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례기
- 감독
- 유현목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윤정희, 허장강, 이순재, 안인숙, 사미자, 최남현, 주증녀, 이길억, 복혜숙, 양석천, 윤희, 박옥초, 송일민, 임동천, 문미봉, 김지영, 정미경, 이정애, 곽태용, 손전, 노강, 박예숙, 김승남, 여정권, 서인숙, 박정수, 박명운, 한경훈, 권일정, 강한순, 김신명, 지방열, 이영호, 이동섭
1.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이유는 전부 비디오에세이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고전영화를 ‘본다’기보다 다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비디오에세이깨나 만드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건 아니다. 재작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구입한 이후 계속해서 결과물들을 산출하고 있기는 하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혼자 하는 것들은 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냥 폴더에 담아두기만 한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본다’라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이미 나는 ‘땡’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수년 전 미디액트에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실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상을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시도로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역시나 그 작업의 최종 목적지는 여러 영상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깔아서 산출하는 mp4 파일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대상(물)과 그 대상(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적절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로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이것저것 보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영상을 탐색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안 보던 고전영화들을 본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고. 사실 ‘한국고전영화’야말로 아도르노가 정리한 대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고찰”1)이라고 하는 에세이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소재다. 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보는데,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말하기 위해 내가 만들다가 만 한 편의 비디오에세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를 말해보려 한다. 1959년작 < 여사장 >(한형모)부터 <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두고만 보세요 >(김봉환, 1964), < 떠날 때는 말없이 >(김기덕, 1964), < 회전의자 >(이형표, 1966), < 억울하면 출세하라 >(심우섭, 1969) 등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의 영화에서 직장인들의 출퇴근, 회의, 월급날, 신입사원 채용, 면접, 점심시간, 사내연애, 근무 중 농땡이 부리기, 상사의 꾸지람 등의 장면들을 골라 붙여 만든 것이다. 부끄럽게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조금은 재밌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명에게는 보여주고 반응을 살핀 적도 있었다. 그중 몇 명으로부터는 냉철한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려는 생각으로 처박아 두었다. 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갖다 쓴 부분인데, 바로 김진규의 직장 동료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는 두 장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계리사사무소에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피스트가 분첩을 꺼내 찍어 바르며 “육시랄하게 시간도 안 가지”라고 말하고 김진규에게 상사 없을 때나 쉬지 언제 쉬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곧바로 상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타이피스트는 후다닥 분첩을 집어넣고 다시 바쁜 손동작으로 타자기를 친다. 두 번째 장면은 이들이 퇴근하는 장면으로, 타이피스트가 “월급도 받았는데 집에 그냥 가냐”며 김진규를 낚으려고 하다 김진규가 “월급을 아내에게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며 거절하니 “흥, 재~미없어”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타이피스트가 쌩하고 사라지자 혼자 남은 김진규는 이가 아파 볼을 만지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노잼인증’을 당해 겸연쩍은 느낌으로 빠르게 자리를 뜨는 느낌으로도 보인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이 장면이 원작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규 같은, 즉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매사 진지하기만 한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더없이 적절한 공격 타이밍으로 촌철살인의 일갈을 할 수 있는 젊은이 특유의 여유랄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발탄>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육시랄’이라는 욕설의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대사엔 욕설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의 영화들에서도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김숙일, 도금봉, 최지희 같은 여배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역 여배우들이 김승호나 김희갑, 주선태 같은 문제적 상사들에게 속 시원한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꽤나 자주 볼 수 있었고, 대사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전통적인 규범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후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군의 여배우들 즉, 노경희, 양미희, 나애심, 안나영, 김의향 같은 배우들의 활약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이중에 < 서울의 휴일 >(이용민, 1956)과 < 화심 >(신경균, 1958) 등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양미희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의 필모를 깨기 위해 보게 됐던 홍성기 감독의 < 열애 >(1955)에서, 나는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2. 한국고전영화를 가끔이지만 조금씩 보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고전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하고 안 하고 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고전영화를 픽션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고전영화에서 내가 목격하는 ‘과거의 한국’이나 ‘과거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거나, 반대로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들의 작용이 픽션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의 외피를 쓴 무의식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잘 찍고 내러티브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도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내러티브가 산만하고 완성하기에 급급했다 싶은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영화는 내게 있어 재미가 있다/없다, 이해가 잘 된다/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익숙한가 아닌가의 단순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국고전영화의 ‘디폴트값’을 알아챘다는 뜻이어서,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왜 특이하게 여겨질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끔 의외의 재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홍성기 감독의 <열애>를 본 후, 나는 내가 배우 ‘석금성’과 ‘복혜숙’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열애>에 나오는 복혜숙은 출연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석금성의 목소리인 걸로 착각이 되었던지 나는 <열애>의 그 인물을 한참이 지난 뒤까지도 ‘석금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닮은 꼴 배우를 헷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닮았다’ ‘안 닮았다’라고 하는 조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판단조차 개인의 이미지 경험이나 레퍼런스에 영향받기 때문에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배우들도 가끔은 헷갈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복혜숙과 석금성은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동그란 얼굴에 눈이 새까맣고, 항상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약간 비슷하다. 심지어 음성도 걸걸하면서 중저음인 게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헷갈린 건 그 둘이 외양과 음성이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혜숙’이란 배우가 있고 ‘석금성’이란 배우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어떨 때는 착하게 나오고(복혜숙), 어떨 땐 고약하게도 나온다고(석금성) 생각했던 것이다. 왼쪽은 24세의 석금성이고 오른쪽은 26세의 복혜숙의 모습이다. 둘 다 토월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 사진 출처: 석금성-1930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복혜숙-1931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복혜숙과 석금성을 빠르게 구별하기 위해 찾은 김남석의 『조선의 여배우들』(국학자료원, 2006)은 연배마저 비슷한(복혜숙이 1904년생, 석금성이 1907년생으로 세 살 차이) 이 두 사람이 토월회라는 신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김수용 감독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1957년 여름 < 배뱅이굿 >을 찍기 위해 충청도 온양에 머물렀을 때 사이가 굉장히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쓰면서 서로를 비방했다고 썼다. 2) 석금성은 워낙 동료 연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고 3) , 실제로 모 배우가 석금성의 거친 성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영화사연구자 L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복혜숙이 남긴 ‘나의 교유록(交遊錄)’ 4) 을 보면 복혜숙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 토월회에서 활동하다 영화계에 들어왔고 영화에선 둘 다 주로 할머니 역을 했던 공통점도 있으니 거의 지척에서 서로를 봤을 텐데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니 두 배우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다. 3. 1904년생 복혜숙과 1907년생 석금성은 각각 10대 후반에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입단해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각각 인기 여배우로 거듭났지만 토월회 입단 전후로 기생 활동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불안정한 쇼비즈니스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5) 20~30대 시절 영화에 단발적으로 출연했지만(복혜숙은 < 농중조 >(1926), 석금성은 < 심청 >(1937))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전후의 나이였다(복혜숙은 < 수업료 >(최인규, 1940)에서 영달이 할머니로, 석금성은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에서 최은희 어머니로). 이들보다 불과 10살가량이 어린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당시 조선에 형성되기 시작하던 영화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현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전시 체제 프로파간다의 얼굴이 되어가는 동안, 복혜숙과 석금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이미 ‘여성’보다는 ‘모성’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복혜숙은 <수업료>에 영달이 할머니로 출연했을 때 고작 37세였다. 그녀의 당시 나이를 알고 <수업료>를 다시 봤더니 그냥 할머니 분장한 젊은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에 출연한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에서만 해도 그는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라디오를 할부로 구매하는 활달한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데, 그 후로 맡은 역할은 거의 다 온정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유모, 식모 같은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석금성은 <마음의 고향>에서 최은희의 완고한 친정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그 이후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 < 자유결혼 >(이병일, 1958), < 촌색씨 >(박영환, 1958) 등에서 표독스러울 정도의 거친 모성을 연기하거나 아예 무당(<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이나 < 강화도령 >(신상옥, 1963), < 만고강산 >(최인현, 1968))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했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 연거푸 전형적인 역할에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은 안타깝게도 개점휴업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내가 이들을 혼동한 데에는 연달아 비슷한 역(온정적인 어머니냐 완고한 어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연유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복혜숙은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하기 위해 기생 활동이나 다방 마담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고 7) 대한영화배우협회, 성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영화계 대표 ‘인싸’였다. 심지어 임화수도 복혜숙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고. 8) 하지만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 이력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나 9) 연예인 친구보다는 평범한 주부들이나 동네 부인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흔히 말하는 '주부도박단' 사건에 두 번이나 연루되는 등의 사정으로 봤을 때 연예계에서는 전형적인 '아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55세의 나이로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복혜숙.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생애 말기에 연기자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둘은 토월회 50주년 기념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연극 <이대감 망할대감>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고, 10) 복혜숙은 7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석금성은 8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다. 76세의 나이로 < 사랑의 조건 >(김수용, 1979)에서 한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연기를 펼친 복혜숙이나, 80세 넘어서 출연한 TV문학관 <사평역>, KBS 설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 SBS 드라마 <분례기>,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 등에서 엄청난 존재감과 명연기를 선보인 석금성을 보면 생애 마지막 나날까지도 꾸준한 자기 관리로 일을 해나갔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에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유작인 SBS 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에 출연한 석금성의 모습. 4. "악역을 많이 맡아 욕을 무던히 먹어서인지 오래 살지요? 이제까지 살면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제는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 하는 식으로 산답니다.” 1983년의 인터뷰에서 석금성은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에 선배인 복혜숙 씨마저 타계하는 바람에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복혜숙은 72년의 인터뷰에서 토월회의 가장 큰 성과로 1929년에 공연했던 <아리랑고개>를 언급하며 “처녀 봉이(석금성)가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긴 아버지를 따라 괴나리 봇짐을 들고 간도로 가면서 사랑하는 총각과 이별하는 구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석금성의 눈물을 따라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임검경관마저 같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11) 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흔적으로, 내가 찾은 바로는 이 두 개가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1년 5월 14일 자 11면. 함께 찍었다기보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찍힌 사진 같기도 하다. 복혜숙과 석금성은 복혜숙의 남편인 김성진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1973년에 있었던 토월회 50주년 행사 때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토월회에서 데뷔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무리하게 묶어서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행적을 파악하며 느낀 건, 진부하게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문구이다. 두 사람은 그 어느 여배우보다도 길게 살았고, 길게 연기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어 ‘위기의 중년’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다음 비디오에세이에 대한 계획은 우선 여기까지이다. ※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바이라인에 대한 추가 설명: 지난해까지는 원고 쓸 일이 있으면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라는 직함을 썼고 그전까지는 항상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도 아니고 중앙대 박사과정생으로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아 이 원고를 다 써놓고 '영화연구자'라는 표현을 이름 옆에 달아두고는 있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연구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영어의 researcher가 아닌 scholar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쓰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 4층 사무실의 복사기 앞에서 출력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뭔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는 김기호 차장님을 봤다. 김기호 차장님은 복원팀에서 오랜 기간 아키비스트로 일했고 지금은 학예연구팀에서 조금은 다른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팀을 떠났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 순간 그 어떤 연구자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 KOFA Issue paper vol. 1 , vol. 2 )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따위(표준국어대사전에서 '따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1번, 2번 용례에 해당. 3번 아님)의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르지 못할 일은 없기는 하나 '연구자'보다 그럴듯한 표현이 없을까 하다가 '연구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내 주변에는 확실히 '박사'라고 하는 학계에서 인증한 소위 '메이카'를 갖고 계신 연구자 선배님들도 많지만 내가 그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메이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항상 꾸준히 우리의 삶과 사회가 노출하는 모순들을 자신의 연구영역 안에서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메이카'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도 있지만 일단 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시청각연구인'을 표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보고자 한다. *** 1)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 Hullot-Kentor and F. Will,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 No. 32. (Spring-Summer, 1984), p.151 2) 김수용,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한국의 여배우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블로그, 2014. (https://siwff.tistory.com/503) 3)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4) 복혜숙이 1981년 4월부터 두 달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5)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이었고 데뷔 후에는 권번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복혜숙은 오히려 데뷔 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이용해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 활동 및 기생 교육 활동을 했다. 복혜숙, '나의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 자; 김정은, 「일제시대 기생과 여배우의 관계: 대표적인 여배우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용동권번을 중심으로」, 『인천학 연구』 6, 2007.2. 6) 약간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도 있기는 했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복혜숙은 55세의 나이에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웃겼다는 복혜숙의 진가가 이 영화에서 조금이지만 발휘되고 있다. 석금성은 <고려장>(김기영, 1963)에서 그나마 전형적인 표독스러운 계모를 탈피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강렬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이런 톤 다운된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가 다양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7) 복혜숙은 권번 활동이 적잖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최성해, 이월화, 김소진 등 토월회 멤버들과 함께 권번을 드나들었으며, 권번에서 돈을 벌어 연극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었다고 한다. 복혜숙은 특히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일본어와 현대무용을 가르치기도 하고 후에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와 콤비를 이뤄 손님들을 웃겼다고 한다.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2> 초창기의 여배우 복혜숙⑫: 초창기의 여배우', 《동아일보》 1981년 5월 1일 자;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자. 8)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6> 복혜숙 26: UN군 환영 연극', 《동아일보》 1981년 5월 25일 자. 9) 석금성은 1930년대의 언론 인터뷰에서 토월회 배우 데뷔 전 이력을 '개인 사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였고, 언론들도 '쓰라린 세파에 몸을 적시고 있었던' 시기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생애 후반기 인터뷰들은 토월회 입단 전에 그녀가 진명고녀 졸업생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리석 같은 여인 - 눈물을 흘리는 역이 적역, 신흥 토월회 스타편 - 석금성', 《조선일보》 1930년 1월 8일 자; '석금성 여사 - 처녀와 귀부인이 적역',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 자;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10) '토월회 창립 50돌 기념 공연', 《조선일보》 1973년 10월 23일 자. 11) '내가 겪은 20세기 (25) 복혜숙 여사',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자.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 월하의 맹세 >(1923)의 이월화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 (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 (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 (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 (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 낙동강 >(1952), < 최후의 유혹 >(1953), < 미망인 >(1955), < 교차로 >(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 처와 애인 >(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 윤인자 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 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 (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 약혼 >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 종소리 >(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 너와 나 >( 허영 ,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 은 광복 후 < 마음의 고향 >(1949)을 비롯해 < 춘향전 >(1955), < 장화홍련전 >(1956), < 그 여자의 일생 >(1957), < 마도의 향불 > < 자유결혼 >(1958), < 청춘극장 >(1959), < 장희빈 >(1961), < 성난 코스모스 >(1963), < 치마바위 >(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 화촉신방 >(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흔히 배우를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배우도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재능과 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순재 는 무슨 역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맡든 믿을 수 있는 배우로 통한다. 대학시절인 1956년 <지평선 넘어>라는 연극작품에 출연하면서 무대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연기자를 겸했고 1966년 < 초연 >이란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영화배우의 길도 함께 걸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그는 성실한 배우, 믿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았다. 그와 함께 일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한결같다. ''약속시간보다 1분이라도 빨리 나오는 배우'' ''항상 대본을 읽는 배우'' ''누구보다도 성실한 배우''---. 실제로 그의 일상도 그같은 평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을 별로 하지 않는데다 남들 눈에 두드러져 보일만한 호사를 즐기는 경우도 드물다. 배우에게라면 의례 따라 다닐 것 같은 스캔들도 없다. 겸손하고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이미지인 셈이다. 이순재 는 1935년 10월 10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주위 어른들을 통해 전해들은 정도에 그친다. 그가 네 살되던 해에 조부모가 살고 있던 서울로 와 줄곧 생활했기 때문이다. 조부는 서울에서 소규모 부동산업을 하며 생활했고 부친 이용남(작고)은 고향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계로 삼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피난민들 속에 섞여 서울로 왔다. 그가 기억하는 집안 사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현동에서 성장한 이순재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이때까지도 역시 그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은 쓰라린 상처와 가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현실의 생존은 무엇보다도 다급한 과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화는 크게 다가왔다. 이념의 대립이 어떤 형태로 폭발할 수 있는 가를 절감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군(UN)의 파견과 함께 들어온 미국식 문화와 가치관,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꿈을 키우는 창구였다. 특히 미국영화는 법과 정의,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파라다이스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하는 ''시네마 천국''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위안과 꿈, 희망을 찾았다. 현실이 거칠었던만큼 영화는 더욱 간절하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잡았다. 스무살 전후 청년 시절의 이순재 역시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중요한 일과였다.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와 종로 통의 단성사, 우미관, 을지로의 국도극장, 충무로의 수도극장(현재는 스카라극장)은 당시 사정으로는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문화센터나 다름없었다. 시간 나는 대로, 극장 표를 살만한 형편이 되는대로 그는 극장을 들락거렸다. 주로 외국영화들을 섭렵했다. 영화를 보면서 생기는 궁금증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던 ''포토플레이''(Photoplay) ''모던 스크린''(Modern Screen), 일본에서 발행되던 ''키네마 준포''(키네마旬報)나 ''에이가노도모''(映畵의友)) 같은 영화잡지들을 구해 보면서 풀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 내역, 아카데미 영화상의 수상기록 등 잡다한 상식이 늘어갔고 그 덕분에 이순재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화박사''로 통할 정도였다. 영화매니아 청년이 호기심을 넘어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영화덕분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흑백영화 < 햄릿 >(1948)은 영화 이상으로 다가왔다. 철학과 지도교수의 권유로 본 것이지만 가동의 충격은 강렬했다. 삼선교 건너 돈암동 동도극장에서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될 때는 첫 회에 들어가 4번을 연속해서 보고 나온 적도 있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어두워 져서야 극장 밖으로 나왔고 점심도 거른 채 였지만 <햄릿>의 감동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결국 이순재 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배우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인배우들 조차 변변하게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젊은 배우 지망생의 처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로지 젊은 열정과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만이 보상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순수한 예술을 지킨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었다. 1958년 입대한 그는 3년동안 대북방송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받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군인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연극계와 가깝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61년, 그가 군대를 제대하던 해에 KBS 방송국이 개국했다. 새로 생긴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를 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연기자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었다. 1967년에는 동양방송(TBC)이 개국했다. 방송 드라마에 필요한 연기자는 대부분 연극무대 출신들이 맡았다. 지금은 무대와 방송, 영화 분야의 연기가 서로 넘나드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이나 차별적 인식이 없지만 1960년대 무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영화배우들은 텔레비전 연기를 비정통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텔레비전 연기자들이 대부분 무대 배우 출신들이라 연기 패턴에도 연극적 과장이 섞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극배우들은 과장이 심하다며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텔레비전 연기자들은 정통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화계에서는 선뜻 문을 열지 않았다. 60년대를 넘기면서는 한국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연간 150여편을 넘나들 정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작품 편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새로운 연기자의 발굴이 절실한 문제였지만 방송 연기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순재 는 1966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 초연 >이란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는 한수 접는 시선으로 연극이나 텔레비전 연기자들을 대하려 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새로운 연기자를 구해야 하는 영화계로서는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많은 없는 일이었다. 이낙훈 , 김성원 , 전운 , 김성옥 , 오현경 , 김동훈 같은 연기자들이 연극과 방송 쪽에서 경력을 쌓으며 당시 영화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화계에서도 이순재 의 성실함은 여전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성격을 꼼꼼하게 따졌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영화계 스타는 신성일 , 엄앵란 을 비롯하여 김지미 ,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최무룡 , 남궁원 ,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 신영균 등 모두가 내로라 하는 거물급들이었다. 잘 나가는 스타들은 몇 편의 영화에 동시 출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케줄이 엉킬 때는 여러 곳의 촬영 일정이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주연급 배우가 시간에 맞추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머지 배우나 스탭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도 이순재는 시나리오를 읽고 대사를 다듬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습관처럼 삼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어도 표시가 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그의 성실함과 연기 감각은 영화계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 막차로 온 손님들 >(1967), <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8), < 일식 >(1968) , < 피도 눈물도 없다 >(1969), < 분례기 >(1971), < 토지 >(1974) < 집념 >(1976) < 광염 소나타 >(1979) 등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력 있는 이른바 ''성격파 배우''로 주목받았다. 1999년의 <허준>에 이르기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200여편이다. 그 중에서 한의로 명성을 날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집념>에서 그는 주인공 허준 역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조연 캐릭터였다. 많은 경우 조연급 연기자들은 영화의 간판 역할을 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의 흐름을 받쳐주며 특색있는 포인트 역할을 한다. 이순재 역시 이지적이며 논리적인 인물, 따뜻한 심성을 지닌 캐릭터를 독특하게 소화 해냈다. 지금 이순재 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 역할을 자주 맡으며 현역 배우로서의 위엄을 지켜나가고 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연기한 ''대발이 아버지'' 역이나 <허준>에서 한의의 도를 지켜나가는 유의태, 조선시대 상인들의 사업 철학을 들여다본 <상도>의 거상 박주명 등의 역할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경우들이다. 한때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연기자의 길로 다시 돌아왔고, 노년의 열정을 연기에 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변함없는 무대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성실한 일관성으로 평생을 배우로 살고 있는 사람, 무대나 영화 텔레비전을 오가며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순재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5년 10월 10일 함북 회령 출생 1958년 3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연극활동 시작 1966년 정진우 감독의 < 초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 역임 14대 국회의원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사단법인 중랑문화원원장, 대한적십자사 친선대사 <수상 경력> 1976 < 집념 >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최우수남우상 < 어머니 > 대종상 남우특별상 1982 <풍운> 한국방송대상 2002 문화훈장 보관장, MBC '명예의 전당' <주요 작품> 초연 , 막차로 온 손님들 , 탈출 , 서북청년단 , 어머니 , 집념 등 200여 편