보훈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회다. 한국 사회는 특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존경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여기서 내가 반민특위 사건을 들먹이며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윤리적이지 않다. 윤리적인 국가는 보훈(報勳)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동체 유지와 후세대 교육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상 국가는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몸으로 재현되지만, 실제 정상 국가는 외적과 투쟁을 거쳐 쟁취한 공동체이므로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이용사(傷痍勇士)’나 장애인의 몸이 정상 국가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거의 없다. <작전명 발키리>의 주제는 반역이 탄로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제시된다. 관객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때 슈타우펜베르크 역의 톰 크루즈는 자신의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한마디로 “당신들, 나처럼 조국을 위해 눈과 팔을 잃었나? 감히 내 앞에서 할 말이 있는가?” 체포 직전의 그는 자신의 훼손된 몸으로 히틀러 측을 압도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감동받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 없는 상태를 ‘현상 유지(the status quo)’라고 표현하는데, 부정적/비정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국가는 계속 전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묘사된 비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부상당한 장애인의 몸이어야 한다. 지난번 이 지면에서 다룬 영화 < 설국열차 >(2013)에서 언급한 리더의 조건 중에, 다친 몸이 아닌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영화를 통해 독일은 또 한 번 뿌듯(?)했을지 모른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의 전후 책임 문제를 두고 극단적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이 글에서 다룰 사안도 아니다). 독일도 ‘군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가해/피해 사안 모두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의 아내 역으로 나오는 네덜란드 배우 카리서 판 하우턴이 열연을 펼친 폴 버호벤 감독의 <블랙북>은 2차 대전 후 연합군 국가들이 ‘적국의 남자와 섹스한 자국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준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존재는 독일의 자부심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나치 정권은 대중의 협력 없이 불가능했고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 심리』를 통해 해석을 시도했지만, 어쨌든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한 독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상기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사과하는 일본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벌인 만행에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는 한국인, 나치에 항거한 독일인……. 자국의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인류가 국민이기 전에 인간인 이유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좌파와 페미니스트가 ‘난민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대불 +> 작년에는 전반적으로 흉작 또는 주목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평들이 많지만, 아시아(독립)영화들로 보자면 나름대로 의미 있고 흥미로운 한 해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성장하는 영화산업 규모와 더불어 급격하게 변화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시아 영화들 또는 주목할 만한 감독들, 혹은 어떤 경향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을 통해 돌아보는 2017년 아시아독립영화에 대한 일종의 일람표이자 짧은 코멘트. 올해 중화권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는 <대불+>이다. 동명의 단편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하면서, 아이폰과 아이폰 플러스의 차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대불+>로 타이틀을 붙인 이 대담하고 어두운 블랙코미디 영화는 대만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던 후앙신야오 감독의 첫 번째 장편극영화인 <대불+>의 탄생과정에는 <일로순풍>과 <실혼>의 감독 청몽홍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추앙신야오의 단편을 본 청몽홍 감독이 자신이 제작자로 참여할 테니 장편 버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던 것. 각본가이자 감독인 청몽홍이 촬영감독으로 참여할 때는 ‘나카시마 나가오Nakashima Nagao’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데, <대불+>에는 제작자로 그리고 촬영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일로순풍>에 출연했던 배우 대립인(다이리 런, 레온 다이-배우 계륜미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홍콩 우산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 이후 중국에서의 활동에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불상공장의 사장 케빈 역으로 출연해 중심을 잡아주었다. 영화는 거대한 청동 불상을 제조하는 공장이 배경이다. 공장 야간경비원 피클은 고물수집상이자 친구인 벨리 버튼과 함께 매일 밤 도색잡지나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무료해진 둘은 공장 사장인 케빈의 고급차량에 달려있던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보기 시작하는데, 사장의 은밀한 사생활과 불륜이 담긴 영상을 보던 중 살인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우연히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 사장의 내연녀와 한밤의 살인사건, 사라진 그녀, 최근 공정보다 훨씬 빨리 완성된 거대한 불상, 그리고 피클과 벨리 버튼에게 다가오는 위협의 그림자. 세련된 만듦새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담한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는 <대불+>은 대만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코엔 형제를 연상시키는 블랙코미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확장하는 사건의 고리 등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두 가지 정도를 언급하자면 우선, 흑백과 컬러의 대비를 통한 계급 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 피클과 벨리 버튼이 등장하는 비루한 일상은 흑백으로, 사장 케빈이 등장하는 블랙박스 영상은 컬러로 처리하는데, 소외계층의 파토스를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설명처럼, 영화는 둘의 비루함과 무력감은 단조로운 모노톤으로 담아내고, 사장 케빈의 일상이나 정치인, 종교인, 지역 유지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선명한 컬러로 담아내면서 분명한 의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관음증의 세계. 자동차에서 벌어지는 내연녀와의 불륜 장면, 고속도로에서 싸우는 장면이나 러브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장면 등은 실제 블랙박스 영상처럼 보이는데, TV에서나 접하던 가진 자들과 유한계급들의 은밀한 세계를 피클과 벨리 버튼과 함께 엿보면서 관객들도 두 세계를 함께 오가는 영화적 체험을 하게 된다.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17년 단연 주목받았던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몰리 수리야 감독의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은 한 여성이 자신이 살해한 남성의 잘린 머리를 들고 경찰서로 가서 자수한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거장 가린 누그로호가 작업한 3페이지의 트리트먼트로 시작된 프로젝트이자 부산국제영화제 APM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작품. 인도네시아 동부 숨바섬의 아름답지만 황량한 느낌의 사막을 공간으로, 복수와 구원이라는 서부극의 전통적인 모티브를 살짝 변형하고 여러 장르를 혼합한 독특한 형식과 색깔로 올해 최고의 아시아영화로 호평받았다. 잘린 남성의 머리를 들고 경찰서에 가기 위해 황토색 사막을 가로지르는, 서부극 카우보이 같은 말리나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영화로 인도네시아 예술영화를 주도하는 최고의 제작진이 참여해 프로덕션 디자인, 촬영, 음악까지 최상의 결과물로 완성했다. 상반기에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이 있었다면 하반기는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로 세계를 매혹했던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단연 주목을 받았다. 병상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쌍둥이 남동생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어린 동생을 떠나보내야 하는 누나 탄트리의 내면과 불안한 심리가 춤과 노래, 그리고 놀이를 통해 환상적이고 마법적인 이미지들로 펼쳐진다. 3년전 론칭한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첫 경쟁부문인 플랫폼은 주로 서양권 영화들로 채워지는데(<문라이트>와 <재키>와 같은 영화들이 여기서 경쟁했다) 아시아영화로는 드물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초청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인도네시아 독립 예술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든든한 후견인을 자임하는 가린 누그로호의 딸로도 잘 알려져 있는 카밀라 안디니는 족자카르타에서 감독, 제작자인 이파 이스판샤와 함께 족자카르타 영화학교에서 강의와 연출지도를 하고 있다. 족자카르타에서는 매해 12월이면 족자-넷팩아시아영화제가 열리는데, 가린 누그로호와 이파, 그리고 감독 이스마일 바스베스(<회전목마는 멈추지 않는다>)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6년에 4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관객 수가 올해의 경우, 3배 가까운 12,000명 정도로 증가했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대부분 20대나 대학생들이어서 역동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2004년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특별전 <가린과 넥스트 제너레이션: 인도네시아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에서 가린 이후 그의 제자, 후배 감독과 제작자들이 새로운 산업적 토대와 미학구축을 통해 성과를 거뒀고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하나의 주요한 경향이자 동력으로 언급했던 ‘여성파워’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는 2017년이었다. <섹시 두르가> <뉴턴> 마지막으로 인도영화. 방대한 시장에 비해 독립. 예술영화는 여전히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인도영화는 2013년 <런치박스>의 국제적 성공(2008년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미친 영화도 아주 크다) 이후 새로운 변화를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발리우드 상업영화의 자장 아래서 예술. 독립영화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가 활발한데, 2017년의 경우는 그 가능성의 희망을 본 해이기도, 절망을 확인한 해이기도 하다. 시작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한 사날 쿠마르 사시다란 감독의 <섹시 두르가 Sexy Durga>다. 시나리오는 물론 스토리도 없이 배우와 소규모 팀을 꾸려 22일 동안 촬영한 이 저예산 말라야람어 영화는 인도 북부출신 여성과 케랄라 출신 남성이 야반도주를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도로를 따라 역을 향해 걷는 커플에게 지나가는 승합차의 남성들이 합승을 제안하고, 차량에 올라탄 이들은 지옥을 경험한다. 다문화, 다인종으로 구성된 인도 사회에 내재된 공포를 그로테스크하게 담아내며 호평을 받은 영화지만, 오랫동안 인도 영화계를 짓눌러온 검열의 날을 비껴가진 못했는데, <S. Durga>로 제목을 바꾸고 일부 장면을 덜어냈지만 지금까지 자국 내 상영은 물론 개봉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고 있다. 2017년 인도독립영화인들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대를 안겨준 작품은 아미트 마수카 감독의 <뉴턴>이다.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마오주의 반군과 정부군이 대립하고 있는 차티스가르주 분쟁지역을 배경으로, 갓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대기 중인 뉴턴이 이 지역주민들의 투표지원 업무에 자원하면서 생기는 과정을 따라간다. 강직하지만 융통성 없는 공무원 뉴턴과 지역을 관할하는 정부군 소속 군인들, 그리고 선거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변방 마을 주민들을 통해 인도 사회를 재치 있게 풍자하는 이 블랙코미디는 인도독립영화인들과 시네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새로운 대안 영화로까지 평가를 받은 작품. 이후 개봉을 통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으며 특히 쟁쟁한 상업영화들을 제치고 2018년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 부문 인도 출품작으로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아쉽게도 <섹시 두르가>는 아직 한국에서 소개된 적이 없으며, <뉴턴>의 경우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