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의 제전
- 감독
- 하길종
- 제작년도
- 1969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하길종은 신화화된 감독이라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길종은 그의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감독이기에 이 말은 틀렸고, (그의 영화가 아니라) 하길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양산되면서 신화화 되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맞다. 문제는 후자에 있다. 하길종은 신화화하기 ‘딱’ 좋은 인물이다. (‘딴따라’라며 영화계를 천시하던 시기에) 서울대라는 최고 학부를 졸업했고, (누구도 제대로 된 영화 공부를 하지 않던 그때)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UCLA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너무도 엄혹한 현대사의 중심에서) 그 어떤 영화인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다가,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다. ‘4.19세대’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특히 문화 분야의 이름난 이들이 하길종의 친구들이었다. 하길종 사후에도 신화화가 멈추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하길종을 둘러싼 신화가 굳건히 유지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길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길종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간한 『한국영화 100선』에서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세 영화가 있었다. 김기영의 <하녀>(1960), 유현목의 <오발탄>(1961), 그리고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등이 그것인데, 놀라운 것은 언제나 표현주의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하녀>, ‘한국적 리얼리즘’의 정수로 여겨지는 <오발탄>과 함께 <바보들의 행진>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분명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한국영화사에서 <바보들의 행진>만큼 한 시대를 온전히 담고 있거나 그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엔딩 신인 용산역에서의 키스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현실적인 시간으로 1970년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이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유신의 억압에 맞서 고뇌하고 좌절하던 청춘이 선택한 것은 자살과 군 입대였다. 낭만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병태는 친구 영철이 자살하자 역설적이게도 입대를 한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입대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도피를 늦게 알게 된 영자가 달려와 기차에 매달린다. 둘의 그 슬픈 키스는 1970년대 청춘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때 구슬프게 들려오는 “날이 갈수록”을 더 설명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고래사냥”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1970년대에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암울했을까? 역으로 말해, 이 영화가 존재함으로써 1970년대에도 한국영화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시대를 평가하고 회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하길종은 이 영화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평가 받아야 할 감독이다. (사진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엔딩 장면 ‘하길종 신화’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김지하와의 인연이다. 중동고 졸업 앨범에는 하길종과 김지하가 나란히 등장한다. 훗날 함께 서울대 인문대에 합격해 ‘인문대 거지그룹’ 멤버가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은 두 사람은 그러나 가는 길이 달랐다. 4.19를 겪은 후 김지하는 민중 시인의 길을 걸었고 하길종은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가는 길이 달랐지만, 아니, 달랐기 때문에 둘은 꾸준히 교류할 수 있었다. 하길종이 귀국하자마자, 그리고 죽을 때까지 연출하려고 했던 영화가 <태인전쟁>이었던 것도 김지하와의 교류 덕분이다. 김지하가 공부하던 동학사상을 하길종은 영화로 만들어 세계 영화계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하길종이 오히려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발굴해 세계 영화계로 진출하려 노력한 것은 김지하와의 관계를 떼면 설명하기 쉽지 않다. (사진2) 중동고 졸업 앨범의 하길종 1964년, 하길종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젊고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이 있다. 우리 나이로 스물넷의 이 청년은 금문교 앞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잔뜩 멋을 부리고 앉아 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기에 그의 기대는 그만큼 컸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이면서 영화에 관한 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미국 아닌가. 미국에 온 지 일 년만에 마침내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2년 반만에 다큐멘터리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써 졸업을 했다. 그 사이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과 결혼해 득남했다. 이 시기 하길종은 친구 곽광수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꾸준히 했다. 결국 그가 설 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사진3) 유학 시절 금문교 앞에서 (사진4) 유학 시절 영화를 촬영하며 1969년, 하길종은 문제의 실험영화 <병사의 제전>(1969)을 만들었다. 영화사 MGM이 전미 영화과 학생 가운데 4명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하길종이 선발되어 후원을 받은 것이다. 귀국 후 몇 번 상영되다가 필름이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오랜 세월이 지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길종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발굴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운드는 멸실되어 이미지로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얼마나 고뇌 깊은 영화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하길종은 1960년대 중후반의 혼란스런 미국에서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실험적인 영화 형식 안에 담아냈다. 타나토스적 욕망과 에로스적 욕망, 문명과 인간, 삶과 죽음 등이 치열하게 교차하는 장면을 알레고리화해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강한 실험성을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실험을 귀국 후 충무로에서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순진함이 차라리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이다. (사진5) <병사의 제전>(1969)의 한 장면 1970년 가을, 6년의 유학을 마친 하길종은 마침내 귀국했다. <태인전쟁>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이효석의 원작 <화분>(1972)을 연출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하길종이 충무로에서 대중적인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비평에서도 표절 논쟁에 휘말리고 말았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지나 서서히 긴 침체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 실험성이 강한 ‘정치적’ 영화를 당시 대중들은 수용하지 못했고, 보수적인 영화상과 비평계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다. 196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 가령 이만희의 <휴일>(1968), 김수용의 <안개>(1967), 이성구의 <장군의 수염>(1968) 등의 작품보다 더 강한 정치적 실험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쇼적인 한국 사회에서, 당시 세계영화사적 흐름인 정치적 모더니즘으로 정면승부를 펼치려고 했으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청와대로 상징되는 파란 집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추한 욕망을 전시하는 영화를 통해 하길종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적시했지만, 동시에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깨달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분>이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 가운데 한 편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6) <화분>(하길종, 1972)의 한 장면 차기작 <수절>(1974)은 화천공사에서 제작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하길종의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충무로 주류 영화사에서 제작했고, 화천공사에서 연출한 4편 가운데 흥행에 실패한 단 하나의 영화라는 말이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하길종의 연출작 7편 가운데 원작이 없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화분>의 실패 이후 하길종은 현대의 푸른 집을 재현하는 대신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음에도 그가 하고자 한 이야기는 여전했다. 특정 마을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군부 독재의 폭정. 특이하게도 <수절>은 공포영화의 컨벤션을 빌려와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딸의 한을 남편이 복수하는 내용이지만, 1970년대 중반이라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 검열하던 상황에서 온전히 통과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특히 강간 장면이 많이 잘려 나갔다. 검열에서 20분 정도 잘린 영화를 본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나의 모습”이라고 당시 심정을 적었다. 데뷔 후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검열에서도 상처를 받은 하길종. 미국에서 꿈꾸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었다. (사진7) <수절>(하길종, 1974) 촬영 현장에서 영화는 산업이다. 이 말은 투자한 돈은 회수할 정도의 흥행을 기록해야 한다는 뜻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하길종은 이번에는 흥행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소설가 최인호가 쓴 에피소드식 콩트 『바보들의 행진』을 하길종 식으로 각색해 완성한 것. 이후 최인호와 하길종은 깊은 인연을 맺어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을 함께 했는데,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하길종은 최인호와 작업할 때 자신만의 각인은 약해졌지만 흥행에서는 성공을 거두는 아이러니를 겪어야 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하길종은 원작에 없는 영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보수화된 당시 사회를 상징하는 캐릭터와 장면들을 넣었으며, 송창식과 강근식의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1970년대 한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아주머니들인 ‘고무신’ 관객에서 대학생인 ‘하이힐’ 관객으로 관객층이 변화하는 흐름을 만들어내었고, 다시 이것은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로 명명되었다. 단언컨대 1970년대의 영화가 탄생했다. (사진8)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을 개봉한 국도극장 풍경 <바보들의 행진>의 흥행 이후 하길종은 이장호, 김호선, 변인식 등과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이 동인을 통해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고 감독을 육성하면서 새로운 흐름, 즉 뉴 웨이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영상시대 결성 이후 만든 <여자를 찾습니다>(1976)는 안타깝게도 다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김주영의 원작은 재미있었지만 영화화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남녀 갈등을 그린 원작은 영화보다는 TV 드라마로 각색되었을 때 그 묘미가 살아날 것 같았지만, 하길종은 하재영을 다시 한 번 주연으로 삼아 청춘의 질주를 그려냈다. 눈에 띄는 감각적인 영상은 곳곳에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영화가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이 시대와도 맞지 많았다. 도시의 타락과 대비되는 시골의 순수함으로 귀환한다는 내용은 뭔가 어색했고, <바보들의 행진>과도 한참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사진9) <여자를 찾습니다>(하길종, 1976)의 한 장면 <한네의 승천>(1977)은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이다. 하길종이 가장 좋아하던 하명중 주연, 유영길 촬영의 마지막 영화였고, 영상시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하길종과 영상시대는 침체하던 한국영화를 갱신해 세계영화계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 하나가 한국적이면서 우주적인 소재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하길종의 말을 빌리면, “전생과 내세와 현세가 한 지평 속에서 공존하는 윤회사상을 2대에 걸친 부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향토색 짙은 영상으로 그려 보려”고 한 것으로, 실제 설악산과 공주의 깊은 산에서 촬영한 영화에는 탈춤, 산신제, 남사당, 걸립 등이 등장한다. 윤회 사상을 그리기 위해 여배우 전영선이 1인 3역을 하고 흑백과 칼라가 교차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하길종의 의도대로, 한국의 비극이지만 한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대결하는 서구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영화는 묻히고 말았다. (사진10)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의 포스터 다시 하길종은 흥행 영화로 눈을 돌렸다.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 자격이 정지되었던 이장호를 대신해 그는 <속 별들의 고향>(1978)을 연출했다. 하길종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장호의 뒤통수를 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만의 하나 흥행에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 배수지진. 이런 각오로 만든 <속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가운데 손꼽을 만한 영화가 되었다. <별들의 고향>의 속편이지만 호스티스물이 아니라 낭만적이면서 병폐적인 사랑이야기를 아름답고 쓸쓸하게 재현한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볼거리를 남겼고, 또 어떻게 보면 하길종이 좋아하던 서구 감독에게 오마주를 바치면서 지적 이야깃거리를 던졌으며, 한편으로는 병으로 죽어가는 낭만주의자를 형상화하는 방법으로 그의 자의식을 영화 속에 심어 놓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주인공 문오는 감독 하길종과 겹친다. 잠깐 카메오로 등장해 한없이 초조해하던 하길종의 모습은 현실의 그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이다. (사진11) <속 별들의 고향>(하길종, 1978) 촬영장에서 <병태와 영자>(1979)가 개봉해서 한창 흥행을 할 때 하길종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유작이 되어버린 것.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가 유작인 것은 아마 치욕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속 별들의 고향>도 속편이었고 <병태와 영자>도 속편이었다. 자신을 ‘속편 감독’이라고 자위하면서, <병태와 영자>의 흥행을 보며 이제는 진정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하길종에게 <병태와 영자>는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영화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병태와 영자>는 그리 좋은 영화는 아니다. 속편의 연결성도 떨어지고 극적 재미도 덜하다. 그럼에도 가난한 청년이 시대의 권위와 부에 맞서 싸워나가는 에너지는 어떤 영화보다도 강하게 살아있다.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을 연상시키는 엔딩이 더욱 그렇다. 가진 자가 자동차로 거리를 달릴 때 병태는 뛰어서 간다. 이때 감독은 둘을 교차로 편집하는데 기묘하게도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당연히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길종은 젊음의 싱그러움, 그 무한한 힘이 이기도록 설정해 놓았다. 미처 마흔도 되지 않은 하길종이 그 시절 젊었다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진12) <병태와 영자>(하길종, 1979) 포스터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한다. 하길종은 영화감독만 한 것이 아니다. 귀국해 국내에서 활동한 시간 내내 그는 감독생활을 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감독이 평론을 겸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지만, 하길종은 미국에서 배운 이론과 새로운 영화 사조를 국내에 빠르게 전파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엑소시소트』, 『스타워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중앙대, 서라벌예대 등에서 강의를 하다 서울예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것도 인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생전 하길종의 이 모든 활동은 한국영화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으며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았다. 하길종은 동료 감독의 영화를 매우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평하는 것으로 유명해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신랄하게 평가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하길종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13) 유현목 감독과 (사진14) 서울예대 제자들과 한국영화사의 숱한 감독들은 시대와 싸워야만 했다. 나운규의 일제강점기, 유현목과 임권택의 반공영화 시기를 보면 시대가 영화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하길종도 마찬가지이다. 하길종을 평가하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그가 충무로에서 활동한 시기이다. 박정희의 유신이라는 폭압적인 정치 체제 시기에 하길종이 활동했다. 더 세밀히 말하면, 데뷔작 <화분>을 만든 1972년은 유신이 시작된 때이고, 하길종이 세상을 떠난 1979년은 유신이 종말을 고한 때이다. 그러니까 하길종은 가장 가혹한 시기에 바로 이 땅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8년 동안 하길종은 영화감독으로서, 영화평론가로서, 영화학과 교수로서, 번역가로서, 영화운동가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은 여기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서른여덟이라는,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 그. 지금 그는 경기도 광주의 한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 땅에서는 매우 드물게, 사각형의 돌로 된 그의 무덤에는 생전 그의 필체로 각인된 “河吉鐘”이라는 이름과 생몰연도만 기록되어 있다. (사진 15) 하길종의 무덤
하길종 의 < 바보들의 행진 >(1975)은 영화가 겪어야 했던 검열과 수난의 역사가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다. 각본 단계에서부터 극장에 걸리기까지 5차례에 걸친 사전검열에 의해 이야기가 마구잡이로 난도질 되었으며, 다섯 곳 장면 삭제, 네 곳 장면 길이 단축, 세 개 대사 삭제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바보들의 행진>의 현재 남아있는 네거티브 필름의 분량은 102분. 검열을 받기 위해 제출할 당시의 공식적인 러닝타임 117분에서 무려 15분이 잘려나간 것이다. 이에 감독은 심의를 통과한 직후, 삭제된 필름을 다시 붙여 원래의 판본을 국도극장에 걸었지만 이 또한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걸려들었다.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 송창식의 ‘왜 불러’와 영철의 테마곡인 ‘고래사냥’은 공연예술윤리위원회에 의해 금지곡 판정을 받고 음원 판매도 금지당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서울 관객만 잡아 15만에 달하는, 당시 기준에서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감독 본인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 수절 >(1973)을 꼽았지만) 하길종 의 대표작으로 한국 영화사에 남게 되었다. 각본과 기록을 통해 더듬어 원형을 유추해볼 따름이지만, 남아있는 판본만으로도 < 바보들의 행진 >은 걸작이다. 정부의 탄압과 대중의 호응, 저주와 찬사를 오가는 이 양가적인 반응은 이 작품이 청춘드라마의 표면을 넘어 시대의 정곡을 관통하는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지식인 감독 하길종의 예민한 감수성은 그렇게 당대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영화에 투영하며 활로를 찾지 못한 청춘들의 답답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속사적 관점에서 보는 70년대의 한국 일차적으로 < 바보들의 행진 >은 그 당시의 풍속을 조명하는 미시사적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밤 12시가 넘으면 통행금지에 걸려 돌아다니지 못하고, 경찰만으로는 부족한 치안력을 보조하던 방범대원들이 통금 위반자를 적발해 파출소에 넘기는가 하면, 막 성년이 된 20세에 바로 군대로 징병 되기 위해 징병검사관의 눈앞에 거의 발가벗겨진 채 서야 했고, 미풍양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경찰이 자를 들고 일정길이 이상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헤어스타일도, 옷차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행동, 거취의 자유도 제약되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침해가 일상적으로 치러지고 그걸 묵묵히 감수해내야 했던 억압의 시대. 이 작품에서 하길종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보’란 무기력하게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스스로 ‘바보-되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청춘의 모습을 잘 함축하는 표현인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1970년대라는 시대의 생경함. < 바보들의 행진 >은 병태, 영철, 영자 등 대학생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당시 청춘들이 처해야 했던 시대의 풍경을 조명한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생맥주와 통기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춘 문화의 기풍이 그나마 숨 쉴 틈을 열어주었고, 당시로선 충격적이었던 여성의 흡연이 자유와 반항, 파격을 추구하던 신여성의 아비투스(habitus)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군사적 근대화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회의 기저에서는 은연중에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경기 응원 간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강의실을 나가는 장면은, 본래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수업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신체 길들이기 - 파시즘적 상황과 산업전사의 탄생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저작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적 인간의 탄생에 대한 계몽주의적 환상을 깨부순다.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합리적 이성, 주체적 개인을 키워내는 관념적 계몽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이란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신체를 길들이고 시스템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형을 찍어내고자 한 유물론적 과정의 산물이 근대적 인간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의 기계화, 규율과 감시의 시선, 그리고 처벌을 통해 일정한 패턴의 행동양식을 강제하고 몸에 각인시킴으로써 국가 권력의 필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표준적 신체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 산업혁명 이래 20세기 서구의 근대화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개발도상국에선 군사주의-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동반하면서 더욱 강압적인 형태로 발현되었다. < 바보들의 행진 >은 징병 신체검사를 받는 대학생들의 행렬을 비추는 걸로 막을 연다. 징병검사관 앞에 발가벗겨지고 일사불란하게 구보하는 학생들의 모습. 체제에 적응하기 적합한 신체‘인가-아닌가’(합격/불합격)의 여부를 선별하는 일종의 입사식.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전통 없이 근대화를 경험한 국가의 군국주의적 사회상이 단적으로 드러낸다. 1930년대 독일과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에게 군대식 훈육을 강요하고 획일적으로 주입한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은 1970년대 한국에 고스란히 계승된 것이다. 군대가 아닌 민간에서도 ‘감시와 처벌’의 시선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위협하는 경찰, 캠퍼스 안에서 담배를 태운다며 학생의 뺨을 때리는 교수 등. 시위가 없더라도 경찰과 공안조직의 존재가 촘촘히 짜인 그물처럼 곳곳에 퍼져 개인의 신체를 ‘관리’하고 있고, 그런 갖가지 교정을 거쳐 ‘철이 든’ 한국인은 ‘군국주의-자본주의’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군대(‘반공투사’)와 산업현장(‘산업전사’)을 떠받치는 부속이 되었다.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는 기계적인 신체의 생산. 이러한 군사적 훈육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반사회분자로 몰려 탄압과 재사회화의 대상이 되었다. < 바보들의 행진 >에서 징병검사에 불합격하고 철학과 출신으로 장래가 불투명했던 몽상가 영철의 자살은 한국적 근대화가 지닌 획일적 성격, 미세한 탈주와 일탈의 여지조차 빈틈없이 봉쇄하고 포획하려는 권력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극 중 영자가 빗대듯 ‘동물원 우리의 사슴’과 같았던 70년대의 청춘들. <바보들의 행진>은 통제의 손길이 잦았던 시대를 산 억눌린 청춘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동시에, (‘군관민일체(軍官民一體)’라는 표현처럼) 국가와 민간이 하나 되어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신체에서부터 파괴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기계적 신체로 재구성하고자 했던, 군국주의의 맥락에서 산업화를 달성하려 했던 한국적 근대화의 특질을 고발하는 메타 텍스트가 된다.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미국 UCLA에 입학해 영화를 전공한 유학파 출신이었다. 재학 시절 만든 단편 < 병사의 제전 >(1969)으로 MGM이 미국 전체 영화학과 학생 4명에게만 주는 메이어그랜드상을 받았으며, UCLA 강사 자리가 보장된 상황이었음에도 귀국(이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귀국을 만류했다는 설이 있다)하여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7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가적 행보는 매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검열로 훼손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 수절 >의 경우 20분이나 잘려나갔고 < 바보들의 행진 >의 삭제장면들은 반체제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사유로 당국에 필름을 압수당한 뒤 불태워져 복구가 불가능하다. 인간성을 검열하는 체제를 비판한 영화 또한 검열의 손길에 짓밟히는, 이 지독한 비극적 아이러니. 권력은 자의적인 잣대로 영화를 검열하고 훼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지로 시간을 봉인한 채 살아남아 역사를 증언하는 것으로 당대에 복수한다. <바보들의 행진>은 지금도 여전히, 10월 유신체제 시절 한국의 사회상에 대한 생생한 영화적 증언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