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 감독
- 부지영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공효진, 신민아, 추귀정, 김상현, 문재원, 배은진, 김대흥, 이선희, 이정은, 한동화, 양영조, 박동현, 곽병규, 최교식, 김진욱, 서민이, 안세은, 김지나, 이나현, 송기동, 김지수, 곽병규
‘글로 쓴 역사’가 다가갈 수 없는 역사에 대한 감각적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어두침침한 공장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피를 토하던 어린 여공이 “손 씻을 데가 없어요.”라며 흐느낄 때, 언어의 추상적 서술이 배제할 수밖에 없던 역사의 감각이 깨어난다. 흑백 화면 속에 1960년대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박광수 , 1995)은 숨 막힐 것 같던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관객을 위치시킨다. 노동 투쟁의 역사를 소재로 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그 이전의 한국영화가 외면했던 현대사의 치부를 응시하려 했던 ‘코리안 뉴웨이브’의 시대정신으로 충만한 작품이다. 이러한 면에서 박광수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한국영화계의 죄의식을 덜어준 감독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걸작선’으로 통칭되는 글과는 달리) 이 작품이, 또는 박광수가 한국영화계에 일군 영화적 성과를 상찬하는 것으로 이 글을 채우고 싶지 않다. 그러한 내용의 글이라면 이미 충분하다. 오히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지금 이 시점에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이 작품에 내재한 역사적 한계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은 단지 이 작품의 한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생산된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다. 그 한계를 들춰내는 것, 그럼으로써 그 시대를 성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코리안 뉴웨이브의 정신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영화라 하더라도) 모든 역사서술은 그것이 발화되는 시대의 역사적 한계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전태일( 홍경인 )의 삶을 한 축에 두고, 또 다른 한 축에 그의 일대기를 평전으로 남기려는 김영수( 문성근 )의 삶을 병치시킨다. 즉, 전태일의 삶은 김영수라는 화자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서사구조는 전태일로 상징되는 1960년대 노동 현실과 유신 독재에 맞섰던 1970년대 학생운동을 한 곳으로 수렴하면서, 암흑의 현대사와 온몸으로 싸웠던 아름다운 청년‘들’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서사 구조에 대해 왜 노동자의 삶이 지식인이라는 필터를 거쳐 서술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달리 말해,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에서 반복되는 지식인 화자라는 서사적 특성 속에는 민중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의식의 한계가 내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면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지식인은 이중적 존재이다. 한 편으로 지식인 서술주체는 노동 계급을 대변하면서도, 또한 그들의 직접적인 역사서술을 가로막음으로써 노동 계급이 역사서술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와 관련하여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 관객에게 전해주는 주된 정서가 전태일이 아닌 김영수에게서 비롯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영수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계급적으로 일정한 거리가 있을뿐더러, 또한 수배 중이기 때문에 학내 투쟁에도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못한다. 김영수가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는 것이 마치 그를 휘감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에 빠진 김영수의 모습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된 시기의 지식인 계층의 정서에서 파생된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 시기의 지식인 계층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중 세력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또한 새로운 세력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시기이지 않았는가? 이러한 정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노동계급이 아닌 지식인 계급의 자기 회고담처럼 느껴지도록 한다. 이미 운동권이 쇠락해진 1995년은, ‘서른, 잔치가 끝났다’는 선언과 함께 과거의 후일담을 팔아대던 시절이지 않은가? 처절히 싸웠던 시절에 대한 회고담을 통해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이 과정에서 전태일은 현실과 맞서 싸운 노동 투사가 아닌 도덕적으로 숭고한 종교적 순교자로 완성된다. 실제로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은 자유간접화법(indirect free discourse)을 통해 전태일의 시점과 김영수의 시점을 반복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두 사람의 차이를 지우려 한다. 전태일의 계급투쟁과 김영수의 유신투쟁(정치 투쟁)은 하나의 지점에서 수렴되지만, 결코 이 두 투쟁은 동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태일의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적대 관계인 두 계급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김영수의 투쟁은 유신 체제라는 정치적 영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투쟁이 한 데 뒤섞임으로써 1987년 이후 정치적 영역의 운동이 종료함과 동시에 계급투쟁도 시효가 끝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회고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법이고 보면, 결국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의 회고적 성격은 이러한 착시 효과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노동 계급의 투쟁이라는 미완성의 서사를 ‘정치적 민주화’라는 완결형의 서사로 대체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종결된 사건의 회고적 후일담으로 위치시켜버린다. 달리 말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노동 계급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지식인의 시선으로 매개함으로써 계급 적대라는 실재적 공포를 이데올로적으로 봉쇄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 카트 >( 부지영 , 2014)가 증명한다. 노동 계급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고, 비정규직은 자신과 동일한 노동계급인 정규직 노동자에게서 다시 한 번 소외되는 ‘이중 소외’를 겪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다. 만약 2014년이라면, 전태일의 투쟁이 이미 종결된 것처럼 회고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분명한 것은, 노동 계급의 역사는 아직 단 한 번도 종결된 바 없고, 그렇기에 회고적으로 후일담을 이야기할 시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옴니버스 영화 한 편을 준수하게 ‘뽑아내는’ 게 참 힘들다. 그 각각의 에피소드가 바통 터치하는 것을 지켜보는 관객도 중간에 한 번쯤은 마음이 편치 않다. 가요 순위 프로와 비슷하달까. 색깔 다른 무대를 골고루 구경하는 풍성함이 있다 싶다가도, 그 사이에 그저 장르의 차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엄연한 수준차 (또는 보는 이의 호불호)가 존재하기에 공연이 아닌 경연을 참관하는 듯 얄궂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비유가 좀 얇긴 했지만 옴니버스 영화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힘든 이유가 거기 있지 않나 싶다. 다만 그렇게 미리 까칠한 태도로 관람하더라도 국가인권위의 다섯 번째 옴니버스 프로젝트인 < 시선 너머 >의 성취는 상당하다. 새터민 청소년을 다룬 < 이빨 두 개 >는 강이관 감독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신중해서 아름답고, 이주노동자를 다룬 윤성현 감독의 <바나나 쉐이크>는 주제에 눌리지 않은 활력이 넘친다. 김대승 감독의 <백문백답>은 정보인권 이슈를 직장 내 성폭력 문제와 세련되게 결합시킨 웰메이드이고, 부지영 감독의 < 니마 >는... 그래, 이 < 니마 >가 조금 튄다. 기왕에 릴레이에 비유하자면, 중간에 바통을 받아서는 비뚤배뚤 뛰다가 가속도를 내려나 싶은 순간에 구간이 끝나는 주자다. 여성, 불법체류 이주민, 비정규노동자 등등 한국사회에서 소수자/약자로 규정될 정체성을 주인공 캐릭터 (모텔에서 청소일을 하는 몽골이주여성노동자 ‘니마’) 에 단번에 모아놓고 그 수난의 양상을 죄 보여주려니 영화가 너무 바쁘다. 고국 몽골에 남겨두고 온 딸의 출산, 소통을 사양하는 한국인 여성 동료, 방 한복판에 배설물을 싸지르고 가는 무례한 투숙객, 함께 온 여성을 두들겨 패며 되려 유세를 떠는 비열한 남자, 니마를 그저 윽박지르는 모텔 지배인, 나 홀로 출산을 위해 모텔을 찾은 여고생 등등의 이슈가 명멸하는 모습은 마치 옴니버스 속에 또 다른 옴니버스가 위치한 느낌마저 든다. 어, 그런데 이런 태도가 어쩐지 친숙하다. 영화를 공공적 접근(public access)으로 대하고 실천하는 습작들의 리듬이 이렇다. 기존 매체들이 시선을 할애하지 않던 자신과 이웃의 삶을 한 번에 담아내려니 배열이 서툴고 바쁘다. 드라마의 구축보다는 우정의 나열이 중요해진다. 어찌 보면 연출자에게도 이 몽골 여성은 노련하게 극화해야 할 대상이 아닌 정말 이웃인 거다. 드라마보다는 우정이 중요한 거다. 대개 이런 태도를 프로답지 못하고 아마츄어에 가깝다 얘기한다. 그런데 아마추어적인 태도가 꼭 부정할 무엇일까? 아마추어(amateur)의 어원을 번역하자면 ‘love of’가 된다. 즉 돈이나 명예를 위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추구한다는 의미. 지금 이 땅에서 공공의 영역이 충분히 보듬지 않는 인물들을 연출자 개인에게 주어진 기회로 감싸려는 부지영 감독과, 영화 속 최약자면서 오히려 모두에게 손을 내미는 니마의 미덕이 그렇게 겹친다. 가령, 온갖 세탁물들이 니마의 손을 거쳐 모텔 구석의 튜브를 통해 꾸역꾸역 내려가던 이미지 - 온갖 잡스러운 사연을 똘똘 말은 타올과 시트들이 툭- 튜브 밖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어떤 낙심의 표현이 아닌 엄숙한 출산을 닮은 풍경이다. 그 앞에서 니마는 그저 낮은 존재가 아닌 늠름한 산파인 셈이다. 자신을 닮은 여성의 사연들을 수렴할 때 묘하게 아마추어 같아지는 부지영 감독 또한 그렇다. 그녀가 더 좋은 산파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